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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산_UBF 2016년 4월 17일 주일메시지
사마리아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말씀 / 사도행전 8 : 1-40
요절 / 사도행전 8 : 12 “빌립이 하나님 나라와 및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관하여 전도함을 저희가 믿고 남녀가 다 세례를 받으니”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시편119:71) 성경은 고난이 유익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핍박과 박해는 고통스러운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고난은 성령께서 허락하신 것이었습니다. 위대한 생명역사를 온 천하로 확장하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스데반의 순교와 예루살렘에서의 핍박이 무엇을 이루는지 배우고자 합니다. 성령께서 어떻게 생명의 말씀 역사를 확장시켜 나가는지 배우고자 합니다. 성령께서 아산 UBF가 고난을 잘 감당하고 세계선교와 캠퍼스 제자양성 역사를 잘 감당해 나가기를 기도합니다.
1. 사마리아의 복음역사(1-25)
1절을 보십시오. “사울이 그의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핍박이 나서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 8장 말씀은 스데반의 순교와 사울의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사울은 스데반이 순교하던 날 현장에 있었습니다. 그는 스데반이 동족들의 돌에 맞아 죽음을 당하는 현장을 보았습니다. 그때 그는 스데반이 유대인들에게 정죄당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겼습니다. 그는 골수 유대교 청년이었습니다.
스데반은 순교하였습니다. 이 세상의 사명을 마쳤습니다. 스데반은 이 땅에서의 여행을 마쳤지만 그의 순교를 신호탄으로 이 땅에서는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첫째는 예루살렘 교회에 대한 대대적인 핍박이었습니다. 유대교와 기독교는 함께 할 수 없는 관계가 되었습니다. 둘째는 예루살렘에서 완성되고 예루살렘 안에서 폭발하던 생명의 복음이 예루살렘과 유대를 넘어 온 세상으로 확장하기 시작했습니다. 셋째는 위대한 사도 바울이 되는 사울의 회심입니다. 사도행전은 스데반의 순교 전과 순교 후로 나눌 수 있습니다. 스데반의 순교까지 생명의 복음은 예루살렘에 머물렀습니다. 스데반의 순교이후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복음은 성벽을 넘어 온 세상으로 뻗어나갑니다. 2절을 보십시오. 경건한 사람들이 스데반을 장사지냈고 그로 인해 통곡하며 울었습니다. 성도들이 흩어지고 난 예루살렘에는 기독교인들에게 사납고 적대적인 사람들만 있는 것 같지만, 의외로 경건한 사람들이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이 순교자 스데반을 장사지내고 그의 희생을 슬퍼해주었습니다.
3절을 보십시오. 사울은 가장 거세게 핍박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교회를 없애고자 작정한 사람이었습니다. 사울은 예수 믿는 사람이라면 닥치는대로 체포하였습니다. 여자들도 가리지 않고 체포하였습니다. 멧돼지가 포도원을 샅샅히 파헤치듯이 사울은 예수 믿는 사람들에 대한 핍박을 철저하게 강력하게 실행하였습니다.
4절을 보십시오.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쌔” 예수 믿는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성도들은 직장을 잃고 땅을 잃었습니다. 집을 잃고 고향을 잃고 낯선 곳으로 향하여야 했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슬펐을 것입니다. 그들은 매우 피곤하였을 것입니다. 그들은 언제까지 고생을 해야 할까 막막하였을 것입니다. 고민은 깊고 두려움은 짙은 그림자를 마음에 드리우게 하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성령 충만한 성도들은 고통의 시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성도들은 집을 잃었지만 하늘나라 영광을 버리고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신 예수님을 전하였습니다. 성도들은 직장을 잃고 땅을 잃었으면서도 하나님의 아들이신 분이 이 땅에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셔서 그를 믿는 자들에게 참 자유와 구원을 주신 예수님 전하는 것을 잊지 않았습니다. 성도들은 매우 성숙하였습니다. 성도들은 성령에 충만하여 자기문제를 뛰어넘었습니다. 성도들은 성령 안에서 예수님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을 불쌍히 여겼습니다. 성도들은 자기의 고민을 잊고 예수님의 이름을 중심으로 나아갔습니다.
시련과 핍박은 성도들에게 고통스러운 것 맞습니다. 시련과 핍박이 하나님의 생명 역사에는 큰 유익이었습니다. 성도의 시련과 고난은 복음을 듣는 백성들에게는 큰 구원과 행복이었습니다.
5-8절을 보십시오.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빌립이 사마리아 성에 내려가 그리스도를 백성에게 전파하니 무리가 빌립의 말도 듣고 행하는 표적도 보고 일심으로 그의 말하는 것을 좇더라 많은 사람에게 붙었던 더러운 귀신들이 크게 소리를 지르며 나가고 또 많은 중풍병자와 앉은뱅이가 나으니 그 성에 큰 기쁨이 있더라”
빌립은 사마리아로 갔습니다. 빌립이 사마리아로 간 것은 안전을 위해서는 탁월한 선택일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들과는 식사하지 않는 것이 룰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과는 상종도 대화도 하지 않는 것이 룰이었습니다. 사마리아 땅 조차 밟지 않으려 하였으므로 빌립 집사가 사마리아로 간 것은 피신 루트로는 좋은 것이었습니다.
집사 빌립은 피하는 일에만 급급하지 않았습니다. 사마리아에서 예수님을 전하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영접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붙어 괴롭히던 더러운 귀신들이 쫓겨나고 많은 중풍병자와 앉은뱅이가 나음 받고 고침을 받았습니다. 온 성은 큰 기쁨에 넘쳤습니다. 유대인들이 증오하고 멸시하는 사마리아에 빌립집사를 통해서 예수님의 말씀이 전파되자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어 하나님 나라 복음을 영접하는 역사가 불길같이 강력하게 일어났습니다.
9-12절을 보십시요. “그 성에 시몬이라 하는 사람이 전부터 있어 마술을 행하여 사마리아 백성을 놀라게 하며 자칭 큰 자라 하니 낮은 사람부터 높은 사람까지 다 청종하여 가로되 이 사람은 크다 일컫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하더라 오래 동안 그 마술에 놀랐으므로 저희가 청종하더니 빌립이 하나님 나라와 및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관하여 전도함을 저희가 믿고 남녀가 다 세례를 받으니” 사마리아 사람들은 오랫동안 귀신과 마술에 속아 있었습니다. 그들의 삶은 죄로 인한 고통이 가득하였고, 감당할 수 없는 삶의 짐이 무거웠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이 무거운 죄의 짐을 지고 고통스러워 할 때 헛된 것들이 사마리아 사람들을 현혹하였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을 시몬이라는 마술사가 마음껏 이용했습니다. 그는 요상한 마술을 행하여 그 마음을 빼앗았습니다. 그는 사람들을 미혹하여 자기 유익을 취하는 자였습니다.
빌립은 이런 소망 없는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와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여 주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님을 영접하고 그 십자가와 부활을 믿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13절을 보십시요. 이 놀라운 역사에 마술사 시몬도 크게 놀라 빌립을 따라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사마리아에서의 복음역사가 어떤 면에서 큰 의미가 있습니까? 사마리아 사람들은 솔로몬 왕이 사망한 후 남유다와 분리된 북이스라엘이었습니다. 북이스라엘이 문제가 되기 시작한 것은 성전문제였습니다. 북이스라엘이 예루살렘 성전으로 내려가는 것이 불안했던 북이스라엘 왕은 꼭 예루살렘 성전에서만 제사드리지 않아도 된다고 하며 그리심산을 대체 성전장소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지정하신 제사제도를 부인하고 고치는 것이므로 큰 죄악이었습니다. 이런 상대주의 죄악속에서 북이스라엘은 앗시리아에게 멸망하였습니다. 앗시리아는 북이스라엘을 멸망시킨 후 북이스라엘 사람들을 앗시리아 각지로 이주시켰습니다. 북이스라엘에는 앗시리아가 정복한 족속들을 이주시켰습니다. 세월이 흐르며 북이스라엘에는 혼혈족이 생겨났습니다. 이 사람들은 신앙이 변질되고 혈통이 혼합된 사람들이었습니다. 삶도 진리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경홀히 여겼으며 악한 열매를 맺었습니다.
이때까지의 유다와 사마리아의 관계가 멸시하고 반발하는 관계였다면, 증오하는 원수관계로 돌입한 것은 2차 성전 건설을 방해한 사건 때문입니다. 바벨론에서 포로귀환 한 후 유다는 파괴된 성전을 짓기 시작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페르시아 왕 고레스에게 유다가 성전을 지으면 페르시아에 큰 골치거리가 될 것이라고 모함하였습니다. 고레스 왕이 듣지 않자, 그 다음 왕 아닥사스다에게 또 참소하여서 결국 유다의 제2성전 건축은 16년간이나 중단되어야 했습니다. 성전 뿐 아니었습니다. 80년 후 예루살렘 성벽 건축도 방해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성전과 예루살렘 성 건축을 노골적으로 훼방한 사마리아는 절대로 용서할 수 없는 원수가 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이 개라면 사마리아 사람들은 개만도 못한 자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구원받더라도 사마리아 사람들만큼은 하나님의 거룩한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여겼습니다. 사마리아인은 거룩해질 리도 없다고 여겼습니다.
이런 사마리아에 복음이 전파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는 역사가 이루어졌습니다. 귀신이 쫓겨나가고 많은 백성들이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 받는 역사가 이루어졌습니다.
14-17절을 보십시오.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이 사마리아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함을 듣고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매 그들이 내려가서 저희를 위하여 성령 받기를 기도하니 이는 아직 한 사람에게도 성령 내리신 일이 없고 오직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만 받을 뿐 이러라 이에 두 사도가 저희에게 안수하매 성령을 받는지라”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와 그 말씀을 영접하는 역사가 있다는 소식이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와 사도들에게 전해졌습니다. 성령 충만한 사도들은 사마리아에 대한 유대인으로써의 편견을 버렸습니다. 성령 중심으로 열린 마음을 가졌습니다. 사도들은 기꺼이 사마리아로 갔습니다. 사도들이 사마리아에 가서 안수하고 기도해주었습니다. 그러자 각 사람들이 인격적으로 성령 세례를 받았습니다.
이상의 역사를 통하여 배우는 바가 큽니다. 첫째, 양들을 위하여 많은 목자들이 수고하여야 합니다. 빌립 집사는 포용력이 있어서 원수같은 사마리아 사람을 위해서도 기꺼이 복음을 전하는 열린 마음의 목자였습니다. 이런 넓은 세계관과 융통성 있는 목자 덕분에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님의 이름을 듣고 영접할 수 있었습니다. 여기에 예루살렘 사도들이 가서 깊이 있는 말씀을 전하고 그들의 신앙을 더욱 체계적이고 굳건해지도록 하였습니다. 사마리아의 불쌍한 영혼들을 살리고 돕는 일을 함에 있어서 평신도와 사도, 넓은 마인드와 교회의 존귀한 권위가 하나가 되어 섬겼습니다.
둘째, 성령안에서 하나가 되었습니다. 사마리아 역사의 특이한 점은 예수님 이름으로 세례 받는 일과 성령 세례가 시간차이가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성령께서는 빌립 집사가 예수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사마리아 양들이 믿을 때 즉시 임하지 아니하셨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사도들이 와서 안수해 주었을 때, 각 사람에게 강림하셨습니다. 사마리아와 유대는 반목의 역사가 깊습니다. 사마리아와 유대는 너무 증오하였기 때문에 모든 일을 따로 하고 싶어하였습니다. 성령께서 임하실 때, 굳이 예루살렘에서 사도들이 와서 안수해주자 임하신 것은 사마리아와 유다가 하나의 성령안에 있으며, 성령의 새역사를 이루는데 있어서 서로 갈라지지 않고 하나의 뿌리에서 교회가 출발하게 한 것입니다.
18-24절을 보십시오. 새로운 성령의 역사, 큰 역사가 일어날 때 들떠서 분별력을 상실하기 쉽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사마리아에서 복음역사가 활발하게 일어나는 와중에서 사단이 틈타는 것을 분별하였습니다. 그들은 마술사 시몬의 마음 중심에 있는 탐욕을 분별하여 보았습니다. 시몬이 회개하도록 분명하게 죄를 지적하고 도왔습니다. 교회는 시몬 같은 사람을 분별하고 회개를 도와야 합니다. 예수님 이름을 팔아서 사람을 끌어모아 자아실현하려는 사람입니다. 성령을 이용하여 자기 광을 내고 유명해지고 싶어하는 사람입니다. 시몬은 회개하여 예수님의 이름에 복종하고 성령안에 거하는 일에 관심이 없습니다. 그는 예수믿는 사람들을 통하여 자기가 큰 존경을 받을 것을 기대하는 사람입니다. 성령을 마음대로 부리는 능력을 얻어서 수많은 사람들을 자기에게로 모으고 사람들을 더 많이 모아서 유명해지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교회를 사업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예수믿으라고 소리치고 성령 충만해지라고 강력하게 주장하지만 사실은 내 밑으로 들어와라. 내게 와서 배우라. 소리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 때문에 교회가 욕을 먹습니다. 예수님 믿고 배우려고 온 사람들이 교회 안에서 상처받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예수와 성령을 이용하여 자기가 유명해지는 것을 지향하기 때문에 예수님 중심, 성령중심이라고 하지만 정작 모여든 사람들에게 사랑이 없습니다. 빨리 커나가는 것을 원하며, 적은 사람들을 귀하게 여기며 오래 기다릴 줄도 모르며 참을 줄도 모릅니다. 시몬은 본질적인 회개와 결단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오직 자기가 잘못되는 일이 없기만 바랄 뿐이었습니다.
25절을 보십시오. “두 사도가 주의 말씀을 증거하여 말한 후 예루살렘으로 돌아갈새 사마리아인의 여러 촌에서 복음을 전하니라” 사도 베드로와 사도 요한은 성령의 뜻을 영접하였습니다.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길 사마리아 각지에서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님께서 이땅에 계실 때, 하늘로부터 불을 내려서 사마리아 사람들을 불태우자고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이제 사마리아의 불쌍한 영혼들이 구원받도록 힘쓰고 있습니다. 성령의 역사는 정죄와 판단이 아니라 사랑과 생명입니다.
2. 이디오피아 내시에게 전한 복음(26-40)
26절을 보십시오. “주의 사자가 빌립더러 일러 가로되 일어나서 남으로 향하여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길까지 가라 하니 그 길은 광야라” 주의 사자가 이번에는 빌립에게 사람 없는 광야로 내려가도록 방향을 주셨습니다. 가사는 얼마전까지 언론에 많이 나왔던 이스라엘 내 팔레스타인 거주지인 가자지구가 있는 곳입니다. 예루살렘 서남쪽 70킬로 정도 되는 곳에 있습니다. 여기서부터 이집트로 가는 길이 시작됩니다. 주의 사자가 북쪽 사마리아에 있는 빌립을 무엇 때문에 가장 남쪽 가사로 가게 하셨습니까?
27,28절을 보십시오. 빌립이 광야에 순종하여 가보니 이디오피아 내시가 고급 자가용을 타고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이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모든 재물들을 관리하는 큰 권세를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이 사람이 예배하러 예루살렘에 왔다가 돌아가는 길에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읽고 있었습니다. 그가 읽고 있던 것은 이사야서53:7,8절이었습니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그가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 갔으니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산 자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을 인함이라 하였으리요”
29절을 보십시오. 성령께서는 빌립에게 이 사람에게 가까이 가라고 방향을 주셨습니다. 빌립은 성령의 방향에 순종했습니다. 그는 달려가 “읽는 것을 깨닫느뇨” 물었습니다. 31절을 보십시오. 그러자 그가 대답했습니다. “지도하는 사람이 없으니 어찌 깨달을 수 있느뇨” 이디오피아 내시는 빌립을 병거로 올라타게 하여 말씀을 배웠습니다. 32-35절을 보십시오. 빌립은 이사야서 말씀이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것인 것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신 하나님의 복음을 자세히 가르쳐 주었습니다. 이디오피아 내시는 말씀을 사랑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이디오피아는 옛날 솔로몬 왕때 솔로몬의 지혜의 말을 듣고자 예루살렘까지 왔었던 시바의 여왕의 후손들이 사는 나라입니다. 문제는 이디오피아에서 온 이 사람이 내시라는 것입니다. 머나먼 이디오피아에서 예루살렘까지 왔다가 가도 그에게 성경을 가르쳐 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아마도 신명기 말씀에 기록된 대로 자기 몸을 상하게 한 사람은 총회에 들어올 수 없다는 것 때문에 유대에 있는 많은 랍비들이 이 사람를 상대해주지 않은 것이 아닌가 추정됩니다. 성령의 인도함을 받은 빌립은 이사야 말씀을 잘 풀어주고 그것이 예수님에 대한 예언과 기록임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이사야 말씀을 통하여 메시야의 인격과 메시야 예수님의 사역과 예수님을 보내시는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36-38절을 보십시오. 이디오피아 내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인격적으로 영접하고 물에 내려가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러면 이디오피아 내시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신 사건이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는 무엇입니까?
첫째, 세계선교 역사, 생명구원 역사는 성령께서 이끄시는 역사입니다. 빌립은 사마리아에 있었습니다. 가사로 가는 길은 사마리아로부터 먼 남쪽입니다. 길도 멀고, 황무지 광야여서 사람도 없는 곳이었습니다. 성령께서 인도하신 곳에 가보니 사람이 있었습니다. 말씀을 사모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성령의 음성에 순종해서 다가가보니 이 사람은 예비된 사람이었습니다. 성령께서는 우리를 이끌어 주십니다. 우리가 성령의 방향에 순종하고자 하면, 우리를 복음 전할 사람에게로 이끌어 주십니다.
둘째, 성령께서는 모든 족속에게 예수님을 증거하도록 하십니다. 이디오피아 사람들은 피부가 검고 얼굴은 비쩍 말랐습니다. 높은 산악지역이 많아서 그들의 문화와 풍습은 특이합니다. 성령께서는 이 사람들에게 복음을 증거하게 하셨습니다. 이디오피아는 지금 기독교 국가입니다. 이디오피아 기독교는 개신교도 아니고 카톨릭이나 동방정교도 아닌 콥틱교회라 부릅니다. 이들의 영향으로 이집트에도 2-3백만에 이르는 콥틱교인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성령의 소원이 모든 족속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빌립이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 이디오피아 내시에게 성경을 가르치고 예수님을 전했을 때, 아프리카에 지금 수천만명이 구원을 얻고 생명을 얻는 역사를 이루고 계십니다.
셋째, 성령께서는 모든 장벽을 넘게 하십니다. 성령께서는 사마리아에 대한 장벽을 넘어 역사하셨습니다. 성령께서는 이디오피아에 대한 장벽도 넘게 하셨습니다. 특히 이디오피아 내시는 율법상 하나님의 전에 나올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NIV성경에 보면, 이 사람을 ‘거세된 남자’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런 남자는 신명기23:1절에서 하나님의 전에 나오는 것을 금하고 있습니다. 빌립은 유대인으로서 이 율법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다른 유대인들은 이 사람과 가까이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성령께서 그에게 가까이 가라고 하셨습니다. 성령은 율법의 장벽을 뛰어 넘어 생명구원역사를 이루십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장벽이 많습니다. 까다로운 조건도 많습니다. 성령의 역사는 일체의 선입견, 편견, 고정관념, 문화, 인종, 국적, 차별을 뛰어 넘습니다. 우리가 만나는 대학생들 중에는 기성세대가 이해하기 어려운 학생들이 있습니다. 과도하게 여자를 좋아하는 학생들이 있습니다. 아무 생각이 없는 사람, 너무 생각이 많은 사람, 젊은 나이에 술에 쩔어서 하루라도 술이 없으면 못사는 사람, 매일 농구 해야 하는 사람, 매일 축구 해야 하는 사람, 매일 야구 해야 하는 사람, 매일 야구 봐야 하는 사람, 야구용품 사모으는 사람, 야구 모자 사모으는 사람, 야구 잠바만 사서 입는 사람, 야구잠바 못사입어서 괴로운 사람, PC게임 하는 사람, 스마트폰 게임 하는 사람, 집에서 게임 하는 사람, PC방 가서 게임하는 사람, 아직도 리니지가 최고라는 사람, 게임은 LOL이라는 사람 중요한 사실은 이런 다양한 사람들에게는 모두가 삶의 무거운 무게가 있고, 인생의 죄가 그 영혼을 고통하게 한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너 참 불쌍하다 내가 너 도와줄께 하면 반발합니다. 우리 아산UBF는 나와 다른 많은 사람들을 이해하고 영접하고 사랑하여야 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든 사람을 존중하여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향하여 ‘별난 인간’ ‘참 죄악된 인간’이라고 정죄할 권한은 우리에게 주어진바가 없습니다.
39-40절을 보십시오. 아소도는 가사 북쪽으로 인접한 유다지역 성읍이면서도 오랫동안 유다와 이질적인 점이 많은 동네였습니다. 아소도 사람들은 심지어 유다사람들이 사용한 아람어, 또는 고대 히브리어와 의사소통이 되지 않기도 하였습니다. 빌립은 성령의 소원이 유대인 뿐 아니라 다른 많은 족속들이 구원받기 원한다는 것을 영접하였기 때문에 사마리아로 올라가는 길에서 굳이 아소도에 들어가 또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성령중심 일때, 성령 안에서 팔레스타인 분쟁은 전혀 문제될 것이 없었습니다. 빌립은 이후에도 이방인들이 많이 사는 도시 가이사랴에서 다양한 많은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생명의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결론적으로 스데반의 순교를 시작으로 본격화된 예루살렘의 큰 핍박은 세계선교의 기폭제가 되었습니다. 사도들만 쓰신 것이 아니라 각지에 흩어진 평신도들을 통해서 큰 역사를 이루셨습니다. 우리는 성령의 소원이 세계 선교에 있음을 명심하여야 합니다. 우리는 자기 문제를 뛰어넘어서 어느 누구라도 사랑하고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도 사랑하고 그들에게 생명의 복음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여야 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사랑을 충만히 받은 우리의 할 일입니다. 이것이 우리와 함께 하시며 날마다 우리에게 힘주시는 성령안에서 아산UBF가 기쁘게 감당할 사명입니다. 기도하고 마치겠습니다.
아산UBF/2016/04/17
Asan_UBF Testimony Meet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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