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장 베르그송의 존재론: 존재의 긍정적 운동
들뢰즈 사상의 진화(Gilles Deleuze: An Apprenticeship in Philosophy, 1993)
마이클 하트, 김상운과 양창렬, 갈무리, 2004, P.477.
- 하트(Michael Hardt, 1960-), Gilles Deleuze: An Apprenticeship in Philosophy,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1993.
들뢰즈가 학문을 시작하면서 자기 나름대로 철학적 연습과정으로 벩송을 토대로 또는 시작으로 삼았다는 것이 나로서는 매우 신기할 정도이다. 그가 스승이 없이도 벩송의 저술들을 플라톤주의, 토마스주의, 주지주의, 신토마스주의, 유일신앙주의, 우화(mythe)주의를 전도된 철학으로 읽을 수 있었는지 궁금하다. 그는 스스로 “전복의 철학”이라 하겠지만.
나로서는 박홍규 선생님에게 강의를 들을 때 이해하지 못하여 고민을 했던 추억이 아직도 남아 있다. 유학중에 벩송의 작품만을 아무 참조 문헌 없이 9년간 계속 읽었는데 5년 정도 지났을 때, 벩송의 작품이 스피노자의 방식을 현대의 심리학과 생리학의 실증 토대위에 썼다는 점을 어렴풋이 느끼기 시작했고, 하루에 3시간을 베르그송, 5시간을 유태인 문제와 스피노자를 보면서 벩송은 플라톤주의(데카르트주의) 사고와 크리트트교적 신앙과는 전혀 다른 생각을 하였다는 것을 알았다. 벩송에게는 이데아(이념, 이상)라는 개념이 이중성이 있다는 것이다. 상층(하늘)의 이데아만큼이나. 지구(땅)의 이데아가, 개념적으로 같은 부류라는 것이다. 이 생각은 아마도 지구의 자기장에서 나왔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 이런 생각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들뢰즈의 이중구속도 또한 상반된 두 이념도 반대로 또는 모순으로 설명하기보다는 상보적 연관으로 보아야 현존에 대한 해명이 있을 수 있다는 점이 나온다. 이 점을 좀 더 확장하여 사회 또는 공동체에 적용해보면 주지주의적 사고는 자기 이외에 타자가 잠재적(경쟁에서)으로 적(敵)이 되고 나아가 (환타지로) 위험과 위협을 제공하는 공포스런 현존으로 만든다. 이것이 2천5백년 전통의 야만의 정치 또는 광기(공포)의 정치라는 것이다. 자연주의적 사유는 남극과 북극, 여 대 남, 밤과 낮이라는 대립의 구조는 상보와 교대라는 생각으로 공명, 공감, 감화(감응)을 필요로 한다는 점이다. 한반도의 북남을 생각해보면 괴물을 만들면서 살았다는 점이다. 들뢰즈는 내재성(자연, 다양체)의 생성과 창조를 말할 것이다.
자연주의 사유, 내재성의 발현(갈망, 열망, 욕망)이 소크라테스에 있었다는 것을 알아차리는데 까지는 또 다른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그리고 플로티노스를 읽으면서 알렉산드리아 학파는 다른 사유를 한 것이라는 점도 생각하게 되었다. 이런 생각을 이어가면서, 나로서는 서양철학사가 영혼과 신체의 이원성에 매여 억지 변증법을 부리는데, 벩송에서 영혼과 신체는 지구의 자전에서처럼 양극이 동시에 성립하는 이중화 현상으로 생각해 보았고, 그리고 들뢰즈가 이중구속이라는 정신분석학적 개념을 분열분석으로 바꾸면서 벩송처럼 이중분절로 사유한 것에서도, .. 형이상학의 이중성, 인지론(지식론)의 이중성, 윤리와 종교에서 이중성을 보게 되었다. 다시 이데아(이념)의 이중성이 자연에 대한 태도의 이중성에서 나온 것이 아닌가 한다. 이중성은 이원론이 아니다. 역지사지(易地思之)는 기본이고, 화의부동(和而不同), 견리사의(見利思義)라는 의미를 다시 생각한다. 이 모든 점에는 박홍규의 원인(시초)에서부터 생각해보자는 점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영혼, 그것은 불가역성이며, 삶도 불가역성이며, 게다가 불가예측성에 대해, 인간이 겸손할 때, 철학 일반이 인본주의(humaniste)가 아니라, 인도주의(humanitaire)로, 지식이 아니라 오랜 과정의 지혜를 추구해야 하지 않을까 한다. 인격의 자유에 관해서도 상품자유주자(le liberal, liberaliste)가 아니라, 인성자유주의자(le libertaire)로 살아가는 삶, 삶이 먼저고 철학은 다음이다. 그 다음이 인도주의로서 인성자유주의의 길이리라. (51VKF)
***
제1부: 들뢰즈의 철학사상: 철학에서의 도제수업 13
제1장 베르그송의 존재론: 존재의 긍정적 운동 45-103
“베르그송이 본질적으로 자신의 선배들을 비난하고 있는 것은 …” 들뢰즈가 베르그송을 지배적인 철학 전통에 대항한 논객으로 독해하고 있으며, 베르그송의 선배들이 지닌 과오들은 헤겔의 논리학에서 가장 집중된 형태를 띠고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45) [벩송이 비판하고자 한 것은 존재를 정지로 보는 형상형이상학, 사물을 요소들로 보는 인식론의 주지주의, 그리고 사회(공동체)의 폐쇄적 공간을 자연적이라고 느끼는 정태적 도덕과 종교, 이것들은 전통적으로 상층주의자들의 사고방식이다. 사유는 다른 것이다.]
그러므로 베르그송이 차이 개념을 탐구할 때 들뢰즈가 설정한 핵심적 과제는 이중적(twofold)이다. 첫째. 그는 존재론적 전통에 대한 베르그송의 비판을 이용하여 헤겔의 변증법과 특히 존재의 부정적 논리학이 갖는 취약점을, 즉 {헤겔의 변증법과 존재의 부정적 논리학이} 차이에 대한 잘못된 개념화라는 것을 드러내야 한다. .. 둘째, 그는 베르그송이 말하는 차이 속에서의 존재의 긍정적 운동을 정교하게 만듦으로써, 이 운동이 어떻게 존재론에 대한 하나의 실행 가능한(viable) 대안을 제공하는가를 보여주어야 한다. (47)
[하트는 들뢰즈 벩송 연구를 두 시기로 나눈다. 하나는1956년까지 다른 하나는 1957년부터라고 한다. 1957년부터 조교였다. (1956년에서 1962년) 8년간 공백 .. ]
[1947(스물둘) 대학을 졸업하다. 이폴리트와 캉길렘의 지도로 흄에 관한 논문을 제출하다. 이는 1953년 경험론과 주관성(Empirisme et subjectivité)이라는 제목으로 PUF출판사에서 출판하였다.
[1949(스물넷) 깡길렘(Georges Canguilhem, 1904-1995)은 1949년 그에게 『본능과 제도(Instinct et Institution)』라는 작은 책의 방향을 제시했었다.
[1956(서른하나) 들뢰즈(Gilles Deleuze), "베르그송에서 차이개념(La conception de la différence chez Bergson)" dans Les Etudes bergsoniennes 4, Paris, PUF, 1956, pp. 77-112. <베르그송모임(Association des amies de Bergson)에서 1954년 5월에 발표
[1956 Gilles Deleuze, "베르그송(Bergson)" dans Les Philosophes célèbres, sous la direction de Merleau-Ponty, Paris, Mazenod, 1956. pp. 292-299 (457). 메를로-퐁티(Merleau-Ponty, 1908-1961)는 마즈노(Mazenot)사전의 출판의 기회에, 그에게 베르그송의 항목을 집필할 것을 권했다.
[1957(서른둘) 기억과 생명(Mémoire et vie, 1957)(Textes choisis), PUF, 1957,
[1966 베르그송주의(Le Bergsonisme)를 출간(PUF)하였다. 직관, 지속, 기억, 생명 등의 개념을 조명하면서, 베르그송의 보수주의자 정신주의자의 이미지를 떨쳐버렸다고 평가되는 책이다. 베르그송은 질료의 차원에서 발생을 중요시하는 합리적 경험주의자이다.]]]
1절 결정과 내활적 차이(efficient difference) 49-66
[하트는 결정론에 대비하여 비결정성 또는 예측블가능성에 대해 논한다.- 하트는 개념으로 다루기 때문에 심리학에 대해 주목하지 못한 것 같다.]
베르그송에 대한 들뢰즈의 초기 독해는 부정적 결정과정에 대한 공격에 토대를 두고 있다. .. 그것은 헤겔의 스피노자 독해와 비판이다. 헤겔은 스피노자의 편지들 가운데에서 한 구절을 따온 다음에 이 구절을 다시 스피노자에 반하여 설정함으로써, 그것을 자신의 논리학의 중심적 격언으로 만든다. “모든 결정은 부정이다(Omins determinatio est negatio). (49)
나[하트]는 인과성의 존재론적 중심성과 존재의 능산성(productivity)에 대한 스콜라철학적 개념화를 참고할 때, 들뢰즈의 설명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제안한다. 여러 측면에서 들뢰즈는 베르그송의 존재론을 스콜라철학으로 독해하고 있는데, 이러한 스콜라철학에서 차이에 관한 논의가 인과성에 관한 담론으로 대체된다. (55)
존재가 필연적이기 위해서는 근본적인 존재론적 원인이 그 효과에 내부적이어야만 한다. 이러한 내부적 원인이 바로 작용인(efficient cause)이다. 작용인은 스콜라철학의 존재론적 기반들에서 중심적 역할을 한다. 더군다나, 바로 이것이 지닌 내부적 본성 때문에, 존재를 실체로서, 자기 원인(causa sui)으로서 유지시킬 수 있는 것은 작용인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베르그송적 맥락에서 내활적 차이(efficient difference)란 존재의 내부적 동력이 되는 차이라고 말살 수 있을 것이다. 즉 내활적 차이는 존재의 필연성과 실재적 실체성을 유지시킨다. 이러한 내부적인 생산적 동학을 통해, 내활적 차이의 존재는 자기원인(causa sui)인 것이다. (56-57) [우리로서는 스피노자나 벩송이 아리스토텔레스와 스콜라철학의 효과인(efficient cause)과는 전혀 관계없는 자연 즉 생명의 자기 변용이라 생각한다. 하트는 형상론의 영향으로 해석하는 것은 플로티노스를 플라톤주의로 해석하는 것과 맥락을 같이 하는 것으로 보인다. (51VKE)] [내부적 원인으로서 자기원인이란, 박홍규에 의하면, 그리스 철학에서 시초(arche, 원질)이다. (51VKH)]
베르그송에게 있어서 차이는 내부적 동력 - 이를 베르그송은 직관(intuition)이라고 부른다 -에 의해 추동되는 것이다. 반면 플라톤[주의]에 있어서 이 역할은 목적성으로부터 오는 외부적 영감(inspiration)에 의해서만 수행된다. (57) [벩송에게서 내부적 동력은 충력, 추진력 등으로 생성과 창조를 이루어 간다. 기계적 진화도 목적성의 진화도 아니라, 자기 권능의 확장이다. 스피노자에서 권능의 변용태이다.]
“베르그송에게서… 사물[영혼]은 우선, 즉각적으로[무매개적으로] 그 자신과 다르다. 헤겔에 의하면 사물은 그것이 우선 자신이 아닌 모든 것과 다르기 때문에 그 자신과 다르다.” 베르그송에게서 사물을 즉각적으로[무매개적으로] 그 자신과 다르다 다시 말해서 사물의 차이는 내부적이고 내활적 생산을 통해 유지된다. 기계론과 플라톤주의가 지닌 공통적인 결함은 그것들 모두가 차이를 외부적 지지물에 의존한다고 파악한다는 점이다. (60)
헤겔의 변증법[네오토미즘]은 기계론 및 플라톤주의처럼 존재에 우연[우발, accident]을 도입할 뿐 아니라, 존재의 구체성과 단독성(singularity, 특이성)을 포착하지도 못한다. “이제 베르그송이 플라톤주의에 대해 제기할 수 있었던 반대가 그것이 여전히 외부적인 차이의 개념화에 머물러 있다는 것이었다면, 그가 모순의 변증법에 대해 한 반대는 그것이 단지 추상적이기만 한 차이의 개념화에 머물고 있다는 것이다.” (61-62)
끝으로 헤겔적 변증법은 절대적으로 외부적인 부정적 운동을 가지고 있기에 본성의 차이도 정도의 차이도 포착할 수 없다. 변증법의 존재는 우발적일 뿐만 아니라 추상적인 채로 머문다. “정도[잠재성, 노력]도 뉘앙스도 담지할 수 없는 것 바로 그것이 추상이다.” (64)
“사람들은 차이를 결정의 게임(jeu)으로 대체시켜 놓았다.” (64)
나중에 니체에 대한 저술에서나 또는 차이와 반복에서 베르그송 연구의 둘째 국면에서 들뢰즈가 변증법을 다시 공격할 때, 그는 언제나 변증법의 외삽(extrapolaration)이나 파생물을 다루고 있다. (65) [부정성에서 지향(aufheben)으로 등장하는 긍정성은 데우스엑스마키나의 작용과 같은 외삽법이거나, 잠재성의 작동(acte)이 여러 갈래로 나올 수 있는 파생(편위, 탈주) 중에 현실적으로 적응 또는 유용한 것을 인정하는 경우처럼 파생물로 보기 때문이다.]
“베르그송이 결정[결정성]에 대해 이야기할 때, 그는 우리에게 이성을 포기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만드는 과정에 있는 사물[생명, 영혼]의 진정한 이성에 도달 할 것을, 철학적 이성(이것은 결정이 아니라 차히이다)에 도달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사실 우리는 베르그송의 “미결정”(비결정성)이 헤겔의 ‘결정’과 아무런 관련이 없으며, 오히려 그것은 실재적 존재의 창조성과 독창성 관념과, 즉 예측불가능성(l'imprévisible)의 관념과 관련된다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66)
2. 질에서 양으로의 이행에 있어서의 다양체 66-75
1960년대 중엽 들뢰즈가 다시 베르그송으로 돌아가 베르그송주의를 집필할 때, 그는 초기 논의들 가운데 많은 것들을 다시 다루었다. 하지만 논쟁의 기반은 약간 변했다. .. 들뢰즈는 자기의 베르길리우스(Virgil)인 베르그송을 옆에 가까이 두고서, 단지 헤겔의 존재의 논리에로 한 단계 더 깊숙이 내려간 것과도 같다. (66-67) [이글에 트릭이 있다. 들뢰즈가 모방하려는 벩송은 인민의 인도주의자(humainitaire)이다. 단테의 사고에는 우화적 천국으로 이끈다는 점에서 토미즘에 가깝다. 벩송은 들뢰즈의 길을 인도(引導)하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생성 창조의 길을 찾는 것이다. 그 또한 다양체로서 리좀처럼 살아가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들뢰즈가 베르그송주의에서 일자와 다자의 문제에 접근할 때, [제논의] 변증법적 해결에 대한 그의 비판이 그가 이전에 결정의 변증법적 과정에 대해 행한 비판과 매우 유사하다는 것을 놀랄만한 일이 아니다. “철학에는 일자와 다자를 결합하는 이론이 많이 있다. 그 이론들은 일반관념들을 가지고서 실재를 재구성하고자 하는 공통점이 있다.” (67-68) - [벩송의 원저(DI)에서 비판들은 과정이 있다. 수에 대한 비판, 정지에 대한 비판, 공간에 대한 비판, 형상(이데아)에 대한 비판이다. 들뢰즈가 이를 깊이 있게 이해했다고 본다. 그 내용을 좀 더 다양하게 보여준 것이 의미의 논리이고, 풍부하게 서술한 것이 차이와 반복이다.]
“자아(self)는 하나이고(정립), 또한 그것은 여럿이며(반정립), 그런 다음 그것이 다자의 통일이다(종합)라는 말을 우리는 듣고 있다. 또는 일자는 이미 다자라는 마을 듣게 되거나, 존재는 비-존재로 옮겨가며 생성을 낳는다는 말을 듣는다.” (68) - [주지주의자들이 자아가 하나라고 하는 것은 자연주의자에서는 이미 다양체이고, 현실적 표출에서 수렴(convergence)으로 출현(표상)된다. 게다가 형상론의 존재는 등질적으로 상징일 뿐이고 원래(본질적) 존재라는 것은 아직 알려지지 않은(정해지지 않은 부정) 존재로서 온존재이며, (비)존재, 비규정적 존재이다. 이 온존재는 항상 생성과 창조의 길을 걷고 이 길을 (영혼의) 갈망(욕망)이라 부르 것은 소크라테스였다. 이를 잘 살리면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이 아니라 ‘분열분석’이 될 것이다. 이는 자연 또는 지구가 (자기장을 형성하는데) 이중구속(이중분절)을 형성한다. 남극과 북극은 대립이지만 보완적이지 이걸 모순으로 한쪽을 부인하는 짓은 유일신앙(북극) 종교의 적대의식에서 나온 것일 뿐이다. 이 허구적(우화적) 의식이 2천5백년을 유지해온 것을 한탄한 것이 벩송이다. 새로운 전환을 말한 것이 벩송이라면, 이를 빗대어 다양하게 확장한 것은 들뢰즈이다.]
헤겔은 플라톤의 훌륭한 재능과 비교했을 때 조심성 없는 변증법적 푸주한처럼 보인다. 실재적 존재[현존]에서 통일성과 다양체의 단독적[특이적] 개념화[개념작업]에 도달하기 위해서, 우리는 플라톤 식으로 ‘어떤 존재[현존], 어떤 통일성, 어떤 다원성인가?’라는 질문에서 시작해야 한다. “베르그송이 변증법이나 대립자의 일반개념(‘일자’와 ‘다자’)에 반대하여 주장하는 것은 다양체에 대한 섬세한 지각이고 무엇과 얼마나(combien)에 대한 섬세한 지각이며, 그가 ‘뉘앙스’ 또는 잠재태의 수(nombre en puissance)라고 부르는 것에 대한 섬세한 지각이다.” (72-73) [사실, DI 작품이 EC보다 훨씬 먼저, 주지주의 또는 플라톤주의에 대한 비판이다. 벩송이 논문 발표 당시에도 심사자들이 잘 이해하지 못했다고 불평했는데, 이를 이해해 준 것은 EC(1907)를 읽은 윌리엄 제임스였다는 것이다. (51VKF)]
“분자와 입자들을 다루고 있는 물리학은 원자 때문에 고통을 당한다. 이는 개인들의 특수 의지에서 출발하는 국가 이론의 경우가 그런 것과 똑 같다.” 질에서 양으로 이행은 존재론적 문제의 중심부에서 정치적 문제를 드러낸다. 판돈(논란거리)이 상당히 큰 셈이다. (73) [헤겔이 죽는 해(1831) 쯤에는 원자가 존재가 아니라 현존이며, 원자 속에는 핵과 전자가 있고, 핵안에는 양성자와 중성자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 언제나 질에서 질로 이해이며, 표면(현상)은 배치(결합방식)의 문제가 될 것이다. ]
“베르그송에게서 문제는 다자를 일자에 대립시키는 것이 아니라, 두 가지 유형의 다양체를 구별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질서[위계]의 다원론에 반대하여, 조직화[들뢰즈 계열]의 다원론을 지지하는 입장을 창안한다. 그리고 이것은 일자와 다자의 통일에 대한 헤겔의 국가철학으로부터 훨씬 더 떨어져 있는 것이다. (75).
3. 존재의 적극적 유출 75-89 The positive emanation of being
[온존재는 능동성이자 이질적이고 잠재성이며, 그의 현존은 구체적이고 실재적이며 끊임없는 유출 또는 발현(창발)이다. 그러한 실체는 자연밖에 없다. 신과 절대자는 상징물이며, 추상성으로 현존의 능력들이 없으나, 기표체계로서 기호적 언어는 명령과 위계체계(다단계)이다.]
이제 헤겔적 변증법을 겨냥하고 있는 공격적 운동에서 들뢰즈가 베르그송에게 발견하고 있는 긍정적 대안으로 나아가 보자. 대안의 용어들은 이미 비판에 의해 주어져 있다. 긍정적ㆍ내부적 운동을 통해 존재[현존]는 단독성과 특정성에서 질적으로 규정되고 구체화되어야 한다. (75)
잠재적인 것(the virtual)은 존재의 단순성이며, 그 자체에 있어서 순수 추억(le souvenir pur)이다. 하지만 순수한 존재, 잠재적인 존재는 추상적이지도 비차이적이지도 않다. ... 그것은 분화{차이화}의 내부적 과정을 통해 질적 규정을 받으며 실재적이다. “차이는 결정이 아니다. 그것은 생명과의 이러한 본질적 연관에 있어서, 하나의 분화이다.” 존재는 즉각적으로[무매개적으로], 내부적으로 그 자신과 다르다.
왜냐하면 존재의 차이[차히]는 그것의 바로 핵심부에서 “생명이 자기 내부에서 담지하고 있는 내적인 폭발력”으로부터 생겨나기 때문이다. 존재에 생명을 불어넣는 생의 약동(l’elan vital, 생의 도약)은 다시 말해 분화의 생생하게 살아있는 과정은 존재의 실재적 실존과 순수한 본질을 연결시킨다. “잠재성은 자기 자신을 분열시키는 가운데 실현되는 바로 그런 방식으로 실존하며, 따라서 자기 자신을 실현하기 위해서 자기자신을 분열시킬 수 밖에 없다. 분화는 자기 자신을 현실화하는 잠재성의 운동이다.”
들뢰즈는 지속[기억]과 물질의 구분을 정확히 실체-[속성]양태의 전통적 용어들로 규정한다. “지속은 능산적 자연(natura naturans)과 같고, 물질은 소산적 자연(natura naturata)과 같다.” 하지만 왜 지속이 자기 자신과 다를 수 있고, 물질이 그럴 수 없는가? (78-79) [자기 기억과 물질, 즉 영혼과 신체에서 영혼은 이질적 반복이고 신체는 동질적 반복, 인식적으로 정체성 대 동일성의 대비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51VKF)]
들뢰즈는 지속의 영역이 공간보다 더 심대한[심층적] 다양체를 제공할 뿐만 아니라 더 심대한 통일성 역시 제기하고 있음을 주장한다. .. 그러므로 존재의 본질적 본성을 실체적 통일성으로서 인식하기 위해서 우리는 존재를 시간에 입각해서 사고[사유]해야만 한다. “하나이고, 보편적이며 비인격적인, 유일한 시간”
이와 관련하여 베르그송은 존재의 유출(emanation)에 관한 철학자이며, [이점에 있어서] 플라톤적 공명이 매우 강력하다.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들뢰즈는 베르그송이 소중히 여기는 플라톤적 구절에 주목한다. 거기에서 그는 철학자들 ‘자연적 마디를 따라 칼질을 하는’ 훌륭한 요리사와 비교한다.
베르그송의 현실화[실현화]에 대한 들뢰즈의 묘사를 플라톤적 유출로부터 구분하는, 적어도 두 가지 측면이 있다. 첫째 들뢰즈는 ‘잠재적인 전체(the virtuel Whole)’가 존재의 타락이 아니라고 – 그것은 잠재적인 것에서[는] 관념의 제한도 모사도 아니다라고 – 주장한다. .. 둘째 들뢰즈는 베르그송의 존재론적 운동이, ‘생명이 그 자신 속에 담지하고 있는 내적인 폭발력[추진력]’에 의해 추동되는, 존재의 절대적으로 내재하는 내활적(efficient) 생산에 의지하고 있다. (81)
4. 생성의 존재, 그리고 현실적인 것의 조직화 89-103
The being of becoming and organization of the actual
창조적 조직화(creative organisation)라는 질문은 심각한 문제를 제기한다. 그리고 마침내 이는 베르그송의 사유가 들뢰즈에게 불충분한 것으로 판명되는 것처럼 보이는 지점이다. (89) [새로운 공동체의 조직화는 단번에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고, 목적이 있어나 하나의 귀결점이 있는 것도 아니다.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하는 신비가가 필요하다. 그 신비가가 인민이면 누구나 될 수 있다는 것이다(MR 마지막 구절). 인민들이 신들이 되는 세상을 창조해 나갈 것이다. 나로서는 이런 세상이 화엄의 세상으로 읽혔다. (51VKF)]
들뢰즈는 현실적인 것의 수렴적(convergent) 운동이 있음을 시사하듯이 보인다. “실재{적인 것}는 자연적 마디들이나 본성상의 차이들에 따라 잘라지는(se découpe) 것일 뿐 아니라 그것은 또한 똑같은 이상적이거나 잠재적인 지점으로 수렵되는 길을 따라 다시 교차하는(se recouper) 것이기도 하다” 현실적 다양체를 잠재적 통일성과 연결시키는 이와 같은 르구쁘망(recoupement) 또는 교차의 과정은 정확히 무엇인가? 들뢰즈는 이 점을 폭넓게 다루고 있지 않다. (90-91) [하트가 들뢰즈의 다음측정을 알아본 것은 좋은 일이다. 다음측정은 내가 알기로 벩송이 단 한번 쓴 용어이다(MR 263). 그리고 들뢰즈는 이 책(Bergsonisme)에서 3쪽이나 할애해서 다루고 있다.]
우리는 베르그송이 말하는 기억의 두 가지 운동 속에서 잠재적인 것과 현실[실재]적인 것 사이의 소통에 관한 또 하나의 사례를 발견한다. 과거를 향한 포함적인(inclusive) 운동 속에서 팽창하고 확장하는 ‘회상-기억’과 특수화(particularization)의 과정으로서 미래흘 행해 집중하는 ‘수축-기억’. 다시 말해 뒤를 돌아볼 때 우리는 보편적인 것(회상-기억)을 발견하고 앞을 내다볼 때 우리는 개별적인 것(수축-기억)을 발견하게 된다. (92) - [하트가 오해한 것 같다. 기억의 두 종류는 미래와 연관이 없다. 그리고 미래와 연관은 신체를 통한 행동과 관련하여 8자 회로의 문제이다. 들뢰즈가 말하는 것은 다른 차원이다. 이야기 하자면 길지만, 들뢰즈로서는 “이점에서, 추억-기억 속에 압축(작용)-기억이 개입되어 있으며, 어느 정도로는 추억-기억의 층계참을 잡고 있다”(p.56) 추억들은 층계참들 정도이다 라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우리는 현재에서 과거로, 지각(la perception)에서 추억(le souvenir)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과거에서 현재로, 추억에서 지각(la perception)으로 간다.” 이러한 용어들 속에서, 현실적인 것의 조직화는 지각[작용]으로부터 새로운 ‘추억’으로 나아가는 운동이어야 하는바, 그것은 실재적 조직화의 공통지점으로서 미래 기억(일종의 전미래futur antérieur 또는 문법적의미에서 미래완료)이 될 것이다. (92) [하트가 전미래(futur antérieur)를 언급했다는 것은 흥미롭다. 들뢰즈가 언급한 것이 아니다.]
들뢰즈는 베르그송주의의 마지막 페이지들에서 조직화와 사회화의 문제를 진지하게 다루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 [들뢰즈는 구별 된 섹션(원문 111-119.)은 사실의 선에서 끝인 인간, 그리고 집단을 이루는 사회와 종교에 대해 요약적으로 설명한다.]
“인간은 마침내는 능산적 자연(la Nature naturante)을 표현하기 위하여, 도식들을 뒤섞을 수 있고, 자기 자신의 도식과 자기 자신의 조건을 뛰어 넘을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인간의 자유와 창조성에 대한 설명은 {그 뜻이} 즉각적으로 명확하지 않다. (93) - [벩송은 MR에서 사회적으로 도덕적 영웅이고, 종교적으로 신비가(걸승)의 해결할 것이다.]
# 들뢰즈와 해석 96 Remark: Deleuze and interpretation
[내용을 쓰지 않고 간단한 감상을 쓴다.]
[[일반적으로 공자에 따르면, 15세를 지학(志學), 30세를 이립(而立), 40세를 불혹(不惑), 50세를 지천명(知天命), 60세를 이순(耳順), 70세를 종심(從心)이라 한다. (子曰 吾十有五而志于學(자왈오십유오이지우학)하고, 三十而立(삼십이립)하고 四十而不惑(사십이불혹)하고, 五十而知天命(오십이지천명)하고 六十而耳順(육십이이순)하고 七十而從心所欲(칠십이종심소욕)하되 不踰矩(불유구)라. <爲政(위정편)>) / 벩송을 정리한 들뢰즈(Gilles Deleuze, 1925-1995)는 마흔쯤에 니체(Nietzsche)를 출판하면서 니체 텍스트를 정리한다. PUF)하였다. 여기서 니체의 텍스트를 발췌 편집하였다. 그의 새로운 방향으로 사색이 전개되는 시기이다.]]
[[저자 하트는 들뢰즈의 벩송 읽기에 대한 비판의 입장으로 두 사람을 들고 있다. 둘다 여성이다. 하나는 영국 학자인 로즈(Gillian Rosemary Rose, 1947–1995)이고, 다른 하나는 프랑스 철학자인 바르텔미-마돌(Madeleine Barthélemy-Madaule, 1911–2001)이다.
전자는 헤겔주의를 따르면서 신칸트주의를 비판하는 입장이라고 하며, 니힐리즘의 변증법(Dialectic Of Nihilism: Post-Structuralism and Law, 1984)비판 속에 제장 “새로운 베르그송주의”("The New Bergsonism") 인데, 논자는 들뢰즈가 벩송주의를 자연철학으로 만들고 있다고 하는데, (우리로서는 자연(본성)주의 맞다) 이것이 들뢰즈가 베르그송주의가 아니라고 한다.
후자는, 초인간적 또는 비인간적으로 정식화할 수 없다고 하는데, 비인간적이란 자연 자체가 비인격적으로 시작한다는데 대해 아무도 이의를 제기 하지 않는다. 내가 번역한 바 있는데, 그녀는 벩송을 플라톤주의 또는 카톨릭사상으로 파악하는 잘 못을 범했다.
저자가 두 비판은 들뢰즈의 기획을 오독한데서 오는 것이라 한다. 나로서는 오독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이들이 벩송의 새로운 질료형이상학적 기반 또는 문제제기가 무엇인지를 모르고 있기 때문이거나, 자신들의 종교적 입장 때문에 벩송을 정면으로 바라보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한사람은 앵글로색슨의 특성을 드러내고 다른 한사람은 카톨릭신자로서 자기 신앙을 옹호하고 있을 뿐이라 하겠다.(51VKG)]]
기껏해야 일의성은 우리에게, 그것이 존재론적 동등성(equality)과 참여(participation, 분유)에 대해 갖는 함축을 통해, 정치학에 대한 직관을 제공할 뿐이다. 이 동등성은 들뢰즈 설명에 의하면, 존재의 아나키에 ‘왕관을 씌우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직관이 들뢰즈 사유에 있어서 정의(正義)에 대한 참다운 개념화[작업]를 낳게 하기 위해서는, 결국 존재론에서 정치학[활용론]으로 나가게 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두 개의 중요한 국면을 더 거쳐야 할 필요가 있다고 나는 주장하고자 한다. 첫째, 우리는 니체 연구에서 발전된, 내활적 역량(자신을 현시하는 내부적 힘)이라는 개념화를 살펴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법과 사법주의(juricidism)에 대한 공격의 기초를 놓고 있기 때문이다. 둘째 우리는 스피노자 연구를 살펴보아야 한다. 거기에서 우리는 공통개념(common notions)에 대한, 사회적으로 구성된 실천에 대한, 그리고 권리에 대한 탐구를 발견하는데, 이로서 들뢰즈는 법에 대한 적극적 대안을 정교화할 수 있는 것이다. 정의(jus) 대 법(lex). 이것이야말로 법률주의(legalism)와 사법주의(juridicism)에 대항하는 들뢰즈의 입장을 훨씬 더 적절히 정식화하는 것이다. (103) [집단(대중)과 공동체에서 도덕론의 문제와 사회 제도와 국가에서 정의에 관한 법률제도의 문제에 대하여 관점이 필요할 것이다.]
(10:11, 51VKG) (12:6, 51VKH)
*** 인명록 *** **** ***
바르텔미-마돌(Madeleine Barthélemy-Madaule, 1911–2001), 프랑스여성 철학자. 프랑스 소르본 대학에서 전임강사(maître-assistant)를 지냈다. 베르그송과 떼이야르 드 샤르당(Bergson et Teilhard de Chardin, 1963)(Seuil), 베르그송, 칸트의 반대자(Bergson adversaire de Kant, 1965)(PUF), 베르그송(Bergson, 1967)(Seuil), 베르그송(Bergson, 1968)(PUF) ("Lire Bergson")
벩송(Henri Bergson, 1859-1941) 프랑스 철학자.
칼리클레스(Calliclès, Καλλικλῆς, c. 484–전 5세기 후반) 플라톤의 대화편(“Gorgias”편)에 나오는 인물, 수사학자로서 귀족적 도덕을 옹호한다.
두란테 델리 알리기에리(Durante degli Alighieri, 1265-1321) 두란테의 약칭인 단테(Dante) 또는 단테 알리기에리(Dante Alighieri)로 널리 알려진 이탈리아의 시인. 피렌체의 알리기에리 혹은 알라기에리(Alagh(i)eri) 가문의 일원이다. 두란테 알리기에리의 이름은 "장수하는 날개가 달린 자"라는 뜻인데 그것은 그의 작품이 남긴 다양한 영향들의 결과를 예언한 실로 상징적인 이름이라 할 수 있다.
들뢰즈(Gilles Deleuze, 1925-1995) 프랑스 철학자.
마이클 하트(Michael Hardt, 1960-) 1990년 워싱턴 대학에서 질 들뢰즈 연구로 박사 학위. 안또니오 네그리와 함께 『디오니소스의 노동』(네그리와 공저, 조정환 옮김, 갈무리, 1996), 『제국』(네그리와 공저, 윤수종 옮김, 이학사, 2001)을 썼다. 안또니오 네그리의 『야만적 별종』(윤수종 옮김, 푸른숲, 1997)을 번역, 빠올로 비르노(Paolo Virno, 1953-)와 함께 『이딸리아의 급진사상』(1996)을 편집하는 등 이딸리아의 아우또노미아 사상을 영어로 소개하고 있다. [가족의 종교로서 카톨릭이 아닐까 한다. 그러나 그의 종교성향은 기록상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1770-1831) 관념철학을 대표하는 독일의 철학자. .
베르길리우스(Publius Vergilius Maro, 영어: Virgil 버질[*], 전70-전19)는 로마의 국가 서사시 《아이네이스》의 저자이다. 로마의 시성이라 불릴 만큼 뛰어난 시인으로 이후 전유럽의 시성으로 추앙받게 되는 시인으로 단테가 저승의 안내자로 그를 선정할 만큼 위대한 시인이었다.
로즈(Gillian Rosemary Rose, 1947–1995) 철학, 사회학 분야 학자. 유태인 가계이지만 신자활동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 네오칸트주의와 후기 칸트주의를 비판하면서 헤겔의 사변적 사고를 옹호하고 있다. Hegel contra Sociology (1981), Dialectic Of Nihilism: Post-Structuralism and Law (1984) Judaism and Modernity: Philosophical Essays (1993) ("The New Bergsonism")
* [베르노(André Bernold 1958-), 작가. “Suidas” 01/09/1995(Philosophie, n 47.)에서 들뢰즈를 혈거인(troglodyte)이라 칭하기도 한다. Deleuze épars, Textes recueillis par André Bernold et Richard Pinhas, 2005 / épars a. 산만한, 어수선한, m 마른 번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