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세기경 백제에 의해 축조된 저수지로서 우리나라 고대에 만들어진 최대의 저수지.
〈삼국사기〉 신라본기 흘해이사금 21년 조에 "처음으로 벽골지를 열었는데 그 둘레가 1,800보(步)이다"라고
하여 AD 330년에 신라에서 만든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1950년대에 벽골제를 발굴·조사한 결과 그 시축 연대가 1600(오차 100) BP 즉 AD 300년경으로 밝혀졌다.
이것을 보면 축조 연대는 신빙성이 있으나 당시 신라의 영역과 백제의 고이왕 이후 영역 확장 기록을 통해 볼 때,
백제 11대 비류왕 27년(330)의 사실을 사가의 착오로 신라 측 기사로 잘못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백제에 의해서 축조되었다고 보는 것이 마땅하다. =본 내용은 다음 백과의 기록이다.
그 당시 김제 지역은 백제 지역인데 삼국사기는 신라본기 홀해21년 에 축조한다고 기술하고 있다
의문?
1) 신라가 무엇 때문에 백제 지역에 벽골지 을 만들어야 했는가?
2) 삼국사기 저자 김부식 오류인가?
*** 제야 역사 학자님 의 변****
다음 백과 설명대로 사가의 착오라고 하는 것은 정말로 우리 역사를 알지 못하는 무식 에서 나온 발상이다.
당시 백제는 가야 신라를 전부 담로국 으로 합병한 시기다.
즉 삼한통일 시대였다.(마한 진한, 변한)=진왕 이통치
당시 신라 지역을 점령 후 점령지역의 사람들을 후방으로 이동시키는 것이 그 당시 통치 방식이었다.
(신라가 가야을 멸망시키고 가야주민을 충청도로 이주시킨 것과 같은 방식)
해서 백제는 신라 사람들 김제로 이주정책으로 하여 방대한 벽골지을 축조하게 된다.
그때 백제왕은 누구인가? 다음 백과 의견대로 비류왕이다
그러나 비류왕은 당시 백제왕 이 아니고 십제국 왕이었다.
그 당시 백제(잔) 왕은 일본 속기 응신천황이전 신공 사후 247-390년 살아진 5왕중에서 찾아야 할것이다.
아마 이 기록은 일본천황실 역사 수장고 안에 잠자고 있을 것이다.
그럼 삼국사기는 이 기록을 신라본기에 기록할 수밖에 없는 고충을 이해하여만 할 것이다.
특히 신라는 후일 삼국을 통일한다. 그리고 원성왕때 개축 기록이 있다
신라로서는 당연히 자신의 역사 이다.
삼국사기는 삼국이전의 고구려와 이남 지역 78개국의 역사중에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3국을 기록하고
다른 국가들의 역사들은 다 삭제한 삼국(고구려 백제 신라)의 역사서이다.
당시 발해,가야,역사기록이 있는것은 살아남은 고구려,백제,신라 본기에 가장적합한곳에 기록하였다.
광개토태왕에게 백제(잔국)는 패하여 일본으로 도망가서 나라가 없어지니 기록할곳을 찿아
신라본기에 기록한것이다.
만약 이기록은 하지도 않은 비류왕때 추조하였다고 사기칠수는 없는것이 삼국사기다.
제야 역사 사학자님들은 삼국사기 기록 이 소름돗을만큼 정확하다고 극찬을 한다.
이후 아신왕이 태자을 응신에게 질자로 보내고 백제국명과 한강이남 전 잔국 땅일부을 인수받는다.
백제가 지금의 전남 제주까지 합병은 동성왕때 비로소 인수하나 영산강세력은 이후 무녕왕때 비로소 합병한다.
백잔=한성백제 잔국=응신천황의 백제(72국 조각국가(잔국)으로표기 광개토대왕비문에서)
칠지도는 백제(한성)가 신공천황에게 준것이아니다.그래서 삼국사기에 없다 안주었어니까!!
(삼국사기백제는한성백제의 기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