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연
-제주 출생
-한라산문학동인회
-제주작가회의
-E-mail : somban@hanmail.net
류천
-경남 산청 출생.
-경상대학교 국어교육과, 동대학교 국어국문과 석사
-남가람문학회 시 창작 강사
-천상병문학제 추진위원장
-이형기기념사업회 부회장
-E-mail : ryujunyul@hanmail.net
세이렌 외 3편
- 뱀의 발성
김혜연
그림자를 삼킨다
그림자가 목소리로 만들어졌다는 걸 말해줄 수 없다
목구멍을 모범적 표정들이 막는다
나의 발성법은 똬리, 를 틀 수 없다
종種을 묻는다면
그림자를 뱉을까 똬리를 틀까
내 노래를 들어줘 멋대로 흘러드는 네 운명을 뱉게 해줘 모든 것의 시작인 귀들을 핥게 해줘 뜨거워지는 네 혈관에 파고들 수 있게 해줘 왜곡하는 눈동자를 삼키게 해줘 돛대에 묶인 너를 풀어줘
예감한 당신이 나를 힐끔거린다
빈칸에 대다수의 분위기를 채우시오
뱀이냐 묻기 전에
귀신이냐 묻기 전에
바벨탑 근처는 가 본 적도 없습니다
사과는 도대체 어떻게 따는 겁니까
미쳐 날뛰며 바다로 뛰어들어줘 검은 입속에서 후회로 팔딱거릴 비명에 맞춰 발톱이 부서지도록 춤을 추게 해줘 왼손에 사과를 쥐고 모든 날을 깨물게 해줘 쓸데없이 길게 존재하지 않게 해줘 부리가 부러지고 머리가 으깨어 죽게 해줘 묻지 말고 내 노래를 들어줘
말이 죽었는데 목만 남는 건 억울하다
억울은 모두에게 어울린다
문을 닫고 접경이 되고
흘러드는 그림자를 조금씩 모아둔다
누구냐 묻기 전에
무간無間에서 말라가기 전에
밤의 도마
배가 불러와요 고래를 삼킨 탓인지 칼을 삼킨 탓인지 두 발이 보이지 않아 둥둥 떠다녀요 죽어가는 것들의 악취가 피어나요 갓 빠져나온 영혼들은 늙은 아기가 되어 새벽의 골목을 기어 다녀요 새벽은 촉촉하고 아무렇지 않게 풀냄새를 풍겨요 죽음이 껍질을 벗는 동안엔 누구라도 너그러워져요 노란 불빛 아래 칼이 많아요 쌓여가는 것들에서 핏물이 흐르고 노란 냄비에선 보글보글 몸 없는 대가리들이 익어가요 노랑은 따뜻하고 칼은 서러운 것들을 베고 나는 배가 불러와요 쌓인 눈알들이 마지막으로 바라본 것은 불빛이었을까요 나였을까요 나는 배가 불러와요 배를 도마에 붙이고 두근거리는 심장의 너울을 견디며 칼을 휘둘러요 사람들은 똑같은 말을 반복해요 새로운 말이 생기면 깔깔대며 그 말이 죽을 때까지 그 말만 해대요 다리가 부풀고 손가락이 부풀고 죽은 말들이 둥둥 떠다녀요 장어는 못에 대가리가 박힌 채 꿈틀대요 배를 가르자 고래들이 쏟아져 나오고 나는 눈알들이 마지막으로 바라본 것을 불러보고 싶어요 깊은 바다의 노랫소리가 들려요 모든 말이 죽어버린 나는 머리만 남겨져요
고양이 버스
내가 아직 반죽 덩어리였을 때
한 가지 무게의 웃음만 보았을 때
손가락 대신 꼬리가 돋았으면 했다
쉽게 엉덩이를 보이고
납작한 울음을
빈 잠으로 대신했으면 했다
추워서 버스를 탔는데
행선지가 없음을 누군가 알 것 같아
더 작거나 더 크지 못한 나는
흐물거리다 쏟아져버리지 않도록
발끝을 세웠다
고양이 버스는 종점이 없어
잠들 수 있었는데
드러난 나는 더 이상
고양이 버스를 볼 수 없어
움츠러들었다
나는 내가 된 뒤로
킁킁 냄새를 맡으며
두리번거리게 되었다
밤의 맛
어떤 밤은 회를 씹는 맛이야
오지 않는 내일이 질겅거려
비늘 없는 고통을 분류하다 보면
같은 지점에선 같은 음이 들려
난 포말 같은 노래를 뻐끔거려
밤의 직전을 닮은 나의 골목은
보호색이 완성되지 않아
낡은 어둠을 쳐 놓지
나의 가시는 내 어둠만을 찌르지
생략 가능한 시간은
기척이 마르지 않는 불안
어쩌면 나는 몇 번을 용서받은 건지도 몰라
날 것을 오염시키듯
갓 태어난 시간을
나의 밤들은 얼른 껴입고 주머니에 숨기고
입안에 욱여넣어
말랑이던 오후
기다림을 소곤대던 발톱
골목에 밴 안전한 거짓말, 그 맛
길어지는 발목은 계속 잃어버리는데
골목은 머뭇머뭇 탁해져 가는데
수상소감/
김혜연
낡고 커다란 식탁 아래가 제 방이었습니다. 곰팡이가 핀 벽 쪽으로 헌 책방에서 사 모은, 사촌이 읽지 않아 받아 온 책들을 겹겹이 쌓고 늦은 밤까지 손전등으로 비춰 읽으며 아늑한 동굴 같은 그 곳에서 공상으로 잠을 대신하곤 했습니다. 그 시절, 집으로 돌아가는 골목은 길고 캄캄해 종종 날개를 꿈꿨습니다. 하지만 누군가의 자궁을 찢고 나온 우리들이기에 완전히 날아가 버릴 수 없다는 것과 그것이 사랑이란 단어와 생김이 많이 다른 쌍둥이 같은 것임을 느낍니다. 살아가기 위해 지나간 죽음에 매일을 덧칠하고 밤을 견디기 위해 낮을 웃습니다. 그럼에도 이 生을 사랑하게 된 건 가족들과 쓰기 덕분입니다. 쓰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아주 가까이에서 낮고 선한 눈빛으로 바라보기 위해 매 순간 노력하겠습니다. 여전히 미약한 저의 글쓰기는 미끼가 풍부한 낚시질에 지나지 않음을 알고 있습니다. 손목에는 힘이 부족하고 낚싯줄을 드리운 후 지난한 기다림이 종종 고통이며 조류에 흔들리다 줄이 끊어지기 일쑤입니다. 그럼에도 제 앞의 온통 까만 바다는 훨씬 깊고 아름답다는 것을 분명하게 느낍니다. 밤바다에서 서성거리는 저를 하늘에 계신 부모님이 더 이상 슬퍼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시인이라는 멋진 낚시꾼이 되어야하는 기회를 얻었습니다. 전신의 힘을 기르고 온 마음으로 활자와 행간을 사랑해 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늘 새벽의 여명처럼 그 자리에 있어주는 당신과 아이들, 하늘아래 우리뿐인 동생들, 벗들에게 감사를 전합니다. 저에 대한 조금 덜 걱정스런 시간들과 앞으로 만들어갈 문장들로 보답하고자 애쓰겠습니다.
운석 외 3편
류천
푸른 이끼가 새치처럼 숨어있는 돌담
그림자 속에 얼굴을 드러내는 초록이 있다 그 틈새 꽃과 잎을 구분할 수 없는 조그만 초록이 있다
언제 자릴 잡았는지 아무도 모를 일
돌담 어디에도 어쩔 수 없는 무관심만 존재할 뿐
보이는 건 어둠 뿐
슬픈 꽃향기가 될 줄 모를 일
어디서 날려 온 씨앗인 줄 모를 일
떨어지는 별빛이 채 스며들기도 전에
몇 마디 그림자가 뚝 떨어지는
길 하나 만들고 있는 돌담 우리는 저녁마다 슬픔의 돌담을 지나쳤다 꽃과 잎을 구분할 수 없는 이리저리 세속에 찌든 몸
어디서 왔을까
까닭 모를 슬픔이 내 곁으로 다가왔다
방금 떨어진 듯 생과 죽음이 뒤섞인 별빛이 게걸스럽게 핥는 슬픈 그림자
네가 꽃 피울 수 있는 자리는 어디에도 없다 더 이상 너는 나의 것이 될 수 없다
별빛이 씻기고 벗겨주고 매만짐 속에
어여쁜 꽃향기가 될 줄 알았지만
너는 내 그림자 일 뿐이다
기시감
1
꿈길이다
내 가슴의 절벽 아래 두 개의 강이 물결 출렁이며 합류하는 곳
덕산일까
어디일까
가파른 층계 끝 만자卍字 새겨진 아스라하게 솟은 첨탑기둥
탑 형식을 본떠 세운 조그만 사원이 내 가슴 속에 있다
2
거리에는
더덕을 뿌리 채 들고 있는 한 여인의 미소,
낯선 이방인에게 손 흔드는 어린 꼬마들의 눈빛,
감잎 팔랑거리는 거리
어지럽게 돌아가는 노랑바람개비
이 낯익은 곳은 어디일까
덕산일까
3
눈目 이 그려진 액자 앞에 서 있다
눈이 무엇을 상징하는지, 눈이 믿음의 대상이 되는지
커다란 향로와 불꽃 날름거리며 타오르는 두 개의 길이 있다
어느 것을 선택할까
액자 속에 든 커다란 눈 그림에서 뻗어 나오는 강렬한 백색안광
왼쪽 길을 걸었다
끓는 국밥 솥을 바라보며 입맛을 다시고 있는 덕산 장터의
내 어릴 적 나를 보고 있다
4
내 속마음 들여다보는 듯 빛나는 눈빛에 압도당한 나는.
영암사지
폐허의 영암사는 앙상한 X선이 지나간 자리
검은 몸통과 허연 흉곽만 보이는 금당金堂 에워싼 도량이다
온 사방으로 바람 한 줄기마저 찍히는
먼지를 흔들어대는 장면마다 근심을 더했다가 빼는
풍경소리
숨을 쉰다 내장이 엮어 있는
사진 속에는 단순한 고유명사만 바람에 뒹군다
스님 오르내리던 층계와 축대에도 별빛이 미리와 염불하고
그 염불소리 자막으로 처리되는 영암사
누구의
상처 하나
불경 하나
기록 하나 더해지는 X선, 매장된 형상들
사자석등의 궁둥이에도 백일몽을 꾸는 어둠이 내리깔린다
별들이 검해지는
이제 잠들 시간이다
지금 내 흉곽엔 폐사지의 내장이 투사되고 있다
검은 실루엣으로
상무주上無住
하늘에 매달려 있는 건지
대지에서 솟아나 앉아 있는 건지
억겁의 세월 간직한 능선이 눈앞에 펼쳐진다
천지의 기운 체감하고 하늘의 소리 들으려거든 상무주암에 가라 한다
불법의 세계 드러내며 뻗어 있는 지리산 수많은 봉우리 바르게 읽으려거든 상무주암에 오르라 한다
부처의 경지 들려거든 지리산 능선 마주 보는 상무주암 바위에 앉으라 한다
선이란 고요한 곳에도 있지 않고 시끄러운 곳에도 있지 않다는 고승의 심오한 말 귓전에 맴도는데
번뇌 내려놓으려 오르는 상무주암 발걸음,
속세의 오욕심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다
중무주는 고사하고 하무주조차 이르지 못한 속인俗人
상무주 경계에 이르러 오른다
땀방울 훔치며 올라 상무주암 선승에게 한 경지 들으려 했으나
선정 마치고 구름 타고 지리산 능선 거니는지
보이지 않는다
당선 소감/
류천
시인의 옷을 입어도 몸에 맞을 지 고심을 거듭하다가 옷을 껴입게 되었습니다.
‘시와 경계’에서 시인이란 옷을 입혀 주어 시원치 못한데도 시의 길로 들어서 보라는 격려로 받아들이겠습니다.
시인으로서의 길을 가게 해 주신 편집위원님과 심사위원님께 감사의 인사드립니다.
젊은 시절부터 나이가 들도록 시의 언저리에서 맴돌며 국외자 노릇을 해 왔습니다. 대학 4년 동안 ‘전원문학’이란 문학동아리에서의 활동 영향이 아닌가 합니다.
문학 동아리에서 시를 써서 매월 합평회에서 당시 내가 쓴 시가 시 같지 않아 보였습니다. 선배로부터 혹평을 기혹하게 듣고 나면 시 쓸 의욕이 나지 않았습니다.
질책을 받은 후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내용의 시를 습작하는 꼼수를 부렸는데 희한하게 질책을 크게 받지 않았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이미지와 상상력, 시적체험을 붙잡아야 하는데 이상한 방향으로 빠져들고 말았습니다. 대학 졸업 후 시 습작은 엄두를 내지 못하여 시는 나로부터 멀어져 버렸습니다.
2003년부터 2017년까지 ‘남가람문학회’에서 시 창작 지도를 하며, 십여 명이 시인으로 등단하는데 도움을 보탰습니다. 나 스스로 시인이 되고 싶은 마음을 갖고 있지 않았지만 시 흡사한 ‘관觀’이란 글을 20여 년 쓰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시도 수필도 아닌 대체로 짧은 글을 연작 형태로 써 오는 중, 은사이신 강희근 선생님과 박우담 시인의 권유로 늦게야 ‘시와 경계’에 응모하게 되었습니다. 과분하게 뽑아 주어 시인의 옷을 입게 되었습니다.
글을 쓴다는 것은 어렵고 힘든 일임을 알고 있기에 이참에 배움의 자세로 삼라만상을 따뜻한 눈으로 바라보며, 시가 되 든 안 되든 성의를 다하여 써 보려고 합니다.
길을 열어 준 ‘시와 경계’ 관계자님께 감사 인사 올립니다.
심사평/
광활한 상상력과 심연
걸어 다니는 1인 미디어 시대에 마음만 먹으면 언제 어디서든 누구라도 SNS를 통해서 세계에 발언할 수 있다. 그것이 만인의 공감이라도 얻으면 세계도 바꿀 수도 있는 놀라운 시대가 도래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구나 대한민국의 시인으로서 발언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김혜연 류천 두 분은 본지의 신인 공모라는 어려운 관문을 통과해서 시인으로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되었다.
김혜연의 「세이렌」 외 3편은 한결같이 광활한 상상력과 판타지의 신비감으로 아우라를 거느리고 있다. 그리이스 신화의 오디세우스는 세이렌이 아름다운 노랫소리로 유혹하여 파멸시키는 것에 대응하여 배에 몸을 묶어 두었다. 이렇듯 김혜연의 「세이렌」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세이렌’을 모티브로 하면서도 창세기 뱀의 유혹과 이브의 사과, 바벨탑의 욕망 구조, 그리고 그림자로 표상되는 융의 심층심리와 ‘무간無間’이 환기하는 불교적 상상력 등으로 그리스 신화의 세이렌을 재해석하며 시인의 시적 의도를 투영시켜 오늘의 독특한 개인 신화로 빚어낸 것이다.
「고양이 버스」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 ‘이웃집 토토로’의 고양이버스의 환유와 문화적 상징을 끌어와 보여주고 「밤의 도마」와 「밤의 맛」은 와이드 스케일의 의인화 등으로 김혜연 특유의 시법을 담지하고 있음을 알게 한다.
류천의 「운석」 외 3편은 길 위의 구도자로서 존재의 심연을 응시하며 생의 의미를 궁구한다. 「운석」의 ‘초록’은 무관심의 대상이다. 돌담 어디에도 그것을 주목하는 이는 없고 보이는 건 어둠뿐이다. 초록은 어디서 날려 온 씨앗일까. 제목 「운석」의 환유성을 주목해야 한다. 운석은 하늘에서 추락한 별의 잔해이니 이 시에서는 존재의 불온성과 비극이 투영되어 나타난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씨앗의 초록, 그리고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궁구하며 돌담길을 걷는 화자는 결국 우주의 운석이다. 초록과 운석과 화자의 서정적 동일성은 던져진 존재자로서의 근원적 슬픔을 환기한다.
「기시감」에는 실존으로서의 ‘두 개의 강’, ‘두 개의 길’이 놓여 있다. 그래서 분열하는 자아와 갈등하는 자아가 찾아가는 곳은 사찰이다. 「영암사지」에서는 화자의 흉곽에 폐사지의 내장을 투사하고. 「상무주上無住」에서는 본격 구도의 길을 걷는다.
김혜연 류천 두 시인은 각자 개성적인 색깔을 확보하며 나름의 시적 행보를 분명히 하고 있다. 부단한 노력과 열정으로 일가를 이루기를 기원하며 두 분의 당선을 축하드린다.
심사평: 이상옥(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