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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쟝켈레1959앙리베16L03C
앙리 벩송(Henri Bergson, 1959)
쟝겔레비치(Vladimir Jankélévitch, 1903-1985), PUF, 증보판 1959(초 1931), P. 300.
제2장 자유 Liberté 28
제3절 자유로운 현실태[자유 작동] L‘acte libre 59
어떤 부분에서도 설명이라는 우상은 자유와 관계있는 물음들에서와 마찬가지로 해결할 없는 난문제들을 솟아나게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아마도 어떤 부분에서도 설명한다는 근심은 그것의 진실한 본성과 그것의 회고적 범위를 더 이상 배반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설명(l'explication)은 설명해야할 사물들에 대해 정확하게 공식적이지 못하다. 설명은 사건들의 경험적 역사 대신에 현상들의 지성적 역사를 대체한다. 그리고 후자가 전자를 재구성하기에 앞서서 전적으로 이야기(구두서술)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기다려야만 한다. 구술(le récit)을 설명과 대립시키는 것, 그것은 구술에서는 전기 작가나 화자(le narrateur)가 관례적으로 항상 흘러가는 기괴한 연대기에 동시대인들 이게 하는데, 이에 반하여 “설명”에서는 도덕론자나 역사가가 이미 흘러간 연대기에 허구적으로 그 후배가 되게 하는데 있다. 회고성의 시각에 의해 왜곡된 자유재량(le libre arbitre 자유의지)란 무엇인가? 자유로운 행위 동안에 그 자유(la liberté)란 무엇인가?
1. 전통적 정신주의는 우리에게 자유로운 의지적 작동으로부터 오로지 책에서나 얻어지는 정식을 유산으로 남겼다. 이 정식에 대한 비판은 특히 블롱델(Charles Blondel, 1876-1939)에 의해 여러 번 비판되었다. 이것이 틀림없이 이렇게 사람들이 책들 속에서 원하는 것이다. 아마도 의욕적인 풍자의 검토는 진지하게 원하는 자유에 관하여 간접적으로 빛을 던져 줄 것이다. 사람들이 알고 있는 대로 개론서들은 의욕(la volition) 속에서 4가지 연속적 계기들을 구별하는데, 이 4가지를 개론서에서는 개념작업, 숙고, 결단, 실행이라 불린다. 우선 이 작업들 사이에 도입된 그러한 칸막이(세분화) 작업이 - 사람들은 이 네 가지 작업들을 미리 공통분모가 없으며 실체적으로 구별되는 것으로 가정하지만 - 얼마나 불합리하고 임의적인가를 제시해야만 하는가? 특히 우리는 의욕-표본(모델)의 뿌리에서 벩송주의 전체가 싸워왔던 고집스런 편견을 인정한다. 그래서 정신은, 일화들의 생생한 것에 관해서 구체적인 내재성을 파악하는 대신에, 자유 작동이 모든 심적 일화들(에피소드들)을 풀어내었던 것을 기다린다. 이렇게 사람들은 의지의 뼈대를 얻는다. 그 뼈대는 아마도 볼프(Caspar Friedrich Wolff, 1734–1794)의 심리학에 나오는 이상적인 호문쿨루스(homunculus)에 속하지, 원하고 행위하는 실재적 개체에 속하는 것은 아니다. 이런 이유로 통속적 실체론은 숙고가 앞서고, 그리고 해결을 준비하는 것을, 마치 해결이 되기 앞서 예를 들어 실행이 이루어지는 것처럼, 전심전력으로 원한다. 그리고 그러한 것은 이러한데, “논리적으로” 사람들이 결정하기에 앞서 마땅히 주저해야 하기 때문이고, [자유] 작동이 실재적이기 앞서서 마땅히 가능해야 하기 때문이며, 의욕이 제작과정에 마땅히 닮아야 하기 때문인데, 이 제작과정에서 [자유] 작동은 잠재적 또는 숙고된 현존으로부터 현실적 또는 단호한 현존으로 이행하면서 조각들에 의해 구축되어 있다. 그러나 반대로 행동에서 진실로 동시적인 경험은, 사람들이 해결하기에 앞서서라기보다 결심한 후에 숙고한다는 것을 증명한다. 이런 것은 불합리한 것은 나타났다. 그러나 또한 “사후”(postume)에 숙고의 무용성은 사색적 지성의 무관심(le désintéressement)을 증거 한다. 이 사변적 지성은 역학적인 지성의 취향을 만족시키기 위하여, 우리의 모든 삶을 기꺼이 논리화할 것이다. 사람들은 도처에서 제작작업의 질서를 탐구하는 덕분에, 기술의 질서는 다시 말하면 입헌적인[법칙적인] 관성의 질서인 “유용한” 질서는, 너무 늦었을 때라고 하더라도, 그것을[기술 질서를] 재구성하려고 그것을 훈련[단련]시켰다. 이런 이유로 모든 것은, 마치 여러 주저함들의 순간이 어느 정로는 하나의 작은 무의식적 희극(le commédie)일 뿐인 것처럼, 이렇게 일어났기 때문이다. 우리가 우리자신에게 무의식적 희극의 역할을 스스로 하는데, 지성을 가지고 규칙으로 만들기 위하여 그리고 회고적으로 결단을 합법화하기 위하여 이며, 이리하여 결심은 숙고과정에서 매우 자주 먼저 형성 되었다. 결심은 추상적 평결에 따라 심사과정을 실행하기는커녕, 그 내부 안에서 숙고과정을 지배한다. 그리고 사실상 준엄한 의식의 검토는, 의지가 왜(Pourquoi)라는 질문에 왜냐하면(Parce-que)이라고 대답함이 없이, 기원적으로 결단했다는 것을 우리에게 제시한다. 이데올로기적인 동기들은 원인의 필요들을 위하여 발명되었고, 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실재적 품행을 우리가 차후에 규칙으로 만든 이상적 시나리오와 혼동한다. 우리는, 어느 정도로는 사물들이 “이성적”(raisonnables)인 방식일 수 있게 마땅히 일어나야만 했을(auront dû)[전미래] 것이라는 그 방식을 상상하는데 기분이 좋아 마음에 든다. 왜냐하면 회고적 배열들의 악[오류]은, 그 배열들이 전미래(futur antérieur)에게만, 그리고 언젠가(jamais) 진실한 미래에 따라서만, 정확하게 의미를 갖는다는 것이다. 엄밀하게 파악된 미래, 그것은 사람들이 아무것도 속단할 수 없는 그 무엇이다. 왜냐하면 그 미래는 절대적으로 “다음”(après)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앞선 미래의 고유함은 심리학적으로 과거가 된, 상상에 의해 허구적으로 앞선, 예상 참여된, 따라서 미래로서는 부정된, 미래라는 것이다. 이렇게 이 설명은 설명해야할 행동을 앞서는 것이고, 그 행동에게 어느 정도로는 교훈을 만들어 주는 것이다. 진실이라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삶의 문법 앞에다가 단순히 순서로 놓은(être en règel) 것이 문제이며, 게다가 검은 논리를, 즉 우리의 작동들에 대해 부끄러운 논리를, 갈 길을 조정하는 지성에 의해 규제된 공적인 논리의 고상한 이유들을 가지고 감추는 것이 문제이다.
이 회고성의 착각(l'illusion)은 실재적인 연대기의 발명을 주문한다. 마땅히 있어야 했던 대로, 또 있는 것으로 추정되었던(censée) 것과 같은 병인학(l'étiologie)은 현재 있는 것과 같은 병인학으로 대체되었다. 협약적인 것만큼이나 영광스런 원인성은, 다시 말하면 길을 잡아주는 관념에 의한 원인성, 즉 주도권을 쥔 이성에 의한 또한 순진무구한 정신에 의한 원인성은, 우리 자신 속에 모범적인 어린이[유치한] 질서를 확립한다. 동기없이 수동적으로 결심한 결단, 다시 말하면 이유없는 결단은 사후(posthume, 死後) 정당화 작업들의 어머니였다. 정당화작업들은 어머니에게 결단을 잘 되돌려준다. 이 지체된[저능] 아동들(ces progénitures)은 거꾸로 행하면서도 결단의, 전환의, 선호의 이성적[합리적이라 표현해야] 원인이라고 지금도 주장한다. 자발성의 아주 열기있는 질서는 인위성의 다시 덮어진 질서에게 양보한다. 우리의 삶 전부는 마비된 재구성작업들에 굴복하여 이 논리의 무더기 만들기 속에 사라진다. 자유의 심층적이고 중심적인 의미화(la signification, 기호화)는 우리를 침투할 수 없게[불가침투적 존재로] 만든다. 우리는 끝내 부차적[이차적] 삶을, 회고적 삶을 살면서 실재적으로 살았던 삶 위에 지체하며 산다. 그 삶은 우리가 곧바로 살아야 할 삶인데, 다른 행동들에게 표본으로 쓰이기 위하여 또는 단순히 우리의 행동을 책 속에서만 그려진 어떤 협약적인 모법에 결합시킬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이다. 하나의 당(un parti, 종파)을 떠나기를 갈망했던 자는, 니체(Friedrich Nietzsche, 1844-1900)가 주목하듯이, 우선 그 당(종파)을 반박하도록 강요되었다고 믿게 된다. 막스 셸러가 자기인식의 우상(Die Idole der Selbsterkenntnis, 1912)에서 매우 통찰력있는 분석에 열중했던 사회적 도덕적 착각은 이 거짓 전망의 특별한 한 경우일 뿐이다. 왜냐하면, 여론[공공의 견해]의 눈에 비추어서 영예로운 동기들을 잘 치장하기 위하여, 그 명예로운 동기들에 대해 우리의 행위들을 차후에 할당하는 것이 중요할 뿐만 아니라, 또한 아주 원초적인 논리의 요구[필요]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우리 견해들에서 유일하고, 인격적이고, 진실로 비합리적이며, 고백할 수 없는 견해가 있다는 것, 그것이 우리를 혼란하게 하고 무섭게 한다. 우리는 개론서들의 안정된 분류 작업들에게, 또 상식적인 도덕의 [잡지 지면의] 항목들에게, 학적인 만족들을 요구하기를 더 좋아한다. 이 만족들은 우리 의지의 중심 자체에다가 우리를 안착시키려는 수고를 우리에게 절약하게 한다. 만일 우리가 자유의지를 진실로 수용하는데 동시대인들과 같이 한다면, 이 자유의지가 무엇이 될 것인지를 우리가 의심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가끔 우리는 그것이 심지어 너무 지나칠 정도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우리 행위들의 중심적 근원은 우리를 약간 두렵게 한다. 게다가 정식들이라는 목발에 의지하는 것이 상당히 아늑하게 느껴지기도한다! 작동이 완수된 이후에, 사람들은 시간을 갖고서, 논리에 앞서서 정당화되는 무엇을 여전히 발견한다. 그리고 사람들은 깨어지기 쉬운 “착한 이유들”의 무더기 아래서 신중하게 흘낏 들여다보았던 진리를 감추려고 서두른다. 그러고 나서 사람들은 이 진실한 원인을 완전히 망각하고, 또한 단호한 작동을 생성하게 했던 특권을 결정적으로 획득하게 된 회고적 정당화 작업을 망각한다. 우리 모두는 항상 늦게서야 도착하는 이 (성질)나쁜 변명자를 다소간 닮는다. 때로는 그 변명자는 너무 오래 자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때로는 그가 기차를 놓쳤기 때문이라고, 때로는 약속시간을 망각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는 결정적으로 항상 지각했었는데, 왜냐하면 지각의 원인은 그에게[그의 내부에] 있었기 때문이며, 그의 현존의 양식에, 또 그의 정신적 구성방식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다수의 변명[구실]들 자체는, 지각[늦음]들을 변명하기 위해 나쁜 이유들을 지각들과 더불어 발생 했던 중심적 운명(le destin central)의 주변사항들을 그릴 뿐이다. 직관주의자의 철학과 감동주의자들의 철학은 행위의 중심적 근원에게 다른 철학들보다 일반적으로 주의를 더 기울이며, 또한 정당화하는 상부구조들에 대하여 부자연스럽고 인위적이며 시대착오적인 측면을 보다 분명하게 항상 고발한다. 심성의 권리들을 옹호했던 빠스깔(Pascal, 1623-1662)은 [친구인] 로아네즈(Artus Gouffier, duc de Roannez, 1627-1696)에게 다음과 같은 견해를 부여했다. “이유들은 나에게 나중에 온다. 그러나 우선 사물[사정]은 나에게 동의를 구하거나 또는 그것의 이유를 알게 함이 없이 나에게 충격을 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것은 내가 그러고 난 다음에만 발견한 바로 이 이유 때문에 나에게 충격을 준다.” 그리고 덧붙여서, “그러나, 사람들이 나중에 발견한 이유들 때문에 그러한 것이 충격을 주었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러한 것이 충격을 주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 이유들을 발견한다.” 그리고 반주지주의자가 결코 아닌 그러나 코나투스(Conatus)의 우선성을 존중했던 스피노자, 그 또한 원인성의 질서를 뒤집으며(전복하며), 이렇게 공언했다. “Nihil nos conari, velle, apetere, neque cupere, quia id bonum esse judicamus; sed contra nos propterea, aliquid esse, judicare, quia id conamur, volumus, appetimus, atque cupimus.”(노력, 바램, 욕구, 욕망을 기초하는 것, 그것은 우리가 사물이 좋다고 판단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반대로 사람들은, 노력, 바램, 욕구, 욕망에 의해 사물에 이르렀기[목적을 성취했기] 때문에, 이 사물이 좋다고 판단한다.) 술을 마시고자 갈망하는 자는, 그에게 그렇게 처방한 의료 처방전을 때에 맞게 항상 발견한다. 이것은 이런 견해에 맞게, 레온 브랑슈비끄와 더불어 라 로슈푸꼬(La Rochefoucauld, 1613-1680)의 격언을 상기하는 경우이다. 즉 “정신은 항상 심성의 속임수이다” .. 또는 본능의 속임수이다. 이런 이유로, 그러한 것은 빠스깔이 여기서 심성(le coeur)라 불렀던 초점에서 퍼져나가는 힘인데, 그 심성은 이 힘을 행위들로 방출되게 할 뿐만 아니라 운명적으로 행위들을 합법화하게 하는 이데올로기적인 정당화들로 방출되게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정당화의 체계는 정신의 표면에서 자기의 고유한 자치(능력)없이 부차적 생장(une végétation)을 표상[대리]한다. 왜냐하면, 자발적 운동으로 진행하는 것으로 보이게 하는 것, 또 전적으로 하부 대체재(subalterne 對替材)인 증거들을 밑바탕에 줄 세우는 것, 그것이 “정당화”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거기에 추론(le raisonnement)의 불편부당성과 논증들(les arguments)의 비굴함 사이에 모든 대립이 있다. 논증하는 사고는 미리 예견된 사고이다. 그것은(사고는) 항상 어떤 것의 하녀(ancilla) 이다. 그것은 항상 어떤 주제[명제]에 관심있다(intéressée). 그러한 이유는 그것이 특히 변호론자들[호교론자들]과 수사학의 스승들에게 선입견을 갖기 때문이고, 진솔한 사색보다 전투적 논리에 더 많은 고민을 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작동들(현실태)에서 영감을 일으키는 원천과 우리 자유의 진솔한 재능(le genie, 천재)은 공언된 이론들과 숙고된 논증들 중에서, 말하자면 거의 항상 합법화된 그 무엇의 이론들 중에서 선택하는 것이 아니다. 프리드리히 2세(Frédéric II, Friedrich II, 1712-1786) 같은 이는 그가 탐냈던 슐레지엔(La Silésie, deu. Schlesien) 지방을 획득함으로써 진정한 [왕위] 자격들을 드러낸다. 고백할 수 없는 이유들 때문에 자기 개(son chien 犬 견)를 익사시키기를 결심했던 자는 우연히 그 개가 광견병에 걸린 것으로 발견한다. 이것은 나쁜 신앙의 정의(la définition) 자체가 아닌가?
이렇게 의지적 작동의 전통적 도식을 비판하면서, 우리는 비결정론에게 무기들을 제공하는 것 같다. 이런 이유로, 언제 어느 때에나, 인간들이 선택의 순간에, 다시 말하자면 추론적 숙고의 순간에, 자유의 서명을 식별한다고 믿었다. 그런데 숙고는 이제 우리에게 마치 사후의 합법화처럼, 마치 쓸모없는 형식성처럼 나타난다. 우리는 완수된 사실 앞에서 미신들을 믿듯이 쓸모없는 형식성으로 진행하고, 그리고 그 쓸모없는 형식성이 작동들의 진실한 일반화에 더 이상 영향을 주지 못한다. 우유부단한 군주들이 실제로 곧 담당할 독재 권력을 강요할 분위기를 만들기 위하여, 필수적인 덕성을 시행하면서, 마치 한 장관의 피할 수 없는 쿠데타를 합법화하기를 서둘러 끝내는 우유부단한 군주들의 양심가책들처럼, 약간의 가책이 남는다. 행위의 모든 생산성은 우리들의 몸짓과 몸짓의 정당화에 영감을 주는 어떤 결과의 개념작업 속으로 말하자면 애초부터 도망쳤다. 따라서 그 결단은 동기들(motifs)과 동인들(mobiles)을 가지고 구축되지 않듯이, 예지적 작업에서 의미는 요소들의 기호들을 가지고 구축되지 않는다. 동기들과 동인들은 사유의 여러 방향들로 짜여진 - 이 방향들로부터 우리가 바라는 것이 수렴하는 방향정립이라는 것을 확신하는데 - 심리학적 매듭들(des noeuds)이다. 따라서 이것들이 단순하지 않듯이, 심리학적 “원자론”의 개념들도 단순하지 않다. 그리고 이것들은 심지어 훨씬 더 복잡하게 되어 있다. 왜냐하면, 만일 동요하는 숙고과정 속에서 무게를 측정할 수 있는 요인인 한에서, 다시 말하면 무게 있는(pesant) 것처럼 고려되었던 심적 내용(감정, 관념)이 아니라면, 사람들은 무엇을 “동인” 또는 “동기”라고 부르는가? 니체는 임의적 자유의 신화와 심리적 “사실들”(faits)의 원자론적 고립 사이에 맺어진 암묵적인 동조(la complicité, 묵계)를 고발한다. 언어의 실체주의는 아주 자연스럽게 이 묵계를 총애한다. 그러나 만일 동기들이 결단에 관하여 동기들의 “무게”(le poids)에 의해 행동할 수 있다면, 그것은 동기들이 그 자체로 정신적인 관계들의 망[그물]에 걸려 있어서, 이미 잘 계획된 길거리에서 우리들의 주저하는 행동에 방향을 잡게 하는 섬세한 긴장을 반영하는 것이다. 각 동기는 나의 내밀한 선호 작업들을 혼자 힘으로 증거한다. 마치 한 문장의 각 단어가 전체적 의미를 - 그 단어는 한 부분만을 형태학적으로 운반할 뿐인데 - 증거하고, 그 문맥을 재구성하게 하듯이 말이다. 하나의 작동은, 그 작동의 동기들이 전체적 자아를 포함하고 있지 않지만 바자이아스가 올바로 그것을 관찰했듯이, 의욕의 풍자적 모방(une parodie)일 것이다. 이 모든 숙고과정은 대안[교대적인 것]의 형식을 상식으로 삼는다. 그 대안[교대]의 두 가지들은 잘 구별된 동기들의 두 계열에 해당한다. 그러나 대안은 마치 동기들 자체들처럼 회고적 효과이다. 그러한 것은, 아마도 임의자유(le liberum arbitrium)가 사유에서 무-의미(le non-sens)라고 키에르케고르가 말한, 그 추상적 임의자유일 것이다. 따라서 달리 행할 수 있다는 착각은, 라이프니츠(Leibniz, 1646-1716)가 말했듯이 그렇지 않으면(Aliter)이라는 착각은, 사후의 제작 작업이다. 사람들은 왜 상식의 표본적인 자유가 가능한 두 해결방식이 갈라지는 그 점에 정당하게 있어야 하는지를 쉽게 이해한다. 그럼에도 삶이 분명하고도 거친 딜레마들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드물며, 하나의 의식이 반대되는 가능성들 사이에서 이렇게 이중화된 채 있다는 것도 드물다. 의지에서는 의지의 반명제를 함축하는 주제[논제]는 없다. 그러나 특히 선택자체가 있으며, 그 선택은 결심을 고정화시키고서, 그 결심과 더불어 모든 진행절차를 만든다. 이 대안의 절차와 동기들이 결심으로 이끌었다고 추정된다. 르끼에(Jules Lequier, 1814-1862)가 강조하여 말했듯이, 르누비에에 의해 인용된 아름다운 조각글 속에서 “나의 선택은 나의 기호에 따라 행한 것이다. 나의 맘에 든다는 점이 나에게 기분 좋다.” 플라톤은 에우튀프론에서 소크라테스를 통하여 질문하게 한다. 경건한 사물들이 경건한 것은 그것들이 신들에게 동의(agréer 사랑)를 받기 때문인가 또는 그 경건한 사물들이 신들의 동의를 받은 것은 그것들이 경건하기 때문인가? 사람들은 똑같은 의미에서 물을 수 있다. 우리가 한 작동을 선호한다는 것은 우리가 그것을 선택했기 때문인지, 또는 우리가 그것을 선택한 것이 그것을 선호했기 때문인지. 우리가 생각하기에 다음과 같은 대답이 나올 것 같은 어떤 파라독스에 대해 대답해야 할 것이다. 만일 작동이 자유로운 작동이라면, 작동이 선호할 수 있는 것은 그 작동이 선택되었기 때문이다. 피아트(fiat, 심사숙고 후 결단)가 자기 기호에 맞게 결심하기 때문에, 이성은 피아트를 합법화하기 위하여 맞춰나간다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조용히 안정될 수 있고, 이성은 항상 약속된다. 이것은 회고적 효과이다. 일단 선택의 모험에 처하면, 전도를 안심하게 하는 모든 작업은 약속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자의적이고 무상적이고 절대적인 바램의 우선성을, 또는 - 설명에 의해 질문에 응답하는 대신에 질문에 의해 질문에 응답하는 - 응답의 순환성을 인정하는 것이라기보다, 모든 일에 심지어는 가장 절망적인 결정론에 동의했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이[남성]는 소위 말해서 사랑받는 이[여성]를 사랑한다고 한다. 왜냐하면 사랑받는 이는 사랑스럽기 때문이며, 그리고 왜냐하면 [그것은] 사랑받는 이[여성]가 아니라 사랑하는 이[남성]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그가 어떤 이유들도 없이 사랑한다는 것을, 또는 그가 ... 도 고려할 것이 없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일 것이기 때문이다. 벩송주의는 확실히 무차별의 철학이 아니다. 우리는 이에 대해 곧 바로 확신하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무차별적이고 깊이를 잴 수 없는 전제적인 신의 신학적 가설에서, 즉 심지어는 영원한 진리들보다 우월한 신의 신학적 가설에서, 심리학적으로 합법적인 무엇인가가 있을 것이라는 것이다. 아무 것도 순수한 의지를, 현존들과 가치들 그 자체들의 모태(matrice)를 앞서지 못한다. 마치 “생의 도약”에 앞서서, 생의 도약이 실현화할 것이라는 초월적 프로그램이 없다는 것처럼, 이처럼 앞서가는 의지는 - 의지가 동기들의 충동을 상속하다 - 동기들에 의해 결코 먼저 앞서나가지 못한다. 오히려 만일 이 동기들이 있다면[현존한다면], 동기들은 의식 상태의 단계들에 환원된 완전한 의지이다. 그러나 아무것도 바램(vouloir)의 비합리적인 우선성 그 이상으로 기분을 거스르기도 하고 멍청하기도 하고 현기증 나는 것도 없다. 행위를 시작하기 위하여, 우리는 원칙의 순서에 따른 행위라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이루어진 사물이라는 원리를 요구한다. 우리의 작동들이 출현 자체와 일치하는 유일한 예외적 직관은 그 때에는 무용하게 된다. 자유의 모호한 실험실 안으로 침투하는 것이라기보다, 오히려 우리는 어떻게 결심이 [심사]숙고의 현명한 발언들과 더불어 조금씩 만들어지는 지를 탐구하기를 선호할 것이다.
만일 사람들이 모든 대가를 치르고 고전적 어휘에 집착한다면, 우리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자유란 심사숙고 속에 있지 않다. 따라서 자유는 자유의 실재적 목적이라는 또 명백한 결과인 결심의 과정에서 어딘 가에[모처에] 있어야 한다. 벩송의 사유에 충실에게 남아있게 하기 위하여, 어떤 의미로는 의욕의 두 가지 시각들을 구별해야 한다.
1). 심사숙고를 통하여 생각 되었다면, 의욕은 결정되었던 것으로써 나타난다. 왜냐하면 일반적으로 숙고는 실재적으로(réellement) 결심 다음에 있다. 그리고 그러한 것이 증명하는 바는 결정론이 옳다고 인정하는 의지적 목적성을 강조하는 방식이 있다는 것이다. 확실히 변호는 증명해야 할 논제(la thèse)를 형식적으로(formellement) 앞선다. 그러나 그 때에, 하나의 의미에서 결과들은 그 결과들의 원인들에 앞서 있을 수 있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지칠 줄 모르는 벩송의 변증법은, 이 경우에 - 신학적 목적론의 경우 인데 - 심리학적으로 원인성이 또한 중요하고, 그러나 육안으로 보기에(à l'œil) 목적론의 형식을 취했던 부끄러운 원인성도 중요하다는 것을 제시하고자 집착했다. 이것은 창조적 진화의 제1장 전체에서 벩송이 증명하려 할 것이다. 빠스깔은 이 전복을 이미 주목했고, “왜냐하면(Parce que)”의 의미를 바꾸어놓았다. 벩송은 자기편에서 원인성의 두 전형을, 우리가 측력 원인화(causation-poussée, 밀기)와 인력 원인화(causation-attraction 당기기)라 부르는 것을, 은연중에 구별했다. 밀기[측력]에서, 말하자면 일상적 전형의 효율(l'efficience)에서, 결과들은 - 단어의 고유한 의미에서 - 그것들을 원인 앞에 밀고가면서, 그것들을 “생산하는” 원인을 이어간다. 그러한 것은 충격의 충력(l'impulsion, 충동)이며, 효율적인 또는 원심성의 원인의 충력[충동]이다. 그러나 모든 벩송의 변증법은, 이 경우가 “목적(finale 최종)” 원인성[목적인]에서는 밑바탕에서 동일하다는 것을 정확하게 제시하는 데 있다. - 목적 원인성에서는 결과들이 앞서서 간다. 왜냐하면, 만일 원인이 결과들을 자기 쪽으로 “당긴”(attirer)다면, 살았던 지속에서 원인이 결과들에게 앞서기 때문이다. 원인의 후행성은, 우리가 완수된 작동 앞에서 이 지속 바깥에 위치하기 때문에 가능하게 되는 허구이다. 따라서 만일 우리의 자유로운 작동들이 이 작동들을 재구성하여 검증하는 도식들의 목적성을 전적으로 유지한다면, 우리의 행위는 총체적으로 예결할 수 있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법정 변론에서 변호사가 입을 열 때, 우리는 무슨 일이 있을 지라도 변호사는 혐의자의 무죄를 지지할 것이다. 그리고 설교자는 단상에 올라갈 때, 우리는 설교자가 신의 현존을, 또 자비로운 자들에게 약속된 지복을 증명할 것이라는 것을 안다. 자유는 거기에 있지 않다.
2). 자신의 성장에서 진실로 동시대적인 성찰에 의해 자유 작동이 성숙하는 정도에 따라 생각되었다면, 자유 작동은 영감 받은 작동(un acte inspiré)처럼 나타난다. - 영감 받은(우리는 보다 정확한 용어는 아니지만 지금으로서는 이 정도로 말하자)이란 의미는, 나의 인격의 재능에 의해, 자유로운 행위가 솟아나는 중앙 핵심에 의해, 결국 양심의 심판(ce for intime)에 의해, 사람들이 에크하르트(Eckhart, 1260경—1328)에게서 빌려온 단어로 부를 수 있다면 작은 불꽃에 의해 영감 받았다는 의미이다. 이리하여 우리는 생산-원인성의 관념으로 또한 새로이 비결정론으로 되돌아가는가? 그러나 여기서 특히 알아맞힘(divination)과 예상참여(anticipation) 사이에 구별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영감을 주는 결정권(l'initiative, 주도권)은, 전적으로 발명 작업과 임시방편일지라도, 행동의 생성에 앞선 전제적인 “주제”(thèse)에 되돌아가지 않는다. 이 “주제들”이 영감을 주기보다 더욱 낙담시킨다. 이 주제들은 미래에 대해 투명하게 예견할 수 있는 관점(une vision, 통찰)을 우리에게 제공하기에, 다시 새롭게 하기 작업의 모든 가능성들은 미리 소진되어 버렸던 것이다. 그러나 예감들은 영감적이다. 우리가 그 예감들에 빚진 직관은 밖으로 퍼져가는 원심력의 “역동적 도식”과 동일한 질서의 것이다. 이 도식으로부터 지적 운동이 진행한다. 모든 예견(prévision)에 매우 반대적인 흘낏보기(cette entrevision, 일별)는 일종의 의도이며, 일종의 지향적 상태(l'état intensionnel)이며, 즉 동기화된 선택이 선호에 맞게 현실화하려는 것을 생겨나는 잠재적인 상태에게 포함하시키는 매우 조형적인 지향적 상태이다. 따라서 생명은 “충력” 원인들의 초월성과 목적 원인들의 초월성 사이에서 이미 매개적인 것으로써 우리에게 나타난다. 생명은 말하자면, 원인들 서로의 길 위에 있으며, 이미 이루어진 것(le tout-fait) 속에가 아니라 이루어지고 있는 것(le se-faisant) 속에 있다. 이것은 이행성(cette transitivité)이다. 이것은 불가사의와 자유의 그자체성 자체를 재현하는 “현재의 나누어가짐”(participe présent)이다.
2. 따라서 이제 임의 자유에게 위치[지위]가 만들어졌다. 자유 작동에 적용된 역동적 도식은 - 다시 말하면 우리 언어 속에서 행위의 지향성(의도성)은 - 그 철학자가 어떤 길 위에서 자유와 만나는지를 우리에게 이미 지적해 준다. 결정하는 의도(지향)는 전적으로 행위의 욕망이며 아리스토텔레스가 의지에 대해 말했던 대로(ὁρμή τις τοῦ πράττειν [어떤 실행하는 욕망])이다. 지적 노력의 참여들에서처럼, 의도(지향)는 형태론적으로가 아니고 역동적으로이며, 말하자면 기능적으로 미래 작동이 이미 완전히 선형성 되었다. 이런 이유에서, 재구성 요소들로부터 작동의 재구성은 해결할 수 없는 만큼 많은 아포리(난제)들을 생성시킨다. 이 요소들은 행위의 구성적인 것들(constitutifs)이 결코 아니라, 행위의 표현적인 것(expressifs)이다. 경험은 우리에게 체계의 조각들이 아니라 역사의 순간들을 폭로한다. 이런 의미에서, 그런데 오직 이런 의미에서만, 자유 작동에 대해 그것이 예견할 수 있는 것이라고 사람들은 말할 수 있다. 의지적 작동의 예측(prédiction)은 “거짓 재인식”에 대하여 벩송이 묘사한 예감들과 유사한 예감으로부터 유래한다. 내가 이러한 또는 저러한 방식으로 작동할 것이라고 알아맞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작동함으로써만이 그것을 알 뿐이다. 내가, 여러 주저함들에 처해 있어서 이 주저함들의 출구에 예상 참여할 수 없다. 그러나 내가 거기에 참여하려 할 때, 나는 이 출구를 가능한 유일한 것으로써 인정할 것이라는 것을 내가 미리 내다본다[예견한다]. 나는 알지 못하지만, 내가 곧 알게 될 것을 내가 알아맞힌다. 결국에는 내가 “한 인격이 무지하다고 스스로 아는 것을 안다고 스스로 느끼는 그 인격의” 모호한 상황에 처해있다. 이 자유의 감정은 이 무지를 보탠 이 지식(ce savoir, plus cette ignorance)이외 다른 것이 아니다. [이것은] 혼란스럽지만 보기 드문 특이한 감정이다. 왜냐하면 그 감정은 자기 속에 엄격한 필연성의 위협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르누비에가 표현한 것인데, 그는 “자기 동기적”(automotive) 행위가 사실에 앞서 후천적으로(a posteriori) 자유롭게 항상 결정되는 것 같다고 말했을 때이다. 마치 진화론의 목적성과 같은 이 작동들의 필연성은 오직 회고적일 뿐이다. 밑바탕에서 스튜어트 밀(Stuart Mill, 1806-1873)의 결정론은 이것 이상의 어떠한 것도 말하지 않는다. 일단 정해진 결단은 우리에게 항상 유일하고도 가능한 결단처럼 또한 유일한 자연적인 결단처럼 나타난다. 왜냐하면 그 결단을 준비했던 심사숙고를 재구성하면서 그일 다음에 결단이 설명될 수 있는 방식이 항상 있기 때문이다. 행위에 앞서서 나의 선택이 나 자신도 모르게 나를 덮쳤다는 것을 나는 확신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지금 있다는 것에 관련하여 내가 [미래에] 선택할 것이라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다. 내가 나의 심층적 욕망들과 점점 더 내밀하게 일치할 때, 심지어 나는 거기서 매듭풀기(le dénouement, 대단원)이라는 단어를 읽기에 이른다. 하지만 애석하도다! 그것은 나에게 틀림없이 정보를 줄 수 있을 유일한 매듭풀기이다. 따라서 매듭풀기가 너무 늦었을 때만, 또 미래의 비밀이 현재의 실재성이 되었을 때만, 나는 확신을 획득할 뿐이다. 그러나 이때 결정론은 예측이 더 이상 아니다. 그것은 확인이다. 따라서 나의 자유는 매 순간에 죽음의 위험에 처해 있다. 자유는 스스로 부정하면서 만이 스스로 활성화 된다. “사람들이 지닌 ‘선택하다’라는 능력은 그 능력 덕분에 실행했던 선택 속에서는 읽혀질 수 없다.” 완성된 작동은 완성할 작동에 대해 등을 돌린다. 그리고 이 자기 만족적인 재구성들은 우리에게 우리의 굴종을 증명하기 위하여 사방에서 쇄도 한다.
특히 엘레아학자들의 착각은 이렇게 설명된다. 변증법은 거북이를 따라 잡는 아킬레스를 옹호한다. 그럼에도 거북이를 따라 잡는다는 것은 사실이며, 심지어는 거북이를 뛰어 넘는다는 것도 사실이다. 벩송이 다른 곳에서 말하듯이, 기하학자들은 곡선을 마치 무한히 많은 작은 직선들의 재통합처럼 설명한다. 왜냐하면 극한에서 곡선은 각 점에서 점의 접선[탄젠트, 기울기]과 혼동되어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굽은 선들이 굽어져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가장 잘 검사하는 눈은 곡선의 휨(flexion, 굽힘)의 연속성을 부수는데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란 것도 사실이다. 변증법을 조롱하는 아킬레스는, 마치 변증법이 아킬레스가 지나갈 공간의 길이들을 끝까지 총합하는 것처럼 진행하지 않는다. 그는 달리고, 그리고 이 헛된 문제를 해결한다. 톨스토이(Léon Tolstoï, 1828-1910)는 인류성[인류애]의 역사적 생성에 관해 성찰하며 이렇게 설명한다. 운동의 연속성이란, 우리들이 운동의 흐름에서 구별하는 간헐적인 짓거리들(les motions)의 결과에 의해, 우리에게 비지성적일 수 있게 되어 있었다. 역사의 ‘미분적인’ 것을 계산하는 것이, 그리고 셀 수 없을 정도이며 무한소들인 자유재량들을 “적분하는” 것이 우리에게 요구된다. 벩송의 형이상학은 곡률(기울기)들의 계산과 무한소 수학을 넘어서 갈 것이다. 운동은 - 스스로 움직이는 사물들의 진실한 운동 즉 로댕이 영화적 기법에 의해 암시된 운동 - 하나의 유기적 총체성이이고, 그리고 만일 사람들이 그것을 요소들로부터(ἀπό στοιχεῖων) 해석하기를 전심전력으로 원한다면, 무한히 현실적이고 긍정적인 요소들에 의해 그것의 역동적 연속성을 설명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변증법적 구축은 원자들의 유한한 수로 작업을 하면서 진실한 운동성의 이유를 설명할 수 없을 것이며, 더욱이 그 구축은 멜로디의 유연함과, 곡선들의 구불구불한 굴곡성과, 자유행동의 살아있는 우아함을 복구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사람들은 운동과 행동을, 움직이면서 만이 또 작동하면서 만이 진실로 이해한다. 왜냐하면 오직 작동자체만이 또는 그것을 모방하는 인식의 기능만이 - 말하자면 직관 - 생명적인 것에 알맞게 이루어진다. 그것은 그 바탕에서 아리스토텔레스가 자연학의 용어[단어]들에 의해서 표현한 바의 것이다. “무한한 시간 속에서 사람들이 무한 한 것들을 답보한다는 것보다 불합리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ouden gar atopon ei en apeiroi chronoi apeira dierchetai tis) 다른 한편, 당신들이 시간의 무한 분할에 의해 얻었던 순간들이 시간 속에서 현실태(en acte)가 아닌 잠재태(en puissance)로서 현존한다고 해서, 그는 엘레아학자들에게 반대하는가? 벩송은, 자신이 말하듯이, 거기에서 잠재적 멈춤들(arrēts virtuels)을 보지 못할 것인가? 우리에게 가능한 멈춤들을 현실화하게 해주는 것이 표상의 인위적이고 우발적인 작동이다. 그러나 사실상 시간은 순간들로 구성되어 있지 않듯이, 불가분적인 내용 또는 운동체들(κινήματα)의 운동도 그렇게 되어 있지 않다. 점들은 현실태로서 선을 자르는(sectionner 분할하는) 반면에, 순간들은 시간을 잠재적으로만 나눈다(diviser, 분할한다). 그런데 아무것도 동체가 잠재적 점들을 무한한 수로 답보하는 것을 막지 못한다고 할 경우란, 사람들이 이 무한을 현실화하지 못하는 한에서 이다. “걱정하지 마세요, 당신,”이라면서 라이프니츠(Leibniz, 1646-1716)가 말하기를, “퓌론주의자들이 아킬레스만큼 빨리 갈 수 있게 하는 거북이를 걱정하지 마세요. 당신은 모든 크기들이 무한히 분할될 수 있다는 것을 말할 이유가 있습니다. 너무나 작은 크기 안에서도 사람들이 결코 다 써버릴[소진할] 수 없는 무한 분할들을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그렇게 매우 작은 크기란 전혀 없을 정도입니다. 그러나 나는 어떤 잘못이 일어나는지를, 또는 어떤 필요에서 무한 분할들을 소진하는 것이 있는지를 알지 못한다. 끝없이 나눌 수 있는 공간은 또한 끝없이 나눌 수 있는 시간 속에서 일어난다.” 기하학과 더불어 불가분성들을 파악한 파스칼은 이 동일한 논증을 변증법적 형식으로 이용하는데, 그가 무한한 가분성을 반대하는 메레(Méré, 1607-1684)의 반박을 거부하기를 시도할 때이다. 어떻게 사람들이 유한한 시간에서 무한히 많은 무한소들을 즉 너비를 구성하는 이 무한소들을 거쳐갈(답보) 수 있는가? 그러나 파스칼이 대꾸하기를 그것은 시간 전체이며, 공간 전체와 공연적(coextensif)이고, 운동은 무한히 많은 순간들로 되어 있는 무한히 많은 점들 답보한다. 그러나 유한론자인 르누비에는 사람들이 난점을 이중화하면서 그 난점을 해결하지는 못한다는 구실로, 그 당시 유일한 무한 대신에 뛰어 넘어야 할 두 가지 무한이 있을 것이라는 구실로, 이 논증을 거부했다. 그런데 끝날 수 없는 지겨운 시간의 경과들(laps de temps)이 성공한다. 즉 [그렇게] 되면서 비로소, 우리는 간격을 소모하고, 각 시기의 끝에까지 건드린다. 무한한 시간으로부터 무한한 궤적에까지 공연성이, 무한은 온무한(l'Infini)에 취약할 수 있다는 것을, 운동은 공간을 꿀꺽 삼킨다는 것을, 작동의 단순성은 열거하는 변증법이 좌초하는 거기에서 성공한다는 것을, 표현한다. 그리고 빠스깔이 자신을 위하여, 언제 어느 때에나 역동주의자[동력학]의 학설들을 원자론에 대립시킬 줄 알았다는, 논증을 다시 한다. 또는 이 “나눌 수 없음”이 이미 너비의 권능(la puissance, 잠세력)을 가지고 있고, 그리고 그것은 그 자체가 부분들을 가지고 있다. 또는 그것은 진실로 비너비적인 것(l'inétendue)이고 그러면 너비는 제로(O)로부터 태어난다고 해야 할 것이다. 게다가 푸르동(Proudhon, 1809-1865)이 주목하듯이, 우리가 운동을 부정한다는 것은 정신[지성]의 운동에 의해서가 아닌가? 운동체를 비운동성이라고 단죄하는 자는 사유의 진보를 마비리라고 단죄하지는 않는가? 지나가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만 지나간 시간은 빠르다. 그러한 것이 시간이고, 그러한 것이 운동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분할의 무한 또는 무한한 분할성(κατά διαίρεσιν)과 크기의 무한(τοίς ἐσχάτοις, ou κατά ποσόν)을 구별했다. 무한히 큰 궤도를 실행하기(effectuer) 위하여 진리에 무한히 큰 시간의 경과가 필요하다. 그러나 무한히 나눌 수 있는 길이는 무한히 길이가 있는 것이 아니고, 그 길이를 소진하기 위하여 무한히 나눌 수 있는 그러나 유한한 지속으로 충분하다. 이렇게 이해된 운동이 불가능하지 않듯이, 현재는, 즉 영속적 기적은 과거와 미래에 대해서 생각할 수 없게 한계를 정한다. 밀(Stuart Mill, 1806-1873)이 주목하듯이, 태양의 잔다는 것(le coucher)이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편이 낫다. 왜냐하면 만일 그것이 가능 했다면, 태양이 수평선 위에 아직 있는 한에서 이건 또는 태양이 수평선 그 밑에 있을 때 이건 간에, 태양이 [잤다면] 마땅히 일어나야만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잔다는 것은 어디에도 없다. 왜냐하면 태양은 마치 낮에서 밤으로 이행처럼 정당하게 정의되기 때문이다. 변화에게 장소를 할당하는 것, 그것은 그것[변화]을 제거하는 것이다. 메가라학파의 부동론은 이렇게 반박되었다.
유기적 총체성의 연구는 우리에게 모든 정신적 존재가 필연적으로 충만하다[꽉 차다]는 것을 제시했다. 운동과 자유작동에 대해 진실하다는 것은 확장과 지식작업(l'intellection)에 대해서도 또한 진실할 것이다. 사람들은 운동을 점들로써 더 이상 제작하지 않듯이, 너비를 추억들로써, 의미를 기호들로써 제작하지 못한다. 마찬가지로 자유작동은 말하자면 최소한의 요소들에까지도 총체적 연속성이고, 이런 비합리적 긴장만이 생명에 가까운 방법을 취하고, 그리고 생명의 [걸음]방식을 모방한다. 회고적으로 행동은 순간들과 동기들 가루로 만들어서, 사람들은 행동을 곡선으로 재구성하기 위하여 순간들과 동기들을 [수적] 다수로 만든다. 상호연관적으로 우리의 변증법은 근사치로 또 조잡한 할당량으로 소진된다. 어떤 르누비에라는 자의 유한론에서 알파에서 오메가까지이라는 현실적 무한의 비판은 회고적인 분해 작업들의 불모성[생산성없음]을 단지 진술할 뿐이다. 전투적이고 건장한 자유는 변증법에 의해 실현된 현재적 무한에 대한 강박[시달림]을 벗어난다. 그것은 원하는 것 속에서 그리고 행위 속에서 건강의 증거이다. 조락해지는 조심성들에 사로잡힘에도 손상 입을 수 없는 자유에 대한 근심걱정 없음[무사안일]이 그 증거이다. 무능이 끊임없는 의심들에 의해 부스러지게 되는 자들에게 충격을 준다. 그러나 자기 자신과 진실로 동시대인 정신이 또 회고적 조심성들에 대해 진실로 면역이 된[무감각해진] 정신이, 또한 이 정신은 어떻게 완수된 사물[사정]들에 대한 영원한 후회 속에서 자기 시대를 상실했던가? 어떻게 그 정신은 매 순간에 단순한 결단들에서 무한히 풍부한 자기 경험들 몸에 배게하는 기적을 이루지 못했던가? 정신이 주도하는 편안함은 그대로 됨(자연 自然, grâce)과 다른 것이 아니다. 우리의 예술은 그것을(그대로 됨) 모방하고자 애쓴다. 그러나 그대로 됨은 자연적으로 생명에만 속한다. 그대로(gracieuse) 행위는 재담과 관계없이 무엇보다 무상의(gratuite) 행위이다. 그 행위 회고적인 어떠한 절차조차도 매력과 자발성을 변질시키지 못하는 그런 행위이다.
따라서 벩송의 자유 이론은 보편적(universel) 시간의 회복이며, 엘레아학자들과 아이슈타인에 대한 반박처럼, 상식에 대한 존경이다. 운동과 행위는 그 철학자에게 있어서는 이것들이 모든 세상 사람들에게 있어서 사실들(les faits) 중에서 가장 분명한 무엇이 되며, 가장 단순한 무엇이 된다. 메스트르(Joseph de Maistre, 1753-1821)가 말하듯이 “사람들은 대답만을 할 줄 알고, 사람들은 걷는다” 여기서 사람들은 벩송의 방법에 대한 비교할수 없는 독창성을 잘 인정한다. 상식의 관점은 행위자(배우)의 관점이며, 반면에 제논의 관점은 지속에서 살기를 거부하며 행위에 참여하기[분유하기]를 거부하는 구경꾼의 환상적 전망을 표상한다. 개인적으로 자유의 드라마에서 참여하는 행위자에게 있어서, 운동들이 그것들의 목표에 도달하는 것은, 그리고 그 작동들이 효과적인 결론들로 대단원의 막을 내리는 것은 생명적 관심으로부터이다. 그러나 그 배우에 있어서는 정확히 어떠한 의심도 없다. 벩송주의의 본질은, 이 순진한 확정이 그 철학자가 본질에게 부여한 존경을 겨우 받을 만한 정도일 것 같이 매우 순진하기에, 우리에게 절대자에 관한 관점만을 제공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더 좋게 말하자면, 행위자는 심지어 “관점”을 갖지 않는다. 왜냐하면 행위자가 드라마 자체이며, 가장 미묘한 세부사항들과 가장 비밀스런 동기들을 지닌 드라마 전체이기 때문이다. 관점은 제한을 의미한다. 그리고 따라서 라이프니츠의 신은 관점을 갖는 것이 아니라, 단지 모나드들을 갖는다. 엘레아학자들은 우리에게 운동에 관하여 사변적 관점을, 다시 말하면 우리들의 시각을 완전히 착각하게 하는 전망적이고 부분적인 관점을 제안한다. 우리는 장면의 불[조명]들과 거리의 특권에 의해 눈부신 변증법의 신기루들에 대항하여 직관의 분명하고 총체적인 명증을 교환한다.
이리하여 자유 작동은, 운동들 그 자체들과 마찬가지로, 운동들의 “위치적 기호”(lan signe local)를, 즉 그것들의 고유한 독창성을 지닌 불가분적 존재들이다. 수학자는 운동들의 정신적 본질을 무시하고 또 가볍게 그것들의 “운동성”을 다루면서 운동들만을 획일화할 뿐이다. 그 운동성은 항상 개별적인 경향이며, 질적이고 방향이 주어진 교대작용이다. 자유작동을 물고 늘어지는 또한 자유작동의 이것임[고유한 인격성]에 도달하는 인식의 유일한 형식은 직관일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일반적인 것으로 남아있는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가분적 대상들에게 정확하게 어울리는 것은, 직관의 본성 속에 있기 때문이다. 삶(la vie, 일생)의 인식은 당연히 삶의 모방이다. 지성은 자기 대상과 항상 닮지 않을 수 있는데 비하여, 직관의 운동과 자유 또는 생명의 운동 사이에는 본질적 차이가 없다. 엠페도클레스(Empédocle, Ἐμπεδοκλῆς, 전490경–435경)가 동일자는 동일자에게만 인식가능하다고 하듯이, 이처럼 생명은 생명에게만 침투가능하다. 괴테(Goethe, 1749-1832)가 그렇게도 찬양했던 플로티노스의 문장은 새로운 의미를 입혔다: 빛을 보기 위하여 눈은 태양이야만 한다. 너의 눈이 보여지는 사물이라 치면, ... “지상의 양식”(Les Nourritures terrestres ) 속에서 우리를 읽자. 너의 망막이 창공 자체라 치면, 너의 시각은 인격적인 면에서 불이로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는 순수 지각의 실재론을 해석할 것이다. 직관은 자기 차례가 되어서 느끼는 것과 느껴지는 것의 사변적 동화가 아니며, 오히려 강력한 일치이며 말하자면 재창조이다. 이해하다, 이것은 다시 만들다가 아닌가? 해석적 노력은, 정신이 문제들의 출현 앞에서 단번에 정신적 분위기 속에 자리 잡고서 진실한 의미를 가정하면서 그 의미를 발견할 것을 요구하지 않는가? 따라서 항상 엄밀하게 지적잡업은 해결된 문제를 가정하는데 있다. 그런데 운동이 문제거리일 때, 해결된 문제를 가정하는 것, 그것이 스스로 움직이고 있지 않는가? 마찬가지로 가능한 자유를 증명하는데 좋은 방식이 있다. 그것은 원하는 것이고 행동하는 것이다. 역설과 양식이 결합되어 있는 활동가 방식의 해결은 적어도 임의적인 진행방식을, 즉 일종의 초기적인 모험을 함축하고 있다. “시작해”야만 하고, 위험에 부딪혀보아만 한다. 추론은 어떤 [도구적] 자료의 선현존에 항상 종속되어 있다. 그러나 행위는 그 자체 통째로 스스로를 창조한다. 왜냐하면 행위는 충만하고 총체적인 현존이기 때문이다. 몽테뉴의 교육학이 그것을 잘 포함하고 있고, 그는 모든 사물들보다 먼저 경험, 훈련, 행위의 수련(l'apprentissage, 배움)을 권장했다. 사람들은 말을 하면서 말하기를 배우고 그리고 어린이는 걸으면서 걷기를 배운다. 우리의 입문자들의 자발성은 문제들의 흩어진 수(數)들을 끌어 모으는 것이 아니라, 문제들을 밝힌다. 행위는 정당화 작업들이 우리를 가두고 있는 원(순환구조)을 부순다. 행위가 자기 원인(causa-sui)이 아닌가?
자유에 대한 이러한 내재주의적 개념작업은 결단의 시기에 시작(commencement)이라는 예외적인 자유가치를 제거하지 못한다. 벩송은, 피아트(fiat, 심사숙고 후 결단)의 엄숙함(la solennité 성대함)을 우리에게 느끼도록 하기 위하여, 르누비에처럼 자유행위들의 불연속을 강조되어야 할 필요가 없었다. “시작하다란 위대한 한마디 이다!”(Commencer est un grand mot!)라고 르누비에가 인용한 감동적 조각글들 속에서 쥘 르끼에가 소리쳤다. 사람들은 이 위대한 한마디가, 벩송의 임의자유 안에서 그 말의 존엄성을 상실했다고 보지 않는다. 르누비에 그 자신은 자유(liberté)와 뜻밖(fortuité)의 차이를 내는데 끝장까지 가는 고민을 하지 않는가? 벩송으로부터 올 수 있을 언어에서, 그가 약간 덜 좌파(왼쪽)이었다할지라도, 그는 동기들의 추상적 산술학에 대항하여, 무차별적이고 몽상적으로 절대적인 바램의 신화에 대항하여 저항한다. 의지는 수동적 기저(ὑποκείμενον)도 아니며, 동기들이 밖으로부터 의지를 규정하러 오는 것을 기다리는 백지(une table rase)도 아니다. 르누비에가 심도있게 첨가하기를, 결정론과 비결정론의 공통적 전제(le postulat)는 의지의 기본적이고 본질적인 비차이(une indifférence foncière et essentielle de al volonté)라는 전제이다. 아무 것도 더 이상 벩송적인 것은 없다... 베르디아에프(Nikolai Berdyaev, 1874–1948)도 또한 경쟁하는 동기들을 동일효력성(isosthenie ἰσοσθένεια) 안에서, 더 좋게 말하자면 모든 동기화과정이 빈 것 안에서, 선택하는 실체적의 자유재량의 관념을 거부한다. 본질적으로 ‘바란다’는 것은 무차별주의에 따르면 무(無) 가운데서 결단한 좋은 쾌락일 것이고, 바램을 결정할 때조차도 차이들에 대한 수고[힘들임]에서 땀나지 않음[여유로움]일 것이다. 우발적으로, 바란다는 것은 결정론에 따르면, 밖에서 그것을 방문하러 온 몇 가지 요인들에 대해 저항할 수 없는 충력을 받아들이는 것일 것이다. 그러나 권리상으로 사람들은 그 충력을 수동으로 또는 능동으로 취급하면, 의지는 본질적으로 이 요인들로부터 판명[분명]해 질 것이다. 그런데 반대로 우리는 동기 전체가 이미 원해진 것이라는 것을 안다. 그러나 이렇게 사람들은 인격자체에 초월하는 바램을 인격화하기를 또는 “사물화하기”(réifier)를 거부하지 않는가? 나의 의지는 나 자신 속에 이방인처럼 또는 방문자처럼 있지도 않다. 더군다나 나의 지속은 의식 자체로부터 실재적으로 구별되는 어떤 사물을 지칭하지도 않는다. 반대로 나의 의지와 나 사이에서 내밀한 친밀성, 오랜 동지의식이 있다. 그것은 순수하게 원하는 인격과 순수하게 원했던 인격의 차별없는 마주함이 아니라, 오히려 모든 순간의 일치[합의]이다. 사실상 이 때 자유의 작동은 자의적 법령[훈령]이기를, 즉 듣지도 못한 파국이기를 그친다. “나는 자유롭다는 것으로부터 자유로운가?” 사람들은 얼마나 르누비에가 근본적인 혁신들에, 또 행위의 위기들에 민감했는가를 알고 있다. “그것은 이상하게도 특이한 사물(chose 무엇)이며, 그리고 심층적 시선을 두렵게 하기 위해 만들어진 사물(무엇)이다. [이 뭣꼬는] 순간적이고 새로운 현상을 생산하는 능력이며, 진실로 앞선 것도 뿌리도 없지 않으면서 결국에는 사물의 영원한 질서와 필연적 연결도 없이 그 현상을 생산하는 능력이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유 작동이 이 작동 자체를 준비하는 전통들[이론들] 속에서는 먼저 형성되었다고 할지라도, 이 자유작동은 벩송 속에서는 갑작스런 행위로 여전히 남아있으며, 진솔한 시작이다. 우리의 창도력들은 우리자신 속에서 예견되지 않은 어떤 것을 가지고 있으며, 자아는 자신의 고유한 빛을 초월하기 위하여 필수적 모든 것을 내포하고 있다. 창조는 도처에, 즉 우리 속에, 그리고 우리 주위에 있다. 매 순간마다 내적 삶에는 넘어야 할 어떤 루비콘 강이, 말하자면 완수하기에는 위험스런 도약이 있다. 그것은 사람들이 갑작스런 몇 가지 결단들의 불합리성을 잘 인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결단들은 한 바탕의 연극을 터뜨리면서 우리 경향들을 따르기보다, 경향들을 앞서고 또 경향들을 인도하는 것 같다. “일어나다(avoir lieu)”라는, 그것을 다시 말해야할지라도, 영혼의 삶 속에도 자연 속에서도 헛된 형식성이 아니다. 고심[계산]할 사건만 있다. 그러한 것은, 행위의 결말(le dénouement, 대단원)이 관례적인 예식도, 즉 대단원의 막내림의 상징적 짓거리도, 전혀 아라는 것을 말하고자 한다. 거기에서 더 멀리 간다. 중요한 것은 결론이며, 그리고 그 결론은, 모든 대가를 치르더라도 반드시 사람들이 결론 내린 주장을 요구하면서, 정당화작업의 예식들을 그것[결론]의 쓰임새에 맞게 창조한다[만들어 낸다]. 따라서 모든 것은 대단원의 결말을 위해서 있다. 논리에 맞게, 즉 예식들이 [이루어질] 할 수 있을 것처럼 배열되어야 할 이유에 맞게 창조한다. 어느 누구도 예식의 공연에 대해, 예식의 아름다운 정식들에 대해, 이 모든 의례의 합법화에 대해 속지 않는다. 왜냐하면 단지 대단원의 결말은 약간의 희생(du prix, 대가)을 치르기 때문이고, 단지 그 결말은 우리가 모든 것을 그 결말에 아래로 배치하는 것이 장점이게 한다. 단지 결말만이 효과적이다. 그리고 효과적인 실재성들에 대한 벩송주의 만큼이나 배려깊은 철학이 어떻게 전투적이고 정복적인 자유에 대한 모든 창조적 결단들을 그 위에 놓지 않을 것인가?
이렇게 말하면, 벩송은 혁신들을 인정하지만 급진적 창조를 인정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왜 충만의 연속주의가 절대적 시작을 인정할 수 없는 이유를 보게 될 것이다. 벩송의 정신에서 창조적 연속화는 모순이 아니듯이 창조적 진화도 더 이상 모순이 아니다! 또한 자유는 모든 선호와 모든 선현존으로부터 빈 것 속에서 현기증 나는 선택과목(une option)이 아니며, 심지어는 임의적으로 표상의 흐름은 굴곡시거나 또는 급습하는 능력도 아니다. 자유는 급습하는[우연적] 클리나멘(un clinamen)[παρέγκλισις, reconnaît le hasard], 즉 생성의 급변적 편위(déclinaison)도 아니고, 오히려 지속의 극단적인 집중화[긴장성, 강도성]이다. 이런 결과로 벩송은, 르누비에와 르끼에에게 대립하여, 바램의 초월을 주장하기를 경계한다. 인간은, 머리에서 발끝까지 생성 속에서 잠겨있는 것처럼 자유 속에 푹 빠져있다. in ea vivimus, et movemur, et sumus[우리는 그것 속에 살고 움직이고 현존한다]. 자유는 생명적 환경 안에 있다. 벩송의 자유는 벨송의 기억의 표본에 맞추어보면, 쇠퇴할 수 없다(indéfectible, 영원하다). 영혼이 항상 스스로 추억하듯이, 이처럼 의식은 연속적 자유로부터 자유롭고, 의무들의 충돌들과 많은 도덕적 선택들로부터도 심지어 바깥에 있어서 자유롭다. 왜냐하면 지속 자체는 연속되어 있는 선택(cette option)이기 때문이다. 편을 갈라서 선택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이, 총체적으로 또 토대에서,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이 문제가 아닌가? “너가 [현재] 있는 바대로 되어라(생성하라)”, [그러면] 그 자가 너가 있는 바의 것이다! 심지어 인간은 자유롭기를 원하지 않을 때라도, 인간은 자연적으로 자유롭다. 또한 시론의 내밀주의는, 예외적이고 간헐적이고 불연속적인 위기들을 무시하고, 또 책무로부터 나오는 것이며 르누비에에서 도덕적 논쟁과 실천적 이성의 중요성을 표현하는 위기들을 무시한다. 벩송은 피아트(Fiat)가 그에게서는 결정적이고 혁명적인 약간의 특성을 상실하는 만큼이나 매우 자주 자유로운 선택을 생물학적 부화(개화)에 또는 과일의 유기적 성숙에 비교한다. 에픽테토스(Epictète, Ἐπίκτητος, 50-125/130)가 말했듯이, 무화과(une figue)는 한 시간 안에 제작될 수 없다. 즉 시간이 필요하다. χρόνου δεί .. Eita sukes karpos aphno kai mia ora ou teleioutai. 향수의 향내, 유출, 자연적 진화, 익어감, 개화와 결실. 여기서 모든 것은 레가토 연주법(Legato)의 연속성과 내재성 속에서 갑작스레 순간을 삼켜버리는 데 공헌한다. 도덕과 종교의 두 원천에서는 보다 단호한 방식으로 주도권(l'initiative)을 표상할 것이로다! 그러나 시론에서는 자유가 네오플라톤주의의 과정도 아니듯이 그만큼 크리스트교의 드라마도 불러일으키지 않는다. 게다가 감정토로도 아니듯이 그만큼이나 [생의] 도약도 불러일으키지 않는다.
따라서 자유는 결단의 어떤 총체성이며 또는 르누비에가 말하듯이 “인간 작동(현실태)의 특성 ... 그 특성[인격성] 속에서 의식은 동기와 이 동기와 동일시하는 운동체를 밀접하게 통합하기를 제안한다.” 자유 행위는, 한 인간이 저자인 모든 저작품들(les oeuvres) 중에서 그에게 가장 본질적으로 속하는 하나의 저작품이다. 그는 예술가가 자기 예술품에서 인정하는 것보다 더 잘 스스로를 그 저작품 안에서 인정하고 있고, 아버지가 자기 자식을 인정하는 것보다 더 잘 스스로를 인정하는 것이다. 그것은 보다 깊은 부성(父性)이며, 능력있고 내밀한 공감이다. 자유는 총체적 과거로부터 자유로워진다(se dégager). 자유는 일종의 상위 필연성을, 즉 자아에 의한 자아의 결정론[자기에 의한 자기의 생성 즉 자연]을 표현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여기서 원인이고 동시에 효과이라는, 또한 형상이자 질료이라는 동일자이기 때문이다. 생명의 사물[사정]들에서, 사람들은, 마치 호소하기에는 불가능한 궁극적 심급에로 이끌려지듯이, 항상 생명 그자체로 이끌려진다: 정신은 정신을 가정하고, 행위는 행위를 가정한다. 내적 경험은 우리를 원[순환]에서 벗어나게 내버려 두지 않는다. 이렇게 나는 나의 행위들의 각 행위를 위하여 전적으로 원인으로 남아 있다. 쇼펜하우어가 말하듯이, 나의 책임성은 겉보기에 내가 행한 그 무엇에, 실재적으로는 내가 [현재] 있다는 그 무엇에(ce que je suis) 참여한다. 나는 나의 본질(esse, 동사의 부정법)이기에 책임질 수 있다. 그런데 내가 [정지하고 있는] 나 자신 자체라고 하는 것이 잘못이다. 나는 나의 작동 안에 전적으로 [현재로] 있고, 또한 작동을 일으키는 동기들 안에 전적으로 [현재로] 있다. 총체적 인격으로부터 발산하는 자유 작동은 부분적으로 참여하는 영혼이 아니라 온전하게 전체의 영혼의 작품이다. 왜냐하면 자유로운 인간은, 플라톤의 용어에 따르면 ξὺν ὅλῃ τῇ ψυχῇ[영원 전체를 합하여] 원하고 결심하기 때문이다. 벩송은 이것을 시론에서 상기했다. 자유롭다, 그것은 이런 의미에서 전체적이고 심층적이다. 그리고 웃음에 대한 시론[웃음]은 정확히 강조한다. “생에서 모든 신중한 것은 우리의 자유로부터 삶으로 온다.” 신중한 이란 것, 그것은 바로 그러한 것이로다! 왜냐하면 만일 기계적인 효과에 오는 웃음거리가 지엽적이고 부분적인 우발사건이라면, 신중한 것은 총체적이다. 작동[자유의 현실화]은, 그것이 인격에 관하여, 보다 진솔하고 보다 더 표현적인 증거인만큼이나 자유롭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사회적 교환에 운명적으로 맡진 인격의 세속적이고 연설적인 할당부분에 관하여가 아니라, 오히려 필연적이고 내밀한 나의 인격에 관하여 이다. 즉 내가 책임을 질 수 있다고 느끼고, 진실로 “나-자신”이라고 하는 인격에 관하여 이다.
자유작동은 기호화하는(significatif) 작동이다. 반대로 결정된 작동 속으로, 보다 더 주변적이고 또 보다 더 비기호적인(insignifiant) 인격 속에 있는 그 무엇이 피난한다. 그것은 피상적이고 지엽적인 작동이다. 게다가 이렇게 생각된 자유는 마치 플라톤, 스토아학자들, 스피노자가 자유를 이해했던 것처럼, 무차별과도 또 결정론과도 동시에 대립되는 유기체적 필연성일 것이다. 그러한 것이 현자의 자유이다. 요청(exigence)으로써 생각되어지면, 자유는 우리에게 있어서 의무를 함축한다. 그 의무는 가장 가능한 한 우리 자신의 행위들과 동시대적인[현실태] 의무들로 남으며, 효과적 원인들의 과거 속으로도 회고적 정당화[검증화]의 미래 속으로도 도망치지 못한다. 그 자유는 허구와 대립된다. 자유는 허구에 반해아여 변호인들의 위선을 갖추고, 유창한 추상화작업의 감정(pathos)을 갖는다. 그러면 그때 그의 이름은 솔직성(sincérité 진정성)이다. (49NL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