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星州 六李의 貫鄕 表記 實相을 말하다.’
- 경상대학교 교수 이상필 문학박사 초청 특별강연회 개최 -
□ 광평이씨(대종회장 이태호)에서는 2016년 7월 2일(토)
대구광역시 달서구 갈산동 358-13번지 영신기계 2층 회의실에서,
대종회 주관으로 광평, 벽진, 경산, 성산이씨 등 5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성주 육리의 관향 표기 실상에 대한 이해를 더욱 증진시키기 위하여
경상대학교 이상필 교수를 강사로 초빙하여 특별 강연회를 열었다.
□ 남명 조식학파를 연구하는 권위자인 이상필 교수는
이날 경연회에서
“평소 성주이씨 관향에 대하여 의문을 가지다가 연구를 시작하게 되었다”고 말문을 열었다.
성주에는 육리( 농서, 벽진, 성산, 광평, 경산, 가리이씨)가 있는데,
모두 성주의 옛 지명이며,
“성씨 앞에 붙는 고을 이름이 본관·관향·관적이다”하며,
“조상의 명부가 있었던 고을 이란 뜻이라고 말했다”,
또 우리 ‘광평이씨 계사보 서문’의 예를 들며,
“성주의 여러 이씨에 대하여 처음 언급한 사람은
1593년에 이능의 후손인 황곡 이칭(1535-1600) 선생”이며,
“그는 족보서문에서 우리 광평을 포함하여 네 가문을 소개하였다”고 하였고,
“1618년 경산이씨(이순적)가 발간한 족보서문에도
성주에는 농서·벽진·성산·광평 등 여섯 가문을 분명하게 서술되어있다” 하였다.
또 이기항이 작성한 1726년 성산이씨(이능일)의 족보서문,
1864년 벽진이씨 족보서문에도
우리 광평 이씨를 포함하여 성주에는 여섯 가문 또는 일곱 가문이 있다고 소개하였다.
또 다른 기록에는
성주의 최초 읍지인 경산지에도 확인 할 수 있는데
특히 우리 광평 이씨는
‘광평군 후손이므로 광평을 관향으로 하여 다른 이씨와 구별하였다’고 하였다.
그런데
“과거의 각종 역사서인
문과방목이나 사마방목, 고려사절요, 조선왕조실록, 동사강목, 각종 문집 등에는
거의가 일반적인 명칭인 성주 또는 성산으로 표기된 것을 각종 문헌에는 볼 수 있다”고 하였다.
이는 관향을 몰라서라기보다는
“그 당시에 공사기록에서 관향을 모두 성주 또는 성산으로 통상 서로 같이 사용하여 왔기 때문” 이라고 하였다.
또 “동관이조(同貫異祖)인데도 호적이 같은 부모가 있는가하면,
분명히 시조가 다른데도 호적이 같아 혼인을 하지 못하는 사례도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벽진이씨는 1710년 족보부터 다른 이씨와 구별하여 족보를 발간하였고,
이후 각 문중에서는 각자 고유의 본관을 찾기에 이르렀으며,
일제 강점기에 제정된 호적에는 성산, 성주로 표기한 사례가 많았으나,
이는 성주의 일반적인 이름이어서,
성주 육리는 일제 1920년부터 가문별로 족보 또는 호적에 자기 관향을 구분하여 사용하기 시작하였으며,
“최근에도 호적을 바꾸는 가문도 있다”고하면서,
그는 “하루 빨리 성주 육리도 성씨에 대한 각자의 정체성을 찾아야한다”고 강조하였다.
이상 입니다/
# 출처 : 광평이씨 대종회 홈페이지 "보도자료"를 인용 편집하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