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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근대화는 개항으로부터 비롯되었다.
19세기 중엽 西勢東漸(서세동점)의 세계적 기류속에서 서구 자본주의 열강들은 아직 미개척지 동양에 식민지를 건설하기에 여념이 없었으며 그 결과 영국이 중국을, 미국이 일본을 침략하여 불평등 조약을 맺어 개항을 강제하기에 이르렀다.
조선은 鎖國攘夷(쇄국양이)의 폐쇄적인 자세를 취하면서 청나라(중국)을 上國으로 여기는 국제질서를 유지하고 있었으나 미국에 의해 강제 개항된 일본이 개항후 서구 문물을 받아들여 강력해진 국력을 바탕으로 자신들이 당했던 방법 그대로 조선을 개항시키기에 이르렀으니 1875년 운요호 사건을 일으킨후 1876년 강화도조약을 체결, 이후 부산-원산-인천 순으로 개항하게 되었다.
우리는 개화기(개항기) 문화유산 답사를 아이템으로 답사를 진행함에 있어서 대한제국의 수도 한성에 대한 답사를 제외하면 당연히 개항 순서대로, 즉 부산-원산-인천 순으로 돌아보고 싶었지만 원산은 북한에 있어 가볼수가 없고 부산보다는 인천이 가까운지라 인천을 먼저 답사한 후 군산-부산 순으로 돌아보았다.
이제 다음으로는 목포등 개항지역을 찾아가야 하겠으나 우리의 발길은 다소 의외로 대구로 향하였다.
大邱... 대한민국 근대역사의 중심 대구, 국채보상운동과 2.28 학생운동을 주도한 대구의 정신을 주장하는 도시를 지나치지 못하고 근대의 문화유산으로 무엇들이 있는지를 찾아 보기로 하였다.
비록 개화기때에 開港을 한 항구도시는 아니지만 그에 못지않은 개화기 문화유적들이 있어 매우 흥미로운 곳이다.
ㅇ 대구근대역사관 (구 조선식산은행) (대구 유형문화재 제49호)
대구근대역사관은 1932년 조선식산은행 대구지점으로 건립되었으며, 1954년부터 한국산업은행 대구지점으로 이용된 근대문화유산으로 아직까지 르네상스 건축양식이 잘 남아 있어 2003년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49호로 지덩되었다.
이후 대구근대역사관으로 단장하여 2011년 개관하였다.
우리는 가장 먼저 이곳에 들려 전시물들을 둘러보고 그시대의 대구에 대한 이해를 도모한 후에야 정식답사를 시작하기로 하였다.
<대구근대역사관>
ㅇ 대구 근대문화골목
대구 도심에 있는 동산 선교사 주택과 청라언덕, 이상화·서상돈 고택 등 근대 역사·문화 자원을 토대로 차별화 된 투어코스를 만들어 '근대골목'이란 이름으로 운영하게 되면서 한국관광공사의 '한국인이 꼭 가봐야 할 국내 관광지 100곳' 중 상위권인 7위에 선정되었고, '한국관광의 별'에도 선정되어 많은 관광객들이 찾고 있는 곳이다.
靑羅(청라)언덕
푸를 靑, 담쟁이 羅, 푸른 담쟁이를 가리키는 말이니, 즉 신록이 짙어지는 계절에 담쟁이 넝쿨이 휘감아 올라 온통 푸른 풍경을 연출하는 모습을 일컬어 청라언덕이라고 하는데, 대구시 중구 계명대학교 동산의료원 남문을 지난 구름다리 뒤편 언덕을 말한다.
그저 東山(동산)이라고도 부르는 이 낮으막한 구릉지대는 제일교회를 설립한 아담스와 동산의료원을 설립한 존슨 선교사가 1899년 달성 서씨 문중으로부터 매입하였으며, 달성토성(現 달성공원)에서 동쪽에 있다하여 東山(동산)이라고 하였는데 이곳에 병원, 교회뿐만 아니라 당시 선교사들이 거주하는 주택들도 들어서게 되었다.
이곳에 1910년 미국선교사들이 지은 총 7채의 선교사 주택이 있었는데 같은 시기에 지은 방갈로풍 미국주택 형태로 지금도 당시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으며, 현재는 3채만 남아 각각 의료, 선교, 교육/역사박물관으로 탈바꿈하여 무료 개방하고 있다.
<스윗즈 주택(선교박물관)... (대구 유형문화재 제24호)
이곳은 마르타 스윗즈(Miss Martha Switzer) 선교사가 살았던 사택이다. 스윗즈 여사를 비롯하여 계성학교 4대 교장인 핸더슨, 계명대학교 대학장인 캠벨등의 선교사들이 거주하였으며, 대구 읍성돌(城石)을 주춧돌로 사용하여 문화재로서 큰 의미가 있다.
개신교회사에 관한 사진 자료와 선교유물, 2층에는 구약과 신약의 세계에 대한 다양한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챔니스 주택(의료박물관)... 대구 유형문화재 제25호)
이곳은 챔니스(O. vaughan Chamness) 목사의 집으로 1911년 계성학교 2대교장인 레이너와 챔니스, 샤워택 선교사등에 이어 1948년부터 1993년 동산병원(現 동산의료원)을 크게 발전시킨 마펫(Howard F. Moffett) 병원장이 거주했다.
지금도 그때의 생활공간이 그대로 전시되어 있어 당시 선교사들의 생활상을 엿볼수 있으며, 1900년대 전후의 동서양의 의료기기 등이 소장되어 근대의학의 발전과정을 한눈에 볼 수 있다.>
<블레어 주택(교육.역사박물관)... (대구 유형문화재 제26호)
이곳은 블레어(Blair) 목사가 살았던 사택이다. 조선시대 서당과 1960~70년대 초등학교 교실이 재현되어 있고, 시대별 교과서 및 민속자료, 2002년 한일월드컵 관련자료 및 2003년 하계유니버시아드대회 의무지원과 관련한 기념품도 볼수 있다.
또한 대구 3.1운동 및 사진이 전시되어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데 기여하고 있다.>
<동산의료원 외국인 묘지 '은혜정원'... 선교사와 그 가족들의 안식처, 현재 12개의 묘석이 있다.>
<사과나무 자손목... 대구 최초의 서양 사과나무 자손목이다.
1899년 동산의료원 초대원장인 존슨 선교사가 미국에서 3개 품종의 사과나무 72그루를 들여와 사택 뜰에 심어 키우기 시작했는데 이중 미주리 품종만 자라 동산의료원 주변에 보급한것이 대구 사과나무의 효시가 되어 대구를 사과의 주산지로 만들었다고 한다.
2세목은 수령이 80년쯤 되었으며, 현재 그 옆에 3세목을 심어 관리하고 있다.>
<대구 3.1 운동길...일명 90계단길...
청라언덕에서 계산성당 방향으로 내려가는 제일교회 옆 계단길을 말한다. 3.1운동 당시 학생들이 일본군의 감시를 피해서 도심으로 모이기 위하여 통과했던 솔밭길이라도 한다. 대구 만세운동은 일제의 감시가 심해 3. 8일 오후에 일어났으며 대구시는 2003년에 이 솔밭길, 지금은 90계단길이 된 이곳을 대구 3.1운동길로 지정하였다.
박태준이 사랑했던 여학생이 매일 등교하던 길이기도 하다.>
동무생각(思友)
청라언덕은 또한 학창시절 누구나 흥얼거렸던 가곡 '동무생각'의 노랫말 배경이 된곳이다.
그래서 위 선교사주택들 사이에는 이은상 작사, 박태준이 작곡한 <동무생각>의 노래비가 세워져 있다.
<동무생각>은 우리나라 최초의 가곡으로 박태준 선생이 1911~1916년 계성학교에 다닐 때 등교길에서 매일 만나던 신명학교 여학생을 짝사랑했던 마음과 청라언덕의 향수를 바탕으로 만든 곡으로 알려져 있다.
매일 등교길에 만나던 백합처럼 고고하고 도도하고 아름다운 여학생에게 말 한마디 붙이지 못한 이 남학생......
그녀는 졸업후 일본으로 유학을 갔고, 박태준의 연애 이야기를 전해들은 이은상 선생이 노랫말을 써주어 곡을 붙인 것이 ‘동무생각’이다. '봄의 교향악이 울려퍼지는~ 청라언덕위에 백합 필적에"로 시작되는 첫소절의 청라언덕이 바로 이 동산을 말하며, 백합은 그가 흠모하던 신명학교 여학생이라고 한다.
동무는 친구를 부르는 참 아름다운 우리말인데 지금은 북한에서 정치적인 용어가 되어 사라져 버린 아쉬움이 큰 명칭이다.
(어깨동무 내동무 미나리밭에 앉았다~~)
<동무생각(思友) 노래비....>
桂山(계산)성당 (사적 제290호)
계산동은 과거 대구 읍성 남쪽 성곽을 끼고 형성된 부락으로, 산이름 계산을 따서 계산동이라 지었는데 桂山은 현재 동산병원이 들어서 있는 東山을 말한다. 조선 중기에는 명나라에서 귀화한 장수 杜師忠(두사충) 일가의 世居地(세거지)였으며, 1898년을 전후하여 서양 선교사들이 이 일대에 자리를 잡으면서부터 이곳에는 근대 서양문물이 급속하게 뿌리내렸다.
계산성당은 서울과 평양에 이어 3번째로 세워진 서양식 건물이자 영남 최초의 고딕양식 성당으로,1899년 처음에는 로베르 신부에 의해 한옥으로 지어졌지만 1901년에 지진, 화재로 전소되었고 1902년에 프와넬 신부가 설계하여 현재모습으로 재건되었다.
아름다운 설계와 100년의 긴 전통 때문에 성당은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사적 제290호로 지정되어 있다. 우뚝 솟은 쌍탑이 특징인 계산성당은 고풍스러운 내부와 건축물의 아름다움 덕분에 많은 유명인사들이 결혼식을 올리러 찾아오는 장소이기도 하다.
이곳에서 박정희, 육영수의 결혼식이 진행되었으며, 당시 주례가 박정희양과 육영수군으로 불러 더 유명해진 곳이기도 하다.
성당 내부에는 한복을 입은 사람들이 스테인드 글라스에 새겨져 있는데 조선시대 천주교 박해 때 순교했던 성인을 의미한다. 계산성당은 경상도 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성당으로 대구 가톨릭의 역사뿐만 아니라 경북지역 가톨릭의 중심지로 백여년이 넘는 시간을 함께 해왔다.
이상화 고택
대구에서 태어난 민족시인 이상화,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남기고 폭풍처럼 살다간 파란의 생애는 43년으로 너무 짧았지만 남겨진 우리들에게 전해주는 그의 울분과 통곡은 아직도 살아 숨쉬고 있으니 대구 그의 고택에서 절절히 느낄 수 있다.
1923년 6월, 프랑스행을 꿈꾸던 그는 관동대지진으로 꿈이 좌절된채 귀국하여 서울에 거주하면서 詩作에 몰두, '나의 침실로'를 내놓은 이후 1926년 마침내 대표작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발표하기에 이른다.
신간회에 관여하던 이상화는 일제에 의해 많은 고초를 겪다가 중국을 유람하는등 어려운 시기를 지나면서 病을 이기지 못해 결국 지금의 고택에서 43세로 숨을 거두었다.
서상돈 고택
서상돈은 천주교 순교자 집안에서 태어나 맨손으로 시작하여 큰 부자가 된 대구 출신의 민족자산가이다.
달성 서씨인 그의 집안은 천주교 박해로 뿔뿔이 흩어지고 고생만하다가 죽은이가 다수였으며, 서상돈은 어려서부터 주변도움으로 보부상을 시작하여 35세에 大商이 되었고, 대구 유력 경제인으로 부상하였다.
천주교에 많은 기부화 후원을 하던중 계몽과 교육에도 힘을 쏟았으며, 1896년 독립협회가 설립되었을때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당시 대한제국 정부가 1,300만원이라는 엄청난 빚을 일본으로부터 지게되자, 나라가 망해서는 안된다며 분연히 일어나 국채보상운동을 발의하게 된다. (1907년 1월 29일)
그 실천방법으로 담배를 끊고 그 돈으로 국채를 갚자는 斷煙會(단연회)를 설립하고 최초의 민중대회인 군민대회를 개최하였으며, 이를 계기로 국채보상운동은 고종황제를 비롯하여 신분을 초월한 전국의 남녀노소가 참여하는 전국민운동으로 확산되었고, 해외동포들에게도 전파되었지만 일제의 훼방으로 결국 결실을 맺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국권회복을 위해 온 국민을 단결시킨 자발적인 사회운동의 모범이라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가 대단하다고 본다.
제일교회 (대구 유형문화재 제30호)
1898년 경북지역에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가 처음 세운 개신교회인 남성정교회를 세운 곳이다.
또한 이곳은 1898년 미국인 의사 존슨이 대구최초의 서양식 병원 제중원(동산의료원 전신)을 세운 곳이었다.
처음에 초가와 기와집이 있었으나 1908년 교세가 점점 커지자 한옥과 서양식을 절충한 단층건물을 신축하여 사용하였으며 그뒤 1933년에 신도들의 헌금과 중앙교회의 성금으로 벽돌로 교회당을 짓고 제일교회로 이름을 바꾸었다.
1936년에는 5층 높이의 종탑을 세워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는데 담쟁이 덩굴이 아름다운 교회이다.
<구 제일교회... 대구 약령시 근처에 있다.>
<100주년 기념관과 현재의 제일교회... 청라언덕위에 서 있다.>
YMCA 전신
제일교회 건너편에 위치한 붉은색 벽돌 건물, 블레어 선교사가 건립하여 선교사업 교육관으로 사용되었으며 대구 YMCA 전신인 <교남기독교청년회>가 자리 잡은 곳이다.
역사적으로는 제일교회보다 더 오래된 건물이며 대구 최초의 전시회 <대구미술전람회>가 열렸던 곳이며, 대구 최초의 서양결혼식이 있었던 곳이기도 하다.
진 골목, 뽕나무 골목
약령시 안쪽으로 100m남짓 이어진 진골목, 근대초기 대구 달성서씨 부자들이 사는 동네로 유명한 곳인데 당시 대구 최고 부자였던 서병국을 비롯하여 코오롱 창업자 이원만, 정치인 신도환, 금복주 창업자 김홍식도 진골목에 살았다고 한다.
그들이 살았던 저택들 대부분은 식당으로 바뀌었고 골목 양쪽으로 세워진 붉은 벽돌담이 멋진 분위기를 연출한다.
진골목 ‘정소아과의원’ 2층집은 현존하는 대구 最古 양옥건물이며 미도다방과 진골목식당은 진골목의 역사와 함께 그 시대의 향수를 느낄 수 있는 명소이다. 또한 뽕나무 골목의 뽕나무를 이용한 양잠으로 대구 섬유산업이 발전하였다고 한다.
<진골목 풍경...>
<最古의 2층양옥집, 정 소아과 의원...>
<당시 대구갑부 서병국의 집 입구... 흔적만 겨우 남았다.>
그밖에도 가까운 곳에 화교들의 흔적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화교 소학교가 여전히 운영중에 있으며 교내에는 붉은벽돌 건물의 화교협의회 건물이 있었고, 장개석 총통의 흉상도 남아 있었다.
개화기 청나라가 중화민국으로 바뀌는 과정의 산물, 그리고 공산화이후 비틀어진 중국의 정통성을 보고 있는듯 하여 헛헛하다.
<華僑(화교) 小學(소학)... 작은 규모로 운동장도 농구코트 하나 크기이다.>
<대구화교협회건물... 원래는 대구갑부 서병국의 집이었다.>
<화교 소학교 마당, 화교협회 건물 옆에는 장개석 총통의 흉상이 있다.>
Tip : 대구 맛집 따로국밥
대구 맛집으로는 따로국밥을 추천한다.
값도 싸고 맛도 있고....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음식이다.
밥과 국을 따로 내온다는 당연한(?) 이름인데 국은 선지해장국 스타일이며, 따로 나온 밥을 말아 먹는다.
그 밖에는 갈비골목, 막창골목등 특화된 먹거리가 있었으며
시장을 누비고 다니다보니 납작만두가 눈길을 끌었다.
<대구에서 가장 유명한 원조 국일따로국밥집...>
<막창구이와 납작만두....>
< 계 속 >
ㅇ 내나라 문화유산 답사회 : http://cafe.daum.net/sm-academy
ㅇ 사랑하는 내인생 : http://cafe.daum.net/people4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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