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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제도 문화유산답사기
글: 별빛촌닷컴 이원석
사진: 카페지기 옥건수
새벽 3시...
서울에서 내려온 친구놈이랑 걸팡지게 놀다가 집에 들어 온 시간이다. 낼 답사를 위해 간단한 준비물을 챙겨두고 서둘러 잠을 청해야 한다. 아침부터 진행되는 답사도 답사거니와 답사내내 운전도 해야하기 때문이다. 거제도 답사에 대한 설레임으로 잠이 쉬이 오질 않는다.
어느새 아침이다. 어이쿠나 늦었다. 서둘러야겠다. 곤하게 자고 있는 친구놈을 깨워 서둘러 동대구역으로 향했다. 친구놈도 서울로 올라가는 기차표를 예매해 놓았고 충방에서 9시쯤에 도착하기로 했다. 친구놈을 동대구역에 내려놓자 말자 가람님이랑 다예님이 온다. 오랜만에 일상에서 탈출해서인지 다예님의 얼굴 표정이 싱글벙글이다. 회사일로 많이 바빠서인지 답사에서는 오랜만에 얼굴을 본다.
다시 동부버스터미널로 가서 강마담님, 쥬디님, 경주지킴이님을 태우고 다시 화원 IC로 가서 대가야님과 잔다르크님를 태웠다. 우리얼민들 정말로 약속은 정말로 잘 지킨다. 시간이 되자 속속 배낭을 매고 나타났다.
마산 내서 IC에서 만나기로 한 산하야님이 길을 잘못들어 진주방면으로 많이 갔단다. 어쩔수 없이 기다려야겠다. 여러가지 경제 사정상 차 한대로 움직여야 하기 때문이다.
기다리는동안 답사내내 필요한 물품들을 하나로마트에서 구입하기로 했다. 한참 길을 돌아 온 산하야님은 아침부터 황당했는지 상기 된 모습이다. 9인승 차에 답사인원 9명... 조금은 복잡하지만 화기애애한 분위로 웃고 떠들고 신명이 났다.
내서 IC를 나와 진동까지 시원하게 뚫린 국도를 따라 고성IC에서 다시 통영까지 40여분의 시간밖에 걸리지 않았다. 예전에는 마산 시내를 경유해서 가느라 마산시내에서 30여분의 시간을 보냈는데 이제는 훨씬 오가는 시간이 단축되었고 수월해졌다.
부산에서 서울까지 가장 빨리 갈 수 있는 방법은 사랑하는 사람이랑 가는 것이란다. 정겨운이들이랑 떠나는 답사는 이래서 항상 기분이 좋다. 견내량 바다가 보이는 구거제대교까지 너무나도 금방이다. 차를 등대가 보이는 뚝방으로 내렸다.바다에서 불어오는 해풍으로 조금은 추웠지만 넓은 견내량 바다를 보면서 점심으로 끓여먹는 라면맛은 정말이지 잊을 수가 없다 .
모두들 추위를 달래기 위해 소주를 한잔씩 들이키며 캬~~소리를 연발한다.
모두들 배가 고팠는지... 정말로 잘 먹는다. 라면에 밥까지 말아서 김치랑 먹으니 꿀맛이다. 거기에다 예전에 이순신장군이 왜적을 격퇴했다는 견내량 앞바다를 바다보며 먹는 라면맛이라니.. 배도 부르고 술도 한잔 걸치고 다들 흥이 올랐다. 웃음소리가 커졌다.
2. 아양리 3층 석탑
하지만, 서둘러 가야한다. 대우조선해양안에 있는 아양리 3층석탑을 보기위해 대우조선에 견학신청 약속을 3시쯤 해두었기 때문이다. 대우조선해양 경비실에 간단한 절차를 거치고 차량으로 넓디넓은 조선소내를 한바퀴 휙~돌고 아양리 3층 석탑을 보러 갔다.
무재해 안전탑 옆에 그 수많은 세월의 흐름속에서도 조금은 무심한 듯 덩그라니 탑이 서 있다. 부재들이 많이 깨어져 없어지고 본연의 모습이 아닌 것들이 많아 애처롭기까지 하다.
아양리 3층 석탑은 경상남도문화재자료 제33호(1983. 8. 6)이다. 이 탑이 서있는 곳은 신라시대 법률사, 고려시대 은적사란 큰절이 있던 곳이다. 이 탑은 1935년 박학중이 탑골에서 경작중 발견하여 이곳에 세운 것으로 높이 303cm이며 석탑의 재질은 연화강암이고, 옥개석 부분은 신라의 일반적인 3층 석탑과 비슷하다.
발견 당시부터 기단부는 사라져 었었으며 2층 3층의 몸돌도 탑을 옮겨 세울때 새로 만들어 놓은 것이다. 3층의 옥개석은 원래의 것이며 상륜부는 어설픈 돌덩이를 올려두어 부자연스럽다. 몸돌에는 후대에 새겨진듯한 명문이 쓰여져 있다. 아마 불심을 이용하여 소원성취를 바랐는지 모를 일이다. 층간 받침의 조각 수법은 우수하나 대체적으로 조각수법이 떨어지는 편이다.
3.지세포성
봄 소식은 이미 왔는데 날씨는 생뚱맞게도 바람도 많이 불고 여전히 쌀쌀하다.
가기로 했던 대금산은 일정도 많이 늦어졌고 왕복 거리도 멀어서 아쉽지만 다음으로 미뤘다. 지세포는 사전답사때 제대로 못 보았던 곳이라 찾을 수나 있을지가 걱정이었다. 하지만, 멤버들이 먼저 앞서서 길을 개척하고 있었다.
바다가 해안쪽으로 난 성벽위로는 성벽을 기초로 하여 일반 민가들이 밀집해 있다. 입간판이 보이는 옆길을 따라 길을 오르니 조그마한 밭에서 할머니께서 봄초를 캐신다. 산성의 위치를 여쭸더니 모퉁이를 돌아 가면 산성이 나온다고 소박한 미소로 답해주셨다.비록 길은 좁고, 이름모를 들풀로 우거져 있었지만, 비교적 다니기엔 수월했다.길가에는 이곳에서만 이름모를 꽃들이 군락을 이루고 있었는데 정말로 소담스러웠다.
마침내 무너진 산성이 모습을 들어냈다. 비록 지금은 무너지고 갈대숲속으로 많은 모습을 감추고 있지만, 산성의 웅장함은 그대로 드러나 보였다.
지세포산성은 조선 12대 인조 1년(1545) 외환을 우려하여 영남 6군 2만5천명을 동원하여 축성한 것으로 임진왜란때 강지욱이 왜장 가등청정과의 싸움에서 패전, 성이 함락되어 성을 폐하였다가 조선 17대 효종 2면 만호진으로 다시 복구하였다.
현재는 성둘레가 1.1km정도 남아 있으며 직접 올라가 본 산성에는 성을 돌아가며 사이사이에 7개정도의 치가 있고 대마도가 보이는 해변쪽에는 옹성이 만들어 있어 상당히 잘 만들어진 성임을 알수 있었다. 그리고, 내성 앞 부분에다가 지금의 참호 모양을 내성과 함께 나란히 만들어서 외성의 형태로 만들어져 있다. 외성의 형태인 이것은 파낸 흙으로 둔덕을 만들었으며 다시 돌무더기로 견고하게 쌓았다. 1차 외성에서 전투를 하고 밀리면 다시 외성으로 들어오는 그러한 방어전략으로 만들어 진 것 같았다. 성을 둘러서는 산책하기에 편리하게 돌계단을 잘 정비해 두어서 탐방객들에게 편리하게 해두었다.
사전답사때 제대로 못 본 탓인지, 아니면 산성의 위용 그리고 위치, 전망탓인지 나의 마음은 지세포성에 홀딱 뺏기고 말았다. 정말이지 움직이기가 싫었다.
마냥 산성의 돌무더기에 걸터앉아 아래로 내려다 보이는 지세포를 바라만 보고 싶었다.
4.서이말 등대
떨어지지 않은 발걸음을 억지로해서 서이말등대로 향했다. 서이말등대는 원래 일정엔 없었지만, 대금산을 가지못하는 대신 여유의 시간이 좀 남아 바로 가보기로 결정한 곳이었다. 지세포에서 벗어나 서이말등대라는 이정표가 보이는 곳을 향해 차를 몰아 내려갔더니,막힌 길에 등대는 보이지 않고 한국석유공사 정문이 나타났다.
서이말등대를 가려한다니까 다시 돌아서 언덕배기에 있는 초소에 가서 문의를 하라고 하셨다. 출입제한구역인가 싶어 망설이다가 문의나 해보자 싶어 했더니, 방문 목적등을 상세히 기록한 후 출입을 허락해 주었다. 어쨌던 출입제한구역을 간다는 생각으로 기분이 묘했다.
해안선을 따라 겨우 차 한대정도 들어갈 수 있는 길은 너무나 아름다웠다. 이렇게 아름다운 길을 가는데 출입제한을 받아야하다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다.
아름다운 숲길을 지나 오른쪽으로 펼쳐지는 다도해의 절경을 보고 우리는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차에서 뛰어내려 감탄사를 연발했다. 멀리서 가끔 그 유명한 외도를 보기는 했지만, 이렇게 한 눈에 외도, 내도 그리고 멀리 해금강까지 보기는 처음이었다. 다도해의 아름다운 섬들이 나란히 한눈에 보이는 풍경은 그야말로 절경... 감탄, 감탄 그 자체였다.
가슴속에 일렁이는 감흥을 가슴에 품고 서이말등대로 향했다. 섬의 말단부에 위치한 서이말등대는 하얀색으로 너무나도 깨끗하고 단아하다. 서이말등대에 계신 직원분의 친절한 안내로 등대까지 올라가 볼 수 있었다. 세차게 불어오는 해풍에 오래 머물수는 없었지만, 눈앞에 펼쳐지는 풍경에 잠시도 눈을 뗄수가 없었다. 멀리 부산과 대마도가 보인다고 하셨는데 날씨가 흐려 제대로 볼수는 없었다.
5.공고지
친절한 서이말등대를 뒤로하고 다음은 종려나무숲이라는 영화촬영지로 유명한 공고지로 향했다. 공고지의 공은 나루터 공, 고는 곳이라는 뜻이라고 공고지의 주인 할아버지께서 설명해주셨다. 그 옛날에 내도, 외도 그리고 육지를 연결하는 나루터가 이곳에 있었다고 하셨다.
외도가 두 부부의 노력으로 아름다운 정원을 만들어 지금은 최고의 관광지로 각광을 받고 있다. 여기 공고지도 외도와 조금은 닮아있다. 외도와는 달리 정형적으로 잘 꾸며지지는 않았지만, 할아버지께서 40년동안 이곳에 사시면서 숲을 가꾸기 시작하신게 오늘에 이르렀다.
가파른 산길을 따라 고개를 넘고 공동묘지를 지나면 터널처럼 조성된 아름다운 숲이 나온다. 계단식으로 가파르지만, 온갖 꽃나무들로 조성되어 있어 마치 천국으로 향하는 문처럼 아름답다. 천국으로 향하는 문을 지나면 할아버지가 사시는 민가가 보이고 바로 바다가로 이어진다.바닷가에는 커다란 몽돌이 너부러져 있는데 거센 파도를 대비해 몽돌로 이중담을 쌓아올렸다. 여기저기 거센 파도로 인해 입은 흔적들이 널려 있어 마음이 아팠다.
아무도 없는 봄 바다에 앉아 한참이나 명상에 잠겨 있었다. 여유로움...
이것이야말로 내가 원하는 삶이 아닌가... 해는 어느새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6.거제자연휴양림 그리고 휴식
공고지를 떠나와 숙소인 거제자연휴양림으로 향했다. 이쁜 몽돌로 유명한 학동해수욕장에서 우측으로 난 길을 택해서 구비구비 올라가 고개를 넘자마자 거제 자연휴양림은 아담하게 자리를 잡고 있었다.
휴양림의 특색인 숲속에 위치한 콘도는 주차장 그리고 외부 식사공간 등 여러가지로 편리하게 준비되어 있었다. 오랜만에 온 다예님의 요리 솜씨로 다양한 메뉴들이 상위에 올려졌다. 특별히 된장찌게의 맛은 그야말로 일품이었다.
저녁을 거나하게 먹고 식곤증탓인지 나이탓인지 잠이 쏟아졌다. 가람님이 자그마한 윷을 만들었고 쉬는 사람을 제외하고 팔뚝때리기 윷놀이가 시작되었다.
웃고 크게 소리지르고 난리법석이다. 산하야님은 내리 연달아 몇번이나 맞았는지 오늘 아무도 잠 못 잔다고 난리다. 잠깐 잠을 잤나보다. 다시 깨어보니 주변이 적막하다. 모두들 잠자리에 들었나 보다. 그때부터 또 혼자의 시간이 되었다. 답답함에 밖으로 나왔다 의외로 거제도의 밤은 따뜻했다.
7.학동해수욕장 그리고 해금강 일대
아침에 일어나 또다시 다예님의 요리솜씨.. 어제 저녁 반찬보다 아침이 훨씬 더 풍성하다. 고갯마루에서 바라 본 학동해수욕장의 물결은 밝은 햇살로 반짝반짝 보석처럼 빛났다. 앙증맞은 몽돌은 파도에 밀려 자그락 소리를 내며 마치 우리에게 잘왔다고 속삭이는 듯하다.
해금강으로 향하는 길가에는 동백나무 숲이 울창했고 주변으로 펼쳐지는 바다 풍경은 수려했다. 역시 우리의 산하는 금수강산이라는 말이 있듯이 보면 볼수록 아름답고 수려하다. 신선대 전망대에는 신선한 바람이 불어오고 나의 마음은 바다를 닮아 옥빛으로 반짝인다. 신선대 아래쪽에는 벌써 유채꽃이 꽃망울을 터뜨리고 있어 봄처녀를 유혹하듯 살랑인다.
신선대에서 우측으로 난 길을 통해 바람의 언덕으로 향했다. 바람의 언덕도 수많은 영화와 드라마의 촬영지여서 특별히 연인들이 많은 듯 했다. 우리처럼 단체로 몰려다니는 이들은 별로 없는듯..
세차게 바람이 불어온다 . 저멀리 산하야님이 바람을 맞으며 바람의 언덕 가장자리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다 .아마 영화라도 한편 찍고 싶은 모양이다.
거제도 앞바다는 보면 볼수록 수려하다. 끝인가 싶으면 이어지고 또 이어지고...
다시금 율포해수욕장으로 난 비포장길을 택해서 들어섰다. 바닷길을 따라 이어 진 정겨운 비포장길은 다도해를 가장 가까이서 볼수 있는 장소인 것 같다.
하늘은 맑고 푸르러 옥빛 바닷가에 떠있는 다도해의 아름다움은 더욱 정겹다.
볼에 스치는 바람을 맞으며 전망대에서 마냥 머나먼 곳을 향하여 바라보니 멀리서 섬이 보인다. 저게 뭐냐고 물으니 대마도란다. 우리땅에서 불과 57km정도의 거리밖에 떨어져 있지 않는다하니 아무래도 우리가 찾아와야할 우리땅이 아닌가 싶다. 대마도는 우리땅이나 진배없다. 일본이 노략질한, 그리고 건너간 우리의 문화가 고스란히 가있으니 말이다.
8.가배량성
비포장길을 벗어나 아스팔트길을 달려 가배량성으로 향했다. 율포에서 가배량성은 거리가 멀어 한참을 달려 갔는데 다들 노곤한지 졸고 있었다. 가배량성은 임진왜란때 이순신장군이 전략적으로 아주 중요하게 이용했던 요새지로 그 당시에 쌓았던 성곽이다. 이순신은 우수영을 한산도 두억포에서 전라도 녹도로, 다시 진도경으로 옮겼다가 거제 가배량으로 옮겼다.
현재는 성을 갈라서 지방도로가 뚤렸고 성벽은 많이 허물어지고 잡초가 우거져 면밀히 살펴보지 않으면 성곽을 찾아볼수도 없다. 하지만, 좀 더 가까히 가보면 성곽의 웅대함을 느낄수 있고 지형지세에 따라 적절하게 조성된 성곽임을 알수 있다. 성곽 바로앞에 양계장인듯한 움막이 운영되지도 않은체 방치되어 있어 주변 경관을 심하게 훼손하고 있었다.
작은 길을 따라 성곽에 올라보니 그야말로 대단한 요새임을 알수가 있었다.
마을과 바다에 경계로 한 지형지세를 이용하여 성곽을 쌓았는데 그 위세는 더욱 당당해 보인다. 바다로 향하는 가장 좋은 곳에 치를 설치해 적의 출현을 감시 한 흔적이 보인다. 주변 정리를 하여 보존한다면 우리의 문화유산이 더욱 빛날텐데 하는 아쉬움이 맴돌았다.
9.기성관과 질청
기성관과 질청은 지금의 면사무소옆에 위치해 있으며 건물 입구에는 버스정류장으로 지정되어 많은 왕래객이 시내버스를 기다리고 있었으며 주변에는 그 지역에서 나는 생산물들을 파는 작은 시장이 형성되어 있어 정겨움을 더하고 있었다. 아쉬운 것은 질청 입구문이 자물쇠로 굳게 닫혀 있어 담장 너머로 건물 안을 엿볼수밖에 없었다.
주말을 맞아 거제를 탐방하러 온 외지인에 대한 배려는 전혀 찾아 볼 수 없는듯 하였다. 물론 관리상 어려움이 있어 자물쇠로 닫아 두었겠지만, 편의주의적 문화재관리는 생각밖에 들지 않아 상당한 아쉬움으로 남는다.
거제면 동상리에 위치한 기성관은 1489년 조선 성종20년에 거제현이 부로 승격되면서 동시에 거제 7진의 통활영으로 고현성내에 건립되었다. 그러나, 고현성이 폐성이 된 이후 거제면으로 이전된 기성관은 한때 삼도수군통제영이 거제에 설치되었을 때는 거제현의 부속건물 객사인 영빈관으로 이용되었고, 한일합방 이듬해에는 거제국민학교의 교실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건평 265m2에 고목이 울창한 고대위에 층단식으로 축조된 기성관은 본관과 외삼문, 석축기와 담장이 매우 세련된 고전미를 잘 간직하고 있어 경남 4대 누각인 촉석루, 영빈관, 영남루, 기성관중의 하나이다.
건물의 특징은 이조(1488년)시대의 자연적 배합법을 중시 하여 우아한 고전미를 간직한 층단식이며 이중지붕에 팔작으로 고대위에 건축하고 아름드리원목을 써서 형태의 중장미, 선의 개방과 남아식 불화단청으로 국내에서도 보기드문 수법으로 그 예술성이 더욱 높게 평가되고 있다. 1974년 복원하여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81호로 지정 관리하고 있으며, 경내에는 울창한 고목과 1663년 이래 송덕행적비군 14기를 집결하여 건립한 곳으로 석축 기와 담장과 3문이 있어 그 역사적 가치가 높다
기성관과 같이 거제동헌의 부속건물인 질청은 지금의 행정사무실 또는 도서관과 같은 역할을 했으며, 고을원님 자녀 및 관리들의 자녀가 공부하던 곳이다 거제면 동상리 기성관 앞(거제초등학교앞)에 있는 'ㄷ'자형의 기와집이다. 현재 이 건물은 'ㄷ'자 형태 건물로 양 날개부분에 주거용 방을 두고 중앙부에 대청을 둔 건물이다. 무엇보다도 전면 5칸, 총15칸이 넘는 중앙의 대청은 그 유래를 찾아보기 어려운 건물형식이다.
이 건물은 규모면에서도 특이하지만 평면구성으로 볼 때 대규모의 중앙대청과 양 날개 부분의 여러 개 방들이 다채롭게 배치된 우진각 형태로 이조중엽의 우아하고 정중한 건축법을 따르고 있다. 1982년에 해체복원하였으며, 지정 전까지는 거제등기소로 사용해 왔다
대지 1,040m2(347평)에 건물이 69평으로 우진각의 형태에 다포집의 구조로 되어 이조 중엽의 우아하고 정중한 건축법을 따르고 있다. 1976년 2월 16일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46호로 지정되어, 1982년에 해체 복원하였다.
9.옥산금성
면소재지를 약간 벗어나 면소재지 언저리 부분에 우뚝 쏟은 산위에 조그마하고 아담한 정자가 눈에 확 띈다. 그것이 수정봉 옥산금성이다. 옥산금성을 바라보고 우측길을 택해서 돌아갔다. 비록 길도 가파르고 넓지 않은 길이었지만, 콘크리트 포장이 다 되어 있어 올라가는데는 아무런 문제가 되질 않았다.
길은 산정상부 산성입구까지 이어져 있고 성입구에 있는 주차장이 좁아 주차하기가 힘들다. 산성 입구를 동쪽으로 해두었는데 들어가자마자 'ㄱ'자 모양의 옹성 형태를 만들어 두었다. 아마 적이 침입했을때 바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기 위고 적을 혼란케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성입구에는 여기저기 큰바위들이 자연스럽게 너부러져 있고, 평지가 조성되어 있는걸로 봐서는 군사훈련장과 창고 등 건물이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바위들 기초로 하여 이 산성의 축성비가 우뚝 서 있어 이 산성의 역사를 알리고 있다.
최근에 복원한 듯한 정자는 콘크리트로 조잡하게 만들어져 있었지만, 멀리 들녘과 해안선을 따라 이어진 조망들이 한 눈에 다들어와 적을 침입을 감시할 수 있었을 것 같았다.
그야말로 거제 앞바다와 넓은 들녘에 한 눈에 볼수 있는 천혜의 요새이다.
그렇다면, 이 성을 축성한 송희승은 충신인가, 간신인가. 진정 나라의 앞날을 걱정하여 미리 대비를 한 것인지.. 백성들에게 부담을 준다고 나라에서조차 금한일을 무리하게 진행시킨것은 무엇 때문인지... 모든일은 무리하면 좋을게 없는 것 같다.
거제면 동쪽 계룡산 밑의 작은 산정의 수정봉(水晶峰) 정상에 위치한 옥산금성은 산성내에 맑은물이 솟아난다고 해서 수정봉이다. 종시 부사 송희승(宋熙昇)이 거제 군민들을 동원하여 쌓은 성으로, 경상남도 지방기념물 제10호이다.직경 40~80m의 장방형 자연석을 끝은 가지런히 하여 산능선의 굴곡에 맞추어 타원형으로 쌓아 올리고 성내의 요소마다 루가, 무기고, 호(壕), 연못(池) 등을 구축하였으며, 동쪽과 서쪽은 성문을 'ㄱ'자 형으로 하여 만들었고, 석단의 층계를 만들어 성내로 출입하도록 하였다.
이 산성의 축성기는 성내 동쪽에 비석을 세워 송희승 부사가 성을 축성하게 된 내역을 상세히 기록하였다. 그 내용을 간략하게 기록하면, 고종 10년 당시 거제부사 송희승이 읍성을 축성할 것을 조정에 건의하였던바 거제는 이미 읍을 3회에 걸쳐 옮겨 백성의 부담이 너무 크다는 이유로 허가치 않으므로, 그 대신 수정봉에다 산성을 쌓을 것을 결심하고 거제도민을 강제적으로 부역케 하고 거금을 각출하여, 8개월만에 석축을 완공하여 이곳에다 군기 및 군량을 비축하고 바다방어에 대비하였다 한다. 후에 조정에서는 군미들의 무리한 부담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하여 송희승부사를 파직하였다고 한다.
10.폐왕성
해안도로를 따라 길을 달렸다. 삼거리가 나오고 오른쪽편에 폐왕성지라는 입간판이 보인다. 마을길을 지나 다시 좁은 농로를 지나고 다시 임도를 따라 가파른 길을 20여분 달려 올라가니까 최근에 복원한 듯한 성벽이 그 위용을 들어낸다.
산성의 둘레는 550m이며 성벽은 5m정도의 높이로 50m정도만 복원을 했으며 동서남북 중 3곳에 성문의 흔적이 엿보인다. 복원된 동쪽외에 나머지 3면은 모두 허물어진 성벽을 그대로 두었다. 예전에는 잡풀이 우거져 있었는데 성벽 안길을 따라 산책을 할 수 있게 산책로를 조성해두었다.
산책로를 따라 조금만 오르니 남문터인 듯한 문지가 보인다. 누군가가 쌓은 돌탑을 곁에 두고 산성의 돌무더기에 올라보니 조망이 너무나도 시원스럽다. 성의 서남쪽으로는 견내량 건너 통영시가 내려다보인다.
의종은 저 바다를 보며 언제 무신세력이 자객을 보내 자신의 목에 칼을 들이댈지 모르는 초조함 속에서 산성을 방비했을 것이다. 통영과 거제도 사이의 바다가 더 멀었으면 하는 바람도 그 초조한 마음 한구석에 도사리고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리 큰 규모는 아니지만 매우 견고했던 성으로 보인다. 성 주위의 마을에 둔전과 마장을 두었다고 한다. 둔전을 둔 마을에서는 농사를 지었으며, 마장에서는 군마를 키웠다고 한다. 또한 성 서북쪽에 오량성을 쌓아 군영을 두고 해상을 감시케 하였다는 사실은 당시 의종이 군사력을 기르며 복위를 꿈꾸었다는 것을 유추해 볼 수 있다. 이러한 사실들로 볼 때 폐왕이 되어 유배당한 의종은 거제도에서 여전히 ‘작은 왕국’의 군주로 행세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는 거제도 주민들을 산성 쌓은 일에 동원하였고, 작은 왕국의 경영을 위하여 세금을 걷었으며, 성을 방위하기 위하여 군사를 징집했을 것이다.
폐왕성은 고려 제18대 왕인 의종(毅宗)의 유배지다. 무신의 난으로 폐위된 왕이 이곳에 와서 잠시 살았다 해서 ‘폐왕성’이란 이름이 붙여졌다는 것을 그 이름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무신들에 의해 폐위되었다 해서 흔히 의종을 연약한 왕으로 생각하는데, 굳셀 의(毅) 자를 쓰는 것을 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다. 그는 오히려 오만하고 독단적이고 포악한 성격의 소유자였을 가능성이 크다.
중국의 포악한 군주로 ‘걸주(桀紂)’를 꼽는데, 의종도 고려에서 방종한 정치를 한 왕으로 첫손가락에 든다. 1146년 고려 제18대 왕으로 나이 20세 때 즉위한 그는 인종의 장남이며, 제2비 공예왕후 임씨의 소생으로 1127년에 태어났다. 어린 시절 이름이 현(晛)이었던 그는 16세 때 태자로 책봉되었으나, 그가 임금이 자리에 앉을만한 인물이 못됨을 안 인종은 태자의 지위를 박탈하려고 한 적도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의 친모인 공예왕후까지도 둘째아들을 장차 후계자로 내세우려고 했었다. 그러나 인종의 신임이 두터운 예부시랑 정습명이 태자를 잘 보필하였다.
인종은 임종 때 “정습명의 말을 따르라”는 유언을 남겼고, 이에 따라 정습명은 태자 현으로 하여금 왕위를 계승케 하였다. 처음 의종은 자신을 왕위에 오르게 한 정습명을 두려워하여 감히 방종의 정치를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재위 5년에 의종은 병중에 있는 정습명의 벼슬을 빼앗아버렸고, 정습명은 그러한 처사에 격분하여 극약을 먹고 죽었다.
정습명이 사망한 이후부터 의종은 마음 놓고 방종의 정치를 일삼았다. 그는 놀기 좋은 곳을 발견하면 별궁과 정자를 지었는데, 그곳이 민가라도 상관하지 않았다.
태평정을 지을 때는 무려 민가 50여 채를 헐기까지 하였다. 정자를 지으면 그 주변에 이름난 화초와 과실나무를 심었고, 기암괴석을 옮겨다 배치하였다.
정자에 청기와를 올리고 받침대를 옥으로 썼으며, 물을 끌어다 폭포를 만들었다. 그가 재위기간 24년 동안 별궁과 정자를 만든 것이 도합 32개나 되었다.
그러니 그 공사에 동원된 인력과 비용만도 엄청난 낭비가 아닐 수 없었으며,
강제노동과 혈세에 시달린 백성들의 괴로움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무신의 난이 일어난 것은 의종의 이와 같은 방종 정치와 무관하지 않다. 물론 당시 문신과 무신 사이의 알력 관계가 직접적인 원인이 되기는 했지만, 연회와 시문을 즐겼던 의종은 아첨하는 3류 문신들과 환관들만 감싸고 돌았던 것이다.
무신의 난을 일으킨 정중부(鄭仲夫)의 경우, 인종 때 초급장교인 건룡대정이 되었다. 그런데 당시 과거에 급제하여 내시직을 제수받은 김돈중이 촛불로 정중부의 수염을 태워버렸을 정도로 문신은 무신을 얕잡아 보았다. 이때 힘이 장사였던 정중부는 김돈중을 붙잡아 흠씬 두들겨 패주었는데, 김돈중의 아버지 김부식이 분노하여 인종에게 정중부의 죄를 묻게 하였다. 그러나 인종이 죽고 나서 의종이 즉위한 후 정중부는 왕의 신임을 얻어 대장군이 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무신은 문신보다 못한 대우를 받고 있는 형편이었다. 정중부가 이고, 이의방 등과 난을 일으켰던 날도 김돈중은 왕과 함께 시를 짓고 노는 문신들 속에 있었다. 문신들이 술에 취해 노는 모습을 아니꼽게 보고 있던 이고는 정중부의 가슴에 불을 질렀고, 결국 무신들은 의종 24(1170)년 8월 29일 보현원 입구에서 문신과 대소 관료들, 환관들을 무참하게 살해하였다. 그 자리에서 용케 도망을 쳐 감악산으로 숨어버린 김돈중도 나중에 정중부의 군사들에게 발각되어 목숨을 잃었다. 당시 무신들에 의해 참살당한 문신만 50여 명이 넘었다. 왕을 수행하였던 내시 10여 명과 환관 10여 명도 달아나다 죽거나 숨어 있다 붙잡혀 참수되었다.
며칠 후 정중부는 의종을 폐하고 의종의 아우인 익양공 호(晧)을 고려 제19대 왕으로 추대하였다. 그가 바로 허수아비 왕 명종(明宗)이다. 한편, 폐위된 의종은 거제도, 당시 행정지명으로 ‘기성현’에 유배되었다. 의종이 거제도로 유배당해 거처한 곳은 현재 거제시 둔덕면 거림리 산 93번지 우봉산(牛峰山)의 중봉(中峰)을 감싸고 있는 산성이다.
이 산성은 의종이 유배를 와서 쌓은 것인지, 아니면 그 전부터 있던 것인지 확인할 길이 없다. 특히 거제도는 왜구의 침입이 잦았던 곳이라, 그들을 방어하기 위해 산성을 많이 쌓았었다. 그러나 왜구의 침입이 잦았던 시기가 고려 말에서 조선 초의 일이므로, 폐왕성은 의종이 유배를 온 뒤에 쌓은 산성일 것으로 추측된다.
11.오량 석조여래좌상
폐왕성을 내려와 견내량을 바라보고 이어진 임도를 따라 차를 몰아 내려왔다.
임도를 다 내려온 부분에 황토방이 위치해 있는데 공휴일이어서 그런지 제법 많은 손님들이 있다 . 다시 좁은 농로길을 따라 산을 바라보고 오르면 산 아래 신광사라는 절이 있다. 이전의 벽담사라는 절이 이름만 바뀌었다.
밑에서 올려다 보면 조그마한 암자라고 생각했지만, 좁다란 길을 따라 절집 마당까지 차량 수십대 정도는 무난히 주차할 수 있을 정도로 절집 규모도 크고 마당이 넓다. 계속 증축되고 있는 이 절집에는 새로 만들어진 커다란 해수관음보살상이 연못가운데 서있고 대웅전도 다시 중수하고 있다. 대웅전은 거의 마무리 단계인듯 단청이 한창이다.
약수를 마시는 곳 옆 언덕에 보면 석굴암을 흉내낸 듯한 건물이 있는데 그 속에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는 불상이 하나 있다. 그 불상이 오량 석조여래좌불이다.
플라스틱으로 조악하게 만들어 놓은 주변 불상들 가운데서 홀로 외로운 이 석조여래좌상은 앉아 계신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새로 화장을 시켜 본래 모습을 잃어버렸었다. 하지만, 지금은 예전의 화장한 모습이라던지 몸에 회분칠은 모두 벗겨내고 원래의 석불모습으로 돌려 놓았다. 얼굴 전체에 마모가 심하고 부처님의 오른쪽 귀도 조금 떨어져 나간 상태였다. 항마촉지인을 한 채 연화문의 상대석 위에 우뚝 앉아 있다.
절 앞에서 농부가 논을 갈다가 우연히 발견했다고 하는 오량 석조여래좌상은 고려초기 쯤의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부처님께 삼배를 하고 석굴을 벗어나는데 웬지 씁쓸한 마음이 든다. 나름대로 석굴암을 본떠 성역화를 시켜 두었지만, 빛 하나 들지 않은 어둠이 짙은 곳에 부처님이 계시니 얼마나 답답하실까 하는 생각에서다. 석굴을 빠져나오자 아까부터 따라 다니던 이쁜 강아지가 또 다시 나를 졸졸 따른다.
12.오량성
신광사를 나와 마을로 들어가는 좁은 소로길을 따라 가다 보면 오른쪽 들판에 무너진 성곽의 잔재가 고스란히 남아있다. 성은 읍성의 형태이며 마을을 둘러싸며 조성되어 있다.
성의 양 방향으로 성곽을 허물고 마을을 통과하는 길을 만들었으며, 현재눈 주민들의 요청으로 견내량쪽 성곽은 거의 복원을 완료하였다. 오른쪽편으로는 마을이 성곽 안쪽으로 형성되어 있으며 마을앞의 성곽위에는 견내량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막아주는 방풍림이 심어져 있다. 방풍림을 지나면 복원한 성곽이 정형화된 모습으로 조성되어 있다.
성 주변에는 축성된 성곽을 따라 전답이 조성되어 있으며 전하는 바에 의하면 사방에 성문이 있었으나 지금은 동문과 북문의 성문을 마을의 진입로로 사용되고 있는 듯 하다.
현재 복원되어 있는 성곽은 너무나도 정형적이고 딱딱하다. 그것의 비교는 마을 입구에서 100M정도를 더 가면 예전의 성곽 모습을 보게 되면 금새 알수가
있다. 지금은 마을과 논의 경계가 되어 버려 치로 보여지는 곳에 쓰레기를 태우는 등 여기저기 오물 투성이지만, 논바닥으로 내려와서 예전의 성곽 모습을 보면 그 자연스런 아름다움에 감탄사를 연발하게 된다. 평지에 성곽을 쌓은 연유로 납작한 돌로 기초를 하였고, 그 위를 커다란 자연석으로 초석을 하였으며 일부러 다듬지는 않았지만, 사이사이 조화를 맞춰 성을 쌓아가고 있었다. 지금은 많이 훼손되어 위 부분은 없어졌지만, 세월의 흔적을 따라 담쟁이가 피워 있어 그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다.
여기도 의종에 대한 전설이 있으니 그 이야기를 전한다. 사등면 오량리에 위치하는 오량성 은 평지옹성으로 동서남북에 성문이 있고, 성내에는 큰 우물이 있으며, 현재에도 성내에 촌락을 이루어 주민이 살고 있다. 성의 평면형태는 남북이 조금 긴 장방형의 석축성으로 사방에 문지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세 곳에 치(雉)가 잔존하고 있다.
그리고 옹성으로 보이는 유구가 한 군데 보이며 기단석 위에 25cm 정도 뒤로 물러서 그 위에 160x80cm 크기의 큰 돌과 대강 다듬은 60x20cm 크기의 작은 돌로써 잔돌끼움 방식으로 쌓고 안벽은 인두대의 할석으로 처리했으며 내벽과 외벽의 공간에는 흙과 잡석으로 뒤채움한 협축법을 사용했다.
성의 축성연대는 확실치 않으나 성의 축성방법과 형식 및 구조 등으로 보아 인근 사등성과 고현성과 같은 축성방법으로 쌓았는데 고려시대에 의종이 정중부의 무신반란으로 이곳으로 폐왕이 되어 머물면서 군사를 두었다가 사태가 위급할 시는 뒷산 정상에 있는 폐왕성으로 올라갔다는 전설로 미루어 보아 고려시대에 처음 축성하여 이곳에 역(驛)을 설치하였다가 고려말에 폐성되었으며 조선 세종 7년(1425년) 8월에 다시 복원되었고 조선중기인 연산군 6년(1500년)에 역에 보(堡)를 설치하면서 현재의 석축성을 축성하였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성의 둘레는 1,172m, 높이 2.16m, 폭 5m이며 성의 보존이 비교적 잘 되어 있어 향후 거제시에서 복원하여 민속촌 등의 관광지로서 활용할 계획이라고 한다. 1991년 12월 23일 경상남도 기념물 제 109호로 지정 보호 되고 있다. 그가 이곳으로 유배올 때 재위 시절 추종하던 세력이 몰래 따라왔으며, 그들은 다시 군사를 모으고 튼튼하게 성을 쌓아 혹시 불시에 들이닥칠지도 모를 무신세력들을 방비하기 위해 철통같은 경비를 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의종이 노린 것은 무신정권을 반대하는 세력들과의 연계였다. 그래서 그는 군사를 훈련시키고, 군마를 기르며 때가 오기를 기다렸던 것이다. 그가 기다리던 바로 그 때는 유배당한 지 불과 3년 만에 왔다. 당시만 해도 그는 그 때가 자신의 목숨을 가져갈 저승사자가 오는 때임을 알지 못하였다.
명종 재위 3년 8월 동북면 병마사 간의대부 김보당이 군사를 일으켜 정중부와 이의방을 토벌하고 의종을 복위시키려고 하였다. 이에 호응하여 동북면 지병마사 한언국이 녹사 장순석을 거제도로 보내 의종을 경주로 호위해 왔다.
이때 이의방 휘하의 장수 이의민은 경주로 내려가 일격에 난군을 제압하고 의종을 포박하였다. 이의민은 의종을 곤원사(坤元寺) 연못가로 데리고 가서 술을 두어 잔 마시게 한 후 죽여 그대로 수장시켰다. 일설에 의하면 이의민은 타고 난 장사였는데, 의종에게 달려들어 맨손으로 척추를 꺾어 절명케 하였다고 한다. 1173년 10월 1일의 일로, 그때 의종의 나이 47세였다.
오량성을 마지막으로 거제도 답사의 일정을 무사히 마쳤다. 바닷가로 왔는데 회 한번 못먹고 가는게 내내 아쉬웠는데 회를 먹자는 제의가 들어와 다시 통영시내로 향했다. 통영 중앙시장 횟집에 들러 해삼, 멍게 등 각종 해산물을 푸짐하게 사왔다. 답사를 마치고 나니 피곤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맛나는 회를 먹으니 소주 생각이 간절했다. 가람님이 운전을 대신해 주겠다고 해서 소주를 들이키고 한숨 자야겠다.
회를 사들고 올라간 곳이 통영시민문화회관이었는데 통영시내가 한눈에 다 들어왔다. 바람을 맞으며 회와 소주를 들이키듯이 먹었다. 너무 추웠기 때문이다.
회를 다 먹고 나오려는 산하야님이 통영에 오면 꼭 먹어봐야 할 게 있는데 그게 바로 오미사 꿀빵이란다. 녹십자병원 뒷골목에 있는데 일요일이라 문을 닫았고 분점이 통영고등학교 옆에 가고 있다고 해서 그곳으로 달려갔더니 딱 한케이스가 남아 있었다. 도너스에 팥을 넣고 구운다음 꿀을 발라서 만든것인데 하나만 먹어도 배가 불렀다. 조금만 늦었더라고 그 먼길을 찾아가서 그것도 못 먹을뻔 했다.
이번 거제도 답사는 짧은 시간에 너무나도 많은 것을 보고 왔다. 답사의 주제인 굴욕의 역사 그리고 찬란한 역사에서 보듯이 거제도 그 이전에 유배지로 굴욕의 고장이었다. 그러나 현재에 와서 찬란한 역사지로 거듭나고 있다.
도시는 나날이 발전을 거듭하고 있고 조선소라는 거대한 산업현장이 있어 불경기를 모르는 도시가 되어가고 있다. 발전과 문화가 공존하는 그런 현장으로 영원히 우리 곁에 있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