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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國史記》의 河川과 地名
대부분의 역사 기록물들은 나라가 안정되었을 때 편찬되지요.
《三國史記》는 묘청의 난을 진압한 이후 편찬된 역사서입니다.
고려 왕조가 안정적이 상황 엇다는 말이며 자신들의 산천에 대한
세세한 정보를 기록할 수 있는 상황임을 의미한다 할 것입니다.
그런데 《三國史記》에 등장하는 地名들이나 河川은 그 위치를 정확히 설명한 것이 없으며
그 이전에는 한반도에 존재하지 않는 지명들과 하천의 이름들 만이 등장합니다.
우리 식민사관자들이 미루어 짐작하고 억지로 꿰맞추어 비정하고 있을 뿐이지요.
《三國史記》는 《구당서》를 motive로 편찬 되었다고 김부식은 밝히고 있습니다.
現傳하는 《三國史記》는 김부식의 《三國史記》의 原本이 아닙니다.
현존하는 《삼국사기》는 조선 초에 한 차례
그리고 조선 중종 때 4차례의 개정을 통해 간행되었으며
현재 대한민국이 소장하고 있는 《三國史記》인 것입니다.
역사서가 간행되었다는 것은 역사서가 처음의 원본의 내용과 달라 졌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제 대한민국 식민사관자들이 주장하는 역사의 논리적 모순속으로 들어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舊唐書》백제의 인구 논리의 모순
※참고로 위 지도를 자세히 살펴 보면 산동반도일대와 하북성 그리고 요녕성 일대는
空地로 그려져 있다 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618년의 당나라 영토는 산동반도일대와 하북성 그리고 요녕성 일대를
영토화 하지 못했다 라는 것이 역사의 진실 입니다.
※필자는 北魏와 隨, 唐의 지배자들은 고구리와 同種同類라는 전제 아래
隨, 唐을 우리 역사라고 해석 합니다.
北魏와 隨, 唐의 지배자들은 원시 투루크 인종이라는 것만은 분명하며 이들 나라들이 우리 겨레인가
아닌가를 따지지 않더라도 北魏와 隨, 唐의 지배자들은 절대로 漢族이 아니다 라는 것만은 분명 하다 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필자는 北魏와 隨, 唐을 우리 겨례의 역사로 간주 하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고구리와 백제를 부각 시키지 않고 역사를 해석한다 라는 것을 전제 하고
필자의 글을 이해하기 바랍니다.
즉, 위 지도는 그나마 역사의 진실에 가장 부합하는 역사 지도인 것입니다.
이것이 왜 중요한가? 하면 산동반도일대와 하북성 그리고 요녕성 일대는 글안과 靺鞨의 땅이며
글안이 역사에 등장하기 이전에는 역사의 기록이 없는 땅이기 때문입니다.
위 지도들은 모두 唐 初 즉, 아직 고구리와 唐朝가 전쟁을 하기 전의 상황을 해석한 지도 입니다.
위 지도들의 공통점은 모두 唐朝 초기에는 당조와 고구리는 국경을 맞대고 있지 않은 것으로
그리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상태라면 고구리 강이식 장군이 무슨 이유로 말갈병 1만으로 遼西를 공격해야 했느냐? 라는 것입니디.
당조의 영토가 627년에는 갑자기 위 지도와 같이 고구리와 당조와의 국경이
遼東과 遼西 사이로 해석되는 것입니다.
그 어떤 역사적 사건도 없이 당조와 고구리와의 국경이 遼河로 구분되는 이유는
遼水라는 하천을 遼河로 해석하기 때문 입니다.
遼水의 조건으로는
1,太原의 북쪽에서 발원돼야 하며
2,遼山에서 발원돼야 하며
3,발원지가 玄菟라야 하는 것입니다.
4,遼水는 고구리 疆域의 한 가운데를 흘러야 합니다.
그러나 지금의 遼河라는 하천은 이 네가지 조건을 단 하나도 충족하지 못합니다.
단언 컨데 지금의 遼河는 절대로 遼水일 수 없는 것입니다.
遼水는 고구리의 한가운데를 흐르는 하천이라는 것임에 비추어 지금의 遼河가 고구리의 한가운데 라면
고구리의 영토는 지금의 遼河를 가운데에 두고 동서로 3100리 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지금의 遼河가 遼水가 아니라는 것은 고구리와 관련된 모든 역사 해석은 거짓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舊唐書》는 백제의 인구를 76만호라고 하였습니다.
唐나라가 어떤 기준으로 1戶를 정했는지는 모르지만
고대에는 씨족을 중심으로 마을이 형성되었을 것이 라는 가정 아래에서
1戶라는 의미는 씨족 중심의 초대형 가족이라는 것이 필자의 생각 입니다.
하지만 1戶를 4人 기준이라해도 76만 戶란 300만명은 될 것이라는 것이며
많게 잡으면 1천만명은 될 것이라는 것이지요.
이것은 고대 인구 밀도를 감안 하면 식민사관적 힌반도 백제 영토에서는 존재 할 수 없는 인구 입니다.
예컨데 조선 후기 때의 인구가 500만이라고 하는 것으로도
식민사관적 백제 인구는 논리적으로는 모순인 것입니다.
백제 인구 76만호의 진실은 오늘날 식민사관적 역사로도 이 기록을 믿지 못하게 하는 이유가
한반도 백제 영토로는 도저히 나올 수 없는 수치의 인구 기록이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1戶는 1人이다" 라는 미친소리에 가까운 주장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때의 국제 정세는 백제가 신라를 거의 멸망 시킬 기세 였지요.
신라는 다급하게 唐에 援軍을 청합니다.
이에 唐 高宗은 신라의 원군 요청을 수락하고 백제 정벌을 단행 합니다.
帝國의 皇帝는 제후적 나라들간의 다툼에 어느 일방의 나라에게
힘을 실어 주지 않고 다만, 조정적 역할만을 할 뿐입니다.
그러나 唐朝가 직접 신라와 백제의 분쟁에 개입하는 이유는 이 시기의 백제는
제국 당조에게 순종적이지 않고 도전적이 였기 때문에
唐朝는 백제 왕조를 교체 하려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 시기의 역사를 영토 전쟁이나 패권전쟁으로 해석하는 것은 역사 왜곡입니다.
帝國은 정벌은 하되 정벌한 땅을 직접 통지 하지 않았습니다.
특히 唐朝는 유목민족의 왕조이기 때문에 인구가 많지 않은 왕조 입니다.
유목민족의 나라는 인구가 적었기 때문에 정벌당한 나라가 朝貢만 받쳐 오면
그 나라가 무슨 짓을 하든지 상관하지 않는 것입니다.
당조는 41개의 都督으로 이루어진 나라 입니다.
41개의 都督들은 독립된 군왕이 통치하며 그 직위를 세습하고
영토와 군대를 보유하고 세금을 징수하는 왕조 입니다.
다만, 세습 과정에서 皇帝의 허락을 받는 과정을 거쳐야 할 뿐입니다.
이 때의 고구리와 백제의 국제적 위치는 당조의 제후국이 였던 것입니다.
다만, 고구리와 백제는 당조의 무력에 의해 굴복된 都督이 아닌
막강한 당조의 국력에 의해 마지 못한 굴복상태 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에 따라 고구리와 백제는 당조에 늘 호락호락한 제후국이 아니였던 것입니다.
국력의 차이에서 어쩔 수 없이 머리를 조아리는 척은 했지만
고구리와 백제의 세습과정에서 당조의 허락을 받았다
라는 기록은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시기의 백제는 우리가 夫餘와 혼동하지 않기 위해 百濟라는 이름으로 해석 하지만
멸망 당시의 백제의 나라 이름은 (南)夫餘 입니다.
溫祚王이 건국한 나라 이름은 東夫餘 입니다.
東夫餘는 衛仇台가 百濟라는 이름의 나라를 건국 하기 이전 까지 사용하던 이름 입니다.
그러나 公孫度의 사위였던 仇台가 238년 曺魏의 사마의에게 정벌당하는 과정에서
東夫餘도 함께 멸망을 했던 것으로 보이며 이때 東夫餘의 왕 仇台가 배東夫餘를 버리고
위례성으로 이동하여 세운 나라가 百濟인 것입니다.
이와 같은 과정을 생략라고 하나의 百濟라는 이름으로 역사를 해석하기 때문에
식민사관자들 마져 百濟 초기 역사를 믿기 어려운 역사가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百濟라는 나라 이름은 238년 이후 衛仇台에 의해 건국 되었다 라는 것은 《隨書》를 비롯한
唐初八史의 모든 기록이 증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동아시아 역사에서 238년 이전의 기록으로는 百濟라는 나라 이름은 존재 하지 않는다 라는 것입니다.
百濟는 근초고왕 때 전성기를 맞이 하였던 것이며 근초고왕은 고구리의 고국원왕을 전사 시키고
遼西 까지 장악하고 漢城으로 遷都를 하였던 것이며 475년 蓋鹵王(개로왕)때에 백제의 문무백관
그리고 백제의 왕족들 모두가 高麗太王에 의해 아차산성에서 참수당하면서
백제는 사실상 멸망하는 것입니다.
이 시기의 국제 상황은 정확하지는 않지만 대략 위 지도 疆域이 형성되었던 것입니다.
이후 漢城 백제는 倭國에서 돌아 온 文園王이 도읍지를 熊津城으로 옮겼다가 538년 聖王 때 도읍지를
泗沘城으로 遷都 하면서 夫餘라는 이름으로 다시 건국 하는 것입니다.
즉, 백제의 通史는 東夫餘⇒百濟⇒夫餘로 이어진 것입니다.
이것을 百濟라는 이름 하나로 묶어 버린 것이 현전하는 《삼국사기》인 것입니다.
위 지도는 隨나라와 고구리가 전쟁하던 612년 시기의 지도 입니다.
멸망 당시의 義慈王은 夫餘의 왕인 것입니다.
당 고종은 "13만 군대를 인천의 덕적도에 상륙시킨다"
라고 우리 식민사관자들은 주장 합니다.
13만명의 精銳兵이 黃海를 단숨에 건너 인천 앞바다의 덕적도에 도달 하였다?
최근 인하대 역사 연구팀이 漢武帝에 의한 위만조선의 멸망 과정에서 漢나라 배로는
黃海를 절대로 건널 수 없다라는 結論을 내렸지만 唐 나라 역시 내륙 국가이기 때문에
唐이 보유하고 있던 艦船은 강에 띄우는 함선이기 때문이 唐나라가 보유했던 함선으로는
西海를 절대로 건널 수 없다는 것이 專門家들의 見解 입니다.
더구나 내륙국가이며 유목민족의 왕조인 당나라는 해군을 보유하고 훈련시킬 이유가 없는 나라 입니다.
중국 역대 왕조는 중국의 동해안인 黃海 연안을 개발하지 않았으며
소금 역시 내륙의 鹽湖인 淸海湖로 부터 공급 받았던 것입니다.
1만여척의 배를 타고 長安을 출발한 당나라 군사들이 단숨에 덕적도에 도착을 했다?
덕적도의 이야기는 《삼국사기》의 일방적인 기록입니다.
《삼국사기》의 원본인 《舊唐書》의 기록은 덕적도에 관한 기록이 없으며
이와 같은 기록 때문에 《삼국사기》가 고쳐진 역사서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당나라의 공격에 의자왕은 신하들을 불러 모아 회의를 하는데 신하인 흥수가 의자왕에게 말하기를
"당군과 신라는 기각(기병)으로 되어 있으니 平原으로 나가 싸우면 승산을 알 수가 없습니다"
라고 《三國史記》는 전하고 있습니다.
흥수의 이 말로 미루어 당군과 신라군은 騎兵(기병)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이며
당나라 병력은 최정예 부대라는 것을 의미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平原으로 나아가서 騎兵隊와 싸우면 안된다는 말이지요.
여기서 평원이란 넓은 벌판이 아니라 平原郡이라는 지명으로 보입니다.
현재 동아시아 역사 해석으로의 平原이라는 지명은 산동반도 平原郡(위 지도)으로 해석하지만
이 때의 백제의 실제 위치는 하남성 남부 일대로 보입니다.
따라서 平原이란 호북성 북쪽의 江漢平原 북쪽을 말하는 것입니다.
추정컨데 이때 당 수군은 배를 타고 漢水를 따라 동쪽으로 내려와서
江漢平原에 도착하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漢水는 관중평원 남쪽인 진령산맥에서 발원하는 하천 입니다.
즉, 唐軍은 騎兵隊라는 말이며 만약 당군이 배를 타고 황해를 건넜다면 당군의 배에는 말이 실려 있을 테지요.
唐軍은 內陸 사람들 입니다
평생 진짜 바다를 구경해 본일이 없는 사람들 입니다.
더구나 당의 戰艦은 長江이나 黃河등 내륙의 하천을 운행하던 50여명이 탈수 있는 작은 배에 불과 했지요.
이런 배에 말을 싣고 황해를 건넌다는 것은 불가능 한 일입니다.
이때 신라왕 김춘추의 직책은 "仍令春秋為嵎夷道行軍總管"이었습니다.
참고 : http://blog.daum.net/omye-mail/973
즉, 이것을 해석하면 隅夷 정벌의 길 안내를 맡은 총사령관이라는 뜻이지요.
"嵎夷(우이)"라는 땅 이름은 《周礼》와 《尚书·堯典》에도 기록되어 있는 땅이름으로서
최초의 嵎夷라는 땅은 靑州를 의미 하는 것으로 보이며
더불어 김춘추의 직책은 唐朝의 41개 都督의 軍閥중의 한명에 불과한 것이며
총사령관인 蘇定方 보다도 아랫 계급이 였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신라왕이였다는 김춘추의 직책은 애국적(?) 식민사관적으로는 이해 할 수 없는 기록인 것입니다.
신라를 唐과 1: 1의 대등한 국가로 보는 愛國的 식민사관으로는
仍令春秋為嵎夷道行軍總管이라는 기록을 설명할 방법이 없는 것입니다.
신라가 唐이라는 외세를 끌어 들여서 三國을 통일 했다는 역사관은 愛國的 역사 소설 입니다.
唐朝의 지배자들은 고구리와 함께 夫餘에서 함께 나온 同種同類이며
拓跋鮮卑族은 眞朝鮮의 후예임을 모른다면 唐朝가 우리 민족의 왕조라는 것을
절대로 이해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즉, 모든 鮮卑族은 우리 민족이며 夫餘之故地에서 함께 나온 우리 겨레인 것입니다.
그러나 대한민국 식민서관자들은 烏桓 鮮卑만을 우리 민족의 원류로 추정 할 뿐입니다.
모든 鮮卑族의 근원이 烏桓 鮮卑 임에도 말입니다,
唐 水軍의 木船
《三國史記》의 기록은 "13만 당군은 목선을 나누어 타고 黃海를 건넜다'라고 합니다.
우리 식민사관자들은 이들 唐軍이 도착한 곳은 인천의 덕적도 였을 것으로 추정을 합니다.
이 당시의 唐 水軍은 보잘것이 없었습니다.
水軍과 海軍은 다르지요.
또한 中原 內陸 國家들의 海라는 槪念을 정확하게 이해해야 합니다.
지금도 중화인민공화국 사람들은 黃河를 黃海라고 부른다는 것을 간과하지 말아야 합니다.
내륙국가들은 黃河와 淮水 長江의 本流를 海라 表現하는 것입니다.
또한 黃海는 中原國家들 입장에서 보면 東海 입니다.
내륙의 中原 국가인 唐이 海軍을 양성했을 이유가 없습니다.
唐이 무엇 때문에 海軍을 양성해야 하는가요?
唐軍은 50여명이 탈 수 있는 木船 뿐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덕물도를 건넜다는 당군의 13만 병력은 말 또한 병력에 필적하는 숫자가
배에 실렸을 테니 병력만을 수송한다 해도 3천여 여척이 필요 했을 것이며
말과 최소한의 보급품과 무기를 합한다면 최소한 배 1만여척이 필요 한 것입니다.
실제로 식민사관자들은 당군이 범선 1만여척을
나누어 타고 황해 바다를 건넜다고 주장을 하지요.
1천년이 지난 후 壬辰倭亂 때 일본이 조선을 침공하기 위해
동원한 군대가 10만여명이고 700여척의 수송선으로 6차례에 나누어
조선에 도착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것을 단 한번에 도착시키기 위해서는 4200여척의 배가 필요하다는 이야기지요.
그러나 현해탄과 황해는 그 거리와 물살 세기등은 그 차원이 다르다고 하며
1천년이 지난 임진왜란 때의 섬나라 일본의 배와 1천년전의 내륙 국가인
당나라 배는 그 규모와 조선 건조 기술이 다릅니다.
천안함 폭침에 여러 의혹이 제기되고 우리 해군도 물살이 센 황해에는
잠수정이 쉽사리 움직이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에서 출발 합니다.
이와 같이 황해의 해류는 山東半島에서는 상상을 초월하는 물살과
산동반도와 한반도의 중간 해역은 아래로 흐르는 해류로 1만톤급 카페리호도
그 해역을 벗어나려면 안간힘을 써야 하며 대련에서 인천까지
꼬박 21시간을 달려 와야 인천에 도착한다고 합니다.
이곳을 고작 50명이 승선 할 수 있는 木船을 타고 13만 당군이 몇칠을 달려 왔다?
만약 걸프 스트림이라도 만난다면 1만톤급 페리도 절절매는데
50여명이 타는 목선을 타고 황해를 건넜다는 당나라 군.
더구나 백제는 로마와 비견되는 해양 제국이었다는데
황해 바다에 1만여척의 배가 떳는데도 해전의 기록을
찿을 수가 없다는 아이러니가 발생하지요.
거기다 당나라는 내륙에 있었던 내륙 국가이며 선비 출신들이
당나라의 지배 계층이였기에 당나라 장수들은 海戰에 능통한
장수가 있을 수 없으며 적벽대전도 바다가 아닌 강위의 싸움이며
이 마져도 적벽대전은 실체가 없는 소설속의 전쟁에 불과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당 군대가 황해를 건넌다는 것은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되는 불가사의한 일이라고 군사전문가들은 말하지요.
요동치는 물살에 멀미를 할 수 밖에 없다고 하는데 고작 50명에서
100여명 태운 목선으로 바다를 구경 조차 하지 못햇을 당나라 군대가
황해를 건너고 말과 같은 동물이 놀라서 움직이기라도 한다면
어떻게 될지는 독자들의 想像에 맡기겠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자랑스러운(?) 식민사관자들은 부득 부득 1만여 척으로
인천 덕적도에 당군이 도착했다 라고 a fantasy novel 을 씁니다.
더구나 당군이 황해를 건넜다는 시기는 장마철인 7월 입니다.
보통 7월은 우기이며 태풍이 한반도에 빈번하게 상륙하는 하는 시기 입니다.
당 고종은 아버지인 태종 이세민의 "정관의치"를 이끌었던
유능한 가신들을 옆에 두고안정된 국가 내정을 운영을 했으며
이러한 힘을 바탕으로 고구리를 종이 호랑이로 만들고
주변의 속국들에 대해서도 강경한 입장을 취했지요.
특히 백제에 대해서는 강경한 입장이었는데 그것은 백제가 고구리와 동맹을 맺고
고종의 영을 무시하기도 하는 것이며 당의 제후국 위치였던 신라를 계속 공격을 하자
이에 사신을 백제에 보내 신라를 공격하지 말라는 조정자 역할을 했음에도
백제가 전혀 굴하지 않았고 오히려 나제동맹 당시 신라가 백제를 먼저 배신했으며
또한 자신의 왕인 성왕을 죽였다는 이유를 말하며
당은 이에 간섭하지 말라는 역 공갈을 칩니다.
643년. 651년, 백제에서 사신을 보내오자
고종은 백제에게 신라와 화친할 것을 요구 합니다.
그러나 백제는 이를 간단히 무시 합니다.
이 당시 백제가 만만치 않은 국력을 보여 주는 대목이며
이때의 백제는 고구리와 동맹관계 였으며 당 태종 이세민이
고구리 정벌에 실패하며 체면을 구긴 상태이기 때문에
백제와 고구리가 호락호락 당나라의 말을 들어 줄리가 없었지요.
오히려 신라의 김춘추(태종 무열왕)가 654년 신라의 왕위에 오르자
신라의 정세가 불안하다고 생각한 백제와 고구리는 655년 정월
신라를 대대적으로 협공하여 33개의 성을 함락시켜 수도인 금성까지 위협 합니다.
이에 신라는 고구리와 백제로 부터 자신을 구해 줄
구원군을 다급하게 당나라에 요청 합니다.
唐은 隨를 이어 中原을 차지하며 中國(the middle kingdom)이 된 것이기 때문에.
唐에 굴복한 40여개의 諸侯國들이 이들의 전쟁을 지켜 보고 있었을 것입니다.
고구리와 백제가 당에게 굴복하지 않고 버틴다면 당은 제국으로서의 체면을 구기게 되는 것이며
이들 제후국들은 언제 당에게 朝貢을 거부하고 대항해 올지 모르기 때문이지요.
역사적으로 중원이 전란에 휩싸이게 되는 원인은 외부의 침략에 의한 역사는 없습니다.
고대 중원이 전란에 돌입하는 이유는 皇帝가 제후들을 통제 하지 못함으로서 일어난 역사 입니다.
唐으로서는 통제 되지 않는 제후국인 백제와 고구리를 손보지 않을 수가 없었지요.
고구리와 백제는 당에 조공을 하지만 언제든지 당에 반기를 들수 있는 나라였습니다.
唐朝로서는 백제와 고구리의 王朝를 교체 해야 하는 이유인 것이고 그래야 中原이 안정 되지요.
마침 백제의 의자왕이 계속된 전쟁의 승리에 도취한 나머지 군사방비를 소홀히 하자,
고종은 백제의 세력이 미약해졌다 판단하고 660년 3월소정방에게 13만군사를 주어
백제를 정벌 하도록 지시한 뒤, 백제의 동맹국인 고구리에서 구원병 보내는 것을 막기 위해
이적에게 고구려 국경지역인 遼水(河東)에 군사를 배치시켜
고구리가 쉽게 움직이지 못하게 조치 했던 것입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 봅시다.
그래도 당군에게 天運이 있어서 인천 덕적도에 무사히 도착을 했다고 가정을 하고 역사를 구성해 보지요.
당나라가 한반도 백제를 공격하기 위해서는 補級品의 確保가 必須的이며
백제를 공격하기 위해서는고구리 영토를 통과해야 하거나
해상을 통해서만 가능한 일입니다.
고대의 전쟁이란 전투 부대가 1이면 후방의 보급 부대는 전투 부대의 2배가 필요 하다고 합니다.
지금이나 옛날이나 상륙작전은 성공하면 적 후방에 깊숙히 침투하여
상대의 진영에 교두보를 확보하여 內戰과 같은 효과를 발생시킬 수 있지만
만약 사전에 이 같은 전술이 발각되어 실패했을 경우에는
상륙부대 모두가 몰살 될 수 있는 매우 위험한 전술인 것이지요.
하지만 백제 역시 만만한 상대가 아니였지요.
당시의 시대 상황은 평생을 전쟁터에서 잔뼈가 굵은 의자왕과
신라 정도는 안중에도 없던 백제가 신라를 공격함으로서
신라는 국가 存亡을 걱정해야 하는 상황이 었습니다.
즉 당시의 동아시아의 국제 정세는 의자왕이 3천궁녀와 더불어 주색잡기로
나라가 위태했다거나 백제가 기울어 가는 나라가 아닌
전성기와 다름 없는 시대를 구가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百濟의 敗亡 過程
여기서 필자는 백제가 어떻게 패망했는가를 말하려 하는 것이 아니라
13만 당군이 목선을 타고 황해를 건넜다는 역사 해석의 허구와
의자왕이 어디서 어떤 이유로 사로 잡혔으며 백제의 수도 泗沘城의 위치는 어디에 있었으며
伯江은 어디에 존재했었는가를 설명하려 함입니다.
唐나라의 首都는 長安(西安) 입니다.
고구리를 멸망 시키기 위해서는 백제와 돌궐을 괴멸 시킬 필요가 있었던 것이며
고구리를 멸망시키는 것은 이 당시의 통일이며 覇權의 완성인 것이며
唐의 諸侯國들에게 당이 어떤 나라인가를 보여 주어야 하는
당으로서는 절체 절명의 대망이기도 한 것입니다.
唐나라가 백제와 고구리를 멸망시킨다는 것은 백제의 영토를 취하겠다 라는 의도가 아닙니다.
어차피 당나라는 자신의 영토를 모두 직접 통치 하지 못합니다.
唐朝의 영토는 41개의 제후국들의 영토를 당조의 영토 하나로 해석한 것입니다.
당조가 백제와 고구리를 멸망 시킨다 해도 그 영토를 직접 통치하지는 못하는 것이며
정벌한 나라의 왕조만을 교체하여 새로운 왕을 임명 해야 하는 것입니다.
결국 당조는 백제를 멸망시킨 후 백제 영토를 馬韓 都督府, 熊津 都督府, 東明 都督府 등,
5개의 都督府로 분할 하여 5개의 새로운 왕조를 세웠던 것입니다.
고구리 역시 9개로 나누어 9개의 都督府의 새로운 王朝를 만드는 것입니다.
이 9개의 도독들을 관리 감독하는 관청이 安東都護府 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都督府는 王朝라는 것을 간과 하면 안됩니다.
이 당시의 동아시아 정세는 고구리가 간신히 당 태종의 공격을 막아 내기는 했으나
고구리는 연이은 전쟁으로 백제와 신라 그리고 돌궐등이 고구리의 속국적 위치에서
독립적 위치로 돌아 섬은 물론 고구리를 막 보고 고구리의 변방을 공격하기도 하는 등
고구리는 그져 그런 국가로 전락한 상태 였으며 당나라에 조공을 해야 하는 등
그 위상이 말이 아니 었지만 당 고종의 최종 목표는 고구리 왕조의 교체 였던 것입니다.
당 고종은 먼저 突厥을 공격 합니다.
돌궐을 공격하지만 돌궐은 유목민족의 나라 입니다.
돌궐은 서역을 버리고 지금의 터어키가 있는 지역으로 위치 이동을 하는 것입니다.
결국 돌궐은 서쪽 오도로스 넘어로 토껴 버리고 지금의 터어키로 이동한 것입니다.
당조의 서쪽 견제 세력인 돌궐이 무너지자 고구리와 백제의 왕조 교체는 시간 문제 였던 것이지요.
전열을 정비한 고종은 신라와 함께 백제를 무너트리기로 결정을 하고
백제 사비성으로 공격을 감행한 것입니다.
《삼국사기》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 합니다.
당군의 진격 루트 기록의 모순
의자왕의 충신 성충은 의자왕에게
"무릇 용병은 지형을 살펴 선택해야 하는 것이니 강의 上流로 나아가서 싸워야 하며
적군이 육로로 들어 오면 침현을 지나지 못하게 해야 하며 수군이 들어 오면
기벌포로 들어 오지 못하게 해야 하며 遼塞를 의지하여 막아야 합니다"
라고 간언 합니다.
우리의 상식대로 라면 배를 타고 왔을 당군은 배를 타고
하류에서 상류로 이동해야 하는 것이 맞는데
당군은 상류에서 하류로 내려 온다는 것입니다.
논리의 헛점안 것입니다.
식민사관자들은 기벌포를 지금의 장항이라고 주장을 합니다.
지금의 장항에 험새("遼塞)가 존재할 만한 곳이 있더란 말인가요?
즉 농경정주민족인 한족들은 평지에 城을 쌓을 수 밖에 없었기 때문에
성을 높이 쌓지 않으면 안 되었을 것이며 고구리와 같은 사람들은
협곡에 의지해서 살았기에 山城을 쌓을 수 밖에는 없었을 것입니다.
즉, 지형을 이용하여 성을 축조하는 것이지요.
본론으로 돌아가 보지요.
《삼국사기》 신라 본국기에는
"당나라는 峽州에서 군사를 거느리고 물길을 따라 東으로 내려 왔다"
라고 기록 합니다.
협주에서 東으로 내려 왔다?
峽이란 깊은 계곡을 의미하는 글자인데 지금의 충청도 어디에
깊은 계곡이 존재하며 협주는 어디를 말하는 것인가요?
중공의 위키백과는 협주를 다음과 같이 설명 합니다.
즉, 협주의 위치는 호북성 宣昌이라는 곳입니다.
그러나 중공의 모든 땅은 확대 이동된 것이기 때문에 위 지도의 위치가 협주는 아니라는 것이 분명 하지만
백제 핵심적 영토가 호북성임을 감안하면 峽州는 호북성 일대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또한 한반도를 흐르는 모든 하천은 동쪽에서 서쪽으로 흐르며
白馬江(錦江) 역시 동에서 서쪽으로 흐르는 하천입니다.
그런데 당군이 동쪽에서 내려 왔다?
다시 말하지만 漢水는 서쪽에서 동으로 흐르다가 長江으로 흘러드는 하천입니다.
지금의 錦江을 白馬江이라고 해석하지만 지금의 금강이
백마강이였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식민사관적으로 보면 신라는 백제의 동쪽에 위치하고 있지요?
따라서 신라군이 백제로 진군하는 방향은
동에서 서쪽으로 이동하는 것이 정상 아니가요?
그리고 "당군이 이미 백강을 지났기 때문에 계백으로 하여 황산으로 보냈다"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부여는 백마강과 붙어 있습니다.
이미 白江을 지난 唐軍은 百濟 首都인 사비성을 향하고 있는 절체 절명의 상황에서
보급 부대인 신라군을 막기 위해 계백을 황산으로 보낸다?
현재 동아시아 역사 해석으로의 黃山의 위치는 安徽省 남쪽으로 해석을 합니다.
단언컨데 지금의 黃山은 지명이동에 의해 거짓으로 비정되는 짝퉁 입니다.
☞ 즉, 지금의 중공이 五岳이라고 하는 산들은 모두 지명 이동에 의해 만들어진 짝퉁들 입니다.
진짜 黃山은 그 위치를 알수 없습니다.
長安과 洛陽마져 가짜로 만든 놈들이 山 하나 짝퉁으로 만드는 것은 일도 아니지요.
위 지도는 식민사관자들에 의해 환빠들이라고 하는 분들이 해석하는 백제의 疆域 입니다.
위 지도는 현재 동아시아 역사가 주장하는 대로 고증하여 해석된 강역으로 해석된 지도 입니다.
중공 역사 학자들이 해석한 현재의 역사 잣대로 그려진 지도가 왜 잘못인가는
다시 말하지만 동아시아 地名移動의 역사를 모르면 위 지도가 왜 거짓이라는 것을 알 수가 없습니다.
물론 결론적으로 말하면 위 지도는 현재 동아시아 역사 해석 그대로 해석된 것이지만
잘못 해석된 지도 입니다.
왜냐하면 현재 동아시아 역사 해석이 모두 위 지도와 같이 해석되었가 때문입니다.
吳, 越을 양자강 남쪽으로 해석하고, 齊, 魯와 泰山을 산동반도로 해석을 하고,
燕을 지금의 북경으로 해석하는 현재 동아시아 역사 해석대로라면
위 환빠들이 그린 역사지도가 어디가 잘못 해석된 것입니까?
역사 환빠들은 지금의 한, 중, 일 강단 사학자들 입니다.
백강을 지났다는 것은 이미 백제의 도읍지인 泗沘城를 향하고 있다는 말이며
수도인 사비성이 이미 당군에 의해 이미 점령되지 않았다면 있을 수 없는 기록 입니다.
또한 "江"이라는 표현은 南朝의 나라들이 쓰던 표현 입니다.
적어도 660년에는長江이 아닌 다른 하천에 江이라는
표현이 사용된다는 생각은 역사의 기본을 무시하는 것이지요.
적어도 당이 668년 고구리를 멸망 시키고 명실 상부한 帝國이 완성되기 전에는
장강 이외의 하천에 강이라는 표현은 보이지 않습니다.
한반도에서 江이라는 표현은 당이 제국을 완성하기 전에는 나올 수 없는 표현입니다.
《隋書》는 백제의 도읍은 "거발성"이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적어도 《隋書》가 편찬되는 시기는 백제가 건재하고 있던 當代임을 간과 하면 안됩니다.
거발성의 위치는 특정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백제에 관해서 정확한 기록임을 증명할 수 있는 기록물이 《隋書》입니다.
또한 《舊唐書》는 백제의 도읍지가 동서 兩城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階伯(계백)의 황산벌 急派 미스테리
그리고 首都(熊津城)가 절체 절명의 순간을 맞이 했음에도 주력부대인 계백의 병력을
黃山으로 보낼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요?
거짓으로 해석되는 현재의 동아시아 역사 해석으로도 백마강은 산동반도에 존재하는 강입니다.
다음은 중공 위키 백과의 白馬河에 관한 설명 입니다.
发源于邹城市中心店镇九龙山南麓的白马泉,西南流经太平镇后进入微山县,
즉, 白馬江은 산동성 서남부인 남사호 수게에 속한 하천이며, 鄒城市 중시에 있는 龍山 남쪽 기슭
백마천으로 부터 발원하여 서남쪽으로 흘러 미산현을 지나 독산호로 흘러 드는 하천 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백강을 지난 당군을 막기 위해 계백을 황산으로 급파했다고 하는 것을 두고
식민사관자들은 지금의 논산을 황산으로 비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는 위 사진의 돌무더기를 黃山 山城이라고 우기지요.
도데체 뭐라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습니다.
당군의 최종 목표는 백제 도읍지인 사비성 아니던가요?
그런데 부여는 백강과 붙어 있는데 당군과 신라군은 백강을 지났다 하니 논리적으로는 성립이 되지 않지요.
만약 계백이 통솔하는 부대가 백제의 최정예 부대이며 결사 항전의 부대라면
사비성의 함락이 우려 되는 상황에서 보급 부대라는 신라의 군대를 막기 위해
황산벌로 나갈 수 없다 라는 것은 전쟁의 상식 아닌가요?
그러나 《삼국사기》는 신라군은 기각(기병)으로 이루어 졌다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한 《舊唐書》는 백제의 都邑地는 兩城이라고 하였습니다.
즉 백제의 도읍지는 두개의 성으로 이루어 졋음을 알 수 있으며
3천 궁녀가 거주 할 수 있는 정도의 거대한 성이었음을 알 수 있는데
지금의 부여는 성이 아닌 소규모 궁궐에 불과합니다.
사실 삼천 궁녀나 낙화암이라는 이야기는 소설속의 이야기 입니다.
조선의 사대부들에 의해 조작된 《삼국사기》에는 삼천 궁녀나 낙화암의 이야기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삼천궁녀와 낙화암 이야기는 나운영의 소설에 등장 하는 픽션적 소재입니다.
이것을 식민사관자들은 正史 처럼 가르치는 것입니다.
상식적으로도 백제의 중심지였다는 충남의 부여와 공주 어디에 3년을 버틸 수 있는성이 존재하는가요?
이렇게 견고한 성이 있었다면 성벽을 쌓았던 성곽이라도 존재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백제를 한반도에만 존재하던 나라로 고정 시켜 놓다 보니 역사 해석을 모두
한반도에 꿰 맞추려는 무리한 역사 해석으로 일관 하는 것일 뿐입니다.
백제 멸망 당시의 백제 지명들은 한반도에는 단 한개도 없지만
대륙의 산동반도와 하남과 절강성에는 기록에 나타나는
백제의 지명들이 거의 모두 나타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한반도 백제 중심설은 3류 소설입니다.
소설을 써도 어느 정도는 이치에 맞아야 하는 것 아닌가요?
그러나 대륙 백제는 멸망했으며 그 다음의 역사는 승자의 손에
기록되며 승자에 의해 좌우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백제의 역사는 조선 중종 때 《삼국사기》의 개정판을 내면서
조선 史家들에 의해 날조된 것으로 보입니다.
이렇게 날조된 우리 고대사는 또 다시 현대를 살아가는 식민사관자들에 의해 2차 조작이 진행 중이지요.
百濟와 新羅는 韓半島에 同時代에 存在한 적이 없다.
위 지도는 당조가 백제를 멸망 시킨지 2년이 지난 662년을 그린 지도 입니다.
중화사관적으로 역사를 해석한다 해도 위 지도는 거짓입니다.
지금의 중공 역사 해석으로의 遼東城은 요녕성 遼陽이라고 주장 합니다.
遼陽은 요동반도 서쪽에 존재 합니다.
安東都護府는 遼東城에 설치된 것입니다.
즉, 安東都護府는 지금의 遼陽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662년의 요동반도는 고구리의 영토린 것입니다.
그러나 식민사관자들은 安東都護府를 지금의 북한 평양이라고 주장 합니다.
중공 역사 해석대로라면 662년의 요녕성 일대를 당조의 영토로 그리는 것은 잘못 해석된 결과 입니다.
결국 지금의 중공 역사 해석으로 위와 같이 영토를 그리는 것은 식민사관자들의 주장을 수용한 결과이며
자신들 스스로가 安東都護府의 위치를 遼東城은 요녕성 遼陽이라고 주장하는 것을 뒤집는 결과인 것입니다.
이 더러운 역사의 중심에는 대한민국 식민사관자들이 있는 것이며
현재 동아시아 역사는 한중일이 야합한 결과물인 것입니다.
우리 역사는 승자인 당이나 신라에 의해 쓰여 진 것이 아니라
조선 사대부들과 식민사관적 강단 사학에 의해 쓰여지고 조작 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어디에 신라 자신이 三國을 통일 했다고 자랑하는 흔적이 존재 하는가요?
백제 멸망전 까지의 신라는 한반도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나라이며
백제 멸망후 한반도 한강의 남쪽은 자연 스럽게 신라의 영토가 되었던 것입니다.
즉, 백제 멸망 이전에는 신라는 한반도와는 아무런 역사 연고가 없었던 것입니다.
백제의 멸망 시기가 660년이며 한반도에서 신라의 유물이
모두 660년 이후의 것들만 나타나는 이유인 것입니다.
百濟의 復興運動과 滅亡
식민사관적 우리 국사는 백제의 수도인 泗沘城이 함락되자 백제의 잔여 세력이
인근의 熊津(공주)에서 3년간 계속 항전을 했다 라고 설명 합니다.
그러나 지금의 부여가 泗沘城이었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으며
지금의 공주가 웅진이었다는 기록 역시 찿을 수가 없습니다.
지금의 강단 사학이 그렇게 추정하여 비정하고 억지를 부리고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이 백제 패망 당시의 地名들이 모두 山東半島에 존재 합니다.
어찌 되었든 항전 5일째 갑자기 의자왕과 그의 수하들이
熊津城의 城主인 禰寔進에 의해서 줄줄이 잡혀 나옵니다.
수하인 예식진의 배반으로 백제의 사직이 문을 닫는 순간이지요.
그리고 의자왕은 김춘추와 김유신등에게 무릎을 꿇고 술잔에 술을 따르는 수모를 겪고
김춘추와 김유신등이 의자왕을 처결할 것을 주장하였으나 의자왕은 蘇定方에 의해
長安으로 압송되 唐高宗은 의자왕을 훈계하고 방면 하였으나
의자왕은 2달 후에 장안에서 허망하게 죽고 말지요.
웅진성의 견고함은 백제가 망한 후에도 3년이나 함락되지 않고
백제 부흥 운동을 주도 했다고 식민사관자들은 주장하고 있으나
지금의 공주 어디에 3년이나 항쟁을 할 수 있는 견고한
험새의 흔적이라도 있는가요?
왜국에서 백제를 돕기 위해 온 일본 백제 군사 4만 7천과 伯江 전투를 마지막으로
백제는 "서서히 소멸되었다 " 라는 기록을 마지막으로
백제(부여)는 영원히 역사에서 사라 집니다.
이때 까지 동양의 어느 역사서에도 日本이라는 이름은 등장하지 않습니다.
즉, 일본이라는 이름은 백제 멸망 이후 710년에 처음 나타나는 이름인 것입니다.
이때의 왜는 일본 열도 아니다.
日本이라는 이름이 보이기 시작하는 때는 백제 멸망 후 부터 입니다.
《舊唐書》와 《新唐書》는 《倭國列傳》과 《日本列傳》을 분리하여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日本과 倭國이 본질적으로 다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한반도 삼한과 가야 라는 역사는 존재 할 수 없으며 식민사관의 골격 입니다.
이때의 왜는 長江 중.하류에 존재 했었으며 지금의 타이완
역시 탐모라국이라는 이름의 백제의 영토 였습니다.
지금의 일본이 소위 말하는 삼한을 한반도 남부로 설정하는 이유가
자신들이 馬韓의 후예라는 역사성 때문 입니다.
하지만 馬韓의 위치와 범위는 정확하게 특정 할 수는 없지만
지금의 四川盆地 일대를 중심으로 위 지도의 범위 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분명한 것은 馬韓은 물론 三韓은 절대로 한반도일 수가 없습니다.
한반도 어디에 배만한 대추가 열릴수 있으며 무덤과 같은 주거지가 존재 할 수 있으며
겨울에도 여름 음식을 먹을 수 있다는 말인가요?
역사 기록으로의 마한은 절대로 지금의 한반도와는 전혀 관계가 있을 수 없습니다.
다만 초기 백제의 영토가 지금의 호북성과 호남성 일대로 보이는 이유는
현재 동이사아 역사가 해석하는 역사 공정에 의해서 입니다.
즉, 荊山의 위치 비정을 지금의 호북성 일대로 비정 함에 따라
마한의 범위가 지금의 호북성과 호남성 일대 까지로 보이는 것입니다.
즉, 현재 백제 전성기의 영토가 대륙의 2/3인것 처럼 보이는 이유는
중공의 역사 공정에 따른 것입니다.
또한 辰韓의 위치는 漢中汾地 일대 입니다.
洛陽 北邙山의 백제 무덤의 진실
일전에 예식진의 무덤이 洛陽 北邙山에서 발견 되었다고 합니다.
北邙山은 後漢 이후 중원의 중심이라는 洛陽 북쪽 10여리에 있는 야트막한 산이며
괘대 황제들과 황족들만 묻힌다는 산 입니다.
그런데 당조에 의해 멸망한 백제의 의자왕과 부여융의 무덤이 발견되고
에식진의 무덤도 발견되었으며 연개소문 일가의 무덤도 북망산에서 발견 되었다 라는 것입니다.
당조는 어찌하여 자신들이 패망 시킨 나라들의 왕과 왕족들을 북망산에 묻히도록한 것일 까요?
물론 당조 때의 洛陽은 중요한 도시이기는 하지만 변방의 도시이기는 하지만
제 2의 수도로서의 기은을 하던 도시 입니다.
《신당서》및 《삼국사기》에 입전된 흑치상지 열전에서는 의자왕 때 벼슬은 달솔로서
風達郡의 郡將을 겸하고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백제 멸망 직전의 인물들은 하나 같이 한반도와는 관계가 없는 인물들 뿐입니다.
백제와 고구리의 지배 계층 사람들이 훗날 당나라를 위해
혁혁한 전공을 세우면서 당나라의 최상위 계층을 형성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을 두고 "민족적 변절"로 보는 경향도 존재 합니다.
당을 우리와 다른 異民族의 역사로 인식하기 때문이지요.
당나라의 지배자들은 고구리와 同種同類의 종족들입니다.
만약 우리가 통일 되고 북한 고위 관리였던 사람이 통일 대한민국을 위해 일을 한다면
더 먼 훗날 우리 역사는 그 북한 출신 고위 관리를 변절자로 볼 것인가요?
13만명을 실어 날랐다는 작은 목선으로 백제 부흥운동을 진압하기 위해 동원 됐던
당군은 40만명이라는데 이 병력은 어떻게 황해를 건넛다는 말인가요?
고구리는 백제 멸망후 8년만인 668년 멸망 합니다.
나당 연합군이 3년동안 공격을 했어도 함락시키지 못했다는 임존성은
지금의 예산 대흥이라고 하는데 도데체 그 난공 불락의 요새인 임존성이
예산의 어느 곳이 난공불락의 요새라는 말인가요?
적어도 백제 땅이었다는 충남에는 난공불락이 될만한
험한 요새는 보이질 않으니 말입니다.
서기668년 백제가 멸망하자, 일본 땅의 백제 사람들은 《日本書記》 천지 전황기에
"백제의 이름이 오늘로써 끊어 졌으니 선조의 무덤을 어찌 오간다 말인가?"
라고 탄식했다고 합니다.
이것은 4만 7천여명의 왜군을 이끌고 본국 백제를 돕기 위해 백강 전투에 나왔다가
당군에 참패를 하고 돌아가는 倭軍의 선봉장인 의자왕의 또 다른 아들인
부여풍이 했던 말로 전해 집니다.
그런데 이때의 4만 7천명의 왜군이 정말 현해탄을 건너
지금의 금강 하구로 들어 왔다는 것일까요?
1천년이 지나 임진왜란때의 왜군도 한반도를 돌아
직접 한양 근처에 상륙할 생각을 못했습니다.
만약 왜군이 한양 근처에 상륙 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구태여
부산 앞바다를 통해 한양으로 올라 오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1천년 전의 부여풍의 4만 7천의 왜군이 금강 하구에 도착을 했다?
이 때의 사건은 일본 열도에서 4만 7천의 병력을 동원 한다는 것은
일본 열도의 전군을 동원 했다는 말이 되는 것이라는 것이지요.
그러나 《日本書紀》와 《三國史記》는 다같이 이때의 상황을 기록하고 있기 때문에
이 기록은 허구적인 사실이 아닌 것입니다.
다만 이때의 倭를 일본 열도로 비정하고 역사를 해석하는 것이 무네이지요.
즉, 일본 열도에서의 일본의 건국은 백제 멸망 후 710년 부터인 것입니다.
일본은 538년 부터 710년 까지를 飛鳥時代(아스카) 라고 하지요.
즉, 飛鳥(새가 날다)라는 의미는 자유로운 독립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538년은 백제 聖王이 百濟라는 이름을 버리고 夫餘라는 이름으로 거듭 나던 해 입니다.
475년 백제는 개로왕 때 고구리의 고려태왕에게 개로왕과 문무백관 그리고 왕족들이
모두 아차산성에서 참수를 당함으로서 사실상 멸망이 이른 것입니다.
그후 백제는 명맥만 이어 오다가 聖王 때에 새로운 왕국을 만든 것이며
538년 독립적 위치에 서게 되엇던 것입니다.
그리고 668년 백제 멸망 후 독자적인 독립 상태에 들어 간다 라는 다이호 율려을 반포하고
710년 일본이라는 이름으로 독립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현재의 동아시아 역사는 발해의 영토를 위 지도 처럼 비정하지요.
이름만 발해 일뿐이지 발해국의 영토는 勃海를 조금도 걸치지 못하고 있지요.
그런데 勃海가 산동반도의 登州라는 땅을 공격했다 라는 기록이 존재 합니다.
거짓으로 해석되는 현재 역사 해석으로도 登州는 산동반도 북단입니다.
그렇다면 도데체 발해만을 접하고 있지 않은 발해는 어떻게 등주를 공격 했다는 말입니까?
그 후 산동 반도는 이정기의 濟로 분리되는 것이며 이정기의 濟는 唐朝와 갈등을 빚다가
신라 3만 기병대의 공격으로 이정기의 濟는 60여년의 짧은 생을 마감 합니다.
이 때부터 산동반도는 신라의 영토가 되는 것이며
이때부터 신라는 당조로 부터 제해권을 부여 받고
화려한 해상왕국으로 거듭났던 것입니다.
우리 식민사관자들은 신라가 이정기의 제나라를 공격하고
그 땅을 취한 역사를 철저하게 감추고 있습니다.
식민사관으로는 신라가 산동반도의 제나라를 공격한다는 것을 불가능하며
더구나 산동반도를 신라가 차지 한다는 것을 있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舊唐書》 백제 멸망과정의 마지막 기록은 "백제의 種이 서서히 끝겼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백제 왕조는 북방계 이지만 백제를 구성하고 있던 백성들은 倭人들이 다수 였던 것으로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