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9(고종 16)∼1944. 승려·시인·독립운동가
[생애]
6세 때부터 향리 서당에서 10년 동안 한학(漢學)을 익혔다. 14세에 고향에서 성혼의 예식을 올렸다. 넓은 세계에 대한 관심과 생활의 방편으로 집을 떠나 1896년 설악산 오세암(五歲庵)에 입산하여 처음에는 절의 일을 거들다가,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다.
이후 다른 세계에 대한 관심이 깊은 나머지 블라디보스톡 등 시베리아와 만주 등을 여행하였다.
1905년 재입산하여 설악산 백담사(百潭寺)에서 연곡(連谷)을 은사로 하여 정식으로 득도(得度)하였다. 불교에 입문한 뒤로는 주로 교학적(敎學的) 관심을 가지고, 대장경을 열람하였으며, 특히 한문으로 된 불경을 우리말로 옮기는 일, 즉 불교의 대중화 작업에 주력하였다. 1910년에는 불교의 유신을 주장하는 논저 ≪조선불교유신론≫을 저술하였다.
1908년 5월부터 약 6개월간 일본을 방문, 주로 토쿄(東京)와 교토(京都)를 중심으로 새로운 문물을 익히고, 일본의 풍물을 몸소 체험하였다. 일본 여행 중에 3·1독립운동 때의 동지가 된 최린(崔麟) 등과 교유하였다.
1910년 한일합방이 되면서그는 국치의 슬픔을 안은 채 중국 동북삼성(東北三省)으로 갔다. 이곳에서 만주지방 여러 곳에 있던 우리 독립군의 훈련장을 순방하면서 그들에게 독립정신과 민족혼을 심어주는 일에 전력하였다.
1918년 월간 ≪유심 惟心≫이라는 불교잡지를 간행하였다.
불교의 홍보와 민족정신의 고취를 목적으로 간행된 이 잡지는 뒷날 그가 관계한 ≪불교≫ 잡지와 함께 가장 괄목할 만한 문화사업의 하나이다. 1919년 3·1독립운동 때 백용성(白龍城) 등과 함께 불교계를 대표하여 참여하였다.
1920년 만세사건의 주동자로 지목되어 재판을 받아 3년 동안 옥살이를 하였다. 출옥 후에도 일본 경찰의 감시 아래에서 강연 등 여러 방법으로 조국독립의 정당성을 설파하였다. 1925년 오세암에서 선서(禪書) ≪십현담주해 十玄談註解≫를 탈고하였다.
1926년 한국 근대시의 기념비적 작품으로 인정받는 대표적 시집 ≪님의 침묵≫을 발간하였다. 이곳에 수록된 88편의 시는 대체로 민족의 독립에 대한 신념과 희망을 사랑의 노래로서 형상화한 것으로 볼 수 있다. 1927년 일제에 대항하는 단체였던 신간회(新幹會)를 결성하는 주도적 소임을 맡았다. 그는 중앙집행위원과 경성지회장(京城支會長)의 자리를 겸직하였다.
나중에 신간회는 광주학생의거 등 전국적인 민족운동으로 전개, 추진되었다. 1930년≪불교≫라는 잡지를 인수하여 그 사장에 취임하였다. 특히, 고루한 전통에 안주하는 불교를 통렬히 비판하였으며, 승려의 자질향상·기강확립·생활불교 등을 제창하였다.
1933년 55세 때 부인 유씨(兪氏)와 다시 결합하였다. 1935년≪조선일보≫에 장편소설 <흑풍 黑風>을 연재하였고, 이듬해에는 ≪조선중앙일보≫에 장편 <후회 後悔>를 연재하였다. 이러한 소설을 쓴 까닭은 원고료로 생활에 보탬을 얻기 위한 까닭도 있지만 그보다도 소설을 통하여 민족운동을 전개하려는 의도가 더 큰 것으로 이해된다.
1938년 그가 직접 지도해오던 불교계통의 민족투쟁비밀결사단체인 만당사건(卍黨事件)이 일어났고, 많은 후배 동지들이 검거되고 자신도 고초를 겪었다. 이 시기에 ≪조선일보≫에 <박명 薄命>이라는 소설을 연재하였다. 1939년 회갑을 맞으면서 경상남도 사천군다솔사(多率寺)에서 몇몇 동지들과 함께 자축연을 가졌다. 다솔사는 당시 민족독립운동을 주도하던 본거지였다.
1944년 6월 29일 성북동의 심우장(尋牛莊)에서 중풍으로 별세하였다. 동지들에 의하여 미아리 사설 화장장에서 다비된 뒤 망우리 공동묘지에 유골이 안치되었다.
친하던 벗으로는 이시영(李始榮)·김동삼(金東三)·신채호(申采浩)·정인보(鄭寅普)·박광(朴珖)·홍명희(洪命熹)·송월면(宋月面)·최범술(崔凡述) 등이 있었으며, 신채호의 비문은 바로 그가 쓴 것이다. 1962년에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활동사항]
① 불교행정조직혁신론: 한용운이 활약하던 1910년 초에는 친일적 색채를 띤 원종(圓宗)이라는 불교종파가 생겼다. 그들은 일본과 한국 불교의 원류가 하나임을 주장하면서 일제의 동화정책에 교묘하게 영합하였다. 그는 그들에 대항하는 길은 사찰 중심의 현재 조직이 하나로 통일되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② 사원운영의 혁신론: 불교가 시대를 계도(啓導)하려면 그 운영과 조직이 새로워져야 한다는 것이 그가 주장한 유신의 골자이다.
③ 청년불교의 제창: 불교청년회를 조직한 것은 그가 최초라고 할 수 있다. 친일적 경향의 원종에 대항하여 조선불교청년동맹(朝鮮佛敎靑年同盟)을 결성한 것은 1914년이었다.
이는 대중불교의 확산을 위하여 그 모체(母體)를 청년운동으로 삼아야 한다는 그의 실천행이었다.
그는 이 운동의 실천을 위하여 ‘승려에서 대중에로’, ‘산간에서 길가로’ 등을 내걸었다. 또, 해외 포교에도 지대한 관심을 기울여서 미국·중국 등지에 해외 법당을 세워야 한다고 역설한 바 있다.
④ 선교진흥론(禪敎振興論): 불교의 진흥을 위한 필수불가결의 요건은 수행 이상을 확립하는 일이다.그러나 선과 교는 본질에 있어서 하나이다. 왜냐하면, 선이란 불교의 마음이며, 교란 불교의 언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양자의 이론적 합일과 실천이 불교 진흥의 관건이라고 주장하였다. 아울러, 선원(禪院)이나 강원(講院)의 지도 이념이나 실수(實修)에 있어서 외전(外典)을 첨가하여야 한다고 보았다.
그는 선교일치를 주장해온 한국 불교의 일승정신(一乘精神)이 새로운 시대의 좌표여야 한다고 보았다.
⑤ 경전의 한역: 그가 가장 심혈을 기울인 부분은 대장경의 우리말 번역이다. 그가 쓴 ≪불교대전≫은 바로 그와 같은 시도의 결정이다.
한용운 문학의 특징은 불교사상과 독립사상이 탁월하게 예술적으로 결합된 데서 드러난다. 자유와 평등사상, 민족사상과 민중사상으로 요약되는 불교적 세계관과 독립사상은 한용운 문학의 뼈대이자 피와 살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그의 문학은 불교사상과 독립사상, 문학사상이 삼위일체를 이룬다는 점이 특징이라는 뜻이다.
1926년에 간행된 ≪님의 침묵≫은 이별하는 데서 시작되어 만남으로 끝나는 극적 구조를 지닌 한편의 연작시로 볼 수 있다. 곧, 시집 ≪님의 침묵≫은 시 전편이 ‘이별-갈등-희망-만남’이라는 구조의 끈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소멸[正]-갈등[反]-생성[合]이라는 변증법적 지양을 목표로 하는 극복과 생성의 시편들이라 할 수 있다.
이별은 그의 시 전체의 대전제로서 만남에 이르는 방법적인 원리이며 사랑을 완성하는 자율적인 법칙인 것이다. 님을 이별한 시대는 바로 침묵의 시대, 상실의 시대인 것이며 따라서, 언젠가 맞이하게 되는 만남의 시간은 바로 참된 낙원 회복의 시대, 광복의 시대가 되는 것이다. 이 점에서 그의 시는 기다림의 시 또는 희망의 시로 파악할 수 있다.
아울러 그의 시 도처에는 부정적 세계관이 깔려 있다. 즉 ‘못한다·아니한다·없다·말라’ 등의 부정적 종지법이 상당수에 달한다는 말이다. 이와 같은 부정적 사유와 비극적 세계인식은 그가 당대 사회를 모순의 시대로 파악하는 데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일제의 강점에 의한 식민지 지배가 근본적으로 모순된 것이며, 이에 대한 타파와 극복만이 정상적인 질서를 회복하는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그의 일관된 일제에 대한 저항과 투쟁정신은 그대로 시를 통한 부정적 세계관으로 상징화된다. 이별이 더 큰 만남을 성취하기 위한 방법적 원리였던 것과 같이 부정은 참다운 긍정과 생성을 이룩하기 위하여 필수불가결한 전제조건이었던 것이다. 바로 이 점에서 저항시로서 만해의 시의 참된 면모가 드러난다.
한편, ≪님의 침묵≫의 또 다른 특징은 신성과 세속의 갈등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는 점이다. ≪님의 침묵≫의 전편을 통독하면 많은 시구가 대중가요와 같은 느낌을 준다. “나의 노래는 세속의 노래 곡조와는 조금도 맞지 않습니다”와 같이 신성 지향을 갈망하면서도 본능적이며 인간적인 정감이 시의 밑바탕에 깔려 있으며 그것이 직설적으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또한 ≪님의 침묵≫에는 충청도 방언과 토속어가 세련되지 않은 표현으로 다양하게 사용되고 있다. 이러한 향토적 정감의 방언 및 토속어 애용과 서민적인 시어의 활용은 ≪님의 침묵≫에 민중정신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세속적인 정감의 진솔성이 불러일으키는 인간적 설득력과 함께 세속적인 사랑을 표출하면서도 세속사의 진부함에 떨어지지 않으며, 목소리 높여 민중정신을 강조하지도 않는, 바로 이 지점에 참된 민중시로서의 만해의 시의 진가가 드러나는 것이다.
여기에서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은 ≪님의 침묵≫에서 사랑을 호소하는 주체가 여성으로 나타나 있으며 시적 분위기 또한 여성적인 정감으로 가득 차 있다는 점이다. 여성주체는 물론 여성운이 활용되고 여성적인 상관물(相關物)들이 등장하는 등 여성적 성향이 주조를 이루는 것이다.
이러한 여성주의는 불교의 관음사상 또는 인도의 여성사상에 기인한다고도 볼 수 있지만 그보다는 한국 시가의 전통에서 연원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옳을 듯하다. 왜냐하면 고려가요는 물론 많은 시조·한시·가사·민요 등의 저변을 이루는 것이 여성적인 분위기와 주체 그리고 이와 상통하는 한과 눈물의 애상적 정서로 되어 있다는 점에서 그 근거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아울러 만해의 시는 은유와 역설 등 시의 방법과 산문적인 개방을 지향한 자유시로서의 형태를 완성시킴으로써 현대시적 특성을 지니게 된다. 이 점에서 그의 시는 타고르(Tagore, R.) 등 외래 시의 영향을 받아들이면서도 전통시에 그 정신과 방법상의 맥락을 계승하고 있다.
실상 그의 시는 신문학사 초기의 각종 문예사조의 범람 등 서구지향의 홍수 속에서 전통적인 시정신의 심화와 확대를 통해서 창조적 계승을 성취한 것이다. 그의 시의 은유와 역설 역시 서구의 것보다도 전통시에서 연원한 것이 확실하다는 점에서 그의 시는 민족주체성을 시적으로 탁월하게 형상화한 민족시로서의 성격을 지닌다.
이 밖에 그는 현대시 <님의 침묵>과는 별도로 다수의 한시와 시조, 그리고 <죽음>·<흑풍>·<박명>등의 소설도 남기고 있는데 이들 역시 불교사상과 독립사상을 예술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처럼 그의 문학은 험난한 역사를 살아가는 예지와 용기를 가르쳐주며, 현실적인 생의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신념과 희망을 불러일으켜 준다는 점에서 참된 의미를 가진다.
또한, 그의 문학이 한국 문학에 있어 가장 부족한 요소인 종교적 명상의 진지함과 형이상학적 깊이를 추구하고 있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역사와 현실상황에 치열하게 부딪히면서도 물러나 정관하고 투시하는 구도자적 삶 속에서 그의 시가 견지한 미적 거리와 형이상적 주제의 진지함은 한국 문학의 원숙을 위하여 참으로 값진 교훈이라 하겠다.
일관성 있는 행동에 따른 실천의지와 저항정신을 깊이 있는 불교사상으로 이끌어 올리면서 끊임없이 변모하고 스스로 뛰어넘은 그의 시혼은 우리가 되살려야 할 소중한 정신사적 자산이 될 수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그의 시정신과 미학은 어려운 시대일수록 풍란화 매운 향내로서 더욱 그 빛과 향기를 더해갈 것이 확실하다.
1962년 3월 1일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1967년 그가 독립 선언서를 낭독하던 탑골공원에는 후에 승려 운허에 의해《용운당 만해 대선사비》(龍雲堂 萬海 大禪師碑)가 세워졌다.
고향인 충청남도 홍성군 홍성읍 남산공원에 동상이 세워졌고 홍성읍내 장터에도 그의 동상이 세워졌다.
1973년 신구문화사에서《만해 전집》6권이 간행되었다.
그의 결성면 성곡리 박철동 잠방굴마을 생가지는 1989년 12월 24일 충청남도 기념물 제75호로 지정되었다.
1990년에 생가가 복원되고 기념관이 건립되었다.
1991년에는 만해의 업적을 기리는 만해학회가 설립되었다.
그밖에 만해기념관, 만해사상선양회 등이 세워졌다.
강원도 인제군 북면 용대리에는 만해문학박물관이 건립되었다.
<시와 시학, 2015년 봄호에서>
알 수 없어요
바람도 없는 공중에 수직의 波紋을 내이며
고요히 떨어지는 오동잎은
누구의 발자취입니까.
지리한 장마 끝에 서풍에 몰려가는
무서운 검은 구름의 터진 틈으로 언뜻 언뜻 보이는
푸른 하늘은 누구의 얼굴입니까.
꽃도 없는 깊은 나무에 푸른 이끼를 거쳐서
옛 탑 위의 고요한 하늘을 스치는 알 수 없는
향기는 누구의 입김입니까.
근원을 알지도 못하는 곳에서 나서
돌뿌리를 울리고 가늘게 흐르는 작은 시내는
구비 구비 누구의 노래입니까.
연꽃같은 발꿈치로 가이 없는 바다를 밟고
옥 같은 손으로 끝 없는 하늘을 만지면서
떨어지는 해를 곱게 단장하는 저녁 노을은 누구의 시입니까.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됩니다.
그칠 줄을 모르고 타는 나의 가슴은
누구의 밤을 지키는 약한 등불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