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영숙 시인의 시조집 『매일 아침 매일 저녁』이 출간되었다. 2011년 《유심》 신인상에 당선되어 <오늘의시조시인상>, <김상옥백자예술상 신인상>을 수상한 황영숙 시인은 60여 편의 시조를 모아 펴낸 이번 시조시집을 통해 ‘잘 짜여진 연극 한 편 같은’ 생생한 삶의 이야기를 독자들에게 전한다.
● 시인이 들려주는 이야기의 주제는 ‘가족사’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대부분 순환장애를 앓는다. 소통 구조는 날로 진화하는데 사람 간 불통의 시간은 길어진다. 그럴 때마다 평정의 알약을 삼켜보지만 그마저 역류를 경험하곤 한다. 『매일 아침 매일 저녁』은 한 가족사에 관한 이야기를 중점적으로 다루지만, 그 가족사를 통해 이 시대의 소통 불능의 문제에 관해 사유하고자 하는 시인의 의지를 거기서 읽을 수 있다.
● 5부로 나뉜 작품들은 작은 주제로 연결된 서사적 구도가 뚜렷하다. 그녀의 독백을 따라 문을 열고 들어가면 하나의 무대와 만난다. 무대 위엔 고인이 된 아버지와 건강이 좋지 않은 어머니, 손녀인 듯 다소곳이 앉은 3대가 등장한다. 작은 조명 하나가 객석에서 조용히 시를 읊조리는 시인을 비춘다. 자신의 가장 내밀한 이야기를 무대 위가 아닌 객석에서 읊는 방식으로 진행하며 시작되는 이번 시조집은, 하나의 가정을 통해 동시대의 소통 불능 문제라는 다소 범위가 넓은 주제를 다루려는 시인의 의도를 담고 있다.
● 시심의 원천이 되는 가족을 중심으로 산자와 죽은 자, 동물과 식물, 조명되지 않는 이웃과 장소와의 관계 맺기를 하며 우리가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한 세계에 대한 사유로까지 확장되는 시조집 『매일 아침 매일 저녁』은 독자들에게 가족의 의미뿐만 아니라 팬데믹으로 인해 단절된 인간의 관계 문제, 그리고 더 나아가 세계와 인간의 관계 문제를 깊이 있게 생각해보게 할 것이다.
<출판사 서평>
침묵의 시간에서 길어 올린 소중한 이야기
가장 평범한 가족사를 통해 소통의 본질을 생각하다
몰입과 기다림의 과정을 견디며 완성된 언어들
연극보다, 드라마보다 더 흥미로운 가족사가 정갈한 시조에 담기다
우리 시대의 자화상을 고백하는 시조들
황영숙 시인의 『매일 아침 매일 저녁』의 첫 장에서는 희미해진 길이 둘 보인다. 하나는 먼저 가신 아버지의 길이며 다른 하나는 기억의 강을 건너다 물끄러미 바라보는 어머니의 길이다. 첫 무대를 여는 「함박눈 오시는 날」은 부모님께 바치는 헌정 시 치곤 단아하다. 애틋한 딸(시인)에게 아버지가 지어준 꿈의 집에서 아버지는 커다란 느티나무이고 싶었지만 기원만큼 나무는 울창하지 않았다. 그래서 쉬어갈 그늘도 작다며 늘 안타까워하셨다. 그 아버지께 바치는 사부곡으로 연극은 시작된다.
‘아침 식후 30분
저녁 식후 30분’
진해 우체국 소인 찍힌 역류성 식도염 약
어머니 손수 쓰신 처방 전 태평양을 건너왔다
불혹을 넘기도록 겉도는 이방에서
사는 일 왈칵왈칵 신물 올라올 때마다
몇 알씩
평정을 삼긴다
매일 아침
매일 저녁
- 「매일 아침 매일 저녁」 전문
한 사람의 아픔이 어찌 혼자만의 아픔이겠는가. 그리움이란 이렇듯 먹은 음식이 역류하며 목이 메는 현상을 겪는 것과 같은 것이다. 한국의 어머니들은 대부분 그러하다. 누워도 편안하지 않는 불안정한 자세 때문에 위장에 고인 내용물이 식도 가까이로 역류하는 역류성 식도염을 앓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 작품은 주인공인 환자 본인은 말할 것도 없고, 옆에서 바라보는 이도, 먼 타국에 있는 이도 함께 역류성 식도염을 앓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대부분 순환장애를 앓는다. 소통 구조는 날로 진화하는데 사람 간 불통의 시간은 길어진다. 그럴 때마다 평정의 알약을 삼켜보지만 그마저 역류를 경험하곤 한다. 표제 시 「매일 아침 매일 저녁」은 한 가족사에 관한 이야기를 넘어 이 시대를 사는 모든 이들의 자화상으로 읽힌다.
기다림, 그 발효의 시간을 담은 작품들
황영숙 시인의 시조는 시조미학의 정수인 ‘절제’의 미덕을 핵심적으로 지향한다. 그리고 그것은 시인으 지난한 ‘기다림’을 통해 얻어진다. 시조의 기본이 단수라고 하지만 사실 단수가 더 어렵다고 전문가들은 이야기한다. 단수에 얽매이다 시조와 작별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 긴 이야기를 45자로 줄이면 단수가 되고 더 줄이면 속담이나 격언이 된다고 한다. 그러므로 축약된 단수일수록 더 많은 뜻을 함의하고 있을때가 있다. 황영숙 시인의 작품에서는 그런 단수 시조의 미학이 어떤 시인의 작품에서보다 더 또렷하게 나타난다.
천 리
물길이면
그 말씀에 이를까
만 번
도움닫기면
그 뜻을 헤아릴까
얼마나
더 사무쳐야
영취산에 가 닿을까
- 「매미」 전문
매미는 해종일 운다. 침묵과는 거리가 멀다. 그러나 그 신산한 울음의 끝엔 고요와 적막이 있다. 시인은 울어서 까맣게 타버린 매미를 통해 영취산을 떠올린다.
영취산은 우리나라 곳곳에 있다. 그 산기슭엔 어김없이 사찰이 있다. 여러 사찰 중에서도 대표적인 곳이 ‘통도사’다. 시인은 통도사 경내에서 매미 울음을 들으며 무아無我를 경험한다. ‘천리 물길’과 ‘만 번의 도움닫기’처럼 매미는 운다. 생태의 관점이 아니라 깨달음에 이르는 주체로서의 매미를 노래한다. 짧은 한주일을 위해 7년을 기다리며 발효된 삶은 고귀하다. 인간에게서는 그런 발효의 시간을 발견하기가 어렵다. 다 울고 나무에서 떨어질 때, 매미는 오욕칠정에서 벗어나 열반에 든다. 한갓 미물이 완성한 삶, 그런 후회 없는 삶의 중심에 ‘기다림’이 있다. 황영숙이 『매일 아침 매일 저녁』에 담아낸 시조들에는 그런 기다림의 시간들이 응축되어 있다.
몰입의 시간, 시조를 빚다
『매일 아침 매일 저녁』의 3막에서 시인은 장인으로 가고자 하는 몸부림을 보여준다. 무대조명은 꺼지고 주인공을 비추는 작은 불빛 하나가 고통의 시간을 비춘다. 관객도 함께 몰입의 순간을 맞는다. 역지사지易地思之 하며 드러난 모는 깎고, 웃자란 풀들은 다듬으며 정원, 또는 마음의 텃밭을 가꿔간다. 초심으로 돌아가서 진정한 시인이 되고자 다짐하는 의지를 드러낸다.
거름포대 걷어내자 도드라지는 동면
기우뚱 쏠리어도 꼼짝 않는 옴두꺼비
웅크린 축생의 잔등 덤불로 덮어주었다
어느 날 느닷없이 무정형의 모습으로
오십 포대를 견디며 틈새를 메워온 너
세상을 버티는 힘이 기울기에 있었구나
한 몸 들일 데 없어 막돌로 엎드려도
제 자리 잡고 앉아 한 생을 보내다 보면
천년을 무늬 새기며 견딜 수도 있겠다
- 「화석처럼 엎드려」 전문
이 작품은 의미 면에서도 새겨볼 부분이 있지만 형식면에서도 안정적인 보법을 취한 가작이다. 구와 구의 매듭이 잘 이뤄졌고 장과 장, 수와 수의 구별도 좋다. 첫수에서 두꺼비와 만나는 장면을 연출하고, 둘째 수에서 ‘세상을 버티는 힘’으로 의미의 확장을 꾀한다. 그리고 마지막 셋째 수에서 두꺼비와 시인을 인연법으로 연결시키며 하나의 서사를 완성한다.
물씬, 풀 비린내 예초기가 지나간 날/치골만 남겨진 채 지
워진 오장육부/늦깎이 합평 때처럼 죄목이 낭자하다//가물
어 고픈 들녘 갈필로 움켜쥐고/댕강댕강 긴 모가지 수 없이
참수당한/아득한 뿌리를 모아 필생의 꿈을 꾼다//썼다가 또
지우는 육필의 업연으로/흙 한 줌 바람 한 줌 문질러 시를 쓴
다/갑골문 이랑을 따라 흔들리는 비망록
- 「바랭이」 전문
시인에게 시는 업보가 된다. 시적인 순간들과의 대면은 시인을 기쁘게 하는 동시에 두렵게 하기도 한다. 웃자란 언어들 위로 예리한 예초기가 지나간다. 시작이 ‘필생의 꿈’이라면 어쩔 수 없다.
한 장인匠人은 그냥 태어나지 않는다. 장인은 살아온 세월만큼이나 억세어진 굳은살로 섬세하고 정교한 장도를 만드는 일을 익혀간다. 한 수의 시조를 창작하는 일도 공방에서 묵묵히 쇳조각들을 이리저리 맞추고 때우는 일을 끊임없이 되풀이하는 것과 같다. 때리고 담금질을 계속하다 보면 어떤 것은 칼날로, 또 어떤 것은 칼집으로 그 형태를 갖추어가는 것이다. 황영숙 시인은 「바랭이」를 포함한 많은 작품을 통해 완성을 향해 걸어가고자 하는 장인으로서의 의지를 보여준다. 사면발니 같은 바랭이 풀은 되지 않겠다는 의지를 표출한 이러한 작품들을 통해, 독자는 소박하게 버려질 순간들이 하나의 진품이 되어 가는 순간과 마주하며 자신의 삶을 재련할 의지와 용기를 얻게 될 것이다.
시조, 현장을 비추는 카메라가 되다
탈 없이 뚜벅뚜벅 교대시간 올 텐데
뜰수록 감기는 눈, 멀어지는 밥물소리
한 나절 다 지나도록
그저 그리운 집
터널 지나 또 터널 교대 없는 세상 속으로
7호선 아득한 갱도 영생의 꽃길인 양
무사고 오십만 킬로
별을 찾아 나서던 길
대공원 승무사업소 화폭을 배경으로
허기를 달래려던 가방 하나 남긴다
사발면 귤 대여섯 개
낡은 지갑
생수병 하나
- 「오브제」 전문
시인은 이 시조집의 제4막에서 오늘을 사는 현실과 이웃들의 현장을 비춘다. 조금 살풍경하지만 하루하루 힘든 하루를 사는 이 시대의 초상화를 그려낸다. 그저 오늘 하루가 무탈하기를, 아니 교대시간까지의 몇 분이 무사히 지나갔으면 하는 바람으로 사는 사람들을 조명한다. 누구나 삶의 방식이 다르고 처해 진 환경이 다르기에 대부분 나와 다른 이들의 삶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다. 특이한 것은 예측하지 못한 죽음과 마주했을 때 비로소 관심을 갖게 된다. 물론 이런 관심 또한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소멸되고 만다.
「오브제」는 서울 지하철 7호선 기관사의 죽음을 시화한 것이다. 우리를 목적지까지 실어다 주는 기관사의 하루는 대부분 지하에서 시작되고 지하에서 끝난다. 사인은 급성뇌출혈. 그가 두고 간 가방 속엔 사발면, 귤 몇 개, 지갑, 생수병 하나가 들어 있었다. 굳이 이것들을 ‘오브제’라고 제목을 붙인 이유는 무엇일까. 아무 의미 없는 사물들을 작품속에 가져옴으로써 새로운 인식에 이르게 하는 장치다. 기관사가 남긴 것들을 마지막 수 종장에 배치하여 갱도에서 맞은 죽음의 안타까움을 시인은 시조라는 형식을 통해 더욱 극적으로 연출하고, 그 감정을 절제를 통해 오히려 극대화시킨다.
시인과 딸, 상상력의 교감
갤러리 문을 열면 물소리가 들린다/힘줄이 느슨해진 할머
니와 어머니와/아직은 힘이 팔팔한 오빠의 오줌소리//실개
천으로 흐르다 강이 되어 만난다/다시 흘러 바다로 가는 먼
먼 여행길을/서로가 한 몸이 되어 뜨겁게 출렁인다
- 「석동 1402호」 부분
이 시집의 막이 닫히기 직전 조명은 작은 요강 하나를 비춘다. 스피커에선 물소리가 난다. 우리가 흔히 듣던 소변보는 소리와 물 내리는 소리가 들린다. 차츰 조명은 넓게 퍼지면서 집 안 전체를 비춘다. 「석동 1402호」는 시인이 사는 집이며 시인의 딸이 NURTURart,Brooklyn,NY에서 전시한 개인전 제목이기도 하다. 어머니는 시조를 짓고 딸은 미술작품 전시회를 연다. 오브제로 사용된 요강 속으로 강물이 흐른다. 건강한 소리와 힘이 다한 소리가 함께 섞여 있다. 귀를 더 기울여 들어 보면 강물과 함께 세월 흘러가는 소리도 들린다.
황영숙의 시조집 『매일 아침 매일 저녁』은 시인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 3대가 함께 쓴 시집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시인과 딸은 상상력을 교감한다. 서로에게 전이된 상상력은 장르가 다른 작품으로 다시 태어난다. 진해 ‘석동 1402호’는 시집 속에도 있고, 뉴욕 브루클린에도 있다. 황영숙 시인에게 있어 가족은 시심의 원천이며 하나의 우주다. 가족을 중심으로 산자와 죽은 자, 동물과 식물, 조명되지 않는 이웃과 장소와의 관계 맺기를 하고 있다.
확장되어 가는 우주의 경유지로서 이번에 독자들에게 선보이는 시조집 『매일 아침 매일 저녁』은 가벼워 보일 수밖에 없는 우리 삶의 편린들이 가진 예상 외의 깊이를 느끼게 하고, 그것을 통해 삶의 의미를 되찾게 한다. 팬데믹 시국에서 한없이 작아진 세계의 경계에 갇힌 독자들에게, 황영숙의 시조집 『매일 아침 매일 저녁』은 우리 삶의 가려진 깊이와 밀도를 다시 되찾아주고, 그것을 진심으로 누릴 수 있게 만들어주는 용기와 상상력을 독자들에게 전하는 책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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