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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불교의 인간관과 육체관
인간이란 무엇인가? 이는 인간 자신의 오래고도 가장 새로운 문제이다. 인간 스스로 무엇인가를 묻고 스스로를 탐구하여 온지 이미 오랜 역사를 가져왔건만, 아직도 이 물음은 우리에게 과제로 남겨져 있다. 현대인들은 인간의 본질에 대한 명확한 이해를 가지고 있지 않으면서도 인간이해에 대한 노력도 거의 하고 있지 않는 것 같다.
그러나 인류의 지혜로 여러 가지 문화를 이루어 내었고 그로 말미암아 인간의 생활을 굉장하게 발전 향상시켰고. 윤택하고 풍만하게 하였다. 반면에 인간은 스스로 만들어낸 문명의 이기, 원자탄, 수소탄으로 말미암아 인류의 멸망이라는 위기에 다다랐다. 한 발의 핵무기가 한 도시를 하루아침에 불타 버리게 하는 것은 고사하고 나아가서는 이 지구까지도 파괴해 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있어서 인간의 본질, 인간의 정체를 밝히는 일이야말로 현대의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만약 핵을 사용할 수 있는 소련과 미국의 지도자가 건전한 정신을 가지지 못하게 된다면 세계는 어찌 되겠는가? 실로 세계는 그들의 인간성이 건전하도록 빌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인은 인간에 관한 한 거의 무지에 가깝다.
인간이 이 세계 속에서 더 알차고 더 깊은 삶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인간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어느 문제보다도 선행되어져야 한다고 본다. 이러한 의미에서 물이 흐리면 그 근원을 생각해야 하는 것처럼 불교의 인간관에 귀 기울일 때가 지금이라고 생각되어진다. 부처님은 인간으로 태어나서 위대한 인간의 길을 보이셨다는 의미에서 더욱 그렇다.
세계의 많은 종교의 창시자들 가운데 부처님은 순수하게 인간으로 남아 있기를 원했던 거의 유일한 분이었다. 다른 교조들은 자신이 신이거나 신에게서 영감을 받았다거나 신의 아들이라고 하거나, 또는 다른 형태로 화현된 화신(化身)이라고 주장하였다.
이에 반하여 부처님은 인간일 뿐만 아니라 신이나 인간을 초월한 어떤 존재로부터 오는 어떠한 영향력도 요구하지 않았다. 부처님의 깨달음의 성취는 오직 인간적인 노력의 덕분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인간들은 부처님을 본받아 노력하면 성취할 수 있다는 위대한 길을, 희망을 보여 주었다. 희망이 없는 인간처럼 무의미한 존재가 없다는 것을 부처님은 우리에게 생의 의미로 제시해 준 분이다. 때문에 부처님은 오직 바른 인간이 되는 길을 설했다. 어느 면에서 불교야말로 ‘인간학’이라고 불러야 마땅하리라고 본다.
불교에 의하면 인간의 위치는 지극히 높다. 부처님이 이 세상에 오셨을 때 외친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尊)’이라는 탄생게(誕生偈)는 인간이야말로 이 우주의 주인공이라는 위대한 인간선언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또한 부처님 대각 후에 범천이 와서 설법을 청하였다는 이야기는 범천(梵天)을 최고신으로 모시는 전통 종교인 바라문 종교에 대해 불교의 우월성에 대한 자부이자 깨친 인간인 부처님에게 우주 최고의 존재인 범천이 무릎을 꿇었다는 것은 위대한 인간승리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부처님은, 인간은 그 스스로가 그의 주인이라고 가르쳤다. 인간 위에 군림하는 보다 높은 존재나 권력은 없다. 부처님은 제자들에게 자기 자신을 안식처로 삼을 뿐 누구에게 도움을 구하거나 안식처를 구하지 말라고 가르쳤다. 그는 인간은 각자가 자기 자신을 개방해서 스스로 해답을 구하도록 가르치며 용기를 불어넣고 북돋아 주었다.
인간은 자신의 지혜와 노력으로 모든 속박에서 벗어나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불교사상이야말로 인간존중과 인간신뢰에 대한 믿음에 기초한 사상이며, 그렇기 때문에 현대의 난제들을 해결할 길을 제시해 줄 수 있는 것이다. 부처님은 인간에게 위대한 가능성을 보인 스승이요, 해탈과 열반의 길을 보여 주었다는 의미에서 ‘구원자’로 불리어질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토대로 삼아 스스로 걸어야 하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인간은 오온(五蘊, pan쁟a-skandha)으로 구성되어 끊임없이 변하는 존재로 본다. 부처님은 “간단히 말해서 이 오온(五蘊)계의 집착이 바로 고이다”고 설했다. 부처님은 명백하게 “비구여 고(苦)란 무엇인가? 그것은 오온의 집착이다.”라고 말했다.
여기서 고와 오온이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오온 그 자체가 바로 고(苦)이다. 소위 ‘인간’을 구성하는 오온의 개념을 정확히 알게 되면, 인간과 고의 문제를 더욱 잘 이해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오온이란 무엇인가? 가능한 한 그것이 인간 이해의 첩경이기 때문에 자세히 검토해 보자.
첫째는 색온(色蘊, ru칛a-skandha)이다. 색이란 형태와 색채를 한 가지로 묶어버린 의미로서 시각(視覺)대상계인 색경(色境)뿐만 아니라 성(聲)·향(香)·미(味)·촉(觸)과 더불어 유정고체(有情固體)의 생존을 구성하는 감각적·물질적 요소 전부와 감각적 인상을 일으키는 운동변화의 전체를 가리킨다.
둘째는 수온(受蘊, vedana?skandha)이다. 이것은 느낌의 집합으로 물질적·정신적인 기관이 외부세계와 접촉을 통해서 경험되어지는 불쾌함(苦), 유쾌함(樂), 또는 유쾌하지도 불쾌하지도 않는 느낌 등을 포함하고 있다.
여기에는 느낌을 받아들이는 기관에 따라 6가지의 종류가 있다. 눈이 대상과, 귀가 소리와, 코가 냄새와, 혀가 맛과, 육신이 닿음과, 그리고 마음이 마음의 대상이나 생각이나 관념과 접촉함으로써 얻어지는 느낌이다. 우리의 모든 물질적·정신적 느낌은 이 범주에 속한다.
불교철학에서 마음(心)이란 용어가 어떻게 사용되고 있는지 알아두는 것이 필요하다. 마음이란 말은 물질과 반대되는 정신이라는 용어가 아니라는 사실을 먼저 알아야 한다. 마음이란 단지 눈이나 귀와 같은 감각기관(根)이다. 그것은 다른 기관과 마찬가지로 조정되거나 개발될 수 있다. 부처님은 이 마음을 포함한 여섯 가지 감각기관(六根)을 제어하고 수련하는 것을 여러 번 강조하였다.
셋째는 상온(想蘊, sam.jn쁝?skandha)이다. 이것은 인식의 집합을 뜻하며 느낌과 마찬가지로 여섯 가지의 내부적 감각기관과 그 외적 대상과 관련된 여섯 종류가 있다. 느낌과 마찬가지로 인식도 외부세계와 여섯 감각 기관이 접촉을 통해서 일어난다. 물질적이건 정신적이건 대상을 인식하는 것이 상(想)이다.
넷째는 행온(行蘊, sam.ska칞a-skandha)이다. 이것은 정신적 행위의 집합을 뜻한다. 여기에는 선악과 같은 의도적 행위가 포함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업(karma)이라 하는 것은 여기서 생겨난다. 업에 관해서 부처님이 정의하길 “비구여, 내가 업이라고 부른 것은 의도(思)이다. 의도가 있으면 몸이나 말이나 마음으로 행하게 된다”라고 했다.
의도란 정신구성이며 정신적 행위이다. 이것은 마음을 선이나 악 또는 선도 악도 아닌 것으로 향하게 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 느낌이나 인식과 마찬가지로 의도도 여섯 가지 감각기관과 그 외부 세계의 대상과 연결된 여섯 가지의 종류가 있다.
다섯째는 식온(識蘊, vijn쁝칗a-skandha)이다. 이것은 의식의 집합을 뜻하는데 의식이란 여섯 가지의 감각기관과 이에 대응하는 외부현상이 반응하는 작용이다. 예를 들면 안식은 눈을 근거로 해서 형태를 대상으로 하여 보는 작용이다. 심식(心識)은 마음을 근거로 해서 관념이나 생각을 그 대상으로 하여 인식하는 작용이다.
그래서 이 식온은 다른 기관과 연결되어 있다. 느낌, 인식, 의도적 행위와 같이 의식도 내부적 감각 기관과 이에 대응하는 외부적 대상과 여섯 가지가 있다.
불교에서는 일상적 인간을 ‘오온’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리고 인간이 ‘오온’에 지나지 않는 것은 여러 가지 부분이 서로 얽히고 짜임으로서 비파라는 악기를 만드는 것과 같다고도 하였다. 비파의 소리는 모든 부분이 한데 모여져서 적당한 위치관계에 놓여져 비파가 구성될 때에만 울리는 것처럼 인간도 여러 가지 인연에 의하여 얽혀지는 관계에 놓였을 때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더 엄밀히 따지면 인간은 관련되는 모든 인연이 어떠한 상태에서 보여주는 전체관계의 총화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니까 인간은 고정된 ‘실체’는 없고 다만 ‘어떠한 상관관계의 총화’만이 있다. 이 점이 아주 중요하다. 이러한 관계의 총화를 불교에서는 ‘온’이라고 부른다. 즉 불교 용어인 ‘온’을 이용해 표현하면 인간은 관계되는 모든 인연의 ‘온’에 지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온’의 어의 자체에는 ‘연기’를 예상하고 있다. ‘색온’이 ‘연기’를 연상하고 있다는 말은 ‘무아(無我)’에의 접근을 암시한다.
다시 정리하면 불교에서는 인간을 고정불변한 실체로 보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고정불변한 나’가 있을 수 없으며 ‘내 것’ ‘내 자식’ ‘내 견해’로서의 존재는 있을 수 없으며, 그것이 있다고 보는 한 그것은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한 인생을 사는 존재를 불교에서는 ‘범부’라고 부르고 그것을 착실히 깨달아 알면 ‘깨달음’의 세계로 나가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불교의 인간관에서 볼 때 살아있을 때나 죽은 다음에도 육체에 집착할 필요도 없고 해서도 안된다. 이런 의미에서 장기이식을 위하여 온몸을 타인을 위해서 바치는 행위는 올바른 것이다.
다시 설명하면 이런 뜻에서 불교의 무아설(無我說)은 장기이식을 위한 근본적인 인간관이라고 생각된다. 무아설의 현대적 의의를 다시 한번 생각해보자.
불교의 근본 가르침 가운데 하나인 무아설은 ‘나’는 없다는 뜻이며, 더 넓히면 세상 모든 것은 실체가 없다는 뜻이다. ‘나’란 존재가 없다니?’ 그렇다면 내가 없는데 수양은 누가 하며 해탈은 누가 얻는단 말인가? ‘내’가 없다면 내 삶은 무엇이며 먹고 마시고 항상 무엇인가를 갈망하는 ‘나’는 무엇이란 말인가?
눈에 분명히 보이는 ‘나’를 없다고 부정하는 불교의 주장은 매우 비현실적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불교가 ‘나’를 부정하는 근거는 무엇인가? 불교에서는 이세상 모든 것이 다 변한다고 한다. 다만 변하는데 걸리는 시간의 길이만 다를 뿐 정신적인 것이든 물질적인 것이든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그렇게 보면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도 같은 ‘나’가 아니다. 뿐만 아니라 사실 우리는 순간 순간마다 달라지는 ‘나’로 있을 뿐이다. 생각이나 감정, 심지어는 피로감이나 늘어난 주름살까지도 조금전과는 달라진 내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변하지 않는 ‘나’가 있다고 생각하며 산다.
그렇기 때문에 불교에서는 네가 생각하는 그런 ‘나’는 없다고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네가 생각하는 그런 ‘내’가 없다고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불교는 우리의 일상적 삶 모두를 고통이라고 본다. 끝없이 무엇인가를 가지려 하고 그 욕구가 채워지면 또 다른 욕구를 채우려 하기 때문에 우리 삶 전체가 늘 채워지지 않는 갈증으로 시달리고 있으므로 결코 행복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 경우 이러한 고통의 근원은 불변의 ‘나’란 존재가 있다고 보는 데서 오는 것이며, ‘내’가 가진 집착이 클수록 고통은 더 커진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고통에서 벗어날 길은 없는가? 그 길은 무엇인가를 소유함으로써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욕구를 버리고 스스로 만족할 줄 아는 정신 체험을 통해서 가능할 수 있으며, 궁극적으로는 불변의 ‘내’가 존재하는 것이 아님을 깨닫는 것이다.
살면서 우리가 버리기 가장 어려운 것이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우리자신이다. 실제로 우리는 자신을 아끼는 사람일수로 이기적이고 독선적인 삶을 사는 경우를 본다. ‘나’를 살리기 위해 남을 짓밟고, ‘나’를 잘 먹이기 위해 남의 것을 빼앗는 것이 우리의 모습이다. 하지만 ‘나’보다 더 믿을 수 있는 남이 있다면, 마지막 한 자리 남은 구명보트에 ‘나’를 버리고 대신 태우고 싶은 남이 있다면 그런 삶이 해탈한 삶 아닐까?
1) 무속신앙의 인간관과 육체관
한국인의 원초적·전통적 영혼관은 일반적으로 영혼의 존재를 인정하고, 영(靈)·육(肉)의 결합은 삶이며, 분리는 죽음으로 보았으며,1) 죽은 이후 육신(몸)은 소멸되는데 비하여, 영혼은 오랫동안 사라지지 않는 영원한 존재로 이해하고 있다. 또한 사후 영혼은 사후세계인 저승에서 영원히 안주(安住)하거나, 현실세계인 이승으로의 소생·재생2)한다고 보았다. 1) 앞서 설명한 것처럼 한국 무속에서는 영을 魂과 鬼로 나누어 육신과 함께 삼원론적 입장으로 설명하기도 하나, 이는 영과 육신의 이원론적 입장이 어느 정도 시간을 경과하고 사후세계의 공간적 확대와 더불어 이루어졌을 것이라 생각된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먼저 관념되었을 이원론적 견해부터 소개하였다. 2) 죽은 후 영혼의 향방 및 轉移 형태와 관련하여 다양한 용어로 해석하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① 다시 살아남[復活], 영물을 매개로 하여 다시 살아남[靈物媒介復活], 영혼이 되돌아와 살아남[還魂復活], 귀신을 쫓아내어 살아남[逐魂復活], 하늘이 감동하여 살려줌[感天復活], ② 다시 태어남[還生], 다시 사람으로 태어남[人間還生], 동물로 태어남[動物還生], 식물로 태어남[植物還生], 광물로 변함[鑛物還生], ③ 신·신선·정령이 됨[幻生]; 신이 됨, 신선이 됨, 精靈이 됨과 같이 분류하고 있다(최운식, 《이야기에 나타난 한국인의 삶과 죽음》(서울: 한울, 1992), 8쪽 및 119∼201쪽 참조).
그러나 본 연구에서는 소생, 재생, 환생 등의 용어를 다음과 같은 의미로 해석한다. 여기에서 말하는 소생이란 영육이 분리되지 않은 상태에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것을 말한다. 재생은 영·육이 분리되어 영혼이 육체를 떠나 영혼의 세계에 갔다가 다시 돌아와서 살아나는 경우이며, 소생은 육체의 죽음에서 영혼이 육체 속에 있다가 다시 살아나는 경우를 의미한다. 이에 비하여 환생은 다른 떠난 영혼이 생명체로 태어나는 경우이다.
한국인에 있어서 원초적 영육(靈肉) 관념의 형성은 우리나라 구석기시대의 가장 이른 시원(始原) 문화 유적인 청원(淸原) 두루봉 2호 동굴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여기에는 소위 흥수아이 위에 꽃을 뿌려 죽음과 관련된 매장의식을 행하였던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3)3) 이융조, 《한국의 선사문화, 그 분석연구》, 탐구당, 1981.《한국의 구석기문화Ⅱ》, 탐구당, 1984.〈한국 홍적세의 자연환경 연구-청원 두루봉 제2굴의 식물상을
이는 곧 우리나라에서도 구석기시대 사람들이 죽은 사람에 대하여 경외심(敬畏心)을 표현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뿐만 아니라 청원 구석기시대 사람들은 진달래나무를 꺾어다 살림집인 동굴을 아름답게 꾸미고자 하였던 미의식의 표현도 하였으며, 기원과 주술의 표현도 행하였고, 의식을 집행하던 공간도 있었다.4)4) 이융조·우종윤 편저, 《선사유적 발굴도록》, 충북대 박물관, 1998, 10쪽 및 12쪽 참조.
기원과 주술의 행위는 곧 이 지역의 구석기시대 사람들이 당시의 현실세계를 살면서 정령 내지 영혼의 존재를 인정한 결과에서 비롯된 것이다. 선사시대 사람들은 현실세계의 모든 삶이 신(神)과의 관계 속에 생성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자신의 삶 주위에 있는 모든 것은 신령스러운 존재로 받아들여, 신앙의 대상으로 삼게 되었다. 하늘과 땅 및 성숙(星宿)을 신앙하고 물·나무·짐승 등 모든 생물과 무생물이 신앙의 대상이었다. 이러한 신앙은 모든 곳에 영(靈)이 존재한다는 정령사상(精靈思想)으로서 세계인의 공통적인 사상이기도 하다. 정령사상은 인간에게도 예외일 수는 없다. 그래서 인간의 육신(몸) 속에도 영혼(넋)이 깃들어 있다고 생각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이러한 관념이 구석기시대부터 싹트기 시작하여 신석기시대에 본격화되었다. 이런 점에서 청원 구석기시대 사람들이 영혼의 존재를 상정한 것은 우연이라기보다 당연한 현상이었다.
이들이 생존 당시의 활동 공간인 동굴을 시신의 매장 장소로 선정한 연유는 죽은 사람이 산사람과 동일 공간에서 지속적인 생활을 한다는 관념에서 비롯되었으며, 피장자 위에 국화꽃을 뿌린 것은 미의식의 표현임과 동시에 봄이면 꽃이 다시 피듯이 죽은 사람의 영혼도 소생(蘇生)·재생(再生)하기를 기원하는 의미의 표현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관념은 죽은 영혼이 시신과 함께 무덤 속에 기거한다는 전제를 함으로써 그 개연성을 가질 수 있다
. 이런 점에서 청원 구석기시대 사람들의 매장의식에 나타난 영·육 관념은 영육 미분(靈肉未分)5)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고 하겠다.5) 대개는 삶을 영육의 결합 상태, 죽음을 영육의 분리 상태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런 관념은 본 연구에서도 인정을 한다. 그런데 본 연구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살펴본 바, 죽은 이후 사자의 육신과 함께 거주하는 영혼이 있으며, 다른 공간으로 떠나는 영혼도 있다. 머물러 있는 실체는 백이 아닌 혼인 경우도 있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 착안하여 본 연구에서는 죽음 이후 육신과 함께 영혼이 머물러 있다는 생각을 하는 경우를 ‘영육 미분의 관념’으로 지칭하였다. 떠나는 경우를 ‘영·육 분리의 관념’으로 나타내었다.
그래서 구석기시대에 형성된 영육 미분(靈肉未分)의 관념은 우리나라의 원초적·본원적 관념이라 해도 무방하다. 아울러 이들은 이미 자연관을 바탕으로 영혼의 소생·재생을 기원하고 있었음으로 지속 순환론적 관념도 상정하고 있었다. 특히 동굴은 여성의 상징으로써 재생관념과 연결되어 있다는 기존 연구를 고려할 때, 지속 순환론은 구석기시대부터 비롯되었음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나라 신석기 유적으로 확인되는 매장유구는 통영(統營) 연대도(煙臺島, 11기), 욕지도(欲知島, 2기), 부산 금곡동(金谷洞), 동삼동(東三洞), 경북 울진(蔚珍) 후포리(候浦里), 인천 시도(矢島), 경남 진주 상촌리(上村里), 황해도 지탑리(智塔里) 등 한반도의 여러 지역에 분포되어 있다.6)6) 이와 관련하여 다음 자료가 참조된다. 국립진주박물관, 《煙臺島Ⅰ》, 1993. 《欲知島》, 1989. 金廷鶴·鄭澄元, 《金谷洞栗里貝塚》, 부산대 박물관, 1980. 橫山將三郞, 〈釜山府絶影島東三洞貝塚調査報告〉, 《史前學雜誌》 5-4, 1933. 국립경주박물관, 《울진후포리유적》, 1991. 韓炳三, 《矢島貝塚》, 국립중앙박물관, 1970.
대부분 신석기시대의 중기에서 후기에 걸쳐 나타나고 있으며, 유구(遺構)는 부정형(不定形)으로 지하를 파서 굴장(屈葬) 또는 신전장(伸展葬)을 하고, 머리의 방향은 서쪽으로 향하거나 동쪽으로 향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피장자는 팔이나 발목에 장신구를 가지는 경우가 있고, 토기나 석기와 같은 일반적인 생활 도구 등을 부장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통영 연대도처럼 바다가 잘 보이는 곳을 매장지로 선정하고 화장(火葬)한 흔적을 남기고 있는 경우도 있고, 후포리와 같이 후기의 경우는 40여 명을 한 곳에 세골장(洗骨葬)하고 그 위에 180여 점의 돌도끼로 덮어두는 경우도 있다. 진주 상촌리와 지탑리에서는 화장한 사람의 뼈를 주거지 내부에 안치하는 특수한 사례도 있다. 여기서 신석기시대에는 화장, 세골장과 같은 2차장(次葬)이 유행한 것이 주목된다.
이처럼 구석기시대에 비하여 신석기시대의 장례습속이 일반화되어 있으며,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모습에서 우선, 영육 미분의 관념이 지속된다는 것을 엿볼 수 있다. 신석기시대도 매장지를 생존 당시의 활동 공간과 밀접한 곳으로 설정하였으며, 사자가 생전에 사용하던 장신구나 생활 도구를 함께 부장하고 있다. 이러한 매장습속은 신석기시대 사람들도 아직 죽은 영혼이 육신과 함께 무덤 속에 기거한다는 생각을 유지하고 있었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아울러 이 시기 사람들은 유골 숭배사상도 가지고 있었으며, 영육 미분의 관념이 비롯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음으로, 굴장이나 시신을 동향·서향으로 놓아두는 매장 습속에서 본원적 환원·지속 순환론적 관념을 가지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굴장은 아이의 임신 형태를 상징하기 때문에 죽음으로써 사자가 탄생의 형태로 환원하여 아이가 탄생하듯이 소생하거나 재생하기를 기원하는 의미에서 취한 매장습속이며, 동서향의 매장도 태양숭배사상과 함께 역시 반복되는 일출처럼 사자가 다시 태어나기를 기원하는 생각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여기서 신석기시대 사람들은 인간 생명체의 관찰 경험과 우주관을 매장습속에 반영하고 있으며, 이를 바탕으로 죽음에 대한 본원적 환원·지속 순환론적 관념을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유골 숭배사상이 재생관념과 연결되어 있다7)는 점에서 더욱 확신을 가질 수 있다.7) 大林太良, 〈ジヤ-マニズムの起源について〉, 《東洋文化》 46·47합집, 115∼132쪽 참조.
끝으로, 죽은 조상의 뼈를 산 사람의 생활 공간인 주거지에 안치하는 유골 숭배에서 신석기시대 사람들의 조상숭배사상이 확인된다. 신석기시대에는 정착과 함께 4인 내외의 가족이 거주하는 움집이 발견된 바가 있는데, 이러한 주거지 내부에 화장한 뼈를 안치한 점에서 신석기시대의 영혼관념에는 가족 중심의 조상숭배사상이 형성·확산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아울러 신석기 사회가 씨족 중심의 사회인 점을 고려한다면, 이 시기에 이미 씨족 공동의 조상숭배사상이 대두하였을 것으로 본다. 이러한 변화는 곧 신석기시대의 사회 구조적 변화를 집약적으로 반영한 결과일 것이다.
구석기시대부터 신석기시대 이래 형성된 영혼불멸론의 관념은 청동기시대에도 지속된다. 진주(晉州) 대평리(大坪里) 유적에서 목이 없는 피장자가 발견되었다.8) 8) 鄭義道, 〈晉州 大坪里 玉房 7地區 先史時代〉, 《南江先史文化 세미나要》
이 피장자는 전쟁의 희생자라기 보다는 오히려 영혼으로서도 격리되어야 할 경우 그 기능을 상실시킨 결과라고도 해석하고 있다.
여기서 영혼의 본질은 사람의 머리, 즉 뇌로 상정하고 있다는 점이 주목된다. 여기서 인위적인 영혼 차단 행위를 엿볼 수 있는데, 이는 역으로 해석하면 영혼불멸을 믿고 있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아울러 사자가 살았을 당시 사용하던 생활도구 등을 부장한 것에서도 영혼불멸의 관념이 지속되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청동기시대 부장품으로 홍도와 곡식이 발견되는데, 이들 부장품은 일반적으로 피(생명)의 상징으로 무덤 속에 있는 사자의 소생을 기원하는 의미를 가진다. 그러므로 청동기시대 사람들이 아직 지속 순환론적 관념을 지니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현실세계의 사회·경제적 변화 현상을 집약적으로 투영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청동기시대나 신석기시대나 유사할 것이다. 하지만 신석기시대에 비하여 청동기시대의 현실적 사회·경제 구조와 조건이 다르기 때문에 그 구체적인 성격이 같다고 볼 수는 없다.
먼저, 영·육 분리의 관념이 비로소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 무덤에서 청동제·석기 무기류와 홍도(紅陶)가 부장품으로 발견되는데, 이들 유물의 기능은 일반적으로 피장된 영혼을 잡신(雜神), 즉 다른 영혼의 침범으로부터 보호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그 잡신의 실체는 떠도는 원혼 내지 악령(惡靈)이나 다른 무덤에 묻힌 영혼으로 짐작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피장자의 무덤을 침범하는 잡신은 자신의 육신에서 일시적 또는 항시적으로 분리된 영혼으로 해석해도 큰 무리가 없을 것이다. 여기서 청동기시대에는 영·육 분리의 관념이 형성되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 시기에는 지하계에서의 영·육 분리의 관념이 형성되었을 뿐 아니라 사후세계의 공간을 천상계까지 확대함으로써 그 관념이 확산되어 간다. 함안 도항리의 고인돌 유적에는 겹 동그라미를 그려 피안의 세계를 은하계(천상계)로 상정하고 있었다9)는 사실은 이 시기의 사람들이 천상계로 영혼의 이동을 믿고 있었음을 반증한다. 즉 이 지역의 청동기인들은 은하계를 사후 공간으로 상정함으로써 육신에서 영혼이 분리되어 천상의 은하계로 이동한다고 믿고 있었다. 9) 張明洙, 〈岩刻畵를 통해 본 고인돌 社會의 信仰意識 -고인돌 암각화에 비쳐진 죽음관을 중심으로-〉, 《中央史論》, 중앙대, 94∼95쪽 참조.
그런데 이 그림이 아주 소박하게 표현되어 있는데서 알 수 있듯이 천상계의 형태를 구체적으로 형상화하지 않았을 것으로 보여진다. 그리고 천상계로의 영혼의 이동을 돕는 새와 관련된 조형물이 제작되었을 것이라는 점에서도 청동기시대 사람들은 영혼의 분리와 이동을 상정하고 있었다고 하겠다.
다음으로, 원혼 내지 악령의 존재를 상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앞에서 예로 든 진주 대평리 유적에서는 목이 없는 피장자가 발견되었고, 부장품에서는 청동제·석제 무기와 홍도(紅陶)가 발굴되었는데, 원혼이나 악령이 존재하면 우리는 그에 대비되는 선령(善靈)의 존재도 상정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 같은 다양한 혼령의 상정은 청동기시대의 사회적 변화와 연결되어 발생한 관념일 것이다. 이 시기는 전쟁의 수행 및 사유재산의 소유와 같은 현상이 형성되기도 하는데, 이 과정에서 악역을 맡아 희생된 원혼이나 악령이 상정될 수 있음을 쉽게 추단할 수 있다. 이러한 관념은 사회·경제적 구조가 보다 분화되어 가는 철기시대 이후에 더욱 확대, 고착화되었음을 볼 수 있다.
끝으로, 죽은 ‘영혼들 간의 계서적(階序的) 분화’ 관념이 형성되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이같은 관념은 곧 청동기시대의 변화된 사회적·경제적 양상을 영혼관에 그대로 반영한 결과이다. 생존 당시 사회적·경제적으로 지배적 위치에 있었던 사람은 죽은 이후에도 그 지위와 조건을 지속하였으며, 반면에 피지배의 위치에 있었던 사람은 죽은 이후의 영혼도 마찬가지로 상정되었다.
이는 청동기시대 묘제의 규모와 위치 및 내부 출토 유물에 나타난다. 이 시기에는 생전의 사회적 위치에 따라 묘의 규모나 위치가 달랐으며, 지배층 무덤에서 동검(銅劍)·석검(石劍)·동촉(銅鏃)ㆍ석촉(石鏃)·홍도(紅陶) 등과 같은 부장품이 발견된다. 이들 부장품은 영혼을 잡신(雜神)으로부터 보호함과 아울러 피장자의 신분적 위세를 반영한다. 그러므로 청동기시대는 현실세계의 사회적·경제적 위상을 죽은 영혼에까지 반영하여, 영혼간의 신분적·경제적 계서화가 형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이 시대에는 죽은 영혼의 이동을 상정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영혼들 간의 계서적 조직까지 설정한 것으로 보인다.
영혼들 간의 계서적 분화 현상이 보다 뚜렷해지는 시기는 우리나라에서 본격적으로 국가가 발생한 철기시대이다. 부여와 신라 및 가야는 왕이나 귀족이 죽으면 이들과 주종관계에 있었던 산 사람을 함께 무덤에 넣어 매장하는 ‘순장’을 하고 있는데, 순장 습속은 무덤이라는 동일한 내부 공간에서 영혼들간의 계서적 분화를 발생하게 하였다. 이같은 현상은 무속의 저승 구조가 불교 수용 이전부터 이미 분화·계서화되었음을 반증하는 것이다.10)10) 일반적으로 사후세계의 조직적 계서화는 불교의 수용에 따른 불교 衆神의 개념이 습합됩으로써 형성되었던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본 연구에서는 불교 수용 이전부터 막연하나마 계서화가 상정되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이와 같은 현상이 곧 불교의 내세관을 수용할 수 있는 바탕이 되었을 것이다.
삼한ㆍ삼국시대부터는 구석기시대 이래 지속되어 온 원초적 영육관이 크게 변모, 확대되어 간다. 영육 미분의 관념이 지속되면서도 영·육 분리의 관념이 더욱 확산되어, 두 관념이 혼재하는 양상이 드러난다.
먼저, 변진(弁辰)의 장례습속에 반영된 영·육 분리의 관념을 살펴보기로 하자.
큰 새의 날개로써 죽은 이를 보내었는데, 그 뜻은 죽은 이를 하늘 위로 날려보내고자 함이다.11)11) 《魏志》 東夷傳, 弁辰.
새는 일반적으로 인간계와 천상을 연결하는 매개 고리로 생각한다.12) 그래서 새의 날개를 달아매는 장례습속은 죽은 영혼이 천상계로 보낸다는 생각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변진 사람들이 죽은 사람을 장사 지낼 때 큰 새의 날개를 단다는 행위도 영은 육과 분리되어 천상으로 보낼 수 있다는 개념을 일반화한 것으로 볼 수 있다. 12) 고대 한국의 새가 영혼 이동의 매개물로 정리한 최근의 논문은 다음이 참조된다.徐永大, 〈韓國 土着 宗敎史 硏究의 回顧와 展望〉, 《韓國史論》 28, 국편위, 1998, 493쪽 참조.
이런 흔적들은 삼한, 초기 신라 및 가야의 유물·유적에도 나타난다. 고성 동외동 유적의 청동제 조문동기(鳥文銅器), 새 모양의 토기와 관식(冠飾), 배와 수레 및 신발, 그리고 솟대가 있다. 이들 유물이나 유적은 일반적으로 육신에서 분리된 영혼의 이동을 돕는 매개물이나 신앙으로 이해하고 있다. 특히 새는 천상과 인간을 맺어주는 존재로 신령시되었다는 사실에서, 영·육 분리의 관념이 일반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아울러 무속에서 사자와 함께 신발과 노자 돈 등을 넣어 주는 오랜 습속도 육신에서 분리된 영혼의 이동 내지 여행을 상정하는 관념이다.
또한 5세기말∼6세기초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는 양산(梁山) 북정리(北亭里) 고분군(古墳群)의 금조총(金鳥塚)13)에서 출토된 순금제(純金製) 새 발이나 묘도(墓道) 입구에 설치된 솟대의 흔적은 영혼이 지상에서 천계(天界)로 왕래하는 것을 시사하고 있으며, 봉분(封墳)의 형태가 방형(方形)을 취하거나 묘도를 가진 석실분(石室墳)이 나타남은 지상에 유택(幽宅)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13) 沈奉謹, 《梁山金鳥塚·夫婦塚》, 고적조사보고서 제19책, 동아대 박물관, 1991, 159쪽 참조.
이처럼 영·육 분리의 관념은 청동기∼삼한·삼국시대에 형성·확산을 가져왔다. 이런 사실은 불교 수용 이전부터 사후세계관과 영혼관의 변화가 있었음을 의미한다. 그 변화 요인으로 우리는 현실사회의 사회적·경제적 조건과 종교관념이 중요하게 작용하였을 것으로 본다.
영·육 분리 관념이 확산된 이후 무덤 속에 생활도구와 영혼의 이동을 돕는 새나 배 형태의 매개물이 함께 부장되는 경우를 본다. 우리는 여기서 생활도구를 사용하는 주체가 누구인가를 문제삼을 수 있다. 당연히 그 주체는 무덤의 육신에서 일시적으로 벗어났다가 다시 돌아오는 영혼이거나, 죽은 시신과 일정한 기간동안 함께 있는 백(魄)일 것이다. 그 가운데 후자의 백일 가능성이 더 높다. 옛 중국 기록에 “사람의 정기를 혼(魂)이라 하고, 형체를 백(魄)”14)이라 하며, “혼은 하늘로 올라가고 백은 땅으로 돌아온다”15)라고 하였다. 여기서 땅인 무덤에 머무는 실체는 백이다. 14) 《太平御覽》 권549, 禮義部.15) 《禮記》 권5.
이와 같은 관념은 승천하는 혼(魂)과 달리 땅에 스며드는 실체를 백(魄)으로 이해하고 있는 무속적 기반이 한국인에게도 나타나고 있다.16) 그러므로 무덤 속에 남아 있는 백(魄)이 부장된 생활도구를 사용하는 주체라 할 것이다. 여기서 영·육 분리의 개념을 보다 명확하게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16) 박태상, 《한국 문학과 죽음》(서울: 文學과 知性社), 책머리 참조.
한편, 삼국시대까지 지속된 영육 미분의 관념은 신라의 기록17)과 함께, 다음의 자료를 들 수 있다. 17) 이와 관련한 신라의 자료는 뒤에서 설명할 《三國遺事》에 기술된 朴赫居世, 昔脫解, 味鄒王, 文武王, 金后稷, 金庾信 등의 설화가 대표적이다.
9월에 태후(太后) 우씨(于氏)가 돌아갔다. 태후가 임종에 유언하되, “내가 [일찍이] 행실(절개)를 잃었으니 무슨 면목으로 국양(國壤: 故國川王)을 지하에서 보랴. 만일 군신(찷臣)이 차마 [나를] 구렁텅이에 버리지 아니하거든 나를 산상왕릉(山上王陵) 곁에 묻어주기를 바란다”라 하였다. 드디어 그의 말과 같이 장사하였다. 무자(巫者)가 말하되, “국양왕(國壤王)이 나에게 강림하여 말하기를 어제 우씨(于氏)가 산상(山上)에 온 것을 보고 [내가] 분함을 이기지 못하여 드디어 그와 싸움을 하였다. 물러와 생각함에 낯이 뻔뻔하여 차마 국인(國人)을 볼 수 없으니 네가 조정(朝廷)에 아뢰어 [무슨] 물건으로 나를 가리어 달라고 하였다”고 했다. 이로 말미암아 릉(陵: 故國川王) 앞에 소나무를 일곱 겹으로 심었다.18)18) 《三國史記》 권17, 東川王 8년 9월.중심으로-〉 《東方學志》 38, 연세대, 1983. 〈한국 구석기문화에서의 두루봉문화〉, 《歷史學報》 109, 1986.李東注, 〈上村里新石器遺蹟〉, 《南江댐 水沒地區의 發掘成果》, 영남고고학회, 1998. 도유호·황기덕, 〈지탑리유적 발굴 중간보고Ⅰ·Ⅱ〉, 《문화유산》 5·6, 1957.
죽은 사람이 묻히는 무덤에 영혼과 육신이 형체를 가지고 함께 거주하고 있다는 이런 내용은 고구려의 왕위 계승 및 혼인제와 관련하여 자주 인용된다. 지하에 영혼과 육신이 함께 거처한다는 생각에서 이 같은 내용을 기술하였을 것으로 보이는데, 신라나 고구려에서 아직 영육 미분의 관념이 지속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관념은 고구려, 백제, 신라와 더불어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는 부부합장(夫婦合葬)의 습속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2) 한국인의 영향에 미친 유교의 인간관과 육체관
한민족과 중국문화와의 관계는 시대가 올라갈수록 소박한 형태이기는 하겠지만 공자시대 이전에도 교섭하였으며, 따라서 공자도 일컬었던 ‘그 옛날’ 상당히 발달했던 은주(殷周)시대의 문물이 때마다 들어와서 어떤 형태로든지 응용되고 그 자취를 남겼다 할 것이다.
그러나 단군 조선이나 논의가 분분한 기자조선 이전에 동방에는 국가체제를 갖추지 못한 구족(九族)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바, 《삼국사절요》에는 “동방에 견이·방이 … 등 구이가 있었으되 처음에는 군장이 없었다”고 하였으며, 《동사강목》에는 “초에 동방에 구이가 있었다. 견이·방이·우이·황이·백이·적이·현이·풍이·양이라 일컬으니 모두 토착민이었다”라 하여, 구이의 선주민이 정착하고 있었음을 말하면서, 그들의 성품이 “천성이 유순하고 음주와 가무를 좋아하며, 흑 변(弁)을 쓰고 비단을 입었으며, 그릇으로 조두(俎豆)를 사용하였다. 하나라 임금 태강이 실국(失國)함에 비로소 반하였다”고 하였다.
이는 중국의 하대와 그 이상에 걸친 시대를 염두에 두고 말함이니, 기자 이전의 단군조선시대에 해당된다. 천성적으로 낙천우유(樂天優游)하는 예술적 성향과 제기(祭器)와 비단을 사용하는 예의의 풍속을 이루고 있었음을 아울러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공자의 사상으로 집대성된 유교사상이 부분적으로 전래하기는 서기전 3세기의 위만조선과 한사군시대라 할 것이며, 공자의 경학사상이 본격적으로 받아들여지고 활용된 것은 당(唐)나라의 학제인 국학을 받아들인 삼국시대에 이르러서이다. 고구려·백제·신라에 중국문화가 연결, 응용되는 시기와 방법은 차이가 있겠지만, 다같이 한국 고래의 전통적 신앙과 습속을 바탕으로 하면서 변용과 변화를 가져온 것은 마찬가지라 하겠다.
넓은 의미에서 한국 고대정신과 중국의 유교사상은 모두 인간을 본으로 하고 현세를 중시하는 점에서 공통성이 있다. 그러나 앞서 언급했듯이 유교는, 멀리는 상고 은대의 신비적 종교문화의 흐름과 내면적으로 관련되고, 가까이는 주대에 있어 비록 종교적 성격이 들어있는 천명사상을 잠재적으로 계승하지만, 인문주의적 예제문화(禮制文化)와 합리적 정신을 보다 중요한 특징으로 보여준다고 하겠다.
하지만 고대 한국에 있어서는 인간주의적 바탕을 깔고 있으면서도 원래의 종교적 소박성과 고유한 예속, 그리고 주술신앙을 함께 지녀온 신비주의적 전통을 가지고 있었다. 제천사상과 조상숭배, 그리고 영성신(靈星神)·일신(日神)·수호신(守護神)·귀신숭배 등 이른바 ‘음사(淫祀)’가 성행하였다. 여기에 합리주의적 주대문화를 수용한 유교적 특성이 연결되고 영향을 줌으로써 재래의 고신도적(古神道的) 전통이 합리화되고 세련된 양상을 보이는 가운데 신비적·감정적 요소가 축소되거나 대치되기도 하고, 중국적 요소와 함께 한국적 요소가 조화되기도 하며, 주술적인 것이 비판·배척되는가 하면, 오히려 고신도적 전통을 상실하는 등 여러 가지 현상을 빚었다 할 것이다.
초기에 유교의 영향이 소규모적일 때에는 변화 속에서도 고래의 모습을 존속시켰으나, 시대가 지남에 따라 유교가 생활 속에 자리잡고 그 영향이 깊어질수록 다양한 변화를 보이면서 후대에 발달된 바와 같은 가치관·생활체제 등의 역사현실을 형성하는 데 유교는 불가피한 요인으로 작용하게 되었다. 한민족이 상고시대의 이른 시기에 유교와 만났고 역사적으로 관계해 온 사실은 국가의 발전방향과 민족문화의 성격을 조정·정립해 가는데 중대한 역할을 하였으며, 한국인의 현재적 실상 그대로의 모습을 있게 하는데 큰 몫을 하였다.
고려시대를 통관하여 볼 때, 고려 말에 주자학(朱子學)이 들어와 기능하기 이전에는 유교는 역시 그 역할을 유지, 발휘하면서도 불교·도교 및 그 밖의 토속신앙과도 근본적인 갈등을 빚지는 않았으며, 병행·공존하거나 교섭·혼합되는 현상을 보여왔다. 그러나 성리학이 종합된 주자학이 들어오면서 신진사류들의 현실의식과 유·불·도의 관념은 점차 달라지게 되어 반성적·비판적 위치에 서게 되는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개국 초부터 태조의 숭유억불(崇儒抑佛) 정책으로 유교가 크게 발전하게 되었다. 특히 조선은 유교국가인 만큼 조선시대에 일어난 중요한 사항의 거의 모두에 대하여 유교적 관계와 태도가 수반되어 있을 뿐 아니라 주자학으로 대표되는 신유학은 종전의 타종교와의 공존 병행을 청산하고 대립적 관계를 뚜렷이 보여주고 있는 시대이기도 하다.
조선시대 유교의 기초를 처음으로 확립한 학자는 정도전(鄭道傳)이다. 그는 《불씨잡변(佛氏雜辨)》 등의 논설을 통하여 불교를 배척하고 유교를 숭상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는 불가의 ‘사람이 죽더라도 정신은 멸하지 않고 따라서 형체를 받아 난다’는 이른바 윤회설에 대한 반론에서 ‘죽을 때에 기와 더불어 흩어지고, 형상이 다시 멀고 넓은 허공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닌 것을 알게 된다’고 단호히 밝히고 있다.
같은 시대의 유학자인 권근(權近)도 많은 저술로 이에 동조하였고, 또한 고려 유신(儒臣) 길재(吉再)의 학통을 이어받은 같은 시대의 김숙자도 세종에게 올린 척불소(斥佛疏)에서 불교를 끌어들이는 것을 반대하고 ‘학규(學規)’를 지어 학문의 순차를 차례로 규정함으로써 정통적 유교 교육의 준범을 보여주고자 하였다. 또한 생육신의 한 사람이었던 남효온(南孝溫)도 그의 《귀신론》에서 “사람은 죽지만 심신(心身)은 죽지 아니하며 만억 겁을 지내도 사라지지 않고, 다시 사람의 모습을 받는다”는 불가(佛家)의 설에 대하여 “무극(無極)과 태극(太極)은 이(理)요, 음양(陰陽)과 오행(五行)은 기(氣)다. 사람이 나면 이(理)와 기(氣)가 서로 합하여 형질(形質)의 가운데 붙어있는 것이 마음이요, 사람이 죽어서 형해(形骸)가 이미 소멸되면, 이(理)는 이(理)대로 기(氣)는 기(氣)대로 있어서, 말이 분명하지 못하고 질은 바로 흙이 되는데, 어디에 그 마음이 있고 그 형이 있겠는가”라고 반박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종래까지 답습하여 오던 주자의 이기이원론에 대하여 중국 장횡거(張橫渠)의 태허설(太虛說)을 이어받아 기일원론(氣一元論)을 주장함으로써 한국 주기론(主氣論)의 선구자가 되었던 서경덕까지도 그의 《귀신사생론》에서 역시 같은 입장을 보이고 있음은 이 시기 유학자들에게 있어 귀신의 문제는 송대 신유학의 귀신관을 그대로 이어받았음을 알 수 있겠다. “고명(高明)을 다하되 중용을 말미암는다”고 하였듯이, 어떠한 높은 진리를 말하더라도 일상적 현실을 떠나지 않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실학의 성격을 띠는 것이니 만큼, 근본적으로 현실주의적 세계관을 지녔던 것이고, 노불(老佛)에 대해 비판적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영정시대를 전후하여 일어난 천주교 신봉자들의 증가는 유교적 입장에서 비판의 대상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미 정조 15년(1791)에 상제(喪祭)를 폐하고 신주를 불사름으로써 일어났던 진산사건(珍山事件)에서 윤지충·권상연이 처형된 바 있었지만, 순조 조로부터 대규모의 교옥이 일어나기도 했다. 이러한 시대 배경 하에, 유교경전에 대한 자신의 관점을 ‘질서(疾書)’라는 명칭의 방대한 논술 속에 담아낸 대표적 근대 실학자 이익은 서학이 주장하는 천당·지옥설과 같은 종교적 신앙에 대해서는 부정하였으나 수양론이나 윤리사상에 대해서는 긍정적 태도를 보이고 있다.
그리하여 그의 후학들은 스승에게서 볼 수 있었던 전통과 외래적 요소를 종합적으로 인식하고 보다 개방된 자세에서 새로운 사조를 열어주는 학풍에 접근하면서도 각각의 개성에 따라 강조점이 달라지고 사상적으로 대립하는 양상을 보이기도 하였는데, 특히 천주교에 대한 태도가 그러하였다. 조선 후기 실학자의 한 모습을 보여주었던 안정복은 경사를 근본으로 하고 주자학에 대한 조예를 보이면서 이황을 높이 존숭하였지만, 《천학고》와 《천학문답》을 지어 천주교에 대해서는 비판하는 입장을 분명히 하였다.
신후담도 일찍이 《서학변》을 지어 전통유학의 입장에서 천주교 교리서인 《영언여작》·《천주실의》·《직방외기》 등을 이론적으로 비판하였다. 이는 조선 후기에 있어서 서학에 대한 본격적인 비판서로는 최초의 것이며 대서학 논쟁사의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 다른 한편으로 이익의 학풍을 계승하면서도 천주교에 기울었던 후학이나 이익 문하의 인물들로 그의 제자 권철신과 종손 이가환과 같은 학자들을 들 수 있다. 이들은 천주교인이 되었으며 신유사옥 때 순교하였다.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이 이익 문하의 신서파(信西派)들과 교류하였는데 모두 친인척들을 중심으로 한 것으로 보아 성호학파의 한 계통이 천주교와 깊은 관계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정약용은 천주교의 이해를 바탕으로 경전 속의 상제(上帝)사상을 심도 있게 서술함으로써 유교를 종교적 측면에서 해석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하겠다. 정약용이 보는 상제는 ‘하천지총(荷天之寵)의 인격천(人格天)’이요, ‘영명주재지천(국明主宰之天)’으로서, 성리의 극치라 할 태극이나 다른 무엇으로도 비교할 수 없으며, 인간은 영명무형지체(국明無形之體)를 부여받았으니, 그것이 도심이고, 도심의 소리가 곧 하늘의 소리라고 보았다.
다음으로 근대 이래의 서세동점(西勢東漸)과 한민족의 국가적 위기를 당하여 뚜렷한 이념과 행동으로 대응하여 의리학의 학통을 이루었던 이항로 및 그 후학인 화서학파의 서학에 대한 입장이다. 19세기 조선은 전통적 기반 위에서 볼 때 밖으로부터의 두 방면의 위기, 즉 정치적으로는 외세의 침략으로부터 군사적 각축장이 된 점, 사상적으로는 전통가치 체계와 상반되며 도전적이기도 하였던 서학이 확대된 점에 따라 유교국가인 조선으로서는 매우 심중한 문제로 인식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해 있었다.
이항로는 천주교 자체의 내세주의와 구복신앙을 논하고, 전통질서에 대한 파괴적 요인을 비판함과 아울러 그것이 외부로부터의 정치·군사적 침략과 결합하여 안으로부터 대응하는 것이라고 파악하였다. 따라서 조선에 있어서 천주교는 반윤리적·반국가적 존재였다고 보았다. 이러한 비판을 상대방에 대한 주의 깊은 통찰과 이해하려는 태도의 부족으로 인한 유교적 독단이라고 탓할 수도 있겠으나, 그의 《천당지옥변》을 살펴보면 유교적 세계관이 그대로 답습되고 있음을 보게 된다.
그는 천당과 지옥이 혹세무민한다는데 대한 변으로 “양이 있으면 음이 있고 처음이 있으면 끝이 있어서 생재사망(生在死亡)의 설은 분명하기가 낮밤과 같아 삼척동자도 속일 수 없다. 그런데도 나의 말을 따르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서 천당에서 영생을 얻고 나의 말을 따르지 않으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 지옥에 들어간다는 가르침이 있다 하였다. 이것은 천리에 없는 일이기에 (中略) 혹세무민하는 사학(邪學)의 가르침이다”라고 하였다.
이러한 기독교의 천당·지옥설과 아울러 기독교적 계율(戒律)은 완전하지 못한 인격을 일정하게 자제해야 된다는 유교적 예론(禮論)과는 근본적으로 상치되는 점이 많았던 것이다.
이상과 같이 유교는 한국인에게 영혼관념 및 세계관과 함께 현상적 의례나 제향공간의 설치·운영에도 깊은 영향을 끼치고 있다. 그 배경은 인간중시의 의미를 두는 현세적 입장의 유교적 세계관과 이를 지향하는 한국인의 관념이 상호 융합할 수 있는 성격을 가졌기 때문이다. 특히 여기에는 한국인의 원초적 죽음관념에 흐르고 있던 친족 혈연성의 결속, 혈연의 정통성과 정치적 권위의 확보, 학연성의 결집이라는 현상도 반영되어 나타난다. 이런 입장에서 현세적 인간중심의 유교는 한국인에게 온전한 몸으로 죽어서 땅에 매장되는 것을 가장 훌륭한 장례방법으로 보았던 것이다. 이러한 사고방식에서는 장기이식을 부정적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다고 보여진다.
무속신앙과 유교의 인간관은 위에서 서술한 이유로 해서 살아 있을 때나 죽은 뒤까지 육체를 온전하게 보전하는 것을 최상의 가치로 삼는다. 이런 태도는 육체를 함부로 대하지 않고, 육체를 물려준 부모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정신이 있는 등 여러 긍정적인 요소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기이식 면에서는 큰 장애요소가 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벽을 뛰어 넘고 장기이식을 적극적으로 권장할 수 있는 불교윤리의 재조명이 필요하다고 본다. 그런 윤리사상이 불교에 많이 있지만 특히 자비 사상이 그 대표적인 윤리사상이라고 볼 수 있다.(다음호에 계속)
곽만연
동국대학교 대학원 인도철학과에서 석사학위를 받고 동 대학원 철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하였다. 동국대, 한양대, 인하대에서 강의하였고, 현재 동아대학교 인문학부 교수이다. 논문에 〈불교의 직업관〉, 〈불교윤리사상이 신라사회에 끼친 영향〉, 〈불교의 죽음관의 전개와 한국문화에 끼친 영향〉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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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요즘 울딸의 표현~ 대 박....
좋은글 감사합니다
~~대박!
내용이 무척이나 궁금하네요.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