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경주시 서악동844~1
입구에 들어서면 동양의 비석조각중 최대의 걸작 :경주 태종무열왕릉비(慶州 太宗武烈王陵碑) (국보 제25호)
신라 제29대 왕인 태종무열왕의 능 앞에 세워진 석비이다
통일신라 문무왕때 건립되었으며,당대에 명필가로 이름을 날렸던 무열왕의 들째아들인
김인문이 비문을 새겼다 한다.
3계절로 답사 했지만 신라 56대 왕릉 중 가장 안전지대에 모셔진 릉이다.
500원의 입장료를 받고 있다.
신라 29대왕 신라왕실 최초의 시호와 묘호받은 태종무열왕 김춘추
성은 김씨. 이름은 춘추(春秋602∼661). 진지왕의 손자로 이찬(伊飡) 용춘(龍春, 혹은 龍樹)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천명부인(天明夫人)으로 진평왕의 딸이다.
비는 문명부인(文明夫人)인데 각찬(角飡, 角干) 김서현(金舒玄)의 딸, 즉 김유신(金庾信)의 누이동생 문희(文姬)이다.
김춘추는 의표(儀表)가 영특하고 어려서부터 제세(濟世)의 뜻을 가지고 있었다. 진덕여왕을
섬겨서 관등이 이찬에 이르렀다.
진덕여왕이 죽었을 때 여러 신하들이 처음에는 왕위계승자로서 상대등 알천(閼川)을 천거
하였으나, 알천이 자신의 늙음과 덕행의 부족함을 들어 사양하고 그 대신 제세의 영걸(英
傑)로서 김춘추를 천거하였다.
이에 김춘추가 추대를 받아 즉위하여 신라 중대 왕실(中代 王室)의 첫 왕이 되니 당시
나이가 52세였다.
신라의 숙원이던 백제를 병합함으로써 반도통일(半島統一)의 계기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의미를 가지는 것이었다. 사비성 함락 이후 9월에 당나라는 유인원(劉仁願)의 1만명과 김인
태(金仁泰)의 7,000명의 군대로 하여금 머물러 지키게 하였다.
10월에 태종무열왕은 친히 백제지역에서 아직 정복되지 않은 이례성($이01禮城:
지금의 論山) 등 20여성의 항복을 받고 11월에 백제로부터 귀환하여 백제정벌에서 전사한
자들과 전공을 세운 자들에게 상을 차등있게 내려 주었다.
그리고 항복해 온 백제의 관료들에게도 능력에 따라 신라의 관등을 주어 관직에 보임하는
회유책을 쓰기도 하였다.
신라가 백제를 정벌하는 동안 고구려는 660년에 신라의 칠중성(七重城:지금의 積城)을
공
격해왔고, 661년에는 고구려 장군 뇌음신(惱音信)이 말갈군과 연합하여 술천성(述川城:지
금의 驪州)을 공격하고 다시 북한산성을 공격하였으나 성주인 대사(大舍) 동타천(冬#타47
川)이 효과적으로 방어하였으므로 대나마(大奈麻)로 관등을 높여 주었다.
이해에 압독주(押督州:지금의 慶山)를 대야(大耶:지금의 陜川)로 다시 옮기고 아찬(阿飡)
종정(宗貞)을 도독에 임명함으로써 정복된 백제지역의 관리에 적극성을 보였다.
재위한 지 8년 만에 죽으니 나이 59세였다.
영경사(永敬寺) 북쪽에 장사를 지냈다.
시호는 무열(武烈)이며, 묘호(廟號)는 태종(太宗)이다.(한국의 역사편에서....
무열왕릉 뒷쪽에 아직 밝혀지지 않는 고분들..
첫댓글 무더운 여름날 !!무열왕릉 옆에 "시원한 열무국수 말이집"이 있어서 오랜만에 경상도 국수맛 보겠다 싶어 들어갔는데
내 땀방울을 보았는지 사발이 넘치도록 국수를 내 놓더군요...그런데 웬지 국수맛이 ....입에 쩍쩍달라 붙어
고향이 어디에요? 물었더니.
오마이갓!!! "나요? 전라도 나주랑께요 제부따라서 여기까지 왔소..."나는 끝내 경상도 국수맛 기회를 놓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