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과 성취로 한 걸음 나아갈 때(3)
한 알의 대추가 익기까지는
어느 가을날 찬바람이 스잔하게 느껴지는 날이었다. 버스를 타고 시내를 지나가고 있을 때 높은 빌딩에 걸린 현수막이 눈에 들어왔다.
"빨간 대추가 익기까지 번개하나 천둥하나 "
어렴풋한 기억이지만 하나의 결실을 이루기 위해 많은 노력과 정성이 모아져야 한다는 의미심장한 글귀가 적혀 있었다. 햇살과 바람과 빗줄기 등 대추가 익기까지 들어간 자연의 혜택과 더불어 그 뒤에 숨겨진 풍파와 그 풍파를 이겨낸 나무의 힘겨운 과정이 생생하게 전해져 왔다.
평일에는 대전에서 머물고 주말이면 남편이 있는 송추에 가서 보내는 이른바 두 집 살림을 계속하고 있었다. 버스를 타고 다니는 시간이 그렇게 지루하지는 않았다. 4시간 가까이 걸리는 그 시간이 오히려 수행을 할 수 있는 시간이 되었다. 쉼 없이 다라니를 암송하고 있으니 지루할 틈이 없었고 목표로 세운 다라니 독송을 부담없이 할 수 있어 더욱더 좋은 시간이 되었다.
그날도 그렇게 다라니 독송을 하면서 대전에서 남서울을 거쳐 구파발을 지나 송추에 도착했다. 그날따라 오봉산 자락의 풍광이 맑게 빛나고 있었다. 청명한 가을 하늘의 모습이 한 장면 장면이 그대로 하나의 좋은 작품이 되었다. 그런 풍광을 무심히 지켜 보면서 기쁨을 만끽하고 있었다. 그런데 전화벨이 요란스럽게 울린다. 불안감이 문득 스쳐지나간다.
딸아이에게서 온 전화였다.
"눈이 감겨지지 않고 얼굴이 이상하다"고 한다.
전화를 끊자마자 다시 부랴부랴 짐을 챙겨 대전으로 향했다. 돌아가는 차 안에서는 도무지 다라니 독송을 할 수가 없다. 왜 그런 일이 생겼을까 치료는 잘 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생겨났다. 몇 군데 전화를 해서 치료를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은지도 알아 보았다. 일시적인 근육마비일 것이니 우선적으로 한방 병원을 찾아 치료를 받는 것이 좋을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치료방법까지 정하고 나니 마음이 조금은 안정이 되었다. 이제부터는 확신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는 데 생각이 다달았다. 그래서 다시 다라니 독송을 시작했다. 심호흡을 몇 차례 하여 마음을 안정시키고 난 다음 정구업진언부터 개경게를 연달아 암송을 하고 이어서 다라니 독송을 하였다. 암송을 하면서 오직 한 가지 상황에 마음을 쏟아 부었다. 환한 웃음을 띄우고 있는 딸아이의 맑은 얼굴을 계속 그리면서 다라니 독송을 하면서 집으로 향했다.
아이는 얼굴근육이 일시적으로 마비가 되었다. 즉시 한방병원에 입원을 시키고 치료를 받았다. 병은 시험을 앞두고 스트래스를 받아 일어난 일시적인 현상이어서 몇 차례 치료를 받고 마음을 안정시키면 잘 치료될 것이라고 한다. 의사의 말대로 몇일 치료를 받고나자 아이의 얼굴은 정상으로 돌아왔다. 여기서 잠시 당시의 상황을 다시 헤아려보면 어떤 확신이 나를 감싸고 있었기에 그 순간에 별다른 당황이나 긴장을 하지 않고 잘 될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문제를 해결해 나갔다. 그 확신의 실체를 다 알 수는 없으나 그 출발점은 바로 나의 기도의 힘이었다고 생각하고 있다. 제법 오랜 기간 동안 계속된 기도를 통해 단련된 나의 신심이 흔들림없이 현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게 한 것이라 믿고 있다. 아픔 다음에 찾아오는 평안이 이어지기를 기대해 본다.
가행정진
수행을 통해 조금씩 변화되어 가는 마음자리를 느낄 때가 가장 보람있고 행복함을 느낀다. 내 자신의 현상에 안주해 있으면서 해야할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할 때 그 원인을 바로 살펴가는 힘이 예전에 비해 길러져 있음을 알 수도 있다. 어제와 별다른 상황이 아니라 같은 일상에서 매일 만나는 사람들과의 일상적인 관계에서도, 늘상 하고 있는 일을 해나가는 과정에서도 언제나 끊임없는 긍정적인 에너지가 나를 풍요롭게 한다. 지금 이 순간에 머물되 그것에 안주하는 것이 아니며 과거와 미래의 접점에 온전하게 머물고 있음이며 올라가는 것과 내려가는 것이 똑 같이 중요한 역할임을 알아채고 있음이며, 기쁨과 슬픔이 또한 그렇게 왔다 가는 것임을 알기에 붙잡고 있을 까닭이 전혀 없음을 또한 알게 된다.
다라니 독송 수행에 점점 익숙해져 갈쯤 선원의 몇몇 보살님들이 가행정진을 하자고 제안을 하였다. 그때까지 하루 독송수는 300독씩을 하고 있을 때였다. 일주일 동안 매일 1000독을 목표로 가행정진에 들어갔다. 정진을 하는 동안 문득 독송수를 정해 놓고 하는 의미는 무엇일까? 의문이 들었다. 기도는 엄숙하고 정성을 다 하여 오직 경건한 마음으로 불보살님들께 예경하는 것인데 독송 숫자를 정성은 뒷전이고 간절함은 한 켠에 비켜두고 오직 숫자 채우기에 급급하게 될 것인데 과연 이렇게 해서 1000독을 하는 것이 효과가 있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렇지만 하다 보면 뭔가 답이 나오겠지 하는 기대감을 가지고 그 의문을 풀겸 해서 가행정진을 계속 해 나갔다.
하루에 천독!
갈길이 멀다 새벽에 일어나 아침준비를 하는 나의 모습이 예전과는 사뭇 다르다. 잠시간의 고민이나 멈칫거림이 없이 거침없는 질주를 한다. 밥을 짓고 반찬을 마련하여 식탁에 준비해 놓고 간단한 치장을 하고 나서는 손놀림에 재빠름이 배어난다. 송추에서 일산으로 출발하면서 부터 독송을 시작한다. 단 1초도 소홀히 할 틈이 없다. 가행정진 첫날 천 독을 마치고 나서 시간을 보니 새벽 2시가 다 되었다. 지난 20 시간 동안 한 자리에 앉아 쉴 새 없이 다라니 독송을 하였다. 큰 소리로 하기도 하고 낮은 소리로 하기도 하고 소리를 내지 않고 독송을 하기도 하였다. 무릎이 저리면 자세를 바꿔가면서, 가끔은 제자리에 서서 독송을 하기도 하였다.
밥먹는 시간과 화장실 가는 시간 등 아주 약간의 허튼 시간을 제외하고는 오직 다라니 독송에 매달렸다. 커피 두 잔과 물 두 컵을 마시면서 마른 입을 축였고, 굳어지는 어깨는 목을 이리저리 돌려가면서 풀었다. 가끔 지루함이 밀려 들었다. 그럴 때 마다 힘이 되어 준 것은 옆자리의 도반들이었다. 간절함으로 똘똘 뭉쳐 한 치의 흐트러짐없이 독송에 집중하고 있는 그 모습을 한 번 바라보기만 해도 정신이 번쩍 들어 조금전의 지루함은 흔적없이 사라져 버린다. 나의 기도는 무엇을 위함인가 하는 데 생각이 머물 때도 있었다. 그럴 때에는 상단에 모셔진 부처님과 관세음보살님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내가 불자의 길을 가려함은 바로 저 부처님과 관세음보살님처럼 살고자 함이 아니던가?
저 두분의 발원이 바로 내가 이루고자 하는 바가 아니던가 대자대비의 보살심을 키우고자 함이 아니던가? 이 세상의 인과를 살피고 바름이 무엇인지 알아채는 지혜로운 두 눈을 갖추고자 함이 아니던가? 앎음알이에 그치지 않고 아는 바를 실행하는 데 주저함이 없이 두려움이 없이 나아가는 힘을 키우고자 함이 아니던가?
한 밤중이 되니 졸음이 몰려 온다. 이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것이 바로 눈꺼풀이라는 말이 실감이 났다. 그래도 나아가야 했다. 지지 않아야 했다. 머물러 있을 수가 없었다. 고지가 바로 저긴데...
어느 덧 독송 숫자는 900 독을 넘어가고 있었다. 혀는 말려 더디게 나아가지만 막판 힘을 내서 독송을 해갔다. 드디어 드디어 1000독을 했다. 해냈다는 환희심이 잠시 솟아 나더니 이내 담담해진다. 둘째날도 역시 거의 20 시간이 되어 1000 독을 마칠 수가 있었다. 세쨋날이 되니 독송에 걸리는 시간이 한 시간 정도 줄어 들었다. 한 시간이 줄어 들긴 했지만 여전히 거의 하루 전부를 쏟아 부어야만 천 독을 할 수 있긴 마찬가지 였다. 그런데 느닷없는 장애가 찾아왔다. 한 시간이 줄어 들었다는 마음의 여유를 누릴까 했는데 그 방심을 파고 들었다. 한 동안 술술 잘 풀리던 다라니 독송이 혀가 꼬이기 시작하더니 발음이 잘 되지 않았다. 또 어느 부분에서는 다음 구절이 전혀 떠오르지 않아 막막해지거나 몇 구절이 계속 되풀이 되었다.
참으로 난감하였다. 갈 길은 너무도 멀고 넘어야 할 산은 태산같이 느껴졌다. 마음 밑바닥에서 조급함이 몰려왔다. 귀에서는 빨리빨리 하는 소리가 들려 오는 것 같았다. 마음이 조급할수록 수행에는 역효과가 되었다. 스님께서는 이런 현상이 일어날 때는 지금 이자리에서 복을 쌓을 수 있는 마음을 내어보되 복을 지을 게 없으면 정성스럽게 합장하고 남을 위해 진심으로 축원을 해 보라고 하셨다.
축원을 할 대상을 찾자 아이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이 세상에 나를 믿고 찾아온 아이들 - 다생겁의 인연을 받아 이생에 지중한 인연으로 만난 우리 아이들에게 내가 과연 사랑을 심어주고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들의 모습을 떠오리면서 아이들의 밝은 미래를 축원하는 데 문득 평소에 아이들에게 "빨리빨리" 라는 말을 습관처럼 사용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말을 듣고 있는 아이들의 마음이 아려왔다. 아이들에게 진심으로 참회를 하였다. 기도 중 올라오는 어떤 마음들은 자신의 내면속에 잠재되어 있다가 어떤 계기가 되어 나타나는 것임을 알 수 있었다. 나 자신도 잘 모르는 나의 어떤 모습들이 정진을 하다보면 나타나게 되는 것이며, 그것은 마치 거울의 겉에 낀 먼지를 닦아내고 바라보면 잘 보이는 것과 같다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가행정진 5일째 창가에 있는 벌집을 잘못 건드려 얼굴을 벌에 쏘였다. 얼굴은 부어 올라왔고 욱신 거렸지만 참고 견디면서 쉼없이 다라니 독송을 계속 했다. 쉽게 이루는 일보다 어렵게 이룬 일이 성과가 더 달고 튼실하리라는 확신을 가지며 스스로 위로해 나갔다.
드디어 마지막 7일째 내 생에 가장 기쁜 성취감을 온 가슴으로 안았다. 7000독을 달성했다.
첫댓글 다라니를 독송한 수 많은 순간 순간만큼 자유를 얻으셨으니..
참으로 축하 드립니다.
많고 많은 행복의 시간 이었겠지요!!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