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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달마법온족론 제12권
21. 연기품 ②
4-2) 명색(名色)을 반연하여 촉(觸)이 생긴다
어떤 것을 ‘명색(名色)을 반연하여 촉(觸)이 생긴다’고 하는가?
이를테면 눈[眼]과 빛깔[色]을 반연하여 안식(眼識)이 생기고 이 세 가지가 화합하기 때문에 촉(觸)이 생기는데,
여기서 이 눈과 빛깔을 말하여 ‘색(色)’이라 하고,
곧 거기서 생기는 느낌[受]ㆍ생각[想]ㆍ지어감[行]ㆍ의식[識]을 바로 ‘명(名)’이라 하나니,
이와 같은 명색을 반연하여 눈의 접촉[眼觸]이 생기는 것이므로, 이것을 바로 ‘명색을 반연하여 촉이 생긴다’고 한다.
나아가 뜻[意]과 법(法)을 반연하여 의식(意識)이 생기고 이 세 가지가 화합하기 때문에 촉이 생기는데,
여기서 모든 의식이 인식하는 물질[色]을 말하여 ‘색’이라 하고,
곧 거기서 생기는 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의식을 바로 ‘명’이라 한다.
이와 같은 명색을 반연으로 삼아 뜻의 접촉[意觸]이 생기는 것이므로, 이것을 ‘명색에 반연하여 촉이 생긴다’고 한다.
또 『교회파륵루나경(敎誨頗勒窶那經)』에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되,
“파륵루나(頗勒窶那)야, 식(識)을 음식으로 삼기 때문에 후유(後有)를 일으킨다”고 하셨다.
이 식이란 어떤 것인가?
건달박(健達縛)이
(자세한 설명은 생략함)
나아가 갈랄람(羯剌藍)의 자체(自體)와 화합하는 것이니,
이 갈랄람의 자체와 화합하는 것을 바로 ‘색’이라 하고,
곧 거기서 생기는 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의식을 바로 ‘명’이라 하는데,
그때에 이치에 맞지 않는 작의[非理作意]와 함께 생긴 명색을 반연하여 어머니의 태속에서 모든 접촉이 일어난다.
이것을 ‘명색을 반연하여 촉이 생긴다’고 한다.
또 『교회사저경(敎誨莎底經)』에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되,
“세 가지 일이 화합하여 어머니의 태속으로 들어가며,
(자세한 설명은 생략함)
나아가 이 식이 끊임없이 어머니의 태속으로 들어가 여기에 의탁하게 되는 태(胎)를 바로 ‘색’이라 하고,
곧 거기서 생기는 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의식을 ‘명’이라 하는데,
그때에 이치에 맞지 않는 작의와 함께 생긴 명색을 반연으로 하여 어머니의 태속에서 모든 접촉이 일어난다.
이것을 ‘명색을 반연하여 촉이 생긴다’고 한다.
또 어떤 사람이 탐냄ㆍ성냄ㆍ어리석음에 마음이 얽매었기 때문에 몸과 말과 뜻의 세 가지 악행(惡行)을 짓게 된다.
여기서 몸과 말의 악행을 바로 ‘색’이라 하고,
뜻의 악행을 바로 ‘명’이라 하는데,
이 악행의 명색을 반연으로 삼기 때문에 몸이 무너지고 목숨을 마치면 지옥에 떨어지며 모든 접촉이 일어나는 것이니,
이것을 ‘명색을 반연하여 촉이 생긴다’고 한다.
지옥에 대해서 설명한 것과 같아서, 방생과 귀계(鬼界)에 있어서도 또한 그러한 줄 알아야 한다.
또 어떤 사람이 사람의 세계[人趣]의 즐거움에 대하여 마음을 잡아매어 희구하며 이 희구로 인하여 사람의 세계를 받을 수 있는 몸과 말과 뜻의 묘행(妙行)을 짓게 된다.
여기서 몸과 말의 묘행을 바로 ‘색’이라 하고,
뜻의 묘행을 바로 ‘명’이라 하는데,
이 묘행의 명색을 반연으로 삼는 까닭에 몸이 무너지고 목숨을 마치면 사람의 세계에 태어나며 모든 접촉이 일어나는 것이니,
이것을 바로 ‘명색에 반연하여 촉이 생긴다’고 한다.
사람의 세계에 대해서 설명한 것과 같아서,
사대왕중천(四大王衆天) 내지 타화자재천(他化自在天)에 있어서도 역시 그러한 줄 알아야 한다.
또 어떤 사람이 범중천(梵衆天)에 대하여 마음을 잡아매어 희구하며 이 희구로 인하여 가행(加行)을 부지런히 닦아서 욕(欲)과 악한 법을 여의고 나아가 초정려(初靜慮)를 두루 갖추어 머무르게 된다.
이 선정 속에서의 모든 몸의 율의[身律儀]ㆍ말의 율의[語律儀]ㆍ생활의 청정함[命淸淨]을 바로 ‘색’이라 하고,
곧 거기서 생기는 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의식을 바로 ‘명’이라 하는데,
이것을 반연으로 삼기 때문에 몸이 무너지고 목숨을 마치면 범중천들의 동분(同分) 속에 태어나며 모든 접촉이 일어나는 것이니,
이것을 바로 ‘명색에 반연하여 촉이 생긴다’고 한다.
범중천에 대해서 설명한 것과 같아서,
범보천(梵輔天) 내지 비상비비상처천(非想非非想處天)에 있어서도 그 응해 옴에 따라 또한 그러한 줄 알아야 한다.
또 『대인연경(大因緣經)』에서 존자 경희(慶喜)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모든 촉(觸)은 반연하는 것이 있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반연하는 것이 있나니, 그것은 이른바 명색(名色)이니라.
(자세한 설명은 생략함)
나아가 만일 이 모양[相]에 의지한다면 명신(名身)을 시설하겠지만, 이 모양이 만일 없다면 증어(增語)의 접촉[觸]을 시설할 수 있다 하겠느냐?”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만일 이 모양에 의지한다면 색신(色身)을 시설하겠지만, 이 모양이 만일 없다면 유대(有對)의 접촉[觸]을 시설할 수 있다 하겠느냐?”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만일 명신이나 색신이 도무지 없다면 모든 접촉이 있다고 시설할 수 있겠느냐?”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그러므로 경희야, 모든 촉은 모두가 명색으로써 반연을 삼느니라.”
이것을 바로 ‘명색을 반연하여 촉이 생긴다’고 한다.
이와 같이 모든 촉은 명색을 반연으로 삼고 명색을 의지[依]로 삼으며 명색을 건립(建立)으로 삼는 까닭에 일어나고 평등하게 일어나며 생기고 평등하게 생기며 쌓여 모이고 출현하는 것이니,
이 때문에 ‘명색을 반연하여 촉이 생긴다’고 한다.
5) 6처(處)를 반연하여 촉(觸)이 생긴다
어떤 것을 ‘6처(處)를 반연하여 촉(觸)이 생긴다’고 하는가?
이를테면 눈과 빛깔을 반연으로 하여 안식이 생기고 이 세 가지가 화합하기 때문에 접촉[觸]이 생기는 것이며,
나아가 뜻과 법을 반연으로 하여 의식이 생기고 이 세 가지가 화합하기 때문에 접촉이 생기는 것이니,
이것을 바로 ‘6처를 반연하여 촉이 생긴다’고 한다.
또 눈과 빛깔을 반연으로 하여 안식이 생기고 이 세 가지가 화합하기 때문에 접촉이 생기는데,
이 가운데서는 눈을 안의 반연[內緣]으로 삼고, 빛깔을 밖의 반연[外緣]으로 삼아 눈의 접촉[眼觸]이 생기는 것이며,
나아가 뜻과 그리고 법을 반연으로 하여 의식이 생기고 이 세 가지가 화합하기 때문에 접촉이 생기는데,
이 가운데서는 뜻을 안의 반연으로 삼고, 법을 밖의 반연으로 삼아 뜻의 접촉[意觸]이 생기는 것이니,
이것을 바로 ‘6처를 반연하여 촉이 생긴다’고 한다.
또 눈과 빛깔을 반연으로 하여 안식이 생기고 이 세 가지가 화합하기 때문에 접촉이 생기므로 이 가운데서 눈의 접촉은 눈ㆍ빛깔ㆍ안식으로써 반연을 삼는 것이며,
나아가 뜻과 빛깔을 반연으로 삼아 의식이 생기고 이 세 가지가 화합하기 때문에 접촉이 생기므로 이 가운데에서 뜻의 접촉은 뜻ㆍ법ㆍ의식으로써 반연을 삼는 것이니,
이것을 바로 ‘6처를 반연하여 촉이 생긴다’고 한다.
또 눈과 그리고 빛깔을 반연으로 하여 안식이 생기고 이 세 가지가 화합하기 때문에 접촉이 생기므로 이 가운데서의 눈과 빛깔과 안식은 모두 그것이 접촉은 아니요,
세 가지가 화합함으로 말미암아서 비로소 접촉이 생기는 것이며,
나아가 뜻과 법을 반연으로 하여 의식이 생기고 이 세 가지가 화합하기 때문에 접촉이 생기므로 이 가운데서의 뜻과 법과 의식은 모두가 접촉은 아니요,
세 가지가 화합함으로 말미암아서 비로소 접촉이 생기는 것이니,
이것을 바로 ‘6처를 반연하여 촉이 생긴다’고 한다.
이와 같이 모든 촉은 6처를 반연으로 삼고 6처를 의지[依]로 삼으며 6처를 건립(建立)으로 삼기 때문에 일어나고 평등하게 일어나며 생기고 평등하게 생기며, 쌓여 모이고 출현하는 것이니,
이 때문에 ‘6처를 반연하여 촉이 생긴다’고 한다.
6) 촉(觸)을 반연하여 수(受)가 생긴다
어떤 것을 ‘촉(觸)을 반연하여 수(受)가 생긴다’고 하는가?
이를테면 눈과 빛깔을 반연으로 하여 안식이 생기고 이 세 가지가 화합하기 때문에 접촉[觸]이 생기며, 이 접촉을 반연으로 삼아 느낌[受]이 생기는 것이요,
나아가 뜻과 법을 반연으로 하여 의식이 생기고 이 세 가지가 화합하기 때문에 접촉이 생기며, 접촉을 반연으로 삼기 때문에 느낌이 생기는 것이니,
이것을 바로 ‘촉을 반연하여 느낌이 생긴다’고 한다.
또 눈과 빛깔을 반연으로 하여 안식이 생기고 이 세 가지가 화합하기 때문에 접촉으로서는 혹은 순락수(順樂受)이거나 혹은 순고수(順苦受)이거나 혹은 순불고불락수(順不苦不樂受)가 생기는데,
순락수촉(順樂受觸)을 반연으로 삼는 데서는 즐거운 느낌[樂受]이 생기고,
순고수촉(順苦受觸)을 반연으로 삼는 데서는 괴로운 느낌[苦受]이 생기며,
순불고불락수촉(順不苦不樂受觸)을 반연으로 삼는 데서는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不苦不樂受]이 생기게 된다.
나아가 뜻과 법을 반연으로 하여 의식이 생기고 이 세 가지가 화합하기 때문에 접촉이 생기는데,
혹은 순락수이기도 하고 혹은 순고수이기도 하며 혹은 순불고불락수이기도 하다.
순락수촉을 반연으로 삼는 데서는 즐거운 느낌이 생기고,
순고수촉을 반연으로 삼는 데서는 괴로운 느낌이 생기며,
순불고불락수촉을 반연으로 삼는 데서는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이 생기는 것이니,
이것을 바로 ‘접촉을 반연하여 느낌이 생긴다’고 한다.
또 『계경(契經)』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존자 경희(慶喜)가 구사라(瞿史羅) 장자(長者)에게 말하였다.
“안계(眼界)ㆍ색계(色界)ㆍ안식계(眼識界)의 자체(自體)는 저마다 따로따로이어서 순락수(順樂受)로서는 두 가지를 반연으로 하여 안식이 생기고 세 가지가 화합하기 때문에 접촉이 생기나니 순락수촉(順樂受觸)이라 하며, 이 순락수촉을 반연으로 하여 즐거운 느낌이 생긴다.
순고수(順苦受)는 두 가지를 반연으로 하여 안식이 생기고 세 가지가 화합하기 때문에 접촉이 생기는데 순고수촉(順苦受觸)이라 하며, 이 순고수촉을 반연하여 괴로운 느낌이 생긴다.
순불고불락수(順不苦不樂受)로서는 두 가지가 인연이 되어 안식이 생기고 세 가지가 화합하기 때문에 접촉이 생기나니 이를 순불고불락수촉(順不苦不樂受觸)이라 하며, 이 순불고불락수촉을 반연으로 하여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은 느낌이 생긴다.
나머지 다섯 가지 삼계(三界)에서도 자세한 설명은 역시 그러하다.”
이것을 바로 ‘촉을 반연하여 수가 생긴다’고 한다.
또 『대인연경(大因緣經)』에서 존자 경희(慶喜)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모든 느낌[受]은 반연하는 것이 있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반연하는 것이 있나니, 그것은 이른바 접촉[觸]이니라.
(자세한 설명은 생략함)
나아가 만일 눈의 접촉[眼觸]이 없다면 눈의 접촉을 반연으로 하는 안[內]의 즐거운 느낌[樂受]과 괴로운 느낌[苦受]과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不苦不樂受]을 내는 것이 있겠느냐?”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나아가 만일 뜻의 접촉[意觸]이 없다면 뜻의 접촉을 반연으로 하는 안의 즐거운 느낌과 괴로운 느낌과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내는 것이 있겠느냐?”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만일 전혀 접촉이 없다면 모든 느낌이 있는 것을 시설할 수 있겠느냐?”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그러므로 경희야, 모든 느낌은 접촉으로 반연을 삼지 않음이 없느니라.”
이것을 바로 ‘촉을 반연하여 수가 생긴다’고 한다.
이와 같이 모든 느낌[受]은 접촉[觸]을 반연으로 삼고 접촉을 의지[依]로 삼으며 접촉을 건립(建立)으로 삼기 때문에 일어나고 평등하게 일어나며 생기고 평등하게 생기며 쌓여 모이고 출현하는 것이니,
이 때문에 ‘촉을 반연하여 수가 생긴다’고 한다.
7) (受)를 반연하여 애(愛)가 생긴다
어떤 것을 ‘수(受)를 반연하여 애(愛)가 생긴다’고 하는가?
이를테면 눈과 빛깔을 반연으로 하여 안식이 생기고 세 가지가 화합하기 때문에 접촉[觸]이 생기며 접촉을 반연으로 삼기 때문에 느낌[受]이 생기고 느낌을 반연으로 삼기 때문에 욕망[愛]이 생긴다.
나아가 뜻과 법을 반연으로 하여 의식이 생기고 세 가지가 화합하기 때문에 접촉이 생기며 접촉을 반연으로 삼기 때문에 느낌이 생기고 느낌을 반연으로 삼기 때문에 욕망이 생기는 것이니,
이것을 바로 ‘수를 반연하여 애가 생긴다’고 한다.
또 눈의 맛[眼味]에 대한 느낌[受]을 반연으로 삼기 때문에 자주자주 다시 눈에 대하여 따르면서[隨順] 머무르며 따름으로 말미암아 자주자주 다시 눈에 대하여 탐(貪)하고 평등하게 탐[等貪]하며, 가져 간직[執藏]하고 막아 수호[防護]하며, 굳게 집착하고[堅著] 애염(愛染)을 일으키는 것이다.
나아가 뜻의 맛[意味]에 대한 느낌을 반연으로 삼기 때문에 자주자주 다시 뜻에 대하여 따르면서 머무르며 따름으로 말미암아 자주자주 다시 뜻에 대하여 탐하고 평등하게 탐하며, 가져 간직하고 막아 수호하며, 굳게 집착하고 애염을 일으키는 것이니,
이것을 바로 ‘수를 반연하여 애가 생긴다’고 한다.
또 『취온경(取蘊經)』에서 부처님이 말씀하시되,
“필추들아, 마땅히 알아야 한다. 나는 물질의 맛[色味]에 대하여 이미 자세하게 심사(尋思)하여 모든 물질에 대하여는 혹은 이미 맛[味]을 일으켰고 혹은 지금 맛을 일으키는 것이 있되 나는 바른 지혜[正慧]로써 자세히 보고 자세히 알지만,
저들은 물질의 맛에 대한 느낌을 반연으로 삼기 때문에 자주자주 다시 물질에 대하여 따르면서 머무르며 따름으로 말미암아 자주자주 다시 물질에 대하여 탐하고 평등하게 탐하며, 가져 간직하고 막아 수호하며, 굳게 집착하고 애염을 일으킨다.
나아가 나는 의식의 맛[識味]에 대하여 이미 자세하게 심사하여 모든 의식에 대하여는 혹은 이미 맛을 일으켰고 혹은 지금 맛을 일으키는 것이 있되 나는 바른 지혜로써 자세히 보고 자세히 알지만,
저들은 의식의 맛에 대한 느낌을 반연으로 삼기 때문에 자주자주 다시 따르면서 머무르며 따름으로 말미암아 자주자주 다시 의식에 대하여 탐하고 평등하게 탐하며, 가져 간직하고 막아 수호하며, 굳게 집착하고 애염을 일으킨다”고 하셨다.
이것을 바로 ‘수를 반연하여 애가 생긴다’고 한다.
또 『취온경』에서 세존께서는 또 말씀하시되,
“필추들아, 마땅히 알아야 한다.
만일 모든 물질[色] 가운데에 도무지 맛[味]이 없다면 유정들은 마땅히 물질에 대하여 애염을 일으키지 않겠지만,
모든 물질 가운데에는 도무지 맛이 없는 것이 아니므로 이 때문에 유정들은 물질에 대하여 애염을 일으키며,
그들은 물질의 맛에 대한 느낌을 반연으로 삼기 때문에 자주자주 다시 물질에 대하여 따르면서 머무르고 따름으로 말미암아 자주자주 다시 물질에 대하여 탐하고 평등하게 탐하며, 가져 간직하고 막아 수호하며, 굳게 집착하고 애염을 일으킨다.
나아가 만일 모든 의식[識] 가운데에 도무지 맛[味]이 없다면 유정들은 마땅히 의식에 대하여 애염을 일으키지 않겠지만,
모든 의식 가운데에는 도무지 맛이 없는 것이 아니므로 이 때문에 유정들은 의식에 대하여 애염을 일으키며,
그들은 의식의 맛에 대한 느낌을 반연으로 삼기 때문에 자주자주 다시 의식에 대하여 따르면서 머무르고 따름으로 말미암아 탐하고 평등하게 탐하며, 가져 간직하고 막아 수호하며, 굳게 집착하고 애염을 일으킨다”고 하셨다.
이것을 바로 ‘수를 반연하여 애가 생긴다’고 한다.
또 『육처경(六處經)』에서 부처님은 말씀하시되,
“필추들아, 마땅히 알아야 한다. 나는 눈의 맛[眼味]에 대하여 이미 자세하게 심사(尋思)하여 모든 눈에 대하여는 혹은 이미 맛을 일으켰고 혹은 지금 맛을 일으키는 것이 있되 나는 바른 지혜[正慧]로써 자세히 보고 자세히 알지만,
저들은 눈의 맛에 대한 느낌[受]을 반연으로 삼기 때문에 자주자주 다시 눈에 대하여 따르면서 머무르며 따름으로 말미암아 자주자주 다시 눈에 대하여 탐하고 평등하게 탐하며, 가져 간직하고 막아 수호하며, 굳게 집착하고 애염을 일으킨다.
나아가 나는 뜻의 맛[意味]에 대하여 이미 자세하게 심사하여 모든 뜻에 대하여는 혹은 이미 맛을 일으켰고 혹은 지금 맛을 일으키는 것이 있되 나는 바른 지혜로써 자세히 보고 자세히 알지만,
저들은 뜻의 맛에 대한 느낌을 반연으로 삼기 때문에 자주자주 다시 뜻에 대하여 따르면서 머무르며 따름으로 말미암아 자주자주 다시 뜻에 대하여 탐하고 평등하게 탐하며, 가져 간직하고 막아 수호하며, 굳게 집착하고 애염을 일으킨다”고 하셨다.
이것을 바로 ‘수를 반연하여 애가 생긴다’고 한다.
또 『육처경』에서 세존께서는 말씀하시되,
“필추들아, 마땅히 알아야 한다.
만일 모든 눈[眼] 가운데에 도무지 맛[味]이 없다면 유정들은 마땅히 눈에 대하여 애염을 일으키지 않겠지만,
모든 눈 가운데에는 맛이 없는 것이 아니므로 이 때문에 유정들은 눈에 대하여 애염을 일으키며,
그들은 눈의 맛[眼味]에 대한 느낌을 반연으로 삼기 때문에 자주자주 다시 눈에 대하여 따르면서 머무르고 따름으로 말미암아 자주자주 다시 눈에 대하여 탐하고 평등하게 탐하며, 가져 간직하고 막아 수호하며, 굳게 집착하고 애염을 일으킨다.
나아가 만일 모든 뜻[意] 가운데에 도무지 맛[味]이 없다면 유정들은 마땅히 뜻에 대하여 애염을 일으키지 않겠지만,
모든 뜻 가운데에는 도무지 맛이 없는 것이 아니므로 이 때문에 유정들은 뜻에 대하여 맛을 일으키며,
그들은 뜻의 맛에 대한 느낌을 반연으로 삼기 때문에 자주자주 다시 뜻에 대하여 따르면서 머무르고 따름으로 말미암아 자주자주 다시 뜻에 대하여 탐하고 평등하게 탐하며, 가져 간직하고 막아 수호하며, 굳게 집착하고 애염을 일으킨다”고 하셨다.
이것을 바로 ‘수를 반연하여 애가 생긴다’고 한다.
또 『육처경』에서 세존께서는 다시 말씀하시되,
“필추들아, 마땅히 알아야 한다.
나는 빛깔의 맛[色味]에 대하여 이미 자세하게 심사(尋思)하여 모든 빛깔에 대하여는 혹은 이미 맛을 일으켰고 혹은 지금 맛을 일으키는 것이 있되 나는 바른 지혜로써 자세히 보고 자세히 알지만,
그들은 빛깔의 맛에 대한 느낌[受]을 반연으로 삼기 때문에 자주자주 빛깔에 대하여 따르면서 머무르며 따름으로 말미암아 자주자주 다시 빛깔에 대하여 탐하고 평등하게 탐하며, 가져 간직하고 막아 수호하며, 굳게 집착하고 애염을 일으킨다.
나아가 나는 법의 맛[法味]에 대하여 이미 자세하게 심사(尋思)하여 모든 법에 대하여는 혹은 이미 맛을 일으켰고 혹은 지금 맛을 일으키는 것이 있되 나는 바른 지혜로써 자세히 보고 자세히 알지만,
그들은 법의 맛에 대한 느낌을 반연으로 삼기 때문에 자주자주 다시 법에 대하여 따르면서 머무르며 따름으로 말미암아 자주자주 다시 법에 대하여 탐하고 평등하게 탐하며, 가져 간직하고 막아 수호하며, 굳게 집착하고 애염을 일으킨다”고 하셨다.
이것을 바로 ‘수를 반연하여 애가 생긴다’고 한다.
또 『육처경』에서 세존께서는 또 말씀하시되,
“필추들아, 마땅히 알아야 한다.
모든 빛깔[色] 가운데에 도무지 맛[味]이 없다면 유정들은 마땅히 빛깔에 대하여 애염을 일으키지 않겠지만,
모든 빛깔 가운데에는 도무지 맛이 없는 것이 아니므로 이 때문에 유정들은 빛깔에 대하여 애염을 일으키며,
그들은 빛깔의 맛에 대한 느낌을 반연으로 삼기 때문에 자주자주 다시 빛깔에 대하여 따르면서 머무르고 따름으로 말미암아 자주자주 다시 빛깔에 대하여 탐하고 평등하게 탐하며, 가져 간직하고 막아 수호하며, 굳게 집착하고 애염을 일으킨다.
나아가 만일 모든 법(法) 가운데에 도무지 맛[味]이 없다면 유정들은 마땅히 애염을 일으키지 않겠지만,
모든 법 가운데에는 도무지 맛이 없는 것이 아니므로 이 때문에 유정들은 법에 대하여 애염을 일으키며,
그들은 법의 맛에 대한 느낌을 반연으로 삼기 때문에 자주자주 다시 법에 대하여 따르며 머무르고 따름으로 말미암아 자주자주 다시 법에 대하여 탐하고 평등하게 탐하며, 가져 간직하고 막아 수호하며, 굳게 집착하고 애염을 일으킨다”고 하셨다.
이것을 바로 ‘수를 반연하여 애가 생긴다’고 한다.
또 부처님께서 대명이첩비(大名離帖毘)를 위하여 말씀하시되,
“대명(大名)아, 마땅히 알아야 한다.
만일 물질[色]이 한결같이 그것은 괴로운[苦] 것일 뿐이어서, 즐거운 것이 아니고 즐거운 것이 따르지도 않으며 즐거운 느낌[樂受]이나 기쁜 느낌[喜受]이 얽혀 붙어 있지 않은 것이라면, 마땅히 유정들은 즐거운 것을 구하기 위하여 모든 물질 가운데에 탐욕을 일으키거나 애염(愛染)을 일으키거나 번뇌에 얽매임이 없을 것이니라.
대명아, 물질은 한결같이 괴로운 것만이 아니어서, 그것에는 역시 즐겁기도 하고 즐거운 것이 따르기도 하며 즐거운 느낌이나 기쁜 느낌이 얽혀 붙어 있기도 하기 때문에,
유정들은 즐거운 것을 구하기 위하여 모든 물질 가운데서 탐욕을 일으키고 애염을 일으키며 번뇌에 얽매임이 있는 것이요,
그들은 물질의 맛[色味]에 대한 느낌[受]을 반연으로 삼기 때문에 자주자주 다시 물질에 대하여 수순하면서 머무르게 되며 따름으로 말미암아 자주자주 다시 물질에 대하여 탐하고 평등하게 탐하며, 가져 간직하고 막아 수호하며, 굳게 집착하고 애염을 일으키느니라.
나아가 만일 의식[識]이 한결같이 그것은 괴로운 것일 뿐이어서 즐거운 것이 아니고 즐거운 것이 따르지도 않으며 즐거운 느낌이나 기쁜 느낌이 얽혀 붙어 있지 않은 것이라면,
마땅히 유정들은 즐거운 것을 구하기 위하여 모든 의식 가운데서 탐욕을 일으키거나 애염을 일으키거나 번뇌에 얽매임이 없을 것이니라.
대명아, 의식은 한결같이 괴로운 것만이 아니어서, 그것에는 역시 즐겁기도 하고 즐거운 것이 따르기도 하며 즐거운 느낌이나 기쁜 느낌이 얽혀 붙어 있기도 하기 때문에,
유정들은 즐거운 것을 구하기 위하여 모든 의식 가운데서 탐욕을 일으키고 애염을 일으키며 번뇌에 얽매임이 있는 것이요 그들은 의식의 맛[識味]에 대한 느낌[受]을 반연으로 삼기 때문에 자주자주 다시 의식에 대하여 따르면서 머무르게 되며 따름으로 말미암아 자주자주 다시 의식에 대하여 탐하고 평등하게 탐하며, 가져 간직하고 막아 수호하며, 굳게 집착하고 애염을 일으키는 것이니라”고 하셨다.
이것을 바로 ‘수를 반연하여 애가 생긴다’고 한다.
또 『만월경(滿月經)』에서 부처님은 말씀하시되,
“필추들아, 마땅히 알아야 한다.
물질을 반연으로 삼기 때문에 즐거움이 일어나고 기쁨이 생기는 것을 바로 물질의 맛[色味]이라 하는데,
그들은 물질의 맛에 대한 느낌[受]을 반연으로 삼기 때문에 자주자주 다시 물질에 대하여 따르면서 머무르게 되며 따름으로 말미암아 자주자주 다시 물질에 대하여 탐하고 평등하게 탐하며, 가져 간직하고 막아 수호하며, 굳게 집착하고 애염을 일으킨다.
나아가 의식을 반연으로 삼기 때문에 즐거움이 일어나고 기쁨이 생기는 것을 바로 의식의 맛[識味]이라 하는데,
그들은 의식의 맛에 대한 느낌[受]을 반연으로 삼기 때문에 자주자주 다시 의식에 대하여 따르면서 머무르게 되며 따름으로 말미암아 탐하고 평등하게 탐하며, 가져 간직하고 막아 수호하며, 굳게 집착하고 애염을 일으킨다”고 하셨다.
이것을 바로 ‘수를 반연하여 애가 생긴다’고 한다.
또 『대인연경(大因緣經)』에서 부처님은 경희(慶喜)에게 말씀하셨다.
“애욕[愛]을 반연으로 삼기 때문에 구함[求]이 있고,
구함을 반연으로 삼기 때문에 얻음[得]이 있으며,
얻음을 반연으로 삼기 때문에 쌓임[集]이 있고,
쌓임을 반연으로 삼기 때문에 집착[著]이 있으며,
집착을 반연으로 삼기 때문에 탐냄[貪]이 있고,
탐냄을 반연으로 삼기 때문에 간탐[慳]이 있으며,
간탐을 반연으로 삼기 때문에 섭수(攝受)가 있고,
섭수를 반연으로 삼기 때문에 방호(防護)가 있나니,
방호로 인하여 짐짓 칼과 무기 등을 가지고서 싸우고 다투고 아첨하고 속이면서 한량없는 종류의 악한 법[惡不善法]을 내느니라.”
부처님께서 다시 경희에게 말씀하셨다.
“칼과 무기 등을 가지고서 싸우고 다투고 아첨하고 속이면서 한량없는 종류의 악한 법을 내는 것은 모두 방호(防護)가 인(因)이 되고 방호가 연(緣)이 되어서 이러한 일이 생기는 것이니, 방호가 만일 없다면 이러한 일이 있겠느냐?”
아난타(阿難陀)가 말하였다.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그러므로 칼과 무기 등을 가지는 일은 바로 방호(防護)를 유서(由緖)를 삼고 방호를 원인[因]으로 삼으며 방호를 쌓임[集]으로 삼고 방호를 반연[緣]으로 삼아서 생기게 된다.
이와 같은 방호는 섭수(攝受)가 인(因)이 되고 섭수를 연(緣)으로 삼아 방호가 생기게 되는 것이니, 섭수가 만일 없다면 방호가 생기게 되겠느냐?”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그러므로 방호는 섭수를 유서로 삼고 섭수를 원인으로 삼으며 섭수를 쌓임으로 삼고 섭수를 반연으로 삼아 생기게 된다.
(자세한 설명은 생략함)
나아가 이와 같은 모든 구함[求]은 모두 애욕[愛]이 인이 되고 애욕을 연으로 삼으면서 모든 구함이 있는 것이니, 이 애욕이 만일 없다면 구함이 있게 되겠느냐?”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그러므로 모든 구함은 애욕을 유서로 삼고 애욕을 원인으로 삼으며 애욕을 쌓임으로 삼고 애욕을 반연으로 삼아서 생기게 되느니라.
경희야, 마땅히 알아야 한다.
애욕[愛]에는 두 가지가 있나니,
첫째는 욕애(欲愛)요, 둘째는 유애(有愛)이니라.
이 두 가지 애욕은 느낌[受]에 의지하여 생기는 것이니, 느낌이 만일 없다면 두 가지 애욕도 또한 없느니라.”
이것을 바로 ‘수를 반연하여 애가 생긴다’고 한다.
이와 같이 모든 애욕은 느낌을 반연[緣]으로 삼고 느낌을 의지[依]로 삼으며 느낌을 건립(建立)으로 삼기 때문에,
일어나고 평등하게 일어나며 생기고 평등하게 생기며 쌓여 모이고 출현하는 것이니,
이 때문에 ‘수(受)를 반연하여 애(愛)가 생긴다’고 한다.
8) 애(愛)를 반연하여 취(取)가 생긴다
어떤 것을 ‘애(愛)를 반연하여 취(取)가 생긴다’고 하는가?
이른바 그것이 처음 생긴 것을 애라 하고,
그 애가 더욱 왕성해진 자리를 달리 말하여 취라 한다.
그것은 또 어떤 것인가?
마치 어떤 사람이 모든 욕심의 경계에 대하여 마음을 잡아매어 관찰하여 욕탐(欲貪)의 번뇌[纏]를 일으키고,
그는 이 번뇌로부터 다시 그 밖의 다른 번뇌를 일으켜서 더욱 발달한 것[增上]을 한층 더 발달하게 하고 맹렬한 것[猛利]을 한층 더 맹렬하게 하며 원만한 것[圓滿]을 한층 더 원만하게 할 적에,
그 먼저 일으켰던 번뇌를 바로 애(愛)라 하고,
나중에 일으킨 번뇌를 바꾸어 말하여 취(取)라고 하는 것과 같다.
이것을 바로 ‘애를 반연하여 취가 생긴다’고 한다.
또 어떤 사람이 모든 형상[色] 있는 경계나 혹은 형상 없는[無色] 경계에 대하여 마음을 잡아매어 관찰하면서 색탐(色貪)의 번뇌[纏]나 혹은 무색탐(無色貪)의 번뇌를 일으키고,
그는 이 번뇌로부터 다시 그 밖의 다른 번뇌를 일으켜서 더욱 발달한 것을 한층 더 발달하게 하고, 맹렬한 것을 한층 더 맹렬하게 하며, 원만한 것을 한층 더 원만하게 할 적에,
그 앞에서 일으켰던 번뇌를 애라 하고,
나중에 일으킨 번뇌를 바꾸어 말하여 취라고 하는 것과 같다.
이것을 바로 ‘애를 반연하여 취가 생긴다’고 한다.
또 『험갱경(險坑經)』에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되,
“나는 너희 필추들을 위하여 널리 펴 설하여서 모든 온(蘊)의 법요(法要)를 간택하나니,
이른바 4념주(念住)와 4정승(正勝)과 4신족(神足)과 5근(根)과 5력(力)과 7등각지(等覺支)와 8지성도(支聖道)이니라.
이와 같이 널리 연설하면서 모든 온의 법요를 간택할 적에 어리석은 생각을 품은 어떤 사람은 내가 설한 것에 대하여 날카롭게 신애(信愛)와 공경(恭敬)에 머무르지 않으므로 그는 더디게 무상루진(無上漏盡)을 증득할 것이요,
다시 어느 한 총명하고 예지 있는 사람은 내가 설한 것에 대하여 날카롭게 신애와 공경에 머무르므로 그는 속히 위없는 누진을 증득할 것이니라.
또 어떤 사람은 내가 설한 색온(色蘊)의 법 가운데서 나[我]를 평등하게 따라 관[等隨觀]한다.
이 능히 관하는 행[能觀行]은 무엇으로써 반연[緣]을 삼고 무엇으로써 쌓임[集]을 삼으며 이것은 무엇의 종류로서 무엇으로부터 생기는가?
이른바 무명의 접촉[無明觸]으로 생긴 모든 느낌[受]을 반연으로 삼아 애욕[愛]을 내는 것이니,
이것으로 생긴 행[所生行]은 그것으로써 반연을 삼고 그것으로써 쌓임을 삼으며 이것은 그것의 종류로서 그것으로부터 생긴 것이니라.
이 능히 생긴[能生] 욕망은 무엇으로써 반연을 삼고, 무엇으로써 쌓임을 삼으며, 이것은 무엇의 종류로서 무엇으로부터 생기는가?
이른바 무명의 접촉으로 생긴 모든 느낌[受]이니, 이것으로 생긴 욕망은 느낌으로써 반연을 삼고 느낌으로써 쌓임을 삼으며, 이것은 느낌의 종류로서 느낌으로부터 생긴 것이니라.
이 능히 생긴 느낌은 무엇으로부터 반연을 삼고, 무엇으로써 쌓임을 삼으며, 이것은 무엇의 종류로서 무엇으로부터 생기는가?
이른바 무명의 접촉[觸]이니, 이것으로 생긴 느낌은 접촉으로써 반연을 삼고, 접촉으로써 쌓임을 삼으며, 이것은 접촉의 종류로서 접촉으로부터 생긴 것이니라.
이 능히 생긴 접촉은 무엇으로써 반연을 삼고, 무엇으로써 쌓임을 삼으며, 이것은 무엇의 종류로서 무엇으로부터 생기는가?
이른바 6처(處)이니, 이것으로 생긴 접촉은 6처로써 반연을 삼고 6처로써 쌓임을 삼으며 이것은 6처의 종류로서 6처로부터 생긴 것이니라.
이와 같은 6처는 무상하고 유위(有爲)이며 이것은 만들어진 것이어서 여러 가지 연[衆緣]으로부터 생긴 것이니,
이와 같은 접촉[觸]ㆍ느낌[受]ㆍ애욕[愛]과 능히 관하는 행[能觀行]도 역시 무상하고 유위이며, 이것은 만들어진 것이어서 여러 가지 연으로부터 생긴 것이니라”고 하셨다.
이 물질[色]을 평등하게 따라 관하면서 나라고 집작하는 것은 바로 유신견(有身見)으로 현재 일으키는 번뇌[纏]이며,
그는 이 번뇌로부터 다시 그 밖의 번뇌를 일으켜서 더 발달한 것을 한층 더 발달하게 하고, 맹렬한 것을 한층 더 맹렬하게 하며, 원만한 것을 한층 더 원만하게 한 것이니,
앞에서 일으킨 번뇌를 애욕[愛]라 하고,
나중에 일으킨 번뇌를 바꾸어 말하여 취(取)라 한다.
이것을 바로 ‘애를 반연하여 취가 생기다’고 한다.
어떤 이는 물질에 대하여 나[我]를 평등하게 따라 관[等隨觀]하지 않고, 나에게 모든 물질이 있다고 평등하게 따라 관하고,
어떤 이는 나에게 모든 물질이 있음을 평등하게 따라 관하지 않고, 물질 그것은 내 것[我所]이라고 평등하게 따라 관하며,
어떤 이는 물질이 내 것임을 평등하게 따라 관하지 않고, 나는 물질 안에 있다고 평등하게 따라 관한다.
어떤 이는 나는 물질 안에 있음을 평등하게 따라 관하지 않고, 느낌[受]ㆍ생각[想]ㆍ지어감[行]ㆍ의식[識]이 바로 나라고 평등하게 따라 관하고,
어떤 이는 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의식이 바로 나임을 평등하게 따라 관하지 않고, 나에게는 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의식이 있다고 평등하게 따라 관하며,
어떤 이는 나에게 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의식이 있음을 평등하게 따라 관하지 않고 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의식은 내 것이라고 평등하게 따라 관한다.
어떤 이는 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의식이 내 것임을 평등하게 따라 관하지 않고, 나는 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의식 안에 있다고 평등하게 따라 관하고,
어떤 이는 나는 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의식 안에 있음을 평등하게 따라 관하지 않고 의혹(疑惑)을 일으키며,
어떤 이는 의혹을 일으키지 않고 유견(有見:常見)과 무유견(無有見:斷見)을 일으키고,
어떤 이는 유견과 무유견을 일으키지 않고 아만(我慢)을 여의지 않았기 때문에 나와 내 것을 평등하게 따라 관함으로 말미암아 아만을 일으킨다.
이 아만의 행(行)은 무엇으로써 반연[緣]을 삼고, 무엇으로써 쌓임[集]을 삼으며, 이것이 무엇의 종류로서 무엇으로부터 생기는가?
이른바 무명의 접촉[觸]으로 생긴 모든 느낌[受]을 반연으로 삼아 애욕[愛]을 내는 것이니,
이것으로 생긴 행(行)은 그것으로써 반연을 삼고, 그것으로써 쌓임을 삼으며, 이것이 그것의 종류로서 그것으로부터 생긴 것이다.
(더 자세한 설명은 생략함)
나아가 이와 같은 6처(處)는 무상하고 유위(有爲)이며, 이것은 바로 만들어진 것이어서 여러 연[衆緣]으로부터 생긴 것이라고 하셨다.
이와 같이 촉ㆍ수ㆍ애ㆍ아만ㆍ행 또한 무상이고 유위이며 바로 만들어진 것이어서 여러 연으로부터 생긴 것이다.
이와 같은 아만은 곧 유신견(有身見)으로 일으킨 만(慢)의 번뇌[纏]인데,
그는 이 번뇌로부터 다시 그 밖의 다른 번뇌를 일으켜서 더 발달한 것을 한층 더 발달하게 하고, 맹렬한 것을 한층 더 맹렬하게 하며, 원만한 것을 한층 더 원만하게 할 적에,
그 먼저 일으켰던 번뇌를 말하여 애(愛)라 하고,
나중에 일으킨 번뇌를 바꾸어 말하여 취(取)라 하는 것이니,
이것을 바로 ‘애를 반연하여 취가 생긴다’고 한다.
또 ‘세간은 항상 있다’거나 혹은 ‘무상하다’거나 혹은 ‘항상 있기도 하고 또한 무상하기도 하다’거나 혹은 ‘항상 있는 것도 아니고 무상한 것도 아니다’라고 고집하기도 하고,
‘세간은 끝이 있다’거나 혹은 ‘끝이 없다’거나 혹은 ‘끝이 있기도 하고 또한 끝이 없기도 하다’거나 혹은 ‘끝이 있는 것도 아니고 끝이 없는 것도 아니다’라고 고집하기도 하며,
‘목숨[命]은 곧 몸이다’라고 고집하기도 하고 ‘목숨은 몸과 다르다’고 고집하기도 하며,
‘여래가 돌아가신 뒤에 계신다’거나 혹은 ‘계시지 않는다’거나 혹은 ‘계시기도 하고 또한 계시지 않기도 하다’거나 혹은 ‘계시는 것도 아니고 계시지 않는 것도 아니다’라고 고집하는 이가 있다.
이것은 모두가 변집견(邊執見)으로서 현재 일으키는 번뇌인데,
그는 이런 번뇌로부터 다시 그 밖의 다른 번뇌를 일으켜서 더욱 발달한 것을 한층 더 발달하게 하고, 맹렬한 것을 한층 더 맹렬하게 하며, 원만한 것을 한층 더 원만하게 할 적에,
그 먼저 일으켰던 번뇌를 말하여 애라 하고,
나중에 일으킨 번뇌를 바꾸어 말하여 취라 하는 것이니,
이것을 바로 ‘애를 반연하여 취가 생긴다’고 한다.
또 ‘세존은 여래(如來)ㆍ응공[應]ㆍ정등각(正等覺)이 아니며 나아가 천인사(天人師)가 아니다’라고 고집하거나,
‘부처님의 바른 법은 착한 말씀[善說]도, 현재 보는[現見] 것도 아니며 나아가 지혜로운 이가 안으로 증하는[智者內證] 것도 아니다’라고 고집하거나,
‘부처님의 제자는 묘행(妙行)을 두루 갖춘 이도 아니고 나아가 수법행(隨法行)도 아니다’라고 고집하거나,
혹은 ‘괴로움[苦]도 없고 괴로움의 원인[集]도 없으며 괴로움의 소멸[滅]도 없고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道]도 없다’라고 고집하거나,
혹은 ‘온갖 행[一切行]은 무상도 아니요 온갖 법[一切法]은 무아(無我)도 아니며 열반은 적정(寂靜)도 아니다’라고 고집하는 이가 있다.
이런 것은 모두가 사견(邪見)으로서 현재 일으키는 번뇌인데,
그는 이 번뇌로부터 다시 그 밖의 다른 번뇌를 일으켜서 더 발달한 것을 한층 더 발달하게 하고, 맹렬한 것을 한층 더 맹렬하게 하며, 원만한 것을 한층 더 원만하게 할 적에,
그 먼저 일으켰던 번뇌를 바로 애라 하고,
나중에 일으킨 번뇌를 바꾸어 말하여 취라 하는 것이니,
이것을 바로 ‘애를 반연하여 취가 생긴다’고 한다.
또 ‘세간은 항상[常]한 것이니, 이것만이 진실이요 그 밖의 것은 미혹한 것이고 잘못이다’라고 하거나,
혹은 ‘이것은 바로 무상한 것이요 나아가 여래는 돌아가신 뒤에 계신 것도 아니고 계시지 않은 것도 아닌 것이니 이것만이 진실이요 그 밖의 것은 미혹한 것이요 잘못이다’라고 고집하는 이가 있다.
이런 것은 모두가 견취(見取)로서 현재 일으키는 번뇌인데,
그는 이 번뇌로부터 다시 그 밖의 다른 번뇌를 일으켜서 더 발달한 것을 한층 더 발달하게 하고, 맹렬한 것을 한층 더 맹렬하게 하며, 원만한 것을 한층 더 원만하게 할 적에,
그 먼저 일으켰던 번뇌를 바로 애라 하고,
나중에 일으킨 번뇌를 바꾸어 말하여 취라 한 것이니,
이것을 바로 ‘애를 반연하여 취가 생긴다’고 한다.
또 어떤 이는 계취(戒取)를 일으키기도 하고, 혹은 금취(禁取)를 일으키기도 하며, 혹은 계금취(戒禁取)를 일으키기도 하나니,
이른바 ‘이 계와 이 금과 이 계금은 청정하게 하고 해탈하게 하며 벗어나게 하여 고락(苦樂)을 초월하며 고락을 초월하는 곳에 이르게 한다’고 한다.
이런 것은 모두가 계금취(戒禁取)로 현재 일으키는 번뇌인데,
그는 이 번뇌로부터 다시 그 밖의 다른 번뇌를 일으키면서 더 발달한 것을 한층 더 발달하게 하고, 맹렬한 것을 한층 더 맹렬하게 하며, 원만한 것을 한층 더 원만하게 할 적에,
그 먼저 일으켰던 번뇌를 바로 애라 하고,
나중에 일으킨 번뇌를 바꾸어 말하여 취라 하는 것이니,
이것을 바로 ‘애를 반연하여 취가 생긴다’고 한다.
또 어떤 이는 세존께 대해서도,
‘그 분이 여래ㆍ응공ㆍ정등각이신가, 여래ㆍ응공ㆍ정등각이 아니신가?’
나아가 ‘그 분이 천인사이신가, 천인사가 아니신가?’라고 하면서, 망설이기도 한다.
부처님의 바른 법에 대해서도,
‘이 법은 착한 말씀이고 현재 보는 것인가, 착한 말씀이나 현재 보는 것이 아닌가?’
나아가 ‘이것을 지혜로운 이는 안으로 증하는 것인가, 지혜로운 이가 안으로 증하는 것이 아닌가?’라고 하면서 망설이기도 한다.
부처님의 제자에 대해서도,
‘이 분들은 묘행을 두루 갖춘 것인가, 묘행을 두루 갖춘 것이 아닌가?’
나아가 ‘이들은 수법행(隨法行)인가, 수법행이 아닌가?’라고 하면서, 망설이기도 한다.
4성제(聖諦)에 대해서도,
‘이것은 괴로운 것인가, 괴로운 것이 아닌가?’
나아가 ‘이것이 도(道)인가, 도가 아닌가?’라고 하면서, 망설이기도 한다.
3법인(法印)에 대해서도,
‘온갖 행은 무상한 것인가, 온갖 행은 무상하지 않은 것인가?
온갖 법은 나가 없는[無我] 것인가, 온갖 법은 나 없는 것이 아닌가?
열반은 고요한 것인가, 열반은 고요하지 않은 것인가?’라고 하면서, 망설이기도 한다.
이런 것을 모두는 의심[疑]으로 현재 일으키는 번뇌인데,
그는 이 번뇌로부터 다시 그 밖의 번뇌를 일으켜서 더 발달한 것을 한층 더 발달하게 하고, 맹렬한 것을 한층 더 맹렬하게 하며, 원만한 것을 한층 더 원만하게 할 적에,
그 먼저 일으켰던 번뇌를 바로 애라 하고,
나중에 일으킨 번뇌를 바꾸어 말하여 취라 하는 것이니,
이것을 바로 ‘애에 반연하여 취가 생긴다’고 한다.
[4취(取)]
또 온갖 4취(取)는 모두가 애욕[愛]으로써 반연을 삼고 애욕으로써 쌓임을 삼으며 이것은 애욕의 종류로서 애욕으로부터 생기는 것이니,
어떤 것이 네 가지 취인가?
첫째는 욕취(欲取)요, 둘째는 견취(見取)며, 셋째는 계금취(戒禁取)요, 넷째는 아어취(我語取)이다.
어떤 것을 욕취(欲取)라 하는가?
이른바 욕계에 매인[欲界繫] 모든 소견[見]을 제외한 그 밖의 결(結)ㆍ박(縛)ㆍ수면(隨眠)ㆍ수번뇌(隨煩惱)ㆍ전(纏)이니, 이것을 바로 욕취라 한다.
어떤 것을 견취(見取)라 하는가?
이른바 유신견(有身見)ㆍ변집견(邊執見)ㆍ사견(邪見)ㆍ견취(見取)이니, 이와 같은 네 가지 소견을 바로 견취라 한다.
어떤 것을 계금취(戒禁取)라 하는가?
이른바 어떤 사람이 계(戒)를 취하고 금(禁)을 취하며 계금(戒禁)을 취해서,
‘청정하게 하고 해탈하게 하며 벗어나게 하면서 고락(苦樂)을 초월할 수 있고 고락을 초월하는 데에 이른다’고 하는 것이니, 이것을 바로 계금취라 한다.
어떤 것을 아어취(我語取)라 하는가?
이른바 색계(色界)와 무색계(無色界)에 매인 모든 소견을 제외한 그 밖의 결ㆍ박ㆍ수면ㆍ수번뇌ㆍ전이니, 이것을 바로 아어취라 한다.
또 『대인연경(大因緣經)』에서 존자 경희(慶喜)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모든 취(取)는 반연하는 것이 있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반연하는 것이 있나니, 그 반연은 이른바 애(愛)이니라.
(자세한 설명은 생략함)
나아가 만일 전혀 애가 없다면 모든 취가 있음을 시설할 수 있겠느냐?”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그러므로 경희야, 모든 취는 모두가 애로써 그의 반연으로 삼느니라.”
이것을 바로 ‘애를 반연하여 취가 생긴다’고 한다.
이와 같이 모든 취는 애를 반연으로 삼고 애를 의지[依]로 삼으며 애를 건립(建立)으로 삼기 때문에,
일어나고 평등하게 일어나며 생기고 평등하게 생기며 쌓여 모이고 출현하는 것이니,
이 때문에 ‘애를 반연하여 취가 생긴다’고 한다.
9) 취(取)에 반연하여 유(有)가 생긴다
어떤 것을 ‘취(取)에 반연하여 유(有)가 생긴다’고 하는가?
이른바 취를 반연으로 삼아서 많은 유를 시설하는 것이니,
이를테면 부처님은 혹은 삼계(三界)와 5온(蘊)을 말씀하여 유라 하기도 하고,
혹은 후유(後有)를 받게 하는 업(業)을 말씀하여 유라 하기도 하며,
혹은 생분오온(生分五蘊)을 말씀하여 유라 하기도 한다.
어떤 것을 ‘삼계와 5온을 말씀하여 유라 한다’고 하는가?
마치 3유(有)를 말하는 것과 같나니, 이른바 욕유(欲有)와 색유(色有)와 무색유(無色有)이다.
어떤 것을 ‘후유를 받게 하는 업을 말씀하여 유라 한다’고 하는가?
마치 세존께서 아난타에게 말씀하시되,
“만일 업으로서 후유(後有)를 받게 할 수 있는 것이면 유라 한다”고 하신 것과 같다.
어떤 것을 ‘생분오온(生分五蘊)을 말씀하여 유라 한다’고 하는가?
마치 세존께서 파륵루나(頗勒窶那)에게 말씀하시되,
“식(識)을 음식으로 삼기 때문에 후유가 생긴다”고 하신 것과 같다.
또 『대인연경(大因緣經)』에서 존자 경희(慶喜)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모든 유(有)는 반연하는 것이 있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반연하는 것이 있나니, 그것이 반연하는 것은 이른바 취(取)이니라.
(자세한 설명은 생략함)
나아가 만일 전혀 취가 없다면 모든 유가 있음을 시설할 수 있겠느냐?”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그러므로 경희야, 모든 유는 모두가 취로써 그 반연을 삼느니라.”
이것을 바로 ‘취를 반연하여 유가 생긴다’고 한다.
이와 같이 모든 유(有)는 취를 반연으로 삼고 취를 의지[依]로 삼으며, 취를 건립(建立)으로 삼기 때문에,
일어나고 평등하게 일어나며 생기고 평등하게 생기며, 쌓여 모이고 출현하는 것이니,
이 때문에 ‘취를 반연하여 유가 있다’고 한다.
10) 유(有)를 반연하여 생(生)이 있다
어떤 것을 ‘유(有)를 반연하여 생(生)이 있다’고 하는가?
이를테면 어떤 사람은 탐냄ㆍ성냄ㆍ어리석음에 마음이 얽매었기 때문에 몸과 말과 뜻의 세 가지 악행(惡行)을 짓게 된다.
이 세 가지 악행을 업유(業有)라 하나니,
이 인연으로 말미암아 몸이 무너지고 목숨을 마치면 지옥에 떨어지게 되는데,
그때 거기서 모든 나고[生] 평등하게 나며[等生],
나아가 들고[趣入] 출현(出現)하며, 온(蘊)을 얻고 계(界)를 얻으며,
처(處)를 얻고 모든 온(蘊)이 생기며, 목숨[命根]이 생기는 것을 바로 생(生)이라고 한다.
이 생은 곧 유를 반연하여 생기게 되므로 이것을 곧 ‘유를 반연하여 생이 있다’고 한다.
지옥에 대해서 설명한 것과 같아서, 방생(傍生)과 귀계(鬼界)에 대해서도 또한 그러한 줄 알아야 한다.
또 어떤 사람은 사람의 세계[人趣]의 즐거움에 대하여 마음을 잡아매어 희구하면서 그는 생각하기를,
‘원컨대, 나는 장차 사람 세계의 동분(同分)에 태어나서 모든 사람들과 같이 쾌락을 받게 해 주소서’라고 하며,
이런 희구로 인하여 사람의 세계를 받을 수 있는 몸과 말과 뜻의 묘행(妙行)을 짓게 된다.
이 세 가지 묘행을 말하여 업유(業有)라 하며 이런 인연으로 말미암아 몸이 무너지고 목숨을 마치면서 사람의 세계의 동분 속에 태어나게 되는데, 그때 거기서 모든 나고 평등하게 나며 나아가 목숨이 생기는 것을 바로 생(生)이라 한다.
이 생은 유(有)에 반연하여 생기게 되므로 이것을 곧 유를 반연하여 생이 있다’고 한다.
사람의 세계에 대해서 설명한 것과 같아서, 사대왕중천(四大王衆天) 내지 타화자재천(他化自在天)에 대해서도 역시 그러한 줄 알아야 한다.
또 어떤 사람은 범중천(梵衆天)에 대하여 마음을 잡아매어 희구하면서 그는 생각하기를,
‘원컨대, 저는 장차 범중천의 동분 속에 태어나게 하소서’라고 한다.
이런 희구로 인하여 가행(加行)을 부지런히 닦아서 욕(欲)과 악한 법을 여의고, 거친 생각[尋]도 있고 세밀한 생각[伺]도 있으며, 여읨에서 생긴 희락[離生喜樂]이 있으면서 초정려(初靜慮)를 완전히 갖추어 머무른다.
이 선정 속에서 모든 몸의 율의[身律儀]ㆍ말의 율의[語律儀]ㆍ생활의 청정함[命淸淨]을 바로 업유라 하며,
이 인연으로 말미암아 몸이 무너지고 목숨을 마치면서 범중천의 동분 속에 나게 되는데, 그때 거기서 모든 나고 평등하게 나며 나아가 목숨이 생기는 것을 바로 생이라 한다.
이 생은 유를 반연하여 생기게 되므로 이것을 곧 ‘유를 반연하여 생이 생긴다’고 한다.
범중천에 대해서 설명한 것과 같아서, 범보천(梵輔天) 내지 광과천(廣果天)에 대해서도 역시 그러한 줄 알아야 한다.
또 어떤 사람은 무상천(無想天)에 대하여 마음을 잡아매어 희구하면서 그는 생각하기를,
‘원컨대, 나는 장차 무상천의 동분 속에 태어나게 하소서’라고 한다.
이런 희구로 인하여 가행(加行)을 부지런히 닦으면서,
‘모든 생각[想]은 거칠고[麤] 괴롭고[苦] 막힌다[障]’고 사유(思惟)하고,
‘생각이 없는[無想] 것은 공하고[空] 고요하고[靜] 미묘하고[妙]ㆍ여읜다[離]’고 사유한다.
이런 사유로 말미암아 모든 생각을 없애고 생각이 없는 데에 편안히 머무르며, 그는 모든 생각을 없애고 생각이 없는 데에 머무를 때를 무상정(無想定)이라 하며,
이 선정에 들어간 때의 몸의 율의와 말의 율의와 생활의 청정함을 바로 업유라 한다.
이 인연으로 말미암아 몸이 무너지고 목숨을 마치면서 무상천의 동분 속에 나는데, 그때 거기서 모든 나고 평등하게 나며 나아가 목숨이 생기는 것을 바로 생(生)이라 한다.
이 생은 유(有)를 반연하여 생기게 되므로 이것을 곧 ‘유를 반연하여 생이 생긴다’고 한다.
또 어떤 사람은 공무변처천(空無邊處天)에 대하여 마음을 잡아매어 희구하면서 그는 생각하기를,
‘원컨대, 나는 장차 공무변처천의 동분 속에 태어나게 해 주소서’라고 한다.
이런 희구로 인하여 가행을 부지런히 닦아서 모든 물질에 대한 생각[色想]을 초월하고 상대가 있다는 생각[有對想]을 없애며, 갖가지 생각[種種想]을 사유하지 않고 끝없는 허공[無邊空]에 들어가 공무변처를 완전히 갖추어 머무른다.
이 선정 속에서의 모든 사(思)와 평등한 사[等思]와 현전의 평등한 사[現前等思]와 이사(已思)와 당사(當思)와 사의 성품[思性]과 사의 종류[思類]와 마음과 뜻에서 짓는 업[造心意業]을 바로 업유라 하며,
이 인연으로 말미암아 몸이 무너지고 목숨을 마치면서 공무변처천의 동분 속에 나는데, 그때 거기서 모든 나고 평등하게 나며 나아가 목숨이 생기는 것을 바로 생(生)이라 한다.
이 생은 유(有)를 반연하여 생기게 되므로 이것을 곧 ‘유를 반연하여 생이 생긴다’고 한다.
공무변처에 대해서 설명한 것과 같아서 나아가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에 대해서도 역시 그러한 줄 알아야 한다.
또 『대인연경(大因緣經)』에서 존자 경희(慶喜)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모든 생(生)은 반연하는 것이 있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반연하는 것이 있나니, 그 반연은 이른바 유(有)이니라. (자세한 설명은 생략함) 나아가 만일 업유(業有)가 없다면 고기ㆍ새ㆍ배ㆍ전갈ㆍ나가(那伽)ㆍ약차(藥叉)ㆍ부다(部多)ㆍ식향(食香)과 모든 하늘ㆍ사람들이며 발이 없는 것, 두 발, 여러 발의 다른 종류의 여러 유정들이 저 여러 무더기에 나고 평등하게 나는 일이 있을 수 있겠느냐?”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만일 전혀 유(有)가 없다면 모든 생(生)이 있음을 시설할 수 있겠느냐?”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그러므로 경희야, 모든 생(生)은 모두가 유(有)로써 그 반연을 삼느니라.”
이것을 바로 ‘유를 반연하여 생이 생긴다’고 한다.
이와 같이 모든 생은 유를 반연으로 삼고 유를 의지[依]로 삼으며 유를 건립(建立)으로 삼기 때문에,
일어나고 평등하게 일어나며 생기고 평등하게 생기며 쌓여 모이고 출현하는 것이니,
이 때문에 ‘유를 반연하여 생이 생긴다’고 한다.
11) 생(生)을 반연하여 노사(老死)가 생긴다
어떤 것을 ‘생(生)을 반연하여 노사(老死)가 생긴다’고 하는가?
저 여러 유정들이 곧 저 여러 유정들의 무더기 속에 나고 평등하게 나며,
나아가 들고 출현하며, 온(蘊)을 얻고 계(界)를 얻으며, 처(處)를 얻고 모든 온(蘊)이 생기며, 목숨이 생기는 것을 바로 생(生)이라 하고,
머리칼이 빠지고 머리칼이 희게 되며, 가죽이 느슨해지고 얼굴이 쭈그러지며, 몸이 굽고 허리가 굽어지며, 숨을 헐떡거리고 지팡이를 짚고 다니며, 온몸에 반점과 검은 점이 생기고 쇠약해지고 암둔해지며, 감관이 원숙해지면서 변하고 파괴되며, 모든 행이 오래되어 헐고 무너지고 파리해지는 것을 노(老)라 하며,
저 여러 유정들이 곧 저 여러 유정의 무더기에서 이전하고 파괴되고 물러나고 이별하게 되며, 수명[壽]과 따뜻함[暖]과 의식[識]이 소멸하고 목숨[命根]이 옮아가며, 모든 온(蘊)이 파괴되고 일찍 죽거나 늙어서 죽는 것을 바로 사(死)라 한다.
이와 같은 노사는 생을 반연하여 생기는 것이므로 이것을 곧 ‘생을 반연하여 노사가 생긴다’고 한다.
또 『대인연경(大因緣經)』에서 존자 경희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노사(老死)는 반연하는 것이 있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반연하는 것이 있나니, 그 반연은 이른바 생(生)이니라.
(자세한 설명은 생략함)
나아가 만일 생(生)이 없다면 고기ㆍ새ㆍ뱀ㆍ전갈ㆍ나가ㆍ약차ㆍ부다ㆍ식향과 모든 하늘ㆍ사람들이며 발이 없는 것, 두 발, 여러 발의 다른 종류의 저 여러 유정들이 저 여러 무더기에서 있게 되는 노사(老死)가 있을 수 있겠느냐?”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만일 전혀 생이 없다면 노사가 있음을 시설할 수 있겠느냐?”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그러므로 경희야, 노사는 모두가 생으로써 그 반연을 삼느니라.”
이것을 바로 ‘생을 반연하여 노사가 생긴다’고 한다.
이와 같이 노사는 생을 반연으로 삼고 생을 의지[依]로 삼으며, 생을 건립(建立)으로 삼기 때문에,
일어나고 평등하게 일어나며 생기고 평등하게 생기며, 쌓여 모이고 출현하는 것이니,
이 때문에 ‘생을 반연하여 노사가 생긴다’고 한다.
어떤 것을 ‘수(愁)ㆍ탄(歎)ㆍ고(苦)ㆍ우(憂)ㆍ요뇌(擾惱)가 발생한다’고 하는가?
이를테면 어떤 사람이 혹은 부모ㆍ형제ㆍ자매나 스승이나 벗의 죽음으로 인하여,
혹은 친족이 멸망하고 모두 없어짐으로 인하여,
혹은 재산이나 지위를 모두 잃게 됨으로 인하여,
곧 자기의 몸에 날카롭고 사납고 심장이 끊어지고 목숨을 잃을 듯한 모진 괴로운 느낌[苦受]이 일어나는데,
그는 그때에 마음이 애타고 평등하게 애타며 속으로 애타고 두루 애타면서 곧 근심[愁]하고 이미 근심하였고 장차 근심할 것이며,
마음속에서 근심의 화살이 일어나는 것을 바로 수(愁)라고 한다.
또 어떤 사람이 혹은 부모ㆍ형제ㆍ자매나 스승이나 벗의 죽음 등으로 인하여 곧 자기의 몸에 날카롭고 매우 사납게 심장이 끊어지고 목숨을 잃는 듯한 모진 괴로운 느낌이 일어나는데,
그는 그때에 마음이 애타고 평등하게 애타며 속으로 애타고 두루 애타면서 곧 근심하고 이미 근심하였고 장차 근심할 것이며, 마음속에서 근심의 화살이 일어나게 되며,
이 인연으로 말미암아 슬퍼하고 탄식하면서,
‘괴롭고도 괴롭구나. 나의 아버님과 나의 어머님이
(자세한 설명은 생략함)
나아가 나의 재산과 나의 지위가 어찌하여 하루아침에 갑자기 이 지경에 이르렀단 말이냐’ 고 한다.
그러할 때에 생기는 모두를 슬퍼해서 원망하는 언사나 갖가지 어업(語業)을 바로 탄(歎)이라 한다.
5식(識)과 상응하는 평등하지 않은 느낌[不平等受]을 말하여 고(苦)라 한다.
의식(意識)과 상응하는 평등하지 않은 느낌을 바로 우(愚)라고 한다.
모든 마음이 어지럽고[擾] 괴로운[惱] 것과 이미 어지럽고 괴로웠던 것과 장차 어지럽고 괴로울 것과 어지럽고 괴로운 성품[擾惱性]과 어지럽고 괴로운 종류를 말하여 요뇌(擾惱)라 한다.
노사(老死)의 자리에서 이와 같은 갖가지 수ㆍ탄ㆍ고ㆍ우ㆍ요뇌가 발생하는 것이다.
[고온의 샇임]]
어떤 것을 ‘이와 같이 해서 곧 순전하고 큰 고온[純大苦蘊]이 쌓인다’고 하는가?
이른바 이와 같은 노사(老死)의 자리 속에서 한 종류의 큰 재앙[大災], 큰 횡액 거리[大橫具], 큰 근심더미[大過患衆], 고온 덩어리[苦蘊聚]가 쌓이게 된다는 것이다.
또 무명(無明)의 고온(苦蘊)을 반연으로 하여 행(行)의 고온이 일어나고,
행의 고온을 반연으로 하여 식(識)의 고온이 일어나며,
식의 고온을 반연으로 하여 명색(名色)의 고온이 일어나고,
명색의 고온을 반연으로 하여 6처(處)의 고온이 일어나며,
6처의 고온을 반연으로 하여 촉(觸)의 고온이 일어나고,
촉의 고온을 반연으로 하여 수(受)의 고온이 일어나며,
수의 고온을 반연으로 하여 애(愛)의 고온이 일어나고,
애의 고온을 반연으로 하여 취(取)의 고온이 일어나며,
취의 고온을 반연으로 하여 유(有)의 고온이 일어나고,
유의 고온을 반연으로 하여 생(生)의 고온이 일어나며,
생의 고온을 반연으로 하여 노사(老死)의 고온이 일어나고,
이 노사로 말미암아 갖가지 수(愁)ㆍ탄(歎)ㆍ고(苦)ㆍ우(憂)ㆍ요뇌(擾惱)의 고온이 일어난다.
그러므로 통틀어 ‘이와 같이 하면서 곧 순전하고 큰 고온이 쌓인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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