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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지도론 제14권
23. 초품 중 시라바라밀을 찬탄한 뜻을 풀이함②
【문】 시라(尸羅)의 모습은 이미 알았거니와 어떤 것이 시라바라밀(尸羅波羅蜜)1)인가?
【답】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보살이 계행을 지니되 차라리 자신의 몸을 잃어버릴지언정 조그마한 계도 범하지 않는다면, 이것이 시라바라밀이다” 한다.
앞의 『소타소마왕경(蘇陀蘇摩王經)』2)에 의하면, 몸과 목숨을 아끼지 않고 금계(禁戒)를 온전히 지킨 이야기가 있다.
곧 보살은 전생에 힘센 독룡(毒龍)이었는데, 어떤 중생이 그 앞에 있으되 몸의 힘이 약한 자는 눈으로 쳐다만 보아도 곧 죽어버리고, 힘이 센 자는 정신이 돌아 죽어버렸다.
그 용이 일일계를 받고, 집을 떠나 고요를 구해 숲 속으로 들어가서 사유했는데, 너무 오래 앉아 있었기에 피로해져서 잠이 들었다.
용이란 잘 때에는 그 모습이 마치 뱀과 같고, 몸에 무늬가 있는데 7보의 빛깔로 뒤섞여 있다.
사냥꾼이 그것을 보고 놀랄 듯이 기뻐하며 말했다.
“이 희유한 가죽을 국왕께 헌상하여 옷감으로 쓰게 하면 좋지 않을까.”
그리고는 곧 작대기로 그 머리를 누르고 칼로 그 가죽을 벗기기 시작했다.
용은 생각했다.
“내 힘이 자재하여서 이 나라를 뒤집기를 마치 손바닥 뒤집듯 할 수 있거늘 이 사람은 극히 작은 물건인데 어찌 나를 괴롭히는가.
내가 지금 계를 지키기 때문에 이 몸을 생각지 않고 부처님의 말씀만을 따라야 하리라.”
여기에서 스스로 참아 눈을 감고는 보지 않고, 기운을 막아 숨을 쉬지 않은 채 그 사람을 가엾이 여겼다.
계를 지키려는 까닭에 한결같은 마음으로 껍질이 벗겨지면서도 후회하지 않았다.
이미 가죽을 잃고는 붉은 살이 땅에 놓였는데 때 마침 햇살이 몹시 뜨거워 땅 위를 꿈틀거리면서 큰물을 찾으려 했으나 작은 벌레들이 와서 그의 살을 물어뜯었다.
하지만 계행을 지니는 까닭에 감히 움직이지 못하고 생각했다.
“나는 지금 이 몸을 벌레들에게 보시하는 것은 불도를 구하는 까닭이다.
지금 살로써 보시하여 그들의 몸을 살찌우게 해 주고, 나중에 성불하거든 다시 법으로 보시하여 그들의 마음을 이롭게 해 주리라.”
이렇게 맹세하자 몸이 마르고 목숨이 끊어져 둘째 하늘인 도리천에 태어났다.
그때의 독룡은 석가문불이시고,
사냥꾼은 제바달 등의 여섯 외도[六師]이고,
작은 벌레의 무리들은 석가문불께서 처음으로 법의 바퀴를 굴리실 때 도를 얻은 8만의 하늘 무리들이다.
보살이 계행을 지니되 몸과 목숨을 아끼지 않고 결정코 후회하지 않음이 이와 같았으니, 이를 시라바라밀이라 한다.
또한 보살은 계를 지니고 불도를 위한 까닭에 이렇게 큰 서원을 세운다.
“반드시 중생을 제도하리라. 금생이나 내생의 즐거움을 구하지 않으며, 좋은 이름이나 헛된 명예를 바라지 않으리라. 또한 스스로가 일찍 열반에 들기를 바라지 않으며, 오직 중생들이 긴 물결 속에 빠져 사랑에 속고 어리석음에 그르치는 까닭에 내가 마땅히 그들을 구제하여 피안에 이르게 하리라.”
한마음으로 계를 지니어 좋은 곳에 태어나며, 좋은 곳에 태어나는 까닭에 착한 사람을 만난다. 착한 사람을 만나는 까닭에 지혜가 생기고, 지혜가 생겨나는 까닭에 6바라밀을 행하게 되며, 6바라밀을 행하는 까닭에 불도를 얻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계를 지키는 것을 일컬어 시라바라밀이라 한다.
또한 보살이 계행을 지니어 마음으로 착함을 즐기고 청정해짐은 나쁜 길을 두려워해서가 아니며, 하늘에 태어나기를 구해서도 아니다. 오직 착함과 청정함을 구하여 계율로써 마음을 길들여서 마음으로 하여금 착함을 즐기게 하려는 것이니, 이것이 시라바라밀이다.
또한 보살은 크게 인자한 마음으로 계를 지녀 불도에 이르게 되나니, 이것이 시라바라밀이다.
또한 보살은 계를 지니어 능히 6바라밀을 내는데, 이것을 이름하여 시라바라밀이라 한다.
어떻게 지계가 능히 계를 내는가?
곧 5계로 인하여 사미계를 얻고,
사미계로 인하여 율의계(律儀戒)를 얻고,
율의계로 인하여 선정의 계를 얻고,
선정의 계로 인하여 무루의 계를 얻나니,
이것을 일컬어 계에서 계가 생긴다고 한다.
어찌하여 지계가 능히 보시[檀]를 내는가?
곧 보시에 세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재물보시[財施]요, 둘째는 법보시[法施]요, 셋째는 무외보시[無畏施]이다.
계행을 지니어 스스로를 단속하고 모든 중생의 재물을 침해하지 않는다면, 이것을 재물보시라 한다.
중생들이 보고는 그의 행을 흠모하거나 그들에게 법을 설해 주어 깨닫게 하거나 또한 스스로 생각하기를,
‘나는 맑은 계행을 굳게 지니어 일체 중생을 위해 공양의 복밭이 되어 주고, 중생들로 하여금 무량의 복을 얻게 하리라’ 하나니, 이러한 갖가지는 법보시이다.
일체 중생은 모두 죽음을 두려워하는데, 계행을 지니어 해치지 않는다면, 이것이 곧 무외보시이다.
또한 보살은 이렇게 생각한다.
‘나는 계행을 지니고, 이 지계의 과보로써 중생들을 위하여 전륜성왕이 되거나 염부제의 왕이 되거나 혹은 천왕(天王)이 되어서 중생들로 하여금 재물이 만족하여 모자람이 없게 하리라.
그런 뒤에야 보리수 밑에 앉아서 마군을 항복받고, 마군을 무찔러 위없는 도를 이루고는 중생들을 위하여 청정한 법을 설해 주어 한량없는 중생들로 하여금 늙음ㆍ앓음ㆍ죽음의 바다를 건너게 하리라.’
이것을 일컬어 지계의 인연으로 보시바라밀을 낸다고 하는 것이다.
또한 어떤 것이 지계로써 인욕이 생기는 것인가?
곧 계를 지니는 사람은 이렇게 생각한다.
“내가 지금 계를 지니는 것은 마음을 다스리기 위한 것인데, 만약 계를 지니면서도 인욕이 없다면 지옥에 떨어질 것이다.
비록 계를 파하지는 않았더라도 인욕하는 마음이 없기에 악도를 면치 못하리니, 어찌 분한 생각을 따라 스스로 마음을 억제하지 못하겠는가.
오직 마음 때문에 3악취(惡趣)에 든다. 그러므로 스스로 힘써서 부지런히 인욕을 닦아야 하리라.”
또한 행자(行者)가 계행의 공덕을 견고히 하고자 한다면, 인욕바라밀을 닦아야 한다.
그것은 왜냐하면 인욕은 큰 힘이 있어서 계행을 더욱 굳건히 하여 흔들리지 않게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시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다.
“나는 지금 출가하여 모습이 속인과 다르거늘 어찌 마음을 방종히 하여 세상 사람들의 법과 같이 하겠는가.
마땅히 스스로 힘써서 참음으로써 마음을 조절하고, 몸과 입으로 참음으로써 마음으로도 역시 인욕을 얻어야 하리라.
만일 마음이 참지 못한다면 몸과 입도 역시 그러할 것이다.”
그러므로 행자는 몸과 입과 마음으로 인욕해 모든 분노와 원한을 끊어야 한다.
또한 이 계를 간략히 말하면 8만 가지요 자세히 말하면 한량이 없나니, 어찌 내가 이 한량없는 계법을 다 지니겠는가?
오직 인욕으로써 뭇 계법이 저절로 얻어진다.
비유하건대 마치 어떤 사람이 왕에게서 형벌을 받는 것과 같으니, 왕은 죄인을 칼수레[刀車]에다 싣고 여섯 쪽에 날카로운 칼을 세우되 몸과 조그만치의 사이도 뜨지 않게 한 뒤에 험한 길을 분별없이 마구 달리게 한다.
이때에 몸을 잘 가눈다면 칼 때문에 몸을 상하지 않게 되나니, 이는 죽이되 죽지 않는 것이다.
계를 지니는 사람도 그와 같아서,
계는 날카로운 칼날이요, 인욕은 몸을 지탱하는 것이니,
만약에 인욕하는 마음이 견고하지 못하면 계율 역시 사람을 상하게 하는 것이다.
다시 비유하건대 노인이 밤길을 가는데 지팡이가 없으면 넘어지는 것과 같다.
인욕은 계행의 지팡이여서 사람을 부축하여 도에 이르게 하는데, 복락의 인연은 요동치 않는 것이다.3)
이러한 것들을 일컬어 지계가 인욕바라밀을 낳는다고 한다.
무엇을 일컬어 지계가 정진을 낳는다고 하는가?
계를 지니는 사람은 방일(放逸)을 제거하고, 스스로의 힘으로 부지런히 위없는 법을 닦아 익히며, 세간의 쾌락을 버리고 선한 도에 들어가 열반 구하기에 뜻을 두어 모든 중생을 제도하며, 큰 마음으로 게을리 하지 않아 부처 구하는 것으로 본분을 삼는다.
이것을 일컬어 지계가 능히 정진을 낳는다고 하는 것이다.
또한 계를 지니는 사람은 세상의 고통과 늙음ㆍ앓음ㆍ죽음의 과환을 싫어하고 정진할 마음을 내어 스스로 벗어나려 하고 남도 제도하려 한다.
비유하건대 마치 야간(野干)4)이 숲 속에서 사자나 범ㆍ이리 등을 따라다니면서 그들이 남긴 고기를 얻어먹고 살아가는 것과 같으니,
간혹 헛탕을 치면 밤중에 성을 넘어 인가(人家) 깊숙이 들어가서 고기를 찾다가 얻지 못할 경우 으슥한 곳에서 잠시 잠에 들어 쉰다. 모르는 결에 새벽이 되었음을 깨닫고는 깜짝 놀라 갈피를 잡지 못한다. 달아나자니 벗어날 길이 없는 것이 걱정이요, 머물러 있자니 죽음의 고통이 두렵다.
그는 문득 죽은 듯이 땅에 엎드려 있기로 결심하고 있는데,
어떤 사람이 지나다가 보고는,
“나는 야간의 귀가 필요하다”고 말하며 귀를 베어낸다.
이에 야간은 생각했다.
‘귀를 베이니 아프기는 하나 몸만은 보전케 하리라.’
다시 어떤 사람이,
“나는 야간의 꼬리가 필요하다”고 말하면서 꼬리를 베어 가니,
야간은 다시 생각했다.
‘꼬리를 베이니 아프기는 하나 아직은 작은 일이다.’
다시 어떤 사람이,
“나는 야간의 어금니가 필요하다”라고 말하자,
야간은 속으로 생각했다.
‘베어가는 자가 점점 많아지니, 혹 나의 머리를 끊는 자가 있다면 살아날 길이 없다.’
그리고는 곧 땅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그의 지력을 다하여 트인 길을 찾아 용맹스럽게 빠져나가 겨우 살아났다.
수행자의 마음이 고난에서 벗어나려 하는 것도 이와 같나니,
늙음이 이르를 때엔 그래도 너그러워서 정성스럽게 결단을 내려 정진하지 않고, 병이 들어도 그러하다가,
죽음이 이르려 할 때에야 더 바랄 것이 없음을 알고는 문득 스스로 힘써서 과감하게 성의를 다하여 크게 정진을 닦아 죽음에서 벗어나 마침내는 열반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또한 계행을 지니는 법은 마치 활쏘기와 같아서 먼저 평평한 땅을 만나야 하나니,
땅이 평평하여야 마음이 안정되고,
마음이 안정되어야 마음껏 활을 당기며,
마음껏 활을 당겨야 깊이 꽂히는 법이다.
계율은 평평한 땅이요,
안정된 마음[意]은 활이요,
힘껏 당기는 일은 정진이요,
화살은 지혜요,
도적은 무명이니,
만약에 능히 이와 같이 힘써 정진하면 반드시 큰 도에 이르러 중생을 제도하리라.
또한 계를 지니는 사람은 능히 정진으로써 5정(情)을 스스로 제어하여 5욕을 받지 않나니, 마음이 흩어지면 거두어서 다시 돌아오게 한다.
이것이 곧 지계에 의해 능히 모든 감관을 잘 보호하게 된다는 것이다.
모든 감관을 잘 보호하면 선정이 생기고,
선정이 생기면 지혜가 생기고,
지혜가 생기면 불도에 이르게 된다.
이것을 일컬어 지계에서 비리야바라밀이 생겨난다고 한다.
무엇을 일러 지계가 선(禪)을 낳는다 하는가?
곧 사람에게는 3업이 있으니, 만약에 몸과 입의 업이 선하다면, 뜻의 업도 자연히 선해진다.
예를 들어 굽은 풀이 마(麻) 가운데서 자라면 떠받혀주지 않더라도 스스로 곧아지는 것과 같다.
지계의 힘은 능히 모든 번뇌[結使]를 약하게 만든다.
그렇다면 어떻게 능히 약하게 만드는 것인가?
만약에 계를 지니지 않는다면 성냄이 찾아왔을 때 죽이고자 하는 마음이 일어나고,
욕망의 대상을 만나면 곧 음심이 드러난다.
만약에 계를 지닌다면 비록 미세한 성냄이 일어난다고 해도 살심(殺心)이 일어나지 않으며,
비록 음심이 있다고 해도 음사(陰事)를 저지르지는 않는다.
이것을 일컬어 지계로써 능히 모든 번뇌를 약하게 만든다고 하는 것이다.
모든 번뇌를 약화시키기 때문에 선정을 얻기 쉽다.
비유하건대 늙고 병들어 기운을 잃으면 죽음이 오기 쉽듯이, 결사가 약해지는 까닭에 선정도 얻기 쉬운 것이다.
또한 사람의 마음은 쉬지 않고 항상 즐거움을 구한다.
수행자는 계를 지니어 세상의 복을 버리고 마음이 방일하지 않으니, 이 때문에 선정을 얻기 쉬운 것이다.
또한 계를 지니는 사람은 사람 가운데 태어나고, 6욕천에 태어나고, 색계에 이른다.
만약 물질의 모습[色相]을 파한다면, 무색계에 태어나게 된다.
계를 지니고 청정해 모든 결사를 끊는다면 아라한의 경지를 얻는다.
보리심[大心]으로 계를 지키고 중생을 연민한다면, 이것이 보살이다.
또한 계로써 거친 것을 단속하고, 선으로써 세밀한 것을 포섭한다.
또한 계는 몸과 입을 포섭하고, 선은 산란심을 그치게 한다.
사람이 지붕에 오를 때, 사다리가 아니면 오를 수 없듯이,
계라는 사다리가 없다면 선정 역시 서지 못한다.
또한 계를 파한 사람은 결사의 바람이 강해서 그 마음이 산란해진다.
그 마음이 산란해지면 곧 선을 얻지 못한다.
계를 지니는 사람은 번뇌의 바람이 부드러워 마음이 크게 산란해지지 않아 선정을 얻기 쉽다.
이와 같은 종종의 인연이 있다면, 이것을 일컬어 지계로써 선바라밀을 낳는다 하는 것이다.
어떻게 지계로써 능히 지혜를 낳는가?
계를 지니는 사람은 이 계의 모습이 어디에서 생기는가를 관찰하여 뭇 죄를 좇아 생겨남을 안다. 만일 뭇 죄가 없다면 계도 없다.
계의 모습도 이와 같아서 인연을 좇아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슨 까닭에 집착을 낳는가?
비유하건대 연꽃이 더러운 진흙에서 나오는 것과 같으니, 비록 빛깔을 아름다우나 나온 곳은 깨끗하지 못하다.
이것으로써 마음을 깨달아 집착을 내지 않게 한다면,
이것을 일컬어 지계로써 반야바라밀을 낳는다 하는 것이다.
다시 계를 지니는 사람은 이렇게 생각한다.
‘나는 계를 지니는 것을 귀히 여기어 취하고 계를 파하는 것을 천히 여기어 버린다고 한다면, 만일 이런 마음이 있으면 반야에 응하지 못한다.
지혜로써 헤아려 마음으로 계를 집착하지 않고 취하거나 버리지도 않는다면,
이것을 일컬어 지계로써 반야바라밀을 낳는다는 것이다.’
다시 계를 지니지 않는 사람은 비록 날카로운 지혜가 있어도 세상의 갖가지 업무를 경영하면서 생업을 구하려 하기 때문에 지혜의 근기가 점점 둔해진다.
비유하건대 예리한 칼로 진흙을 가르면 마침내 무딘 칼이 되는 것과 같다.
만약에 출가해서 계를 지니고 세상일을 경영하지 않고 항상 모든 법의 참모습은 상이 없는 것임을 관찰한다면, 비록 먼저는 둔했으나 차츰차츰 날카로워진다.
이러한 갖가지 인연을 일컬어 지계로써 반야바라밀을 낳는다고 한다.
또 이와 같은 것을 일컬어 시라바라밀로써 6바라밀을 낳는다고 하는 것이다.
다시 보살은 계를 지니어 그로써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에 또한 우치하지 않고, 의심하지 않고, 미혹하지 않는다. 또한 스스로의 열반을 위하지 않는 까닭이며, 지계란 오로지 일체 중생을 위한 까닭이며, 불도를 얻기 위한 까닭이며, 그리고 일체의 불법을 얻기 위한 까닭에 이와 같은 모습을 이름하여 시바라밀이라 한다.
다시 보살은 죄와 죄 아닌 것을 얻을 수 없는 까닭에 이때를 이름하여 시바라밀이라 한다.
【문】 만약에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하는 것이 지계라고 한다면, 어찌하여 죄와 죄 아닌 것을 얻을 수 없다 하는가?
【답】 사견과 거친 마음으로 “얻을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만약에 깊이 모든 법상에 들어가 공삼매(空三昧)를 행한다면, 지혜의 눈으로써 관하는 까닭에 죄는 얻을 수 없는 것이다.
죄를 얻을 수 없기에 죄가 아님도 얻을 수 없다.
다시 중생을 얻을 수 없기 때문에 살인의 죄도 또한 얻을 수 없고,
죄를 얻을 수 없기 때문에 계율 역시 얻을 수 없다.
왜냐하면 죽이는 죄가 있는 까닭에 곧 계율이 있기 때문이다.
만약에 죽임의 죄가 없다면 또한 계율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문】 지금 현재 중생이 있는데 어찌하여 중생을 얻을 수 없다 하는가?
【답】 육안으로 보이는 것은 보는 것이 아니다.
만일 지혜의 눈으로 관찰한다면 중생을 얻을 수 없으리니,
마치 앞의 보시[檀] 가운데서 말한 바와 같다.
곧 베푸는 이도 없고 받는 이도 없으며, 베푸는 물건도 없으니, 이 역시 이와 같다.
또한 만약에 중생이 있다면 이것은 5중(衆)인가, 아니면 5중을 여의었는가?
만일 5중이라면, 5중은 다섯이고 중생은 하나뿐이다. 그렇다면 다섯은 하나가 되고 하나는 다섯이 될 수 있어야 한다.
비유하건대 시장에서 물건을 바꾸는 것과 같다.
곧 값이 다섯 필(匹)인 것을 한 필만 주고 취하려 한다면 안 된다. 왜냐하면 하나는 다섯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5중은 한 중생이 될 수 없음을 알게 된다.
또한 5중은 생멸하여 항상된 모습이 없는데, 중생의 법은 전생으로부터 와서 내생에 이르며, 죄와 복을 삼계에서 받는다.
만일 5중이 곧 중생이라면, 마치 초목이 저절로 생기고 저절로 멸하는 것과 같다.
그렇다면 죄나 속박은 없고 해탈도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5중이 곧 중생이 아님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만일 5중을 떠나서 중생이 있다면 마치 먼저 말하기를,
“신(神)이 항상하고 두루한다”고 하는 가운데 그 이치가 어긋남과 같다.
또한 5중을 여의었다면 나라는 소견이 생기지 않을 터인데, 만일 5중을 여의고도 중생이 있다고 한다면 이는 상견[常]에 떨어지는 것이요, 상에 빠지면 생도 없고 사도 없을 것이다.
그것은 왜냐하면 생이란 ‘전에는 없던 것이 이제 있는 것’이요,
사란 ‘이미 생한 것이 멸해 없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에 중생이 항상하다면 다섯 길[五道] 가운데 두루 차 있어야 한다.
먼저부터 이미 항상 있거늘 어찌 이제 다시 와서 태어나는 것인가.
만일 생이 없다면 곧 죽음도 있을 수 없을 것이다.
【문】 결정코 중생이 있거늘, 무슨 까닭으로 없다 하는가?
5중의 인연으로 중생의 법이 있는 것은 마치 다섯 손가락의 인연으로 주먹의 법이 생기는 것과 같다.
【답】 그 말은 옳지 못하다. 만일 5중의 인연으로 중생의 법이 있다고 한다면, 5중을 제하고 달리 중생의 법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렇지 못하다.
눈으로 스스로 색을 보고, 귀로 소리를 듣고, 코로 냄새를 맡고, 혀로 맛을 알고, 몸으로 촉감을 느끼고, 뜻으로 법을 알거니와 공하여 나라는 법이 없으니, 이 여섯 가지 일을 여의면 다시 중생이라 할 것이 없다.
외도의 무리들은 뒤바뀐 소견 때문에 ‘눈으로 색을 보는 것이 중생이라 하고,
나아가서는 뜻으로 법을 아는 것이 중생이라 하고,
또한 능히 기억하거나 고락을 받는 것이 중생이다’ 한다.
다만 이런 소견을 내는 중생의 실체는 알지 못한다.
비유하건대 마치 어떤 장로 대덕 비구의 경우와 같으니, 사람들은 그를 아라한이라 하여 많은 공양거리를 바쳤다.
나중에 그가 병들어 죽으니, 제자들은 공양을 잃을 것을 걱정하여 밤에 몰래 시신을 몰래 들어내어 장사지내고, 그가 누웠던 자리에 이부자리와 베개를 두어 마치 그 스승이 살아 있는 것과 같이 만들어 놓았다.
혹 사람들이 문법을 하며,
“스승이 어디에 계시는가?”라고 물어오면,
제자들은 말하기를,
“그대는 저 침상에 있는 이부자리와 베개가 보이지 않으시오?”라고 했다.
어리석은 이들은 자세히 살피지 못하고,
‘스승께서 앓아 누우셨다’ 하면서 크게 공양을 바치고 돌아갔다.
이렇게 한 것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런데 어떤 지혜로운 이가 와서 묻거늘 제자들은 전과 같이 대답했더니, 지혜로운 이가 말했다.
“나는 이부자리ㆍ베개ㆍ침상ㆍ옷자락을 보러 온 것이 아니라 사람을 찾고 있소이다.”
그리고는 이불을 들치고 찾으니, 결국 사람은 없었다.
여섯 가지 일[六事]의 모습을 제하면 달리 나와 남은 없으며, 아는 자와 보는 자도 역시 이와 같다.
또한 만약 중생이 5음의 인연으로 있다고 할 때, 5음이 무상하다면 중생도 무상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인과가 서로 같기 때문이다. 만일 중생이 무상하다면 내생에도 이르지 못할 것이다.
또한 만일 그대의 말과 같이,
‘중생이 본래부터 항상 있는 것이다’라고 한다면,
중생은 응당 5음을 내야 하고, 5음은 중생을 내지 말아야 한다.
지금 5음의 인연 때문에 중생이란 이름이 생겼거늘 어리석은 사람은 이름을 좇아서 진실을 구한다.
이런 까닭에 중생은 실로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중생이 없다면 죽이는 죄도 없을 것이요,
죽이는 죄가 없기 때문에 또한 계를 지니는 일도 없다.
또한 이 5음에 깊이 들어가서 관찰하고 분별하여 공함을 안다면,
마치 꿈속에서 보는 것과 같고, 거울 속의 모습 같다.
만약 꿈속에 보는 것이나 거울 속의 상을 죽인다면 죽임의 죄는 없으니,
5음이 공한 모습인 중생을 죽이는 것 역시 이와 같다.
또한 어떤 사람이 죄를 원하지 않아 죄 없기를 탐착하면, 이 사람은 파계한 사람을 보면 곧 업신여기고 계를 지키는 착한 사람을 보면 곧 사랑하고 공경하게 된다.
이렇듯 계를 지니는 일은 곧 죄를 일으키는 인연이 된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죄와 죄 아님을 얻을 수 없다”고 한다.
그러므로 마땅히 시라바라밀을 갖추어야 하는 것이다.
1)
범어로는 śīla-pāramita. 계를 지니어 완전하게 만드는 일이다. 지계바라밀(持戒波羅蜜).
2)
범어로는 Sutasomarājasūtra.
3)
복락의 인연 때문에 요동치 않는다.
4)
여우[狐]의 일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