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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글 마당 스크랩 아버지의 눈물
홍권사 추천 0 조회 61 15.09.05 20:57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아버지의 눈물

두려움과 감격의 교차 속에서

어릴적 내 별명은 '하루울이'입니다. 한번 울기 시작하면 온종일 울어야 끝이 나서 붙여진 별명입니다. 한번 울음을 터뜨리면 무슨 큰 일이나 난 것처럼 크게 울어 잠자던 사람들이 다 깨어 나와 봐야 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가만히 앉아서 운 것도 아닙니다. 방 안을 훌떡훌떡 뛰면서 난리를 쳐대 온 몸에 상처가 나고 살이 터져 방 안을 피투성이로 만들 정도로 울어댔습니다. 나는 사람들의  흐르는 눈물을 닦어주고 마음에 쌓인 슬픔을 없애주는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다. 숲 속에 누워 새들의 노랫소리를 들으면 향기롭게 만들어주는 사람이 되어야지'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습니다. 과연어떤 사람이 되어야 그런 일을 할 수 있을 지는 잘 몰랐지만 사람에게 행복을 전하는 사람이 되어야 겠.다는 마음만은 굳어져 갔습니다. 열 여섯살 무렵 열세 남매 중 다섯 명의 동생이 한 해에 세상을 떠나는 비극도 겪었습니다. 한꺼번에 아이 다섯을 잃은 부모님의 상심은 이루 말할 수없었습니다. 그런데 끔찍한 일은 우리 집 담장을 넘어 문중에까지 번졌습니다. 멀쩡하던 소가 갑자기 죽어나가고 있따라 말이 죽더니 하룻밤 새에 돼지가 일곱마리나 죽어나갔습니다. 집안의 고난은 민족의 고통. 세계의 고통으로 이어졌습니다. 점점 악랄해지는 일본의 압정과 우리 민족의 비참한 처지를 지켜보며 나의 고민도 커져만 갔습니다. 사람들은 먹을 것이 없어 풀이며 나무껍질을 있는 대로 뜯어다가 끌여 먹어야 했습니다. 세계적으로도 전쟁이 끊이질 않았습니다.그러던 어느날 나와 동갑인 중학생이 자살을 했다는 신문기사를 읽게 되었습니다. '그소년은 왜 죽었을까'... 마치 내가 당한 슬픔인 것처럼 가슴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신문을 펼쳐놓은 채 사흘밤낮을 통곡했습니다. 끝도 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습니다. 

 

열여섯 되던 해 부활절 전야였습니다. 그날도 어김없이 마을 뒤에 있는 묘두산에 올라가 밤새 기도하며 하나님께 눈물로 매달렸습니다. 왜 이로톡 슬픔과 절망이 가득한 세상을 만드셨는지. 전지 전능하신 하나님이 왜 이 세상을 아픔속에 내버려 두시는 건지. 비참한 조국을 위해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나는 눈물을 흘리며 묻고 또 물었습니다. 기도로 꼬박 밤을 해우고 난 부활절 새벽에 예수님이 내앞에 나타나셨습니다. 바람처럼 홀연히 나타난 예수님은"고통 받는 인류 때문에 하나님이 너무 슬퍼하고 계시니라 . 지상에서 하늘의 역사에 대한 특별한 사명을 맡아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날 나는 슬픈 얼굴의 예수님을 확실히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음성을 분명히 들었습니다. 예수님의 현현한 내 몸이 사시나무 떨리듯 심하게 떨렸습니다. 그 자리에서 당장이라도 죽을 것 같은 두려움과 터질 듯한 감격이 한꺼번에 엄습했습니다. 예수님은 또렸하게 앞으로 내가 해야할 일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고통 받는 인류를 구해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라는 엄청난 말씀이었습니다. " 저는 못합니다. 제가 그걸 어떻게 하겠습니까? 제게 그렇게 막중한 임무를 내리시다니요? " 정말 두려웠습니다. 어떻게든 피하고 싶어 예수님의 옷자락을 붙잡고 한없이 울었습니다.

 

 

심장이 아플수록 송두리째 사랑하라.

 

아무리 애를 써도 예수님을 만난 기억에서 잠시도 헤어날 수없었습니다.울음이솟구치는마음을 어쩌지못해그 두려움을 시로 썼습니다.

 

내가 사람을 의심할 때 나는 고통을 느낍니다.

내가 사람을 심판할때 나는 견딜 수 없어집니다.

 

내가 사람을 미워할때 나는 존재가치를 잃고 맙니다.

그러나 만일 믿으면. 나는 속임을 당하고 맙니다.

 

이 저녁 나는 머리를 손바닥에 묻고.

고통과 슬픔에 떨고 있습니다.

 

내가 틀린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내가 틀린 것입니다.

비록 속임을 당할 지라도 믿어야 합니다.

 

비록 배신을 당할 지라도 용서해야 합니다.

미워하는  사람까지도 송두리째 사랑하십시오.

 

눈물을 닦아내고 미소로 맞이하십시오

남을 속이는 일밖에 모느는 자들까지도 ...

 

오. 주여!

사랑하는 아픔이여! 저의 이 고통을 보소서!

 불타는 이 가슴에 손을 얹어주소서.

저의 심장은 깊은 고뇌로 터질듯만 하옵니다.

 

그러나.

배신한 자들을 사랑했을때

나는 승리를 쟁취했습니다.

 

만일 당신도 나와 같은 사랑을 한다면

나는 그대에게 '영광의 면류관'을 드리오리다.

 

예수님은 바람결에 스쳐지나가듯 말씀하셨지만. 나는 그 말씀을 가슴에 품고 나무뿌리를 뽑는 심정으로 간절히 기도하며 우주의 근본과 세상의 원리를 조금씩 깨달아 갔습니다. 그해 여름방학에 나는 조국 순례의 길을 나섰습니다. 돈한 푼 없이 문전걸식을 하다가 운이 좋으면 지나가는 트럭을 얻어 타기도 하면서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 보았습니다. 조국은 어디를 가나 온통 눈물의 도가니였습니다. 굶주린 백성들의 고통스런 한숨소리가 끊이지 않았고 그들의 처절한 희한이 눈물이 되어 강물 처럼 흘렀습니다. "하루 빨리 이 비참한 역사를 끝내야 한다. 더 이상 우리 민족을 슬픔과 절망 속에 빠져있게 해서는 안 된다. 어떻게든 일본에도 가고 미국에도 가서 한 민족의 위대함을 세계에 알릴 방법을 찾아야 한다" 조국순례를 통해 나는 해야 할 일 한 가지를 더 얻었고. 앞날의 뜻을 더욱 단단히 세웠습니다. "반드시  민족을 구하고 하나님의 평화를 이 땅에서 이루리라".

 

거대한 비밀의 문을 여는 열쇠

 

무더위 여름에는땀을 뻘뻘 흘리며. 걸었고. 차디찬 겨울에는 살을 에는 바람을 뚫고 뛰다시피 걸었습니다. 걸음이 워낙 빨라서 흑석동에서 한강을 건너 종로의 화신 백화점 까지 45분이면 도착했습니다. 보통사람은 한시간 반 정도 걸리는 거리를 절반에 주파했으니. 얼마나  빠른 걸음인지 상상이 갈 것입니다. 전차 값은 아껴두었다가 나보다 돈이 더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눠주었습니다. 내세우기 부끄러울 정도로 적은 돈이었지만 천만금을 내주고 싶은 간절한 마음으로 주었고. 그 돈이 복의 씨가 되길 빌며 주었습니다. 4월이면 고향에서 꼬박꼬박 학비를 보내왔지만. 형편이 어려운 주위 사람들을 그냥 보아 넘기질 못하다 보니 그 돈은 5월이 되기도 전에 모두 바닥이 났습니다. 한번은 학교 가는 길에 숨이 넘어갈 것처럼 아픈 사람을 만났습니다. 어찌나 불쌍한지 발이 떨어지지 않아 그 사람을 업고 오리나 떨어진 병원으로 내달렸습니다. 때마침 주머니에 들어 있던 학비를 탈탈 털어 병원비로 내고나니 돈이 한 푼도 남지 않았습니다. 학비를 못 내 학교에서 독촉을 받는 것을 보고 친구들이 돈을 한 푼 두 푼 모아 주었습니다. 그때의 친구들을 평생 잊지 못합니다. 한강 다리 밑에는 누더기 처럼의 거지들이 즐비했습니다. 나는 한강 다리 밑 빈민굴에 찾아가 거지들의 머리를 깎아 주며 마음을 나누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눈물이 많습니다. 가슴에 맺힌 것이 많아 내가 말 한마디만 건내도 대성통곡을 하며 울었습니다. 벅벅 긁으면 허옇게 자국이 생길 정도로 덕지덕지 때가 낀 손으로 직접 구걸해온 밥을 나에게 건네기도 했습니다. 그러면 나는 더럽다 하지 않고 기쁜 마음으로 같이 먹었습니다. 명수대 뒤쪽에는 서달산 이있습니다. 나는 달마산 바윗돌에 올라가 밤새 가도하는 일이 많았습니다. 춥거나 덥거나 상관없이 하루도 거르지 않고 기도에 열중했습니다. 한번 기도에 들어가면 눈물콧물이 범벅이 될 정도로 울며 하나님께 받은 말씀을 놓고 몇 시간씩 기도에만 전념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암호와 같아서 그것을 풀려면 더욱 기도에 몰두 해야 했습니다.  

 

펄펄 끓는 불덩어리 처럼

 

경성학교를 마치고 1941년에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습니다. 일본을 확실하게 알아야 한다는 생각에서 떠난 유학이었습니다. 기차를 타고 부산으로 내려가는데 어찌나 눈물이 쏟아지던지  외투를 뒤집어쓰고 엉엉 울었습니다. 눈물 콧물이 끊이지 않아 얼굴이 퉁퉁 부었습니다. 식민치하에서 신음하는 고아와 같은 내 나라를 두고 가는 마음이 처절했습니다. 그렇게 울다 창밖을 보니 우리의 산천이 나보다 더 섧게 울고 있었습니다. 산천초목에서 눈물이 철철 흘러내리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습니다. 통곡하는 산천을 향해 약속했습니다. "고국산천아. 울지말고 기다려라. 내가 반드시 조국광복을 안고 돌아오마." 4월1일 새벽 2시 부산항 에서 관부연락선을 탔습니다. 밤바람이 거셌지만  갑판 위를 떠나지 못하고 점점 멀어져가는 부산을 바라보며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습니다.  도쿄에 도착해서는 와세다 대학교 부속 와세다 고등공민학교 전기공학과에 입학했습니다. 현대 과학을 모르고는 새로운 종교 이념을 세울수 없다는 판단아래 전기과를 택한 것입니다. 와세다 대학 오른편에 경찰서가 있었습니다. 나의 활동을 눈치 챈 일본경찰은 늘 눈에 불을 켜고 나를 감시했습니다. 방학중에 고향에 다녀오려고 하면 경찰이 먼저 알고 부두나 기차역에 사복경찰을 보내 배웅할 정도 였습니다. 그러니 일본경찰에게 잡혀가 매를 맞고 고문을 당하고 유치장에 갇히는 일도 부지기수였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심한 고문을 받아도 그들이 요구하는걸 불지 않았고. 오히려 맏으면 맞을수록 당당해졌습니다. 뒤쫓아 오는 경찰과 요스가와 다리 난간 위에서 기둥을 빼들고 싸운 적도 있습니다. 당시 나는 펄펄 끓는 불덩어리 였습니다.

 

노동자의 친구가 된 고생 왕초

 

그 시절은 모두들 배가 고팠습니다. 유학생들 중에도 고학생이 많았습니다. 나는 한 달 치 식권이 나오면 모두 들고 나가 고학생들에게 주며. "먹어라. 마음껏 먹어라"하며 다 써버렸습니다. 나는 돈을 버는 것이 두렵지 않았습니다. 아무데라도 가서 노동을하면 밥은 먹을수 있었으니까요. 돈을 벌어서 형편이 어려운 학생의 학비를 도와주는 것도 나의 낙이었습니다. 그렇게 남에게 도움을 주고 밥을 먹이면 온몸에서 힘이 펄펄 났습니다. 내가 가진 돈을 모두 나눠준 다음에는 리어카로 배달하는 일을 했습니다. 도교 시내 27개 구역을 리어카로 누비고 다녔습니다. 나는 노동자 중의 노동자요. 노동자 들의 친구였습니다. 땀내와 지린내가 진동하는 그들처럼 나 또한 노동판에 나가 진땀을 흘리며 일했습니다. 그들은 나의 형제이고, 그래서 지독한 냄새도 싫지 않았습니다. 새까만 이가 열을 지어 기어가는 더러운 담요도 그들과 함께 덮었습니다.  때가 켜켜이 낀 손도 주저 않고 마주 잡았습니다.  땟국물이 흐르는 그들의 땀 속에 끈끈한 정이 있었습니다.  나는 그 정이 구수하니 좋았습니다. 늘 배가 고팠지만 아무리 배가 고파도 나를 위해 밥을 먹지는 않았습니다.  밥을 먹는 데는 분명한 이유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매 끼니마다 배고픈 이유를 스스로에게 따져 물었습니다. '진정으로 피땀 흘려 일했는가? 나를 위했는가. 공적인 일을 위했는가? 하고 물었습니

 

다. 그래서 밥그릇을 대할때마다."너를 먹고 어제보다 더 빛나고 공적인 일을 해줄게" 하면 밥이 나를 보고 웃으며 좋아했습니다. 그럴 때 밥 먹는 시간은 무척이나 신비롭고 기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배가 고파도 굶었으니 하루 두 끼를 온전히 찾아 먹는 날도 그리 많지 안았습니다. 본래 먹는 양이 적어서 하루 두 끼로 견딘것은 아닙니다. 한창 젊은 나이라 나도 먹기 시작하면 끝이 없었습니다. 큰 그릇에 담긴 우동을 열한 그릇까지 먹어봤고  닭고기 계란덮밥을 일곱그릇이나 먹은 적도 있습니다. 그렇게 식성이 좋은데도 점심을 거르고 하루에 두 끼만 먹는 습관을 서른 살이 넘도록 고집햇습니다.  배가 고픈것은 그리움입니다. 나는 배골픈 그리움이 무엇인지 잘 알지만 세계를 위해서 밥 한 끼쯤은 희생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새 옷을 입어본 적도 없습니다. 아무리 추워도 방에 불을 때지 않았습니다. 몹시 추울 때 신문지 한 장은 비단 이불처럼 따뜻 합니다. 나는 신문지 한 장의 가치를 잘 알고 있습니다. 어떤 때는 아예 시나가와의 빈민굴에서 살기도 했습니다. 누더기를 뒤집어쓴 채 잠들고 햇빛이 좋은 한낮이면 이를 잡으며 거지들이 얻어온 밥을 나눠 먹었습니다.  시나가와의 거리에는 떠돌이 여자들도 많았습니다. 한 명 한 명 사연을 들어주다 보니 술 한 모금 마지지 못하는 내가 어느새 그들의 둘도 없는 친구가 되어 버렸습니다. 술의 힘을 빌리지 않아도 그녀들을 안타깝게 생각하는 내 마음이 진심인 것을 알게 되자 그녀들도 허심 탄회하게 이야기를 털어놓았습니다. 일본에서 공부하는 동안 나는 정말 별의별 일을 다 했습니다. 빌딩의 소사노릇도 했고. 글을 대신 써주는 필생 노릇도 했습니다. 노동판에 나가 노동을 하고 현장감독도 했으며. 남의 사주를 봐주기도 했습니다. 궁하면 글씨를 써서 팔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공부하기를 게을리하지는 않았습니다. 나는 그런 것이 모두 나를 단련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사람들은 한번 올라가면 내려가는 것을 두려워해서 그 자리를 지키려고 안간힘을 씁니다만 고인 물은 썩기 마련입니다. 위로 올라갔더라도 아래로 내려와 때를 기다렸다가 더 큰 정상을 향해 올라갈 줄 알아야 수많은 사람이 우러르는 위대한 인물. 위대한 지도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고요한마음의 바다

 

'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는 아버지와 자식의 관계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류의 고통을 보시며 그토록 슬퍼하신 것이다". 라는  깨달음을 얻는 순간 우주의 모든 비밀이 다 풀렸습니다. 인류가 하나님의 명을 어기고 타락의 길을 걸으면서 벌어진 모든 일이 영사기가 돌아가듯 내 눈앞에 환히 펼쳐졌습니다. 눈에는 뜨거운 눈물이 쉼 없이 흘러내렸습니다. 나는 무릎을 꿇고 엎드린 채 좀처럼 일어날 줄 몰랐습니다. 어릴 적 아버지의 등에 업혀 집으로 돌아가던 날처럼 하나님의 무릎에 엎드려 눈물을 쏟았습니다. 나는 예수님을 만난 지 9년 만에야 비로소 아버지의 참된 사랑에 눈 뜬 것입니다. 우주 창조의 비밀을 밝혀내자 내 마음이 바다처럼 고요해졌습니다. 나는 누더기를 입고 머리를 숙인채 걸어다녔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득찬 내 마음은 터질 것만 같았고 내 얼굴에서는 빛나는 기쁨이 떠나질 않았습니다.

 

"제발 죽지 말고 버텨다오"

 

나는 용산에 있는 가시마구미 토목회사의 경성지점에 취직을 해서 회사일과 교회일을 함께 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해 10월. 신혼집으로 느닷없이 일본경찰이 들이닥쳤습니다. "와세다대학 경제학부에 다니던 아무개를 아느냐?" 하고 묻더니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나를 경기도 경찰부로 끌고 갔습니다. 공산주의자로 잡혀간 친구의 입에서 내 이름이 나온 것이 이유였습니다. 경찰에 잡혀간 나는 다짜고짜 고문부터 당했습니다. "네놈도 공산당 맞지? 일본유학 시절에 그 자식하고 같이 일했잖아? 네가 아무리 아니라고 우겨봐야 소용없다. 일본 경시청에 물어보면 다 나오게 돼 있어. 공연히 개죽음 당하지 말고 공산당 놈들 이름을 줄줄이 대란 말이다!" 일본에서 같이 활동했던 친구들 이름을 대라며 책상다리 네 개가 다 부서지도록 맞았지만 나는 끝끝내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일본경찰은 흑성동 신혼집을 뒤져 내 일기장을 찾아왔습니다. 일기장 한 장 한장 넘겨가며 친구들의 이름을 찾아냈지만 죽기를 각오하고 아니라고 버텼습니다. 일본경찰은 징을 박은 군화발로 내 몸을 사정없이 짓이긴 뒤 내가 죽은 듯이 축 늘어지면 천장에 매달고 흔들었습니다. 나는 정육점의 고깃덩어리 처럼 그글이 막대기로 미는 대로 이리저리 흔들렸습니다. 그러면 내 입에서 시뻘건 피가 울컥울컥 쏟아져 시멘트 바닥을 적셨습니다. 나는 몇 번이나 정신을 잃었습니다. 찬물을 한 양동이 뒤집어쓰고 정신이 들면 다시금 고문이 시작되었습니다. 코를 잡은 뒤 양은 주전자를 입 속에 넣은 채로 무한정 물을 먹인 뒤에 바닥에 쓰러뜨리고는 개구리 처럼 부풀어 오른 배를 군화발로 짓이겼습니다. 식도를 타고 넘어온 물을 사정없이다 토하고 나면 눈앞이 깜깜해지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런 날이면 식도가 타들어가듯이 아파 멀건 국물 한모금도 못 넘기고 기운이 없어 맨바닥에 엎드러져 꼼짝도 못했습니다. 

 

전쟁의 막바지에 이르러 초조해진 일본경찰의 고문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지독했지만 나는 끝끝내 친구들의 이름을 불지 않은 채 버텼습니다.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중에도 그것만큼은죽기 살기로 지켰습니다. 고문을 하다 지친 일본경찰이 고향에 계신 어머니를 불러왔습니다. 다리가 풀려 제대로 서지도 못하던 나는 경찰관들에게 양 팔을 끼운 채 면회실까지 겨우 걸어 나갔습니다. 어머니는 나를 만나보기도 전에 이미 눈가가 짓물러 있었습니다. "조금만 참아라. 어미가 어떻게든 변호사를 댈 테니까. 그때까지만 제발 죽지 말고 버텨다오."면회를 오신 어머니가 피투성이가 된 아들 얼굴을 보며 간절히 말씀하셨습니다. "제아무리 뜻이 좋아도 네 목숨을 보전하는 게 먼저다. 절대로 죽으면 안 돼" 하며 우시는 어머니를 바라보는 내 마음이 참으로 애달팠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어머니!" 하며 같이 끌어안고 펑펑 울고 싶었습니다.만 어머니를 면회시켜 주는 일본 경찰의 속뜻이 무엇인지를 잘 아는 나로서는 그럴 수도 없었습니다. 죽지 말고 살아서 버텨달라는 어머니의 말씀에 내가할수 있는 일이라곤 찢어져 퉁퉁 부은 눈을 깜빡거리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경기도 경찰부에 잡혀있던 넉 달 동안 하숙집의 이기완 아주머니 형제들이 돌아가며 옥 바라지를 해주었습니다. 아주머니는 면회할 때마다 울었습니다. 그러면나는 "조금만 견디시면 이 시절이 곧 끝납니다. 얼마 못 가 일본은 망할 테니 울지 마십시오." 하고 위로를 했습니다. 그냥하는 말아 아니라 하나님이 내게 주신 믿음이었습니다. 이듬해 2월 경찰서에서 풀려 나오자 마자 나는 하숙집에 쌓여있는 일기장을 싸들고 한강 모래밭으로 갔습니다. 그러곤 더 이상 친구들한테 피해가 가는 일이 없도록 그 많은 일기장을 다 태웠습니다. 그대로 둔다면 내가 감옥에 잡혀갈 때마다 화근이 될지도 모를 일이었습니다. 고문으로 망가진 몸은 쉽게 회복이 되지 않았습니다. 오래도록 혈변을 보며 몸을 추스르지 못해 애를 먹는 나를 하숙집 아주머니 형제들이 정성껏 돌보아 주었습니다. 마침내 1945년 8월 15일  기다리던 광복의 날이 왔습니다. 삼천리 반도가 '만세!' 소리와 태극기의 물결로 뒤덮인 감격의 날이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머잖아 한반도에 다가올 엄청난 재난을 예감하고는 너무나 심각해져 기쁜 마음으로 만세를 부를 수가 없었습니다. 혼자 골방에 틀어박혀 기도에 열중했습니다. 불길한 예감대로 조국은 일본식민 지배에서 해방되었지만 곧 38선으로 나라가 두 동강이 났습니다. 북한 땅엔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는 공산당 정권이 들어섰습니다. 

 

거역할수 없는 명령

"38선을 넘어가라! 북쪽에 있는 하나님의 사람들을 찾으라!" 는 계시를 받았습니다. ...(중략) ... 창세기부터 묵시록까지 수십 번 밑줄을 그으며 읽고 깨알 같은 글씨로 새까맣게 메모해둔 너덜너덜해진 성경책 하나만 들고 나는 38선을넘어 갔습니다. 그때는 이미 공산당을 피해 북에서 남으로 넘어오는 피난민이 줄을 잇고 있었습니다. 특히 종교를 반대하는 공산당 때문에 많은 기독교 인들이 종교의 자유를 찾아 남쪽으로 내려왔습니다.  공산당은 종교를  아편이라고 하면서 아무도 종교를 갖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런 곳으로 나는 하늘의 소명을 받고 간 것입니다. 목사라면 질색하는 공산당 세상을 향해 제 발로 걸어 들어갔습니다. 피난민이 늘어나자 북쪽의 경계가 삼엄해져 38선을 넘는것조차 쉽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120리 길을 걸어 38선을 넘고 평양에 도착할 때까지 한 번도 내가 왜 이 험난한 길을 가야 하나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스물여섯 살의 새파랗게 젊은 청년이 로마서며 묵시록을 가르치는데 그 내용이 전에 들어보지 못하던 내용이라 그런지 뜻있는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했습니다. 매일같이 와서 말도 없이 이야기만 듣고 가던 반듯한 청년인 김원필은 그렇게 내 첫 번째 식구가 되었습니다. 평양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교편을 잡고 있던 그와 나는 둘이 번갈아 물을길어다 밥을 지어 먹으며 사제의 정을나누었습니다. 나는 한번 성경강해를 시작하면 교회 식구들이 볼일이 있다며  먼저 일어서지 않는 한 멈추지 않았습니다. 얼마나 열정을 다해 가르쳤는지 온 몸에 땀이 줄줄 흘렀습니다. 사람들 몰래 밖에 나가 옷을 벗어서 짜면 옷에서 물이 뚝뚝 흘렀습니다. 여름에만그런 게 아니라 엄동설한 추운 겨울에도 그랬습니다. 그렇게 열을 내어 가르쳤습니다. 예배를 드릴 때는 모두 깨끗한 흰옷을 입었습니다. 찬송가를 수십번 되풀이해 부르며 열정적인 예배를 드렸습니다. 어찌나 감동에 젖어 울부짖는지 우리 교회를 가리켜 "우는교회" 라고 들 했습니다.

 

기성교회의 목사들이 나를 시기 해서 경찰에 고발했습니다. 그러자 가뜩이나 종교를 눈에 가시로 여겨 없애려고 하던 공산당국은 옳다구나 하고 나를 잡아 들였습니다. (1946년8월 11일) 나는 남한에서 올라온 스파이란 죄를 뒤집어쓰고 평양 내무서로 끌려 갔습니다. 이승만이 이북정권에 욕심을 내고 북한에 밀파한 첩자라고 옭아 맸습니다. 쇠고랑을차고 끌려간 지 사흘 만에 머리를 깎이고 감옥에 갇혔습니다. 교회를 꾸리는 동안 길렀던 머리카락이 툭 하고 바닥으로 떨어지던 것이며 내 머리를 깎던 이 아무개의 모습까지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감옥에 있는 동안 죄를 자백하라며 무수히 때렸습니다. 그렇지만 피를 토하고 쓰러져 숨이 끊어질 것 같은 순간에도 정신줄을 놓지 않고 버텼습니다. 고통이 너무 커서 허리가 퍽 하고 꺾인면" 아버지. 나좀구해주시오!"하는 기도가 절로 나왔습니다. 그렇지만 다시 정신을 차리면서 '아버지. 걱정 마이소. 문선명이 아직 안 죽었습니다. 이렇게 형편없이 죽지 않습니다." 하고 배짱을 내밀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나는 아직 죽을 때가 아니었습니다. 내 앞에는 완수 해야할 일들이 산처럼 쌓여 있었고 내게는 그 일을 감당해야 할 사명이 있었습니다. 고문 따위에 굴복해 동정을 구할 정도로 나약한 내가 아니었습니다. 지금도 내 몸에는 그때 생긴 흉터가 여러 군데 남아 있습니다. 살이 패이고 피가 흐르던 자리는 이제 새살이 돋았지만 그날의 끔찍했던 고통은 흉터 속에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나는 그날의 고통이 남긴 흉터를 바라보며 다짐하곤 합니다. "이 상처를 가진 너는 반드시 승리 해야 돼." 소련 조사관까지 나서서 나를 심판했지만  죄가 없는 걸 어쩌겠습니까? 결국 석 달 만에 무죄로 석방되었습니다. 고문으로 피를 너무 많이 흘려 목숨이 위태로운 상태였지만 교회 식구들이 거둬주었습니다. 아무런 대가 없이 내게 생명을 준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다시 힘을 내어 교회 일을 시작했습니다. 이년이 넘으니 교세가 부쩍 커졌습니다.  

 

기성교회는 그런 우리를 가만히 놔두지 않았습니다. 기성교회에 다니던 신도들이  점점 더 많이 우리 교회로 몰려오자 나를 반대하는 자들이 또 경찰서에 투서를 넣었습니다. 1948년 2월 나는 또다시 공산당에게 잡혀갔습니다. 잡혀가자마자 모진 고문이 다시금 시작되었습니다. 고문을 당해 쓰러질 때마다 "내가 맞은 매는 민족을 위해 맞는 거다. 내가 흘리는 눈물은 민족의 아픔을 대신해 우는 거다." 하는 생각으로 버텼습니다. 고통이 너무 심해 정신을 잃을 지경이 되면 영락없이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숨이 끊어질락 말락 하는 순간에 하나님이 나타나십니다. 4월 7일 공판이 있었습니다. 구금된 지 만 40일이 되는 날이었습니다. 공판정에는 이북에서 내로라 하는 유명한 목사들이 우르를 몰려와서 나에게 별의별 욕을 다 해댔습니다. 종교는 아편이라며 공산당도 나를 비웃었씁니다 .공판을 보러 나온 교회식구들은 한쪽에서 구슬프게 울었습니다. 남편이 세상을 따나기라도 한 것처럼 애절하게 울었습니다. 그렇지만 나는 눈물을 흘리지 않았습니다. 나를 보고 몸부림을 치며 울어주는 식구들이 있으니 하늘 길을 가는 나는 조금도 외롭지 않았습니다. 나는 불행한 사람이 아니니 울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판결을 받고 공판정을 떠나면서 교회 식구들에게 수갑 찬 손을 흔들어 주었습니다. 수갑에서 짤랑짤랑 종소리가 나는 것 같았습니다. 그날 바로 평양형부소에 수감되었습니다. 감옥살이는 조금도 두려울 것이 없었습니다. 한두 번 해보는 것이 아니었으니까요. 게다가 나는 감방장하고 친해지는 데 선수입니다. 몇 마디만 이야기를 나누면 어떤 감방장이라도 금새 친구가 됩니다. 나는 누구와도 친구가 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마음이 있으면 누구와도 마음을 터놓게 됩니다. 며칠이 지나자 제일 구석진 곳에 앉아있는 나를 감방장이 윗자리로 끌어 올렸습니다. 변기통 옆의 비좁은 구석이 내가 제일 좋아하는 자리인데 자꾸 더 높은 자리에 앉으라고 했습니다.  아무리 싫다고 해도 막무가내였습니다.

 

감방장하고 친해진 다음에는 방안 사람들을 하나하나 살핍니다. 사람의 얼굴은 그 사람의 모든 것을 말해줍니다. "아 당신은 이렇게 생겼으니 이럴 것이고, 또 당신은 저렇게 생겼으니 저럴 것이오" 하고 이야기를 시작하면 모두들 놀라워 했습니다. 처음 본 내가 자기 속을 알아맞히니 내심으로는 싫어하면서도 인정할수 밖에요. 누구하고도 맘을 터놓고 사랑의 마음을 나누니 감방에서도 친구가 생겨 살인수하고도 친해졌습니다. 억울한 감옥살이였지만 내게는 나름대로 뜻이 있는 단련 기간이었습니다. 이 세상에 아무 뜻 없는 시련은 없습니다. 감옥에서는 이나 벼룩도 다 친구입니다. 감옥안의 추위가 얼마나 혹독한지 죄수복의 시침질한 곳으로 줄줄 지어 기어다니는 이를 잡아 한 곳에 늘어놓으면 이들끼리 서로 달라붙어 동그랗게 됩니다. 그걸 말똥구리처럼 데굴데굴  굴리면 서로 떠러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씁니다. 이는 본래 파고드는 성질이 있어서 서로서로 머리를 들이대고 뭉쳐서는 궁둥이만 내밀고 있는데. 이 광경을 보는 것도  그렇게 재미 날 수 없습니다. 세상에 이나 벼룩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감옥에 있다 보면 이나 벼룩도 소중한 이야기 상대가 됩니다. 빈대나 벼룩을 보는 순간 문득 깨닫게 되는 묵시가 있는데 그걸 놓쳐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이 언제 무엇을 통해 말씀하실지 모릅니다. 그러니 벼룩이니 빈대니 하는 것들도 귀하게 살필 줄 알아야 합니다.

 

밥 한 알이 지구보다 더 크다.

평양형무소에 갇힌 지 한 달 반 만인 5월20일 나는 흥남 감옥으로 이송되었습니다. 혼자 몸이라면 도망이라도 갈 수 있으련만 강도하고 한 조로 묶어놓으니 그렇게 할수도 없었습니다. 차로 열일곱 시간이나 걸리는 먼 길을 가면서 가만히 가만히 앉아 차창 밖을 내다보니 설움이 복받쳤습니다. 개울물이 흐르고 굽이굽이 산골짜기가 이어지는 그 길을 죄수의 몸으로 가야하다니 기가 막혔습니다. 흥남감옥은 실상 흥남 질소비료 공장의 특별노무자 수용소였습니다. 그곳에서 나는 2년 8개월간 고된 강제 노역을 했습니다. 원래 강제노동은 러시아에서 시작된 것으로 세계의 이목과 여론 때문에 유산계급과 반공산주의자들을 무작정 처단할 수 없어 생각해 낸 형벌이었습니다. 강제노동에 착취당하는 사람들은 힘든 노동에 지쳐 죽을 때까지 일해야 했습니다. 러시아의 제도를 그대로 보고 배운 북한 공산당들은 모든 죄수들에게 3년 동안 강제노동을 시켰습니다.  말이 3년이지 고된 노동에 지쳐 저절로 죽게만드는 것이었습니다. 감옥의 하루는 새벽4시 반에 시작됐습니다.  죄수들을 모두 깨워 앞마당에 정렬시키고 불법 소지품이 있는지 몸수색부터 했습니다. 옷을 모두 벗겨 놓고 먼지 하나까지 탈탈 털어가며 샅샅이 뒤졌기 때문에 두 시간은 족히 걸렸습니다. 흥남은 바닷가라 겨울이면 벗은 몸에 칼바람이 불어와 살이 에이는 듯 아팠습니다. 몸수색이 끝나면 형편없는  아침을 먹고 십리 길을 걸어 비료공장으로 향했습니다. 네줄로 늘어서서 얼굴도 똑바로 들지 못한 채 손을 잡고 걷는 죄수들 주변을 소총과 권총으로 무장한 경비원들이 붙어다녔습니다. 만일 줄이 느슨해지거나 손을 잡지 않으면 탈출하는 것으로 간주하여 가차없는 매질을 했습니다.  

 

흥남은 겨울이면 눈이 사람 키만큼 쌓일 정도로 폭설이 쏟아지는 곳입니다. 눈이 한 길이나 쌓인 겨울날. 추운 새벽길을 걸어가면 머리가 빙글빙글 돌았습니다. 얼어붙은 길은 미끄럽기 이를 데 없고 어찌나 매섭게 찬바람이 부는지 머리끝이 곤두섰습니다. 아침밥을 먹었는데도 기운이 없어 자꾸 헛발을 딛기 일쑤였지만. 맥이 풀린 다리를 끌고서라도 일을 하러 나가야 했습니다. 정신이 아득해지는 그 길을. 나는 하늘의 사람이란 사실을 되새기며 갔습니다. 비료공장에는 비료의 원료가 되는 암모니아가 산처럼 쌓여 있었습니다. 컨베이어를 타고 쏟아져내리는 암모니아는 마치 하얀 폭포수같았습니다. 막 쏟아져내린 암모니아는 얼마나 뜨거운지 한 겨울에도 김이 모락모락 났지만 시간이 지나면 그 열기가 식어 얼음처럼 딱딱하게 굳었습니다. 산처럼 쌓인 암모니아를 가마니에 퍼 담는 것이우리의 일이었습니다. 높이가 20미터도 넘는 거대한 암모니아 더미를 우리는 '비료산' 이라고 불렀습니다. 8백~9백 명씩 큰 광장에 나가 암모니아를 퍼 담는 장면은 마치 큰 산을 둘로 쪼개는 형상이었습니다. 열명이 한 조가 되어 하루에 1천4백 가마니씩 퍼 담아야했으니 한사람의 하루 책임량이 백사십 가마니나 되었습니다. 그것을 달성하지 못하면 식량배급이 반으로 줄어버려 죽기 살기로 일했습니다. 조금이 라도 수월하게 가마니를 옮기려고 철사 줄로 바늘을 만들어 가마니를 묶을 때 썼습니다. 도록꼬라고 부르는 운반용 트럭이 지나는 레일 위에 굵은 철사를 올려놓으면 납작하게 눌려져서 바늘 대신 쓸 수 있었습니다. 가마니에 구멍을 낼 때는 공장의 유리창을 깨뜨려 썼습니다. 간수들도 고된 노동에 시달리는 죄수들이 안타까워 공장 유리를 깨는 것을 보고도 어쩌지 못했습니다. 한번은 그 굵은 철사를 이로 물어 자르다가 그만 이가 두 동강이 나 버렸습니다. 지금도 내 앞니를잘 보면 이가 갈라져 있는데. 흥남감옥에서 얻은 잊을 수 없는 기념품인 셈입니다.

 

다들 중노동에  지쳐 몸이  여위어 가는데 나는 줄곧 72킬로그램을 유지해서 다른 죄수들의 부러움을 샀습니다. 체력만은 남부럽지 않던 나도 딱 한번 학질에 걸려 크게 고생한 적이 있었습니다. 한 달 가까이 학질을 앓으면서도 내가 일을 못하면 내 몫까지 일을 해야 하는 다른 죄수들 생각에 하루도 쉬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힘이 좋은 나를 두고'철근 같은 사나이" 라고들 했습니다. 나는 아무리 힘든 중노동이라도 참을 수 있었습니다. 감옥이든 강제노동이든 그런 것쯤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채찍이 제아무리 무섭고 환경이 모질다 해도 가슴에 확고한 뜻이 있으면. 흔들리지 않습니다. 암모니아는 유산이라고도 불립니다. 일본의 가와사키철공소에서 일할 때 탱크에 들어가 유산을 청소하다가 독성 때문에 죽은 사람들을 여러명 보았지만, 흥남은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혹독했습니다. 유산이 닿으면 머리가 빠지고 피부에서 진물이 날 정도로 해로워서 유산공장에서 6개월만 일하면 대부분 각혈을 하고 죽어나갔습니다. 손가락을 보호하느라 골무를 끼지만 가마니를 묶다보면 독한 유산에 닿아 금새 구멍이 나버렸습니다. 그러니 입고 있던 옷은 유산에 녹아 다 뭉개져버리고 살이 갈라져 피가 흐르거나 뼈가 드러나는 경우도 예사였습니다. 살이 떨어져 나간 자리에서 피가 뚝뚝흐르고 진물이 질질 나와도 단하루도 쉬지 못하고 일을 했습니다.그렇게 일을 하고도 하루에 작은 밥공기로 두 그릇이 채 못 되는 배급을 받았습니다. 반찬은 아예 없고 국은 무청이 든 소금물이 전부였습니다. 국물은 목이 타들어갈 정도로 짰지만 그나마 돌처럼 딱딱한 맨밥을 그대로 넘길 수 없어서 어느 누구도 국물 한 방울 버리는사람이 없었습니다. 밥그릇을 받으면 모두들 순식간에 통째로 입속에 털어넣었습니다. 자기 밥을 다 먹고 나면 남들이 밥 먹는 모습을 목을 빼고 바라보다가. 어떤 때는 자기도 모르게 남의 밥그릇에 숫가락을 넣어 싸움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흥남에서 나와 함께 지내던 어떤 목사는 '나한테 콩 한 알만 주면 밖에 나가서 소 두마리를 주겠소" 하고 말하기 까지 했습니다. 죽은 사람의 입속에 있는 밥알까지도 끄집어내 먹을 정도였으니   그때의 배고픔은 그만큼 처절했습니다.

 

배고픈 고통은 실제 겪지 않으면 알수 없습니다. 배가 고플때에는 밥 한알도 얼마나 귀한지 모릅니다. 지금도 흥남만 생각 하면 정신이 번쩍 듭니다. 밥 한 알이 그렇게 까지 온신경을 자극할 수있다는게 믿어지지 않겠지만 배가 고프면 눈물이 쏟아지게 밥이 그립습니다. 어머니보다 더 그립습니다. 배부를 때에는 세계가 큰 것 갖지만 배가 고프면 밥 한 알이 지구보다 더 큽니다. 밥 한 알의 가치가 그렇게 엄청납니다. 감옥에 들어가던 첫날부터 배급받는 주먹밥의 절반을 떼어 동료들에게 주고 나머지 절반만 먹었습니다. 그렇게 석 달쯤 훈련을한 뒤에야 비로소 주먹밥 한 개를 다 먹었습니다. 그러면서 두 사람 몫을 먹는다고 생각하면 배고픔을 견디기가 한 결 수월 했습니다. 감옥살이는 해보지 않은 사람은 짐작조차 할 수 없을 만큼 참혹합니다 .죄수의 절반이  일 년 안에 죽어나가는 바람에 매일같이 감옥 뒷문의로 시체를 넣은 널이 나가는 모습을 지켜 봐야 했습니다. 온 몸의 기름기가 다 빠지도록 일만 하다가 죽어서야 겨우 감옥 문밖을 나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아무리 무자비하고 냉혹한 정권이더라도 그 건 분명 인간의 한계선을 넘어선 것이였습니다. 그렇게 죄수들의 눈물과 한이 담긴 암모니아 포대는 항구를 통해서 러시아로 옮겨졌습니다.

 

눈 내리는 흥남 감옥에서

 

감옥에서 음식 다음으로 그리운 것은 실과 바늘 입니다. 잦은 노동으로 너덜너덜 해진 옷을 꿰매려 해도 실이나 바늘을 구할 수 없어 감옥살이가 길어지면 상거지 꼴이 됩니다. 특히 흥남의 차가운 겨울바람을 조금이라도 막기 위해 구멍 난 옷을 기우려면 길에 떨어진 작은 천 조각도 그리 소중할 수가 없습니다. 쇠똥이 묻은 천이라도 서로 주우려고 난리법석이 납니다. 천은 이떻게든 구하더라도 바늘을 구하기 는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유산 가마니를 옮기던 중에 우연히 바늘 한개가 묻어왔습니다. 시골에서 가져오는 가마니에 어쩌다 덤으로 섞여온 겁니다. 그때부터 나는 함흥감옥의 바느질꾼이 됐습니다. 바늘을 얻은 계 얼마나 기쁘던지 매일같이 남의 바지며 잠방이를 꿰매 주었습니다. 비료공장은 한 겨울에도 땀이 줄줄 흐를 정도로 뜨거웠습니다. 그러니 한여름에는 오죽했겠습니까? 그런데도 나는 한 번도 바짓가랑이를 걷어 올려 정강이를 내보인 적이 없습니다. 오뉴월 삼복중에도 반드시 대님을 매고 일했습니다. 남들이 바지를 훌렁 벗어던지고 속옷 바람으로 일할 때에도 나는 단정한 장바지 차림으로 일했습니다. 공장에서 일을 하고 나면 온 몸이 땀과 비료 가루에 범벅이 되어 사람들은 대부분 일이 끝나자마자 곧바로 옷을 벗어 공장에서 흘러나오는 더러운 물에 몸을 씻었지만. 나는 한 번도 몸을 내놓고 씻지 않았습니다. 그대신 배급으로 나눠주는 물 한 컵을 반쯤 남겨두었다가 남들이 모두 잠든 새벽에 일어나 수건에 물을 적셔 닦았습니다. 새벽의 기운을 모아 기도를 하기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내 소중한 몸을 함부로 내보일 수 없다는 생각에서 그런 것입니다. 감옥에서는 서른여섯 명이 한방에 살았는데 비좁은 방구석에 놓인 변기통 옆이 내 자리였습니다. 여름이면 물이 넘쳐 축축하고 겨울이면 얼음이 얼어 사람들이 기피하는 곳이었습니다. 변기통이라야 뚜껑도없는 조그만 독이었으니 냄새가 나는 것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소금 국에 메밀 주먹밥을 먹은 죄수들은 걸핏하면 설사병이 났습니다. "아이쿠 배야" 배를 감싸안고 변기통까지 종종걸음으로  달려온 죄수들이 궁둥이를 까내리기 무섭게 물똥을 후다닥 싸 버리니 변기통 옆에 있는 걸핏하면 똥물을 뒤집어쓰기 일쑤였습니다. 모두가 잠이 든 한밤중에도 배가 아프다는 사람은 있기 마련이지요. 아구구구 하며 다리를 밟힌 사람들의 비명 소리가 들이면 나는 재빨리 일어나 구석으로 가 앉습니다. 사람들을 밟으며 급히 변기통으로  달려온사람은  미쳐 피하지 못하는 날이면 그대로 뒤집어쓰고 맙니다. 그래도 사시사철 똥물이 튀는 그 구석자리를 내 자리로 알고 살았습니다. "하필이면 꼭 그 자리에만  앉을게 뭐요?" 하고 다른 죄수들이 물어보면 "여기가 젤 편합니다."하고 말했습니다.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 그 자리에 앉는 게 정말 마음이 편했습니다.

 

나는 문학이니 예술이니 하는 것이 특별한 거 쇼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뭐든지 나와 마음이 통해 친구가 되면 문학하고 예술인 것입니다. 변소에서 변 떨어지는 소리가 아름답고 즐겁게 들리면 그 또한 음악과 다를 바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변기통옆에 누워있던 나에게 튀기던 똥물도 내 생각에 따라서는 멋진 예술작품이 될 수도 있습니다.당시 내 수감 번호가 596번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나를 오구륙 번이라고 불렀습니다.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누워 천장을 바라보며 "오구륙. 오구륙..." 하며 혼잣말을 하다가 후루룩 혀를 굴려 발음하면"오구륙"이 억울"로 들렸습니다. 나는 정말 억울한 죄인이었습니다. 공산당은 감옥 안에 '독보회' 를 만들어 자아 비판을 시키고 보안대를 내세워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했습니다. 그리고 매일 그날 배운 것을 감사문으로 써내라고 했지만 나는 단한 장도 쓰지 않았습니다. " 김일성 어버어 수령이 우리를 사랑하사 매일같이 이밥을 주고 고깃국을 주고 이렇게 잘살게 해주셔서 감사 합니다. '라는 글 따위는 절대 로 쓸 수 없었습니다. 아무리 죽음이 코앞에 닥친다 해도 무신론자인 공산당에게 감사문을 바칠 수는 없는 일이었습니다. 나는 감사문을 쓰는 대신 감옥에서 살아남기 위해 남보다 몇 배 열심히 일했습니다. 1등 노동자가 되는 것만이 감사문을 쓰지 않고도 배겨낼 수 있는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덕분에 1등 모범수가 되어 공산당 간부가 주는 상 까지 받았습니다. 감옥에 있는 동안 몇 번이나 어머니가 찾아오셨습니다. '''(중랴)...한창 이 나이에 옥살이하는 자식에게 먹이기 위해 사돈의 팔촌에게 까지 쌀 한 줌씩 을 얻어 미숫가루를 만들어 오셨습니다. 면회소의 철창 밖으로 아들의 얼굴을 마주한 어머니는 눈물부터 흘리셨습니다. 그렇게도 강인하신분이감옥의 아들을 보자마자 목이메어 얼굴도 들지 못하시고 계속 우셨습니다. 내 꼴이 너무 험악해서 그랬겠지만 제아무리 강인한 분이라도 고통 받는 아들 앞에서는 그저 나약한 어머니에 지나지 않으셨습니다. 

 

어머니는 내가 결혼할 때 입었던 명주 바지를 건네주셨습니다. 입고 있던 관복은 암모니아에 녹아 너덜너덜해져서 속살이 내비쳤지만 어머니가 주신 명주 바지를 입지 않고 다른 죄수에게 줘 버렸습니다. 빚을 내서 마련해 오신 미숫가루도 어머니가 보시는 눈앞에서 다른 이들 먹으라고 모두 나눠주었습니다. 아들을 먹이고 입힐 마음에 정성을 다해 지어오신 음식과 옷을 모두 다른 이에게 줘 버리는 것을보고 어머니는 가슴을 쥐어뜯으며 우셨습니다. "어머니 . 나는 문 아무개의 아들이 아닙니다. 문아무개의 아들이기 전에 대한민국의 아들입니다. 대한민국의 아들이기 전에 세계의 아들이요. 하늘과 땅의 아들입니다. 그들을 먼저 사랑하고 나서 어머니의 말을 듣고 어머니를 사랑하는것이 도리임을 압니다. 나는 졸장부 아들이 아니니 그 아들의 어머니 답게 행동해 주십시오." 얼음장 처럼 차가운 말을 내뱉었지만 어머니의 눈물을 보는 내 가슴은 찢어질 듯 아팠습니다. 자다가도 그리워 깨는 어머니 이건만 약해지는 마음을 다잡아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에게 사사로운 모자의 인연보다는 단 한 사람이라도 더 따뜻하게 입히고. 더 배불리 먹이는 것이 종요했기 때문입니다. 나는 감옥 안에서도 사람들과 시간을 틈타 이야기하기를 즐겼습니다. 내 주변에는 늘 이야기를 들으러 모인 사람들로 그득했습니다. 배고프고 추운 옥살이 중에도 마음이 통하는 사람들과의 나눔은 따뜻했습니다. 흥남 에서의 인연으로 나는 12명의 동지이자 평생 함께할 식구를 얻었습니다. 그중에는 이북5도 기독교연합회의 회장을 지낸유명한 목사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목숨이 오가는 위험속에서 혈육보다 더 뜨거운 정을 나눈 내 뼈와 살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들이 있어서 내 감옥살이는 헛되지 않았습니다. 나는 새벽마다 그들의 이름을 일일이 부르며 정성을 들였고. 그들이 바지춤 사이에 숨겨두었다가 나에게 쥐어준 미숫가루 한줌을 수천 배로 갚아줘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유엔군이 열어준 감옥 문

흥남감옥에 갇혀 지내는동안 6.25전쟁이 일어났습니다. 전쟁이 일어난 지 사흘 만에 국군이 수도 서울을 내주고 남쪽으로 떠밀려 내려갔습니다. 그러자 미국을비롯한 16개국 군인들이 유엔군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했습니다. 인천을 통해 남한에 상륙한 미군은 북한의 대표적인 공업도시인 흥남을 밀고 올라왔습니다. 흥남 감옥은 자연히 미군의 폭격목표가 되었습니다. 폭격이 시작되자 간수들은 죄수를 그대로 버려둔 채 전부 방공호에 피신해 버렸습니다. 살든지 죽든지 상관치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루는 눈앞에 예수님이 나타나 눈물을 흘리고 가시는 모습을 보고 문득 예감이 이상하여 "모두들 내게서 12미터 이상 떨어지지 마시오!" 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1톤짜리 폭탄이 내게서 불과 12미터 거리에 떨어져 내 곁으로 피했던 죄수들만 겨우 목숨을 건졌습니다.폭격이 심해지자 간수들은 죄수들을 처형하기 시작했습니다. 죄수들의 번호를 부르면서 사흘 치 식량과 삽을 가지고 나오라고 했습니다. 다른 감옥으로 이송되는 거라 생각하면서 불려나간 이들은 두 번 다시 감옥으로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산으로  끌고 올라가 땅을 파게 한 뒤 그대로 묻어버린 것입니다. 형량이 무거운 죄수들부터 불려 나갔는데. 가만히 헤아려 보니 다음 날은 바로 내 차례였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날 밤. 흥남감옥 위로 폭탄이 장맞비 처럼 쏟아졌습니다. 1950년 10월 13일 인천상륙작전으로 한반도에 올라온 미군이 평양을거쳐 흥남으로 밀고올아온 것입니다. B-29기를 앞세워 총공격을 감행한 미군은 그날 흥남 전체가 불바다가 될 정도로 밤새도록 폭탄을 퍼부어 댔습니다. 높이 솟아있던 감옥의 담벼락이 순식간에 무너져 내리자 놀란 간수들은 모두 줄행랑을 쳤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를 겹겹이 둘러싸고 있던 감옥 문이 열렸습니다. 새벽 2시쯤 나는 다른 죄수들과 함께 당당히 걸어서 흥남 감옥을 나왔습니다. 

 

 2년 8개월 만에 감옥에서 나왔으니 몰골이 참으로 기가 막혔습니다. 속옷과 겉옷 모두 어느 하나 성한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 누더기 를 입고 상거지 차림으로 감옥에서 부터 나를 따르던이 들과 함께 고향 대신 평양으로 향했습니다.그들도 모두 처자식을버리고 내 뒤를 따랐습니다. 고향에서 내 걱정에 눈물 마를 날이 없을 어머니 모습이 눈에 선했지만. 평양에 남아 있는 교회 식구들을 챙기는 것이 우선이었습니다. 평양까지 걸어 가다보니 북한이 이미 전쟁준비를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똑똑히 목격했습니다. 비상시 군사도로로 쓸 수 있도록 큰 도시들 사이에 2차선 도로를 넓게 뚫어놓았습니다. 그리고 시멘트를 두툼하게 발라 30톤 탱크가 지나가도 끄떡없을 만큼 튼튼한 다리를 곳곳에 만들어 두었습니다. 흥남감옥의 죄수들이 목숨을 걸고 퍼 날랐던 비료를 러시아의 낡은 무기로 바꿔와 38선에 일제히 배치했습니다. 평양에 닿자마자 흥남감옥에 같히기 전에 함께했던 식구들을 일일이 찾아다녔습니다. 그 사람들이 어떤 곳에 어떤 처지로 놓여있는지 궁금해서 견딜 수 없었습니다. 전쟁 때문에 뿔뿔이 흩어져 있었지만 어떻게든 그들을 찾아서 살아갈 수 있도록 뒷수습을 해야 했습니다. 누가 어디에 사는지 도무지 알 길이 없으니 무턱대고 평양시내 구석구석을 뒤지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일주일 동안 고작 서너 명밖에 찾지 못햇습니다. 감옥에서 아껴 두엇다가 가지고 나온 쌀가루에 물을 부어 죽을 끓여 주었습니다. 흥남에서 평양까지 걸어오는 동안 꽁꽁 언 감자 한두 알로 주린 배를 채우면서도 손대지 않고 아껴둔 식량이었습니다. 그들이 맛있게 먹는 모습만 봐도 배가 불렀습니다. 늙은이건 젊은이건 생각나는 사람들을 모두 찾아 헤매느라 평양에서 40일이나 머물렀습니다. 식구들을 대부분찾았지만 결국 행방을 알수 없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도 내 마음에서 지워지지 않았습니다. 12월 2일 밤 남쪽을 향해 걷기 시작했습니다. 피난민 무리의 삼십 리쯤 뒤를 김원필을 비롯한 우리 식구들이 따라가는 꼴이 었습니다.  

 

제대로 걷지 못하는 식구까지 데리고 피난길에 올랐습니다.그는 흥남감옥에서부터 나를 따르던사람이었습니다 .감옥을 먼저 나온 그를 찾아가보니 식구들은 모두 피난을 가버렸고 다리가 부러진 그만 빈집에 남아 있었습니다. 나는 다리를 쓰지 못하는 그를 자전거에 태워 데려갔습니다. 번번한 군사도로는 모두 인민군들이 차지한 뒤라 얼어붙은 논바닥 위를걷고 걸어 피난길을 재촉했습니다. 뒤에서는 중공군이 바짝 뒤를 쫓고 있는데다 걷지도 못하는 사람을 데리고 험한 논길로 가려니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길이 너무 나빠 절반은 그를 등에 업고 빈 자전거를 끌며 내려왔습니다. 나에게 짐이 되는 것이 싫다며 도중에 몇 번이나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는 그를 달래기도 하고 호통도 치며 끝까지 함께 했습니다. 아무리 ?겨 가는 피난길 이라지만 밥은 먹어야 했습니다. 피난민들이 허둥지둥 버려두고 간 집으로 들어가 쌀독. 쌀독. 노래를 부르며 찾아다녔습니다. 쌀이나 보리. 감자를 있는대로 찾아내서 끓여 먹으며 간신히 연명했습니다. 밥그릇은 고사하고 수저도 없어서 나뭇가지를 잘라 젓가락 대신 ? 밥은 술술 잘 넘어갔습니다. 궁상이 상 팔자라지요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는데 먹지 못할 것이 없었습니다. 보리개떡 하나도 상감 마마의 진수성찬이 부럽지 않을 정도로 맛있었습니다. 아무리 배가 고파도 나는 항상 먼저 숟가락을 놓았습니다. 그래야 남들이 한 숫가락이라도 마음 편히 더 먹을 수 있으니까요 한참피난길을 걷다보니 임진강 근방에 당도했습니다. 그런데 왠지 한시 바쁘게 강을 건너야 할 것처럼 마음이 급해졌습니다. 아무래도 이고개를 넘어야 살길이 열릴 것 같았습니다. 나는 김원필을 사정없이 내몰았습니다. 나이가 어린 김원필은 걸어가면서도 졸았는데. 그를 몰아치며 자전거를 끌고 밤새 팔십 리 길을 걸어 임진강가에 닿았습니다 . 다행히 강물이 꽝꽝 얼어 있었습니다. 우리는 앞서 온 피난민의 뒤를 쫓아 임진강을 건넜습니다. 우리뒤로도 쉴 새 없이 피난민들이 몰려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강을 건너자 마자 유엔군이 더 이상 임진강을 못 건너게 강을 막아 버렸습니다. 조금만 늦었어도 강을 건너지 못할 뻔한 순간이었습니다. 비로소 강을 건너자 자신이 지나온뒤를 힐끗 돌아보던 김원필이 조심스럽게 물었습니다. 선생님은 임진강이 막힐 것을 미리 아셨습니까? "알고 말고지. 하늘 길을 가는 사람 앞에는 그런 일들이 많이있다네. 한고개만 넘으면 살길이 있는데. 사람들은 그걸 모른다네. 일분일초가 시급한 상황이라 여차하면 자네 멱살이라도 잡고 건널 참이었네." 김원필은 내 말에 감동한 모양이었지만 내마음은 착잡하기 그지 없었습니다. 38선으로 남북이 갈라진 지점에 막 도착했을 때는 한발은 남한. 다른 한발을 북한에 딛고 기도 했습니다. "지금은 비록 이렇게 떠밀려 내려가지만 곧 다시 올라오겠습니다. 반드시 자유세계의 힘을 모아 북한을 해방하고 남북을 통일하겠습니다. 피난민들에 뒤섞여 걸어가는 내내 그렇게 기도를 올렸습니다.

 

그을린 나뭇가지에도 새싹은 핀다.

1955년 7월4일.경찰이 우리 교회로 들이닥쳐 나를 비롯해 김원필과 유효영. 유효민. 유효원을 모두 잡아갔습니다. 기성교회의 목사들과 장로들이 권력층과 손을 잡고 정치권에 투서를 넣어 우리교회를  없애려 한 것이었습니다. 그 때문에 나와 처음부터 뜻을 함께했던 식구 네 사람이 공연히 감옥살이를 했습니다. 일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경찰은 내 과거를 샅샅이 뒤져 병역기피란 죄목을 찾아냈습니다. 북한에서 감옥살이를 하고 내려와 보니 이미 군대 갈 나이가 지나있었던  나에게 병역법 위반 혐의를 뒤집어 씌웠습니다. 1955년 7월13일.또 다시 감옥에들어갔습니다. 서대문 형무소였습니다. 쇠고랑을 찾지만 부끄러울 것도 섭섭할 것도 없었습니다. 감옥살이는 내가 가는 길에는 아무런 방해도 되지 않았습니다. 격분의 심정을 자극하는 탄탄한 동기가 되었지 나를 좌절시키는 함정이 되지는 않았으나 도리어 나로서는 장사 및천을 번 셈입니다. "감옥에서 사라질 내가 아니다. 난 죽을 수없어. 이건해방의 세계를 향해 도약하기 위한발판 일 뿐이다." 라고 생각하며 옥살이를 이겨냈습니다. 악한 것은 망하고 선한 것은흥하는 것이 세상의 이치이고 하늘의 법입니다. 아무리 똥감태기 안에 들어갔다 하더라도 순수하고 참된 마음을 잃지 않는다면 절대 망하지 않습니다. 내가 쇠고랑을 차고 갈때. 지나가는여자들이 곁눈질을 하며 얼굴을 찡그렸습니다. 음란한사이비 교주이니 보기도 역겹다는 표정이었습니다. 하지만 겁날 것도 부끄러울 것도 없었습니다. 더러운 말로 나와 교회를 희롱해도 나는 결코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아침 8시 가 되어야 면회가 시작되는데 우리 식구들은 새벽부터 형무소 담장 밑에 줄을 서서 기다렸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욕하면 욕할수록 내가 외로우면 외로울수록 나를 위로하고 나를 위해 눈물을 흘리는 사람도 점점 더 많아졌습니다. 면회온 교회 식구들을 내가 다정하게 맞아준 것도 아니었습니다. "부산스럽게 오긴뭐 하러와?" 하고 핀잔을 주기 일쑤였습니다. 그래도 눈물을 줄줄 흘리며 나를 따랐습니다. 그런 것이 믿음이고 사랑입니다.

 

종요한것은 진실한 마음입니다.

 

석달 만에 나는무죄로 석방되어 세상에 나왔습니다. 그리고 내가 하나님의 사랑과 생명에 빚진 자임을 다시 깨달았습니다. 그 빚을 갚기 위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교회터를 찾아 나섰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우리 교회를 지어 주십시오"라고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작고 보잘것 없는교회를 불편해 하거나 부끄러워 한 적도 없었습니다. 기도할자리가 있으면 그걸로 감사할 뿐 넓고 편안한 자리는 바라지도 않았습니다. 진정으로 마음을 다해 남이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처럼 나의 진심도 치열하게 들어주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 했습니다. 눈물을 흘리며 밤새 기도를 하니 마룻바닥이 마를 날이 없었습니다. 마룻바닥에 내 피땀이 그대로 젖었습니다. 훗날 미국에 머무는 동안 교회 식구들이 청파동 교회를 번듯하게 뜯어고친다는 소식을 듣고 당장 공사를 중지하라는 전보를 쳤습니다. 청파동 교회는 나 개인의 역사가 담긴 곳이기도 하지만. 우리 교회의 역사를 그대로 증언하는 곳이기도 합니다. 제아무리 멋있게 뜯어고친들 역사가 사라지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중요한 것은 번듯한 꼴이 아니라 그 속에 깃든 뜻입니다. 부족하면 부족한대로. 기기에 전통이 있고 빛이 있으며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전통을 존중할 줄 모르는 민족은 망하고 맙니다. 청파동 교회의 기둥에는 "언제 무슨 일 때문에 그 기둥을 붙잡고 눈물을 흘렸는가" 의 역사가 그대로 새겨져 있습니다. 붙잡고 눈물 흘리던 기둥을 보면 통곡이 나오고 비뚤어진 문짝을 봐도 옛 생각이 납니다. 그런데 지금은 옛날 마룻바닥이 다 없어졌습니다. 밤새 엎드려 기도하며 피눈물을 흘리던 마룻바닥이 없어졌으니 그 눈물자국 역시 사라졌습니다. 내게 필요한 것은 그런 아픔의 추억입니다. 모양이나 외관은 낡아도 상관없습니다. 세월이 지나 우리에게도 잘 지어진 교회들이 많이  생겼지만 나는 그런곳보다는 청파동언덕위의  비좁고 낡은 집을 찾아가 기도하는것이 더 편합니다. 교회를 시작하던 무렵 나는 미군들이 입던 점퍼에 검정 물을 들인 노동복을 입고 단상에 서서 땀과 눈물로 범벅이 되어 설교했습니다. 통곡하지 않는 날이 없었습니다. 눈물이 마음 속에서 차고 넘쳐 밖으로 흘러내렸습니다. 정신이 아득해지고 숨이 넘어갈것 같은 날들이었습니다. 옷이 땀에 젖고 머리에 서 땀방울이 흘러내렸습니다. 학생 밥을 먹어야 하는 전도사들은 그 학생이 끼니를 거르고 배가 고플 것을 생각하면서 밥을 입에 물고는 눈물을 쏟기 일쑤였습니다. 밥보다 정성이 가득해 모두들 죽더라도 뜻을 이루자.는 절박한 심정으로 버텼습니다.

 

나를 위해 울지 말고 세계를 위해 울라

 

그들은 나를 미국에서 추방하기 위해 여러가지 일을 꾸며냈습니다. 결국 나는 또다시 감옥에 갇혔습니다. 나락으로 떨어진 미국의 도덕성을 일으켜 세워 하나님의 뜻에 맞는 나라로 회복시키는 일밖에 한 것이 업는데 세금을 사취했다는 죄를 뒤집어 씌웠습니다. 내 나이 예순이 훨씬 넘었을 때입니다. 나는 미국에 정착하던 첫 해에 세계 각국에서 보내온 선교 헌금을 뉴욕의 은행에 예금했습니다. 미국에서는 종교활동 기금을 종교 지도자의 이름으로 은행 계좌에 넣는 게 전통적인 관습입니다. 그러게 넣어둔 예금 에서 3년 동안 이자소득이 생겼는데 그 이자소득에 대한 세금을 신고하지 않아 탈세 혐의가 있다며 뉴욕 검찰청이 기소한것 이었습니다. 결국 나는 1984년 7월20일. 코네티컷 주의 댄버리 연방교도소에 수감 되었습니다.  댄버리에 수감되기 전날. 벨베디아에서 마지막 집회를 가졌습니다. 벨베디아 를 가득 메운 식구들이 눈물을 흘리며 나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나를 따르던 제자들 수천명이 벨베디아로 몰려들었습니다. 나는 그들을 향해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나는 결백합니다. 나는 아무 잘못도 저지르지 안았지만 댄버리 저너머에서 떠오르는 찬란한 희망의 불빛을 보며 갑니다. 나를 위해 울지 말고 미국을 위해 울어주십시오. 미국을 사랑하고 미국을 위해 기도하십시오. " 슬픔에 잠긴 젊은이들에게 나는 희망의 주먹을 불끈 쥐어 보였습니다. 교도소에 들어가기 전에 내가 남긴  성명서는 종교인들 사이에 큰 파문을 일으켰습니다. 결백운동 innoocnt Movement 이 벌어지고 나를 위한 기도의 물결이 거세게 일어났습니다. 감옥에 가는 건 겁날 게 없었습니다. 나는 감옥살이에 익숙한 사람 입니다. 그러나 주위 사람들의 마음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유대인들이 내 목숨을 없애기 위해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며 겁을 냈습니다. 하지만 나는 당당하게 감옥으로 향했습니다. 

 

"왜 우리 아버지가 감옥에 가야 합니까?

 

댄버리 교도소에서도 남을 위해 살려고 하는 내 원칙을 그대로 지켰습니다. 아침 일찍 일어나서 더러운 곳을 깨끗이 치웠습니다. 식당에 가서도 남들은 탁자에 코를 박고 졸거나 수다를 떠는데 나는 허리를 반듯이 펴고 차례를 기다렸습니다. 주어진 일은 남보다 훨씬 많이했으며. 주위 사람들을 살폈습니다. 남는 시간에는 성경책을 읽었습니다. 밤이고 낮이고 성경책을 보고 있으니 어떤 죄수가 "그게 당신의 성경책이야? 내 성경책은 이건데 한번 보겠어? " 하며 잡지를 던져 주었습니다. "허슬러"라는 도색잡지 였습니다. 댄버리 교도소에서 나는 말없이 일하는 사람. 책 읽는 사람. 명상하는 사람으로 불렸습니다. 그렇게 석 달을 지내고 나니 감옥 안의 죄수며 간수들과도 친해졌습니다. 마약을 하는 사람과도 친해졌고. 도색잡지를 자기 성경책이라고 했던 죄수와도 친해졌습니다. 그러자 한두달이 지나면서 댄버리에 수감되어 있던 죄수들이 모두 자기가 받은  차입품들을 내게도 나누어 주었습니다. 사람들과 정을 나누자 감옥 속에 봄날이 찾아온 듯 했습니다. 사실 미국은 나를 굳이 감옥에 보내고 싶어 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독일에 나가있던 틈을타서 기소결정을 내렸으니 내가 미국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그뿐인상황이었습니다. 미국은 나를 감옥에넣으려고 했던게 아니라  추방하려 한것입니다. 내가 "레버런 문"으로 명성을 얻고 나를 따르는 사람들이 걷잡을수 없이 늘어나자 나의 길을 방해한것입니다. 한국에서 처럼 나는 기성교회들에게 눈엣가시처럼 거슬리는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목적을 알고 있던 나로서는 미국에 입국해서 스스로  감옥에 갔습니다. 그때까지도 미국에서 해야할 일들이 남아 있었으니까요. 

 

나는감옥에 가는 것이 나쁘지만은 않다고생각했습니다. 눈물골짜기에서 우는 사람을 회개시키기 위해서는 내가 먼저 눈물을 흘려야 합니다. 내가 그렇게 처참한 마음이되지 않으면 상대를 굴복시킬 수없습니다. 그런데 하늘의 섭리는 참으로 오묘합니다. 내가 감옥에 갖히자 뜻밖에도 미국 정부가 종교의 자유를 침해했다며  분노한 성직자 들 7천여명이 나를 구명하는 일에 앞장섰습니다. 그중에는 미국 보수 기독교단을 대표하는 남침례교회의 제리 포웰 목사와 오바마 대통령 취임식 때 축복기도를 한 진보계열의 조셉 라우리 목사도 있었습니다. 그들은구명 시위에 앞장섰습니다.  딸 인진이도 그들과 함께 팔짱을 끼고 행진했습니다. 7천여 명의 성직자들 앞에서 눈물로 쓴 편지를 읽기도 했습니다.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저는 문선명 목사의 둘째딸 문인진입니다. 1984년 7월 20일은 세계의 종말이 우리 가족에게 찾아온 것 갔습니다. 이날은 바로 아버님께서 교도소에 들어가신 날입니다. 이런 일이 아버님께 일어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그것도 하나님이 축복한 자유의 땅이며. 아버님이 모시도 사랑하고 봉사해온 미국 땅에서 말입니다. 아버님은 미국에오셔서  매우열심히 일하셨습니다. 저는아버님이 주무시는 것을거의 본적이 없습니다. 항상 새벽에 일어나셔서 기도하시고 일하십니다. 저는미국의 장래와 하나님을 위해 아버님만큼 헌신 적으로 일하시는 분을 본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미국은 아버님을 댄버리 교도소에 수감 시키고 말았습니다. 아버님이 왜 댄버리 교도소에 가야 합니까? 그분은 자신의 고통에는 개의치 않는 분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실천해온 아버님의 삶은 눈물과 고난으로 점철돼 있습니다. 지금 아버님의 연세는 예순넷이십니다. 아버님에게 는 미국을 사랑한 죄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그 분은 지금 이 순간에도 교도소 식당에서 접시를 씻으시거나 바닥을 닦고 계십니다. 지난주에 저는 죄수복을 입고 계신 아버님을 처음 면회했습니다. 저는 울고 또 울었습니다. 아버님은 "나때문에 울지 말고 미국을 위해 기도하렴" 하고 말씀 하셨습니다. 아버님은 전 세계 수백만 교인에게 말씀하신 이야기를 저에게도 그대로 전하셨습니다. "네 분노와 슬픔을 돌이켜 이 나라를 진정 자유로운 나라로 만들 수 있는 강력한 힘으로 바꿔라" 

 

아버님은 감옥 안에서 어떤 힘든 일도 하실 것이며. 어떤 억울함도 다 참을 것이며. 어떤 십자가도 능히 지실 거라 하셨습니다. 종교의 자유는 모든 자유의 기초입니다. 종교의 자류를 위해 지지해주신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나는모범수로 인정을 받아 6개월 감형을 받고 13개월만에 출소했습니다. 교도소 문을 나서던 날 저녁에 워싱턴에서 출감 환영 만찬회가 열렸습니다. 유대교의 랍비들과 기독교의 목사들이 1천7백명이나 모여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나는 그곳에서 또 한번 "초종교 초종파" 를 주장했습니다. 누구의 눈치를 볼것도 없이 큰 소리로 세상을 향해 외첬습니다. "하나님은 종파나 교파주의자가 아닙니다. 지엽적인 교리 이론에 얽매이실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부모심정. 그리고크신 사랑의 마음에는 민족과 인종의 구분이 없습니다. 국가나 문화전통의 벽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만민을 같은 자녀로 품기 위하여 애쓰고 계십니다. 지금 미국은 인종문제. 가치관의 혼란과 사회. 윤리. 도덕의 퇴폐문제. 영적 고갈과 기독교 신앙의 몰락 문제. 무신론에 입각한 공산주의 문제 등 심각한 병폐를 안고 있습니다. 제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이 나라를 찾아온 이유는 여기에 있습니다. 오늘의 기독교는 크게 각성하고 하나로 뭉쳐야 합니다. 목회자들 또한 지금까지 해온 역할을 재점검하고 회개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회개하라  외치서던 그때의 정경이 2천 년이 지난 지금 이 땅 위에 반복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미국에 분부하신 중대한 사명을 다해야 합니다. 지금 이대로는 절대 안 됩니다. 새로운 종교개혁이 일어나야 합니다. 옥살이를 하고 나오자 더 이상 나를 얽매는 것이 없었습니다. 나는 이전보다 더 강한 목소리로 타락한  미국에 대해 경고의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도덕성을 되찾는 것만이 미국을 다시 일으켜 세울 수 있는 힘이라는 것을 강력하게 알리고 또 알렸습니다. 아무 죄도 없이 감옥생활을 했지만 하나님의 뜻은 거기에도 있었습니다. 내가 출감한 뒤. 나를 위해 구명운동을 벌였던 사람들은 번갈아 가며 부산 범냇골과 서울을 찾아왔습니다. 도대체 레버런 문의 어떤 정신이 미국의 젊은이 들을 그토록 매료시킨 것인지를 알기 위해 찾아온 것입니다. 그들은 짧은 방문기간 중에도 일부러 틈을 내어 우리 교리를 배우고 돌아갔습니다. 나는 그들을 중심으로 "미국성직자연합회 ACLC"를 조직해서 지금까지 초종교 초교파적인 신앙운동과 평화운동을 벌이고 있습니다.

 

아들을 먼저 보낸 아내의 슬픔

 

웬만한 일에는 꿈쩍도 하지 않는 아내였지만. 둘째 아들 흥진이의 죽음 앞에서는 힘들어 했습니다. 1983년 12월의 일이었습니다. 나는 아내와 함께 전남 광주에서 열린 승공궐기대회에 참석 중이었습니다. 흥진이가 교통사고를 당해 병원으로 실려 갔다는 국제 전화를 받고 이튿날 바로 뉴욕으로 갔지만 병실에 누워있는 흥진이는 이미 의식이 없었습니다. 언덕길을 과속으로 내려오던 트럭이 급하게 브레이크를 밟다가 옆으로 밀리면서 일어난 사고였습니다. 흥진이 차에는 절친한 친구 두명이 같이타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목숨이 위태로운 다급한 상황 속에서도 흥진은 핸들을 급히 오른쪽으로 꺽어 자신이 앉은 운전석을 트럭과 맞부딛치게 하고 옆자리에 앉았던 친구들의 목숨을 구했습니다. 사고가 난 집 근처의 언덕길을 가보았더니 도로에는 오른쪽으로 급하게 꺾인 타이어의 검은 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결국 흥진이는 1월 2일 새벽에 하늘나라로 갔습니다. 바로 한 달 전에 열일곱살 생일을 지낸후였습니다. 다 키운 자식을 먼저 보내는 아내의 슬픔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었지만 소리 내어 울기는 커녕 눈물조차 흘리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영혼의 세계를 아는 사람들입니다. 사람의 영혼은 목숨을 잃는 다고 해서 먼지처럼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영혼의 세계로 가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랑하는 자식을 이 세상에서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다는 것은 부모로서 견디기 힘든 고통입니다. 마음대로 울지도 못하던 아내는 흥진이를 태운 영구차만 자꾸 어루만졌습니다. 

 

사랑하면 통일이 된다.

 

내가 처음 예루살렘에 발을 디딘 것은 1965년이었습니다. 당시는 "6일 전쟁"이 일어나기 전이라 예루살렘이 아직 요르단의 영토일 때였습니다. 나는 예수가 빌라도의 재판정에 끌려가기 전에 피눈물을 흘리며 기도를 올렸던 감람산을 찾았습니다. 그곳에는 이미 감람교회가 세워져 있었습니다. 나는 예수가 기도하는 모습을 지켜보았을  2천 년된 감람나무를 어루만졌습니다. 그리고 그 나무에 유대교와 기독교. 이슬람교를 의미하는 세 개의 못을 박으며 그들이 하나 되는 날을 위한 기도를 올렸습니다. 나는 평생 평화를 위한 일에 몸을 바쳐왔습니다. 평화라는 말만 떠올리면 지금도 목이 메어 밥이 넘어가지 않고 눈시울이 붉어집니다. 세계가 하나 되어 평화를 누리는 그날을 그려보는 것만으로도 그저 감격스러울 뿐입니다. 평화란 그런 것입니다. 생각이 다르고 인종이 다르고 말이 다른 사람들을 하나로  연결하는 것입니다. 그런 세계를 그리워하고 바라는 마음입니다. 평화는 구체적인 행동이지 막연한 꿈이 아닙니다. 

 

"소련따에 종교의 자유를 허락하십시오"

 

다윈의 진화론은 검증된질이가 아닙니다. 정신이 물질에서 비롯된다는 그들의 사상은 뿌리부터 잘못된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물이며 모든 존재는 정신과 물질의 양면을 지닌 통일체입니다. 한마지로 공산주의 이론과 사상은 그릇된 것입니다. 그러데도 나는 일본유학 시절에 공산주의자들과 함께 독립운동을 했습니다. 그들 역시 조국광복을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은 좋은 친구들이였지만 그들과 나는 근본적으로 생각이 달랐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조국이 광복된후 각자의 길을 걸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소련 정부에서 보내준 리무진을 타고 크레물린 궁전 깊숙이 들어갔습니다 .대통령 접견실로 들어가 우리 내외가 앉고 그 옆으로 소련의 전직 각료들이 둘러앉았습니다. 얼굴 가득 환한 웃음을 땐 고르바초프 대통영은 사진이 페레스트로이카가 어떻게 성고?고 있는지를 열심히 설명했습니다. 그리고는 밀실로 들어가 두 사람만의 특별회담을 가졌습니다. 나는 그때를 놓치지 않고 고르바초프 대통령에게 말했습니다. "대통령께서는 페레스트로이카로 이미 훌륭한 성공을 거두고 계시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한 개혁을 할 수 없습니다. 지금 당장 소련 땅에 종교의 자유를 허락하십시오. 하나님 없이 물질세계만을 개혁하려한다면 페레스트로이카는 반드시 실해합니다. 공산주의는 이제 곧 끝납니다. 이 나라에 종교의 자유를 불어넣는 것만이 나라를 구하는 길입니다. 이제는 러시아를 개방한 용기로 전 세계평화를 위해 일하는  세계의 대통령이 되어야 할 때입니다. " 종교의 자유라니. 전혀 예상치 못했던 말이 튀어나오자 고르바초프 대통령은 적잖이 당황하며 얼굴을 굳혔습니다. 그렇지만 독일통일을 허락한 사람답게 곧 굳어진 얼굴을 풀며 내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였습니다.

 

한반도의 통일이 곧 세계의 통일

 

고르바초프 대통령을 만나고 크레믈린 궁을 나오면서 나는 수행 중이던 박보희에게 특별한 지시를 하나 내렸습니다. "1991년이 넘어가기 전에 김일성 주석을 만나야겠다. 시간이 급해! 소련은 이제 한두 해 안에 끝나고 만다. 문제는 우리나라야. 어떻게든 김일성 주석을 만나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나는 것을 막아야해".소련이 붕괴되먼 전 세계 공산국가들도 함께 괴멸되므로 마음이 급했습니다. 그렇다면 궁지에 몰린 북한이 어떤 도발을 해올지 알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더구나 북한은 핵무기에 대한 집착이 대단했으니 더더욱 불안했습니다. 북한과의 전쟁을 막으려면 북한과 아야기할 수 있는 채널이 있어야 했는데 그때까지 우리에게는 그런것이 없었습니다. 어떻게든 김일성 주석을 만나 핵무기에 대한 야욕을 버리고 남한 을 선재공격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내야 했습니다. 40년만에 만난 형제들을 껴안고 울지 못하는 내 마음은 속으로 폭포 같은 눈물을 쏟아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나는 마음을 추스르고 숙소로 향했습니다. 다음 날 평생의 습관대로 새벽에 일어나 기도를 했습니다. 만일 영빈관에 감시시설이 있었다면 한반도의 통일을 위해 울부짖는 내 기도가 모두 녹음이 되었을 겁니다. 그날 우리는 평양시내를 둘러보았습니다.  평양은 주체사상의 붉은 표어로 완전히 무장되어 있었습니다. 고향에서 부모님의 묘소를 찾아 꽃을 바쳤습니다. 흥남감옥으로 나를 찾아오셔서 피눈물을 흘리서던 어머니의 모습이 내가 본 그분의 마지막 모습입니다. 어머니의 무덤 위에 간밤에 내린 눈이 살포시 덮여있었습니다. 나는 흰 눈을 손바닥으로 쓸어내리고 어머니의 묘에 자란 뗏장을 한참이나 쓰다듬었습니다. 어머니의 거친손등처럼 무덤위의 겨울 잔디가 거칠거칠했습니다. 

 

김일석 주석과의 만남

 

김 주석과나는 손을 잡고 복도를 걸어 나가 기념사진을 찍고 헤어졌습니다. 나를 보내고 난 뒤 김주석은 "문총재라는사람 참 훌륭하다. 일생 동안 내가 많은 사람을 만나보았지만 그런 사람은 없었다. 배포도 크고 정이 넘치는 사람이다. 친밀함이 느껴지고 기분이 좋아 오래오래 같이 있고 싶었다. 나중에 다시 만나보고 싶다. 내가 죽은 후에 남북 사이에 의논할 일이생기면  반드시 문 총재를  찾아라!"하고 김정일에게 신신 당부했다니 서로 어지간히 잘 통한 모양입니다. 내가 일주일의 일정을 마치고 평양을 떠나자마자 연형묵 총리를 수반으로 한 북한 대표단이 서울에 왔습니다. 연총리는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에 조인했습니다. 그리고 이듬해 1월 30일. 북한을 IAEA의 핵사찰 협정에 조인함으로서 나와의 약속을 모두 지켰습니다. 목숨을 걸고 평양에 들어가 그만한 성과를 냈으니 참으로 보람된 일이었습니다. 

 

땅은 나뉘어도 민족은 나눌 수 없다.

 

지금이야  다들 평화통일을 이야기 하지만 내가 평화통일을 주장하던 때는 반공법과 국가보안법이 무서워 감히 평화통일이란 말을 사용하기조차  겁나던 시절이었습니다.나는 그때부터 줄곧 평화통일을 주장해 왔습니다. 지금도 누가 "어떻게 해야 한반도가 통일됩니까?" 하고 물으면 내 대답은 한결 같습니다."남한 사람이 남한보다 더 북한을 사랑하고. 북한 사람이 북한보다 더 남한을 사랑하면 오늘이라도 한반도는 통일이 됩니다. " 1991년에 목숨을 걸고 북한 땅에 들어가 김일성 주석을 만난 것도 모두 그런 사랑의 밑바탕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때 나는 김일성 주석과 남북 이산가족 상봉. 남북 경제협력. 금강산 개발. 한반도 비핵화. 남북 정상회담 추진 등에 대해 합의했습니다. 반공주의자가 공산국가에 들어가 남북통일의 물꼬를 트리라고 아무도 생각하지 않았지만  나는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습니다. 나는 북한을 내 고향. 내 형제의집 으로여기고  찾아갔습니다. 무엇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랑의 마음을 주려고 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의 힘이 김일성 주석을 넘어 김정일 위원장에게도 통했습니다. 그날이후 지금까지 북한과 우리 사이에는 특별한 관계가 지속되어 남북관계가 어려워질 때마다 힘을 다해 물꼬를 트는 역할을 맡아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은 김일성 주석과 만나 진실한 마음을 통하며 신뢰를 쌓은 것이 그 뿌리입니다. 신뢰는 그렇게나 중요합니다. 김일성 주석을 만나고 온 후 우리는 북한에서 평화자동차 공장을 비롯해 보통강호텔. 세계평화센터 등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평양 시내에는 평화자동차 광고탐이 8개나 세워져 있습니다. 우리나라 대통령이 방북했을때 북한 사람들은 평화자동차 공장을 보여 주었습니다. 대통령과 함께 방북했던 재계 인사들은 보통강호텔에 묵었지요. 북한 땅에서 일하는우리 식구들은 일요일마다 세계평화센터에 모여 예배를 드립니다. 이런 일들은 남북의 평화적인 교류와 통일을 위한 평화활동들이지 경제적인 이득을 얻기 위한 사업이 아닙니다. 민족적인 사랑으로 남북통일에 이바지하고자 하는 노력의 일환인 것입니다. 한반도에 평화세계를 구축하는 것은 의외로 간단합니다. 남한이 북한을 완전히 위할때 북한은 싸움을 걸지 않고 한반도에는 저절로 평화가 찾아옵니다. 불효자식을 감동시킬수 있는 힘은 주먹도 아니고 권력도 아닌 가슴에서 우러나는 사랑의 힘입니다. 북한에 쌀을주고 비료를주는 것보다 사랑을 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 진정을 다해 북한을 생각하고 위할때 북한도 마음을 연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고난과 눈물의 땅에서 평화와 사랑의 땅으로

 

핍박받는 사람은하나님과 가장 가깝습니다.눈물을 흘리는 마음을 갖는것이 중요합니다. 평소에는 눈물을 흘려본 적이 없던 사람도 나라를 잃게 되면 눈물을흐리며 웁니다. 하나님한테 배달려 통곡합니다. 고통스럽고 힘들지만눈물을 흐리며 울수 있는 마음은복됩니다. 눈물로젖은 마음에하나님이오시기 때문입니다.한민족의 마음속에 눈물이많았기 때문에 한번도가 천운을 받을 땅이 될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동안 우리가 사랑하는 거들을 모두 빼앗겨 버렸습니다. 일제 강점기에는 소중한 나라를 빼았겼고. 뒤이어 국토가 두동악이이 나 사랑하는 부노형제들과 헤어져야 했습니다. 그래서 한반도는 눈물의 땅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우리가 세계를 향해 울어주어야 할 때입니다. 이제부터는 우리를 위해 울던 것보다 진실하고 절실하게 세계를 위해 눈물을 흘려야 합니다. 그것이 천운을 맞이한 한반도 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할 때 한반도의 천운이 세계로 뻗어나가 한민족 중심의 세계평화시대가 열릴 것입니다."땀은 땅을 위하여. 눈물은 인류를 위하여 피는 하늘을 위하여 흘려라!"입니다. 인간이 흘리는 피와 땀과 눈물은 거짓이 없습니다. 모두 진실입니다 .그렇지만 나를위해 흘리는 피와 땀과 눈물은 무의미 합니다. 피와 땀과 눈물은 남을 위해 흘려야 합니다. 

 

 

문선명선생의 자서전<평화를 사랑하는 세계인으로>가 필요하신 분은 전화로 주십시오 

 

2015년 8월23일 생명의말씀을 洪貞姬타자를 처서 옮겨놓음.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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