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우리교육> 1997. 12월호
우수영중 3년차.
아이들과 사계 들꽃 벽그림을 그리자 했답니다.
가끔 포스터나 붙는 교무실 벽이 욕심났던 것.
처음엔 신나게 붓 들고 함께 벌였지만
아초에 이것들과 더불어 완성하겠다는 것은 정확히
오판이었고 완벽한 모험이었으며
돌이킬 수 없는 실패일 수 밖에 없음을 정말 난 몰랐을까.
함께 그린다는 명분을 앞세우고 아이들과 이야기하며
우수선히 그림놀이라도 하는 것인데,
이렇게 저렇게 시켜놓고 보면 금세 망치고 다시 시키면 곧 베리면서
엎치락뒤치락허다 결국 "걍 션섕님이 혈테니깨 너덜은 쉬라" 혀고 말았죠.
짝짝짝...
환호와 함께 교무실에 걸렸답니다.
아침마다 출근하는 샘님들이 벙글벙글입니다.
와따~로 시작되는 그림이야기꽃이 시도 때도 없었죠.
엉?? 왼쪽의 머이마는 주대희죠.
지금 광주 화단에서 아조 열심히 하는 화가가 되었답니다.
고등학교 때 상을 많이 받고 조대미술대회에서 최고상인가 받더니
조대 장학생으로 들어갔죠.
옛날에 즈그 동창들 데리고 와서 나를 찾길래 한 번 만난 뒤로
안즉 접촉이 없답니다. 왜냐.
친구들은 영양사도 되고 도배사도 되고 뭣도뭣도 하여 번다는데
얀 구석에서 웃기만 허고 말이 없어요. 애송이 화가로 뭘 벌겠습니까?
지 중 1 때던가 그 우수영중핵교에서 만났을 때 가을에 미전을 하면
망치도 갖다 주고 그림도 잡아주고 아침부터 밤까지 나를 쫄쫄 따라댕겨요.
고때 언젠가 "넌 만들기에 재조가 쫌 있다" 했던 것인디 것이 계기가 되어
필경에 목포예고를 진학했다는 거 아닙니까?
학교 근처에서 슈퍼마켓을 했던 지 아버지는 훗날 나를 댑다 원망합니다.
그 칭찬만 있었으면 됐지 어쩌다 진학 학교에 관해서도
도와주고 조언해주었으니 말입니다.
그 때야 물론 우리 대희가 그림도 잘 그리고 상도 많이 타오니까 좋았는디
대학을 진학하고 보니 왈 먹고 살 일이 까마득하여 그 때 그 선생이 밉더랍니다글씨...
녀석이 수묵화를 하는데.
그 중 3 때나 됐을까 때 내 전시회 도록의 수묵 인물을 보고 막 배껴요.
그 길이 지 인생의 길이 되고 말았으니 어쩝니까. 절대 안 보죠.^^
그 언동에 또 한나 더 있었죠. 신혁.
쪼꼬맣고 이쁘기로야 사위삼고 싶을 머시매!
아버지가 교통사고로 몸을 쓰기 어려운데 이놈 재주를 칭찬했고
급기야 이놈이 미술을 하겠다고 하는데 어쩌냐고 물어를 와요.
머뭇거리다가 필경에 주대희 놈과 같은 죄과를 빚고 말았죠.
얀 그 시골 촌구석에서 중앙대학교를 버젓했고
결혼도 번듯혔으니
오늘날 간간이 전화질을 혀도 그려 잘 사냐? 허면서
공연히 가족들 안부도 묻곤 했죠.
참 아닌 선생노릇입니다...
애들 ㅋ인기가 하필 미술선생이다보니
이런 생애의 사단이 난 거고 그 아비 어미가 몰래 쏘는 화살은
어떻게든 잘 보이지 않는 곳에 숨어 있어야 겨우 안심이 되니
아조 안 만나는 거이 상책일 밖에요.
그 첫 교단 여양종합고등핵교에서도 나를 쫄쫄 따라댕겼던 애가 있었죠.
종군이는 훗날 간판쟁이가 되었는데 나이가 쉰 댓 됐어요.
한땐 여천산업공단을 끼고 간판이며 표지판며 여러 디자인이
잘 나갔던 시절이 있었죠만 차차 디지털에 죄 뺐겨버리고 인자는 아마
집 짓는 어떤 대열에 끼어다닌다죠...
아, 야들아~ 사계절 배곯지 말고 자식 교육 잘 시켜서
부디 잘 살거라~~
미안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