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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경록 제1권
1. 표종장
[부처님의 말씀을 인용하는 까닭]
[문] 만약 종(宗)을 밝히고자 하면 순전히 조사의 뜻[祖意]만을 잡는 것이 합당하거늘,
무엇 때문에 모든 부처님과 보살의 언교(言敎)를 아울러 인용하여 지남(指南)으로 삼는가?
이 때문에 종문(宗門)에서 이르기를,
“새우[蝦]를 빌려 눈을 삼는 것은 자기 몫이 없음이다. 이는 단지 문자의 성인[文字聖人]만 이루고 조사의 지위에는 들지 못하리라”고 했다.
[답] 옛날부터 한결같이 교(敎)를 보는 것을 허락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두려워한 것은 부처님 말씀을 살피지 않고 글을 따라 알음알이[解]를 내어 부처님의 뜻을 잃고 처음 낸 뜻[初心]을 저버릴까 해서였다.
어떤 이가 만약 언어로 인하여 뜻을 얻고 마음의 대경[境]을 짓지 않으면서 다스려 곧장 부처 마음을 깨닫는다면 또 무슨 허물이 있겠는가?
예를 들어 저 약산(藥山) 화상이 일생 동안 『대열반경(大涅槃經)』을 보며 손에서 책을 놓지 않은 것과 같다.
그때 어떤 학인(學人)이 묻기를,
“화상께서는 평소에 학인들에게 경을 보지 못하게 하시면서 화상은 무엇하러 보십니까?”라고 하자,
스님이 이르기를,
“다만 눈만을 가리기 위해서니라”라고 하셨고,
묻기를,
“학인이 보아도 됩니까?”라고 하자,
스님이 이르기를,
“네가 본다면 소 가죽[牛皮]도 뚫어지리라”라고 하였으니,
이는 또 서천(西天)의 제1 조사와 같다.
이는 본사(本師) 석가모니불께서 처음 마하가섭(摩訶迦葉)에게 전하였으므로 초조(初祖)가 되었고, 차례로 서로가 전하여 이 땅의 6조(祖)까지 이르렀다.
이는 모두가 부처님의 제자이다.
이제 본사의 말씀을 인용하여 제자들에게 가르쳐 보이고 말로 인하여 도(道)를 천거하여 법(法)을 보고 종(宗)을 알게 하면 바깥으로 내달아 구하지 않을 것이다.
부처님 뜻을 친히 밝혀 뜻을 얻고 이내 조사의 지위에 들면 누가 돈점(頓漸)의 문을 논하겠으며, 본성을 깨달아 현재 원통(圓通)을 증득하면 어찌 전후(前後)의 지위를 드러낼 것이며, 만약 이와 같다면 무슨 어긋남이 있겠는가?
이는 또 서천의 상대(上代) 28조(祖)와 이 땅의 6조(祖)와 같으며, 내지 홍주 마조(洪州馬祖) 대사ㆍ남양 충(南陽忠) 국사ㆍ아호 대의(鵝湖大義) 선사ㆍ사공산본정(思空山本淨) 선사 등과 같다.
이들은 모두 경론을 널리 통달하여 자심(自心)을 뚜렷이 깨치고서 모든 것을 제자들에게 보이되 다 진실한 증거를 인용하였으며, 끝내 자기의 소견을 내어서 망령되이 지시하거나 진술하지 않았었다.
그러므로 세월이 면면히 이어지면서도 참된 종풍은 떨어지지 않았다.
거룩한 말씀으로써 일정한 분량[定量]을 삼았기 때문에 삿됨과 거짓이 변화시키지 못하였고, 지극한 가르침으로써 지남을 삼았기 때문에 의지함에 근거가 있었다.
때문에 규봉(圭峯) 화상이 이르기를,
“모든 종(宗)의 시조는 바로 석가이시다. 경은 부처님의 말씀이요, 선은 부처님의 뜻이다.
모든 부처님의 마음과 입은 반드시 서로가 어긋나지 않았고 모든 조사는 서로가 근본을 이어 받았으니, 이는 부처님께서 친히 부촉하신 것이다.
보살이 논(論)을 지은 시말(始末)은 오직 부처님의 경을 넓힌 것이다. 하물며 가섭(迦葉)으로부터 국다(毬多)에 이르기까지 널리 전한 것이 모두가 삼장(三藏)을 겸한 것은 말해 무엇 하겠는가?
그리고 마명(馬鳴)과 용수(龍樹)가 모두 조사였지만 논을 짓고 경을 풀이한 것이 수십만 게송이니, 풍속을 관찰하여 물(物)을 교화함에는 정해진 일과 거동이 없다”고 하였다.
그 까닭에 선지식이라고 일컫는 이는 본래 부처님 말씀을 밝혀서 자기 마음을 인가(印可)하여야 된다.
만약 요의(了義)의 일승원교(一乘圓敎)와 상응(相應)하지 아니하면, 설령 성인의 과위를 증득했다 하여도 역시 구경(究竟)이 아니다.
이제 또한 두 가지를 기록하여 이 글을 증명하겠다.
홍주 마조(洪州馬祖) 대사가 이르기를,
“달마(達馬) 대사가 남천축국(南天竺國)으로부터 온 것은 대승(大乘)의 한 마음의 법을 전한 것뿐이었으나,
『능가경(楞伽經)』으로써 중생의 마음을 밝힌 것은 이 한 마음의 법을 믿지 않을까 해서였다”라고 했다.
『능가경』에서 이르기를,
“부처님께서는 마음으로 종(宗)을 삼고 문(門) 없음으로 법의 문을 삼는다”고 하였거늘,
무엇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마음으로 종을 삼는가?
부처님께서 마음이라 함은 마음이 곧 부처라는 것이요, 지금 말하는 이것이 바로 마음의 말[心語]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는 마음으로 종을 삼는다”고 하였다.
문 없음으로 법의 문을 삼는다 함은 본성(本性)이 공함을 통달하면 다시는 하나의 법도 없어서 성(性) 스스로가 바로 문(門)이다. 성에는 상(相)도 없고 문(門)도 없다.
그러므로 “문 없음으로 법의 문을 삼는다”고 하였다.
또한 공문(空門)이라고도 하고, 색문(色門)이라고도 한다.
왜냐 하면 공은 바로 법성(法性)의 공이요 색은 바로 법성의 색이기 때문이다.
형상이 없기 때문에 공이라 하고, 지견(知見)이 그지없기 때문에 색이라 한다.
그러므로 “여래의 색(色)은 그지없고 지혜 역시 그렇다”라고 하였다.
모든 법이 나는 곳에 다시 한량없는 삼매문(三昧門)이 있다.
안팎의 지견(知見)과 망정의 고집[情執]을 멀리 여읜 것을 역시 총지문(總持門)이라 고도 하고 시문(施門)이라고도 한다.
안팎의 선악의 모든 법을 생각하지 않으므로 이 모두를 여러 바라밀문(波羅蜜門)이라 한다.
색신불(色身佛)은 바로 실상불(實相佛)의 가용(家用)이므로 경에서 이르기를,
“32상(相)과 80종호(種好)는 모두가 마음의 생각으로부터 생긴다”라고 하였다.
또한 ‘법성가의 불꽃[法性家焰]’이라고도 하고,
‘법성의 공훈[法性功勳]’이라고도 한다.
보살이 반야(般若)를 행할 때, 불로 3계(界)의 안팎의 모든 물건을 다 태워 없애면서도 그 중에서 한 개의 풀잎도 다치지 않는 것은 모든 법이 상 그대로[如相]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경에서 이르기를,
“몸을 무너뜨리지 않으면서 하나의 모양[相]을 따른다”고 하였다.
이제 자성(自性)이 부처이며 가고ㆍ머물고ㆍ앉고ㆍ눕는 모든 때에 한 법도 얻을 것이 없음을 알았으며, 진여는 일체의 이름에 속하지 않고 이름이 없는 것도 아님을 알았다.
때문에 경에서 이르기를,
“지혜[智]는 있음과 없음과 안과 밖으로 얻지 못하므로 구할 것이 없다”고 하셨다.
그 본래 성품에 맡기는 것이며, 또한 성품에 맡긴다는 마음조차도 없다.
경에서 이르기를,
“나는 갖가지 의생신(意生身)을 마음의 헤아림이라고 말하나 그것은 마음이 없는 마음[無心之心]이요, 헤아림 없는 헤아림[無量之量]이다”고 하셨다.
이름 없는 것이 참 이름이 되고 구함이 없는 것이 바로 참된 구함이니라.
경에서 이르기를,
“법을 구하는 이는 마땅히 구하는 바가 없어야 한다”고 하셨다.
마음 밖에 따로 부처가 없고 부처 밖에 따로 마음이 없나니, 선(善)도 취하지 아니하고 악(惡)도 짓지 아니한다. 깨끗함과 더러움의 양 쪽이 다 함께 법에 의하지 아니하고 제 성품이 없으며 3계는 오직 마음뿐이다.
경에서 이르기를,
“삼라만상(森羅萬像)은 한 법의 나타남[所印]이다”고 하셨다.
보는 색(色)은 그 모두가 곧 보는 마음이다. 마음은 자체의 마음이 아닌 것이다. 색으로 인(因)하는 까닭에 마음이며, 색은 자체의 색이 아니라 마음으로 인하는 까닭에 색인 것이다.
때문에 경에서 이르기를,
“색을 보는 것은 곧 마음을 보는 것이다”라고 하셨다.
남양 충 국사(南陽忠國師)가 이르기를,
“선종의 법이란 마땅히 부처님의 말씀인 일승요의(一乘了義)에 의거하여야 본원의 마음자리에 계합하고 서로 전하고 받아 부처님의 도와 같아지는 것이다.
망령된 생각과 불요의교(不了義敎)에 의지하여야 하며 멋대로 견해(見解)를 내어서는 안 된다. 뒤의 학인을 그르치어 모두가 다 이익이 없을까 해서이다.
비록 스승에게 의지하여 종지(宗旨)를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만약 요의교(了義敎)와 상응하면 곧 행(行)에 의지하여도 되나 만약 불요의교라면 서로가 허락되지 아니한다.
마치 사자 몸속의 벌레가 사자 몸속의 살을 뜯어먹는 것과 같으며 하늘 악마와 외도만이 불법을 파멸하는 것은 아니다”고 하였다.
그때 어떤 선객(禪客)이 물었다.
“어느 것이 곧 부처의 마음[佛心]입니까?”
그러자 스님이 말했다.
“담ㆍ벽ㆍ기화 조약돌 등 무정의 물건[無情之物]도 다 부처의 마음이니라.”
선객이 말했다.
“경과는 크게 어긋납니다.
경에서 이르기를,
‘담ㆍ벽ㆍ기와ㆍ조약돌 등 무정의 물건을 여읜 것을 불성(佛性)이라 하느니라’고 하셨거늘,
이제 온갖 무정의 물건도 모두 부처의 마음이라 하십니까?
잘 모르겠습니다. 마음과 성(性)은 별개입니까, 별개가 아닙니까?”
스님이 말했다.
“미혹한 사람에겐 별개이겠지만 깨친 사람에겐 별개가 아니니라.”
선객이 말하였다.
“경과는 또 어긋납니다.
경에서 이르기를,
‘선남자야, 마음은 불성이 아니니라.
불성은 바로 항상[常]한 것이지만, 마음은 바로 무상(無常)한 것이니라’고 하셨거늘,
이제 별개가 아니라 하시니 잘 모르겠습니다. 이 뜻은 어떤 것입니까?”
스님이 말했다.
“그대 스스로가 말에만 의지할 뿐 뜻에 의지하지 않은 것이다.
비유하면 추운 계절에 물이 얼어서 얼음이 되었다가 따스한 때가 되면 얼음이 녹아 물이 되는 것과 같다.
중생으로서 미혹해 있을 적에는 성(性)이 엉겨서 마음[心]을 이루지만, 깨쳤을 때에는 마음이 풀려서 성을 이룬다.
그대가 결정코 무정의 물건이 마음이 아니라고 집착한다면 경에서 ‘3계가 오직 마음일 뿐이다[三界唯心]’라고 말씀하지 않았어야 한다.
때문에 『화엄경』에서 이르기를,
‘마땅히 법계(法界)의 성품을 살펴야 한다. 온갖 것은 오직 마음으로 지은 것일 뿐이니라’고 하였다.
이제 또 그대에게 묻겠다.
무정의 물건이 3계 안에 있는 것인가, 3계 밖에 있는 것인가?
또 이것이 마음인가, 이것이 마음이 아닌가?
만약 마음이 아니라면 경에서 ‘3계는 오직 마음일 뿐이다’라고 말씀하지 않았어야 하며,
만약 이것이 마음이라면 또 성이 없다[無性]고 말씀하지 않았어야 한다.
그대 자신이 경과 어긋났을지언정 나는 어긋나지 않았느니라.”
아호 대의(鵝湖大義) 선사가 조칙을 받아 궐내로 들어왔는데, 서울의 여러 대사들에게 물었다.
“대덕(大德)이여, 그대들은 무엇으로써 도(道)를 삼습니까?”
어떤 이가 대답하였다.
“지견(知見)으로써 도를 삼습니다.”
스님이 말했다.
“『유마경(維摩經)』에서는,
‘법은 보고[見] 듣고[聞] 지각하고[覺] 아는 것[知]을 여의었다’고 하셨거늘,
어떻게 지견으로써 도를 삼습니까?”
또 어떤 이가 말했다.
“분별(分別)없는 것으로써 도를 삼습니다.”
스님이 말했다.
“경에서 말씀하기를,
‘모든 법의 모양을 잘 분별할 수 있어야 제일의(第一義)에서 동요되지 아니하다’고 하셨거늘,
어떻게 분별없는 것으로써 도를 삼습니까?”
황제(皇帝)가 물었다.
“어떤 것이 곧 불성입니까?”
스님이 대답하였다.
“폐하(陛下)께서 하문하신 데에서 떠나 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혹은 마음 밝힐 것을 바로 지시하기도 하여 혹은 집착을 깨뜨리고 도에 들게 하기도 하면서 견줄 데 없는 변재로써 꼭 정해졌다는 집착을 떨어버리고 얻음이 없음을 꺾은 것이다.
사공산 본정(思空山本淨) 선사가 서울의 여러 대덕들에게 말하였다.
“그대들은 마음에 집착하지 말라.
이 마음은 모두가 앞의 티끌로 인하여 존재하는 것이니, 마치 거울 속의 형상이 없으면 있을 수 없는 것과 같다.”
만약 실유(實有)를 집착한다면, 곧 본래의 근원을 잃는 것이니, 언제나 제 성품이 없는 것이다.
『원각경(圓覺經)』에서는,
“허망하게 4대(大)를 잘못 알아 제 몸의 모양으로 삼고 6진(塵)의 인연 그림자를 제 마음의 모양으로 삼는다”라고 하셨으며,
『능가경』에서는,
“마음과 인연을 환히 알지 못하면 두 가지 망상(妄想)이 생기고 마음과 경계(境界)를 환히 알면 망상이 생기지 않는다”라고 하였으며,
『유마경』에서는 “법은 보고 듣고 지각하고 아는 것이 아니니라”라고 하였고,
다시 세 가지 경을 인용하여 이것이 진실임을 증명했다.
오조(五祖) 문하의 장엄(莊嚴) 대사는 일생 동안 제자들에게 오직 『유마경』에서 보적 장자(寶積長者)가 부처님을 찬탄한 게송의 끝 네 구절만 들어 보였다.
“세간에 집착 않음이 마치 연꽃과 같고
언제나 공적(空寂)한 행에 잘 들며
모든 법상(法相)을 통달하여 걸림 없어
공과 같아 의지할 바 없는 이에게 머리 조아립니다”
그러자 학인이 물었다.
“이것은 바로 부처님의 말씀이십니다. 화상 자신의 말씀을 얻고자 합니다.”
스님이 말하였다.
“부처님 말씀이 곧 나의 말이요, 나의 말이 곧 부처님 말씀이니라.”
그러므로 초조(初祖)가 서천에서 와서 처음 선도(禪道)를 행하면서 심인(心印)을 전하려 하였으나 불경을 빌려야 했으므로 『능가경』으로써 증명을 삼아 교문(敎門)의 유래한 바를 알리어, 마침내 바깥 사람은 비방을 쉬고 내학(內學)은 받아 이어져서 후대 자손[祖胤]이 크게 흥성하고 불교의 가르침[玄風]이 널리 미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처음으로 마음을 내어 배움을 시작하는 이로서 아직 스스로 깨닫기 이전에 만약 거룩한 가르침의 바른 종(宗)이 아니라면 무엇을 의지하여 수행하며 도에 나아가겠는가?
설령 스스로가 망령된 소견을 내지 않는다 하여도 역시 모두 삿된 스승을 만나리라.
이 때문에 이르기를,
“나의 눈은 본래 바른 것이었는데 스승 때문에 삿되게 되었다”고 하나니,
서천의 96종(種)의 소견에 집착된 무리가 모두 이런 무리들이다.
그러므로 알라. 나무는 먹줄이 아니면 곧게 되지 아니하고 진리는 가르침이 아니면 원만해지지 않는다.
위에서와 같이 대략 두세 가지를 인용하였으니,
이는 모두가 곧 큰 선지식(善知識)이요, 만물을 벗어난[物外] 종사(宗師)이며, 참선하는 동산의 기린과 용이요, 조사 문중의 귀감(龜鑑)이다.
하나의 가르침을 보이매 바람이 일고 번개가 걷히며 한 말씀을 드리우매 산이 무너지고 바다가 마른다.
제왕(帝王)이 스승으로 섬기고 조야(朝野)가 귀명(歸命)하며 총림(叢林)이 법칙으로 취하고 뒤의 학인이 이어받는 것이니, 끝내 자신의 소견을 따르면서 부처님 말씀을 어기는 것이 아니다.
의심을 풀고 거짓이 떠나면 성(性)이 나타나고 종(宗)이 밝아진다.
하나하나가 경전의 글을 널리 인용하여 부처님 뜻을 골고루 나타내지 않음이 없다. 그 까닭에 영원히 후사(後嗣)에게 전해지고 가풍(家風)을 떨어뜨리지 아니한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또 어찌 이제까지 이어지면서 창성할 수 있었겠는가? 법의 힘은 이와 같아서 증험은 헛된 것이 아니다.
또 만약 불승(佛乘)을 연구하고 보장(寶藏)을 헤쳐 찾으려면, 낱낱이 모름지기 사라져 자기에게로 돌아가게 하고 말마다 참 마음에 명합되게 해야 한다.
다만 뜻 위의 글에 집착하여 말만을 따라 소견을 내지 말고 곧장 설명 끝의 뜻을 더듬어서 본래 근원에 계합하여야 된다.
그러면 스승이 없는 지혜[無師智]가 앞에 나타나고 천진(天眞)의 도가 어두워지지 아니하리니,
『화엄경』에서 이르기를,
“모든 법이 곧 마음이 자성(自性)임을 알면 지혜 몸을 성취하되 다른 이로 말미암아 깨치는 것이 아니다”고 했다.
그러므로 언교[敎]는 도를 돕는 힘이 있음을 알라. 처음 마음 낸 이가 어찌 잠깐인들 잊을 수 있겠는가?
자세하게 살피면 법의 이익이 그지없다. 그래서 찾아 책으로 엮어 모았다.
또 종지(宗旨)를 논한 것이 모두 돈기(頓機)에 머무를 뿐이니,
마치 해가 뜨면 높은 산을 비추고 빠른 말이 채찍의 그림자를 보고 달리는 것과 같다.
그 까닭에 단하(丹霞) 화상이 이르기를,
“서로 만나면 집어 내지 아니하여도 뜻을 들면 문득 안다”라고 했으나,
지금 이 종경(宗鏡)에서는 오히려 뜻을 드는 것을 기다리지 않아도 문득 스스로 알 것이다.
그러므로 『수능엄경(首楞嚴經)』에서는,
“뚜렷이 밝고 환히 아는 것은 마음의 생각으로 인한 것이 아니다”라고 했다.
눈썹을 치키고 눈을 굴리면 이는 벌써 어긋난 것이니,
선덕(先德)의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이는 곧 오히려 글귀를 더함이요
눈을 굴리면 곧 어긋난다.
만약 조계(曹谿)의 뜻[旨]을 물으면
다시는 눈썹 치킴을 기다리지 아니한다”
이제 불승(佛乘)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실로 아직 알지 못하는 이를 위하여 임시 종경(宗鏡)으로써 참 마음을 돕고 드러낸다.
비록 글과 말을 걸어 놓았으나 묘한 뜻이 여기에 있으므로 아래로 중근기와 하근기를 거두어서 뭇 근기에게 다 미치도록 하여 다만 그 사람 각자에게 자기 이익을 돕도록 맡길 뿐이다.
백 개의 하천이 비록 넘친다 하나 어찌 큰 바다가 널리 받아들이는 것을 방해하겠는가?
다섯의 큰 산이 스스로 높지마는 태양이 널리 비추는 것을 장애하지 아니한다.
근기(根機)도 같지 않고 즐기는 것과 하려는 것도 같지 않으며 네 문[四門]에 들어가는 곳도 비록 다르기는 하나, 하나의 참된 소견을 보는 것에는 구별이 없다.
마치 새를 잡는 이가 한 코에 걸려들게 하되 한 코로써 그물이 될 수 없고,
나라를 다스리는 이의 공(功)이 한 사람에게 있되 한 사람으로써 나라가 될 수 없는 것과 같다.
저 『내덕론(內德論)』에서 이르기를,
“한 방울의 물로는 국을 끓이지 못하고,
한 개의 나무로는 방을 만들지 못하며,
한 벌의 옷으로는 뭇 사람 몸에 맞추지 못하고,
한 개의 약으로는 서로 다른 병을 고치지 못하며,
하나의 채색으로는 무늬 놓은 수가 될 수 없고,
한 소리로는 거문고와 비파를 고르지 못하며,
한마디 말로는 뭇 선행을 권하지 못하고,
한 가지 계율로는 많은 과실을 막지 못한다”라고 한 것과 같다.
어찌 점돈(漸頓)의 다름을 괴상히 여기어 법의 문을 전일(專一)하게 하려고 할 수 있겠는가?
때문에 이르기를,
“한 사람을 위하는 것처럼 많은 이들에게도 그러하고 많은 이들을 위하는 것처럼 한 사람에게도 그러하거늘, 어찌 하열한 이해[劣解]를 가진 어리석은 사람이 내는 국집된 소견과 같겠는가?
나의 이 걸림이 없는 넓고 큰 법의 문은, 마치 허공이 모양은 아니면서 모든 모양이 떨쳐 드러남을 거역하지 않는 것 같고 법성(法性)이 몸은 없으면서 모든 몸이 단박에 나타남을 장애하지 않는 것과 같다.
모름지기 6상의 이치[六相義]로써 모두 포섭하여야 단상(斷常)의 소견이 비로소 녹고, 10현의 문[十玄門]으로써 막힘없이 통하여야 거취(去取)의 망정(妄情)이 비로소 끊어진다.
또 만약 실로 하나를 들어도 천을 깨치는 큰 총지(總持)를 얻게 된다면, 일부러 언어[言詮]를 빌어서 수고로이 해석함이 없으리라. 배와 뗏목은 미혹한 이 나루를 건네주기 위해서 있는 것이요, 길잡이는 길 잃는 사람을 인도하기 위해서 있는 것이다.
모든 언어를 꿰뚫고 원종(圓宗)에서 보이고자 하는 것은, 그 모두가 문자(文字)의 성품을 떠나는 것이 곧 해탈임을 모르고, 일체제법(一切諸法)의 진실한 성품을 마음 밖에서 얻고자 문자를 세우는 사람에게, 도저히 문자로서 대치(對治)하여 그 진실을 보이는 것이다.
만약 모든 법의 근원을 깨치면 곧 문자나 실 털끝만큼의 나타남도 보지 않으며, 온갖 모든 법이 바로 마음 자성임을 비로소 알면 대경[境]과 지혜가 막힘없이 통하고 색(色)과 공이 함께 없어진다. 이 뚜렷이 밝은 끝을 친히 증득하게 되어야 이 한 법의 평등한 때[時]에 든다.
또 무슨 교(敎)이기 때문에 떠나야 하고 무슨 조도(祖道)이기 때문에 중히 여겨야 하며, 무슨 법이 돈(頓)이어서 취하여야 하고, 무슨 법이 점(漸)이어서 버려야 되는가?
이는 모두가 식심(識心)으로 멋대로 분별을 내는 줄 알아야 한다”고 한 것이다.
그 까닭에 조사와 부처님이 선교방편(善巧方便)으로 은밀하게 권도의 문[權門]을 펴시고 널리 교승(敎乘)의 방편을 갖추어 회득(會得)하게 하나니, 갓 견성(見性)한 그 자리에서 무심(無心)해지면 이에 약과 병이 함께 소멸되고 교와 관[敎觀]이 같이 쉬게 된다.
『능가경(楞伽經)』에서 게송으로 말하였다.
“모든 천승(天乘) 및 범승(梵乘)과 성문승(聲聞乘)과 연각승(緣覺乘)이
모든 부처의 여래승(如來乘)이니,
나는 이 모든 승(乘)과
유심(有心)을 굴리는 것까지 설명했지만
모든 승(乘)이란 구경(究竟)이 아니니라.
만약 그의 마음 소멸하고 다하여
탈 것과 그리고 태울 이가 없으면
승(乘)을 세울 것이 없어지므로
나는 일승(一乘)이라 설명하겠지만
중생들을 이끌어 안내하려고
분별하여 모든 승(乘)을 말하느니라”
때문에 선덕이 이르기를,
“하나의 흐림[瞖]이 눈에 있으면 천 송이 꽃이 허공을 어지럽히고, 하나의 망령이 마음에 있으면 항하의 모래[恒沙]만큼 많이 나고 죽느니라”고 했다.
흐림이 없어지면 꽃이 다하고 망령이 사라지면 참됨[眞]을 증득하며, 병이 나으면 약이 없어지고 얼음이 녹으면 물이 남는다.
신단(神丹)은 아홉 번을 굽고 무쇠를 별러 황금이 되듯 지극한 진리의 한 마디 말씀은 범인(凡人)을 바꾸어 성인을 이룬다.
미친 마음이 쉬지 않다가 쉬어버리면 그대로 보리(菩提)이며 거울이 깨끗하고 마음이 밝아지면 본래 이것이 부처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