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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성경이 말씀하는 용서(15P)
♥ 일생의 무거운 짐, ‘容恕(용서)’의 문제 25-11 ♥
♥ <성령의군대> 선교 후원 ♥
배종부 농협 3560393-047263
배종부 <성령의군대> 지도목사
서울 새성교회(장로교 통합)
서울 노원구 노원로 26가길 25, 코롱상가 3층
010-2940-1717
배종부 목사의 글, 설교, 유튜브 동영상을 보시고 감동이 되시는 분은
너무나 어려운 주의 종들과 고통 당하는 선교사님들이 많음으로,
어려운 개척교회와 열악한 선교사님들을 섬기는 <성령의군대>를 정성껏 후원해 주십시오.
1.容恕(용서)의 문제, 예수 그리스도의 용서 - 2P
2.용서해야 하는가? - 15P
3.어디까지 용서해야 하는가? - 32P
4.용서할 수 없는 인간들 – 47P
5.내가 용서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그를 축복하지 않으실까? - 60P
6.용서하지 않으면, 내게는 무슨 일이 있을까? - 74P
7.시간이 가면 용서가 되는가, 그냥 잊혀지는가? - 83P
8.인생은 끝없는 용서의 과정이다. - 105P
9.한 인간 裵鐘富(배종부) 목사의 容恕(용서) - 117P
10.그래도 생각하면 또 화가 나고, 용서가 되지 않는다. - 140P
11.성경이 말씀하는 용서 - 159P
12.나도 용서 받을 수 없는 인간이었다. - 174P
13.그들도 나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 201P
14.잘못을 빌면, 착한 나는 宜當(의당)히 용서하지! - 215P
15.배종부 목사를 배신한 자들에 대한 성령 하나님의 회개 촉구 편지 지시 – 229P
16.아직도 용서하지 못한 잊혀진 사람들-목사 장로의 갈등의 문제 - 247P
17.“暴力(폭력)을 행하고, 激憤(격분)을 풀고 나면, 감정은 풀리지만, 평생 후회가 된다. 그럴 필요가 없었는데... 하고” - (284P)
18.진정으로 사랑한 만큼, 용서하지 못하게 된다 - 296P
19.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인간들-그래서 살인,이혼,폭력,응징,이별...을 하게 된다 – 316 P
20.역대 잘못한 대통령 들을 전부 용서합니다!? - 331 P
21.잊혀진 것은 容恕(용서)가 아니다. - 365 P
22.자기의 잘못을 깨닫지 못하는 자도, 용서해야 하는가? - 375 P
23.잘못한 家族(가족)을 어디까지 용서할 것인가(비공개 원본,33P)...399 P
23.잘못한 家族(가족)을 어디까지 용서할 것인가(수정 전송본,14P)...432 P
24.그냥 고백하고, 용서를 빌어라 - 446 P
25.容恕(용서)! 그 고난의 대행군에 다시 도전하다 – 458P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8가지 단계
1. 용서란 의지의 한 행동이며, 용서할 마음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
원한을 품는 것은 나의 영과 혼과 몸, 그리고 마음을 파괴 시킨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너희가 서로 돌아 보아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있는가 두려워 하고, 또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고,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러움을 입을까 두려워 하라.(히 12:15)
2. 나에게 상처를 입힌 그 사람을 용서하기 전에는, 하나님께서도 나를 용서하시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마 6:14-15)
마6:14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15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3. 하나님께서 어떠한 용서를 나에게 베푸셨는가를 생각하라. (엡 4:32, 골 3:12-14)
엡4:31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비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32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골3:12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 받는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13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14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4. 나에게 상처를 입힌 그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얼마나 많은 축복을 나에게 주셨는지를 생각한다.
5. 나에게 상처를 입힌 그 사람의 필요는 무엇일까 생각해 본다. 영적, 정서적, 육체적으로 아마 그는 나보다 더 많은 상처가 있는 사람일 것이다.
6. 이제는 용서할 수 있는 초자연적인 힘을 주시도록 하나님께 간구하며, 그를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인다. (롬 5:3-6, 히 11:6)
롬5:3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 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4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5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6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히11:6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7. 말과 행동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그들에게 나타낼 수 있는 기회를 주시도록 하나님께 요청한다. (요일 3:16-18)
16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17누가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
18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8. 그들을 위한 중보기도를 한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축복하시고, 격려하시며, 평강을 주시고,그 들의 모든 쓸 것을 채워 주시도록 기도한다.(마 5:13-16)
13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14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15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16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용서하시는 예수님
마태복음 18장 15절-22절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만일 듣지 않거든 한 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 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증참케 하라.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 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번이라도 할지니라.”
진정한 용서
영국의 의사이며 저술가인 T.브라운(1605~1682)은 용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해 지도록 분노를 품지 말고, 즉시 재처럼 날려 버리라. 당신의 상처 받은 마음에 망각의 커튼을 치라. 하나님께서 벌 주실 것이라는 희망을 품고 원수를 용서하는 것은 완전한 용서가 아니다. 원수를 무조건 용서하고, 하나님께서도 용서를 베풀어 주시기를 기도하는 사람 만이 진정한 자유와 평화를 얻을 수 있다. 당신의 적들을 일말의 여지 없이 전적으로 용서하라. 이것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다.』
우리는 날마다 이렇게 '주기도문'을 외웁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이처럼 거듭되는 자신의 허물을 서로 용서하며, 용서 받으며 살아야 하는 것이 우리 삶의 현실입니다. 그래야만 비로소 진정한 평안과 기쁨과 행복을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시간에는 우리는 왜 용서 받아야 하며 또 용서해야만 하는지, 또 어떻게 용서 받으며 용서하며 살 수 있는지, 말씀을 받고자 합니다.
첫째, 우리는 용서가 필요한 죄인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죄와 실수를 그대로 덮어 두어서는 안됩니다. 상처가 나서 곪았으면 이것을 터뜨려서 고름을 짜내야 새 살이 돋고 우리의 몸이 건강하게 되듯이, 죄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약에 지은 죄를 해결하지 않은 채 그대로 덮어 두게 되면, 우리의 잘못을 변상하거나 돌이킬 수 있는 길이 영영 사라지게 됩니다. 더구나 사람은 '양심'을 품고 사는 존재이기 때문에, 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깊은 자책감에 빠져 괴로움을 당하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친히 “너는 오직 네 죄를 자복하라”(렘 3:13)고 권고하십니다. 죄의 짐을 덜고 빚을 청산하는 길은 솔직하게 모든 사실을 털어 놓는 길 밖에 없는 것입니다. 고백하지 않는 죄는 그대로 남아 있게 되며, 이것은 인생의 커다란 짐이 됩니다. 우리는 마음 속에 감추어 둔 비밀이 잠재의식 속에 깊이 내재해 있다가 여러 가지 병적인 현상으로 표출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되신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해결해 주시기 위하여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려 피 흘려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값을 치러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음 속에 있는 그 어떤 잘못일지라도 주님 앞에 털어 놓고 용서를 빌어야 하며, 나아 가 남에게 잘못한 일이 뉘우쳐지거든 그것을 최대한 변상해 주고 용서 받을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합니다.
둘째,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우리가 죄를 고백하기 이전부터 예수님은 이미 우리의 속성을 잘 아시고 우리의 과거의 죄, 현재의 죄, 미래의 죄까지를 모두 용서해 주셨으며, 직접 실천을 통해 용서란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어느 날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난처하게 하려는 속셈으로 간음 중에 잡힌 여인을 끌고 와서 예수님께 판결을 요구했습니다(요 8:1-11). 모세의 율법대로 하자면, 그 여인을 돌로 쳐서 공개적으로 사형에 처하는 것이 마땅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요 8:7)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그 여인을 돌로 치려고 의기양양하게 달려 왔던 무리들은 하나 둘씩 그 자리를 떠났고, 결국은 예수님과 여인만 남게 되었습니다. 오직 예수님 만이 그 여인에게 돌을 던지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며, 여인을 용서해 주셨습니다. “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요 8:10-11)
예수님께서는 비유를 통해서도 용서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마태복음 18장 23-35절에 보면, 어떤 임금에게 1만 달란트 빚을 탕감 받은 종이 자신에게 100 데나리온 빚진 사람에게 돈을 내놓으라고 협박하며 그를 감옥에 가둔 이야기가 나옵니다.
100 데나리온은 1만 달란트에 비교하면 60만분의 1에 해당하는 돈입니다. 그러자 이 말을 전해 들은 임금은 그에게 베푼 용서를 취소하고 그가 빚을 다 갚을 때까지 그를 감옥에 가두도록 명령하였습니다.
우리가 땅에서 남을 용서하면, 하늘 아버지께서도 우리의 죄를 용서하실 것입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마 18:18)
한편, 용서를 가르치시는 예수님께 베드로는 칭찬 받을 것을 기대하며 이런 질문을 던졌습니다.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마 18:21).
보통 유대인의 교훈에 의하면 세 번까지는 용서해 주라는 가르침이 있었는데, 베드로는 넉넉잡고 '일곱 번'까지 용서해 주겠다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대답은 전혀 뜻밖이었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지니라.”(마 18:22). 용서에는 한정이 없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셋째, 성도는 의인처럼 당당하게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 덕분에 죄인이 아니라, 영원한 의인이 되었습니다(롬 3:23-24).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가 되셨으며,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요 15:7-8) 당당하게 하나님께 구할 것은 구하고, 감사할 것은 감사하며 살아야 합니다.
마귀는 사람에게 다가 와서 죄책감을 심어 주려고 하고, 좌절하고 낙심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죄를 회개하고 용서 받은 우리들은 이제 더 이상 이런 마귀의 속삭임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죄의 유혹이 다가 오고, 낙심이 다가 올 때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당당하게 이를 물리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죽었다가 살았습니다. 마귀의 종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습니다. 이것을 생각할 때 그저 감사, 감사, 감사할 뿐입니다. 더구나 죄를 많이 진 사람일수록 더 많은 용서를 받으며 살 수 밖에 없습니다(눅 7:41-42). 그러므로 자신의 약점과 부족함을 알면 알수록 우리는 그것을 감추려 하기보다는 그로 인해 더 주님께 감사하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넷째, 우리도 남을 용서해야 합니다.
에베소서 4장 32절에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용서 받은 사람으로서 남의 허물도 사랑으로 덮어 주고 용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용서하는 사람은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 있습니다. 용서하는 삶에 평안이 있으며, 기쁨이 있으며, 사랑이 있는 것입니다.
요셉 갈로(J. Gallo)는 이런 기도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었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용서해 주시듯, 우리도 이웃을 용서할 줄 알게 해 주십시오/
잠시라도 마음에 원한을 품는 일 없이 즉시 용서할 줄 알게 해 주십시오/
입으로만 아니라 마음으로부터 모든 것을 용서할 줄 알게 해 주십시오/
조건을 붙이거나 제한을 두지 않고 온전히 용서할 줄 알게 해 주십시오/
한번 용서했으면 결코 지나간 일을 들추어 내지 않고, 모든 것을 물에 흘려 보내듯, 용서할 줄 알게 해 주십시오/…"
진정으로 강한 사람 만이 용서할 수 있으며, 용서할 줄 아는 사람이야말로 용기 있는 사람입니다.
용서란, 주는 것이요(forgive), 완전히 잊어 버리는 것이요(forget), 상대에 대한 원한과 저주를 영원히 포기하는 것이기(forsake) 때문입니다.
우리는 또한 용서하는 사람이 건강하게 산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용서는 나의 분노를 쉬게 하며, 마음을 안정되게 합니다. 그럴 때 우리의 신체는 기능을 최대한 발휘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용서 받은 자들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정직하게 시인하고 회개하여 '의로운 삶'을 지향해 나갈 때, 영생과 축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내가 남을 용서하며 살아 갈 때 마음과 육체와 생활의 건강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를 용서해주신 예수님으로부터 용서를 배워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허물과 죄를 용서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용서 받은 우리들 모두 이제 의인처럼 당당하게 살며, 또 남을 용서하며 살게 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신의 이름으로 신을 배반하는 이들 강남순
내가 가르치는 한 세미나에서 자신을 "무신론자"라고 소개하던 학생이 있었다. 학기 첫 시간에는 학생들이 돌아 가면서 자신을 소개하는 시간이 있는데, 그 학생은 "나는 무신론자이다"라는 말로 자기 소개를 시작했다. 신학대학원의 학생으로 있으면서 자신을 "무신론자"라고 지칭하는 학생을 만나는 것은 참으로 흥미로운 사건이다. 나는 그 학생의 "용감한 자기 선언"을 들으며, 그 과목이 학기 내내 매우 재미있는 세미나가 되겠다는 생각을 속으로 했다. 학생들이 새로운 것들을 발견하는 것을 보는 것은 선생으로 살아 가는 사람들이 가장 보람을 느끼는 일이 아닌가? 나는 그 학생이 지칭하는 "신의 비존재 (무신)"는, 본인은 인식하지 못했을지라도 사실상 니체의 신 죽음의 선언과 유사한 맥락을 가진다고 느꼈다. "신이 죽었다"는 니체의 선언은 "죽었다"는 부분이 아니라 "어떤 신"이 죽었다고 하는 것인가 라는 부문에 촛점을 두어야 한다. 그 학생이 생각하는 "존재하지 않는 신"은 어떤 신일까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면서 그와 한 학기 세미나를 함께 했다. 학기 말이 되면 그러한 유신론, 또는 무신론이라는 종교적 정체성이라는 것이 커다란 의미를 가지는 것이 아님을 그가 인식하게 될 것이라는 나의 예감과 기대는 그대로 맞았다. 그 당시 석사 과정에서 공부하던 그는 후에 나의 조교가 되었고, 지금은 박사 과정에 들어 가 신학/철학 등 다양한 인문학의 경계들을 넘나 들면서 열정적으로 공부를 하게 되었다.
내가 나의 신을 사랑할 때, 나는 무엇을 사랑하는가?
스스로 신앙인이라는 사람들은 "신을 믿고 사랑하는 이들" 이라고 자신들을 지칭한다.
그런데 과연 "신을 사랑하는 것"이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기독교의 "죄의 역사"를 보면 신의 이름으로 무수한 살상, 폭력, 전쟁이 정당화되어 왔으니, 단지 "나는 신/예수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자신의 종교적 정체성의 선언은 사실상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유신론자" 또는 "무신론자"라는 개념도 별로 커다란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 자신을 "유신론자"라고 지칭할 때 무엇보다도 선행되어져야 하는 물음은 그 사람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신"이 과연 어떠한 신인가 하는 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나는 신을 사랑하는가" 라는 물음을 "내가 나의 신을 사랑할 때, 나는 무엇을 사랑하는가?" 로 전환시킨다. "신을 사랑하는가?"라는 물음에는 "예" 또는 "아니오"라는 대답만 가능할 뿐 "어떠한 신" 의 개념을 가지고 있는가, 또는 "신을 사랑한다"는 것의 의미가 구체적인 삶 속에서 어떻게 나타나는가 등 다양하고 복합적인 의미들이 드러 나지 않기 때문이다.
최근 한국교회 목회자들의 행보를 보면서 그들이 "주님"으로 고백하는 예수나 "하나님"은 과연 어떠한 존재인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최근 한국교회의 목회자들을 통한 세 가지 사건들을 보면서, 이러한 각기 다른 사건들은 어찌 보면 한국교회의 자화상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2014년 5월 11일, 신도가 수 만명이 넘는다는 서울 대형교회인 M 교회의 K 목사는 그의 "믿음의 3요소"라는 제목의 설교에서 세월호 침몰에 대하여 언급하면서 "하나님이 공연히 이렇게 침몰시킨 게 아니다. 나라를 침몰하려고 하니 하나님께서 대한민국 그래도 안 되니, 이 어린 학생들이 꽃다운 애들을 침몰시키면서 국민들에게 기회를 주는 것이다." 라고 했다고 한다. 또한 2014년 5월 26일에는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가 K 교회에서 창립준비 총회를 가졌다고 한다. 612명의 목회자가 이 교단에 가입했다고 하는데, 목회자 정년 폐지, 목회자 납세와 WCC(세계교회협의회) 반대, 그리고 목회 세습 허용 등을 골자로 하는 교단창립 선언문을 보니, 참으로 착잡하고 아득한 느낌이 들었다.
한국교회들이 이러다가 교회의 권력을 절대화하기 위하여 지구가 돈다고 주장하는 과학자들까지 종교 재판에 세우고, 면죄부까지 팔던 중세시대로 돌아 가는 것은 아닌가?
5월 15일에는 <한국범죄예방국민운동본부>와 <한국기독교원로목사회>가 공동주최하여 "세월호 추모와 나부터 회초리 기도회" 라는 기도회를 가지면서, 세월호 사고에 대한 채임이 자신들에게 있다면서 원로목회자들이 자신들의 다리에 6대씩을 때리는 "회개식"을 했다고 한다.
이러한 회초리 사건을 어떻게 "신학적/종교적"으로 이해해야 하는가? 이 "회초리 사건"을 보는 다양한 시각이 있겠지만, 나는 그들의 이러한 행위 그 자체가 진실인가 아닌가, 또는 의미가 있는가 없는가 라는 문제로 보는 것은 문제의 본질을 빗나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세월호 참사"라는 분명한 "사회-정치-제도적 문제" 를 "개인적-영적" 문제로 돌연히 전환시키는 것이 가장 심각한 문제라고 본다. 진정 그 <원로목사회>가 자신들이나 교회의 무책임성과 무관심을 "회개" 하고자 한다면, 우선 세월호 참사의 희생자들, 그리고 그 가족들의 아픔과 고통에 동참하고 애도해야 하며, 그러한 참사가 일어난 원인에 대한 구체적인 진상 규명과 책임의 소재를 묻는 목소리들에 연대함으로써, 진정한 "올바른 회개" 를 보여 주어야 한다. 그런데 이들의 "집단적 회개" 는 정작 세월호 희생자나 그 가족들의 고통과 아픔과의 연대의 끈을 홀연히 끊어 버리고 있다는 점에서, 이 원로목사회의 "회초리 사건" 은 심각한 문제를 지닌다.
이러한 행위들은 더 나아 가서 한국 기독교인들/목회자들에게 "신앙인" 이 된다는 것의 의미를 지독히 왜곡시키고 있다. 이들의 회초리를 동반한 "무대에서의 회개" 는 "극적 회개 (theatrical repentance)" 이며, 이들의 회개 모습은 내게 아감벤의 경고를 상기시킨다. 아감벤 (Giorgio Agamben)은 나치의 유대인 학살을 "홀로코스트(Holocaust)" 라든지 "쇼아 (Shoah)" 라고 명명하는 것 자체에 비판적인 문제 제기를 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종교적 명칭을 부여하는 것은 "정치적/윤리적 공간"인 아우슈비츠를 "종교적/신화적 공간"으로 전이시킴으로서 그 본질을 왜곡시키기 때문이다.
"세월호 참사"는 분명히 "정치적-윤리적-구조적 사건"이지 "종교적-영적-개인적 사건"이 아니다. 이러한 왜곡된 전이는 대한민국을 구하기 위하여 "꽃다운 애들을 침몰시키는 신" 을 설교하는 목회자에게 "아멘"으로 응답하는 교회들, 그리고 정년 폐지, 교회 세습 등을 주장하면서 교회나 목회자의 사회적-윤리적 책임과 전적으로 무관한 개인적 권력 확장을 교회의 사명과 모습이라고 하는 목회자들의 모습들 속에서도 각기 다른 모습으로, 그러나 그 본질에서는 매우 유사한 모습으로 남아 있다.
신의 이름으로 신을 배반하는 이들
"신을 사랑한다"는 고백을 한다고 해서 그 사람의 신앙이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 신의 이름으로 신을 배반한 "죄의 역사"를 모든 종교들은 가지고 있지 않은가? 하나님을 또는 예수를 사랑한다는 이들은 어거스틴의 물음, "내가 나의 신을 사랑할 때, 나는 무엇을 사랑하는가?" 를 지속적으로, 철저히 물어야 한다. 그들이 "사랑하는 신"은 혹시 자신들의 권력 확장, 사회-정치적 무관심, 자본주의화 된 승리주의와 성공주의를 조장하고 정당화하는 신은 아닐까. 이러한 진지한 신학적/신앙적 물음이 부재한 "종교적 공간"은 예수의 이름으로 예수를 배반하며, 신의 이름으로 신을 배반하는 지독한 오류를 끊임없이 재생산하게 될 것이다. 이제 한국교회는 그러한 "왜곡된 신"의 죽음을 선언해야 하지 않을까?
이제 더 이상 신의 이름으로 신을 배반하지 않기 위해, 한국목회자/기독인들은 어거스틴의 물음과 진지하게 대면해야 한다.
"내가 나의 신을 사랑할 때, 나는 무엇을 사랑하는가? (What do I love when I love my God?)“
용서하는 마음
마18:21-35절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지니라.”
참으로 위대하다는 것은 용서하는 마음에서 나타납니다.
사도 바울의 생애를 생각해 보십시오. 사도 바울은 완전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마음이 바뀐 후로는 가장 올바른 사람이었다고 생각이 됩니다. 바울은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데 훌륭한 본을 보인 사람입니다. 그는 이렇게 회상하였습니다.
딤후4:14 "구리 장색 알렉산더가 내게 해를 많이 보였으매, 주께서 그 행한 대로 저에게 갚으시리니,"
바울은 현명하시고 정당하신 주님께 기꺼이 심판과 형벌을 맡기고자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압제자의 온갖 박해에도 불구하고, 증오심이나 악한 마음이나, 또는 원한을 마음 속에 품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와는 반대적인 면을 엿볼 수 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자기가 갈고 닦아서 간직한 성품을 지니도록 강조하였습니다. 그 시대 사람들로부터 많은 박해를 받았던 바울은 뭇매를 맞고 고통을 당하였습니다. 바울은 수차 옥에 갇히기도 했습니다. 바울은 회초리와 쇠막대기로 잔등에 200여 대의 매를 맞았습니다. 바울은 돌로도 맞아 죽을 지경까지 이르렀습니다. 세 차례나 파선을 당했습니다. 그래서 바다에서 수 많은 시간을 헤매었습니다. 바울은 도둑들로부터 고통도 당했습니다. 바울은 때로는 추격자를 피하여, 숨기도 했습니다. 바울은 담 위에 걸린 통 속에 피신까지 했습니다.
이러한 바울이 용서하는 마음을 디모데후서 4:16절은 잘 나타 내고 있습니다.
"내가 처음 변명할 때에 나와 함께 한 자가 하나도 없고 다 나를 버렸으나, 저희에게 허물을 돌리지 않기를 원하노라."
‘용서’ 라는 거룩한 성품을 나타낸 또 다른 예를 스데반에게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교회의 재정 일을 맡아보도록 선임된 일곱 집사 중 하나인 스데반은, 신앙심이 강하고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완전한 길을 걸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의 얼굴에서 천사의 얼굴을 보았습니다. 스데반은 사악한 무리들에게 심장을 꿰뚫을 듯한 설교를 한 후, 그를 공격해 온 악인들에게 죽임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성문 밖에 내치고 돌로 칠 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 발 앞에 두니라. 저희가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가로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행7:58-60)"
우리는 완전한 모범을 보이시고, 우리에게 따르라고 명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강인, 친절, 사랑, 용서 등의 훌륭한 본을 보았습니다. 주님은 일생 동안 추악한 인간의 희생물이 되어 왔습니다. 주님은 어린 육아 시절에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 애굽으로 피한 적도 있습니다.
악인들은 주님에게 욕을 퍼붓고, 얼굴에 침을 뱉었습니다. 이 얼마나 역겨운 일이었겠습니까? 그러나 주님은 매우 침착하게 이에 대처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용서하심은 만 인간의 본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그를 버리고 도망을 갔습니다. 이러한 어려운 상황에서 주님은 폭도와 선동자들과 대면하게 되었습니다. 주님은 잔인하고 야수와 같은 폭도들 틈에 홀로 서게 되었습니다. 입에 담지 못할 욕설도 쏟아져 나왔습니다.
예수님에게 있어 매우 성스러웠던 것이나 귀했던 사람, 장소, 상황 등에 대한 온갖 비난과 힐난, 불경스러운 욕설 등이 주님에게도 참기 힘든 상황이었을 것입니다. 심지어 그들은 예수님의 순결한 어머니에게 간음자라고 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이를 참아 내었습니다. 움츠리거나 부인하려거나, 또한 반박하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위증자가 나와서 그에 대해 거짓 증거를 했을 때에도 그들을 꾸짖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왜곡하고 본 뜻을 오해하였지만, 예수님은 조용하였습니다. 당황하는 기색도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오히려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고 가르쳤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뭇매를 맞았습니다. 그는 심한 고통이 따르는 가시관을 썼습니다. 그는 조롱과 조소를 당하였습니다. 그는 자기 백성들로부터 온갖 모욕을 당했습니다. 그는 몸소 십자가를 지고 갈보리 산에 올라 십자가에 못 박혀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는 십자가에 달려 군병과 그를 비난하던 무리를 보시며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저희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다." 라고 말씀하시며 생애를 마치셨습니다.
1. 용서와 복수심
바울이나, 스데반이나, 예수 그리스도라 할지라도 그들이 용서하는 정신을 꾸준히 계발하지 않았다고 하면, 보복하려는 마음을 갖기가 쉬웠을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다른 사람과 화해를 하게 되면 용서했노라고 말을 합니다. 그러나, 실은 계속해서 적의를 품고 있습니다. 상대방을 의심합니다. 상대방의 성실성을 믿지 아니합니다. 이것은 죄입니다.
왜냐하면 일단 화해하고 회개했으면 서로가 용서하고 잊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불화로 허물어진 담을 보수하고 과거에 가졌던 우애를 회복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용서할 수 있으나 잊을 수 없다는 말은 용서할 수 없다는 말을 다르게 표현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타인의 죄된 행위를 잊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들을 끝까지 추적하려는 사람도 있습니다. 자신의 손으로 정의의 칼을 들겠다고 작정했으며, 죄인은 처벌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 사람은 처벌 받아야 마땅합니다." 라는 호소가 있는가 하면, "그 사람이 처벌 받지 않으면 안심할 수가 없습니다." 라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그 사람이 교회에 나오는 한, 나는 절대로 교회에 나가지 않겠다." 라고도 합니다. 복수나 불복이나 원한을 품고 있는 마음의 상태는, 순수하고 매사를 용서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정신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보통 가혹하다고 생각되는 모세의 전도도 이러한 복수를 금하고 있습니다. 시대를 초월해서 적용되는 불멸의 명령을 우리는 시내산과 광야에서 받았습니다.
레위기 19:16-18 "너는 네 백성 중으로 돌아 다니며 사람을 논단하지 말며, 네 이웃을 대적하여 죽을 지경에 이르게 하지 말라. 나는 여호와니라. 너는 네 형제를 마음으로 미워하지 말며, 이웃을 인하여 죄를 당치 않도록 그를 반드시 책선하리라."
오늘날 흔히 볼 수 있는 질투, 증오, 복수와 같은 불협화음 속에서는 용서와 같은 협화음이 치료제의 역할을 합니다. 용서는, 용서해 주는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이 매우 큽니다. 주님의 산상보훈은 복수심을 갖지 않는 방법을 제시하여 줍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로마서 12:17-19 "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2. 용서와 비판 심리
주께서 부드러운 음성으로 한 여인을 죄인으로 몰아 세운 사람들을 쫓아 버렸습니다. 요한복음 8:7 "저희가 묻기를 마지 아니하는 자라. 이에 일어나 가라사대 너희 중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
성경은 함부로 비난하는 일을 엄격히 금하고 있습니다. 주님 자신도 이러한 사실을 분명히 강조하셨습니다.
마태복음 7:1-2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주께서는 우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우리를 비판하십니다. 우리가 거칠게 되면 거친 대접을 받습니다. 우리를 해친 사람을 자비로 대하면, 그도 또한 우리의 허물을 자비로 대해 줄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용서하지 않는다고 하면 그는 우리를 죄 가운데서 헤매게 하실 것입니다.
남을 비판하고 싶은 사람은 바울이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한 말을 기억하여야 합니다. 로마서 2:1-3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무론 누구든지 네가 핑계치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이런 일을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판단이 진리대로 되는 줄 우리가 아노라. 이런 일을 행하는 자를 판단하고도 같은 일을 행하는 사람아. 네가 하나님의 판단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
비판하지 말라고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원리는 단순한 행동 규제가 아니라, 하루 하루를 살아 가면서 요구되는 인생 전반에 걸친 교훈입니다.
그는 우리에게 우리의 죄를 씻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다른 사람의 약점이나 허물을 들추어 낼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7:3-4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이것은 마음 속의 의심을 깨끗이 풀어 줍니다. 들보와 티의 비교가 모든 의문을 대답해 줍니다. 티는 눈에도 잘 보이지 않는 적은 것이나, 들보란 건물의 무거운 지붕을 받쳐 주고 있는 큰 통나무와 쇠붙이인 것입니다. 사람이 들보처럼 큰 약점이나 죄를 갖고 있으면서, 그 형제의 사소한 약점을 과장하며, 자신의 어렵고 난처한 입장을 잊으려고 하는 것은 큰 잘못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자신의 결점을 비춰 주는 거울을 보지 못하고 타인의 허물만 살피려고 할 때, 우리의 통찰력은 완전히 장막 속에 가리우게 됩니다.
우리가 주님의 가르침을 따를 때, 우리는 자신을 온전히 하기 위해서 매우 바쁘게 되며ㅡ 다른 사람의 허물이 대단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사람의 약점을 최소로 줄이고 자기의 미덕을 증진시키는 아름다운 습관을 스스로 길러야 합니다.
3. 용서하지 않은 마음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않으려는 사람은 자신이 건너야 할 다리를 파괴하는 것과 다름 없습니다. 본문 말씀에 기록되어 있듯이, 이것은 주인에게 용서 받기를 간청하여 용서 받았으나, 자기에게 용서를 간청한 사람을 용서하지 않은 못된 종의 마지막과도 같습니다.
용서하지 않은 마음에는 흔히 비통함이나 증오심이 수반됩니다. 용서하지 않는 마음 속에 이러한 것을 지니고 있는 사람에게는 독약이 됩니다. 그것은 질투를 낳습니다.
요한 1서 3:15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일반적으로 시기를 당하는 사람은 그에 대해서 품은 적의가 얼마나 쓰라린 것인지를 모릅니다. 그는 잠도 전과 같이 달게 잡니다. 그는 평온함도 지닐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질투하는 자는 선량한 사람의 틈에 끼지도 못하고, 마음을 조이게 되며, 스스로를 불행한 자로 만들어 버립니다. 대체로 그러한 사람은, 자신의 문제나, 편견이나 증오심을 남에게 알리고자 함으로 이웃 사람들로부터 환영을 받지 못합니다. 그것은 결국 지겨운 일이 됩니다. 사람들도 그의 말에 싫증을 느끼게 됩니다. 불평자, 비평자, 질투자가 나타날 때 사람들은 그들을 피하여 상대하기를 싫어합니다.
결국 우리의 사명은 사람을 해치거나 파괴하는 것에 있지 않고, 구원하는 데 있습니다. 사람들이 대인 관계에 있어서 항상 분별력과 사교적인 능력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것은 참으로 불행한 일입니다. 때때로 가장 훌륭한 사람, 심지어 가장 훌륭한 교회 지도자라고 할지라도 좋은 의도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뜻 밖에 과오를 범하거나 해를 끼치는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말을 들으며 그들의 행동을 눈으로는 볼 수 있으나, 그들이 생각하는 바와 마음 속에 지니고 있는 바는 정확하게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다른 사람의 내면의 의도를 비평하고, 우리 나름대로 해석하려고 할 때, 잘못을 범하게 됩니다.
용서란 가정이나 교회에 조화와 사랑을 가져다 주는 기적과 같은 요소입니다. 용서가 없을 때, 분쟁이 생깁니다. 용서가 없을 때, 오해가 생깁니다. 용서가 없을 때,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이해와 용서가 없을 때, 분란이 일어납니다. 조화를 잃게 됩니다. 가정이나 교회에 불화를 낳게 합니다. 그러나, 반면에 용서와 이해가 있을 때 복음의 정신과 조화를 이룹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적은 종으로 일하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가 자신에게 죄를 용서 받고 하나님 앞에 흠 없이 서기 위해서 지녀야 할 정신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다른 사람을 용서하고 이해하며 살아 가는 백성이 되기를 바랍니다.
제1차 세계대전(1914.7.28-1918.11.11)을 일으켰던 독일은 패전 후 연합국들에게 피해 보상을 해 주기로 했지만, 사실 전쟁 피해는 연합국만 본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패전국가 독일이 더 큰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연합국은 독일에게 재기의 기회를 주지 않으려고 독일의 많은 영토와 함께 식민지에서 수탈하듯, 막대한 배상금을 요구해 왔다.
그 배상금이 너무 엄청난 액수여서 독인인들은 몇 백년이 지나도 갚지 못할 정도였다. 그러자 독일인들은 적개심에 불타 올랐다. 빚은 커녕 한결같이 복수를 염원하게 되었다. 그들은 1차 대전이 종전된 것이 아니라 잠시 휴전되었을 뿐이라며, 독일의 명예 회복을 위해 전쟁을 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히틀러가 등장하여 득세할 수 있었던 것이다. 독일 국민들은 히틀러만이 독일을 살릴 수 있다고 굳게 믿어, 그의 무리한 요구에도 순응했다. 그리하여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것이다. 연합국들이 독일과의 공존 공생을 생각지 않았던 데서 비극이 시작된 것이다. 고양이도 쥐를 잡을 때는 막다른 곳에 몰지 않는다. 도망치다가 더 이상 숨을 데가 없다는 것을 알면 쥐도 고양이에게 죽을 힘을 다해 덤비기 때문이다. 죽기 살기로 덤비기 보다, 도망치는데 훨씬 힘쓰도록 만드는 것이다.
남편과 아내, 두살바기 딸이 캠핑용 차를 빌려 여행을 떠났다. 그런데 한밤중에 네 명의 멕시코인 강도들이 쳐들어왔다.
“돈 내놔! 어서 돈 내놔!” 흉기를 들었고, 그 중 한 명은 권총을 남편의 목에 갖다 댔다. 바닥에 엎어져 있던 남편은 간절하게 기도했다. “우리 가족이 무사히 살아 나게 해 주세요.” 그때 시편 23장에 있는 성경 구절이 떠올랐다.
“너희는 네 적들이 있는 앞에 식탁을 준비하라.” 남편은 망설였다. “난 그럴 수 없어.” 그러나 다시 생각을 고쳐 먹었다. “그래, 이 애들도 하나님의 자녀야. 순진한 어린애 들이야.”
남편은 강도들에게 말을 걸었다. “이봐요, 정말 좋은 물건은 놓치고 있어요. 저기 소파에 있는 카메라를 가져 가요. 그리고 외투 속에 워크 맨도 들어 있어요.”
강도들은 순간 멈칫했다. 그리고 냉장고에서 사과를 꺼내 주었다. 강도들은 조금 동요하는 듯 싶더니, 사과를 먹었다. 선물과 먹을 것까지 받은 셈이다.
강도들은 곧 차를 몰고 자신들의 마을로 가족을 끌고 갔다. 그리고 차에서 내리면서 신분증과 신용카드, 그리고 약간의 돈을 돌려 주었다. “미안해요. 우리는 모두 가난합니다. 우리 아버지들도 가난하구요. 우린 이렇게 밖에 돈을 벌 수가 없어요. 미안합니다. 당신은 좋은 사람이에요. 아디오스.(안녕) 잘 가세요.”
그들은 연거푸 사과를 했다.
‘아디오스’란 본래 ‘신과 함께 하기를’ 이라는 뜻이다.
죄 용서
종교개혁자 루터가 로마서를 읽다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만 죄사함을 받는다.’ 는 이 놀라운 진리를 깨달은 후에도, 죄책감은 망령처럼 그의 마음을 계속 약탈하고 괴롭히고 있었습니다.
말씀을 묵상하다가 하루는 잠이 들었습니다. 꿈에 사단이 나타나, 루터가 범한 모든 죄를 조목 조목 쓰기 시작했습니다. 죄를 하나 하나 쓰면서 "네가 이러고도 용서 받은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라고 계속 죄를 열거합니다.
이 때 갑자기 자기가 본 성경 구절이 생각 났습니다.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자유케 하실 것이요,"
이 말씀을 자기를 번민케 하던 죄를 향해서 던지자 말자, 즉시 마귀가 떠납니다. 루터는 소스라치게 놀라서 깨어 났습니다. 그 날 일기에 이렇게 기록합니다.
"나는 이제 깨끗함을 느낀다."
죄는 슬픔을, 용서는 기쁨을 가져 온다
견신례를 위한 교리책에 "죄는 슬픔 가져 온다." 라는 구절이 있다.
주일학교 토의 때에 반에서 가장 어린 샤론이 말했다.
"나는 죄가 어떻게 슬픔을 가져 오는지 알고 있어요. 나는 어머니의 접시 한 개를 깼는데, 그것은 우리들이 손도 못 대게 되어 있는 것이었어요. 나는 겁이 나서 어머니께 말씀을 못 드렸어요. 그러나 내가 학교에 간 후, 어머니께서 그것을 아시고 내 여동생을 꾸짖으셨어요. 내가 집을 돌아 왔을 때 내 여동생은 야단을 맞은 일로 슬퍼하고 있었고, 나는 그 애에게 참 미안했습니다. 나는 어머니께 내가 그것을 깼다고 말하면서, 울어 버렸어요. 그러나 어머니는 우리 둘을 안아 주셨고, 우리는 모두 다시 즐거워졌습니다."
어머니와 여동생은 둘 다 샤론을 용서하였다. 그들의 용서에는 단지 몇 마디 말이 필요했다. 하나님의 용서를 바랄 때, 말 많은 기도가 필요치는 않다.
자신에 대한 용서
한 의사가 정확한 진단을 내리지 못해, 환자를 죽게 했습니다. 이 때부터 그는 자신을 정죄하고 학대했습니다. 그는 우울증에 걸려 절망하다 끝내 식음을 전폐하고 두문불출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가족들과도 잘 만나지 않고 비탄에 잠겨 자학하다, 아예 자리에 눕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잘 믿는 이 분의 조카 딸이 찾아 와 복음을 전하며 소망을 주었습니다. 이 조카 딸은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죄를 용서하시고,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기까지 하셨으니, 그 사랑을 받아 들이세요.] 라고 간곡하게 전도했습니다.
이 때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이 의사는 감화를 받아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했습니다. 그러자 자신을 용서할 수 있게 되었고, 이 체험을 성장의 동기로 삼아 전보다 더 실력 있는 의사요, 성숙한 인격을 갖춘 신앙인이 되었습니다.
오늘날 수 많은 사람들이 자기를 용서하지 못하는 가운데, 음울과 좌절과 열등의식과 자기학대를 하며 살아 가고 있습니다. 예수를 통해 자기를 용서하는 사람 만이 자신을 사랑할 수 있고, 인생의 의미와 기쁨을 맛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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