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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릭터 탐구
『문제아』의 문제적 인물들
배봉기
읽고 난 후 오래 기억에 남는 동화가 좋은 작품이라는 생각에는 별로 이견이 있을 것 같지 않다. 기억에 오래 남는다는 것은 그만큼 강한 인상을 주었다는 뜻일 텐데, 작품이 그런 인상을 준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재미가 있어서’나 ‘주제가 깊어서’ 같은 포괄적인 차원을 생각할 수 있고, ‘문장이 좋아서’ ‘구성이 치밀해서’와 같은 좀 더 세분된 요소를 들 수도 있다.
이렇게 작품이나 독자에 따라 다를 수 있지만, 아마도 우리의 기억에 가장 강하게 남는 작품의 요소는 인물일 것이다. 어떤 작품을 읽고 상당히 긴 시일이 흐른 뒤에도 인물은 쉽게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인물이야말로 사건을 끌어가는 서사의 중심이고, 서사의 요소 중에서 현실의 독자처럼 인간적인 문제를 고스란히 끌어안고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나 자신도 작품을 읽은 후에 가장 오래 기억하는 요소는 대부분 인물이다. 마치 청명한 가을 하늘의 별자리처럼 수많은 인물이 제각각 개성과 매력으로 반짝이고 있는 것이다. 이 자리에서는, 그 중 하나의 별자리처럼 빛나는 인물들을 소개하려고 한다. 문제아(박기범, 창비, 1999)의 인물이 그들이다. 이 동화집에는 총 10편의 단편 동화가 실려 있는데, 여기서는 3편에 등장하는 인물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한다.
「독후감 숙제」의 ‘나’와 엄마
개인적인 창작 경험에 비춰 보면, 동화를 쓸 때 형상화하기 어려운 인물은 ‘올바른 인물’이다. 여기서 말하는 올바르다는 뜻은, 일단 인물 자신이 도덕적으로 흠이 별로 없고 이성적으로 균형 잡힌 사고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작품 속의 인물이 처한 경제 정치적인 맥락에서 판단해 볼 때, 독자가 지지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악덕 사업주에 의해 부당하게 해고당하고 고통을 겪는 가족(아빠, 엄마, 아이들)이 이럴 때 해당할 것이다(물론 이런 상황 자체를 별로 문제가 될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무지하고 잔인한 독자’라면 이야기는 달라지지만). 이러면 독자는 거의 무조건 이들 인물을 지지할 수밖에 없는데, 이렇게 긍정적인 상황에 놓인 인물 형상화는 단순화되고 피상적인 형태로 나타나기 쉬운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볼 때, 「독후감 숙제」의 ‘나’와 엄마는 형상화하기 어려운 인물이다. ‘나’와 엄마를 규정하는 사회경제적 조건은 절대적 가난이다. 아빠가 부재한(언급조차 없다) 모녀로 구성된 이 가족은, 심한 가난에 처해 있다. “우리 학교는 6학년이 되면 봄에 수학 여행을 간다. (중략) 맨 나중까지 돈을 안 낸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독후감 숙제」, 문제아, 51-2쪽. 이하 쪽수만 밝힘) ‘나’는 수학여행비 5만원이 없어서 반 아이들이 다 가는 수학여행을 가지 못했다. 엄마는 콩나물을 길러서 팔고 피곤에 찌든 몸으로 밤에 봉투도 접지만, 이 모녀는 극심한 가난에 시달리는 상태에 있다. 그래서 모녀가 사는 방안에는 이렇다 할 가구도 없고, 읽을 책도 없다. 학교에서 내 준 독후감 숙제를 해야 하는데, 학급 문고에서 책을 가져오는 것을 잊은 ‘나’는 숙제를 포기해야 할 상황이다.
마침 봉투를 접을 신문지를 가지러 골목 밖으로 간 ‘나’는 버려진 책 묶음 아래에서 겉장에 ‘작은 책’이라고 쓰인 책을 가져온다. 밤에 엄마와 봉투를 접다가 펼쳐 본 그 책에는 만화가 있다. 이제 이야기의 중간에 오세영이라는 만화가가 그림 「부자의 그림 일기」라는 만화가 나온다. 동화 속에 만화(이야기)가 나오니까 이 동화는 액자 동화의 형식을 취하는 셈이다. 이 만화의 이야기에도 ‘나’와 엄마가 나온다. 만화 속의 초등학교 2학년인 ‘나’와 엄마 역시 심한 가난에 시달리고 있다. 운동회 날에 반의 다른 아이들 모두 입은 무용복을 ‘나’만 준비를 못해 총연습 때 선생님한테 혼이 나고, 정작 운동회 날은 아예 끼지도 못하는 것이다. 만화 속의 ‘나’는 운동장 구석에서 혼자 울고 있는데, 그때 엄마가 왔다. “엄마는 내 손을 잡고 한참을 떠셨다.”(49쪽) 그러니까 액자 안 이야기인 만화의 ‘나’와 엄마, 액자 밖 이야기의 ‘나’와 엄마는 성격상 쌍둥이처럼 겹치고 있다. 두 이야기가 상승 작용을 일으키고 있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이 만화를 본 뒤 독후감을 쓰는데 엄마가 자다가 깬다. ‘나’는 엄마에게 이 만화를 읽어 준다. 엄마는 그냥 바라보기만 하다가 자라고 한다. 만화를 읽고 생각이 난 ‘나’는, 그제야 봄에 있었던 수학 여행 이야기를 한다. 엄마는 그저 바라보기만 한다. 마침내 엄마는 그만 자자고 해서 모녀는 나란히 눕는다. 다음은 이 두 인물을 오래 기억하게 하는 가슴 아픈 장면이다.
“오늘따라 웬일인지 엄마는 나를 세게 끌어안았다. 숨이 막혔다. 그 상태에서 젖가슴은 크게 부풀었다가는 떨리면서 작아지곤 했다. 그 애 엄마는 안 울었지만, 우리 엄마는 울고 있는 거다.”(53쪽)
독자의 입장에서 지지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인 인물은 형상화하기 어렵다고 앞에서 이야기했다. 선악이 분명하고 호오(好惡)가 명백하게 나뉘는 경우, 인물을 보는 시각이 단순화되기 쉽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아」의 모녀는 피상적인 상투형에 머물지 않고 생생하게 살아 있다. 그 이유는 핍진성 있는 인물 형상화에 있다고 본다. ‘나’도 상투적인 불쌍하고 착한 아이가 아니지만, 엄마도 생동감 있게 등장한다. 옆방 아줌마와 싸우고, 방문을 열자마자 ‘나’에게 짜증을 낸다. 거기에다 ‘나’의 등짝까지 때리고 좁은 부엌에서 걸레를 빨려는데 “비켜, 이년아!”(42쪽)하고 욕설까지 내뱉는다. 이런 자연스럽고 개성적인 인물 형상화를 통해 ‘나’와 엄마는 살아 있는 인물이 된다. 그리하여 결말에서 딸을 끌어안고 우는 엄마의 눈물은, 피상적인 착한 인물의 눈물과는 다르게, 우리 가슴을 먹먹하게 울리고 오래 기억하게 하는 것이다.
「문제아」의 ‘나’와 봉수 형
졸업식에서 아이들이 교복을 찢고 밀가루를 뒤집어쓰는 장면을 보고 대다수 언론은 개탄한다. 심야를 질주하는 폭주족, 패거리를 지어 비행을 저지르는 불량 청소년을 보는 시각은 싸늘하기만 하다. 물론 교복을 찢고 흡연과 음주를 시작으로 갖가지 비행을 저지르는 청소년들의 모습을 바람직하다고 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안타깝고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어른들이 이런 행동을 개탄하고 아이들을 처벌하라고 목소리만 높일 일인가. 그러기 전에 해야 할 일이 있지 않을까. 도대체 누가, 무엇이 이 아이들을 이렇게 만들었는지 먼저 물어야 하지 않을까. 그런 진지한 물음을 바탕으로 했을 때 비로소 문제 해결의 어떤 실마리가 열리지 않을까.
「문제아」를 읽으면 자연스럽게 이런 물음을 떠올리게 된다. 말을 바꿔서 이 작품은, 우리 사회에서 ‘문제아’라고 지칭하는 아이들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우리에게 진지하게 물어오는 것이다.
「문제아」의 ‘나’는 지금 문제아가 되어 있지만, 본래는 평범한 아이였다. 싸움 같은 것은 별로 좋아하지 않고, 노는 것을 좋아하는. 키도 중간 정도이고 덩치도 크지 않은 ‘나’는 우연한 사건에 말려들어 문제아로 변해가게 된다. 5학년 때 할머니 약값을 뺏으려는 형들에게 안 뺏기려고 “두꺼비 같은 형의 입술을 찢듯이 잡아챘고, 빡빡머리 형의 손가락을 깨물”(75쪽)고 도망치게 된다. 더 큰 문제는 다음 날 벌어졌다. 전체 학년에서 싸움 대장으로 인정받는, 어제 ‘나’가 상해를 입힌 형들과 같은 패거리인 규석이가 ‘나’를 마구 패는 사태에 이른 것이다. 정신없이 얻어맞던 ‘나’는 아무 생각도 할 수 없는 상태에서 의자로 규석이를 내리치고 또 내리친다. 이 이 우발적인 행동으로 ‘나’는 문제아가 되고 만 것이다.
생각해 보면 일련의 ‘나’의 행동은 정당방위였다고 해야 한다. 돈을 뺏으려는 형들에게 한 행동은 말할 것도 없고, 일방적으로 두들겨 패는 규석이에게 한 행동도 힘으로 대항할 수 없기에 도구를 쓴 점을 인정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주변에서는 선입견으로 보고, ‘나’는 주변 사람들에 의해 서서히 문제아로 변해 간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태도로 대하는 아이들도 일조하기는 하지만, ‘나’가 문제아가 되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인물은 선생님들이다. 아이러니한 상황이 아닐 수 없다. 아이들이 갖는 문제를 더불어 해결하여 문제아가 되는 것을 막아야 할 선생님들이 문제아가 되는 쪽으로 조장하는 것이다. 5학년 때 선생님은 “내가 뭘 하거나 말거나 신경도 쓰지 않는 것 같았다. (중략) 그냥 짜증내는 거다. (중략) 어떤 때는 정말 벌레를 보는 것처럼 쏘아보기도”(79쪽) ‘나’를 소외시킨다. 6학년으로 올라가자 담임 선생님은 ‘나’를 교무실로 불러서 “5학년 때는 여자 선생님이라서 네 멋대로였지만, 나한테는 없다.”(89쪽)면서 협박부터 한다. 아이의 문제를 끌어안아야 할 학교가 아이를 문제아로 만들어서 학교 밖으로 쫓아내고 만다. 결국 문제아를 만드는 것은 어른들이고, 우리 어른들이 만든 사회와 제도인 것이다.
이렇게 학교에서 밀려난 ‘나’에게 큰 힘이 되는 인물이 바로 봉수 형이다. 신문 보급소에서 만난 봉수 형은 열심히 살면서 검정고시를 준비하고 있는 인물이다. 봉수 형은 야단을 쳐도 ‘나’를 정말로 걱정하는 마음으로 야단을 친다. 이 봉수 형 덕분에 ‘나’는 진짜 문제아로 전락하지 않고 열심히 살아간다. 「문제아」의 봉수 형은 문제아는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를 역설적으로 잘 보여 준다. 그리고 어떻게 해야 우리 아이들이 문제아의 굴레를 벗을 수 있는지도 설명해 준다. 문제를 가진 아이들을 개탄하고 비난하는 시각이야말로 문제아를 양산하는 태도라는 것. 먼저 어른과 사회가 반성하고 진실한 마음으로 다가가서 같이 문제를 풀어나가는 자세만이 해결의 실마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김미선 선생님」의 김미선 선생님과 ‘나’
「김미선 선생님」은 제목에서 등장하는 것처럼, 김미선 선생님이 주인공이라 할 수 있다. ‘나’의 비중도 꽤 크기는 하지만 사건은 김미선 선생님을 중심으로 진행되고 ‘나’의 관심이나 행동도 김미선 선생님에게 맞춰져 있으므로, 1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진행되는 서술 양식으로 볼 수 있다. ‘나’의 눈에 비친 김미선 선생님은 참 예쁘고, 첫날부터 너무 좋아진 선생님이다. 그래서 “김미선 선생님이 선생님이 되자마자 우리 반을 맡게 된 것은 정말 행운이”(96쪽)라고 생각한다.
1인칭 관찰자 시점 서술은 1인칭 관찰자가 내포독자에게 서술하는 형식이다. 따라서 독자는 관찰하는 1인칭 서술자의 말을 일방적으로 듣는 셈인데, 이 경우 독자는 크게 두 가지의 태도를 보일 수 있다. 서술자의 말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가 그것이다. 다시 말해서 1인칭 관찰자가 신뢰할 수 있는 서술자라면 독자는 그 말을 믿을 것이고, 신뢰할 수 없는 서술자라면 믿지 않을 것이다. 물론 신뢰의 판단 여부는 독자의 지식과 관점으로 판가름난다. 독자가 판단할 수 없을 정도로 미비한 지식과 왜곡된 관점을 가진 경우, 서술자의 말은 완전히 역설적으로 받아들여지게 되는 것이다.
그럼 「김미선 선생님」의 ‘나’는 우리가 신뢰할 수 있는 서술자인가. 일단 신뢰해야 할 것 같다. 비록 초등학교 5학년인 어린 나이지만, 아이들이야말로 자신들의 선생님이 어떤지 가장 가까이에서 잘 판단한다고 볼 수 있으니까. 일단 신뢰할 수 있는 ‘나’는 김미선 선생님을 아주 좋아하고 ‘나’의 관찰과 서술에 유도된 독자도 그렇게 믿으면서 이야기를 따라 읽어가게 되는데, 하나의 사건이 터지게 된다. 김미선 선생님이 반 아이 엄마에게 돈을 받았다는 것이다. 소문은 퍼져 나가고 김미선 선생님은 궁지에 몰리게 된다.
이 작품은 이 부분에서부터 독자를 혼란스럽게 한다. 정말 김미선 선생님이 돈을 받았는지, 아니면 엄마의 수술비 때문에 돈을 빌린 것이 와전되었는지, 둘 다 아니고 잘못된 소문이 확산된 억울한 누명에 불과한 것인지 모호한 것이다. 전지적 서술자의 시점이라면 이런 경우 전지적 서술자의 판단에 따라 독자도 명백하게 판단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사태를 전하는 서술자가 초등학생인 1인칭 관찰자이고, 김미선 선생님을 개인적으로 좋아하고 지지하는 주관적인 처지에 있기에 혼란스럽게 되는 것이다. 전후 맥락에서 볼 때, 돈이 급한 김미선 선생님이 학부모에게 돈을 빌렸는데 이것이 와전되어 사건이 되어버렸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정작 문제는 이 사태를 보는 ‘나’의 관점이다.
“김미선 선생님은 정말로 정란이네 엄마가 주는 돈을 받았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한테는 이미 그건 중요하지 않다. 우리가 선생님을 믿은 것처럼, 선생님은 우리를 그냥 믿었다. (중략) 선생님은 병원에 낼 돈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선생님이 돈을 받았나, 안 받았나는 아무 것도 아니다. 나한테는 김미선 선생님만한 선생님이 없다.”(116쪽)
1인칭 서술자인 ‘나’의 이런 말은 독자가 사태를 명확하게 판단하기 어렵게 만든다. 물론 ‘나’의 말은 아이들과 김미선 선생님의 신뢰를 강조하는 것이고, 아이들에게 그런 믿음을 준 김미선 선생님을 더욱 긍정적 인물로 만드는 효과가 있다. 그런데 선생님이 학부모한테 돈을 받았다는, 교육의 근간을 훼손하는 사건을 그냥 이런 식으로 넘길 수는 없는 일이다. 선생님이 준 신뢰가 아주 소중하다고 해도, 선생님이 부정한 돈을 받았다는 사태에 대해 ‘선생님이 돈을 받았나 안 받았나는 아무 것도 아니다’라고 말할 수는 없는 일이다. 이런 경우, 지금까지 신뢰를 받아 왔던 1인칭 서술자를 독자는 의아스러운 시각으로 보게 된다. ‘나’의 이런 맹목적인 믿음에 대해 회의를 갖게 되는 것이다.
「김미선 선생님」은 그런 점에서 미묘한 작품이다. 김미선 선생님은 도덕성에서 애매한 상태에 처해 있고, ‘나’는 서술자의 성격에서 모호한 상태에 놓여 있다. 이 두 인물은, 작가의 의도가 무엇이건 간에, 인물의 시점이 어떤 효과를 발휘할 수 있는지에 대한 좋은 사례를 제시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도 「김미선 선생님」의 김미선 선생님과 ‘나’는 문제적 인물이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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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봉기 : 소년중앙문학상과 계몽문학상에 동화, 국립극장 장막 공모에 희곡, 스포츠서울․영화진흥공사 공모에 시나리오, <문학사상> 신인상에 장편소설로 등단하였다. 그동안 쓴 아동․청소년 책으로는, 동화 <너랑 놀고 싶어><새 동생><나는 나><실험 가족><무지개 색 초콜릿>, 청소년 소설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사라지지 않는 노래><안녕 라자드>, 동극 <말대꾸하면 안 돼요?>, 청소년 희곡집 <UFO를 타다>가 있다. 현재 광주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로 아동․청소년문학과 희곡을 강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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