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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뜻 못 따라요.
왜냐면 대안학교는 인가가 안나 검정고시 치러야 하고 과천쪽은 멀고
난 지금 이 곳이 동무도 있고 좋습니다.
인가는 일부러 안받는 거란다. 나라의 인가를 받으면 간섭이 심해서고 입학이 끝났는데
엄마의 빽으로 들어갈 수 있는거니 잘 생각하거라.
너가 나왔던 공동육아랑 같은 형태라 선택하려 했다.
두발,복장 자율이고 원하는 수업 참석하면 되고 악기,연극,체험학습 확실하게 해주니
스펙 쌓아서 대학교 가는 것도 힘들지 않게 갈 수 있어서다.
그리고 샘과 제자간의 관계가 인간적이다.
너 샘과의 관계 많이 힘들어하지 않았니?
하지도 않은 일을 했다하고 샘들이 현재의 네 모습만 보고 작년 한 해 엄마 엄청 불려다닌거
알지?
너 도망갔다며 담임 생 나 호출하고 아유 나도 이젠 지겹다 지겨워..
그래서 샘이 훌륭한 분들이라 보내.
그 분들에겐 제자를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 너희들 말에 귀 기울여 주고
또 더불어 함께 하려는 마음이 있지. 그 마음때문에 사람은 행복하기도 불행하기도 하단다.
한마디로 휴머니즘이 살아있고 똘로랑스를 배울 수 있어 비싼 돈 들여 널 보내려했다.
호주 유학보다는 훨씬 싼 월 50만원이면 가능해서 널 보내려했다.
그래도 싫다면 안보낸다.
언제나 난 너에게 선택하며 살게했지 강요은 안했다.
인가 안난거는 고3때 검정고시 공부하면 되는거다.
인가 안난 것이 오히려 편할 수 있다.
간섭아래서는 참교육을 할 수 없다. 아이들이 살아있더라.
표정이 공교육 아이들하고는 다른 생생함과 당당함이 있더구나.
첫번째 문제는 해결된 거 아닐까?
아니지. 난 그냥 졸업하고 싶지.
검정고시 같은 특별한 거를 봐서 졸어하고 싶지는 않다고.
이놈아! 거기도 졸업식은 있고 검정고시는 제도로 있는거고 그거 시험도 안어렵단다.
너의 자유를 지킬 수 있고 중국어랑 제대로된 공부를 가르쳐 주는 곳을 가야지.
그래도 싫습니다.
전 그냥 평범하게 살기를 바랍니다.
그럼 말고..할 말이 없다.
자! 두번째 집 먼거는 이사가면 돼..
아니 싫다구...첫째 이유가 해결이 안됐는데 더 이야기 필요없지.
알았다..그럼 넌 일반고등하교 가락고 가는거다.
대신에 이젠 공부해야 할 거 같은데 어때?
해야죠.
수학은 그 학원이면 되고 영어는 어떠니? 좋아요.
국어는 논술을 해야한다. 젤 좋은 샘 만나게 해줄테다. 이유는 재수하는 것보다
돈이 적게 들고 우리나라 교육제도하에서는 수시,입학사정관제로 넌 가야하니
지금부터 논술 준비할거다, 그리고 교육방송 활용할거야.
너 학원비가 60만원이야.
너 통신비 8만원이야.
자! 누나 아빠꺼까지 하면 한 달 통신비가 30만원이야.
과연 이렇게 들어야할까?
네가 최고의 스마트폰 해달라는 건 검색하고 공부한다해서 사준건데 정말 그대로 하고 있니?
녜..그래 그럼 믿겠다.
더 지켜보마.
관리비로 30만원,저금 50만원,보험 10만원, 너희 둘 청약적금 20만원, 생활비,나눔비,
경조사비 때때로 다름 등
빠듯하게 한 달을 살아낸다.
넌 내 자리를 갖기위해 공부하는 걸 거다.
난 네가 원하는 식으로 살길 원한다.
청소부도 좋고 법관도 좋다.
허나 관여하지않겠다.책임지거라.
녜...
학원비 아껴서 빨리 학원 끊어 교육방송 보고 하자.
난 학원비가 젤 아깝다.
그 돈으로 악기나 체험학습 가야지.
내 아들은 6살까지는 새벽형이었다.
엄마랑 온갖 책 많이 읽었다.
특히 탈 것에 관심이 많아서 현대,쌍용,대우,기아 자동차 대리점 찾아다니며 카탈로그 구해와서
아들과 오린 후 스케치북에 부치고 또 갖고 놀았다.
주로 공짜 교육에 주력했다. 말품과 발품과 성실성으로 되는 교육!!
서초구민회관 음악회 수준 높다..금요일 오후 7시였던가 언제나 갔다.
인사동 등 전시회마다, 서울 역사박물관등 온갖 박물관, 산에 갔다.
매일 아차산,어린이대공원 우리 두 아이에겐 추억이 필요해서 공동육아한거다.
난 일곱살에 서울 와서 거의 서울아이인거나 마찬가지라서,,
고향은 강진이라도 거의 가본 적없다,
그래도 우리 때는 공터가 많아 놀이대장으로 살아서 추억이 왕창있는데
이 놈들은 아니라서 비싸고 힘겹지만 자식을 위해 힘든 결정을 했다.
자동차를 가위로 오림은 손의 근육이 발달하여 머리도 좋아지지만
자동차 카달로그 그림은 유명 디자이너 작품이다.
그건 차종을 알게되고 차종에 따라 생김새에 미묘한 차이가 생김을 알게 되어
사물을 자세히 관찰하는 관찰력을 길러준다.
거기다가 사진이라서 원래의 형태랑 같다.정확성 공부도 된다.
어디 그 뿐이랴 엔진,와이어브러쉬등 다양한 용어 공부도 가능하고 영어를
왜 공부하는지 아이가 알게 되는 계기가 된다.
맹목적인 공부는 지치고 지루하여 금방 그만두게 된다.
공부에는 왕도가 없고 죽을 때까지 하는게 공부다.
성실성하나로 묵묵히 할 뿐이다.
30년 죽어라고 하면 안되는거 없는 걸 삶에서 체험했다.
난 그래 남에게 하지않고 우리 두 아이와 우리 반 아이들에게 했다.
루소의 에밀은 가짜다.
교육서로는 훌륭하나 자기 아이들은 모두 고아원에 간 걸로 안다.
난 자기 가정부터 훌륭히 한 후 사회에 도움이 되길 바란다.
한마디로 가화만사성과 맥이 통하는 말이고
수신제가치국 평천하이다.
그래 우리 아들과 함께 하던 작업 우리 반 아이들과도 함께 했다.
숙제를 내줬다. 동네 가까운 대리점에 부모님 함께 가서 카탈로그 가져오기.
부모님 맞벌이인 집은 동무 엄마 따라가기.그것도 안되면 내가 준다..
언제나 아이들 준비를 내가 챙겼다.
우리 나라는 교육환경이 열악하다.
아직도 교육재정이 6%가 안된다.
그러면서 철밥통 운운이다.
그렇다. 나는 먹고 사는데 지장없다.
허지만 교육은 백년지대계란 말, 스승의 똥은 제자도 밟지않는다란 말이 괜히 나왔는가?
한번 스승은 영원한 스승이다.
내 밥 그릇만 차면 되는 것이 아니라
제자의 밥그릇도 차야 하고 나보다 더 잘 차야하고
또 따끈해야한다.
이유는 더 좋은 환경에서 자라나기 때문이다.
우리는 깡촌에서 뭐 먹고 자랐는가?
옥수수빵 기다리며 굶기를 거의 밥먹듯 했다.
그래서 샘이 되었으니 너희들은 못돼도 하고 잡은 일하며
떳떳한 대한의 국민으로 세금 잘 내며 사는 그런 당당한 어른으로
자라길 바라기에 하루도 게으를 수 없는 것이다.
누군들 뜨끈한 밥에 국을 싫어할 건가?
난 아니다. 싫지는 않지만 좋아도 안한다.
함께 함이 가장 높은 단계의 선임을 알기에 실천하려 오늘도 버둥거려본다.
그럼 어느덧 하루가 지고 있다. 감사하다.
하루가 저물어주니 담날은 더 잘하면 될테니 감사할 뿐이다.
그 해는 3학년 담임이라서 남자 아이들이 차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알기에 아이들이 구해온거 내가 가져온 카달로그로 미술시간을 장식했다.
참으로 즐겁더라. .오리고 자르고 붙이고 중얼거리고 큰 소리지르는 놈들만 적당히 제재시키고
나머지 아가들은 지들 천국이다.
오린 자동차에 자기식으로 꾸미고 글쓰기도 하고 연극도 하고 무용도 하고
아주 게지랄을 다 떤다.
난 칭찬만 해주고 판을 잘 벌리게 내가 더 버라이어티하게 분우기 띄운다.
언제나 함께 할 때 교육은 진정으로 된다.
아름다움은 그냥 되는게 아니다.
수고를 해야된다,
마음만의 수고가 아닌 몸의 수고가 꼭 따라야하고
돈 주고 사오는 몸의 수고 뿐만 아니라
함께 아이들 수준으로 내려가서 펄쩍 뛰고 까르르 놀래고 웃고 하는 경지까지다.
즉, 내 어린시절의 나를 되찾아서 아이가 되야지 진정 아이들과 하나가 될 수 있는 것이다.
3학년 교육이야기로 되돌아 가자.
자동차에 한지 색종이 무늬 오린 거 붙이니 색다른 맛이다.
마치 동양적인 차로 거듭나는거 같다.
국적 불명의 차가 얼마나 많은가?
언제나 서구식을 못따라가 안달인 우리나라 고위층분들
우리 서민은 아니다.
개성이 있다.
우리식으로 우리 것으로 나타내길 선호한다.
우리 창,우리 가락,우리 한복,우리 음식, 우리 한옥,우리 것은 좋은 것이어다.
자동차에 한지 색종이를 크게 작게 변화시키고
모양 변화도 가져오고 또 반짝이도 섞고 하니 금새 화려해지고 발랄해지더라.
아이들의 속성이 바로 발랄이다.
같은 작품이 하나도 없더라
녀석들은 천재더라.
자기가 만든 자동차 자랑하기다.
글쓰기의 주제다. 의자는 어떤 식으로 되며 색깔은 모양은 누가 좋아하는지등 다양성을 추구한다.
유리는 어떤 재질의 것이 좋은지, 비오는 날은 어떤 와이퍼가 튼튼한지등 지식공부 스스로 인터넷 찾아 하게 하고 감성적인 글쓰기와 사실적인 글쓰기로 갈래가 나뉜다.
물론 둘을 짬뽕하는 동무도 있다.
글쓰기가 끝나면 종합공부다.
바로 연극이다.뮤지컬이다.무용이다.
자기가 만들면서 느낀 기분을 말하면 대본이 완성된다.
주고 받는 말 넣고 하면 연극 대사다.
배경음악 넣고 말에 가락을 넣고 춤을 가미하면 뮤지컬이고 무용이다.
우리 반은 이거 식은 죽 먹기다.
지금 아이들도 마찬가지다.
언제나 종합적으로 공부한다.
그래 난 방학 끝나도 바쁜거다. 그거 봐주고 도덕공부 확실하게 시켜보내야해서다.
봉사활동의 중요성 강조하기 위해서다. 교실에서 내가 할 수 있는 봉사활동,집에서
할 수 있는거 친구위해 이웃위해 할 수 있는 봉사활동을 찾게함도 그래서다.
진정한 삶은 봉사할 때 평화롭고 기쁘다.
이 해는 리코더의 해이기도 했다.
3학년은 처음 리코더가 들어오는 학년이라 다장조 밖에 없다.
난 기능이 없다.서울교대에서 놀아서고 이론은 있다.
잘하는 아이를 나오게 한다.
우리 예슬이다,장예슬!!!
나중에 우리 집 이층으로 이사 온 녀석!
난 집 앞으로 이사를 했다.
가장 단거리로 다녀야 아이를 빨리 만날 수 있고 여러가지로 좋으므로다.
장예슬!! 우리 반 회장 아이다.
만화도 잘 그리고 못하는 것이 없는 이쁜 놈이다.
당연 예슬이가 리코더 반장으로 뽑힌다.
8시 40분이 일교시인데 8시부터 시작한다.
리코더 다장조 악보로 300장 복사해 둔다.
능력별 지도다. 듣는 귀는 있으므로 통과 안된 아이는 예슬이에게 가서 모르는 운지법이랑
소리 들어보게 한다.
또 짝꿍제로 아이들끼리 하게 했더니 매일 리코더의 빽빼리 소리가 우리 반을 진동한다.
난 그 소리가 어찌 그리 아름답던지?
옆 반 선배는 기절하고 싶었던가보다. 나의 열정을 칭찬하면서도.. 은근히 꼬집더라.
그 반은 매일 신문에서 한자 오려 시험봤다.
우리 때는 신문은 강매다.
어린이 신문이 한 매에 3000원 이었나? 많이 볼 수록 학교에 떡고물이 떨어져서 운영에 썼으므로
유능한 교사 일 수록 신문 부수가 당근 높다.
난 당근 꼴등이다.
아이들은 신문 읽을 줄 모른다.
한자 하나 하자고 신문을 ..물론 다른 기사들도 도움이 되겠지만 나는 지도할 여력이 없고
교육과정 따라잡기만도 벅차다.
그래 헤재낀다..아닌 건 과감하게 버린다.
우리 반 녀석들은 리코더 연주회도 하고 매일 아침 등교하면서 리코더를 하니 그보다
행복한 얼굴 일 수가 없다. 모르는 놈은 모르는 대로 한 곡이라도 하니 좋고 아는 놈은 아는대로
500곡 하니 신나고다...ㅎㅎㅎ~~
그만하자..이젠,,, 이건 병이다..
우리 아들 이야기로 돌아가자.
일본 여행을 아이가 3살 때 갔는데 탈 것위주로 돌았다.
철도 박물관등을 갈 때도 모두 기차와 지하철로 이동하니 아들은 바깥만 바라보고 말이 없더라.
일본인의 친절에 감사하다. 두 아이 데리고 일본 여행을 12박 13일 정도했다.
이유는 동무가 남편따라 일본갔는데 우울증이란다.
3살 아들 , 일곱살 딸 데리고 오사카에 내렸다. 춥진 않고 따스한 편이더라.
첫날만 동무랑 함께 하고 둘째 날부턴 여행했다.
동무는 아이가 간난쟁이라서 함께 할 수 없으니 홀로이 일본을 알아갔다.
그 분들은 내가 철도박물관 못 찾을 때도 나랑 함께 버스타고 가서 철도박물관 매표원에게
나를 넘기고도 몇 번이나 되돌아보고 가더라.
그런 민간외교의 힘이 오늘의 일본을 만든 것이리라.
내 아들 재영은 오사카성,시까(사슴), 동대사, 수족관등 다니는 걸 참으로 좋아하더라.
오히려 내가 힘들어워했다.
두 아이는 정말 잘 다니고 즐거워하더라.
돈은 아낀다고 점심은 주로 국수로 하나 정도 시켜 나눠먹고 군것질 거리 동무가 싸주는 걸로
대신했다.
내 동무는 비디오 카메라 사길 원해 두 아이 일본 여행 촬영했다,
딸 아이는 생활 한복을 입고 작은 아이는 머리에 모자를 썼다.
지금 봐도 흐뭇하다.
여행만큼 사람을 키우는 것도 드물다.
여행만큼 사람을 자유롭게 하는 것도 드물다
여행만큼 사람을 여유롭게 하는 것도 드물다.
재영에 대한 추억 계속 긷는다.
내 아들 재영은 3살 때인가 글도 모르는데 어떤 책 앞에 가더니 그 책을 사달란다.
보니 비행기관련 만화책이었다.
가리키는 쪽수를 보니 비행기에 관해 설명이 되어진 부분이었고 그림은 비행기였다.
집에 와서 읽어달라해서 그 부분만 읽어주니 외우더라.
언제나 거기만 봤고 책을 펴먼 거기더라.
그러더니 호주 유학을 비행기쪽으로 보내달란다.
파일럿은 어릴 적 오래전 꿈이었으나 사시원시에 난시라 안됨을 알고 비행기 관련 일을 한다며
혼자서 알아보더니 호주 유학간다해서 정확한 게획서 가져오라했다.
힘든 한국 교육과정보다는 돈이 들어도 아이가 원하면 보낸다.
내 의지가 아닌 아이가 원하면 가게 한다.
돈은 나중 문제다..그건 부모가 해야될 몫이니까다...
고민줄이 깊더니 결국은 유학은 포기하고 한국의 일반고등학교다.
아들이 대견하다.
옳은 결정이다. 나도 공교육교사로 평생 감은 가장 평범한 것 속에 가장 흔한 곳 속에 언제나 진리가 있었으므로다.
대안학교 좋다. 엄선된 집단으로 이뤄져서 안심되고 교육과정 믿을만하고
허나 온실이다..
혼자 헤쳐감이 옳다.
나는 힘겹게 살았으므로 아들은 좀더 쉬운 길 알려주려 대안교육 권한건데 아들은 역시 아들이다.
호주는 엄마의 경제사정을 생각해서이기도 하고 혼자서 호주생활하는 것이 자신없어서이기도 하리라.
날 닮아 겁이 많으므로 언제나 경험할 때 주저하고 세밀하게 살핀다.
그런 아들은 꼭 나의 복사판 같다.
엄마, 이젠 집안 일 잘 도울께요.
괜찮아. 실수함이 아이들이니 잘 할거라 생각해.
아들은 여행을 좋아해서 7살때부인가부터 지하철 여행을 했다.
툐요일 오후에 차비랑 김밥감이랑 2000원 달라며 인천행 타러 갔다 온단다.
돈 안 부족해.
충분해요.
그래 그럼 조심해,,주변 살피는거 잊지말고.
인천행에서 돌아온 아들에게
뭐했어? 그냥 땅속으로만 돌다 왔지.
뭘 봤어.인천에 내려 밖으로 나가려했더니 추워..그래 다시 타고 집으로 왔지.
잘했다,,,무사귀환을 축하해...
어느 날은 양평행 타고 양평까지 가고.
외할머니는 그런 외손주가 대견한지 자랑처럼 말씀하신다.
야무지다고,,,혼자 지하철 여행한다고..
아빠랑 떨어져 살았다.
결혼하고 바로 하고 삼년..2004년 다시 남편은 강릉으로 내려갔다.
남편은 일 욕심이 많다. 남의 밑에 있길 원하지 않는다.
첫 회사가 망해서 다른 회사를 찾아나서야는데 러브콜이 여러군데서 왔다.
그 업계에선 상위권에 드는 회사에서 스카웃 제의가 왔다.
언제나 의논없이 혼자 결정하던 남편이 그때는 의논하더라.
시누이는 강릉 사람 시누 남편도 강릉 사람인데 사업체를 가지고 있다.
남편을 필요로한다.
좋은 제의가 들어왔다.
난 단연 서울에서 들어온 상위권 회사를 추천했다.
같은 형제간이 함께 일함이 쉽지않고 가족은 함께 살아야해서다.
남편은 고집이 세다.
내 의사는 안중에도 없더라.
그러더니 강릉으로 휘리릭 떠난 후 일,이주에 한번씩 오더라.
아들은 그런 아빠가 그리운지 지 스스로 강릉 간다했다.
그때 울 아들이 3학년인가 했던거 같은데 같은 학교에 다녔다.
난 2학년 담임인데 연구교사라 시간이 없고 언제나 바쁘다.
아들은 그런 엄마 한번도 귀찮게 한 적 없고 고물고물 알아서 잘 놀았다.
아들 교실은 3층이고 우리 반 교실은 2층이다.
아들은 우리 교실을 들러갔다.
언제나 이유가 있어서 들렀다.
들어올 땐 언제나 조길남선생님 안녕하세요..아차 그 전에 노크를 하고
인사를 하고 들어와야했고 우리 반 동무들은 아침 자습이거나다.
아님 담임이 심부름을 우리 반으로 시켰다.
그 담임은 내 후배인데 울 아들을 아끼고 이뻐해서 일부러 우리 반으로 심부름을 보냈다.
아들은 씩 웃으며 인사하고 들어온다.
우리 반 아이들은 재영이 형아다. 재영이 오빠다라고 하며 알은체를 했다.
나는 그런 것엔 아랑곳 하지않고 하던 일 한다.
눈도 마주치지않는다.
단 한번도 준비물 가질러 온 적 없다.
준비물 안가져 갔으면 담임께 혼나라 했고 준비물은 두 세개씩 보내서 안가져온 동무들
주라했다.
아들은 그렇게 길러서인지 일학년 때는 그 반에서 가장 개차반인 아이랑 계속 짝궁을 했다.
다른 아이랑은 싸우고 해꼬지 하는데 우리 아들하고 앉으면 순한 양이 된단다.
그 담임은 서울교대 후배이고 아주 유능한 샘이라서 일부러 찍어서 담임했다.
일학년 담임은 원하는 사람 해주는게 같은 학교 교직원에게 해주는 관례같은 거였다.
난 아주 똑똑하고 싹싹한 후배라 당근 재영 담임으로 해달라했다.
흔쾌히 승낙했는데 문제는 언제나 말썽꾸러기랑 짝궁을 하게 하는거다.
속이 터질 거 같은데 말은 못한다.
일학년 아이 담임이 힘듦을 알기에 말은 못하지만 솔직한 심정은 돌아가면서
개차반 아이들과 함께 짝을 하게 했으면 좋겠더라.
그 담임은 자기 편의주의로 우리 아들과 그 녀석을 짝하게 했지만 어린 것이 얼매나
힘들꼬 생각하니 속이 아리지만 난 아들을 격려했고 훌륭하다 했다.
"재영아! 변혜정샘이 널 가장 믿는갑다. 너네 반에서,,그러니까 그 동무들이랑 짝꿍하게
하는 거지..아무나 하게 하니? 엄마가 샘이라 아는데 문제 일으킬 애는 아예 짝도 안하게
한다,,그러니 넌 특별히 선택받은 아이니 변샘께 감사드려라.." ㅎㅎㅎ~~
참 힘들다.
가장 힘든 게 어미 노릇이다.
언제나 중용을 유지해야하고 고기 잡는 법을 알려줘야해서다.
재영은 강릉에서 근무하는 아빠께 금요일 5교시 끝난 후 내려간단다.
혼자서 강릉 어떻게 가려구?
동서울 터미널에서 고속버스 타고가면 되요.
어떻게 가?
버스타고 지하철 타고 강변역에서 내려서 버스타면 되요.
버스 탔는지 안탔는지 어떻게 알아? 전화하지. 전화가 없잖아.
옆 사람한테 빌리지.. 알았다..그럼 가..아빠께 안부 전하고 할아버지,할머니께도
몇 시차인지랑 도착시간 알려다오..
그리곤 다 까먹고 일한다.
아주 바쁘다.수업 끝난 후 바로 학급 이야기 쓰고 그림책 연구교사 팀장이니 후배들과 공부할거
복사하고 담 날 수업 준비하고 아이들이 한 말 기록하고 등등 ~~
전화가 왔다. 엄마 3시 몇 시차 탔어요
이건 누구 전화니? 옆의 아저씨 전화예요..
고맙단 말 꼭하고 내리면 바로 전화하거라.
예..
도착 할 시간되어 남편이 전화왔다.
재영이 도착할 시간이 30분 지나도 안온단다.
"아이를 왜 혼자 내려보내고 그래? 걔가 뭘 안다고,,차 잘못 탄 거 아닌가?"
아니요..전화 받았어요..차 탔다고.나 바쁘니까 좀 더 기다려보고 연락하세요.
남편은 나의 천하태평한 성격에 언제나 기겁을 한다.
모 아니면 도가 인생이다.
아이가 가겠다했고 그냥 믿어주면 되고
뭔 일 생겼으면 그때 고민해도 늦지않다.
가기 전 철저하게 주의할 점 교육 시켰는데 뭔 걱정인고?
내 일이나 잘하고 있으면 되지..참 참 참~~
아들에게서 전화가 왔다.
고속버스를 타야는데 시내버스가 더 빨리 표가 있어 그걸 탔고 그건 돌아가니까
차비는 싸지만 시간이 많이 걸려 이제 도착했단다.
"왜 전화 안했어? 아빠 핸폰으로 사정을 알렸어야지.."
잠들었어요..그리고 생각이 안났구요.....
울 아들은 그 후로도 꾸준히 홀로 여행했다.
난 그냥 뒀다.
사람은 타고난대로 사니까다.
구례 악양으로 봉사활동을 떠났다.
재영이 일곱 살 때다. 초등학교가 폐교가 되어 창하던 분이 교장을 하면서 아이들 캠프를
받아서 방학동안 한다.
그때는 여름이라.
주로 전교조 교사 아이들과 각양각색의 다양한 아이들이 악양으로 모인다.
난 서울팀 인솔이다.
우리 두 아이는 학생이라 돈을 낸다.
난 봉사활동이라 서울 아이들 모두 챙기는데 10명 정도다.
서울역에서 구례가는 기차를 타고 구례에 내리니 덜커덩 봉고차가 구비구비 돌아 산길 간다.
멀미가 날 거 같다.
예나 지금이나 몸이 약해 밥을 잘 못먹고 특히 비유가 약해 온갖 냄새에 약하다.
기차에서 멀미를 할 거 같다. 한 다섯시간 정도 간 거 같은데 서울역에서 8시 정도 탔으니 거의 오후 1시나 되어 도착하니 힘겨웠다.
구례에서 인솔팀장님도 한 분 오셨는데 남자분이더라.
나보다 한 두살 더 드셨던 거 같고 어른엔 관심이 적다.
대신에 난 예나 지금이나 아이들과 대화줄 늘리기 좋아해
아이들과 노는데 갑자기 그 분이 대화에 참견을 한다.
미야자키를 좋아하신다구요?
그럼요.하울의 움직이는 성,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이웃집 토토로,센과치이로의 행방불명등
주옥같은 작품이 많은 만화가이며 민중배우라고 해야할까요?
암튼 일본에선 대단한 작가다\죠.
난 이 분의 작품이 좋았던 건 여성이 주인공이고 여성이 세상을 개척해 나간다는거다.
미야자키는 일본 고유의 색깔을 쓰고 일본인들의 신을 그리고 암튼 일본 것으로만 작품을 하는 작가로 유명함다..아우 부러붜라,,저런 애국심이 어디서 생겨날꼬? 일본이란 나라를 연구해봄직 하군. 전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보려다 못봐서 아쉬워요? 구워드릴께요. 저한테 있슴다.
이런저런 말나눔을 하다보니
그 분은 의대생이었는데 데모하다 짤리고 부인은 창하는 여자를 만났는데 어찌어찌하여
헤어졌단다. 지금은 고수로 악양마을에 터를 잡았단다.
집에 갔더니 초가삼간 오두막에 마당엔 풀 천지요 방은 한 칸인데 오디오 앰프시설 끝내주고
비디오 테레비가 크더라. 아참 화장실이 없더라.
풀 지천인 앞마당이 화장실이란다. 자연적으로 청소가 된단다.
여교사들 초대하여 술 한 잔 대접하셨는데 집이 인상적이라 기억에 오래더라.
참 자기 빛깔로 사는 이들 투성이네.내 주변에는..ㅎㅎㅎ~~
술 먹는데 먼저 붕어탕을 한 개씩 먹으란다.
북 배우는 제자가 보낸거라며 속을 훌치않고 좋다나.
나랑은 관계없는 일이라 대면대면 듣고 먹지않았다.
그 비릿한 붕어를 어찌 삼키누?
안주는 계란탕이더라.. 계란은 속을 편하게 한다고 했던가
난 소주를 그렇게 맛나고도 미학적으로 마시는 이 본 적없다.
한번에 모두 털어넣고 안주는 아니 먹는다.
술잔을 내려놓는 손은 파르르 떠는 게 꼭 계집 손 같더라.
좋은 집안에서 자랐군..고생을 안했어..한 눈에 알 수 있는 선비의 희디흰 손이더라.
문인의 손임을 담박에 알아보겠더라.
전 나이 먹는게 좋았어요.
나도 였슴다.
근데 나이 먹어서 좋다는 사람은 아마도 우리 밖에 없을 거다
난 40까지 살 줄 몰랐다. 살아온 세월이 하두 검어서 산을 몇 개를 넘었나 알 수 없어서
사십이 되니 절로 어깨 춤이 나더라.
그런데 이 고수님도 그랬단다.
자기는 마누라랑 헤어지고 이리 흔들 저리 흔들 발길 가는대로 살다가 여기 악양 하늘아래다
또아리를 틀고 살게 되었고 설장구하는 구례 총각, 창하는 교장샘, 택견 가르치는 경희대생이랑
어우렁 더우렁 사는 게 맛나단다.
욕심도 없구 먹고 잡으면 먹고 자고 싶으면 자고인데 꿈이 하나 있단다.
그건 우리 음악이 팝송처럼 대중화되는 거란다.
그래서 팝송을 매일 듣고 오디오세트도 가장 좋은 이유는 새 것으로 바꾸는 추세로
아파트 근처에서 주워온 거란다. 그야말로 아날로그였다.
비디오는 꼭 필요한 이유가 영화를 즐겨봐서란다.
시골에 살아도 세상 돌아감을 알아야 팝송처럼 국악을 대중화시킬 수 있다는 말에 다시 보이더라.
고수는 어느 정도 술을 먹더니 영화를 보고 싶냐고 했다.
"무슨 영화죠? 파이란임다, 최민식,장백지 주연의 남자들 동호회까지 생긴 영홥니다."
갑자기 호기심이 동했다.
그 밤을 새더라도 봐야겠단 생각이 들어 봤다.참 아름답더라, 장백지의 창백하고 고운 얼굴에
드려진 생머리의 수더분함이 곱더라.
최민식 남자다움의 터프가이!! 요즘 말하는 나쁜남자의 원조라고나 할까?
암튼 영화내내 아리고 서글프고 아프더라.
왜? 장백지는 감방에 들어간 최민식만을 오매불망 기다리는 걸까?
자신의 삶을 살 것이지..아니 차라리 자신의 삶을 살면서 최민식을 기다리렸다면 서로에게 도움이 될 거 같은 막연한 느낌이 들었고 이건 남성중심의 영화란 느낌이 들었다.
완전 조선의 여인이 은장도 하나로 자기 몸을 지키는 격이다.
죽은 지아비위해..이게 뭐꼬?
잼 없다..나 갑니다.. 이리 되어뿐 거고 ..
집에 와서 또 글 써놓고..
그때 글이 있을려나?
메일로 보내서 있으면 보고 아님 말고~~~
~새벽을 영화를 보며 지샌 추억이 있다는 것,
그것도 생전 처음 본 남모르는 사내의 집에서,
파이란을 보고 싶어 안달 난 사람들과 함께,
취향에 맞는 술잔을 기울이며,
계란탕을 안주 삼아,
붕어탕 보약까지 먹어 가며,
파이란을 봤다는 것은
삶의 길목에서 휴식을 취하기에 충분했다.
그것도 40이란 나이에.....
껄껄껄.....
우리 동포를 팔아먹는 시사성있는 소재에,
바닥 인생인 두 사람이 서로 의지해가며 새 삶을 설계해 간다는 주제로 영화를
이끌어 간 점은 충분히 인정합니다.
한번도 만나본 적이 없는 두 남,녀가 서로에게 깊은 인연으로 작용해서
삶을 올곧게 이끌어 가보려 한 점등은 감동 깊었습니다.
여주인공이 불쌍해 우는 월숙언니 보며 울지 않는 나는 감정이 메말랐다고
고수 선생님이 이야기를 했지만...
그때는 '아! 여기서도 나는 이방인이구나 '싶은 생각이 들어 쓸쓸했습니다.
서로 다른 생각을 인정받을 수 있는 자리라고 생각했는데.
새벽 산책길 내내 나를 생각해 봅니다.
왜 남들이 우는데 나는 울지 못할까?
왜 나는 다른 생각이 꼬리를 물어 영화에서도 여주인공의 다른 삶을 생각할까?
그냥 보이는 그대로 받아드릴 수도 있을텐데.
산책길이 끝나갈 때
이런 내 생각이 정리가 되었습니다.
어디까지나 나는 나라고...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는대로 내가 생각할 필요도 없고
내 생각을 인정 받기도 기대하지 말자라고.
다양하게 가면 된다고...
한국에서 살기 힘들어 3년 전에
전셋돈 빼서 영국 유학 가겠다 했다가
남편에게 정신차려라 소리듣고
말없이 삽니다.
다양함은 삶을 풍요롭게 합니다.
배역에 딱 맞는 여자 연기자의 청순 가련한 이미지, 최민수씨의 연기도 볼만
했습니다.파이란이 삶을 아름답게 살다 갔던 점은 인정합니다.
그 남자가 있다는 그 자체가 그 여자에게는 삶의 위안이 되었으므로.
남자 또한 새 삶을 살게 된 계기를 여자에게서 얻을 수 있었습니다.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죽어가는 누군가에게,
절대적인 존재로 군림했던 기억은
남자를 새 사람으로 거듭나게 하기에 충분했습니다.
하지만
여자 주인공의 삶이 단조롭고 그 남자만이 생의 마지막 희망이었던 점,
최민수씨가 그 여인에게는 희망이었지만, 왜 부질없는 것에 희망을 걸어
삶을 더 힘들게 살았을까 싶어 울음이 안 나왔습니다.
그리고 한국에서 여자는 항상 기다림의 존재여야했고 그 기다림은 값어치가 있고
새 삶을 개척한 여자의 삶은 인정하기를 꺼려하는 분위기가 싫었던 것입니다.
남자가 여자를 키우는 (우리 신랑처럼) 영화를 보고 싶습니다.
사고가 경직되어 있는지 모르나 남성위주의 사회에서 여자는 항상 소극적으로
묘사 되는 영화가 판을 치는 곳에서 파이란도 그런 영화의 부류로 분류되더군요.
남자는 어머니가 필요하듯,
여자는 아버지가 필요합니다.
대학 시절 사람에 상처받은 기억이 있었습니다.
그 기억은 참 오래 갑니다.
그때 이후로 내 사고는 복잡해졌던 것 같습니다.
여자로 사는 것이 아니라 사람으로 살고 싶은데 사람들은 꼭 남,녀로 가르기를 좋아했습니다.
남자는 군림하고 여자는 보조자로 삶을 살아야하고등.
파이란도 선택한 삶을 산 것은 아니고 선택 되어진 것입니다.
자신의 선택에 의해 사람이 아닌 들꽃,나무,바람, 구름에서 마음의 위안을
구했으면 하는 것이 내 생각이었습니다.
인생이 그렇게 단순하냐?
아니지요.
인생이 그렇게 낭만적이냐?
절대 아니지요.
영화는 낭만 자체였습니다.
그것이 영화의 특성 중 하나이고 그것 때문에 사람들은 영화를 즐기기도 할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아닙니다.
영화를 보는 이유는 내가 모르는 또다른 세상을 접할 수 있어서 입니다.
끝간데없는 상상 속에 시원함을 느끼므로 영화를 봅니다.
삶의 잡다한 문제를 한켠으로 밀어논 채 영화 보길 좋아합니다.
즐거움을 주므로 난 영화 보기를 즐깁니다.
삶이 허망해 보이다가도 파이란 같은 영화를 보면 따뜻함을 느끼기도 합니다.
누군가에게 내 가치를 인정 받을 수 있다는 것은
분명 따뜻한 소재입니다.
어쩌면 우리 모두 파이란 같은 존재가 필요해서
이 영화에 의미부여를 강하게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뭔 소린지 모르겠네요.
학교에서 관리자와 교육과정 문제로 부딪치고 동료들과는 개성이 강하단
이야기 속에 외로움 느끼다
거리를 두고 생각하고 싶어 잠시 메일 썼는데
내가 쓰고도 모르겠네요.
하지만 모든 것을 다 안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만이므로 그냥 끝냅니다.
건강하길... ~~~~~~~~
아 있었네. 일단 옛글은 버리지 말지어다,
웅쿠시 샘과 메일나눈 편지 모두 비운거 후회되더라
그냥 추억인거고 어떤 것이든 지나간 건 아름답더라.
그 고수랑 말나눔 깊었다.
이런 선배가 취했다. 최여사인데 평소 남편과 사이가 안좋더니 왜 여기와서 퍼지누?
아들을 내게 맡기더니 미안했는지 아님 아들 먹으라고 쏘세지부터 페스트푸드 잔뜩 사들고 오고
맥주,소주 짝으로 가져왔다. 그러더니 자기가 다 먹고 퍼진다.
우린 영화로 즐거운데 계속 게우러 다니더니 결국 뒤비져 잔다. 얼매나 고맙던지.
세 여자와 한 남자는 파이란 영화에 눈이 고정됐고
영화 끝난 후는 팝송이야기로 날을 꼬박 세웠다.
결국 새벽 6시에 해산이다.
아침 체조시간이므로다. ㅎㅎㅎ~~~
선배 아들인 준호는 천재였다.
머리가 명민하여 한번 들은 건 안까먹고 우리 두 아이 컴플렉스 엄청 느꼈다.
평범한 내 두 아이인데 주변은 천재천지였다.
난 그래 자랑할 게 없어 언제나 조용했다.
남의 아이들 이야기에 감탄하고 맞장구나 쳐줬다.
그러던 준호를 어렸을 적에 보고 6학년 되어서 보니 뚱돌이가 되었더라.
서초동으로 이사갔고 강남에서 좋은 환경으로 기르려는 아빠의 교육열 덕으로
서울교대 부속 초등학교에 다녔다.
녀석은 이 곳 음식에 익숙치 않아 거의 숯가락질을 멈춰버렸다.
이 곳 음식은 짜고 맵고 정말 아이들을 위한 식단은 아니었다. 부실 그 자체였으나 건강식이라
우리 두 아이는 남김없이 먹게했고 재영은 일곱살이라 가장 어렸다.
같은 또래로 온 일곱 살 여자아이는 미술샘 딸이고 봉사활동 온 엄마의 덕을 톡톡히 봐서
언제나 엄마 옆에서 밥을 먹었다.
난 아니다.
우리 재영은 학생,난 교사라서 학생 자리에서 먹게했다.
재영은 그런 엄마랑 어떡하든 같이 먹으려고 내 주위를 서성댔다.
난 계모형이다. 아닌 건 아닌거고 긴 건 긴거라서 그런 아들 용납 안했다.
재영은 샘들 물을 모두 떠온다.
식사가 끝나가는 걸 보고서다.
샘들이 칭찬한다.
아들이 물도 떠다주니 편하게 물먹는다며 좋아한다.
물 떠다준 후 서성이는 아들을 보며 " 야! 가서 놀아, 여긴 샘들 있는 곳이다."
아들은 조금 미적거리다가 떠난다.
한번은 샘들 식판을 가져다 놓겠단다.
모두 식사 끝난 식판을 가져다 놓겠다고 해서 그러라고 했다.
또 잘하더라.. 끝나면 바로 아웃이다.
샘들이 옆에 좀 있게 하라는 말에 안그러는 이유는 평생 있게 될까봐서임다,
자식은 떠나보낼 때 잘 보내야 잘 살 수 있음다.
우리 프로그램은 새벽 여섯부터 기상이라 다섯 오십분 부터 일어난다.
재영은 일어나는 걸 힘들어워했다.
아무 관심두지 않았다. 학생이므로 알아서 대처하라고다.
일어나면 바로 체조다. 조회대앞에 택견 샘이 정렬 시켜 아침운동한다.
재영은 울면서도 운동 따라한다.
안하면 나한테 혼나서다.
체조가 끝나면 악양 마을 한 바퀴를 도는데 참으로 아름답더라.
물이 좋고 돌담 사이로 핀 아담 소담한 고향빛 꽃들이 아름다워 새벽이 기다려지더라.
우리 아들 재영은 한 시간이나 하는 산책이 힘겨운지 얼굴은 궂어서 출발하지만 끝날 땐
고운 아가빛 햇살 담은 얼굴로 변하여 웃더라.
이게 바로 이겨낸 자의 행복일 것이다.
잠에서 승리했고 체조 열심히 했고 주변 관찰 잘했으니 엄마가 칭찬해줘서이리라.
다도를 배운다.
사군자를 배운다.
장구를 친다.
북을 친다.
택견을 배운다.
재영은 그 모두에 참석했고 키가 젤 작은 꼬맹이라 맨 앞 줄이다.
사군자 칠 때도 함께,,모두 다 함께다.
난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아이들에게 이야길 잘 들려준다.
그때는 6학년 남자 아이들 잠재워주기 당번이라서 역사이야기 들려주며 말나눔하다가
잠을 잤던거 같은데 우리 재영은 내 옆에 있는게 그리 좋은가부더라.
단연 준호가 톱이다.
아이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고 왕따인데
공부는 쨩이다,지식줄이 길다.
다른 넘들은 조폭과들이다.. 아이들은 놀며 자라야 하고 나중에 공부해도 된다는 부모들이
많아 선행학습 제로인 집단이라 그냥 건강하다.
그러나 준호는 서초동 서울교육대 부속초 학생이다.
단연 지식면에선 왕이다. 준호는 이 시간을 가장 기다렸다.
밥먹는 시간도 쭈볏, 체조도 쮸볏,사군자, 택견등 모두 싫다이고 엄마더러
언제오느냐며 불편을 달고 살더라.
이런 준호 끝까지 마칠 수 있음은 나때문이리라,
밤만 되면 준호 왕되게 만들었으니까다.
낮엔 평민인데 게으르다..청소도 안하니 다른 아이들한테 미운 털 박힌다.
자기들이 잔 방은 치워야는데 빗자루질 하고 있는 아이들 곁을 지나가며 행여나 먼지
묻을까봐 전전 긍긍하니 아이들이 좋아할리가 있나?
왕따는 다 원인이 있다.
서로 아픈거다.
준호는 엄마만을 기다렸다.
초코렛,페스트푸드 음식만을 기다렸다.
아예 적응하길 바라지 않았다.
가슴이 아팠다,
어렸을 적 준호는 멋졌다.
우리 딸애랑 한 살 차이라서
토요일 오후엔 언제나 대공원 나들이 했다.
교사 여러 명이서 자기 아이들 데리고 그림도 함께 가르치고
그러던 그날이 떠올라 눈물 나더라.
이젠 손,발 다 짤려나가 오로지 초콜렛에 페스트푸드에 뚱돌이에 공부 벌레가 된
준호가 가슴이 아파 한참 아팠다.
녀석은 아빠의 기대에 부응하려 무척이나 버둥거렸다.
선배는 그걸 보는 것이 힘겹고 아팠다, 그냥 놀게 내버려두면 좋을 것을 아들이 천재라 아는
그 순간부터 특별 사육한다.
그래 평범이 최고인거다.
실력은 최고일지 모르나 감성.인간미,여유,함께 함이 사라진 준호의 모습은
날 교사로 거듭나게 했다.
아이들에게 공부로 줄세우기는 의미없음을 강하게 각인시켜 줬고
학교에서만이라도 더불어 사는 우리라는 홍익인간이념으로 길러야겠단 생각이 들어
나부터 공부했고 나부터 행복했다.
악양에서 봉사활동 교사는 보조 교사 역할이라 아이들 문구류 나누기부터 도우미 활동이라서
언제나 함께다. 우리 재영은 질문이 많더라.
모르면 바로 손들어서 그 작은 입으로 요목조목 따져 물어 흐뭇하고 신기하더라.
울 아들 여섯 살 적 일이다.
중앙 병원 정기 검진 갔다. 그냥 재미로 갔던가? 기억이 없다.
공동육아는 의사를 유치원으로 데려다가 일년에 정기검진 한 번씩 한다.
내 아들은 눈을 검사 맡았고 아무 이상이 없는 상태였는데
중앙병원에선 난시에 원시에 사시까지 있어서 안보이는 상태였단다.
그 아득함을 알까?
아니 뭔가 오진이예요. 애는 매일 산에 가면 젤 먼저 오르고 바위,철봉 애가 하고나서
다른 아이들이 할 정도로 운동신경이 좋은걸요.
그건 까만세상에 익숙해져서 그래요.
믿을 수가 없었다.
서울대,삼성병원 ,공안과 안가본 곳이 없다.
진단은 처음과 같았다.
그러고보니 아들을 자세히 보게 되더라,
동화책을 읽어주면 아이들은 아주 세세한 그림 글씨 하나라도 다 찾는데
울 아들은 잘 모르더라..
아! 내 아들이 맹인의 경지라니...이건 비극이다.
이건 천형인거다.
아들은 두꺼운 돋보기 안경을 쓰니 아이들이 왕눈이라 놀린다.
별로 아랑곳 않더라.
내가 흉터에 별로 관심없어 하듯이...
안과에 가서 별 소득이 없자 이번엔 한방 치료를 했다.
대치동 은마아파트 상가에 있는 한의원이었는데 사시와 원시 난시를 침으로 치료했다.
한의와 양의를 함께 했고 차병원 부원장하다가 지금은 경희대 출강하시는 분이였다.
내 정신적인 문제 카운셀러도 해주시고 본인이 부인과 이혼위기를 넘긴 이야기부터
다감하더라.
울 아들 맡기니 마음이 놓였다.
아들은 싫다했고 그걸 꼬시기위해 아들이 좋아하는 걸 사줬다.
하지만 한의원 갈 때마다 백 방이상 맞는 침땜에 눈물바람이고 소리는 자지러진다.
난 그냥 옆에서 묵묵히 바라볼 뿐이다.
대신 살아줄 수 없고 대신 아파해 줄 수 없으므로다.
손 잡아주고 이야기 들려주고 아가 엄마가 있다는 것만 알려주고
자장자장 잠재워 침 맞게한다.
30분 정도 침 맞은 후 상가에 가서 사고잡은거 사게 한다.
그 후로 일학년이 되면서는 홀로 가게했고 지하철 버스타고 잘 가더라.
3학년까지 꾸준히 다녔으나 아빠의 반대로 그만이었다.
길고 긴 침맞는 일은 아이에게 안좋다는 것과 검증된 것이 없는데 뭘 믿고 내 자식
맡기느랴라며 반대하더라.
사실 남편도 그 의사샘 만났고 우리 부부 상담까지 해주셨는데도
우리 시댁은 검증된 거 아니면 안하는 편이다.
일더하기 일은 이가 되어야만 한다.
대충은 절대 아니니 미학을 모르고 감정의 소중함은 뒷전이고
이성적인 편이라 싸움도 안한다.
적당한 거리를 두고 배려하며 사는 가족이다.
아들은 침 맞기를 그만둔 후는 안경을 두꺼운 걸 거부하고 그냥 다니더라.
안보이면 안보이는대로 그러더니 지금은 책 볼 때만 본다.
사시끼는 자세히 보면 보이지만 그냥 스치면 모른다.
아들은 눈이 컴플렉스다
하고 잡은 꿈도 접어야하고 피로를 많이 느낀다.
눈이 안좋은 이유는 비장이 약해서란다.
날 꼭 닮은거다. 비유가 약해서 테레비에서 뱀이나 잔인한 장면이 나오면
바로 꺼야 밥을 먹고 또 찡그리거나 소리지름 막을 수 있다.
벌레도 넘 싫어해서 벌레만 나오면 날 부른다.
아! 이놈아, 뭐가 무서워서 그러냐? 알아서 해치워,, 딴 놈들은 엄마 보호해주고 그런다는데
난 뭐냐..아들 위해 휴지에 벌레싸서 버려야 하니 이게 뭔 신세여..아서라,,아서,,
울 아들은 기겁을 하며 도망만 다닌다. 아무리 내가 화를 내도 그냥 실실이다.
참내..기막혀서 원..
4학년 때 아들이랑 여행을 했다.
아들은 언제나 날 따라다니길 즐겨해서 함께 했다.
케이티엑스가 첨으로 만들어졌다.
당근 아들의 호기심 자극이다. 케이티엑스로 백만원 들여 경주 갔다가 부산 가고잡다 해서
부산 가고 대구 가고 잡다 해서 대구로 대전 가고 잡다하면 대전으로 부여 가고 잡다 하면
부여로 참 아들의 뜻 받들기 힘들더라.
경주 불국사에 갈 때는 버스 여행을 하는데
거리가 이쁘더라. 버스가 높으니 시원하기도 하고 참으로 기쁘더라.
택시,자가용이 모르는 묘미가 거기 있었고 걸어다니는 재미도 쏠쏠하더라.
불편함은 불편함으로 끝남이 아니라 뭔가 하나씩 깨우침을 준다.
버스를 오래 기다렸다,
아주 더운 여름날 오후에
아들은 지치는지 털썩 바닥에 앉는다.
그저 옆에서 부채질만 해주고 장난 건다.
힘들면 힘드는데로 기쁘면 기쁜대로 함께 함이 사랑이다.
아들은 버스를 타자 즐거워 어쩔 줄 몰라 엄마, 저건 불국사,저건 연꽃 밭이란다.
우리 둘은 지지배배 참새처럼 제비처럼 즐거웁더라.
언제나 삶은 즐거움과 슬픔의 변주곡이더라.
기쁘다고 넘칮지 않았고 슬프다고 빠지지않음이 그래서라.
아들은 경주 여행에서 돌아오더니 무척 성숙한거 같았고 그 다음 해 5학년 올라가야되는 때에
가장 힘든 고비를 맞았다. 엄마랑 헤어져서 미국 유학길이다.
아빠가 일 찾아 미국으로 가야 했으므로 아들,딸 함께 가서 공부 가르치고 난 돈을 벌어야했다.
남편도 벌었지만 꿈이 크고 씀씀이가 크므로 골프에 이런저런 즐김을 다하기에 난 두 아이
학비 벌기위해 불철주야 열심일 수 밖에 없었고 하두 외로워서 산책 줄 길게 늘였다.
집에 들어가면 하두 그리워서 넘 보고파서 아침마다 운다는 아들 이야기 딸에게
전해듣고 고개를 들지않고 다닌다는 말 들으면서
밥을 아니 먹는다는 말 들으면서 안 울 에미가 이 세상 어디 있을 것인가?
아들과 함께 걸었던 그 길 걸으며 혼자 시 쓰고 울고 했다.
두뎀이 공원 소나무 끌어안고 울기도 많이 울었다.
내 아들 몸 갖고 내 딸 몸 같아서
딸을 보며 별을 보며 딸, 아들 데려다 달라 했다.
그땐 정말 하루 넘기기가 힘들었다.
집에 들어가면 적막이다.
무서웠다.혼자라는 것이,,,하두 무서워서 테레비 크게 틀고 라디오는 꺼본 적 없다.
그 깊은 외로움을 누가 알까? 차라리 자식을 낳지 말것을,
멀리 날고 높이 나는 갈매기로 기르기위해 견디어야하는 아픔이 넘 깊었고 아팠다.
홀로 집을 들어가지 않고 아들이랑 함께 걸었던 개롱공원 길가에 피어난 황매화꽃 보며
시를 썼다.
정말 매화꽃이 노오란 황매꽃이 아들 같더라.
(황매화꽃에 낙엽이 떨어진 모습 -
새벽기도 마치고 공원 산책 중 찍은 사진....^^***)
황매화꽃
노오란 아가손 꼬물대던 황매화꽃
여름날 내내 내게 사랑빛 전해주었네.
내 아들 그리워 못내 그리워
가던 발길 오래 붙잡았던
따스하고 사랑뿐인 니 몸은
내겐
언제나 기쁨이었고 슬픔이었다.
난 널 만나러가고 잡아
퇴근 길에 차를 하두 쌩쌩몰아
교통법규 위반딱지를 받아도
너만 볼수 있다면
너의 사랑의 빛인 노오란 아가빛 볼만 볼 수 있다면
세상속
돈 들어가는 건 아무것도 아니었고
난 니가 내 아들의 만지고 잡은 다부진 몸이라서
널 만지고 또 만지다 내 손에 노오란 잎사귀 자디잘게
번져 나가
네 몸에 생채기 냄에 내 맘 오래도록 아리었고
난 너만 보면 밥을 아니 먹어도 행복했단다.
이제 그대는 가지만 높이 길어올려 쓸쓸히
가로등 아래 가녀린 가지만의 몸이라도 살아내려
모진 비바람에도 다부진 맘자락으로
주황빛 가로등과 동무하여 소담스런 이야기꽃 피어내다
니 몸에 같이 사는 나뭇잎 동무 받아주기에
넉넉한 사내가슴으로 피어나니
난 널 보면 가슴엔 하나가득 그리움이고
난 널 보면 가슴엔 아릿한 슬픔이 배이고
난 널 보면 아들자전거 밀어주며 행복했던 기억 새삼스러이 떠올라 눈가에 이슬동무 매달아 네게 선물하나니
노오란빛 황매화야
다시 피어날 봄날엔
다시 완결미의 극치를 보여줄 여름날엔
나도 너와 함께 동구밖으로 춤을 추며 내 아들 마중나가려네.
모진 세월 흐르고 난뒤에라야
난 내 아들 맞이할 수 있으려니
그대 노오란 빛 사랑의 빛인 황매화여
내 외로운 소반에
니 따스한 햇빛 한 줌의 사랑을 내려다오.
행복한 웃음가득 개롱공원에 울려퍼지며
네 사랑 가로등 동무와 나누었던
가로등 주황들녁의 사랑을 내게도 들려다오,
그 사랑하나면
난 내 아들 기다림에
소나무 가슴팍에 내 가슴 묻어
이슬방울 흘리는 날 많았더라도
너의 주황빛 가로등 사랑이야기만 들어도
얼굴에 하나가득 웃음잔치 매달아
세상의 온갖 시름 잊나니
미소가 곱다못해 내 눈거둬들이기 아쉬워
그대 눈가 들녁에 오래도록 피어나리니
황매화빛 노오란 사랑의 눈빛
오래도록 내 가야하는 외로움의 나날들에
등불이 되어주거라.
황매화꽃 1
진노오랑 황매화꽃 피었다.
아들과 자전거 타며 봤던 황매화꽃
올해도 여전히 그 자리에 피었다.
진노오랑 황매화 꽃 피었다.
아들과 자치기하며 봤던 황매화꽃
올해도 여전히 공원길가 옆에 피었다.
자치기하며 깔깔대던 아들 웃음소리
노오란 꽃잎에 망울망울 울린다.
세월은 가고 기억만이 남았다.
사람은 가고 추억만이 남았다.
난 추억 속을 혼자 걸어간다.
그 추억이 내겐 큰 위안이 되어주고 있다.
작년에 피었던 황매화 꽃
올해도 피어나 혼자만의 단촐한 추억을 만들었다.
황매화 꽃잎에 그리움 알알이 매달아 놓았다
황매화2
노오란 빛깔의 황매화 찾아
새벽 이슬 밟고
눈 비비며 달려간다.
아파트 한 켠 그늘진 자리
노오란 황매화가 사는 자리
오늘은 아무리 찾아도
오늘은 아무리 헤매어도
언제나 그 자리에서
나를 기다려줄 것 같던
노오란 빛깔의 황매화
오늘은 아무리 찾아도
오늘은 아무리 헤매어도
노오란 빛깔의 황매화마저
날 잊은 날
동그마한 보름달이
날 쳐다보고 있다.
만지고 또 만지고 쳐다보고 또 쳐다보다가 울고 또 울고 달 치어다 보고 한번 울고
별 치어다보고 또 눈물 삼키고 하늘 보고 나무보고 바람 내 볼을 스칠 때 가슴이
없어졌으면 싶더라.
밥을 못 먹어 두 달 병가란다.
두 아이 보내고 우울증,거식증이란다.
천형이다.이건 그냥 함께 살지어다. 가족은 떨어져 살지말고
특히 어린 아들,딸과는 절대 헤어지지 말지어다,
울 아들은 외국 가길 원했다.
한국이 좁고 아빠 엄마의 다른 성향땜에 집이 따스하지 않았던가보다.
그런 예민한 아들이라 외국 물 먹고 잘 배워 훌륭하게 키움이 좋은건 줄 알았다.
내 비록 이 좁은 한국땅에서 한많은 교사로 핍박 받으며 살았지만
아들만은 딸만은 넓은 곳에서 하고잡은 일하며 당당한 자기 목소리를 내며 행복하길
바래서 힘든 유학 결정했다.
결코 형편이 넉넉해서도 아니다.
난 한국이 싫었다. 정말 좁고 여자는 여자이기만을 강요하는 한국이 너무 싫었기에
내 아들 그 어린 아들 엄마의 세치 혀끝으로 설득해서 스스로 웃으며 가게 했다.
허나 미국땅은 내 아들에겐 너무나 낯설었던가보다.
집도 안됐는데 남의 집에 얹혀 살아야하는 시간부터 저녁이면 엄마 팔 베게하고 자던
아이가 엄마의 포옹이 끝나야 자던 아이가 이렇게 홀로 되니 아빠,누나는 안중에도 없고
엄마만 찾는데 속이 깊으니 울지는 못하고 그냥 말이 없더란다.
말을 안하고 고개로만 절래절래 밥도 안먹고 그냥 우울이었던가보다.
내 아들은 그렇게 성장해갔고 나도 자리를 잡아 갔다.
여행으로 내 힘든 시간들 이겨냈고 기왕에 혼자라면 공부하자해서 그 해에 공부를 많이했다.
아동문학공부쪽이랑 옛이야기 공부 송파팀장을 맞고 국어과 학회 활동하고 다양한 일속에
미쳐야 사는 세월이었다.
흐르는 이 눈물이러라,, 아직도 못내려 놨나??
아들이 부른다. 이제 학원갔다 오는 길인데 엄마랑 데이트 하고잡단다.
신발이 필요하다고 ,,돈이 필요하면 이젠 날 찾는다..다 컸으니 감사다.
아니 미국 다녀온 후 아이가 쪼그라들었더라.
그 가슴 아픔을 어이 말로 다 할까나?
유학에서 돌아온 아들은 나와 3년 떨어져 사는 동안 외모에 관심이 많아져서 드라이 ,고대기로
아침 30분을 쓰더라,염색,탈색 다하고 옷은 지맘대로다.
책가방 속엔 아무것도 아니넣고 학교 간다. 실내화는 질질 끌고 간다.
첨엔 잔소리했으나 효과없어 뒀다.
집에선 봐줄 정도는 했으므로 건강하게 먹는 것만 잘 챙겨먹였고
잠 잘 시간 일어나는 시간등 생활규칙 지키는 것이랑 성실성에 촛점을 맞춰 길렀다.
잔소리가 없다.
아들의 결정을 존중하고
비록 지금은 꼴등이지만 나중엔 자기 길을 갈 것을 알기에 믿고 기다려줄 뿐이다.
내 아들 재영이 세상 속에서 자리를 갖고 비상하는 그 날을 위해 에미는 어떤 일에도
나서지않고 지켜만 볼 것이고 가슴 속 깊이 드러내지 않는 지지만을 보낼 뿐이다.
하루빨리 떠나줌도 효도일 거 같다.
떠남은 자리 자리가 있어서니 얼매나 축복하고 반가워 해야 할 일인가?
무수히 많은 이야기들이 있지만 오늘은 여기까지 내려놓는다.
일을 해야므로..날 부른다...
첫댓글 저도 부모님께 효도를 많이 해드려야 돼겠어요.
저도요.선생님 완전 길어요. 10분만에 다 읽었어요.ㅋㅋㅋㅋ
그랬니? 진짜 쓰는거에 비해 빠르다.읽는 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