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전서
전체(혹은 4장만)
욥기의 결론: 그리스도인의 고난의 의미에 대하여 - 베드로전서를 중심으로
(찬송 494장)
2020-8-15, 토
맥락과 의미
이렇게 7주 동안 욥기 말씀을 읽었습니다. 오늘은 베드로서 4장을 읽읍시다. 가능하다면 베드로전서 전체를 읽읍시다. 그리스도인의 고난의 의미에 대해 생각합시다.
1. 고난을 사람 중심이 아니라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보아야 함
1) 욥기의 사람의 말과 저자, 하나님의 말씀
욥기의 중간에 나오는 친구들과 엘리후, 욥은
“왜 욥이 고난을 당하는가?”그 문제에 집중해서 말했습니다. 친구들의 말과 욥의 말에 하나님의 진리와 사람의 생각이 섞여 있습니다. 엘리후는
좀 더 진리를 많이 말하지만 그의 말에도 부족함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아주 분명한 진리의 말씀은 1-2장, 28장(저자가 하는 말),
38-42장(여호와께서 하는 말과 저자가 하는 말)입니다. 그러나 욥과 친구들, 엘리후가 하는 말도 하나님의 계시의 한 부분입니다. “하나님의 진리를 말하는 사람에게 인간적인 부족이 섞여 있는 것”을
나타내 주는 점에서 계시된 말씀입니다. 또
하나님께서는 욥이 그들과 대화하면서 고통을 당하고, 자기를 돌아보면서,
하나님을 더 바라보게 하셨습니다. 욥기를 읽는 우리에게도 욥과 세 친구, 엘리후의 말은 하나님의 뜻을 물으며 하나님을 알아가는 데 유익을 주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2) 고난의 원인에 대한 질문 보다 창조주 하나님을 경외
38-39장에서
여호와께서는 욥에게 그가 당하는 고난의 원인에 대해서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창조주로서 피조물을 완벽하게
통치하심을 보이심으로써 대답을 대신하셨습니다. 욥기의 저자가 28:28에서
말한 것처럼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그분을 신뢰하는 것이 우리가 취할
길입니다.
3) 그리스도안에 있는 성도의 고난
그러나 욥기를 읽을 때 주의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개인주의적으로 욥을 곧바로 자기와 동일시하며 읽는 것에 주의할 것이 있습니다. 그러면 자기가 욥과 같은 고난을 당하는 것처럼 생각하기도 쉽습니다. 또한 고난의 의미를 다 몰라도 되는 것처럼 이야기하면서 쉽게 넘어가기도 합니다. 신약의 성도들이 욥에게서 배울 것이 있지만, 그것은 욥이 소망한
그리스도를 통해서 배워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배제하고서 욥기를 읽으면 매우 부족한 것이 될 것입니다. 구약의 모든 성경이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되었고 욥기 역시 그렇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욥기를 읽어야 할 것입니다.
베드로 전서를 중심으로 고난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2. 그리스도의 고난에 연합함
그리스도인의 고난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실제로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에 참여한 자는 죄 짓는 것을 그치고 육체의 정욕을 따라서 살지 않고 단정한 생활을
합니다(벧전 4:1-3). 4:1에서는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가 죄를 그쳤음이니”라고 적극적으로 이야기합니다. 고난 자체가 우리로 죄를 덜 짓게 하는 것은 아니며, 어떤 경우에는
오히려 고난으로 인해 더 완악해지기도 합니다. 여기에서 “고난을
받는 자가 죄를 그쳤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고난을 받으면서 그리스도의 고난을 생각하기 때문에 그는 죄를 그치는 것입니다(참조. 2:24). 그리스도인은 현재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합니다(벧전
4:13). 바울 사도가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고 단언한 것처럼,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자는 매일 죽습니다.
바울 사도는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 1:24).
우리를 구원하기 위한 공로가 되는 그런 고난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고난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위한 고난입니다. 사도는
교회를 위해서 봉사할 때에 고난을 경험하였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통해 세우신 교회를 세우는 데
고난이 있습니다. 사도나 목사뿐 아니라 모든 성도는 교회를 세우는 사명으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교회 안에서 교회와 연합되어 섬기며 고난을 당합니다. 그 모든 고난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는 고난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생각하고 나아갔던 것입니다. “왜 나만 이러한 고난을 받는가?” 하면서 뒤로 물러서지 않고 오히려
고난을 받는 것을 기쁘게 여기면서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하나님의 집에서 심판이 시작되었다고 선언합니다(4:17), 전후 문맥을 보면 4:16, 19절에서는 고난을 이야기합니다. 따라서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고난은 심판과 관련이 됩니다. 그리스도의
심판에서,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죄에 대해서 정죄하시면서 죽게 하셨습니다. 후에는 그의 순종에 대해서 의로움을 나타내시기 위해 그분을 부활시키셨습니다.
신자는 이러한 두 가지 의미에서 심판에 참여합니다.
첫째, 신자는 그리스도와 함께 죄에 대해서 죽었습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의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도록 하기 위함입니다(벧전 2:24). 따라서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한 자는 “죄를 그쳤습니다”(벧전 4:1).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는 죄에 대해서 죽은 것입니다(롬 6:2-4). 둘째, 심판이
옳은 것과 그른 것을 골라내는 것처럼, 고난을 통해서 그 사람이 그리스도에게 속했는지 속하지 않았는지가
드러납니다. 현재에 그리스도와 함께 죄에 대해서 죽은 자는 지금도 부활의 생명을 누리다가 마지막에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받으신 것은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하시기 위함입니다(벧전 3:18).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하는 의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과 관련됩니다(빌 3:10-12).
3. 증거로서의 고난
베드로 사도는 자기를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라고 소개합니다(5:1). 이것은 4:19의 말씀과 연결됩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을 목격했기 때문에 “고난의 증인”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함을 이렇게 말합니다. 신자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면서 그분의 증인이 됩니다. 신자 안에 있는 소망에 대한 것을 묻는 자가 있는데(벧전 3:15) 그 질문은 고난의 맥락에서 주어집니다(벧전 3:14, 16-17). 로마 제국 시대에는 기독교인이 황제
숭배를 거부한다는 이유로 핍박을 받았는데, 그렇게 고난을 받는 사람에게 소망에 대한 것을 물었고, 그들은 “고난의 증인”으로서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스데반은 순교를 당하는 그 순간에도 다른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고 자기의 영혼을 주님께
부탁하였습니다. 고난 가운데서 증언하였습니다. 이것이 주위
사람들 특히 바울 사도에게 강력한 인상을 남겼을 것입니다. 고대 교회의 교인들이 순교를 당하면서도 신절을
굽히지 않은 것은 그것 자체가 “고난의 증언”이었습니다. 테르툴리아누스가 지적한 것처럼, 순교의 피가 복음의 씨가 되어서
복음이 더욱 널리 전파되었던 것입니다.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모든 성도는 핍박을 받습니다(딤후
3:12). 그리스도인의 고난은 그 사람의 잘못 때문이 아닙니다. 욥은
하나님께서 그의 믿음을 인정해 주셨기 때문에 고난을 받았습니다. 예수님도 하늘에서 인정하는 소리가 들린
다음에 시험을 받으셨습니다(마 3:17). 우리의 잘못에
대한 징벌로서가 아니라, 우리가 그리스도께 속하였음을 드러내시기 위해서 고난을 내리시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모든 고난이 하나님께서 인정하신 것은 아닙니다. 모든 사람이 고난을 통하여 그리스도처럼 되는 것도 아닙니다. 이
점에서 우리는 자신을 살피고 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병으로 고난을 당하는 것도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인가?”라는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2:19에서는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라고 합니다. 여기에서 핵심은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는 것입니다. 따라서 병으로 고난을 당할 때에도 병의 원인이 근본적으로 아담의 죄이고 그리스도 안에서 해결되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잘 인내한다면, 그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고난을 이기는 자는 죄를 그치고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자가 되기 때문입니다.
4. 의를 훈련하기 위해 징계하시는 고난
우리가 잘못을 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징계하십니다. 의로우신
하나님께서는 신자뿐 아니라 불신자의 잘못과 죄에 대해서도 심판을 하십니다. 불신자는 징계를 받을 때
분노와 한을 품습니다. 하나님을 대적합니다. 혹은 좌절하여
무너집니다. 그러나 징계를 받는 신자는 불신자들과는 다른 태도를 취합니다.
징계를 받을 때에 신자는 그리스도의 고난을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죄를 그치고 의를 추구하면서 나아옵니다(계 3:19; 히 12:7-8). 믿음의 시련을 거치면 그는 금보다 더
귀하게 나타날 것입니다(벧전 1:7; 4:12-13. 참조. 욥 23:10).
5. 영광을 향한 연단으로서의 고난
사람은 참으로 자기중심적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무엇을 배워도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요셉은 꿈을 꾸었으나 그 꿈에 대해서 지혜롭게
이야기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13년 동안 말씀으로 연단을
받고 난 다음에는 달라졌습니다.
어떤 사람은 공부를 잘하면 그것을 중심으로 세상을 쉽게 평가합니다. 돈을 잘 버는 사람은 그것을 중심으로 세상을 봅니다. 다른 사람에게
친절히 잘 대하는 사람은 또한 그것을 중심으로 자신을 봅니다. 바로 이 부분에서 그 사람의 강점이 그
사람의 약점이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자기의 강점을 중심으로 생각하는 데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그
사람의 강점이 고스란히 그 사람의 약점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고난을 겪으면서 그러한 부족이 채워집니다. 우리는
고난을 통해서 연단을 받고 영광과 존귀를 얻습니다(벧전 1:6-7).
연단을 받은 금은 세상적인 것이기 때문에 없어지지만, 고난으로 연단을 받은 믿음은 금보다
귀하고 없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 하느니라.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가운데서 즐거워 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은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로마서 5:2-5).
6. 결론:
자신과 세상에 대한 인식의 변화
고난에 대해서 생각할 때에 자신과 세상에 대한 인식의 변화가 중요합니다. 이 세상에서 나그네가 되는 것은 특권입니다(벧전 1:1). 우리는 나그네가 되도록 선택을 받은 자들입니다. 따라서 고난도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을 편하게 느끼는 자는 교회를 불편하게 느낄 것입니다. 고난을 통해서 우리는 영광에 들어갑니다. 고난을 통해서 우리는 세상을
버리고 주께 나아옵니다.
요셉이 13년 동안 말씀으로 연단을 받았을
때, 그는 매우 성숙한 사람으로 나타났습니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요소가 함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에 연합한 점도 있고 증거의 면도 있습니다. 그의 잘못과 미성숙에 대한 징계의 의미도 있습니다. 영광을 위한 준비의 측면도 있습니다. 욥의
고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하나님께 인정을 받았고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서 고난을 받았습니다. 그렇지만 그에게도 잘못과 미성숙이 있었습니다. 그는 고난 중에서도
하나님을 증언하였고 고난 후에는 영광에 참여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의 고난은 이러한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비기독교인의 고난은 장차 임할 고난에 대한 경고입니다. 이러한 어려움이 올 때에 그는 회개하고 돌이켜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홀연히 멸망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