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재지 : 안동시 와룡면 산야리 187
배향인물 : 유일재 김언기, 권대기, 김용석
향사일 : 매년 3월 초정
첨부파일 : 용계서원 보덕단 단향과 홀기
□ 연혁
이 건물은 조선 중기의 학자인 유일재 김언기를 배향한 서원이다. 와룡면 소재지에서 예안 방향으로 가면 산야리 산골마을이 있고 이 마을의 동쪽 산자락에 서원이있다.
이 서원은 1778년 선생의 문인들과 후손들이 보덕사를 세워 선생을 제향하고 인재 권대기를 추향하여 오던 중 대원군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된 뒤 지금까지 복설되지 못하고 있다. 서원 맞은 편 언덕에 용산 보덕단을 세워 매년 3월 초정일에 향사를 지내고 있다. 현재는 강당 건물 1동과 부속 건물 1동이 남아 있다. 강당은 막돌 초석위에 사각의 주초를 놓고 각주를 세운 정면 4칸, 측면 2칸의 홑처마 맞배지붕으로 중앙에 4칸의 마루를 두고 좌우에 2칸의 온돌방을 배치한 간결한 구조의 건물이다. 매년 3월 초정일에 향사를 지낸다.
□ 배향인물
1) 김언기(1520~1588) 선생은 조선 중기의 학자로 본관은 광산이며, 자는 중온이요, 호는 유일재이다. 퇴계 이황 선생의 문인으로 1567년(명종 22)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선생은 일찍이 구봉령 선생과 함께 청량산에 들어가 10년을 기약하고 글을 읽다가 연고가 있어 구봉령 선생보다 1년 앞서 돌아왔다. 산에서 내려오며 암애와 초목이 모두 읽던 책의 글자로 보였다 한다.
도산 근처에 살면서 서사를 지어 '유일'이란 편액을 걸어 놓고 후진을 교육하였다. 문하에서 남치리, 정사성, 권위, 박의장, 신삼제, 권태일 선생과 같이 훌륭한 인재들이 배출되어 당시 안동의 학문 진흥의 창도자로 알려졌다. 퇴계 선생이 돌아가신 뒤에는 여강에 서원을 세우고, 백련사를 철거하여 유학을 숭상하고 불교를 배척하는 데 노력하였다. 저서로는 <<유일재집>> 1권이 있다.
유일재공 용산 보덕단 비명
안동 땅 와룡산 기슭 간좌 언덕에 보덕단이 있으니 이 단은 바로 유일재 김선생의 문제자(文弟子) 제현들이 보은하기 위해서 설치하였다.
처음에는 묘소 앞에 설단을 하여 해마다 한 차례씩 헌성(받들어 모심)할 곳으로 만들었다.
용계서원을 건설한 이후부터는 묘전 정향을 폐하고 사우향례(祠宇享禮)를 받든지 오래 되었으나 불행하게도 훼철령이 내려 묘우는 헐리게 되었다.
오직 강당만 우뚝하게 남아 있으니 강림하시던 혼령께서 어디에 의지하실 바가 있겠는가? 이러므로 많은 선비들이 발의하여 길일을 받아 옛 단을 지금의 위치로 옮기었다.
앞에는 옛날 서원 사당 터가 있고 위로는 선생의 체백을 안장한 묘소가 계시니 여기야말로 아주 적합한 자라가 아니겠는가?
지금 민국이 두 번째로 맞는 정묘년 가을에 후손 용각, 용세 제군이 문부로(門父老)와 묘든 향중사림(鄕中士林)의 명을 받들고 철희에게 찾아와 『모든 일이다 되었는데 기사(紀事)할 바가 없기에 감히 청하는 바입니다.』라고 하는지라 삼가 상고해 보니 선생의 휘는 언기요 자는 중온이다.
김씨의 계통은 신라에서 시작하였는데 신라말기에 태어난 왕자 흥광이 세상이 장차 혼란할 줄 아시고 광주 평장동에 들어가 숨어살았다.
이분이 바로 시조이시다.
손자이신 길에 이르러서는 고려 태조를 보좌하여 관직이 삼중대광공신 사공에 이르렀다.
그 후부터 연달아 평장사 여러분이 나시니 이로 인하여 동명을 평장이라 하였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휘 약채가 계셨는데 충청도 관찰사를 지냈으며 증직은 예조판서이다.
아들 퇴촌공 열은 형조좌랑이며 문장으로 명망이 있었는데 분파조이다.
할아버지 휘 용석은 성균진사인데 세상에서 담암 선생이라 칭하신다.
아버지 휘 주도 역시 진사이고 어머니는 순흥 안씨인데 첨정, 처정이 그의 아버지이시다.
선생은 중종 경진(1520)에 태어나시고 선조 무자(1588)년에 세상을 떠나셨다.
춘추가 69세였으며 와룡산 남쪽 기슭 축좌가 바로 묘소이다.
영양 남씨는 주부 세용의 따님이시고 영천 이씨는 참봉 안필의 따님이신데 전후 배위였다.
아들 갈봉은 생원 진사를 다 합격하였으며 증직은 집의다.
딸은 권산두와 이경리에게 각각 출가했는데 모두 배전의 소생이고 만취헌의 득숙은 당음이었고 청취헌 득의는 출계하였으며 딸은 남태화, 권혼, 김영에게 각각 출가했는데 이 모두 배후의 소생이다.
갈봉의 아들 광주는 생원이었고 광부는 출계 했으며 딸은 이예준 박대유 이진남, 권즙에게로 각각 출가하였다.
만취헌의 아들 광부는 호를 오매당이라 하였고 청취헌의 광원은 진사였다. 이하는 생략한다.
선생은 천품이 고상하고 명랑하셨으며 덕행과 기국이 넓고 깊었는데 의연한 장자의 기품이 있으셨다.
48세에 사마시에 합격한 후 다시 진취할 생각을 하지 않으시고 오직 육영사업에만 낙으로 여기셨으니 운명을 아시는 군자라 할 수 있겠다.
선생은 처음에 구담에 사셨고 중년에 이계로 옮기셨으며 만년에 가야에 와서 터를 잡으셨다. 가야와 도산의 거리는 삼십 리가 채 못 되었다.
오천 종인(宗人) 후조당 부필 여러 종반과도 사는 거리가 불과 수마장 밖에 되지 않았다.
또 백담 구봉령, 학봉 김성일, 회곡 권춘란, 지산 김팔원 제공과도 서로 사는 거리가 역시 멀지 않았다.
그래서 나아가면 스승에 묻고 물러나면 벗과 함께 강습을 하면서 이것으로 깊은 경지의 자득한 낙을 삼았다는 것은 또한 우러러 헤아릴 수 있지 않겠는가?
모재 몇 칸을 짓고 유일재라는 편액을 붙였는데 책 상자를 짊어지고 학업을 배우려고 몰려오는 자가 날로 문전가리(門前街里)를 매웠다.
재주에 따라 잘 교양시켜 성취한 분들이 많았으며 심지어 복주(안동의 옛 지명)의 문학이 훌륭하다는 칭송까지 이르렀다.
혹 한가로운 겨를을 타서 노닐던 곳에는 광풍헌이라고도 하고 구선대라고도 하고 반송정이라고도 하는 아름다운 명칭까지 지었으니 이것은 모두 선생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여강서원이 처음 이루어 질 때에는 선생이 동주(洞主)가 되셔서 동문제공들과 더불어 강론하여 규약을 정하고 이에 따라 부백(관찰사)에게 정문을 올려 국학으로 승격시켰다.
또 중간에 일찍이 영해부교수가 되기도 하셨는데 강사를 수리하고 학측을 거듭 밝히자 깊음은 그 입덕문부(入德門賦) 한편으로 보아서 가히 상론(尙論) 할 수 있고 선생께서 학풍을 일으킬 뜻이 간절하고 지극함은 부백에 올린 정문 수 백언에 추측하여 알 수 있겠다.
시전(詩傳)에 이른바 덕이 있으면 반드시 문도 있다는 말이 아니겠는가? 하물며 이 제단을 보덕단이라고 명칭한 바에야 선생께서 성기설물(成己設物)에 대한 공(功)과 앞을 밝히고 뒤를 여신 덕이 넓고 또 멀다는 것을 더욱 상상할 수 있겠다.
공경하는 마음으로 명(銘)을 다음과 같이 지었다.
도산에서 도학을 제창하자, 제현들이 많이 일어났는데 달재성덕(達材成德)이 훌륭하고 씩씩하다.
독특하게 깨달은 선생께서는 덕재를 겸비하신 아름다운 기국이었다.
어찌 반궁(泮宮)에 물러 나와 임천(林泉)에서 덕을 길렀을까.
나에게 이것은 내 마음대로 하지만 나에게 없는 것은 하늘에 맡길 뿐이기 때문이다.
이러므로 자기 운명을 안다는 것은 군자로서 귀히 여긴다. 하물며 또 나의 도라는 것은 서책에만 붙어 있은 지 오래였다.
이것으로 찾아오는 자에게 아침저녁으로 쉬지 않으면서 가르쳤다.
다음 달밤엔 달이 밝고 봄철 산에는 경치가 고왔어라.
영재교육에 낙을 삼고 하늘에서 주신 수명은 제대로 끝맺으셨고 복주 고을 문풍은 선생으로부터 베풀어졌다.
입덕문부(入德門賦)와 부백에게 올린 정문(呈文)을 읽을수록 더욱 음미할만하니 먼 백세토록 전할 수 있다.
이 보덕단을 설치한 것이 어찌 소용이 없겠는가.
몇 백 명 문인들이 보덕의 뜻을 더욱 경건히 하였다.
언덕이 혹 골짜기가 되고, 바다가 흙빛이 된 다해도, 우뚝한 이 보덕단은 무너지지 아니하고 이지러지지도 않을 것이다.
후학 순천 김철희 삼가지음
2) 권대기(權大器)
1523년(중종 18)∼1587년(선조 20). 조선 중기 학자. 자는 경수(景受)이고, 호는 인재(忍齋)이다. 본관은 안동(安東)이고, 출신지도 경상북도 안동이다.부친 전 참봉(前參奉) 권엽(權燁)의 3남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형 권위기(權偉器)와 동생 권중기(權重器)가 있다.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문하에서 학문을 익혔다.
1552년(명종 7) 식년시 생원 3등 56위로 합격하였으나, 성균관 유생으로서 과거에 뜻을 두지 않아 관직에는 나아가지 않았다. 타고난 품성이 순수하고 행실이 반듯하였으며, 경서(經書)에 능통하고 배운 것을 실천하는 지행합일(知行合一)로 추앙을 받았다.
평생토록 효제충신(孝悌忠信)의 실천과 세속의 명예와 이득 취하는 일에 경계할 것 등에 관해 공부하였으며, 검약한 생활을 하면서도 남이 알아주기를 구하지 않는 삶을 살았다. 후에 이계서원(伊溪書院)을 지어 후진 양성에 힘썼는데, 문하에 많은 선비들이 배움을 갖기 위해 찾아왔다. 슬하에 5남으로 왕자사부(王子師傅) 권우(權宇), 영릉참봉(英陵參奉) 권굉(權宏), 생원 권성(權宬), 장릉참봉(章陵參奉) 이우당 권환(權寏)을 두었다. 안동의 용계서원(龍溪書院)에 배향되었다. 유고로 《인재선생실기(忍齋先生實紀)》가 있다.
문집인 『인재선생실기(忍齋先生集實記)』는 여러 차례의 병화를 겪고 맏아들 권우(權宇)가 왕자사부로 재직 중 뜻을 펴지 못하고 39세로 세상을 떠나는 등 불행이 겹쳐 유문(遺文)을 거의 수습하지 못하여 산일됨에 따라 현재 시 5편, 편지 2편만이 남았고 그 외는 부록이다.
만사(挽詞) 학봉 선생 찬
난초와 눈 같은 회포 죽도록 맑았으니 / 蘭雪襟懷抵死淸
눈 안의 그 무엇이 그대의 맘 끌었으랴 / 眼中何者可嬰情
나이 젊어 서울에서 문장 재주 펼치었고 / 妙年京國摛文藻
말년에는 고향에서 월평을 주관했네 / 晚歲鄕閭主月評
강장에서 가르치는 가학이 깊었고 / 絳帳敎存家學邃
청전은 오래 되어 전대 속 금 경시했네 / 靑氈物舊槖金輕
갑작스레 돌아가서 무덤 속에 누웠음에 / 忽然歸臥黃壚宅
인간 세상 노성한 분 잃었음을 통곡누나 / 痛哭人間失老成
3) 김용석(金用石)
潭庵金先生遺墟碑
【前面大字】成均進士潭庵金先生遺墟碑
【碑 文】 福州之九潭則龍醴二郡之交也前俯洛江三邑之民絡岸而居屋廬相連爲大村北則龍宮山其上有故進士潭庵金先生塚焉先生諱用石字鍊叔成化間人也世家京城之東門外二十中 成廟三年壬辰進士遊佔翁門下喬桐初則挈家來隱于九潭夫人金氏之鄉也公歿而子孫守其廬相傳八九世而公墓前石只書姓諱闕顯刻公男八人子孫文雅傳業而爲公身後謀沒沒若此何也世傳公臨終將案上書火之蓋不欲留名於世而子孫遵遺意不敢載之石歟今距公幾三百年當時事無可徴而獨南秋江孝溫錄師友載公姓名而姜中和應貞事中言公少時依朱文公故事設鄉約月朔會講小學於太學其選皆一時名士如金用石鍊叔申從濩次韶朴演文叔孫孝祖無忝鄭敬祖孝昆權柱支卿丁碩亨嘉會康伯珍子韞金允濟子舟其尤也末云世之不悅者喧之指以爲小學孝子之契有夫子四聖十哲之譏云秋江翁高蹈一世少許可人而列數長安俊士獨擧十人爲尤而公首焉則公可知也當是時 成廟作人一時才俊可謂盛矣其設鄉約于太學講論小學蓋欲倡明古道措諸斯世而已有戲而沮之者公亦知斯道之不可行不復應擧同門如寒暄一蠹之賢欲以此學修之身傳諸後而終不免世禍靜庵先生受學於暄翁欲以此學試之一世而又有己卯之禍我東固褊小矣何其與古道相盭若是哉竊惟先生學術醇正智慮淵偉觀象玩占不俟終日超然鵠擧歷戊甲兩大禍同人韲粉而葆光卒歲不恨身名之薶沒易曰知幾其神乎殆先生之謂歟說者言有人偸瘞先生墓山者知縣按驗見墓石驚則泣曰我不料此老之委骸於此也爲文哭奠而去云然則當時人不識先生處所者多矣先生後孫設齋舍歲一祭先生墓今年春九世孫光鉉慨然念遺跡之泯沒也倡議同宗伐石載先生事若干表厥遺墟皆拜手曰諾於是光鉉以其事來索銘光庭亦忝在外裔不敢以老洫無能辭謹受而敍之系以銘銘曰
鷄林葉黃王子遯荒釋去紱冕混跡黎蒼遺風邈焉曠世誰伉有孫曰吉佐麗祖以昌子孫繩繩有八平章歷世數十絓組相望以至于公尙書之弟少載令聞則志斯世樂彼泮林俊髦連袂設約講學之經之綸章甫煌煌駭視介鱗張弩吹毒有徒莘莘占時觀象廢不可支先幾色擧于洛之湄塞兌藏六誰測其微允矣明哲于舊有光凡厥懿蹟幽鬱不章悠悠百世孰究其詳公有子孫世聾規矩遺芬未沫過者起慕彼考槃者思薦豆俎公孫追孝歲祀罔缺愾然遐懷圖載遺烈刻詩牲繫以詔來哲
崇楨紀元後 七月 日
折衝將軍僉知中樞府使 李光庭 撰
참고자료 : 유허비 및 제향관련 자료
첫댓글 박선생님2)권대기 내용잘못됨(장남권굉->권우이며, 5남:권우,권굉,권성,권환,권면임을 수정바람: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수정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