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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및 자료실 스크랩 北朝시대의 刻石 서예-墓誌, 造像記, 刻碑, 摩崖刻石
청운 추천 0 조회 31 09.08.03 15:10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3. 北朝시대의 刻石 서예

중국인들은 漢族의 역사를 중심으로 중국의 역사를 이해하고 漢族이 통치한 국가와 문화를 중심으로 시대와 문화를 설명하는 漢族 중심의 역사 사상이 매우 강하다. 여러 민족의 국가로 이루어진 魏晋南北朝시대의 서예도 한족이 통치한 南朝를 위주로 기록되고 소장하며 가르치고 배웠다. 唐나라 太宗 李世民이 王羲之의 서예를 좋아하여 수집한 이후 淸나라 중기까지 王羲之를 중심으로 한 南朝의 서예와 그 심미적 특징이 중국 서예의 전부라고 하여도 지나친 말이 아닐 정도로 王羲之 중심의 서풍이 중국 서예를 풍미하였다. 현재까지 전하고 있는 北朝시대의 刻石 서예 작품이 수천 점이 넘으며 그 예술적 수준과 가치도 漢隸나 南朝의 帖과 비교하여 조금도 손색이 없으나 淸나라 중기까지만 하여도 서예가들의 관심을 받지 못하였다. 淸나라 시대에 접어들면서 발전하기 시작한 고증학, 금석학, 문자학 등 樸學의 발전으로 오랜 세월 동안 햇볕을 보지 못하던 北朝시대의 墓誌銘, 造像記, 刻碑, 摩崖 등의 刻石 서예 작품이 심미적 범주의 중심으로 떠오르게 되었다. 그리고 阮元, 包世臣, 康有爲 등의 經學者와 金石學者의 고증과 저술로 北朝시대의 刻石 서예는 더욱 찬란한 빛을 발할 수 있었다.

중국인들은 漢族의 역사를 중심으로 중국의 역사를 이해하고 漢族이 통치한 국가와 문화를 중심으로 시대와 문화를 설명하는 漢族 중심의 역사 사상이 매우 강하다. 여러 민족의 국가로 이루어진 魏晋南北朝시대의 서예도 한족이 통치한 南朝를 위주로 기록되고 소장하며 가르치고 배웠다. 唐나라 太宗 李世民이 王羲之의 서예를 좋아하여 수집한 이후 淸나라 중기까지 王羲之를 중심으로 한 南朝의 서예와 그 심미적 특징이 중국 서예의 전부라고 하여도 지나친 말이 아닐 정도로 王羲之 중심의 서풍이 중국 서예를 풍미하였다. 현재까지 전하고 있는 北朝시대의 刻石 서예 작품이 수천 점이 넘으며 그 예술적 수준과 가치도 漢隸나 南朝의 帖과 비교하여 조금도 손색이 없으나 淸나라 중기까지만 하여도 서예가들의 관심을 받지 못하였다. 淸나라 시대에 접어들면서 발전하기 시작한 고증학, 금석학, 문자학 등 樸學의 발전으로 오랜 세월 동안 햇볕을 보지 못하던 北朝시대의 墓誌銘, 造像記, 刻碑, 摩崖 등의 刻石 서예 작품이 심미적 범주의 중심으로 떠오르게 되었다. 그리고 阮元, 包世臣, 康有爲 등의 經學者와 金石學者의 고증과 저술로 北朝시대의 刻石 서예는 더욱 찬란한 빛을 발할 수 있었다.

淸나라 중 후기 阮元이『北碑南帖論』을 저술하며 北朝의 서예는 刻碑를 위주로 하며 南朝의 서예는 帖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발전하였다는 ‘北碑南帖’논을 제창하였다. 그리고 帖과 碑의 심미적 특징과 용도, 장점과 단점에 대하여 설명하고부터 北碑와 南帖이라는 용어가 서예학의 새로운 단어로 자리잡게 되었으며 碑派와 帖派라는 새로운 학파를 형성하게 되었다. 漢碑와 北碑를 중심으로 공부하는 학문을 碑學이라 하고 紙帖과 閣帖으로 전하는 南朝의 서예를 중심으로 공부하는 학문을 帖學이라 한다. 北朝시대의 서예 작품은 대부분 北魏와 東魏, 西魏시대의 刻石이며 또 楷書인 까닭에 일반적으로 北碑, 魏碑, 魏楷로 부르고 있다. 包世臣과 康有爲 등의 학자는 北朝에도 帖이 있고 南朝에도 뛰어난 碑가 있기 때문에 北碑南帖으로 나누는 것은 억지가 있다고 阮元의『北碑南帖論』을 비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碑學을 숭상하여 크게 발전시키기에 이른다. 이후부터 중국의 서단은 碑派와 帖學이 대립하기도 하고 서로 호응하기도 하면서 碑學과 帖學으로 발전하였다. 碑派의 입장에서 본다면 일 천년 동안 帖學만이 서예 학습의 전부로 인식되어 온 중국 서단에 일시에 碑學을 帖學과 대등하거나 혹은 우위에 서게 하였기 때문에 碑派의 승리로 인식될 수 있었다.

北朝의 刻石은 크게 刻碑, 墓誌, 造像記, 摩崖, 磚文의 다섯 가지로 나누어진다. 이러한 刻石들은 대부분 北魏와 東魏시대의 작품으로 형식과 서풍이 다양하고 풍부하다. 康有爲는『廣藝舟雙楫』에서 “魏碑無不佳者, 雖窮鄕兒女造像, 而骨血峻宕, 拙厚中皆有異態, 構字亦緊密非常.”(魏碑는 훌륭하지 않은 것이 없다. 비록 첩첩 산 속에 있는 아녀자의 造像記 일지라도 골격과 혈맥이 준엄하며 대범하다. 질박하고 중후한 가운데 모두 다른 형태를 갖추고 있으며 結字 역시 훌륭하다.)이라 하여 北碑의 수준을 매우 높게 평가하였다. “北碑는 훌륭하지 않은 것이 없다”라고 한 康有爲의 평론이 과분한 점이 없지는 않으나 北碑가 하나의 형태로 통일되지 않고 다양한 심미적 특징을 표현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唐나라 시대의 楷書가 매우 엄밀한 법칙과 통일된 형태와 미감을 갖추고 있는 반면 魏楷는 덜 다듬어진 다양한 형태와 미감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서예가들에게 광범위한 창작 영역을 제공하는 매우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는다.

北魏시대의 刻石 서예의 특징은 전기와 후기로 나누어 설명할 수 있다. 전기는 太武帝가 즉위한 후인 424년부터 孝文帝가 洛陽으로 수도를 옮긴 494년 이전까지이며 그 이후는 후기로 분류 할 수 있다. 道武帝인 拓跋珪가 北魏를 건국한 후부터 太武帝 이전까지의 北魏 시대의 刻石 서예 작품은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다. 北魏 전기의 魏碑 서체는 隸書의 筆劃과 結字법이 많이 남아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시기의 대표적 작품은『太武帝東巡碑』,『大代華岳廟碑』,『中嶽嵩高靈廟碑』,『暉福寺碑』 등으로 대부분이 비석의 형태이다. 60년대 이후 內蒙古 阿里河의 嗄仙洞안에서『鮮卑石室石刻祝文』이 발견되었으며 초기의 造像題名과 造像記 몇 점이 발견되었다. 그러나 北魏 전기의 墓誌와 摩崖, 그리고 완벽한 형태의 造像記는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다.

洛陽으로 도읍을 옮긴 후부터 北魏의 孝文帝는 漢化정책으로 漢族의 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임에 따라 중원의 문벌 세족들이 北魏의 정치와 문화에 많이 참여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北魏의 문화와 예술은 눈부신 발전을 하게 되었다. 孝文帝 이후의 후기 北魏의 서체는 일대 변화를 맞이한다. 洛陽으로 도읍을 옮긴 孝文帝는 궁전을 건축하고 龍門에 석굴을 뚫어 불상을 조각할 뿐 아니라 그곳에 불상을 만들고 造像記를 세웠다. 또한 관리와 귀족들은 죽은 사람의 무덤에 墓誌를 묻고 관에는 화려한 그림을 그리고 頌德碑를 세워 고인의 명복을 빌며 가문을 빛내는 방법으로 삼았다. 이와 더불어 서예의 수준도 급속히 발전 할 수 있었으며 내용과 형식도 다양해 졌다. 北魏 전기의 서예 작품은 비석이 대부분이고 서체도 十六國시대 이후의 특징인 隸書의 맛을 띤 楷書 즉 新隸體가 중심이 되었다. 그러나 후기 北魏의 서예는 작품의 형식과 내용도 다양할 뿐 아니라 楷書로 완성되면서도 풍부한 미감을 갖추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北魏가 멸망한 후에 東魏와 西魏가 각각 鄴(지금의 河北省 臨漳縣)과 長安에 도읍을 정하고 새로운 왕조를 세웠다. 東魏와 西魏 모두 北魏의 제도와 문화를 그대로 수용하여 발전하여 나아갔다. 서예도 北魏의 형식과 서풍을 직접적으로 이어 받았다. 그러나 北魏의 刻石 서예와 같은 웅장하고 강건한 미감은 점점 쇠약해 가는 형세이며 예술적 가치도 많이 떨어진다. 東魏의 刻石 서예 작품으로『程哲碑』,『高盛碑』,『凝禪寺三級浮圖碑』,『司馬昇墓誌』,『劉懿墓誌』,『王僧墓誌』,『高歸彦造像記』 등이 전하고 있다. 西魏 시대의 刻碑은 전하지 않으며 墓誌와 造像記도 몇 점되지 않고 예술적 가치뿐 아니라 서예사적 가치도 매우 낮다.

北齊가 東魏의 왕조를 이어 받고 난 후부터 北朝의 서예는 많은 변화를 맞이한다. 北魏를 중심으로 한 北魏의 서체는 楷書를 근본으로 하고 있으나 北齊의 서예는 隸書를 위주로 한다. 復古 정책과 함께 번성한 北齊의 隸書는 漢魏시대의 隸書와는 많은 차이가 난다. 筆劃의 波磔만 隸書의 형태를 취하고 있을 뿐 楷書의 결구와 자형을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北齊시대 서예의 또 하나의 특징은 석굴의 造像記 이외에 摩崖刻石이 많은 것이다. 摩崖刻石은 山東省의 泰山과 天柱山에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다. 北齊시대에 완성되지 못한 摩崖刻石들은 北周 시대에도 계속 새겨져 현재까지 전하는 刻經이 수천 자에 이른다. 徂徠山과 四山이라 불리는 鐵山, 崗山, 葛山, 尖山 등에 수많은 北周시대의 摩崖 刻經이 전해지고 있다. 北周의 서예는 東‧西魏와 北齊의 서예를 그대로 이어 받았다고 하였다고 평가 할 수 있다. 그들이 비록 南朝의 영향으로 약간의 변화를 추구하였으나 역사가 짧은 까닭에 큰 업적은 남기지 못하였다. 다만 北齊시대 이전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불교의 전통으로 摩崖 刻經 작품과 몇 점의 碑刻 작품을 남기고 있다.

1) 墓誌

墓誌는 죽은 사람의 이름, 관직과 업적, 생졸연대 등을 돌이나 나무, 도자기 등에 기록하여 묘소에 묻은 것으로 墓誌銘이라 부르기도 한다. 문헌의 기록을 근거로 하면 墓誌의 기원은 周나라 시대이다.『禮記‧檀弓』에 “銘, 銘旌也”(銘은 銘旌이다)라는 기록이 있고『儀禮‧士喪禮』에도 ‘銘’을 묘소나 관에 함께 넣는 銘旌이라 하였다. 초기의 墓誌는 이름과 형식이 통일되지 않고 葬磚, 墓碑, 墓記, 柩銘, 新座 등으로 불리다가 南北朝시대에 墓誌와 墓誌銘으로 불렸다. 南北朝시대에 墓誌의 문장 형식은 통일되며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진다. 誌文은 산문의 형식인 傳記이며 銘文은 운문의 형식으로 시와 비슷하다. 南北朝시대의 서예 작품으로 가장 많이 전하는 것이 墓誌이다.『北京圖書館藏墓誌搨片目錄』에 수록된 墓誌만 하여도 4636점이며 그밖에 佛僧의 塔銘이나 각 고을에 흩어져 있는 것을 모두 합하면 수 천 점이 더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淸나라 이전에는 墓誌 서예에 대한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하였다. 18세기 금석학과 고증학 등 淸學이라 불리는 樸學이 성행한 이후 역사, 지리, 민속, 문학, 문자와 서예의 연구에 墓誌가 귀중한 자료로 이용되었다. 魏晋南北朝시대 이전의 墓誌는 수량도 매우 적을 뿐 아니라 형식도 완비되지 않고 있다. 曹魏시대 이후에 墓誌의 수가 조금씩 증가하였으며 北魏 시대 孝文帝가 洛陽으로 도읍을 옮기고 난 이후부터 급속히 많아져 국왕과 귀족 관료에서 일반 백성들까지 墓誌를 묻는 풍속이 유행하였으며 형식과 내용이 점차 통일되었다. 지금까지 발견된 墓誌 가운데 가장 많은 것은 北魏시대의 것으로 民國 이후에 洛陽의 北邙山에서 수백 점이 발견되었으며 예술적 수준이 높은 작품이 매우 많다. 北魏시대 이후의 墓誌는 정사각형이나 직사각형의 石盤에 명문을 새겨 그 위에 뚜껑을 덮고 뚜껑 위에 다시 죽은 사람의 이름을 새기는 형식이 대부분이다. 명문의 내용은 墓主의 출생지, 이름, 경력, 생졸연대, 가족 관계, 그리고 頌德詩가 기록되어 있다.

北朝시대의 사람들은 墓誌로 사용할 석재를 고르고 다듬어 글씨를 쓰고 새기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 글씨를 쓰기에 편리하도록 石盤을 평평하고 매끄럽게 갈아내고 가로와 세로로 선을 그어 칸을 만들거나 사방의 가장자리와 뚜껑에 그림을 새겨 장식하기도 하였다.『元暉墓誌』의 네 가장자리에 새겨진 四神과 구름 기운의 문양,『馮邕妻元氏墓誌』의 뚜껑과 네 가장자리의 특이한 동물을 새긴 문양,『元顯儁墓誌』의 거북 모양과 또 뚜껑을 거북의 등처럼 조각한 것 등에서 墓誌를 만드는 北朝 사람들의 정성을 엿볼 수 있다. 글씨도 수준이 가장 높은 사람으로 하여금 쓰거나 새기게 하여 서예와 그림, 그리고 조각을 완벽하게 조화하여 훌륭한 예술품으로 탄생 시켰다.

北朝시대 墓誌의 서예는 造像記나 摩崖 刻石과 비교 할 때 많은 차이가 난다. 墓誌는 석굴의 造像記나 摩崖의 刻石과 달리 석질이 좋은 것을 택하여 균일하게 다듬을 수 있었고 규모가 작아 실내나 일정한 장소에서 글씨를 쓰거나 새겨 완성 할 수 있었다. 따라서 墓誌는 좁은 면적에도 작은 서체로 많은 글자를 써넣을 수 있었고 서체의 완성도가 높으며 세련되었다. 글씨를 쓰거나 새기는 환경과 석질의 조건이 다르기 때문에 형태와 서풍이 달라지는 것 이외에 새기는 방법의 차이에서도 형태와 서풍이 다르게 나타난다. 대부분의 墓誌가 雙刀法에 의하여 새겨졌으나『皇甫驎墓誌』,『劉玉墓誌』 등은 雙刀法과 單刀法을 함께 사용하여 또 다른 맛을 표현하였다. 이러한 刀法은 淸나라 시대 이후에 성행한 篆刻의 款識에서 많이 사용하는 刀法으로 생동감이 많은 것이 특징이다.

墓誌 서예의 서풍은 南朝 墓誌와 北朝 墓誌의 두 가지로 나누어 설명할 수 있다. 南朝시대의 墓誌 서예의 筆法과 結字法은 다양 하지만 심미적 범주는 그 시대의 다른 서예 작품들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온아하고 유연하다. 北朝시대 墓誌는 孝文帝가 洛陽으로 도읍을 옮기고 난 후의 北魏 시대에 급속하게 증가하였다. 東魏와 北齊에서도 墓誌를 묻는 전통이 계승되었으나 西魏와 北周에서는 墓誌를 묻는 풍속이 적었다. 北朝시대의 墓誌 서예는 北魏와 東魏‧北齊 시대로 나누어 설명 할 수 있으며 또 北魏의 墓誌 서예는 몇 가지 서풍과 심미적 특징으로 나누어 설명 할 수 있다.

첫째는『刁遵墓誌』,『崔敬邕墓誌』,『元簡墓誌』,『元羽墓誌』,『元珍墓誌』,『司馬顯姿墓誌』,『元詮墓誌』,『元顯儁墓誌』,『常季繁墓誌』 등과 같은 작품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특징으로 體勢가 기운 듯 하면서도 用筆이 완전하고 빼어나다. 점획은 매우 성숙한 楷書의 형태를 갖추고 있으며 結體가 가지런하고 결구와 布置가 우수하다. 方筆을 많이 사용하였고 起筆과 收筆을 날카롭게 처리한 반면 자유롭고 변화가 많은 轉折法의 사용으로 강건하고 예리한 맛을 잘 조화하여 부드럽게 표현한 것이 특징이다.

둘째는『司馬昞墓誌』,『張玄墓誌』,『孟敬訓墓誌』,『趙充華墓誌』,『充華嬪盧氏墓誌』,『元慧墓誌』,『穆玉容墓誌』,『鄭道忠墓誌』,『元勰墓誌』 등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특징으로 비교적 偏方形의 體勢로 이루어져 있으며 약간의 偏筆을 사용한 흔적이 엿보인다. 점획은 圓筆을 많이 사용하였으며 結字가 단정하며 고아하고 부드러운 미감을 많이 표현하고 있다.

셋째는『鞠彦雲墓誌』,『元彬墓誌』,『皇甫驎墓誌』 등에서 표현되는 특징으로 起筆과 收筆에서 方筆의 運筆法을 많이 취하였다. 隸書에서 楷書로 변화하는 과정의 서체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자형이 질박하고 천진스럽다. 그리고 筆劃이 방정하고 튼튼하여 강건하고 웅장한 맛을 표현하였다. 이상과 같은 공통점으로 이루어진 墓誌 이외에도 수많은 墓誌가 각각 독특한 형태와 심미적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 가운데에는 行書의 筆意로 쓰여진『元保洛墓誌』, 瘦金書와 같이 가늘고 예리한 筆劃으로 쓰여진『劉玉墓誌』,『元周安墓誌』 등 墓誌마다 서로 다른 형태와 심미적 특징을 나타낸다.

東魏와 北齊에서도 北魏시대에 가장 성행한 墓誌의 전통을 계승하였으나 예술적 수준은 점점 낮아진다. 筆法이 단순하여 筆劃이 평범해지고 자형은 평탄하며 개성이 줄어들고 하나의 형태와 미감으로 통일되어 가는 것을 알 수 있다. 東魏시대의 墓誌 가운데 비교적 유명한 것은『司馬昇墓誌』,『高湛墓誌』,『劉懿墓誌』,『王僧墓誌』,『王偃墓誌』 등이 있으며 北齊시대의 墓誌는『朱岱林墓誌』,『崔頠墓誌』 등이 전하고 있다.

『刁遵墓誌』는 北魏시대의 熙平 3년(517)에 새겨진 墓誌銘으로 淸나라 雍正시대(1723-1735)에 河北省 南皮의 절터에서 발견되었다. 출토될 당시에는 오른쪽 위에서 왼쪽 밑으로 끊어져 있는 반쪽만 발견되었으며 乾隆 27년(1762)에 劉克綸이 나머지 부분을 발견하여 붙였다. 석질이 좋지 못하고 관리 상태가 나빠 글씨의 상태가 빠르게 훼손되고 있기 때문에 初拓本이 서체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墓誌의 글씨는 모두 일 천자가 넘으며 윗면은 28행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매 행 33자의 楷書가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형제와 아들들의 이름이 적혀 있다. 墓誌의 내용을 살펴보면 刁遵의 선조는 晋나라에서 벼슬을 하였으며 아버지 때에 난을 피하여 後奏로 옮겨 살았고 자신은 다시 北魏에서 벼슬을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刁遵의 고조부 이하 아들과 손자까지의 기록이『晉書』,『宋書』,『魏書』,『南史』,『北史』 등의 역사책에 기록되어 전하고 있다.

『刁遵墓誌』의 서체는 같은 해에 새겨진『崔敬邕墓誌』와 비슷하며 다같이 北魏시대 墓誌 서예의 으뜸으로 꼽힌다. 起筆과 收筆에서 붓 맛과 칼 맛을 적절하게 나타내었으며 筆劃의 움직임이 정교하다. 轉折에서 많은 변화를 추구하였으며 結字가 우수하고 布置가 자연스러워 강건하면서도 결코 억세지 아니하며 단아 하지만 허약하지 않다. 이 墓誌가 발견되고 세상에 알려진 시기가 마침 고증학과 금석학 등이 성행하기 시작한 시대로 학자들의 시선이 집중될 수 있었다. 또한 刁遵과 그 가문의 사람들이 모두 史籍에 등장하므로 이 墓誌는 역사를 고증 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가 되어 많은 학자들이 다투어 연구하고 저술하였으며 北魏시대의 墓誌 서예 가운데 가장 훌륭한 작품의 하나로 평가하기도 하였다. 包世臣은『藝舟雙楫』에서『刁遵墓誌』를『乙瑛碑』보다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하였으며 康有爲도『廣藝舟雙楫』에서 “如西湖之水, 以秀美寰中”(마치 西湖의 물과 같이 빼어나게 아름답다.)하여 그 수준을 北魏시대 墓誌 서예의 으뜸으로 평가하였다.

『鞠彦雲墓誌』는 北魏시대 正光 4년(523)에 새겨진 것으로 墓誌석과 뚜껑에 모두 글씨가 새겨져 있다. 뚜껑에는 “黃縣都鄕石羊里鞠彦雲墓志”라 새겨져 있으며 墓誌의 銘文은 14행으로 매 행 13자의 楷書가 새겨져 있다. 北魏시대의 墓誌가 대부분 洛陽에서 출토되었으나 이 墓誌는 淸나라 光緖(1875-1908) 초기에 山東省 黃縣에서 출토되었으며 지금까지 黃縣에 보존되어 있다.

洛陽에서 출토된 北魏의 墓誌는 모두 성숙한 楷書의 형태를 취하고 있으며 비록 각각 독특한 서풍을 지니고 있으나 동일한 시대의 작품임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 그러나『鞠彦雲墓誌』는 北魏시대 墓誌의 가장 전형적 형태를 갖춘『元倪墓誌』,『常季繁墓誌』와 같은 해에 새겼으나 그 형태와 미감이 매우 독특하다. 筆劃이 굵으며 한 획 안에서 굵기의 변화를 적게 하였고 隸書의 筆勢를 더하였다. 정방형의 結字에 方筆과 隸書의 필세를 많이 표현하여 서풍이 고아하고 질박하다. 北魏시대의 墓誌에서는 이러한 형태가 드물고 東晋의『王興之墓誌』,『王丹虎墓誌』와 北魏의『嵩高靈廟碑』,『伊闕造像記』 등의 新隸體에서 비슷한 미감을 발견할 수 있다.

『張玄墓誌』는 北魏시대 普泰 원년(531)에 새겨진 墓誌銘으로 언제 어디서 발견되었는지 알 수 없다. 원적은 이미 소실되었고 지금 전하는 것은 何紹基가 소장하고 있었던 拓本 뿐으로 上海博物館에 보관되어 있다. 拓本도 책으로 묶어져 전체가 12면이며 한 면에 4행, 매 행 8자로 이루어져 있다. 전체의 이름은 “魏故南陽太守張玄墓誌”이며 淸나라 시대에는 康熙帝의 이름인 玄燁의 이름자를 피하기 위해 張玄의 字인 黑女를 사용하여『張黑女墓誌』라 불렀다.『張玄墓誌』는 南朝 서예의 우아함과 北朝 서예의 강건함을 잘 조화하여 형태와 마감이 매우 뛰어나다. 隸書와 비슷한 偏方形의 結體와 가로로 뻗어 나가는 體勢를 갖추어 품격이 높고 고아한 맛이 넘친다. 中鋒과 側鋒을 고루 사용하고 方筆과 圓筆의 運筆法을 적절하게 구사하여 점획의 형태와 맛이 풍부하고 다양하다. 또한 筆劃은 가는 획과 굵은 획을 조화롭게 배치하였으며 연결된 곳과 끊어진 부분의 처리가 뛰어나 운치가 풍부하다.

『張玄墓誌』의 예술성은 北朝시대의 楷書 가운데 가장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何紹基는 跋文에서 “化篆分入楷,...... 遒厚精古, 未有可比肩黑女者.”(篆書와 隸書의 법을 楷書에 삽입하였다. 씩씩하고 온후하며 정교하면서도 예스러운 맛으로는『張玄墓誌』와 비교할 것이 없다.)라 하였고 包世臣은『藝舟雙楫』에서 “此碑有定法而出之自在, 故多變態.”(이 墓誌는 일정한 법이 있으나 법이 자신 속에 존재하므로 형태가 다양하다.)라 하여 고전의 법칙을 잘 소화하여 개성 있는 자신만의 아름다움을 표현하여 개성이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하였다. 이밖에도 康有爲, 黃本驥, 張穆, 許瀚 등 淸나라 시대의 수많은 書學者들이『張玄墓誌』의 예술성에 대하여 고증하였으며 예술성을 높이 평가하였다.

2) 造像記

北朝는 불교가 중국으로 전파된 후 가장 성행한 시대로 거의 모든 왕조의 제왕은 불교를 숭상하였으며 백성들도 불교에 몸과 마음을 맡기게 되었다. 十六國시대 이후로 北朝 사회는 전쟁이 끊이지 않아 사람들의 생활은 궁핍하였을 뿐 아니라 목숨의 보존도 쉽지 않았다. 따라서 몸과 마음의 안식처가 필요하게 되었고 때를 맞추어 성행한 불교를 믿음으로서 현실 생활의 고통에서 벗어나려 하였으며 죽은 후에 극락에서 영원히 행복하게 살려고 하였다. 南朝의 불교는 교리를 연구하고 불경을 번역하는 등의 실질적인 불사에 치중한 반면 北朝는 사찰을 건축하거나 굴을 뚫어 불상을 조각하고 造像記를 남기는 등의 공덕을 쌓아 내세의 행복을 기원하였다. 北朝 사람들은 조상과 부모 그리고 자신과 자손을 위하고 심지어 국가와 제왕을 위하여 불상을 만들고 그곳에 造像의 題記을 남겨 소원을 빌었다. 이때 남겨진 造像記는 현재까지 수백 점이 전하며 예술성이 뛰어날 뿐 아니라 서예사의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현재까지 존재하는 北朝시대에 불상을 새긴 석굴은 10여 곳으로 그 가운데 가장 유명한 곳은 敦煌의 千佛洞, 大同의 雲崗石窟, 洛陽의 龍門石窟이다. 千佛洞은 敦煌의 鳴沙山 동쪽에 위치하며 600여 석굴로 이루어져 있다, 그 가운데 450여 석굴에 불상이 새겨져 있으며 예술성이 뛰어난 벽화로 장식되어 있다. 唐나라 시대 造像의 題記에 의하면 이 석굴은 前秦시대의 建元 2년(366)에 불승인 樂僔이 莫高窟을 처음으로 조성하기 시작하였다고 기록하였다. 이후부터 北朝와 隋唐을 거쳐 淸나라 시대까지 꾸준히 불상을 조각하고 벽화를 그려 왔다. 그 가운데 北魏시대와 唐나라 이전의 석굴이 규모가 클 뿐 아니라 불상과 벽화의 예술성도 뛰어나다. 그러나 이곳의 서예 자료는 불경을 쓴 竹簡書과 寫經이 대부분이며 造像記는 몇 점에 지나지 않고 규모도 매우 작다.

雲崗石窟은 山西省 大同市의 武州山에 조성한 北魏시대의 석굴로 40여 큰 동굴을 포함하여 크고 작은 동굴에 약 10만여 점의 불상이 조성되어 있는 중국 최고의 석굴이다. 이 석굴은 서기 450년 北魏의 文成帝가 佛僧 曇曜로 하여금 조성하게 하여 이루어 졌으며 대부분 洛陽으로 도읍을 옮기기 이전에 완성되었다. 가장 큰 석굴과 불상은 20미터가 넘으며 석굴의 벽과 천장에 수백 혹은 수천 점의 불상과 장식이 조각되어 있다. 그러나 洛陽으로 도읍을 옮기기 이전의 北魏는 아직 漢族의 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지 않은 까닭에 석굴 속에 造像記를 거의 남기지 않았다.

造像記가 가장 많이 전하는 곳은 洛陽의 龍門石窟로 규모가 클 뿐 아니라 書法 예술의 수준도 매우 높다. 龍門石窟은 北魏 시대의 孝文帝가 494년 洛陽으로 도읍을 옮기고 난 후부터 宣武帝때까지 대대적으로 조성되었다. 그리고 東魏와 北齊를 거쳐 隋唐과 北宋때까지 계속하여 일 만여 점에 달하는 불상을 조성하였으며 3600점이 넘는 造像記를 남겼다. 이 가운데서 예술적 가치가 뛰어난 造像記는 대부분 北魏시대의 것으로 초기의 석굴인 ‘古陽洞’에 집중되어 있다. ‘古陽洞’의 불상들은 孝文帝가 洛陽으로 도읍을 옮길 때 함께 이주해 온 문벌 관료들이 조성한 것으로 석굴과 불상의 규모가 매우 크며 造像記의 문장이 길고 예술성이 빼어나다. 龍門의 造像記 가운데 예술성이 뛰어난 20점을 가려 뽑은『龍門二十品』가운데 19점이 ‘古陽洞’에 있는 것을 볼 때 ‘古陽洞’의 造像記가 얼마나 뛰어난지 짐작할 수 있다. 이외에도 造像記는 遼寧省 義縣의 萬佛洞과 山東省 歷城의 黃石崖 등에 몇 십 점씩 전하고 있다.

北朝시대의 造像記는 같은 시대의 墓誌나 刻碑 서예와는 서로 다른 형태와 심미적 특징으로 이루어져 있다. 같은 시대의 墓誌나 刻碑 서체는 造像記와 같은 方筆이지만 변화가 많고 서체의 완성도가 매우 높다. 그러나 造像記는 굴곡이나 경중 등 用筆의 변화가 적고 굵은 획을 주로 사용하여 웅장하고 강건한 맛은 넘치지만 평탄하여 단조로운 단점이 있다. 이러한 차이는 재료나 환경의 차이 뿐 아니라 쓰고 새기는 방법이 다르기 때문이다. 墓誌나 비석은 좋은 석질의 재료를 골라 일정한 장소에서 비교적 쉽게 작업하였다. 그러나 造像記는 대부분 석굴 속이나 산중의 비교적 높은 곳에 위치한 매우 험하고 단단한 바위에 記文을 쓰고 새겨야 하기 때문에 작업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또 墓誌나 刻碑는 명필에게 청하여 書丹하였고 새기는 과정에 교정도 받을 수 있었으나 造像記는 험난한 산중에 위치한 까닭에 명필의 書丹을 받기가 어려웠다. 따라서 제왕이나 귀족들이 세운 造像記를 제외한 대부분이 민간의 書家에 의해 書丹되거나 혹은 書丹을 거치지 않고 바로 새겨졌다. 서체의 변천사를 살펴 볼 때 민간에서 사용하던 서체는 관료나 지식 계층보다 항상 덜 정리되고 투박하며 완성도가 낮은 것이 특징이다. 造像記의 서체가 墓誌나 비석과 형태와 미감이 서로 다른 것은 바로 이와 같은 까닭 때문이다. 淸나라 시대의 후기에 黃易(1744-1802)가 龍門石窟의 造像記 가운데 예술성이 뛰어난 작품인『孫秋生造像記』,『始平公造像記』,『楊大眼造像記』,『魏靈藏造像記』를 拓本하여『龍門四品』이라 이름 붙이고 난 뒤부터 五品, 十品, 二十品, 三十品, 五十品, 百品, 千五百品, 龍門全拓 등의 이름을 붙여 부르는 습관이 생겼다. 그 가운데 가장 뛰어난 造像記를 가려 뽑아 보편적으로 사용하는 이름이『龍門二十品』이다.『龍門二十品』은 北魏의 孝文帝가 洛陽으로 도읍을 옮긴 직후인 太和 18년(494)부터 新龜 3년(520)까지 약25년간 조성된 불상의 造像記로『牛橛造像記』,『一弗造像記』,『元詳造像記』,『始平公造像記』,『解伯達造像記』,『鄭長猷造像記』,『孫秋生造像記』,『高樹造像記』,『惠感造像記』,『賀蘭汗造像記』,『馬振拜造像記』,『幼孫造像記』,『法生造像記』,『孫保造像記』,『道匠造像記』,『魏靈藏造像記』,『楊大眼造像記』,『元燮造像記』,『元祐造像記』,『慈香造像記』이다. 造像記의 이름은 불상을 조성한 사람의 이름이나 명복을 빈 죽은 사람의 이름을 따서 붙이는 것이 보편적인 현상이다.

造像記 서예의 가장 뚜렷한 특징은 方筆을 기본으로 하며 結字가 방정하고 體勢가 웅장하고 강건한 것이다. 이러한 특징을 잘 표현한 작품이 바로『龍門二十品』이다.『龍門二十品』의 用筆은 方筆을 중점적으로 사용하였으며 起筆과 收筆이 분명하고 날카로운 鋒芒을 드러내고 있다. 筆劃사이의 간격을 균일하게 하고 가운데를 향해 모여들게 하였으나 힘의 중심을 약간 높게 두어 둔탁한 느낌을 떨쳐 버렸으며 장중하고 강건한 느낌을 표현하였다. 章法은 단정하고 규칙적인 배열을 위주로 하였으며 간지와 이름자를 기본적으로 본문과 같은 크기로 안배하였다. 楊守敬은『平碑記』에서『龍門四品』인『孫秋生造像記』,『始平公造像記』,『魏靈藏造像記』,『楊大眼造像記』와『高樹造像記』를 “北魏人造像多此種筆法, 而以此五種爲最工, 結體別有一種風格, 用筆尤斬釘截鐵, 五種大致相同.......”(北魏의 많은 造像記들이 이상의 작품과 같은 筆法으로 쓰여졌으나 이 다섯 造像記의 작품이 가장 뛰어나다. 結體는 서로 다르나 같은 기풍과 격조를 표현하고 있고 특히 剛斷이 있으며 예리한 用筆은 다섯 작품이 비슷하다.)이라 하여 龍門의 造像記가 龍門五品을 중심으로 비슷한 미감으로 이루어져 있으나 서로 다른 형태적 특징이 있다고 하였다.

龍門石窟의 造像記 중에는『龍門二十品』과 같은 규모가 큰 造像記 이외에도 규모가 작은 소품들이 많이 있다. 그 중에서 예술성이 비교적 뛰어난 작품은『安定王造像記』,『杜遷造像記』,『安景妃造像記』 등이 있으며 질박하고 천진스러운 미감이 특징이다. 北朝시대의 造像記 가운데 龍門石窟 다음으로 유명한 것은 遼寧省 義縣의 萬佛堂 석굴의 造像記 이다. 萬佛堂은 北魏 孝文帝 말년(499)에 營州刺史인 元景이 창건한 석굴로 동쪽과 서쪽에 각각 여섯 곳의 석굴이 있다. 이곳에는 淸나라 시대의 梁啓超가 拓本의 발문에서 “天骨開張, 光芒閃溢.”(강직한 골기가 뻗어나고, 섬광이 가득 넘친다.)이라 평가한『元景造像記』,『韓貞造像記』 등의 명작이 남아 있다.

北朝시대의 造像記는 석굴 이외에 바위벽에도 많이 남아 있다. 비교적 많은 양이 새겨져 있는 곳은 山東省 歷城의 黃石崖로 서체와 미감이 석굴 造像記와 큰 차이가 없으나 시대가 경과할수록 粗率한 맛이 많다. 대표적 작품은『法義兄弟姉妹造像記』,『法義二十五人造像記』 등이다. 이밖에도 돌의 평면에 불상을 새기고 그 아래나 양옆에 造像記를 기록한 형식의 造像碑記도 많이 전하고 있다. 그 가운데 예술성이 뛰어난 작품은『劉根造像記』,『劉平周造像記』,『崔懃造像記』,『姚伯多造像記』,『曹望喜造像記』 등이다.

『牛橛造像記』는 北魏 太和 19년(495)에 조성된 것으로『尉遲造像記』 또는『長樂王造像記』라 불리기도 한다. 長樂王의 부인 인 尉遲가 죽은 자식 牛橛를 위하여 불상을 조성하고 造像記를 기록한 내용이다. 楷書로 새겨져 있으며 모두 7행이고 마지막 행의 6자를 제외한 모든 행이 16자로 이루어져 있다. 古陽洞 석굴의 龍門二十品 가운데 가장 일찍 새겨진 造像記로 다른 작품들보다 筆劃이 가늘면서도 起筆과 收筆이 분명하다. 行筆의 들고 누름과 가늘고 굵음, 그리고 꺾고 돌리는 筆劃의 변화를 매우 잘 표현하였다. 이러한 점은 다른 造像記에서 보기 어려운 특징이다. 가로획의 筆勢가 비교적 길며 자형이 조금 기울어져 있으나 결구가 가지런하고 布置가 뛰어나다. 다른 造像記들에 비해 楷書로서의 완성도가 매우 높으며 새긴 기술이 뛰어나 書丹한 사람과 새긴 사람이 당시의 뛰어난 서예가와 석공일 것으로 추정된다. 康有爲는『廣藝舟雙楫』에서 “[丘穆陵亮夫人尉遲造像』體方筆厚, 劃平竪直, 宜先學之.”([尉遲造像記』는 자형이 네모나며 筆勢가 중후하다. 筆劃은 수평과 수직을 기본으로 하기 때문에 마땅히 이 造像記를 먼저 배워야 한다.)하여『牛橛造像記』가 魏楷 가운데에서 기초를 닦는 중요한 작품임을 강조하였다.

『始平公造像記』는 北魏 太和 2년(498)에 比丘인 慧成이 남편인 洛川刺史 始平公의 명복을 빌며 불상을 조성하고 남긴 造像記이다. 古陽洞의 북쪽 벽에 위치하여 10행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매 행 13자의 楷書로 새겨져 있다. 孟達이 문장을 짓고 朱義章이 글씨를 쓴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양각으로 새겨져 있다. 양각으로 새겨진 서예 작품은 印章이나 瓦當을 제외하고는 매우 드물게 볼 수 있는 것이며 규모가 큰 작품으로는『始平公造像記』가 으뜸이다. 筆劃이 굵고 각이 뚜렷한 方筆을 사용하였으며 結體가 조밀하여 중후하면서도 강건한 미감이 특징이다. 비록 칼로 새긴 느낌이 많이 나지만 붓으로 쓴 筆劃의 특징을 표현하려고 노력하여 내면의 筆勢와 흐름은 살아 있다. 淸나라 시대의 趙之謙은 이 작품의 筆意와 결구를 응용하였으며 “北魏造像中最佳者”(北魏 시대의 造像記 가운데 가장 뛰어나다.)라 평가하였다. 또한 康有爲는『廣藝舟雙楫』에서 “遍臨諸品, 終於[始平公』, 極意流蕩, 骨格成, 體形定, 得其勢雄力厚, 一生無靡弱之病.”(여러 작품을 臨書한 후 마지막에『始平公』을 배우면 골격이 이루어지고 체형이 안정된다. 그 體勢의 웅장함과 힘의 장중함을 얻으면 평생 동안 미약한 병은 생기지 않는다.)이라 하여 造像記 중에서 마지막으로 배워야 하는 작품이라 평가하였다.

『孫秋生造像記』는 아래에 造像題名이 있고 위에 造像記가 있는 비교적 특이한 형식이다. 造像記는 北魏시대의 太和 7년(483)에 새겨졌으며 造像題名은 景明 3년(502)에 새겨진 것으로 孟廣達이 문장을 짓고 蕭顯慶이 글씨를 썼다고 기록되어 있다. 古陽洞의 남쪽 벽에 위치하며 楷書로 13행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造像記는 매 행 9자이고 造像題名은 매 행 13자이다. 方筆의 筆法을 주로 사용하고 起筆과 收筆의 각이 뚜렷하며 결구가 방정하고 강건한 미감은『龍門二十品』의 다른 造像記와 거의 비슷하다. 이러한 특징은『魏靈藏造像記』나『楊大眼造像記』에서도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龍門 造像記의 가장 큰 특징이다.

3) 刻碑

北朝시대의 刻碑 서예도 墓誌나 造像記 서예와 마찬가지로 北魏시대에 가장 발전하였으며 수량이 많을 뿐 아니라 예술적 수준과 서예사적 가치도 가장 높이 평가되고 있다. 北魏 시대의 刻碑 서예는 그 형태와 심미적 특징을 전기와 후기로 나누어 설명 할 수 있다. 전기는 太武帝 始光 원년(424)부터 孝文帝 元宏 18년(494)까지로 이 시대의 刻碑 서예는 楷書이지만 隸書의 筆劃과 筆勢를 많이 표현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 시대의 유명한 刻碑 작품으로는『太武帝東巡碑』,『大代華岳廟碑』,『中嶽嵩高靈廟碑』 등이 전하고 있다. 이 세 가지 北碑는 형태와 筆法, 그리고 심미적 특징이 東晋시대의 刻石 서예와 南朝시대의 비석인『爨龍顔碑』 등의 新隸體와 매우 비슷하다. 이러한 공통점은 훗날 일부의 書學者들에 의하여 阮元의『北碑南帖論』을 비판하는 근거로 사용되기도 한다. 이 밖에도 北魏시대 후기 刻碑 서예의 전형적 형태를 갖추고 있는『暉福寺碑』가 있다.

北魏시대의 刻碑 서예는 洛陽으로 도읍을 옮긴 494년 이후에 크게 번성하였다. 이 시대는 중국 서예사에서 漢隸, 唐楷의 刻碑 서예와 함께 최고의 예술 수준으로 평가받는다. 康有爲는『廣藝舟雙楫』에서 “凡北碑, 隨取一家, 皆足成體.”(北魏시대의 刻碑는 어느 것 할 것 없이 좋은 體勢를 이루고 있다.)라 하였으며 北碑의 수준을 唐나라 시대의 비석 서예보다 훨씬 높게 평가하였다. 康有爲의 평가가 비록 학술성 이외에 제 3의 목적이 있는 것으로 인정되지만 형식과 내용이 완전한 北碑는 거의 모두 높은 예술 수준임에는 분명하다. 이 시대의 刻碑 서예 작품으로 예술성이 뛰어나다고 평가받는 작품으로는『霍揚碑』,『高慶碑』,『南石窟寺碑』,『賈思伯碑』,『張猛龍碑』,『高貞碑』,『馬鳴寺根法師碑』,『吊比干文』 등이 있다.

北魏 이외에 刻碑 서예 작품이 많은 北朝의 왕조는 東魏와 北齊이다. 東魏의 刻碑 서예는 北魏 서예의 筆法과 결구법을 계승하였으나 기교를 앞세워 魏楷의 강건하고 웅장한 기백은 많이 사라졌다.『程哲碑』와『高盛碑』와 같은 것은 楷書의 결구에 隸書의 筆劃을 첨가하여 고아하고 질박한 맛이 있지만 생동감이 떨어지는 것이 단점이다. 東魏시대의 유명한 刻碑 작품으로『程哲碑』와『高盛碑』 이외에『凝禪寺三級浮圖碑』,『敬使君碑』,『李仲琁修孔子廟碑』 등이 전하고 있다. 이 가운데『凝禪寺三級浮圖碑』(539년)는 筆勢가 예리하고 자형이 다른 魏楷보다 길다. 또한 글자 사이의 선이 분명해 마치 篆書로 새겨진 詔版를 보는 것 같은 매우 특색이 있는 東魏시대의 刻碑이다.

서체의 변천사를 살펴볼 때 隸書는 三國시대 이후로 점차 그 사용이 줄어들고 南北朝시대에는 楷書가 서체의 중심이었다. 北朝시대는 楷書가 완성되고 난 후의 漢文化를 받아 들였기 때문에 刻石에 사용한 서체는 거의 楷書이다. 北魏시대의 수많은 墓誌銘, 造像記, 刻碑, 摩崖의 서체는 楷書로 이루어져 있다. 北魏의 후기에 정치적 혼란으로 사회가 불안정하고 결국 東魏와 西魏로 분열되면서 문화적 복고 사상이 고개를 들기 시작하였으며 北齊와 北周에서는 漢나라 문화를 숭상하기에 이르렀다. 이와 같은 현상으로 北齊와 北周의 刻碑 서예는 隸書를 기본으로 하거나 楷書에 隸書의 筆意를 첨가한 작품이 많은 것이 특징이다. 北齊와 北周의 복고 현상은 新莽의 복고 현상과 일맥상통하는 것으로 자신의 정통성을 위하여 멸망한 나라의 제도를 부정하고 가장 전통 있는 문화와 제도를 따르려고 하는 것이 일반적 현상이었다. 新莽이 西漢에서 주로 사용하던 隸書를 버리고 秦나라 시대에 완성된 小篆을 주로 사용하였던 것과 北齊와 北周가 北魏에서 주로 사용하던 楷書보다는 隸書를 많이 사용한 것은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北齊의 刻碑로『高肅碑』,『西門豹祠碑』,『玄極寺碑』 등이 있고 北周의 刻碑로는『西岳華山神廟碑』,『張僧妙碑』,『曹恪碑』 등이 전해지고 있다.

『中嶽嵩高靈廟碑』는 北魏시대 太安 2년(456)에 새겨진 刻碑로 河南省의 中嶽廟에 새워져 현재까지 전해진다. 碑陽과 碑陰, 그리고 碑額이 있다. 碑額은 양각의 篆書로 “中嶽嵩高靈廟碑”라 새겨져 있으며 碑陽은 23행으로 매 행 50자이고 碑陰은 7열로 각 열마다 9행에서 19행까지 불규칙하게 布置되어 있다. 서체는 楷書에 隸書의 筆劃을 첨가한 중간 형태로 新隸體에 가까우며 초기 北魏 서예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孝文帝가 洛陽으로 도읍을 옮기기 이전의 北魏시대의 초기 작품인『大代華岳廟碑』와『太武帝東巡碑』와 자형과 筆法이 비슷하다.『大代華岳廟碑』와『太武帝東巡碑』는 정교하고 세련된 맛은 있으나 筆劃이 유약하고 변화가 부족하다.『中嶽嵩高靈廟碑』는 楷書의 결구법에 隸書와 楷書의 筆劃을 동시에 사용하였으며 질박하고 세련됨이 조화롭게 표현되었고 예스러운 아름다움이 뛰어나다. 또한 획수의 많고 적음에 따라 자연스럽게 布置한 章法으로 인하여 풍부한 변화가 돋보이는 것이 특징이다.

『中嶽嵩高靈廟碑』는 淸나라 시대의 書學者들에게 높은 관심과 평가를 받았다. 康有爲는『廣藝舟雙楫』에서 “體兼隸楷, 筆互方圓.”(體勢는 隸書와 楷書를 겸비하였고 筆勢는 方筆과 圓筆을 겸비하였다.)이라 하였으며 碑陰을 ‘神品’으로 碑陽을 ‘高品上’의 위치로 평가하였다. 또한『爨龍顔碑』,『鞠彦雲墓誌』 등과 같은 서풍으로 분류하고 “皆師元常, 實承中郞之正統.”(모두 鍾繇의 書法을 근본으로 하였다고 하나 실지로는 蔡邕 書法의 정통이다.)이라 하여 이 刻碑가 鍾繇보다 蔡邕의 전통 書法을 계승한 작품으로 평가하였다. 그러나 楊守敬은『平碑記』에서 “近來金石家多以爲佳. 以余觀之, 儉陋最甚, 不足貴也.”(근래 많은 金石家들은 이 비를 훌륭하다고 여기는데 내가 보기에는 서체가 매우 지저분하여 좋다고 할 수 없다.)라 하여 많은 書學者들이 이 작품을 높게 평가하는 것은 잘못된 비평이라 반박하기도 하였다.

『張猛龍碑』는 北魏 正光 3년(522)에 새겨진 楷書 刻石으로 후기 魏碑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碑額에 “魏魯郡太守張府君淸頌之碑”라 새겨져 있고 碑陽은 24행으로 매 행 46자이며 비음은 16행으로 비를 세운 사람들의 이름과 관직 등이 기록되어 있다. 현재 山東省 曲阜의 孔廟에 보관되어 있다.『張猛龍碑』는 北碑 가운데 淸나라 이후의 서예가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끼쳤으며 그 예술적 평가도 가장 높은 작품이다. 筆法과 結字, 布置와 章法 뿐 아니라 서풍까지도 이보다 3년 앞서 새겨진『賈思伯碑』와 매우 비슷하다.『賈思伯碑』는『賈使君碑』라 불리기도 하며 “魏兗州賈史君之碑”라는 碑額이 있다.『賈思伯碑』는『張猛龍碑』에 비해 너무 많이 다듬어져 자연스러운 정취가 부족한 것이 단점이지만 이 두 작품의 글씨는 쓴 사람도 같고 새긴 사람도 같을 것으로 추측된다.

『張猛龍碑』도 다른 北魏시대의 刻石 楷書와 같이 方筆을 기본으로 하며 藏鋒의 起筆과 收筆, 그리고 轉折 부분이 매우 깔끔하게 運筆 하였다. 굵은 획과 가는 획을 적절히 안배하여 方筆의 강건하고 씩씩한 筆勢에서도 부드러운 맛을 표현하였으며 풍부한 변화와 주도면밀한 結體가 매우 돋보인다. 碑陰의 서체는 규칙적인 布置와 결구를 탈피하였고 行書의 筆意를 첨가하여 자연스러운 맛을 최대한 표현하였다. 淸나라 후기부터 현재까지 수많은 書學者들이 이 刻碑의 서예를 北魏 楷書의 최고라 극찬하고 있다.

淸나라 시대의 王瓘은 “[張猛龍淸頌碑』書體雄秀俊偉, 在元魏石中, 固應首屈一指.”([張猛龍碑』 서체의 예술성은 매우 뛰어나 北魏시대의 楷書 가운데 으뜸이다.)라 하여 이 刻碑의 서예가 魏楷 가운데 최고로 높은 수준으로 평가하였다. 楊守敬은『平碑記』에서 “書法瀟灑古淡, 奇正相生, 六代所以高出唐人者以此.”(서체가 소쇄하고 예스러우며 담박할 뿐 아니라 바르고 기이함의 변화가 풍부하다. 이것이 곧 魏楷가 唐楷를 능가하는 까닭이다.)라 하였으며 또 “碑陰則流宕奇特.”(碑陰은 유창하고 매우 기묘하다.)이라 하여『張猛龍碑』의 자연스러운 변화는 唐楷를 능가하며 그 비음의 오묘함이 매우 뛰어나다고 하였다. 康有爲는『廣藝舟雙楫』에서 “[張猛龍』,『賈思伯』......結構精絶, 變化無端.”([張猛龍碑』와『賈思伯碑』는 결구가 매우 정밀하며 변화가 풍부하다.)이라 하였으며 “正體變態之宗.”(楷書 중에서 변화가 가장 풍부한 작품이다.)이라 하는 등『張猛龍碑』는 완벽한 결구와 풍부한 변화를 갖춘 역대 楷書 작품 가운데 최고로 평가하였다.

『高貞碑』는 北魏 正光 4년(523)에 새겨진 楷書 刻石이다. 淸나라 嘉慶 11년(1806) 山東省 德州의 高씨 묘소에서 출토되었으며 현재는 德州學宮에 보관되어 있다. 高씨 묘소에서는『高貞碑』이외에『高慶碑』와 東魏시대의『高湛墓誌』가 함께 출토되어 ‘德州三高’라 불리고 있다. 高貞은 高慶의 형으로 營州刺史를 지냈으며 동생은 光州刺史를 지냈다고 기록되어 있다.『高慶碑』는 北魏 正始 5년(508)에 새겨져『高貞碑』보다 15년 먼저 세워졌으나 두 刻碑의 筆法과 결구, 그리고 章法이 비슷해 동일한 서예가의 작품으로 추측된다.『高貞碑』는 꾸밈성이 농후한 篆書의 “魏故營州刺史懿侯高君之碑”라는 碑額이 양각으로 새겨져 있으며 碑陽은 모두 24행으로 매 행 46자의 魏楷가 기록되어 있다.『高慶碑』도『高貞碑』와 같은 篆書로 “魏故光州刺史貞侯高君之碑”라는 碑額이 있으며 碑陽은 모두 24행으로 매 행 42자의 魏楷가 기록되어 있다.(산동 제남의 석각박물관으로 옮겨 보관됨)

『高貞碑』와『高慶碑』의 起筆과 收筆, 그리고 行筆의 筆法은 매우 일정한 규칙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결구가 방정하며 布置와 章法이 균일하고 엄격한 법칙을 갖추고 있다. 이러한 筆法과 결구는 唐나라 시대의 虞世南, 歐陽詢, 褚遂良, 薛稷 등 初唐四大家의 楷書에서 쉽게 찾을 수 있는 법칙으로 규율성은 뛰어나지만 예술적 수준은 다른 魏碑에 미치지 못한다는 평을 받는다. 楊守敬은『平碑記』에서『高貞碑』를 “書法方整, 無寒儉氣.”(서체가 방정하고 가지런하나 변화와 기세가 부족하다.)라 하여 이 작품의 書法이 평범함을 지적하였다. 그러나 근래에는 魏碑를 배우는 사람들에게 筆劃의 연마와 결구를 익히는 기술적 입문서 역할을 하고 있다.

『吊比干文』은 北魏 太和 18년(494)에 새겨진 刻石으로『孝文帝吊比干文』이라고도 불린다. 원래의 刻碑은 宋나라 시대에 훼손되어 전하지 않는다. 현재 河南省의 汲縣에 전하는 것은 宋나라 시대의 元祐 5년(1090)에 吳處厚가 원석의 拓本을 근거로 重刻한 것이다. 碑額은 篆書로 “皇帝吊殷比干文”이라 4행으로 새겨져 있으며 碑陽은 모두 28행으로 매 행 46자가 새겨져 있다.『吊比干文』에 관한 내용은 일찍이 당시의 서적인 酈道元의『水經注』에 전해지며 太和 연간에 孝文帝가 남쪽으로 순행할 때 세운 것이라 하였다. 또『魏書』에도 “(孝文帝)經比干之墓, 傷其忠而獲戾, 親爲弔文, 樹碑而刊之.”(孝文帝가 比干의 묘를 지날 때 比干이 충신이면서 도리어 벌을 받은 것을 슬퍼하며 몸소 弔文하고 비석을 새겨서 세웠다.)라 하여 이 刻碑에 관하여 비교적 상세히 기록하였다.

『吊比干文』의 서체는 北魏시대의 刻石 가운데 매우 특색 있는 작품으로 꼽힌다. 筆劃은 가늘면서도 강건하고 가로획의 양쪽 끝은 굵으며 가운데는 가늘게 運筆하여 강약을 적당하게 조절하였다. 起筆은 전형적인 魏楷의 筆法을 따랐으나 收筆은 隸書의 筆法을 겸용하여 초기 魏楷에서 나타나는 半隸半楷의 형태에 가깝다. 그러나 서풍과 심미적 특징은 완전히 성숙된 北魏 楷書와 비슷하다. 康有爲는『廣藝舟雙楫』에서『吊比干文』의 서품을 ‘高之下品’의 위치에 놓으며 “爲瘦硬峻峭之宗, 其發源絶遠, 自[尊楗』,『褒斜』來.”(마르고 강건한 서체의 으뜸으로 그 기원은 매우 멀어서『石門頌』과『褒斜道刻石』에서 유래하였다.)라 하여『吊比干文』의 筆劃과 미감을 가늘면서도 단단하며 강하고 예리한 작품으로 평가하였다.

4) 摩崖刻石

摩崖刻石 서예의 범위를 크게는 고정되어 있는 바위에 새겨진 크고 작은 글씨를 모두 포함하고 있다. 이러한 개념에서는 刻石 서예 가운데 가장 역사가 오래된 형식이 摩崖刻石이며 前漢이전 시대의 여러 刻石과 南北朝시대의 造像記도 摩崖刻石의 범위 안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일반적인 개념의 摩崖刻石 서예의 범위는 낭떠러지 바위나 혹은 큰 바위를 조금 다듬거나 자연 그대로의 상태에서 새겨진 글씨를 말한다. 石面을 완전하게 평면으로 다듬어 일정한 형식으로 통일된 刻石 서예는 그 형식보다는 내용으로 이름 붙여 부른다. 北朝시대의 摩崖刻石은 河南省 安陽지구, 河北省 邯鄲지구, 山西省 太原지구, 陝西省 褒城지구, 山東省 泰山지구 등에 많이 집중되어 있다. 이 가운데 서예사적으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곳은 陝西省의 褒城과 山東省의 泰山지구이다. 褒城에는『石門銘』이 매우 뛰어나며 태산 지역에는 掖縣의 雲峰山, 新泰市의 徂徠山, 鄒縣의 鐵山‧崗山‧葛山‧尖山의 四山과 嶧山 등에 규모가 크고 예술성이 뛰어난 수많은 摩崖刻石이 분포되어 있다. 이 摩崖刻石들은 대부분 北魏와 北齊, 그리고 北周 시대에 새겨진 것들이다.

北魏시대의 摩崖刻石은 雲峰山, 太基山, 天柱山, 玲瓏山에 분포되어 있으며 일반적으로 雲峰刻石이라 부른다. 康有爲는『廣藝舟雙楫』에서 “魏碑大種有三, 一曰龍門造像, 一曰雲峰刻石, 一曰崗山鐵山摩崖.”(魏碑는 크게 龍門造像, 雲峰刻石, 崗山과 鐵山의 摩崖刻石의 세 가지로 나누어진다.)라 하여 北魏 시대의 造像記와 雲峰刻石, 그리고 北齊와 北周 시대의 四山 摩崖刻石을 北朝시대 刻石서예의 중요한 작품으로 꼽았다. 北魏시대의 雲峰刻石은 頌德文, 題詩, 題名과 題記의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北齊와 北周의 四山刻石은 불경을 새긴 것이 대부분이다.

雲峰刻石은 일찍이 宋나라 시대의 趙明誠이『金石錄』에 소개하여 세상에 알려졌다. 그러나 서예 작품으로서의 예술적 평가는 이로부터 몇 백년이 지난 淸나라 중 후기부터 활발하게 이루어 졌다. 包世臣, 康有爲 등 碑學派 書學者들이 漢碑와 北碑 서예의 예술적 가치를 높게 평가한 후부터 많은 서예가들이 刻石 서예에 높은 관심을 보였으며 이때부터 수많은 雲峰刻石이 새롭게 발견되었다. 현재까지 발견된 雲峰刻石 가운데 비교적 완전한 형태를 가진 작품만 하여도 50점이 넘고 있으며 그 拓本을『雲峰山全拓』이라 부른다.『雲峰山全拓』의 이름과 숫자는 書學者마다 조금씩 다르나 중요한 刻石은 모두 포함하고 있다. 于書亭의『雲峰天柱諸山北朝刻石』과 근래의 답사를 근거로 살펴보면 雲峰山에『鄭羲下碑』,『論經書詩』,『觀海童詩』 등 20여 점, 天柱山에『鄭羲上碑』,『東堪石室銘』,『天柱山銘』 등 10여 점, 太基山에『登太基山時』,『靑烟之寺題字』,『中明之壇題字』 등 20여 점, 玲瓏山에『游槃題字』,『登百峰山詩』 등 몇 점이 전하고 있다. 이상에서 예로든 刻石들이 雲峰刻石 가운데 예술성이 높은 작품들이며 北魏시대의 鄭述祖가 짓고 쓴『天柱山銘』 이외의 刻石은 거의 대부분 鄭道昭의 글씨라 전하여진다.

北魏시대의 摩崖刻石은 그 규모가 일정하지 않고 글씨의 크기도 많은 차이가 많다. 또한 형태가 서로 다른 자연 상태의 바위에 석질에 따라 方筆과 圓筆을 불규칙적으로 사용하여 새겨져 있다. 따라서 그 筆法과 결구, 그리고 布置와 章法을 한마디로 설명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摩崖刻石도 웅장하고 강건한 北朝시대의 전형적인 심미적 특징을 표현하고 있을 뿐 아니라 오히려 다른 형태의 刻石 서예보다도 더 중후하고 질기며 예스러운 심미적 특징을 잘 표현하였다고 평가된다. 淸나라 후기 많은 金石學者들과 書學者이 雲峰刻石을 고증하거나 예술적 수준과 가치에 대하여 높이 평가하였다.

包世臣은『藝舟雙楫』에서 “鄭文公季子道昭, 自稱中岳先生, 有[雲峰山五言』及題名十餘處, 字勢巧妙俊麗, 近南朝郗超.”(鄭文公의 막내아들 道昭는 스스로 中岳 선생이라 하였다.『雲峰山五言』과 題字 10여 점을 남겼는데 筆勢가 교묘하고 뛰어나며 南朝시대의 郗超의 서예와 가깝다.)라 하여 雲峰刻石이 鄭道昭의 글씨이며 수준이 매우 높다고 하였다. 또한 葉昌熾은『語石』에서, 楊守敬은『平碑記』와『學書邇言』에서 雲峰刻石이 鄭道昭와 鄭述祖 부자의 글씨이며 北朝시대 楷書를 대표한다고 설명하였다. 康有爲는『廣藝舟雙楫』에서 “雲峰山刻石, 體高氣逸, 密致而通理, 如仙人嘯樹, 海客泛槎, 令人想像無盡.”(雲峰山刻石은 體勢와 기상이 높고 뛰어나며 구도는 치밀하면서도 이치가 잘 통한다. 이것은 마치 신선이 나무 아래에서 휘파람을 부는 것 같고 뛰어난 航海家가 배를 띄운 것 같아 사람들에게 풍부한 상상을 불러일으킨다.)이라 하여 雲峰山刻石은 품격이 매우 높고 예술성이 뛰어난 작품이라 설명하였다.

北魏시대에 雲峰山을 중심으로 활발하게 제작되어 온 摩崖刻石은 東魏와 西魏 시대에는 별로 발전하지 못하고 北齊와 北周시대를 기다려 다시 크게 성행한다. 北齊시대는 전란이 많고 광폭한 군주의 출현으로 인하여 민심은 황폐해져 사람들은 더 더욱 불교에 의지하게 되었다. 그들은 불상을 조성하고 造像記를 남기는 행위 이외에 불경을 쓰고 새기는 것으로 공덕을 쌓기도 하였다. 따라서 北齊시대에는 寫經과 刻經이 성행하게 되었으며 많은 摩崖刻經이 제작되었다. 北朝도 北齊시대의 전통을 이어받아 北齊에서 완성하지 못한 刻經 작업을 계승하여 현재까지 수많은 摩崖刻經을 남겨 놓았다.

北魏시대에 雲峰山을 중심으로 활발하게 제작되어 온 摩崖刻石은 東魏와 西魏 시대에는 별로 발전하지 못하고 北齊와 北周시대를 기다려 다시 크게 성행한다. 北齊시대는 전란이 많고 광폭한 군주의 출현으로 인하여 민심은 황폐해져 사람들은 더 더욱 불교에 의지하게 되었다. 그들은 불상을 조성하고 造像記를 남기는 행위 이외에 불경을 쓰고 새기는 것으로 공덕을 쌓기도 하였다. 따라서 北齊시대에는 寫經과 刻經이 성행하게 되었으며 많은 摩崖刻經이 제작되었다. 北朝도 北齊시대의 전통을 이어받아 北齊에서 완성하지 못한 刻經 작업을 계승하여 현재까지 수많은 摩崖刻經을 남겨 놓았다.

北齊시대의 摩崖刻石으로 가장 유명한 것은 泰山 經石峪의『金剛經』이며 그밖에도『文殊般若碑』,『天柱山銘』 등이 있다. 北周시대의 摩崖刻石은 山東省 鄒縣의 鐵山, 崗山, 葛山, 尖山 등 四山과 徂徠山에 광범위하게 분포되어 있다. 鐵山은 鄒縣의 서북쪽에 위치하며『大集經』,『石頌』,『鐵山刻經題記』 등의 刻石이 있다. 崗山은 鐵山의 북쪽에 위치하며『佛說觀無量壽經』,『入楞伽經』,『鷄嘴題名』 등의 刻石이 있다. 尖山은 鄒縣의 북쪽에 위치하며『韋子深題跋』,『文殊般若經』,『經主題名』,『大空王佛』,『安道壹等題名』 등의 刻石이 있다. 葛山은 鄒縣의 동쪽에 위치하며『維摩詰經』과 크고 작은 제명이 전하며 徂徠山에도『般若密多心經』 등의 많은 刻石이 있다. 이 刻石들의 문장 내용은 대부분이 불경이며 그 밖의 것은 題字와 題名이다.

北齊와 北周시대의 摩崖刻石은 淸나라 후기에 黃易가 발견하여 세상에 발표한 후 書學者와 金石學者들의 깊은 관심을 받았다. 康有爲는『廣藝舟雙楫』에서 “尖山, 崗山, 鐵山摩崖, 率大書佛號贊語, 大有尺餘, 犯數百字, 皆渾穆簡靜, 餘多參隸筆, 亦復高絶”(尖山, 崗山, 鐵山의 摩崖刻石은 대체로 큰 글씨이며 불경과 송덕의 내용으로 큰 것은 한 尺가 넘고 수 백자에 이르는 것도 있다. 서체는 隸書의 筆劃을 많이 첨가하여 질박하고 온화하며 경건한 미감이 매우 뛰어나다.)이라 하였고 葉昌熾는『語石』에서 “四山摩崖, 其字徑尺, 要貼力排奡, 巨刃摩天揚”(四山의 摩崖刻石은 그 글씨가 한 尺이 넘는 것도 있으며 오만함을 버리고 편안함을 추구하였는데 마치 큰칼이 하늘로 날아올라 다듬어 새긴 것 같다. )이라 하여 四山의 摩崖刻石은 글씨가 매우 크며 질박하고 편안한 느낌의 작품이라 설명하였다.

『石門銘』는 北魏 永平 2년(509)에 陝西省 漢中 石門에 새긴 摩崖刻石으로 높이 2.5미터 너비 3미터의 石面에 명문은 28행으로 매 행 22자의 楷書가 새겨져 있다. 글씨를 쓴 사람은 王遠이며 새긴 사람은 武阿仁으로 기록되어 있다. 王遠의 생졸시기는 알려지지 않고 다만 太原 사람으로 문서를 처리하는 작은 관리였다고 전한다. 刻石의 내용은 梁州와 秦州刺史를 지낸 羊祉가 褒斜道를 뚫어 개통한 공적을 기록한 것이다. 褒斜道는 교통의 요지로서 漢나라 이후로 몇 차례나 뚫리고 또 무너져 이곳을 관리하는 사람은 이 길을 통하게 하는 것이 큰 임무였다. 褒斜道를 개통한 공적을 기록한 刻石은 西漢시대의『開通褒斜道刻石』과 東漢시대의『石門頌』,『楊淮表記』 등이 있다. 현재『石門銘』은 摩崖에서 떼어 내 漢中文化館에『石門頌』과 함께 보관되어 있으며『石鼓文』,『石門頌』과 더불어 ‘三石’으로 불린다.

글씨가 摩崖의 석질에 따라 새겨져 있어서 字間과 행간의 구속을 적게 받았으며 筆勢가 길게 뻗어 있다. 方筆과 圓筆, 강함과 부드러운 筆法을 다같이 갖추고 있고 隸書와 行書의 筆意를 첨가하여 소탈하고도 질박하며 강건함과 부드러움이 함께 나타난다. 隸書에서 많이 나타나는 偏方形의 結字法과 字間을 멀리 띄운 布置, 그리고 상대적으로 길게 써 내려간 撇畫, 捺畫, 磔畫으로 인하여 飄逸하면서도 예스러우며 기이하고도 자연스러운 미감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역대 書學者들은『石門銘』이 魏楷의 법칙을 초탈하였을 뿐 아니라 변화가 무궁하여 가장 배우기 어려운 글씨나 배우지 않으면 안 되는 작품으로 평가하였다.

淸나라 시대의 王權은『石門頌跋』에서 “魏書體多尙方整, 卽[鄭文公碑』于綿密中亦露鋒棱, 獨是銘運用超妙, 如天馬行空.”(魏나라 시대의 서체는 대체로 방정하고 가지런함을 숭상하였다.『鄭文公碑』는 면밀한 결구 가운데서도 역시 필봉을 드러내었다. 오직『石門銘』만이 運筆에서 교묘함을 초탈하여 마치 天馬가 공중을 달리는 것 같다.)이라 하여『石門銘』이 北魏 시대의 서예 작품 가운데 으뜸이라 하였다. 康有爲는『廣藝舟雙楫』에서 “體勢飛逸, 不食人間煙火, 書中之仙品也”(體勢가 飄逸하여 마치 속세를 떠난 것 같이 서예 작품 중에서 仙品이다.)라 하며『石門銘』의 품격을『瘞鶴銘』과『鄭文公碑』와 같이 탈속한 경지로 평가하고 ‘神品’의 위치에 올려놓았다.

『鄭文公碑』는 上碑와 下碑로 나누어져 있으며 北魏 永平 4년(511)에 楷書로 새겨진 摩崖刻石으로『鄭羲碑』라고 불리기도 한다.『鄭羲上碑』는 山東省 平度縣 大澤山(九靑山)의 天柱鋒에 위치하며 높이 3미터, 너비 1미터의 石面에 20행으로 매 행 50자이고 “滎陽鄭文公之碑”라는 碑額이 있다.『鄭羲下碑』는 掖縣의 雲峰山에 위치하며 51행으로 매 행 29자이며 鄭文公의 관직을 모두 기록한 額題가 있다. 上碑의 글씨가 下碑보다 크기만 조금 작을 뿐 형태와 서풍이 서로 비슷하며 내용도 두 碑가 다같이 鄭羲의 일생과 공적을 기록하였기 때문에 매우 비슷하다. 글을 짓고 쓴 사람을 기록하지 않았으나 淸나라 시대의 학자들은 鄭羲의 아들인 鄭道昭의 작품이라 주장하였다. 그 이유는『鄭文公碑』가 四山에 새겨져 있는 여러 題名과 題詩의 서체와 형태와 서풍이 일치하며 題名 가운데에는 鄭道昭의 이름이 적혀 있는 작품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직까지『鄭文公碑』의 정확한 고증이 이루어지지는 않고 있는 상태이다.

『鄭羲上碑』는 석질이 좋지 못하여 훼손이 심하고 글씨가 많이 망가졌으나『鄭羲下碑』는 비교적 상태가 좋은 편이다. 따라서 역대 書學者들은『鄭羲下碑』를 더 많이 拓本하여 臨書하고 또 평가하였다.『鄭文公碑』는 圓筆을 위주로 하였으나 圓筆속에 方筆을 많이 첨가하였으며 運筆을 천천히 하였다. 또한 획의 굵기 변화를 적게 한 반면 行筆 가운데 멈추고, 멈춤 속에서 또 흐르는 듯 運筆하여 강건하면서도 질긴 筆劃을 표현하였다. 篆書의 筆勢와 隸書의 體勢를 첨가하여 부드러움 속에서 굳세고 튼튼하며 웅장한 느낌을 함께 갖추고 있다. 結體가 가지런하고 단정하나 行間과 字間을 뚜렷하게 유지하였다. 변화가 다양한 결구와 布置로 방정하고 안정된 가운데서 생동감을 느끼게 하는 품격이 매우 높은 작품으로 평가된다.

淸나라 시대의 葉昌熾는『語石』에서『鄭文公碑』를 “上承分篆, ...... 其筆力之健, 可以剸犀兕, 搏龍蛇.”(篆書와 隸書의 筆法을 이어받았다. ...... 그 필력의 강건함은 무소의 뿔을 자르고 용을 잡을 수 있을 정도이다.)라 하였으며 역대 楷書가운데 가장 뛰어난 작품이라 평가하였다. 包世臣은『藝舟雙楫』에서 “[鄭文公碑』字獨眞正, 而篆勢, 分韻, 草情畢具. 其中布白本[乙瑛』, 措劃本[石鼓』, 如草同源, 故自署曰草篆.”([鄭文公碑』의 字體는 楷書이나 篆書의 筆勢, 隸書의 운치, 草書의 맛을 고루 갖추고 있다. 그 가운데 결구와 布置는『乙瑛碑』를, 筆劃은『石鼓文』을 근본으로 하여 草書와 원류가 같기 때문에 ‘草篆’이라 한다.)이라 하여 이 작품의 서체는 楷書이나 篆書와 隸書, 그리고 草書의 심미적 특징을 잘 융합하였다고 평가하였다. 또한 康有爲는『廣藝舟雙楫』에서 “[龍門』爲方筆之極軌,『雲峰』爲圓筆之極軌.”(龍門의 造像記는 方筆의 법칙이고 雲峰刻石은 圓筆의 법칙이다.)라 하여『鄭文公碑』가 魏楷 가운데에서 圓筆의 모범이라 평가하였다.

南北朝시대의 摩崖刻石 서예 가운데 가장 걸출한 작품으로『瘞鶴銘』과『鄭文公碑』 그리고『石門銘』을 꼽는다.『瘞鶴銘』은 南朝의 摩崖刻石 서예를 대표하고『鄭文公碑』와『石門銘』은 北朝의 摩崖刻石을 대표한다고 평가받고 있다. 楊守敬은『平碑記』에서 “雲峰鄭道昭諸碑, 遒勁奇偉, 與南朝之[瘞鶴銘』異曲同工.”(雲峰山의 鄭道昭 글씨의 여러 刻石은 씩씩하고 굳세며 변화가 풍부하다. 南朝시대의『瘞鶴銘』과 비교하여 미감은 다르지만 다같이 걸출한 작품이다.)이라 하여『鄭文公碑』를『瘞鶴銘』과 함께 南北朝시대를 대표하는 뛰어난 摩崖刻石 작품으로 평가하였다.

『泰山經石峪金剛經』은 泰山의 동남쪽 經石峪의 경사가 완만한 넓은 바위에 새겨져 있는 北齊 시대의 작품으로 전해진다. 글자의 크기는 50㎝에 달하며 전체의 면적도 대략 축구장 절반 만하여 중국 서예사에서 규모가 가장 큰 서예 작품으로 꼽힌다. 글씨의 형태와 크기, 그리고 방대한 규모로 볼 때 한 사람에 의하여, 또는 한두 달에 완성되었다고 볼 수가 없고 몇 년에 걸친 대규모의 佛事로 이루어진 것으로 추측된다. 연대가 기록되어 있지 않아 새겨진 정확한 시기를 알 수 없으나 書學者들은 서체와 서풍 등을 근거로 北齊시대의 天寶 연간(562-565)경으로 고증하고 있다.

『經石峪金剛經』은 본래 비가 많이 내리는 계절에는 물이 잔잔하게 흐르는 계곡의 평평한 바위에 새겨진 작품이기 때문에 천년을 넘게 그 속에서 마모되어 많이 훼손되었다. 지금은 물길을 막고 울타리를 둘러 보호하고 있으나 때로는 눈비에 젖고 때로는 말림을 반복하며 햇빛에 그대로 노출되어 도리어 훼손되는 속도가 더 빨라지고 있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현재까지 남아 있는 글자는 전체의 약 20% 정도의 900자 내외이며 筆劃도 많이 마멸되어 둥글둥글하다. 지금과 같은 방법으로 방치한다면 이대로의 모습도 몇 십 년을 넘기지 못하고 사라져 버릴 것이다.

『經石峪金剛經』의 서체는 隸書를 기본 골격으로 하였으나 楷書의 筆劃이 첨가되었다. 글씨가 무척 크기 때문에 새긴 방법도 다른 刻石 서예와 달리 筆劃이 교차하는 부분은 조금만 파 내려가 쉽게 훼손되는 것을 예방하였다. 자연 상태의 바위 결에 따라 새겼기 때문에 筆劃의 굵기와 길이가 들쭉날쭉하고 크기도 일정하지 않을 뿐 아니라 결구와 布置가 자유분방하다. 起筆과 收筆, 그리고 轉折부분이 모두 아무런 격식이나 규율이 없으며 行筆의 굴곡이 많아 천진스럽고 질박한 맛이 잘 표현되었다. 書學者들은 이 작품을 ‘큰 글자의 모범’ 혹은 ‘현판 글씨의 으뜸’으로 평가한다.

包世臣은『藝舟雙楫』에서 “[泰山經石峪』大字, 與焦山[瘞鶴銘』相近, 而淵穆時或過之.”([泰山經石峪金剛經』은 큰 글자로 焦山의『瘞鶴銘』과 비슷하나 온화한 위엄은『瘞鶴銘』보다 뛰어나다.)라 하여 이 刻石을『瘞鶴銘』과 비슷한 수준으로 평가하였다. 康有爲는『廣藝舟雙楫』에서 圓筆의 榜書와 題額으로는『經石峪金剛經』의 서체로 하는 것이 으뜸으로 꼽았으며 “草情篆韻無所不備”(草書의 정취와 篆書의 운치를 잘 갖추고 있다.)라 하여 법칙에 메여 있지 않고 자유로운 정취를 잘 표현하였다고 평가하였다. 또한 楊守敬은『學書邇言』에서 “北齊[泰山經石峪』, 以徑尺之大書, 如作小楷, 紆徐容與, 絶無劍拔弩張之跡. 擘窠大書, 此爲極則.”(北齊의『泰山經石峪金剛經』은 한 尺이 넘는 큰 글씨이다. 만약 이러한 이것으로 小楷를 쓰면 구불구불 제멋대로 되어 절대로 좋은 글씨가 되지 않는다. 큰 글씨를 쓰고 새기는 데에는 이 筆法이 매우 좋은 법칙이 된다.)이라 하여 큰 글씨는『泰山經石峪金剛經』이 으뜸이라 평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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