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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조돈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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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이야기 스크랩 홍·유릉을 돌아보고 - 황제릉과 왕릉의 차이
의종(광평18) 추천 0 조회 141 16.12.25 12:15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홍·유릉을 돌아보고 - 황제릉과 왕릉의 차이는?

 

홍릉(고종과 왕비의 합장릉)

 

우리나라 역대 조선왕조의 무덤은 일괄하여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어 있다

 

1392년 고려 왕조가 막을 내리고 탄생한 조선 왕조는 1910년까지 무려 519년이라는 장구한 세월을 이어갔다. 이러한 유구한 역사를 가진 조선 왕조에는 27대 왕과 왕비 및 추존왕과 왕비가 있는데, 조선 태조부터 순종까지 왕과 왕비 무덤 42기 중 북한에 있는 2기를 제외한 40기가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어 있다.

 

세종과 소헌왕후 무덤인 영릉(경기도 여주), 단종이 묻힌 장릉(강원도 영월), 사도세자(장조)와 정조가 잠든 융건릉(경기도 화성)을 제외하면 모두 서울과 인근에 있다.


 

조선왕릉이 있는 곳

 

대부분의 왕릉은 왕이 하루 만에 제례행차를 마칠 수 있는 거리를 고려해 도성에서 10∼100리(40㎞)에 조성되었으며 풍수사상을 배경으로 당시 최고 건축ㆍ조각ㆍ조경기술이 만들어낸 최고의 산물이다

 

 

홍릉에 모셔져 있는 고종은 조선 26대 왕이며 유릉에 모셔져 있는 순종은 27대왕이다.

흔히 조선 제 26대, 27대 왕이라고 말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대한제국 제1대, 2대 황제라고 할 수 있다

고종대에 이르러 대한제국임을 선포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릉의 형식도 왕릉과는 달리 황제릉의 형식을 따르고 있다

 

 

홍 릉

 

 

 

홍릉은 조선 26대 고종(재위1863~1907)과 명성황후 민씨(1851~1895)의 합장무덤으로 기존의 조선시대 왕릉과는 달리 황제의 격을 따른 황릉이다.

능을 바라보고 서서 오른쪽에 고종황제가, 왼쪽에 명성황후가 안장되어 있다고 한다

 

 

고종의 어진.

고종이 신하들의 하례를 받을 때 입는 강사포라는 원유관복과 통천관이라는 모자를 착용하고 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1395년(태조 4)부터 임금이 원유관복을 입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고종은 1852년(철종 3) 7월 25일 흥선군 이하응의 둘째 아들로 정선방의 사저에서 태어났다.

1863년(철종 14년) 12월에 조선의 25대 왕 철종이 후사 없이 승하하자 왕위결정권을 쥐고 있던 신정왕후 조씨가 고종을 양자로 삼아 익종의 대통을 계승하도록 지명하였으며, 그를 익성군에 봉하고 관례를 거행한 뒤 왕위에 오르게 했다.

새 왕의 나이가 어리므로 예에 따라 조대비가 수렴청정을 하고, 흥선군을 흥선대원군으로 높여 국정을 총람케 했다. 그로부터 10년간 흥선대원군의 치세 아래 있던 고종은 장성하면서 친정의 의욕을 내비쳐 아버지와 대립하다가 1873년(고종 10) 친정을 선포하게 되었다.

동시에 외척인 민씨 일가의 권력이 강해졌고, 강화도조약을 맺어 문호를 개방하는 등 대외 개방정책을 취하였다. 개화파와 수구파의 대립으로 인한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동학농민혁명, 을미사변 등 큰 사건들을 뒤로 하고 고종은 1897년 10월 12일 대한제국의 수립을 선포하고 황제위에 올랐으며, 연호를 광무라고 하였다.

그러나 일본의 압력이 심해지는 가운데 1905년 을사보호조약을 맺고 외교권을 일본에 빼앗겼으며, 그들의 강요로 인해 그해 7월 양위조서를 내리고 순종에게 통치권을 물려주게 된다.

 

1919년 1월 21일 덕수궁에서 춘추 67세로 승하하였으며, 이때 고종이 일본인에게 독살당했다는 설이 유포되어 3.1 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명성왕후

 

고종의 왕비 명성황후는 을미사변 때 일본인에 의해 무참히 살해당한 비운의 왕비이다.

1895년(고종 32) 일본 정부의 사주로 낭인에 의해 경복궁 옥호루에서 시해당한 명성황후는 궁궐 밖에서 시신이 소각되었다. 폐위되어 서인으로 강등되었다가 같은 해 복호되고, 1897년(광무 1년)헤 명성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당초 동구릉의 숭릉 오른쪽 언덕에 숙릉을 조성하다 국장이 중단된 후 그해 1897년 11월 청량리 천장산아래 새장지를 정하고 국장을 치르게 되니 홍릉이란 능호가 시작되었다.

 

1919년 1월 21일 덕수궁에서 춘추 67세로 고종이 승하하자 그해 3월 4일 현재의 위치에 조성하면서 천장론이 일던 명성황후의 릉도 이곳으로 옮겨와 합장으로 예장하였다

 

대한제국 선포로 고종을 황제로 칭하게 됨으로서 지금까지 해오던 왕릉의 격식에서 벗어나 제릉으로서의 위엄을 갖추기 위해서 명나라 태조 효릉의 무덤 제도를 본떠서 황제릉을 만들었다

따라서 석물의 규모나 종류가 달라졌으며, 임금의 침실, 제사지내는 방의 위치가 달라졌다

 

홍릉의 능침

 

능침은 12면의 병풍석으로 하고 난간석을 둘렀으며 능침의 삼계를 없애 난간 밖으로 둘레돌과 양석을 세우지 않았다. 능침을 수호하는 석양과 석호는 세우지 않고 혼유석과 향로석 1좌, 그 양 옆으로 망주석 1쌍을 세우고 혼유석 그 앞으로 사각장명등을 설치하였다

 

무덤 아래에는 정자각(구조가 丁자 모양으로 능에서 제례를 지낼 때 제물을 차리고 의례를 진행하는 곳) 대신에 앞면 5칸·옆면 4칸의 침방이 있는 집 즉, 침전을 세웠으며 능침 주위에 배치되었던 석수들은 침전 앞, 참도의 좌우에 그 종류를 더하여 나란히 세웠다.

침전 가까이에 문·무인석을 세우고 석수는 석양과 석호대신에 기린·코끼리·사자·해태·낙타·말 등의 수석을 일렬로 배치하였다

 

참도는 어도와 신도의 두 단으로 구분되어 있던 기존의 것에 비해 가운데가 높고 양 옆이 한 단 낮은 삼단으로 되어 있다.

이밖에 수복방, 수라간, 비각, 소전대, 어정 등이 배치되어 있고 금천교 안쪽 좌측에 일반 재실보다 규모가 큰 재궁이 매우 양호한 상태로 보존되어 있다.

진입부의 낮은 지역에 원형의 연못에 원형의 섬이 있고 나무가 심겨져 있다.

 

 

홍릉의 배치도

 

 

 능의 구조

 

 

 

 

바라보아서 왼쪽에 왕, 오른쪽에 왕비가 안치된다

 

 

홍릉이라고 부르게 된 이유속에는 깊은 의미가 있다.

홍릉이란 원래 청량리에 있던 명성왕후의 능명이다.

고종은 1919년 1월 21일 경운궁 함녕전에서 67세로 붕어(崩御)하였으나 일제는 그에게 능호를 주지 않았다

일본은 "그는 황제도 왕도 아니다"라며 그에게 능호를 주지 않은 것이다.
일제가 강제 합병후 만든 왕공가궤범 제 200조는 "왕족 공족의 분영은 묘이다"라고 규정하였다.
능이나 원도 아닌 일반 묘로 격하시키려는 의도였다

 

 

고종이 승하하자 일본은 조선의 국격을 떨어뜨려 자국의 천황 밑에 두려고 하는 정책을 노골화한다.

그리하여 고종황제를 '태왕' 순종황제를 '이왕'으로 격하시키고 왕실을 '이왕가'라는 명칭으로 부르게 된다

뿐만 아니라 창경궁을 창경원으로 바꾸고 고종황제릉도 '원'으로 낮추려는 움직임이 보이자, 뜻있는 사람들이 먼저 만들어졌던 명성왕후의 능을  금곡에 정해두었던 고종의 능에 이장, 합장하였다

그리고 명성왕후의 능호인 홍릉으로 부르게 되므로서 능의 이름을 얻게 하고 고종릉의 품격을 지켜주려 하 였던 것이다

조선 역대왕 중에서 순종과 함께 자신의 능호를 가지지 못하고 왕비의 능호를 대신 쓰고 있는 왕릉이기도 하다

 

 

외삼문

 

홍유릉의 정문 외삼문(外三門)

조선왕릉 가운데 홍유릉만이 유일하게 외삼문을 두고 있다. 황제능이기에 외삼문을 둘 수 있었던 것이다.
외삼문을 들어갈 때는 오른쪽 협문으로 들어가고 나올 때는 왼쪽 협문을 이용해야 한다. 가운데 어간(御間)이 열려 있다고 해도 함부로 이용할 수 없다. 어간은 신(神)만이 드나들 수 있는 문이기 때문이다

 

 

 

 인위적으로 만든 금천

 

금천교

 

금천(禁川)과 금천교(禁川橋)

금천은 속세와 성역의 경계역할을 하는 곳이다. 궁궐이나 사당, 사찰에도 금천을 둔다. 산지 사찰은 골짜기가 많아 자연스럽게 금천이 이루어지지만 궁궐이나 왕릉 같은 경우는 땅을 파서 인위적으로 금천을 만드는 경우가 많다.
금천 위에 놓인 작은 돌다리를 금천교(禁川橋)라 한다. 금천교를 경계로 인간의 구역과 왕의 혼령이 머무는 신성한 지역으로 나누어지며 금천교를 건너는 순간 혼령의 세계로 들어서는 것을 의미한다

 

 

연지

 

연지(연못)

홍유릉에는 연못이 두 군데에 있다.
홍릉에 들어서서 금천교를 지나면 오른쪽에 큰 연못이 있다.  연못도 둥글고 연못 가운데 섬도 둥글고 둥근 천원지원(天圓地圓)의 생소하고 특이한 형태이다.

 

옛부터 전해오는 우리나라의 정원 연못은 둘레가 사각형이고 가운데 둥근 섬을 두는 천원지방(天圓地方)형태가 근간이다. 그러나 묘역이나 사당에는 연못을 만들지 않는 것이 원칙이다. 

그런데 일제는 홍·유릉 터에 연못을 팠다. 물론 지형상 물이 많이 나오는 곳이기는 하지만 이를 빌미로 조선의 왕기를 끊으려는 의도에서 여기에 연못을 판 것이 아닐까하는 의구심을 버릴 수 없다

조선시대는 역적이 태어난 집터는 연못을 파서 다시는 집을 짓지 못하도록 하였다.  또 다른 역적이 태어나는 집을 아예 짓지 못하도록 연못을 판 것이다.
왕릉 앞에 연못을 파므로서 그의 후손들이 번창하지 못하게 한다는 의미를 둔 것이 아닐까?

 

홍릉의 참도 왼쪽 옆 석수 뒤에도 돌을 쌓아 만든 연못이 하나 더 있다. 처음부터 만들어진 것이 아니고 왕릉 조성 이후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데, 홍유릉 관리소측은 침전 주변에 항상 물이 흥건히 차서 할 수 없이 연못을 파서 물 관리를 하고 있다고 한다. 
침전 근처에 물이 찬다는 것은
이 터가 과연 왕릉의 터로 적합한 곳인지 의심스럽다.

 

원지원도(圓池圓島) 형식의 연못

조선시대의 연못은 천원지방(天圓地方)의 형식에 맞추어 네모난 연못에 둥근 섬이 배치되는 것이 원칙이나

일제강점기에 일본방식이 가미되어 조성되었기 때문에 나타난 형태로 생각되며

황제릉원이 아니라 가정집 정원 정도 격하시키려는 의도로 보여진다 

 

 

수라간

자세히 보면 북쪽과 남쪽의 문살 크기가 다르다

 

수라간

홍살문의 왼쪽에 있는 작은 집으로 왕릉에 행사가 있을 때 음식을 장만하고 또 보관을 하는 곳이다

 

자세히 보면 북쪽과 남쪽의 문살 크기가 다르다. 창살이 남쪽은 길고 북쪽은 짧은데 이것은 찬공기가 북쪽에서 들어와 맴돌다 남쪽으로 나오게 되어 있기 때문에 공기의 흐름을 이용하여 음식을 오랫동안 보존할 수 있게 만든 구조라고 한다

 

 

수복방

 

수복방

능을 지키는 하인들인이 거처하는 곳이다.

 

 

재실

일반 왕릉의 재실에 비하면 엄청난 규모로 재궁이라 불러야 할듯.....

 

제실(齊室)

금천교를 지나면 제실(齊室)을 만난다. 왕릉 관리를 담당하는 능 참봉이 살던 곳이며 제향을 주관하는 제관들이 휴식을 취하는 곳이기도 하고 제향에 쓰이는 기물들을 간수하기도 하는 곳이다.

또한 제향을 맡아보는 관리인 수복(守僕)의 거처이기도 하다.

문을 들어서면 일자형(一字形)의 건물이 2동이 있는데 앞쪽의 건물은 왕이 머무르는 곳이며 뒷쪽의 건물은 능참봉의 거처이며 행사시 왕을 모시고 온 순행자들이 머무르기도 하는 곳이다

 

 

 대문을 들어서면 마주보이는 건물로, 왕 또는 제관이 머무르는 곳

 

 뒷쪽의 능참봉이 거처하는 건물

이 건물의 뒤 작은 출입문을 열면 능침이 한 눈에 들어온다

 

행랑채

왕이 능으로 행차를 할 때 궁에서 능밖에까지는 말을 타고 와서

능 입구에서 재실까지는 가마를 타고 오는데 대문 양 옆의 빈 곳이 가마를 두는 어차고(御車庫)이며

그 옆의 작은 방은 하인들이 묶는 곳이다

 

 

능을 지키는 일을 하는 관리를 능참봉((陵參奉)이라고 한다.

과거에 급제하면 종9품에 해당되는 참봉 품계를 받는데, 능을 관리하는 직책을 능참봉이라 부른다.

비록 종9품이지만 막대한 재산을 관리하기 위해 왕이 파견한 관리이며 왕이 능행할 때는 왕을 가까운 거리에서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왕을 모신다.

따라서 왕과 함께 산보하면서 이야기를 나누다 왕의 눈에 들면 발탁될 수도 있었다.

녹봉을 받으면서 공부도 할 수 있고 왕과의 독대로 벼락출세의 길이 열릴 수도 있는 자리여서 출세를 바라는 인물들에게는 능참봉 자리가 아주 인기가 높았다고 한다

 

실제로 능 참봉을 하다 왕의 측근 실세가 된 대표적인 인물이 이이첨(李爾瞻)이다. 세조왕릉에서 능 참봉을 하다 선조의 눈에 들어 훗날 예조판서까지 오르고 왕의 측근으로 조정의 실세였다

 

 

홍살문

 

홍살문(紅箭門)

 

홍살문은 영(靈)의 세계인 신성한 공간에 침입하려는 잡귀를 막기 위해 참도 앞에 세워 놓은 문이다. 

홍살문은 궁전, 관아, 능, 원 등의 건조물 앞에 벽사의 의미로 세워지며, 10m 이상 되는 둥근 기둥 2개를 세우고 위에는 지붕 대신에 붉은 화살(홍살)을 세로로 꽂아놓았다.

 

화살뿐만 아니라 가운데에 삼지창도 꽂혀있고 삼지창에는 삼태극이 붙어있다. 청색, 적색, 황색의 삼색이 바람개비 모양을 이루고 있는 삼태극은 천(天), 지(地), 인(人) 3 요소가 어우러지면서 끊임없이 변화하는 우주를 상징화한 것이다

 

홍살문은 원래 홍전문(紅箭門)으로 글자는 화살 전(箭)자이나  음(音)이 아닌 뜻을 살려 '살'이라고 읽는다. 
홍살문은 능 주변의 지형에 따라서 높이나 넓이가 다소 다르기도 하며 홍살의 수도 10∼14개로 짝수로 세운다. 일반 홍살문의 홍살이 대개 10~12개이나 이곳의 홍살은 14개이다

 

홍살문의 색깔을 붉게 칠하는 것은 붉은 색이 귀신의 접근을 물리친다는 속설이 있기 때문이다

 

신라 헌강왕 때 처용이라는 사내가 있었다. 처용의 아내는 매우 아름다워서 나쁜 귀신들도 탐을 내었다.
하루는  처용이 집에 없을 때 귀신이 처용의 모습으로 변장하고 처용의 아내에게 갔다.
아내는 처용인 줄만 알고 한 이불속에 누워있었다. 처용이 밤 늦게 집에 들어와보니 이불밖으로 다리가 네 개가 있는 것이다.
처용은 화를 참으며 방문을 닫고 나와 달을 보고 시를 지어 노래로 불렀다.
'처용가'라는 유명한 노래이다
처용은 얼굴색이 붉은 아라비아인인데다 밤새 술까지 마셨고 치밀어 오르는 화를 꾹 참고 있었으니 그 붉은 얼굴이 훨씬 더 붉게 되었을 것이다. 귀신은 붉은 처용의 얼굴을 보자 그만 질겁을 하고 처용 앞에 엎드려

사죄하며 다시는 처용 근처에 오지 않겠다고 약속하고 줄행랑첬다.

이후 신라 세시 풍속은 동짓날 자기 집 대문입구에 처용 얼굴을 상징하는 붉은 팥죽을 끓여 칠하므로서 1년 내내 귀신의 접근을 막았다고 한다.
이런 설화를 바탕으로 홍살문에도 붉은 색을 칠하기 시작하였다.

 

  

 

 

홍살문 옆에는 다른 왕릉에서는 볼 수 없는 석물이 1쌍이 있다. 육면체의 돌에 가운데 구멍이 뚫려있다.

 

이 돌의 용도는 제례 행사시 비나 눈이 오면 홍살문에서 침전까지 위에 천막을 쳐야하는데 그 천막을 치기 위한 큰 막대를 꽂는 곳이다.

양쪽의 구멍에 각각 굵은 막대를 꽂은 다음 막대에 끝에서 부터 침전까지 길게 줄을 맨다. 그 줄 위에 천막을 걸쳐 비나 눈이 맞지 않도록 않게 하는 것이다

침전의 지붕 위에는 줄을 맬 수 있는 쇠사슬이 여러개 고리가 달려 있다,

 

침전 지붕 위의 쇠사슬

 

 

임금이 절을 하는 자리-배위

 

배위(拜位)

홍살문 오른쪽에는 왕이 제례(祭禮) 시에 홍살문 앞에서 내려 절을 하는 자리 배위(拜位)가 있다

임금이 제례를 지내러 오면 홍살문 앞에서 탈것에서 내려 이 배위 위에서 4번 절을 한다.

이것을 국궁사배(鞠躬四拜)라 하는데
'국궁! (鞠躬; 무릎을 꿇어앉으시오)  사배! (四拜; 4번 절하시오)  흥! (興; 일어나시오)   평신! (平身; 몸을 바르게 하시오)" 

이렇게 4배를 한 뒤 하고 참도를 통해 제향공간(침전)으로 들어간다

 

배위를 판위(版位)라고도 하는데 원래는 박석(薄石-두께가  얇고 넓적한 돌)이 깔려 있어야 하지만 근래에 복원된 곳들은 전돌을 깔아 놓은 곳이 대부분이다.

 

 

참도

 

 

참도(參道)

홍살문에서 부터 침전(또는 정자각)까지 신(혼령)과 인간(왕)이 걸어가는 길이 이어진다. 이 길을 참도(參道)라고 한다. 참도는 통일신라 무열왕 때부터 시작된 우리 고유의 묘제이다

 

일반 왕릉에서의 참도는 왼쪽이 오른쪽 보다 넓고 높이가 한 단(5cm 정도) 더 높다. 이것은 신성한 혼령(魂靈)이 다니는 신도(神道 또는 神路)와 사람이 걸어가는 어도(御道 또는 御路)를  분리해 놓은 것으로 오른쪽의 높은 길이 신이 다니는 신도이며 참도에는 삼각형이나 사각형 모양의 얇은 돌(박석 薄石)을 깔려져 있다.

 

박석은 면이 고르지 않고 울퉁불퉁하고 표면이 거칠게 되어 있다. 이는 비나 눈이 왔을 때 가죽신발이 쉽게 미끌어지지 않게 하기 위함이며 통로의 가운데가 약간 높고 바깥으로 경사가 지게 깔아놓은 것은 배수가 잘 이루어지도록 하기 위함아다.

   

 

홍릉의 참도(3개의 길)

 

홍릉과 유릉은 일반 왕릉과 다르게 가운데에 신도(神道)가 높게 있고, 양쪽에 어도(御道)가 만들어져 3개의 길이 만들어져 있다.

 

제례를 드리는 정자각에 오르기 위해서 참도를 따라 들어가 오른쪽으로  90도 꺾으 후 다시 왼쪽으로 90도 ?어 신(혼령)는 왼쪽 계단으로, 어(임금)은 오른쪽 계단으로 올라가 정자각으로 들어가게 되어 있다. 제례가 끝나면 임금은 서쪽 계단으로 내려오게 된다

 

제례(制禮) 의식(儀式)에 따라 동쪽으로 올라가고 서쪽으로 내려오는 동입서출(東入西出)의 의례(儀禮)를 따르는 것이다.

해가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지듯 동쪽은 시작과 탄생, 즉 양()을 뜻하고 서쪽은 끝과 죽음, ()을 뜻한다. 자연의 섭리를 인공적 건축물에 구현한 것이다

 

동쪽 두 계단 가운데 하나는 수려한 구름무늬를 새긴 소맷돌(난간)과 삼태극 무늬의 고석(鼓石·북 모양의 둥근 돌)을 화려하게 꾸며 놓았는데 이것이 신이 오르는 신계(神階)이며 옆의 어계(御階)는 아무런 장식이 없이 소박한 계단만 갖추어 놓았는데 임금이 오르는 계단이다.

 

홍 유릉(침전)의 참도와 진행방향                            일반왕릉(정자각)의 참도와 진행방향

                                                    

(푸른색이 혼령이 가는 방향이며 주황색이 임금이 가는 방향)

 

정자각 왼쪽(서쪽)으로는 내려가는 계단은 동쪽과 달리 어계(御階) 하나 뿐이다. 신계(神階)가 없다. 왜냐하면 동쪽의 신계로 올라온 왕과 왕비의 혼령은 제사가 마친 후 정자각(또는 침전)에서 바로 왕릉속으로 들어가기 때문에 내려오는 계단이 필요없는 것이다. 정자각의 뒷편 능상 쪽에는 문이 나 있는데 동쪽 계단으로 올라온 왕의 영혼은 이 문을 통해 봉분으로 들어간다는 것이다

그러나 홍·유릉에서는 참도가 꺾이지 않고 침전으로 바로 오를수 있게 3개의 계단이 정면에 배치되어 있다

 

 

 

참도에 깔아놓은 박석은 검게 그을린 듯 한 잿빛 화강암판으로 표면을 매끄럽게 다듬지 않고 일부러 우둘투둘하게 해 놓았다.

이유는 무엇일까? 표면이 거칠어 넘어지지 않으려면 고개를 숙여 아래를 내려다 보아야 하는데 이는 저절로 고개를 숙여 존경을 표시하는 자세가 되게끔 고려한 것이다

왕릉에서 사용하는 박석은 반드시 강화도 그을섬(석모도) 매음리에서 나오는 돌을 사용한다고 한다

 

 

무인석                                                            문인석

 

문인석

왕릉에서는 능침 앞에 서 있던 문인석이 홍·유릉에서는 아래로 내려와 침전 앞에 배치되어 있다

침전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서 왕을 모시고 있는 문인석인데 이 문인은 황제능이라서 금관조복(金冠朝服)을 입고는 있다. 그라나 옷차림은 그럴듯하지만 왕을 모시는 신하로서의 충직한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엄숙하면서도 너그러운 얼굴을 한, 강직한 기상 속에 점잖은 표정을 한 조선의  문인상이 아니다.

나라를 위하는 듬직한 충신으로 보이지 않고 허약한 몸매에 간들거리는 약간은 ‘간신배의 모습’으로 보여지는 것은 나만의 생각일까?

 

 

 

무인석

건원릉이나 다른 왕릉에서 보여주는 용맹무쌍한 무인이 아니다 .
과묵하면서도 친근하며 서릿발 같은 위엄 속에서도 인정이 넘치는 전통적인 무인의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겁에 질린듯한 표정에 가녀린 몸매의 허약한 모습은 왕실이 아니라 자기 집도 지키지 못할 것만 같다

 

 

무인석은 왕릉에만 세울 수 있는데 무신을 지휘할 수 있는 사람은 나라의 왕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선 후기로 내려오면서 무시되어 여기져기에 세워져있는 모습을 보게된다

 

 

세종대왕의 릉인 영릉의 문무인석

 

 

석수(石獸)

 

 

입구에 배치된 말은  2마리씩 배치되어 있는데 기단석이 다른 석수들보다 낮은 이유를 모르겠다

 

왕릉에서는 능침을 지키던 석수들이 이 홍릉에서는 능침은 비워두고 침전까지 내려와 참도 좌우에 도열하고 있다.

그 대열에서 전통의 석양과 석호는 아예 빠지고 우리에게는 어색한 기린, 코끼리, 사자, 해태, 낙타, 말이 자리를 채웠다.

이 석수들의 자세도 등으로 봉분을 감싸고 외부 세력을 철저히 경계하는 석양 석호의 경호모습은 아니고 왕릉 수호의 역할이라기보다는 장식을 위해 어거지로 구색을 끼워맞춘듯한 형태이다

 

 

홍릉의 기린상                                                       상상속의 기린

 

얼토당토하지 않은 외양에 왜소한 모습을 한 기린이다.

기린은 동물원에서 보는 아프리카 초원의 목 긴 동물이 아니라 고대 신화에 등장하는 동양의 기린을 말한다

동양에서 기린(麒麟)은 머리에 뿔이 나고 오색 빛깔 털을 지닌 상상의 동물로서 

태평성대에 모습을 드러내는 길조를 상징하는 동물로 여겨왔다

 

 

말                                                                         낙타

 

  사자                                                                      해태(해치)

 

사자라고 볼 수 있을까? 바로 옆의 해태와 전연 구분이 안되는 괴상망측한 모습으로

용맹스러움은 어디로 사라지고 우스꽝스럽고 해학적인 형태이다.

 

 

코끼리

 

 

침전(寢殿)

 

 

 

선왕께 제례를 드리는 공간이다.

왕릉에서는 정자각이나 이곳과 유릉은 일자형이며 팔작지붕의 건물이다.

 

조선 왕릉의 정자각은 뒷쪽 벽에 봉분쪽으로 창이 나 있어 뒷문을 열어 놓으면 능침(임금이나 왕비의 무덤)을 바로 바라보며 제례를 드릴 수 있게 되어 있다.

하지만 홍릉은 침전에서 무릎을 꿇고 고개를 들어도 능침이 바라보이지 않는다.

사초지가 앞을 완전히 가로 막고 있기 때문이다. 우연일까?

아니다. 이는 능침을 바라보며 제사를 올리던 조선 왕실의 효성스런 마음을 애초에 차단하기 위해 일본인들이 만든 간교한 술책의 산물로 사초지의 남쪽부분을 더 높인 탓이다

 

 

 

침전의 내부와 단청

 

준상

제례를 드릴 때 술항아리를 올려놓는 탁자이다

 

 

침전 지붕의 잡상

 

정자각 지붕에는 다양한 수호신들이 사방을 철통같이 경계 경비를 하고 있다. 잡상이라고 하는 것이다 

기와를 만드는 것처럼 흙으로 빗어 불에 구운 것으로 악귀를 막는 벽사의 의미를 지닌다

삼장법사(대당사부)는 가사장삼 대신 머리에 갓을 쓰고 갑옷 차림으로, 손오공(손행자)은 삿갓을 쓴 포졸의 모습이며 그 외 사오정, 저팔계 등이 있다. 용마루에는 용의 머리인 용두기 있다. 용두 역시 악귀를 막는다는 벽사의 의미로 올려놓은 것이다

잡상은 아무 지붕에나 올려놓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궁궐과 임금과 관련이 있는 건물에만 올릴 수 있으며 간혹 사찰의 지붕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침전과 정자각도 왕과 왕비가 주무시거나 머무르는 곳이기 때문에 잡상을 올릴 수 있는 것이다.

 

 

침전의 앞면 기둥에는 차일고리가 달려 있다

 

침전의 기둥에 동그란 고리가 달려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차일고리이다.

중요한 행사나 의례가 있을 때 햇살을 가리거나 비를 막아 줄 천막(차일)을 치는데 이 고리는 차일을 치는 줄을 매어서 고정시켜주는 역할을 한다.

궁궐에는 기둥뿐만 아니라 바닥의 박석에도 박혀있는 경우가 있다

 

 

 유릉의 소전대(예감)

 

소전대(燒錢臺)-예감

 

소전대는 제례의 마지막 절차인 축문을 불태우는 의식을 행하는 곳을 말하며, 예감(?坎)은 제를 올린 뒤 폐백과 축판(祝版)을 묻는 구덩이를 말하는데 둘 다 같은 장소이다.
소전대에서 축문을 태울 때, 바람에 의해 능에 화재가 발생할 염려가 있어서 나중에는 묻는 형태로 바꾸었으며 명칭도 예감으로 바뀌었다.

예감은 길쭉한 석재(石材)로 4면을 막은 형태로서 안쪽이 우물처럼 움푹 들어가 있고, 바닥에 전돌을 깔았다. 예감에는 축문 외에 비단 1필과 음식물을 함께 묻는다고 한다.

 

어떤 왕릉에는 망료위(望燎位)가 있고 소전대가 따로 있다

소전대는 참배 후 축문을 태우는 곳이고, 망료위는 참배 후 축문을 올려 놓고, 축문관이 "축문을 태워도 되겠습니까?" 라고 아뢰는 장소로 이 후에 소전대에서 태운다고 한다.

 

 

산신석

 

산신석(山神石)

 

침전 옆 북동쪽에는 산신석(山神石)이라는 납작한 네모모양의 돌이 있다. 산신제를 지내는 산석(山石)이다.

산신석은 일반 문중의 선산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데 선산의 경우 산석은 무덤 봉분 윗쪽에 있다. 산의 주인인 산신이 무덤의 주인보다 더 높기 때문에 윗쪽에 모신 것이며 보통 산신제를 먼저 올린 뒤 무덤에 제사를 드린다.

그러나 왕릉은 민묘와는 다르다. 왕이라는 신분이기 때문에 왕릉의 산신석은 사초지 아래 두고 왕릉의 능제를 먼저 지낸 다음 산신제를 뒤에 올린다

 

 

어정((御井-우물)

 왕이 능을 참배했을 때 이 우물물을 마셨다고 하여 ‘어정(御井)’이라 부르며

왕릉 제례행사시에 이 우물물을 사용한다.

 

 

홍릉의 봉분 바로 밑 사초지에는 어정이라는 우물이 있다

조선의 왕릉 중 능 능침 구역 안에 우물이 있는 곳은 홍릉뿐이다. 봉분 아래에 우물이 있다는 것은 봉분 주위에 수맥이 흐르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풍수지리설에는 수맥이 지나가는 곳에 묘를 쓰면 봉분이 아래쪽으로 가라앉으며 유골이 검게변해 후손이 ?지 못하다고 한다. 그래서 민묘도 수맥이 있는 곳은 피해 안치한다.

 

그러나 일제는 홍릉터가 ‘매화낙지형’의 명당이라고 하며 매화낙지형 명당에는 땅이 길해 묘를 쓰면 자손이 번성하고 큰 인물이 난다고 선전했지만, 실제로는 조선을 억누르고 발복을 막기 위해 흉지를 명당이라 거짓 선전한 것이다

 

사초지와 능침

 

사초지(沙草地)

능침이 있는 언덕모양의 구릉을 사초지라고 하고 봉분과 석물은 그 위에 배치된다.

 

 

 

 

능침(陵寢)

 

왕과 왕비의 시신이 묻혀있는 봉분이 있는 영역이다

홍·유릉은 왕릉의 둘레에 배치되던 문,무인석과 석수는 침전 앞으로 내려오고  산짐승과 바람을 막는 담장(곡장)이 둘러선 능침구역에는 혼유석, 망주석, 장명등만 서 있다

봉분을 둘러싸고 있는 병풍석은 구름무늬로 장식이 되어 있으며 그 주변은 운문으로 장식하였다

병풍석 바깥으로 박석이 깔려있으며 그 둘레를 따라 난간석이 둘러싸고 있다

 

 

어정                                                                  혼유석과 향로석

 

봉분 앞에는 혼령이 노닌다는 혼유석(魂遊石)이 있고 혼유석 바로 앞에 향불을 올리는 작은 향로석(香盧石)이 하나 있다. 향불을 피우는 향로를 올려놓는 자리이다.

향로석은 다른 왕릉에서는 결코 볼 수 없는데 유독 홍릉에 향로석을 설치해 놓은 이면에는 고종을 황제로 볼 수 없으며 왕릉이 아닌 일반 백성의 묘라는 의미를 음연중에 숨겨놓은 것이다

 

민묘(民墓-백성 묘)는 봉분 앞에 제물을 차려 놓는 상석(床石)과 향로석(香盧石)을 같이 놓는다. 하지만 왕릉에는 제물을 차려 놓는 정자각이 능 아래 따로 있다. 그러기 때문에 능 앞에 놓인 사각형의 넓은 판석은 밥상을 의미하는 상석(床石)이 결코 아니며 향로석이 같이 배치되어야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일제는 향로를 앞에 설치함으로 혼유석을 상석으로 취급하여 민묘와 같은 격으로 낮추려는 의도를 숨겨놓은 것이다

 

왕과 왕비를 합장한 능에는 항상 두 개의 혼유석이 능 앞에 놓이지만 홍릉에는 혼유석을 1개만 만들이 가운데 놓고 그 앞에 향로석이 놓았다.

빨리 향로석을 없애고 같은 모양의 혼유석을 하나 더 만들어 따로따로 설치하여야 격에 맞는 왕릉이 될 것이다

 

혼유석 밑에는 시신을 둔 석실로 연결되는 통로가 있는데, 혼유석의 무게가 수톤이나 되기 때문에 일제의 심한 문화재 약탈 속에서도 조선왕릉이 견딜 수 있었다고 한다

 

 

봉분의 입면도

 

 

 

 

비각

 

비석

 

비각(碑閣)

능의 비(碑)를 안치하기 위해 비각(碑閣)을 조성했는데, 능의 주인이 누구인지는 이 비각(碑閣)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처음에는 왕릉에 비석을 세우지 않았으나  1754년(영조30)에 광릉(光陵)·경릉(敬陵)·창릉(昌陵)과 함께 세우도록 하였다.

옥개(屋蓋)형 지붕을 얹은 비석의 형식이고 비면에는 왕과 왕비명이 전서로 적혀있다. 왕명의 왼쪽에는 '대한제국'이라고 쓰지못하고 '대한(大韓)'이라고만 적혀 있어 나라 잃은 당시의 서글픔이 배어있다  

 

 

중량천을 지나는 고종의 장례 행렬

 

 

유 릉

 

 

유릉

 

유릉은 순종(재위1907~1910)과 비 순명효황후 민씨(1894~1966), 그리고 계비 순정효황후 윤씨(1894~1966)가 함께 합장된 동봉삼실릉(同封三室陵)으로 조선 왕릉 중 유릉만이 유일하다.

동봉삼실릉(同封三室陵)은 한 봉분 안에 3개의 방을 만든 릉을 말한다. 겉으로 보기엔 봉분이 하나여서 단릉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 순종과 그의 두 왕비가 잠들어 있다.

 

홍릉에 비해 능역 규모가 다소 좁긴 하지만, 문무석인을 비롯하여 전체 석물의 조각은 홍릉의 것보다 사실적이면서 나은 편이다.  배치는 홀릉과 거의 같은 형식으로 능침 주변에는 화문을 새긴 병풍석과 난간석이 둘러져 있고, 가운데 혼유석과 사각 장명등 그리고 양 옆에는 망주석이 새워져 있다.

릉의 형태가 홍릉과 흡사한 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홍살문과 침전의 바깥 공간에는 어정(御井)이란 이름의 우물터가 남아 있다

 

순종의 비 순명효황후는 순종이 즉위하기 전인 1904년(광무 8) 11월 5일 경운궁에서 세자빈의 신분으로 춘추 33세에 승하하였다. 오늘날의 성동구 능동에 있는 어린이대공원인 양주땅 용마산 기슭의 유릉에 같은 달 29일 안장되었다.

그가 신분이 세자빈이었기에 유강원(裕康園)이라는 원호를 받았다가 순종이 1907년 왕으로 즉위하자 유강원은 유릉으로 능호를 받았다.

 

 

순종

 

순종은 1874년(고종 11) 2월 8일 창덕궁 관물헌에서 고종과 명성황후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출생 다음해인 1875년 2월 18일 왕세자로 책봉되었고, 1882년(고종 19) 여흥부원군 민태호의 딸을 세자빈으로 맞이했으며, 1897년(광무 1) 대한제국의 수립과 함께 황태자로 책봉되었다.

1904년에 세자빈으로 맞이했던 순명효황후가 세상을 떠나자, 해풍부원군 윤택영의 딸을 황태자비로 맞이했다. 그리고 1907년 7월 19일 일본의 협박과 친일파 대신들의 강요로 황위에서 물러나게 된 고종의 양위를 받아 황제로 즉위했고, 연호를 융희로 고쳤으며, 동생 영친왕을 황태자로 책봉했다.

 

순종 즉위 직후인 1907년(융희 1) 7월 24일 일본은 한국을 병합하기 위한 정미7조약(丁未七條約)을 강제로 체결하고, 1910년(융희 4) 8월 22일 한일합병조약을 체결하였다.

이로서 조선 왕조는 27대 519년만에 멸망하고,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

 

순종 어진

 

 

 

순종은 황제위에서 이왕(李王)으로 강등되어 창덕궁에 거처하며 망국의 한을 달래다가 1926년 4월 25일 53세의 나이로 

승하하자 그 해 6월 11일 순종을 홍릉 왼쪽 산줄기 언덕에 장사지내면서 순명효황후의 능을 천장해 와 합장하였다 .

순종 역시 고종처럼 순종에게도 능호를 받지 못하고 왕비릉인 유릉에 합장을 하였고 능호를 자연스럽게 유릉으로 이름하였다.

순종의 인산일인 6월 10일에는 일반 백성들에 의한 6·10 만세 운동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순정효왕후

 

홀로 남겨진 순종의 부인 순정효황후는 창덕궁 낙선재에서 일제 강점기와 1945년의 광복, 다시 5년 후의 6.25 전쟁 등 한국 현대사의 슬픈 나날을 지켜보다가 1966년 72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자 유릉에 함께 안장하였다.

 

유릉에는 이제까지 지켜졌던 우왕좌비(右王左妃)의 원칙에 따라 제일 왼편에 황제의 재궁이 있어야 하는 원칙이 무시되고 가운데 순종, 우측에 순정효황후 좌측에 순명효황후의 재궁을 두었다

이는 중국 황제릉의 제도를 따른 것으로 추정된다.

 

 

유릉은 배치와 구조는 홍릉과 거의 같으므로 크게 다른 점만 살펴보겠다 

 

1. 유릉은 능침공간과 제향공간의 축이 각기 다르게 배치되어 있다.

홍릉은 홍살문에서 능침에 이르기까지 일직선으로 되어 있으나 유릉에서는 능침의 방향이 오른쪽으로     틀어져 있다

유릉과 같은 이런 형태는 강원도 영월로 귀양을 가 수양대군에게 죽임을 당한 단종의 장릉이 유일하다

 

    홍릉                                                               유릉

 

 

2. 석수의형태가 다르디. 홍릉에서는 다리 사이가 막혀 있으나 유릉에서는 틔여져 있다

조선왕조의 석수는 모두 다리 사이가 막혀있으나 순릉만 틔여 있고 조각이 사실에 기낍게 조성이 되어 있다. 이것은 일본인 석공들이 조각을 맡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홍릉                                                                              유릉

 

 

3. 유릉 비각의 비문이 다르다.

홍릉에 적혀 있던 대한(大韓)이라는 두 글자는 비의 측면으로 옮겨졌고 '순종 효황제 유릉 순명효황후 부좌 순정효황후 부좌'라고만 전서체로 음각되었다

이는 한일합방으로 조선(대한제국)이 자기 나라가 되었다는 것을 은연중에 드러낸 것이다

 

 

홍릉의 비석                                                           유릉의 비석

홍릉에는앞면에 대한(大韓)이라는 글짜가 있으나 유릉에서 옆면에 씌여져 있다

 

그 외 재실의 위치와 크기, 배치가 다르고 홍릉에 있는 수라간이 유릉에는 없으며 홍릉에는 어정이 능침 아래 한 곳밖에 없으나 유릉에서는 능침 구역 밖의 지점에 2개소나 있다

 

 

순종황제릉 조성 장면

왕릉조성 공사시간은 대개 4~5개월 정도가 소요되며 일꾼만 5000명가량이 필요하고

여기에 당대 최고의 장인들이 붙으니 왕릉 조성은 엄청난 역사라고 할 수 있다.

 

 

 

봉분에 하관하기 위해 임시로 만들어 놓은 능삼각(1926년 순종황제 국장장면)

 

 

 

 왕릉의 능침영역

 

왕릉의 석물들

 

 

왕릉과 황제릉의 차이점

 

조선 왕릉 석물의 배치와 구조는 기본적으로 큰 변화 없이 오랜 기간 반복되었지만 당시의 정치적, 경제적 상황이나 당대 왕의 의지에 따라 약간씩의 변화가 있어 왔으나,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라 칭하면서 고종의 홍릉과 순종의 유릉이 황제릉의 형식을 취하였기 때문에 많은 변화와 차이가 생기게 되었다.

이에 더하여 유릉의 석물에서는 일제의 식민지 지배 이데올로기가 그대로 반영되어 있어 낯설고 어색하게 느껴지는 점이 많다.

 

 

왕릉과 황제릉의 차이는 무엇일까?

 

1. 왕릉은 신도와 어도 2개의 길 뿐이지만 황제릉에는 신도를 중심으로 좌우에 어도가 설치되어  3개의 길이 있다

  

왕릉(2도)                                                                             황제릉(3도)

 

 

2. 왕릉의 정자각에서 월대로 올라가는 계단이 정자각의 좌우에 설치되어 있어 방향을 꺾어서 올라가야하지만 황제릉에는 침전(寢殿)의 정면에 월대로 올라가는 계단이 설치되어 있어 홍살문과 직선축을 형성하고 있다.

 

 

             홍·유릉의 침전의 계단                                           왕릉 정자각에는 정면에 계단이 없다

 

3. 능상구역의 봉분 앞에 위치하던 석물이 내려와 침전 앞쪽의 참도 양옆에 일렬로 배치되어 있으며 이것은 중국 황제릉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전통 조선왕릉에서는 봉분이 있는 능상에 석물이 배치되어 있고 홍살문에서 정자각에 이르는 신도에는 박석만이 깔려 있지만, 홍릉과 유릉에는 능상 공간에는 물론 신도의 좌우에 문무석인과 석수를 도열시키는 방식으로 조성되어 있다.

 

능원의 기본 석물인 문무석인과 동물상이 침전 앞 신도로 내려오면서 석호와 석양이 사라졌고 대신에 중국 명나라 황제릉에 보이는 다양한 동물상이 등장한다.

우선 문석인과 무석인이 차례로 마주보고 서고, 그 뒤로 기린, 코끼리, 사자, 해태, 낙타, 말이 순서대로 신도의 양쪽으로 정렬하고 있다. 이러한 석수의 배치는 유릉에서 그대로 반복되고 있는데, 단 유릉의 경우는 서양식 조각수법이 더욱 많이 반영되었다.

 

  홍· 유릉 침전 앞의 석수                                           왕릉의 봉분앞 문무인석과 석수

 

일반 왕릉의 능침 안에는 양(石羊)과 호랑이(石虎)가 각각 바깥쪽을 향하고 있다. 능의 수호신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다

 

왕릉의 석호와 석양

왕릉을 등지고 바깥쪽으로 보며 능을 보호하는 자세이다

 

 

4. 정자각이 침전으로 바꾸었다. 홍릉과 유릉에서는  ‘우물 정(丁)’자의 정자각에서 형태에서 ‘일(一)’자형으로 변화되었고, 그 이름 또한 ‘침전’으로 변경되었다.

침전이라는 용어는 궁궐 건축에서 사용되는 용어로 임금의 숙소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지붕형식 또한 맞배지붕에서 팔작지붕으로 변경되었으며, 정면 5칸, 측면 4칸으로 조선 궁월 내의 한 건물을 보는 것 같다

바닥의 마감도 전돌로 되어 있고, 월대의 계단위치 및 개수가 이전의 정자각과 다르게 침전의 좌우로 각각 2개, 전면으로 3개가 배치되었다.

 

 

왕릉-정자형                                                               침전-일자형

 

5. 비각이 침전과 수평을 이루고 있다

 

 

홍·유릉 역사문화관

 

 

 

홍 유릉의 삼문 맞은 편에 역사문화관이 있다

 

내부는 원 두 개를 붙여 놓은 모양로 한 쪽은 홍릉, 다른 한 쪽은 유릉에 대해 소개하고 있으며 조선 왕릉에 대한 전반적인 안내와 황제릉으로 조성된 홍유릉의 특징, 대한제국 황실 가계도 등도 함께 볼 수 있다.

또한 왕릉의 조성과정을 시물레이션으로 소개하고 있다 

 

 

영원(英園)

  

홍· 유릉주변의 능 분포도

 

남양주 금곡에는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실의 인물들이 잠들어 있는 곳이다

홍유릉 정문에서 오른쪽 담장을 따라 약 1km 산책로를 따라 걸으면 왼쪽에 '영원(英園)'이 있다

마지막 황태자 영왕(영친왕) '이은'과 영왕비 '이방자'여사가 잠들어 있는 곳이다.

영원은 조선왕조의 후손으로는 홍살문, 정자각, 비각을 갖춘 마지막 왕실 원이다

 

 

영친왕과 이방자여사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 영왕(영친왕)은 고종의 일곱째 아들이자 순종의 이복동생으로서 일제 강점기 당시 통감 이토 히로부미에 의하여 11세 때 일본으로 끌려가 일본인 마사코(이방자)와 결혼하였고, 1970년에 세상을 떠났다.

영친왕과 마사코 사이에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 첫째는 생후 8개월 만에 세상을 떠났고 둘째 아들 이구는 멸망한 황실의 마지막 황세손으로서 극적인 삶을 살다가 2005년 74세의 나이로 운명하였다.

영왕비 이방자여사는 창덕궁 낙선재에 빈청을 마련하였으며, 영친왕이 잠들어있는 영원에 안장되었다.

 

 

당의를 입은 덕혜옹주의 어린시절        심상소학교의 덕혜옹주         덕혜옹주과 남편 쇼 다카우카     

 

영원에서 구불구불한 산책로를 걷다보면 고종황제의 외동딸이며 비운의 공주로 알려진 '덕혜옹주'의 묘를 만날 수 있다

 

 

 

원 묘를 지나면 순종황제의 이복동생인 의왕(의친왕) '이강'묘가 있다

원래는 경기도 고양 서삼릉 영역에 있었는데 1996년 이 곳으로 이장을 하였다

 

영원과 덕혜옹주의 묘, 의왕의 묘 등은 평소에는 개방하지 않아 묘소 내 출입은 제한되어 있어 능역 밖에서만 볼 수 있으며 단, 특별한 행사가 있을 때는 참배할 수 있다

 

 

※ 능, 원, 묘의 구분

 

왕족의 무덤은 왕실의 위계에 따라 능, 원, 묘로 분류된다.

능(陵)은 추존왕, 추존왕비를 포함한 왕과 왕비의 무덤이고,

원(園)은 왕세자와 왕세자비, 그리고 왕의 사친(私親 : 종실로서 임금의 자리에 오른 임금의 생가 어버이)의 무덤을 말한다.

묘(墓)는 나머지 왕족, 즉 왕의 정궁의 아들, 딸인 대군과 공주, 왕의 서자, 서녀인 군과 옹주, 왕의 첩인 후궁, 귀인 등의 무덤을 일컫는다. 현재 온전하게 남아있는 서울 근교의 왕릉은 40기, 원은 13기이다

 

 

 

※ 조선 왕릉의 봉분(封墳) 배치에 따른 형식은 5가지  

 

 ▶ 단릉(單陵) : 왕이나 왕비의 봉분을 별도로 조성한 단독(單獨)의 형태의 릉. - 간원릉 등

 ▶ 쌍릉(雙陵) : 한 언덕에 나란하게 왕과 왕비의 봉분을 마련한 형태의 릉 - 정종의 후릉 등
 ▶ 삼연릉(三連陵) 한 언덕에 왕과 왕비, 계비의 세 봉분을 나란하게 배치한 형태의 릉 - 
헌종의 경릉, 
 ▶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 : 하나의 정자각(丁字閣) 뒤로 한 언덕의 다른 줄기에 별도의 봉분(封墳)과

                       상설(常設)을 배치한 형태의 릉 -문종의 현릉 등
 ▶ 합장릉(合葬陵)왕과 왕비를 하나의 봉분에 합장한 형태의 릉 -
세종의 영릉 등 
 

이 밖에 동원이강릉의 변형(變形)으로 효종의 영릉과 같이 좌우 나란한 언덕이 아닌 남북이나 비스듬하게 배치한 특이한 형식의 능도 있다.

 

 

단릉(單陵)

 

 삼연릉

 

이원릉

 

 

 

※ 능호는 누가 붙이나?

 

능호는 대를 이은 새 왕이 신하들의 의견을 들어 결정한다.

조선 왕릉 중에서 태조 이성계만 조선을 건국한 공을 기려 건원(建元)이란 두 글자를 붙였고 나머지는 모두  한 글자를 붙이는데 물론 겹치는 경우는 없다.

그러나 일제하에서 순종은 고종의 능호를 정할 수 있는 권한이 박탈되어 고종은 능호를 받지 못했고 순종 역시 능호를 받지 못하는 비운의 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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