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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달마장현종론 제13권
4.2. 유정의 종류와 그 전생(轉生)[3]
3) 중유의 4종 입태(入胎)
[그렇다면] 일체의 중유는 다 전도된 마음[倒心]을 일으켜 모태에 들어가는 것인가, 그렇지 않은 것인가?
그렇지 않다.
어째서 그러한가?
계경 중에서 “입태(入胎)에는 네 가지가 있다”고 설하였기 때문이다.72)
그러한 네 가지란 무엇을 말하는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첫째는 들어가는 것[入胎]에 대해 바로 아는 것이며
둘째와 셋째는 머물고 나오는 것에 대해서도 아울러 아는 것이며
넷째는 그 모든 상태[位]에 대해 알지 못하는 것이며
그리고 난생은 항상 알지 못한다.
앞의 세 가지 종류의 입태는
전륜왕과 두 부처(獨覺과 無上覺)를 말한 것이니
업과 지혜와 두 가지 모두가 뛰어나기 때문에
순서대로 그러한 것이며, 넷째는 그 밖의 생(태생)이 그러하다.
논하여 말하겠다.
어떤 제 유정들은 많은 복업과 지혜[福慧]를 닦았기 때문에 죽고 태어나는 상태에서 염력(念力)에 의해 지니게 된 심상(心想)이 분명하여 정지(正知)에 산란됨이 없다.
바로 그러한 유정 가운데 혹 어떤 이는 입태(入胎)에 대해 바로 알며,
혹 어떤 이는 입태와 아울러 주태(住胎)에 대해 바로 알며,
혹 어떤 이는 입태와 주태와 아울러 출태(出胎)에 대해서도 바로 안다.
여기서 ‘아울러’라고 말한 것은, 후자는 반드시 전자를 포함한다는 사실을 나타내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온갖 유정으로서 복업과 지혜가 다 같이 적은 이는 입태ㆍ주태ㆍ출태의 상태에 대해 모두 바로 알지 못하니, 전자(예컨대 입태)에 대해 올바로 알지 못할 것 같으면 후자(예컨대 주태와 출태)에 대해서도 역시 그러한 것이다.
이상에서 설한 네 종류의 입태는 일체의 입태를 모두 다 포섭한 것으로서, 여기서는 게송을 짓는 법[結頌法]에 따라 이와 같은 순서로 설하였지만 계경 중에서의 순서는 그렇지가 않다.73) 그리고 이와 같은 네 종류는 바야흐로 태생(胎生)에 어리석고 어리석지 않은 상태의 차별이 있음을 설한 것이다.
모든 난생(卵生)은 입태 등의 모든 상태에 대해 항상 무지할 따름이다.
난생은 알로부터 나오는 것임에도 어찌하여 ‘입태’ 즉 태에 들어간다는 등으로 말하는 것인가?
이것(난생)은 당래(當來)에 근거하여 그 명칭을 설정한 것이기 때문에 어떠한 과실도 없으니, 마치 세간에서 ‘팔찌를 만든다’거나 ‘옷을 짓는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74)
혹은 난생을 ‘일찍이 입태하였다’는 등으로 설한 것은, 지금[의 상태(난생)]에 근거하여 옛날[의 상태(입태)]를 말한 것이기 때문에 이 역시 아무런 과실도 없는 것이다.
어떠한 이유에서 입태에 대해 바로 알지 못하는 자는 머물거나 나오는 상태에 대해서도 필시 바로 알지 못하는 것인가?
깨달음이 저열하고 미혹함이 뛰어나므로 이치상 용납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장차 모태에 들어가려고 하는 상태에서는 [4]지(支)의 몸과 온갖 근(根)을 구족하여 손상됨이 없었을뿐더러 강승(强勝)하고 명리(明利)하였음에도 바로 알지 못하였는데 하물며 [모태에] 머물거나 나올 때를 말해 무엇 할 것인가?
즉 그때는 [4]지와 근이 손상되거나 결여되었을뿐더러 이열(羸劣)하고 암매(暗昧)하므로 능히 바로 안다고 하는 것은 이치상 용납될 수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모태에] 머무는 것에 대한 정지(正知)는 모태에 들어갈 때의 뛰어난 정지라는 한 가지 힘에 의해 인기되기 때문이며,
[모태에서] 나오는 것에 대한 정지는 [모태에] 들어갈 때와 머무를 때의 뛰어난 정지라는 두 가지 힘에 의해 인기되기 때문이다.
또한 앞의 세 종류의 입태도 동일하지 않으니, 이를테면 그 순서대로 전륜왕(轉輪王)과 독각(獨覺)과 대각(大覺)이 바로 그러한 경우이다. 즉
첫 번째의 입태란 말하자면 전륜왕의 그것으로, 들어가는 상태에 대해서는 바로 알지만, 머무는 상태에 대해서는 바로 알지 못하며, 나오는 상태에 대해서도 바로 알지 못한다.
두 번째의 입태란 말하자면 독승각(獨勝覺)의 그것으로, 들어가는 상태와 머무는 상태에 대해서는 바로 알지만, 나오는 상태에 대해서는 바로 알지 못한다.
세 번째의 입태란 말하자면 무상각(無上覺)의 그것으로, 들어가고 머물고 나오는 상태에 대해 모두 능히 바로 안다. 그리고 이러한 앞의 세 가지 입태의 인간은 당래의 명칭으로써 드러나는 인간이다.75)
다시 [세 종류의 입태에는] 차별이 있으니, 순서대로 [각기] 업과 지혜와 두 가지 모두의 세 종류가 뛰어나기 때문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즉
첫 번째(전륜왕)는 업이 뛰어나니, 숙세에 일찍이 광대한 복업을 닦았기 때문이다.
두 번째(독각)는 지혜가 뛰어나니, 오랫동안 다문(多聞)을 익혀 사택(思擇)이 뛰어나기 때문이다.
세 번째(무상각)는 두 가지 모두가 뛰어나니, 광겁(曠劫: 3아승지겁 100겁을 말함)에 걸쳐 뛰어난 복업과 지혜를 닦고 행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앞의 세 종류의 입태를 제외한 그 밖의 나머지 태생과 난생은 복업과 지혜가 모두 저열하기 때문에 그들은 모두 네 번째 입태가 된다.
그런데 어떤 이는 설하기를
“이러한 네 종류의 입태는 모두 보살에 대해 분별한 것으로, 말하자면 최후유(最後有)가 바로 세 번째 입태이고,76) 도사다천(覩史多天: 도솔천)의 전생(前生)이 두 번째 입태이며, 가섭파(迦葉波) 부처님을 만난 다음의 전생이 첫 번째 입태이다. 그리고 그 이전의 생은 모두 바로 네 번째 입태이다.
혹은 다시 초ㆍ제2ㆍ제3 무수겁(無數劫:즉 아승지겁)이 그 순서대로 앞의 세 종류의 입태이며, 그 이전의 생은 모두 바로 네 번째 입태이다”라고 하였다.77)
[입태 등은] 존재[有]로 상속하는 것인데, 어찌 염심(染心)이라고 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어떻게 정지(正知)로서 어머니의 태로 들어간다고 할 수 있을 것인가?
즉 정지와 정념(正念)은 근율의(根律儀)로 설해지며, 대저 근율의는 결정코 마땅히 선심(善心)이라고 해야 하는 것이다.
이 같은 과실은 없으니, 일체의 정지가 모두 선성(善性)에 포섭되는 것이라고는 인정되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이와 다르다고 한다면, 마땅히 정지로서의 망어(妄語)는 존재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혹은 입태의 상태는 상속에 근거하여 설한 것으로, 오로지 바로 결생(結生)하는 찰나에 근거하여 말한 것이 아니다.
그리고 이러한 [상속의] 상태 중에서는 대개 선심이 일어나고 염오심은 적게 일어나기 때문에 ‘정지’라고 말한 것이다.78)
혹은 그들에 대해 공경심을 일으키게 하고 미란(迷亂)되지 않게 하는 것을 ‘정지’라는 말로 설정한 것으로, 이를테면 ‘이분은 바로 나의 아버지이고, 이분은 바로 나의 어머니이다’라고 참답게 알기 때문에 ‘정지’라고 일컬은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을 어떻게 세 번째 입태라고 할 수 있을 것인가?
최후유의 보살은 계(戒)의 과보 등에 대해서도 모두 분명하게 알고 있으며, 모태에 들어갈 때에도 이와 같은 일이 있는 것이다.
무시(無始) 이래 익혀온 대로 문득 마음을 일으킨 것인데, 여기에 무슨 과실이 있을 것인가?
혹은 오로지 친애(親愛)의 염심을 일으킨 것일 뿐으로, 비법(非法)의 애염을 일으키는 일은 없다.
[이 같은 4종의 입태에 관한] 그 밖의 문답은 『순정리론』 제24권에서와 같다.
4) 무아(無我)와 윤회상속
여기서 마땅히 논설해 보아야 할 것이니, 누가 [저 세간으로] 가 입태(入胎)하는 것인가?
어째서 ‘누구’라고 묻게 된 것인가?
무아(無我)이기 때문이다.
즉 만약 자아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누가 이 세간으로부터 중유의 온을 타고 저 세간으로 가 입태ㆍ주태ㆍ출태한다고 말해야 할 것인가?
그렇기 때문에 마땅히 내적으로 작용하는 사부(士夫,puruṣa:내적 자아)가 존재하여 그것이 이 세간으로부터 저 세간으로 가 입태ㆍ주태ㆍ출태 한다고 해야 하는 것이다.79)
그 같은 주장을 막기 위해 게송으로 말하겠다.
무아로서, 오로지 번뇌와 업에 의해
조작된 제온(諸蘊)만이 존재할 뿐으로
중유의 상속으로 말미암아
입태하는 것이니, 마치 등불과도 같다.
[업이] 인기한 순서대로 증장(增長)하여
상속하고, 다시 번뇌[惑]와 업에 의해
다른 세간으로 나아가는 것이니
따라서 존재의 수레바퀴에 시작은 없다.
논하여 말하겠다.
능히 [저 세간으로] 가 입태하는 실유의 자아[實我]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 까닭은 무엇인가?
색(色)이나 안(眼)처럼 그 자성이나 작용[作業]이 획득(인식)될 수 없기 때문이다.80)
세존께서도 역시 [외도가] 주장하는 ‘작자와 향수자로서, 능히 후세로 가는 실유의 자아’를 부정하였기 때문이다.
즉 세존께서는
“업도 존재하고 이숙도 존재하지만, 그 작자는 획득될 수 없다. 이를테면 능히 이러한 온을 버리고서 그 밖의 다른 온을 능히 상속하는 것이니 ……(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라고 말씀하였던 것이다.81)
그리고 [외도가] 주장한 네 종류의 자아에 대한 비판은 『순정리론』 제24권에서와 같다.82)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외도들은 어떤 소연(대상)에 대해 자아관념[我執]을 일으키는 것인가?
비록 제온(諸蘊)을 떠나 별도의 자아[我性]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소연을 [자아로] 집착한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 오로지 제온을 경계대상으로 삼아 [자아] 관념을 일으키니,
계경에서
“모든 유정이 자아 등에 대해 집착하는 바를 관찰해 보건대 그러한 일체의 집착은 오로지 5취온에서 일어나는 것이다”라고 설한 바와 같다.
비록 그러한 외도들이 설하는 바와 같은 진실의 자아[眞實我]는 존재하지 않을지라도 성교(聖敎)에서는 세간에서 설하는 바에 따라 자아를 가설하기도 하는 것이다.
이미 진실의 자아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였는데, 무엇에 근거하여 [자아를] 가설할 것인가?
비록 진실의 자아는 존재하지 않을지라도 세간[언설]에 따라 [5]온을 일시 자아라고 가설하는 것이다.
어떠한 인연에서 자아는 오로지 온에 근거하여 설한 것일 뿐 다른 것에 [근거하여 설한 것이] 아님을 알게 된 것인가?
염오하거나 청정한 법은 오로지 온에 근거하여 성취되기 때문에 ‘자아는 실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게 된 것이다.
즉 잡염법(雜染法)은 다만 제온에 근거하여 찰나로 상속하는 것으로, 번뇌와 업의 세력에 의해 조작된(인기된) 중유가 상속함으로써 모태로 들어갈 수 있다. 비유하자면 등불이 찰나에 상속하여 다른 곳에 이르는 것처럼 제온도 역시 그러한 것이다.
가령 아직 욕계의 탐을 떠나지 않았을 경우, 내(內)ㆍ외처(外處)를 연(緣)으로 하여 비리작의(非理作意)를 일으키면 이로부터 탐 등의 번뇌가 생겨나고, 저열하거나 중간이거나 수승한 사(思:의지)와 아울러 식(識)도 함께 일어난다. 일어나서는 능히 당래 비애(非愛)의 결과를 견인하며, 역시 또한 무간에 일어나는 식 등의 생연(生緣)이 된다.
그리고 무간에 일어나는 식 등은 동류(同類)나 이류(異類)인 전 찰나의 구생연(俱生緣)을 관찰하여 그 생기를 획득할 때, 혹은 선한 성질인 경우도 있고, 혹은 염오한 성질, 혹은 무기의 성질인 경우도 있는데, 일어나서는 다시 능히 자신의 당래 결과를 인기하며, 아울러 무간에 일어나는 식 등의 생연이 된다.
이와 같이 연이 되어 그 다음다음 찰나에도 계속하여 능히 두 가지의 결과(非愛의 결과와 무간의 식)를 견인하는 것이다.
이에 따라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니, 이러한 온의 상속은 전생[先世]의 번뇌와 업에 의해 인기된 수량(壽量:수명의 길이) 등의 법을 영납(領納)하였지만, 그 이숙의 세력이 다하여 없어질 때 죽어서 식과 소의가 다 같이 소멸하는 상태[滅位]에 이르게 되면 능히 중유(中有)의 식 등을 낳는 연이 된다.
그리고 중유의 제온은 [다시] 전생의 번뇌와 업으로 말미암아 마치 환영(幻影)이 상속하듯이 태어날 곳으로 가 어머니의 뱃속에 이르게 되며, 중유가 소멸할 때 다시 능히 연이 되어 생유(生有)의 온을 낳으니,
비유하자면 등불이 비록 찰나에 소멸할지라도 능히 전후 원인과 결과의 관계로서 무간에 전전 상속하여 다른 곳에 이를 수 있는 것과 같다.83)
따라서 비록 자아는 존재하지 않으며, [제]온은 찰나에 소멸하는 것이라 할지라도 능히 후세에 나아간다고 하는 뜻은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즉 이러한 제온은, 이를테면 전세의 번뇌와 업의 세력에 의해 인기되어 순서대로 점차 증가하여 일기(一期) 동안 전전 상속하였듯이 다시 번뇌와 업에 의해 다른 세간(내세)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원인이 다르면 결과에도 다름이 있다는 것은 지금 바로 관찰할 수 있는 사실이기 때문에 온갖 인업(引業)의 과량(果量)은 동등하지 않다.
즉 수명의 과보가 길고 짧은 것은 업이 동일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아가 강성[增]하거나 미약[微]한 업[의 세력]에 따라 인기된 수명과 신근 등은 계속하여 서로 의존하며 갈라람(羯邏藍)ㆍ알부담(頞部曇) 등 그 뒤의 온갖 상태로 점차적으로 증장하게 되는 것이다.
무엇을 일컬어 갈라람 등이라고 한 것인가?
이를테면 온이 상속 전변하는 상태는 동일하지 않은데, 이와 같이 점차로 증장하여 근(根:감관)이 성숙한 상태[熟位]에 이르게 되면, 내(內)ㆍ외처(外處)가 작의 등의 연과 화합하여 탐 등의 번뇌를 발생시키고, 온갖 종류의 업을 조작하여 증장시키니, 이러한 번뇌와 업으로 말미암아 다시 앞서 언급하였듯이 중유가 상속하여 다른 세간(내세)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84)
그리고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니, 이와 같은 존재의 수레바퀴[有輪,즉 생사를 윤회하는 4有의 轉生]에는 시작이 없다.
즉 번뇌[惑]을 원인으로 하여 능히 온갖 업을 조작하고, 업의 힘을 원인으로 하여 능히 생을 인기하며, 생이 다시 원인이 되어 번뇌와 업을 일으키며, 이러한 번뇌와 업으로부터 다시 생이 있게 된다.
따라서 존재의 수레바퀴는 돌고 도는 것으로 시작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만약 시작이 있다고 주장한다면 시작에는 마땅히 그 원인이 없어야 할 것이며, 시작에 이미 원인이 없었다고 한다면 그 밖의 다른 것도 마땅히 스스로 생겨나야 할 것이니, 달리 원인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현재 관찰되고 있는 사실과 서로 모순되는 것이다.85)
이 같은 사실로 볼 때 결정코 원인 없이 일어나는 법은 아무 것도 없다.
그리고 어떠한 경우라도 능히 원인이 되는 영원한 법[常法]은 존재하지 않으며, 아무리 사소한 것일지라도 능히 원인이 될 수 있으니, 이에 대해서 자재천(自在天)을 논파하면서 이미 널리 부정하여 비판하였었다.86) 그렇기 때문에 생사에는 결정코 시초가 없으니, 비유컨대 곡식 등이 전전 상속하는 것과 같다.
그렇지만 [생사의] 끝[後邊]은 있으니, 그 원인(즉 번뇌와 업)이 다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종자 등이 다하게 되면(썩어 문드러지면) 더 이상 싹 등을 낳지 않듯이 [번뇌와 업이 다하여] 생사가 이미 존재하지 않으면 그것이 바로 구경(究竟)의 청정(즉 열반)이다.
따라서 염오함과 청정함은 오로지 온에 근거하여 성취되는 것으로, 실유의 자아가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쓸데없는 일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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