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부흥의 길(復興之路)2부 자막 대사 녹취문
제2부 峥嵘岁月 역경 속에 탄생한 중화인민공화국
중국에 황제가 사라지고, 변발이 잘려 나갔다.
1912년 당시 이것은 큰 충격이었다. 그 당시 원세개(袁世凱, 위안스카이)는 신해혁명의 성과를 독차지했다. 임시 대통령이던 손문이 그 자리를 양보했기 때문이다. 중화민국은 표면적으로는 국회, 헌법, 정당으로 이루어진 듯 보였지만, 실제 정권은 원세개와 북양(北洋)정부의 손에 있었다.
1913년 3월. 국민당의 우두머리인 송교인(宋敎仁)이 암살되고, 의회민주주의 제도에 대한 꿈은 물거품이 된다. 그 후 황제가 되려는 야심을 품은 원세개가 일본의 21개조 요구를 받아들인다. 사람들은 수많은 희생의 대가로 허울뿐인 평화를 얻었다고 한탄했다.
1916년 원세개는 즉위 83일 만에 황제의 자리에서 쫓겨난다. 북양정부는 형식적으로 남아 유지되고 있던 통일도 지켜내지 못한다. 신해혁명은 실패로 끝이 난다. 중국은 여전히 제국주의와 봉건주의 아래 놓여 있었다.
다시 역사의 물결 속에 휘말린 중국.
이 역경을 이겨낼 수 있는 인물은 과연 누가 될 것인가?
오늘날 중국의 상징인 북경의 천안문.
중국근대사에서 천안문은 역사 그 자체다.
1919년 이곳에선 민족을 위기에서 구하기 위한 이른 바 5·4 운동이 일어났다. 1919년 5월 4일. 북경대학생 3천여 명이 대규모 시위를 벌인다.
당시 개최되고 있던 파리평화회의가 그 시발점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 후 열린 파리 평화회의. 독일에 이어 일본이 중국 산동(山東)에 대한 권리를 계승하게 되고, 중국이 요구한 ‘일본의 21개조 요구에 대한 폐지’ 또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장카이위엔(화중사범대학 사학과)
파리 평화회의는 공평함보다 강권이 우선이었죠. 중국은 참전국이자 승전국에 속했지만 약하고, 빈곤하고, 권력이 없는 국가였으므로 상황을 반전시키지는 못했죠. 국민들은 이에 분노했습니다.
5월 4일의 학생시위 후 노동자와 상인들이 파업을 선언하여 사회 각층이 결속하기 시작한다. 1840년 이후 일어난 가장 큰 규모의 애국운동이었으며, 참여인원도 가장 많았다.
중국에서 왜 이런 대규모의 군중운동이 일어난 것이며, 신해혁명 후 중국 국민의 사상에는 어떤 변화가 생긴 것일까?
1915년 9월 15일. 상해 황포강변(黃浦江邊)의 한 출판사에서 잡지가 발간되었다. 1년 후 잡지는 ‘신청년’으로 이름을 바꾸고 만 6천부에 달하는 발행부수를 기록한다. 중국근대사에 많은 영향을 끼쳤던 문화운동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신청년의 편집자인 진독수(陳獨秀 1879-1942)는 중국을 구하고 공화국을 건립하려면 사상의 혁명부터 일어나야 한다고 주장했다.
➡탕바오린 (중국사회과학원 근대사연구소)
손문이 황제를 폐했지만, 중국의 현실은 변함이 없었고 민주공화국의 이념도 실현되지 못했습니다. 이에 대해 진독수는 중국을 위한 자구책은 중국의 국민성을 변화시키는 것이라고 주장했죠.
➡천치엔핑 (남경대학 사학과 주임)
왕조체제에서 민국체제로 시대는 변했지만, 중국은 이러한 사상 변화에 대한 기반이 없었습니다. 중간 단계가 없는 봉건사회의 급변으로 인한 부작용이죠.
‘신청년’이 발간되고 3개월 후, 북경대학의 신임 총장 채원배(蔡元培, 차이위엔페이)는 진독수를 문과대학장으로 임명한다. 그를 따라 신청년 편집부도 북경으로 옮기고, 북경대학과 신청년 잡지는 신문화운동의 중심이 된다. 진독수, 이대쇠(李大釗, 리다자오), 노신(魯迅)과 같은 지식인들이 민주와 과학을 주창하면서 중국의 사상계몽이 시작되었다.
➡두웨이밍(하버드대학 하버드·옌칭연구소)
18세기부터 과학, 자유, 인권, 법치, 개인의 존엄이 거론됐고, 이러한 가치들은 5·4운동을 통해 당시 중국 지식인 문화의 구조와 전통에서 없어서는 안 될 기본적인 가치가 되었습니다.
신문화운동을 통해 서방의 정치학설과 사회사상들이 몰려 왔다. 수천만에 달하는 중국인들은 수많은 사상 중에서 자신에게 맞는 것을 찾고 있었다. 중국은 이미 깨어났지만 그 방향을 찾는 것은 쉽지 않았다. 이제 막 꿈에서 깨어난 중국은 방황하고 있었다.
20세기 초, 중국은 온전한 국가의 모습이 아니었다. 각국 군벌 간의 권력 쟁탈로 중국의 성벽에는 매일 다른 깃발이 펄럭였다. 신문에는 악랄한 대량학살이 보도되었고 백성들은 혼란과 공포 속에서 시달렸다.
조계지와 점령지는 여전히 유지되고 있었고, 중국 내 외국인들의 특권은 여전했다. 또한 외국 전함도 중국의 해역에서 위세를 부렸다. 중국은 방황하고 있었다. 과연 어떤 사상이 중국에 밝은 빛을 가져다 줄 것인가?
1919년 유럽으로 건너간 양계초는 심각한 빈부의 격차와 노사 문제를 보고 놀라게 된다. 그가 쓴 구유심영록(歐遊心影錄)에는 이런 글이 있다.
“모든 사람은 우울하고 의심이 많으며 두려움에 빠져있다. 마치 나침반을 잃은 선박이 바람과 안개 앞에서 길을 잃은 듯하다.”
➡미국의 한 기자는 양계초에게 이렇게 말했다.
“서방 문명은 빈껍데기만 남았습니다.”
서방 문명을 배우려 했던 중국인들은 혼란에 빠졌다. 이대로 중국이 서방을 따라야 할 것인가 의문이 들었다. 바로 그때 러시아의 시월혁명이 성공을 거두게 된다.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가 탄생한 것이다. 중국의 진보세력은 주저 없이 마르크스주의를 선택했다.
➡위페이 (중국사회과학원 세계역사연구소)
러시아 혁명은 중국에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남겨주었습니다. 혁명 후 중국에는 마르크스주의 전파 열풍이 불었죠. 통계에 의하면 그 당시 400여 개에 달하는 신문사가 러시아 혁명과 마르크스주의를 전파했다고 합니다.
1919년에 일어난 5·4 운동은 중국 내에 마르크스주의를 전파했고 노동자 운동의 결합을 추진한다. 사회주의 성향의 지식인들은 마르크스주의의 깃발 아래 단결하기 시작했다.
1920년 2월 9일. 북경에서 천진으로 가는 길에서 북양군벌의 표적이 된 진독수와 그를 배웅했던 이대쇠가 만난다. 이들은 함께 중국 공산당의 건립을 계획한다. 후에 이 이야기는 남쪽의 이대쇠와 북쪽의 진독수의 창당 약속으로 역사에 남는다. 1921년 7월 중국 공산당 제1차 전국대표대회가 개최된다. 그리고 제2차 전국대표대회에서는 제국주의와 봉건군벌의 타도에 대한 원칙을 세우게 된다.
➡천쉬에웨이(중앙당교 당사 교육연구부)
중국공산당은 선진이론 교육, 조직, 계율에 있어 매우 엄격합니다. 그래서 모택동은 중국혁명을 ‘천지개벽의 대사변’이라고 했죠. 이는 곧 중국의 반제국, 반봉건주의 투쟁이 올바른 방향을 선택하여 목표를 달성할 것임을 뜻하죠.
이제 막 설립된 중국공산당은 겉으로는 매우 위태로워 보였다. 하지만 그 뒤에는 마르크스주의와 사회주의에 높은 관심을 가진 중국인들이 있었다.
1923년 북경대학이 세계 최고의 위인을 선출하는 여론조사를 실시한다. 총 497표 중 레닌이 227표로 1위를 차지했고,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51표로 2위를 했다. 중국 지식인들의 사상은 변화하고 있었다.
그러나 중국의 변화는 쉽지 않았다. 노신의 말처럼 “작은 책상, 작은 화로를 옮기는데도 반드시 그 대가가 필요한 법이다.”
새롭게 태어난 중국공산당은 중국을 어떻게 이끌 것인가? 어떻게 해야 반제국 반봉건주의의 임무를 완수할 수 있을까?
1922년 1월부터 중국공산당의 주도와 조직력에 의거해 중국 최초의 노동자운동이 최고조에 이른다. 13개월 동안 약 30만 명이 100여 차례 파업에 참여해 노동자의 힘을 증명하고 있었다. 또한 정치적 영향력의 확대를 위해 중국 국민당의 대표 손문에게 공산당과 협력할 것을 제안한다.
➡장레이 (광동성 손문연구회 회장)
이는 시대의 변화에 순응한 손문의 선택이었습니다. 그는 혁명의 기반은 농민과 노동자이고, 그들이 진정한 친구라고 했죠.
1924년 중국 국민당 제1차 전국대표대회가 개최되었다. 러시아와의 연합, 공산당과 연합, 농공업에 대한 지지 등 3대 정책을 논의한 자리였다. 국민당과 공산당의 최초 협력이었다.
1년 후, 중국혁명의 선구자인 손문이 숨을 거둔다. 그는 자신이 평생을 추구하던 이상을 실현하지 못한 채 눈을 감았다.
그리고 1926년 국민당과 공산당이 공동으로 이끄는 국민혁명군이 광주를 출발한다. 열강을 물리치고 군벌을 제거하자는 구호 아래 북벌전쟁을 시작한 것이다. 역사상 최대 규모로 농민과 노동자가 동원된 이 군중운동을 ‘대혁명’이라 불렀다.
1927년 3월 국민혁명군은 상해와 남경을 점령하며 양자강 중하류의 남쪽을 제압한다. 북벌의 성과는 컸다. 하지만 외국의 세력과 결탁한 장개석은 반혁명 정변을 계획한다. 그리고 10여 일 후인 4월 10일 장개석은 남경에서 비밀 지령을 내린다. 그 지령에 따라 2만 6천 명의 공산당 당원과 30만 명의 군중이 살해되고 노동자와 농민의 운동은 이렇게 진압된다.
대혁명은 실패했다. 중국의 젊은 공산당원들은 잔인한 현실을 맛보았다. 실패를 겪은 후 중국 공산당은 무력으로 정권을 얻을 새로운 혁명의 길을 선택한다. 모택동은 “정권은 포탄으로 얻는다!”고 말했다.
10년 후 그는 자신의 외국인 친구에게 이렇게 말했다.
“중국인은 원래 총을 쏠 줄 몰랐습니다. 평화를 사랑했으며 농사를 짓고 교육을 하고 장사를 해왔죠. 초등학교 교사였던 내가 총을 들고 전쟁을 하리라곤 생각조차 못했습니다.”
모택동은 무장혁명을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 했다.
1927년 8월 남창혁명 이후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는 토지혁명과 무장혁명의 방침을 정한다.
1927년 모택동은 정강산(井岡山)에서 최초의 농촌혁명의 근거지를 마련한다.
1931년 중화소비에트공화국의 임시 중앙정부 설립.
1935년 준의회의(遵義會議). 이를 통해 모택동은 중국공산당과 홍군(紅軍)의 실질적인 우두머리가 된다.
1936년 10여개의 성(省), 2만 5천 킬로를 넘나드는 중국 공농(工農) 홍군의 원정은 승리로 그 막을 내린다.
이곳(연안)은 척박한 황토의 고원이다. 홍군의 원정으로 이 지역은 중국의 운명을 결정짓는 사상의 고지가 되었다. 험한 계곡으로 둘러싸여 생존조차 어려운 황토 불모지. 이곳에서 중국의 역사가 성장하고 중국의 진보사상이 키워졌다. 그 사상은 자석처럼 원대한 꿈을 가진 모든 중국인들을 끌어들였다.
➡양성췬(중앙문헌연구실 상무부주임)
연안시대에 중국공산당의 진보적인 생각이 충분히 발휘됐죠. 덕분에 확신을 갖지 못한 이들의 참여가 이루어졌고, 국민들은 국가의 부흥은 공산당이 이룰 거라 믿었습니다.
중국의 가장 큰 문제는 농민이었다.
중국공산당이 농촌을 기반으로 삼고 있을 때 국민당은 도시에서 자본주의를 발전시킨다. 장개석을 선두로 국민당 고위관료들은 국민의 자산을 약탈하기 시작한다. 관료들은 자산가가 되어갔고 인구의 85퍼센트를 차지하는 농민들은 빈곤해졌다.
1937년 당시 세금의 종류는 1천7백여 종. 국민당이 통치한 10년 동안 경제에 독점 독재가 빈번했고 반식민지 반봉건사회는 유지되었다. 중국사회는 여전히 모순과 위기로 가득 차 있었다.
10년 동안 세계는 급속도로 변하였다. 소련은 체계적인 경제계획을 통해 농업국에서 공업국으로 변화한다. 자본주의는 1929년부터 전례 없던 경제위기를 맞고 실업과 배고픔에 시달리고 있었다. 사람들은 두려움에 빠졌다.
그리고 유럽에 전쟁의 먹구름이 몰려왔다. 1939년 독일이 폴란드를 침략하여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다.
아시아에서는 군국주의 일본이 중국 침략계획에 속도를 내기 시작한다.
1931년 일본군이 만주를 침략한다. 국민당 정부는 공농(工農) 홍군(紅軍)의 위협하는데 병력을 낭비하고 일본군에게는 공격 대신 협상의 손을 내민다. 결국 110만 킬로미터에 달하는 중국 영토를 점령당한다.
1937년 7월 7일 일본은 본격적으로 중국을 침략하고 중국은 심각한 위기를 맞이한다.
➡룽웨이무(중국사회과학원 근대사연구소)
공산당은 수차례 국민당에게 함께 일본에 대항하자고 제안했습니다. 1936년 말 서안(西安)사변이 발발하고, 공산당은 서안 사변의 해결을 위해 노력하여, 결국 서안 사변은 평화롭게 해결됐죠. 두 번째 국공 합작과 동시에 항일 전선이 형성됐습니다.
중국 국민당과 중국 공산당은 함께 항일군대를 지휘하기 시작했고, 힘을 모아 일본을 격퇴하자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군국주의를 앞세운 일본에 대한 저항의 물결이 일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은 항복을 선언한다.
중국은 1840년 이래 최초로 침략자를 물리쳤다. 1895년 청일전쟁의 패배로 일본에게 점령당한 타이완도 반환되었다. 중국은 반파시스트 전선을 지지하고 함께 싸웠으며, 이에 국제적인 위상도 높아졌다. 항일전쟁의 승리는 중국에 있어 역사적인 전환점이 되었다.
➡아키라 아이리예(하버드대학 교수)
1931년 일본의 만주 침략, 1937년 이후의 항일 전쟁까지 중국은 중국 공산당의 지휘 하에 국가의 통일을 이루었고 이는 중대한 의미를 지닙니다. 중국 공산당은 30, 40년대부터 일본의 침략을 받았기 때문이죠.
➡부핑 (중국사회과학원 근대사연구소)
중화민족은 단결력이 부족해 전쟁에서 실패를 맛보았습니다. 그러나 항일 전쟁에서는 중국 공산당의 지휘 하에 단결된 저항세력을 형성할 수 있었죠.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소련과 미국은 세계 양대 진영의 우두머리가 된다. 사회주의와 자유주의가 각자 성장과 발전을 거듭해 나가고 있었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 아래 세계는 중국을 주목하고 있었다. 어떠한 방식으로 나라를 재정비할 것이며, 어떠한 공화국을 설립할 것인지 말이다.
이것은 풍자개(豊子愷/펑즈카이 1895-1975, 중국 만화의 시조)의 1945년 작품 ‘화병이 된 포탄’이다. 이 만화는 나라의 재건을 원하는 국민의 염원을 표현하고 있다.
1945년 국민당과 공산당은 10·10 협정을 체결하고 평화로운 방식의 건국을 기본 방침으로 삼는다.
➡왕페이(난카이대학 사학과 부학과장)
공산당은 국민당이 1당 독제체제를 끝내고 공산당, 민주당 혹은 무당파의 인사를 받아들여 연합정부를 설립하고 민주정치를 실현하길 원했죠. 하지만 국민당은 헌정(憲政)을 실시하게 되면 독재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1946년 1월 10일 정치협상회의가 중경에서 개막되었다. 회의에선 5개 항목에 대한 협의가 이루어졌고 ‘국민정부위원회’ 설립이 제안되었다. 하지만 중국 국민이 기대하던 평화 건국은 실현되지 못했다.
정치협상 회의가 끝나고 5개월 후 1946년 6월 국민당은 내전을 일으킨다. 군사력 차이가 현저한 대립이었다. 국민당의 병력은 공산당의 3배에 달했고, 국민당은 전국의 대도시와 주요 도로를 장악하고 있었다. 또한 전 국토의 76퍼센트에 달하는 토지와 인구의 71퍼센트를 장악하고 있었다.
그러나 전쟁은 중국 공산당의 승리로 끝이 났다. 두 당의 현저한 역량 차이에도 불구하고 중국 공산당이 어떻게 승리한 것일까.
1945년부터 국민당에 대한 지지는 사라지고 중국인들의 마음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당시 부동산, 지폐, 금(金) 등의 모든 물건은 국민당의 차지였다. 국민당은 극단적인 금융정책까지 실행했다. 국민당 정부의 화폐 1원을 다른 점령지구에서 발행된 화폐 2백 위안으로 환전할 수 있다는 정책이었다. 이것은 중경에서 빵 4개를 살 수 있는 돈으로, 상해에서 진수성찬을 먹을 수 있다는 의미였다.
➡추징핑 (복단대학 중국금융사 연구위원)
그 결과 국민당 통치구역에서 통용되던 화폐(위폐), 채권을 가진 국민들이나 공상업 종사 계층 등이 그들 소유의 재산을 국민당 정권에 헌납한 셈이 됐죠. (*화폐개혁으로 신권을 발행하여 구권을 모두 휴지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자기들은 마음대로 신권을 찍어내고!)
➡에즈라 보겔 (하버드 대학 교수)
국민당의 부패, 산만한 조직력이 실패의 요인이었습니다. 공산당 대표는 군대 계율의 중요성, 국민을 위한 봉사를 강조했죠.
국민당의 고위관료들은 장개석의 정책에 반대하고 있었다. 그것은 승리의 함성 속에 던지는 폭탄과 같은 것이었다.
상해 대공보(上海大公報)에 이런 글이 실렸다.
“국민당 정부는 북경, 상해 지역의 민심을 잃었다.”
국민의 지지는 공산당으로 옮겨가고 있었다. 하지만 장개석은 이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이 책(‘중국의 운명’)은 1943년에 출판된 장개석의 저서로 많은 국민들이 반대하는 내용이었다. (그는 이 책에서 ‘1개의 정당’, ‘1개의 사상’, ‘1명의 리더’를 주장하고 있다.)
중국민주동맹의 주요 구성원이던 문일다(聞一多, 원이둬)는 이에 매우 실망하고 있었다. 그는 이 책의 내용이 5·4 운동의 고귀한 정신에 공개적인 도전장을 내미는 것이라 평했다. 1946년 장개석 독재정치에 반대하던 문일다가 암살된다. 이듬해 국민당은 민주동맹을 불법단체로 규정하고 강제 해산시킨다.
➡모리 카즈코 (와세다대학 교수)
1946년 이후 중국의 가장 큰 과제는 민주주의였습니다. 여기저기에서 ‘독재반대’라는 외침이 점차 커졌어요. 국민당의 1당 통치와 심각하게 부패한 당시의 사회상 때문이었죠.
항전 승리 후 일부 민주당파는 제3의 길을 찾고자 한다. 그들은 자산계급(부르조아) 공화국 건립을 제창한다. 하지만 국민당의 독재는 이들의 환상을 깨뜨렸다. 민주당의 대다수가 점차 공산당 쪽으로 이적하고 있었다. 그 당시 중국의 앞날에 대한 모택동의 생각은 점점 확고해지고 있었다.
1930년대 후반에 모택동은 신민주주의 혁명 이론에 대한 중요한 이론서(중국혁명과 중국공산당, 신민주주의론, 논[論]연합정부)를 편찬하게 된다.
15년 후인 1945년 4월 연안에서 열린 중국공산당 제7차 전국대표대회에서 모택동의 사상은 중요한 지침이 된다.
➡세춘타오 (중앙당교 당사교연부 교수)
모택동은 혁명에 대한 경험을 바탕으로, 중국의 현실을 레닌주의에 의거해 구체적인 문제를 분석하고, 중국 혁명 문제에 대해 정확한 관점을 내놓았습니다. 이런 생각들이 40년대 연안 정풍(整風)운동을 통해 공산당 내에서도 인정받아 제7차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당의 지도사상 및 지침이 됐죠.
중국이 나아갈 길은 명확해졌다.
1945년 여름 민주인사인 황염배(黃炎培, 황옌페이)가 연안 지역으로 온다. 그는 모택동과 긴 시간 동안 대화를 나누었다. 황염배는 모택동이 새로운 길을 찾아내어 새로운 중국의 부흥을 이끌어주기를 바랐다. 이에 모택동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새로운 길을 찾았다. 그 길은 바로 민주다.”
국민이 주인이 되는 새로운 길은 1840년 이후 중국의 국민들이 기다려왔던 바로 그 길이었다. 모택동은 이러한 이상을 목표로 2천 년 간 계속되었던 국민의 꿈을 이루어가려고 했다.
1947년 7월에서 9월. 중국 공산당은 중국 토지대강(土地大綱)을 제정한다. 반봉건적 토지 착취를 없애고 농부가 농경지를 가질 수 있는 토지제도를 실현했다. 1년 후 해방구역의 9천만 명에 달하는 농민이 토지를 소유하게 된다.
봉건독재를 근본으로 해왔던 중국 사회에 일어난 큰 변화였다. 농민들은 그 기쁨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고, 중국의 운명을 결정지을 수 있는 힘을 갖게 되었다.
➡한스 반 드 벤 (케임브리지대학 교수)
장개석을 모택동, 손문과 비교해보면, 장개석은 중국 국민이 원하는 미래의 청사진을 확실히 그리지 못했습니다. 또한 민심을 얻는데도 성공하지 못했어요.
(요서·심양 전투, 북경·천진 전투, 회해 전투. 3대 전역에 약 4개월 19일 소요)
국민당의 반내전(反內戰), 반기아(反飢餓), 반독점(反獨占) 운동은 실패했다. 국민당 군대 또한 패배했으며, 장개석 정권과 함께 막을 내렸다.
1949년 4월 23일 중국인민해방군은 남경을 점령한다. 국민당은 22년간의 중국 통치를 끝맺게 된다.
중국 국민당의 패배에 대해 장개석은 이렇게 평가했다.
“공산당의 힘은 전쟁 전에는 보잘 것이 없었다. 하지만 공산당은 우리의 약점을 알아차린 것이다. 공산당이 우리를 이긴 것은 그들의 힘이 강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부패하고 무능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의 약점에 의해 무너진 것이다.”
1949년 9월 21일 제2대 국민정치협상회의가 북경에서 개최되었다. 중국 공산당과 전국에서 모여든 민주 당파, 민주 단체 및 무소속 인사들이 모여 국가의 앞날에 대해 논의했다. 민주혁명중앙위원회 주석 송경령(宋慶齡)은 “역사의 도약”이라 했으며, 민주연맹 중앙 주석 장란(張瀾)은 “오늘부터 중국 국민은 진정한 자신의 주인이 되었다!”라고 외쳤다.
➡모택동 (연설)
여러분, 오늘 우리는 같은 느낌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느낌은 우리의 노력이 인류역사에 기록되고 세계인구의 4분의 1에 달하는 우리 중국인이 세계에 우뚝 설 것이란 것을 뜻합니다.
➡진충지 (중국사학회 회장)
중국인들이 우뚝 서게 된다는 말을 들었을 때의 기분은 우리 중국인만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백여 년 동안 고대하던 일이었으니까요.
➡조나단 스펜스(예일대학 교수)
특별하고 변화무쌍한 역사라 할 수 있죠. 민중의 많은 희생이 따랐지만 더 많은 것을 얻었고 그 결실을 맺었습니다.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이 세워졌다.
1840년 이래 중국 국민이 원해오던 민족의 독립이었다. 마르크스주의와 중국의 현실이 결합된 승리였다. 중국이 나아갈 길은 크게 달라졌다. 국가의 번영과 국민의 행복을 위해 중국만의 새로운 길을 만들어가야 했다.
➡모택동의 건국선언(천안문)
“중화인민공화국 중국인민정부가 오늘 설립됐습니다!”
109년간의 변화를 거치며 중국은 많은 것이 변했다. 북경의 천안문은 역사의 아픔 속에 치욕의 산 증인이었으며, 1919년에 혁명을 일으킨 국민과 함께 했다. 그리고 1949년 가을. 중국은 새로운 공화국을 맞이한다. 이 날을 위해 중국의 국민들은 많은 어려움을 겪어 왔다. 중국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이 날의 영광은 바로 중국 국민들의 것이었다.
1949년 9월 30일 중국이 성립되기 바로 전 날, 공화국의 초대 국가주석인 모택동은 이곳에 비문을 남긴다.
“3년 동안 인민해방전쟁과 인민혁명 중 희생한 영웅은 영원할 것이다. 30년 동안 인민해방전쟁과 인민혁명 과정에서 희생한 영웅 또한 영원할 것이다.”
민족을 통일하고 하나의 공화국을 세우기까지 모든 영웅의 희생은 역사에 기록되었다.
이제 막 사회주의 국가로 탄생한 중국.
그들의 선택은 이 거대한 나라를 어디로 이끌어갈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