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음폭포
1.
겨울 산 입구에서 얼음폭포를 만났다
폭포는 수직으로 멈춰선 채 면벽좌선 중이었다
겁 없이 뛰어내리던 물길은 그대로 굳어버렸고
계곡을 호령하던 물소리도 완고하게 입을 다물었다
찰나의 시간마저도 딱딱하게 응고되었다
거대한 한 폭의 침묵 같았다
고독한 정신의 형해 같았다
2.
다시 올려다보니
폭포는 멈춰선 듯 흐르고 있었다
너무도 생생하여 흐름과 멈춤을 분간할 수 없었다
너무도 투명하여 물의 표정과 뼈까지 들여다보였다
동중정과 정중동의 경계가 따로 없었다
소란과 고요가 은밀히 함께 있었다
그리하여 백발성성한 이마로 빛나는 얼음폭포는
삼라만상을 한기 하나로 다스리고 있었다
오욕칠정도 죄다 얼어버리고 없었다
3.
얼음폭포에 압도되었다 나는
백척간두의 아찔한 경지 앞에서 오돌오돌 떨며
오도 가도 못한 채 그 자리에 멈춰서 있었다
지그시 눈을 감고 오래도록 묵상하며
저 거대한 장벽을 일거에 깨뜨릴 답을 떠올렸으나
얼음폭포는 요지부동 난공불락이었다 도대체
누가 겨울 산의 중심에 드는 문을 막아버렸단 말인가
나는 저 묵묵부답의 은산철벽 앞에
그만 무릎을 꿇고 오체투지 하였다
월간 유심 2014년 3월호
김선태 ksentae@hanmail.net/ 1993년 〈광주일보〉〈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 《간이역》《작은 엽서》《살구꽃이 돌아왔다》등과 평론집 《풍경과 성찰의 언어》등이 있다. 애지문학상, 영랑시문학상, 전라남도문화상 등 수상. 현재 목포대 국문학과 교수
주소:
534-729
전남 무안군 청계면 영산로 1666 (전화 061-450-2110) 국립목포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김선태 교수
‘다시 읽고 싶어 또 펼쳐보는 시가 좋은 시’란 말을 한분의 원로시인께 들은 적이 있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이 시를 몇 번 읽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 시는 얼어버린 폭포를 세밀히 묘사하고 있으면서도 그 내면에 구도求道의 열망을 품고 있는듯하다.
세상에서 ‘내가 나입네’ 하며 설쳐대던 천둥벌거숭이 같은 행동을 멈춘 채, 달마가 구년九年을 면벽좌선面壁坐禪했듯이 도道를 구하는 모습, 얼어버린 폭포를 통해 함묵의 정진을 노래한 이 시를 읽으면 ‘내 죽으면 바위가 되리라/ 억년 비정의 함묵에/ 안으로 안으로만 채찍질하여/ 중략/ 두 쪽으로 깨뜨려져도 소리하지 않는 바위가 되리라’고 노래한 유치환의 ‘바위’를 느낄 수 있다. 오랜 수행을 통해 고고한 정신의 형해形骸로 남아 최고의 경지에 오른 큰 인간의 진면목을 얼음폭포에 빗대어 노래하고 있으니 말이다.
시인은 해부하는 의사와 같이 이 거대한 한 폭의 침묵, 얼음폭포의 진면목을 샅샅이 살핀다. 멈춰선듯 흐르며 움직이는듯한데 멈춰있는 멈춤과 움직임이 자유자재한 정중동靜中動의 세계, 은밀한 찰나의 세계를 살펴보는 것이다. 움직임이 시간의 흐름이라면 멈춤은 시간의 정지이며 찰나라는 지극히 짧은 시간의 단위 안에서 인간은 정靜과 동動의 경계를 구분할 수 없지 않은가. 시인은 이런 최고의 경지를 훔쳐보는 것이다.
오랜 시간의 수행으로 자기를 단련하여 최고의 경지에 오르기까지 생명의 진액을 모두 소비한 듯 백발이 성성한 이마를 들고 삼라만상을 한기寒氣로 다스리고 있는 존재. 시인은 오욕칠정五慾七情도 죄다 얼어버리고 말았다고 하며 ‘색色, 성聲, 향香, 미味, 촉觸’에서 비롯되는 원초적·본능적 욕망을 넘어서서 궁극에는 희喜, 노怒, 애哀, 락樂, 애愛, 오惡, 욕慾을 초월한 존재가 되고 싶다는 자기 고백과 같은 숨은 소망을 내보인다.
우리는 고매한 정신의 소유자를 만나거나 크고 넓은 인간성 또는 한 분야에서 일가一家를 이룬 분들을 보면 경외심을 느낀다. 그러나 나같이 평범한 사람들은 대개 ‘백척간두百尺竿頭에서 한발을 더 내딛는’ 사즉필생死卽必生의 진일보進一步를 딛지 못한다.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하며 기껏 분발하여도 정상아래 팔부능선 쯤에서 주저앉고 만다. 저 높은 하늘을 나는 갈매기 조나단 리빙스턴의 꿈을 이루지 못한다.
시인이 오도 가도 못하고 오들오들 떨고 있음도 이에 다름이 아니다. 시인은 이런 사태에 직면하여 마음을 다스리며 묵상한다. ‘나는 어떻게 해야 저 경지를 넘어서서 저 장엄한 겨울 산, 깨달음의 세계에 들 수 있을까?’ 를 찾는다. 그러나 얼음폭포는 마치 어떤 창으로도 뚫기 어렵고 어떤 도끼로도 깨뜨릴 수 없는 은산철벽銀山鐵壁처럼 거대하게 시인을 압도한다. 어쩌면 얼음폭포는 실상인즉 시인의 중심에 떡하니 주인처럼 자리 잡은 존재인지도 모른다. 얼음폭포는 묵묵부답黙黙不答의 존재, 네 길을 네가 찾으라는 듯 거대하게 겨울 산의 입구를 막아선 넘을 수 없는 철옹성 같은 존재, 태산북두泰山北斗 같은 존재이다. 그러므로 겨울 산에 들고 싶은데 얼음폭포에 막히고만 시인이 할 수 있는 행동은 불교 신자가 불佛,법法,승僧 삼보(三寶)께 최대의 존경으로 큰절을 올리듯 오직 무릎을 꿇고 오체투지五體投地의 예, 외경의 예를 올리는 것뿐이다.
나는 저 묵묵부답의 은산철벽 앞에
그만 무릎을 꿇고 오체투지 하였다
이 장엄한 얼음폭포에 직면한 바로 그 때, 시인이 한계에 직면한 바로 그 순간, 땅에 얼어붙은 듯한 시인의 마음에서 얼음 속에서도 멈춘 듯이 흐르는 물, 얼음폭포를 노래하는 이 시가 태어난 것이 아닐까? 나는 오늘도 좋은 시를 읽을 때 시를 읽는 기쁨과 함께 이렇게 빙벽에 마주 선 서늘함과 초라함을 느낀다.
*십여년전 故 이충이 선생님이 한번 써보라고 하여 써서 '시와 산문'에 실었던 글입니다. 써놓은 글을 정리하다가 겨울에 어울리는 시 감상문이라 한번 실어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