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그럴 때가 있다
어느 날 갑자기 낯선 시간과 공간 안에서 낯설지 않은 기류를 느낄 때가 있다. 오랫동안 잊고 있던 노스탤지어 같은 그것과 마주할 때면 발을 바닥에 딛지 않고 걷는 것처럼 시공간은 아직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경지의 공상과학이 된다. 질문들이 멋대로 유영하지만 손을 뻗어 잡을 수 없다. 공포와 망설임이 동의어가 되는 순간, 거울 속 나는 타인이 된다.
글을 쓰려고 창을 열었다가 그냥 닫을까, 하고 고민할 때가 있다. 내 생각을 칸칸이 가둘 네모 가득한 원고지도, 펜이 지날 때마다 날벌레의 날개 비비는 소리가 나는 흰 종이도 아닌 디지털 종이가 날 마주한다. 노려보는 눈 따윈 없다. 재촉하는 목소리도 없다. 등 떠미는 손 역시 없다. 하지만 왠지 불편하고 초조하다.
안 써지는 날도 있지, 어떻게 항상 잘 써지겠어? 커서를 오른쪽 상단의 엑스 표시에 갖다 댄다. 하지만 여전히 누르기를 망설인다. 마치 책임져야 할 핏덩이를 남의 집 대문 앞에 버려두고 돌아서는 발걸음 같다. 그래서 그것을 다시 등에 들쳐 엎고 마른 바닥을 쓸며 왔다 갔다 한다. 아까보다 더 불편해졌다.
앞부분 몇 줄만 쓰고 닫아둔 글들이 폴더 안에 열 맞춰 서 있다. 모두 죄수의 머그샷처럼 자기 명패를 가슴에 들고 어색한 표정을 짓는다. 그래서 그 표정만큼이나 미지근한 물 한 모금을 삼키며 자판 위에 긴장한 손가락을 얹는다. ‘어느 날 갑자기’로 시작하는 건 진부할까? 한 줄 만에 또 등 뒤를 돌아본다. 그래서 마지막은 ‘그 후로 행복하게 잘 살았답니다’로 끝낼 거니? 하고 비아냥거리기도 한다. 이 촌스러운 작업의 반복은 근본적으로 원래의 내 모습과 닮았다. 이제야 해답에 좀 더 가까워졌다.
소심한 사람들의 특징이다. 무언가 사이에 선을 긋는 일, 이쪽과 저쪽을 구분하는 일, 가야 할 방향을 정하는 일은 여전히 어렵다. 어렸을 때도 다 큰 어른이 되어서도, 아니 오히려 나이를 먹고 나니 더 어렵다. 책임의 무게 탓이다. 그래서였을까. 누가 내게 의견을 물으면 자꾸 어..., 그게..., 하며 무의미한 중간 음을 냈다. 손발이 차가워지고, 얼굴은 금세 목까지 벌게졌다.
인생은 크고 작은 선택들이 이어진 시간이라고 한다. 원하든, 원치 않든 끊임없이 선택하며 살아야 한다. 아침에 울리는 알람 소리에 바로 일어날지, 끄고 좀 더 이불 속에 몸을 파묻을지 선택해야 하고, 아침 식사는 한국식으로 할지, 미국식으로 할지 혹은 건너뛸지 선택해야 한다. 그뿐 아니다. 오늘은 무슨 옷을 입을지, 무슨 신발을 신을지, 한 칸 남은 기름 탱크를 보며 나갈 때 기름을 바로 넣을지, 돌아오며 넣을지조차 선택해야 한다.
글이란 건 이보다 한 단계 더 어려운 선택이다. 글쓰기를 시작했을 때, 내가 가장 어려워했던 질문은 ‘그래서 작가가 이 글을 통해서 하고자 하는 말은 무엇인가요?’, ‘이 글의 주제가 뭐죠?’였다. 난 다시 어...., 그게..., 하며 무의미한 중간 음을 냈다. 졸지에 난 주제도 모르는 인간이 되어버렸다. 글을 쓰기 위해선 어떤 선택이 늘 필요했고, 그 선택을 바깥으로 끄집어낼 나만의 목소리가 필요했다. 하지만 내 머릿속은 항상 동전 몇 개조차 넣지 않은 가난한 주머니 같았다. 갈피를 못 잡을 정도로 난감하고, 초라했다.
글을 쓰기 위해선 반드시 소재와 주제, 단어와 문장 표현 등을 선택해야만 한다. 그 선택들이 이어져 한 편의 글로 완성된다. 그러니까 글 한 편이 인생 한 편과 같단 말도 맞는 말이다. 이 지리멸렬한 글 창을 닫느냐, 마느냐 같은 작업의 반복이 내게 주는 사소한 강박의 불편이다.
그냥 그럴 때가 있다. 그런데 사실, 그냥 그럴 때조차 시공간의 완벽한 논리를 갖는다. 우리가 모르고 지나칠 뿐이다. 아직 설명되지 않는, 이해되지 않는 무엇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우리는 ‘신의 섭리’, ‘운명’ 같은 말로 뭉뚱그려 넘어간다. 하지만 이건 굉장히 중요한 생각의 지점이다. 맹물도 저마다 다른 맛을 가진 것처럼 이 세상 모든 것에 그들의 색을 입히고, 의미를 부여하는 일이다.
어릴 적부터 내가 내었던 의미 없는 중간 음도 나름의 의미가 있지 않았을까. 어쩌면 그건 이쪽과 저쪽 모두를 선택한 것일 수도 있고, 모두 선택하지 않은 것일 수도 있다. 꼭 하나만 선택할 이유는 없으니까. 치마와 바지 사이의 고민은 치마바지 같은 또 다른 형태의 혼종을 만들어 내기도 하고, 삭발과 긴 머리 사이의 고민은 반삭이라는 새로운 유행을 탄생시키기도 하지 않던가. 어쩌면 내 기질에 포함된 결정장애도 내 생각을 딱딱한 틀에 가두지 않으려는 더 강한 선택이 아닐는지.
왜 그냥 그럴 때가 있지 않은가. 지금 선택하지 않기로 선택할 때. 그리고 좀 더 내 선택의 유예기간을 주고 싶을 때. 난 오늘도 단 몇 줄의 족적만을 남긴 채 글 창을 닫는다. 이젠 초조하지도, 불편하지도 않다. 그저 언젠가 쓰고 싶을 때 다시 꺼내어 쓰면 될 일이다. 그리고 매우 촌스럽고, 식상하겠지만 이 모든 선택의 끝은 이렇게 맺고 싶다.
그 후로 행복하게 잘 살았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