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연재 (25) 최부자의 가계도와 마지막 부자 최준(8)
▲ 양삼열의 풍수이야기
경주최씨 시조는 최치원으로 신라말기 천하제일 문장가이며 중국에까지 문명을 떨친 인물이다. 이후 경주최씨는 고려시대 명문가로 성장하였고, 조선 초기에 성균관 사성을 역임한 최예(1373~1434)가 경주최씨의 11代로 24개 파 중에서 사성공파의 파시조가 된다. 최부자의 1代인 최진립은 최치원의 17世孫이고 최예의 6世孫이다. 이렇게 시작된 최부자는 2代 최동량, 3代 최국선, 4代 최의기, 5代 최승렬, 6代 최종률, 7代 최언경, 8代 최기영, 9代 최세린, 10代 최만희, 11代 최현식, 12代 최준을 마지막으로 끝을 맺는다.
최부자 가문은 300여 년 동안 만석꾼 지위를 누려왔지만 시대의 변화와 더불어 또 다른 사회발전에 기여한 인물은 마지막 부자 최준(1884~1970)이었다. 만석꾼 지주로 태어난 문파 최준은 독립운동과 사회·교육운동에 모든 재산을 희사함으로 오늘날 우리 모두가 어떠한 가치관과 자세를 가져야 하는지를 뚜렷하게 보여주었다. 그는 4형제의 장남으로 태어나 일본에 유학하였고, 한일병합에 충격을 받아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 이후 독립운동가인 백산 안희제를 만나 백산상회를 설립했는데 겉으로는 무역업을 한다고 간판을 내걸었지만 실제는 독립 운동가들의 연락소와 독립자금 조달처 역할을 하는 회사였다. 최준을 중심으로 백산무역이 해외에 송금한 독립자금은 그 당시 돈으로 무려 100만 원이 넘는 거액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1955년에는 과수원과 대지, 전답, 임야, 건물 등 전 재산을 들여 교육문화재단을 만들었으며 그 흔적의 재단이 현재 대구의 영남대학교이다. 가문대대로 수집된 8,900여 권의 고서들과 함께 경주 교동의 집까지도 영남대학교에 기증했기에 학교에서는 그의 호인 문파를 따서 ‘문파문고’라 이름 지어 뜻을 기리고 있다. 그 당시 이 학교 교수였던 이은상과 대통령 비서실장 이후락의 권유로 대통령 박정희에게로 소유권이 넘어가게 되고 문파는 12대 만석의 전 재산이 권력핵심부에 들어가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어야 했다.
최준의 재산환원에는 단석사의 노스님도 한몫을 했다고 전해진다. 스님은 젊어서 절을 찾아 온 최준에게 다음과 같이 당부했다고 한다. “재물은 분뇨와 같아 한곳에 모아두면 악취가 나서 견딜 수가 없다. 그러나 골고루 사방에 흩으면 농작물의 거름이 되는 법이다. 재물을 모으기만 하고 좋은 곳에 쓰지 않으면 똥통에 들어앉아 있는 것과 같다.” 최준은 이 말을 상기하면서 모든 재산을 환원하고, 마지막으로 나라가 해방됐으니 일경(日警)의 감시도 없고 전 재산을 희사했으니 도둑이 들일도 없으므로 대문을 활짝 열어두라는 말을 남긴 최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그의 죽음과 함께 12代 300여 년 동안이나 유지되었던 부와 명예가 이러한 과정을 거쳐 한편의 드라마처럼 역사 속으로 사라져 현재까지도 많은 이들의 귀감이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