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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불사 세 성인을 영원히 사모하며 (내불삼성영사집 來佛三聖永思集) 24
해경노화상 전신사리
제16장. 자신이 있는 곳을 알면 자연히 몸과 마음이 자재하리라 (知所在自然自在)
당수파黨秀坡
해경노화상께서는 한 평생 계율을 지키고 염불하여 마침내 육신보살이 되셨습니다. 승려를 위해 몸소 실천하여 모범을 보이셨고, 불법을 위해 몸소 실천하여 증명을 보이셨으며, 또한 수없이 많은 평범하고 어리석은 사람들로 하여금 감화를 받게 하셨습니다. 지금 제가 알고 있는 경공의 몇 가지 사적을 글로 정리하여 많은 학인들의 요구에 부응하고자 합니다.
래불사의 사방 10리에 있는 여덟 촌락의 주민들은 누구를 막론하고 해경노화상의 인품이 진실하고 후덕하고 곧고 바르며, 성품이 온화하고 선량하시다는 것을 다 알고 있습니다. 해경노화상께서는 말씀을 하실 때 더듬는 현상이 매우 심각하셨지만, 오직 “아미타불” 부처님 명호를 부를 때만은 한 글자 한 글자 분명하고 또렷하게 발음하셨으며, 염불하는 소리는 마치 큰 종이 울리는 소리와 같으셨으며, 오로지 이 한 마디의 “아미타불”의 성스러운 명호만을 아실뿐이었습니다. 당시에는 사원의 생활여건이 넉넉하지 않았으며, 청빈함이 극도에 달하였었습니다. 경공은 겨울에는 솜옷 한 벌(이 솜옷은 현재 래불사 금강관金剛館 안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뿐이셨고, 여름에는 홑옷 한 벌 뿐이셨습니다. 이는 보통 사람들은 상상하기조차 어렵고 견뎌내기 힘든 일이지만, 그러나 경공은 하루 종일 늘 언제나 희희낙락하며 항상 웃으셨습니다.
경공은 언제나 늘 일할 공구를 들고 나가서 똥을 줍기도 하고, 땔나무를 줍기도 하고, 부서진 벽돌들을 주워 도로에 깔기도 하셨습니다. 사원으로 돌아오셨을 때 밥이 이미 식어 차가워졌으면 조금 드셨고, 남아 있는 먹을 밥이 없으면 한 끼를 굶으면서도 언제나 한 번도 불평하지 않으셨고, 또한 화를 내지 않으셨습니다. 당시에 사원에 욕하기를 좋아하는 군인출신의 화상이 한 분 계셨습니다. 그 화상은 경공을 보기만 하면 자신의 눈에 거슬려 시도 때도 없이 경공에게 상스러운 욕설을 퍼부었습니다. 거사들은 경공에 대해 너무 심하게 욕설하는 것을 더 이상 참고 볼 수 없어 어느 때에는 그 화상에게 대들어 따지기도 하였습니다. 그래도 경공은 그저 빙그레 웃으시고는 작은 목소리로 말씀하시길, “화상이 나를 위해 업장을 소멸시켜 주시니, 나는 극락세계에 갈 것입니다.”(你爲我消業障, 我上極樂國.)
사원에 공양으로 올린 과일이나 과자나 사탕들이 놓아둔 시간이 오래되어 맛이 변질되고 곰팡이가 피어오른 것들이 있으면, 다른 사람이 좋은 것을 다 고른 후 남아 있는 좋지 않은 것을 경공에게 줄지라도, 경공은 조금도 화를 내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말하길, “이것은 먹을 수가 없게 된 것이니 소에게 먹이세요!” 그러면 경공이 말씀하시길, “소는 쟁기를 끌고 쇠스랑을 끌면서 마른 풀을 먹으며 매우 고생하면서 사는데, 소에게 이런 것을 먹게 해서는 안 됩니다. 내가 응당 받아 누려서는 안 되는 것은 제가 죄업이 있는 것이니, 더 이상 소를 괴롭혀 해쳐서는 안 됩니다.”(老牛拉犁拉耙,吃乾草,活得夠苦了,不能讓它吃這東西,我不該受用是我有罪業,不能再去坑害牛.) 그래서 먹을 수 없게 된 것들은 전부 나무뿌리 옆에 파묻거나 농작물에 뿌렸습니다. 조서진曹書珍거사가 말하길, “노화상은 참으로 검소하고 알뜰하게 생활하십니다!” 그 말에 경공께서 말씀하시길, “불조께서 다 보고 계시며, 우리들 머리 위 석 자 되는 곳에는 바로 신령이 계십니다. 만물은 모두가 불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마땅히 어떻게 받아 누려야 한다면 바로 그렇게 받아 누려야 합니다.”(佛祖看著哩, 頭上三尺有神明, 萬物都有佛性, 該咋受用咋受用)
한 번은 성이 도陶씨인 열여섯 살 된 소년이 자기 또래 친구를 몇 명 데리고 함께 사원에 와서 떠들며 놀았습니다. 그 소년들은 경공의 순진무구하신 모습을 보고는 못된 욕설을 마구 퍼부었으며, 또 작은 몽둥이로 경공의 삭발한 머리를 톡톡 두드렸습니다. 그러자 경공께서는 머리를 갸우뚱하면서 웃으며 말씀하시길, “너는 나와 인연을 맺고 싶은 게냐? 원하면 내가 너를 내 제자로 삼아 너에게 ‘아미타불’을 부르는 것을 가르쳐주마. 좋은 공부를 하고 좋은 일을 하면 어른이 된 후에 네 집안은 자자손손 부귀할 것이라고 네 부모님께 말씀드려라.”(你想和我結緣啊? 給你爹媽說說我收你當徒弟, 教你念阿彌陀佛, 上好學做好事, 長大你家輩輩有富貴.)고 하셨습니다.
1973년 음력 섣달 초에 날씨가 몹시 차갑고 추웠습니다. 장장촌張莊村에서 태어난 지 겨우 열 며칠 밖에 되지 않은 송아지가 깊이가 10미터 정도 되는 우물 속에 빠진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이 우물은 이 마을에 하나밖에 없는 유일한 식수 우물이며, 30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물 벽은 불에 잘 견디는 내화耐火 벽돌로 쌓아 만들었고, 우물 입구 사방에는 네 개의 석조石條가 둘러져 있습니다. 우물 벽의 여러 곳은 세월이 오래 되어 이미 깎이고 부식되어 군데군데 구멍들이 생겼습니다. 송아지가 우물 안에서 발버둥치는 과정 속에서 벽돌이 계속해서 우물 바닥에 떨어져 대단히 위험하였습니다. 어떤 사람이 말하길, “송아지 한 마리를 구하자고 위험을 무릎 쓸 필요는 없소이다.” 그러나 만약 송아지를 건져내지 않는다면, 그 송아지가 우물 속에서 막고 있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몇 백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먹는 이 물에 그야말로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에 부닥치게 될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서로 얼굴들만 쳐다볼 뿐 어찌할 바를 몰라 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송아지가 곧 숨이 끊어질 듯 하며 이제는 지쳐서 더 이상 발버둥조차 치지 못하게 된 모습을 자신들의 두 눈으로 뻔히 보면서도 그러나 어느 누구도 우물 속으로 내려가길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때 마침 경공이 이 길 앞을 지나가다가(당시에 경공은 때 마침 이 마을에서 일을 하고 계셨습니다.) 이 광경을 보시고는 다짜고짜 담력이 큰 젊은이 세 사람에게 밧줄을 끌어당기라고 시키고는 사닥다리를 내려뜨리고서 자신이 직접 당장 우물 속으로 내려가셨습니다.
경공은 우물 속에서 간신히 힘들게 자신의 무명조끼를 벗어서 송아지 몸을 휘감았으며, 다시 밧줄로 동여 맨 후에 사람들에게 천천히 송아지를 끌어올리라고 하였습니다. 송아지를 어렵사리 구하고 나서 경공을 위로 끌어 올리려고 할 때, 때마침 공교롭게도 벽돌 하나가 바로 경공의 머리 위에 떨어지는 바람에 순식간에 경공의 얼굴이 피로 물들었습니다. 우물에서 나오신 후, 여러 사람들이 둘러서서 경공의 머리를 싸매어주었습니다. 그러자 경공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면서 웃으며 말씀하시길, “내가 흘린 피는 불조께서 나에게 성불할 때 얼굴 위에 기호를 표시하라고 하신 것이지요.”(我流的血是佛祖叫我成佛時臉上做個記號) 옆에 있던 정鄭씨 성을 가진 중년 부인은 원래 불법을 믿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부인은 그때 자신도 모르게 말하길, “소식素食하고 염불하는 사람은 정말 좋겠어요!” 나중에 그 부인은 불법을 공부하기 시작하였으며, 시부모님을 공경하고 효도하였으며, 늘 언제나 좋은 일을 행하였습니다. 경공은 바로 이처럼 진실하신 분입니다. 경공은 정규교육을 받지 않아 큰 도리를 강설하시지는 못하셨지만, 그러나 몇 십 년 동안의 수행 생활 속에서 그 분은 항상 이렇게 실제의 행동으로 불법을 설명하고 불법을 널리 드날리셨습니다.
1957년 8월, 며칠 동안 그치지 않고 계속해서 물을 퍼붓듯이 내린 장대비로 인해 장장張莊의 서쪽에 있는 작은 강물의 수위가 갑자기 불어나서 몇 백 년 된 돌다리가 강물에 쓸려 무너졌습니다. 당시에 여전히 생산대에 계시던 해경노화상과 마을 사람 몇 분이 함께 밧줄과 강철 끌을 가지고 가서 위험을 무릎 쓰고 대충 응급조치를 해놓았습니다. 그러나 몇 십 명의 사람들이 필사적으로 있는 힘을 다해 오전 내내 구조작업을 하였지만, 돌다리를 완전히 복구하지는 못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천근이 넘는 석조石條가 강물에 휩쓸려 교각橋脚에서 멀리 5미터나 떨어진 진흙 속에 곤두박질쳐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모두가 만약 이 석조를 들어내어 옮기지 못한다면, 이 돌다리는 영원히 무너질 것이라 근심하였습니다. 바로 이렇게 사람들이 실의에 빠져 낙담하고 있을 때, 해경노화상께서 천천히 더듬더듬 말씀하시길, “곧 점심때가 다가오니, 저에게 다시 한 번 해보게 해주십시오. 이곳에 사는 사람들이 건널 다리가 없음으로 인해 힘들게 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는 단지 경공이 중얼중얼 혼자서 한참 동안 말하는 것을 보았을 뿐입니다.(사실 사람들은 해경노화상께서 “아미타불”을 부르고 계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 시절의 정책은 염불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에, 소리를 내어 염불할 수가 없었습니다.) 노화상은 그렇게 말씀하신 후에 강철 끌 하나와 완구(碗口: 화포의 일종) 크기의 나무 막대 두 개를 가지고서 놀랍게도 진흙 속에서 석조를 몇 차례 곤두박질을 하더니 어느 순간 교각 옆에 기대어 세워놓았습니다.
사람들은 그 광경을 보고 모두 놀라 어리둥절하였습니다! 경공을 도와준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는데, 이렇게 몸집이 왜소하고 연세가 60이 넘은 노화상이 도대체 어떻게 이 천근이 넘는 석조를 진흙 속에서 끌어올렸으며, 그 뿐만 아니라 멀리 5미터나 떨어진 곳에서 그것을 끌어내어 옮겨놓을 수 있었는지, 사람들은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당시의 생산대 대장이었던 훈지발黨志發은 경공께서 진흙 속에서 석조를 꺼내어 옮길 때, 노화상의 이마에서 땀이 나고 빛이 나는 것을 보았지만, 그러나 몸에서는 오히려 땀이 나지 않았다고 말하였습니다. 후에 어떤 사람이 경공에게 여쭈었을 때, 웃으면서 대답하시길, “그것은 전부 아미타 부처님의 가피이시지요. 만약 그렇지 않다면 제가 어떻게 그렇게 큰 힘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那全都是阿彌陀佛加持, 要不然我怎麼可能會有那麼大力氣呀!)
해경노화상은 생활이 극도로 곤고했던 자연재해가 발생했던 3년 동안, 항상 위험에 처한 사람을 도와주고 곤궁에 빠진 사람을 구제하셨으며, 이뿐만 아니라 오가는 행인들을 위해 큰 길옆에서 죽과 차를 베푸셨습니다. 해경노화상은 자신은 먹고 마실 것이 모자라 항상 굶으시면서도 오히려 남에게 베풀어 주셨습니다. 이러한 일들은 그 지역의 연세가 많은 노인들은 다들 잘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그 시절에 경공께서 밥을 먹을 때 사용했던 그릇은 띠로 엮어 짠 풀 주발(草碗)이었으며, 경공은 직접 황무지를 개간하여 손수 고구마와 수수를 심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기억하고 있는 것은 경공은 항상 자신이 직접 삶은 고구마와 야채를 넣어 끓인 수수죽을 띠로 엮어 만든 주발에 담아서 길가는 사람들에게 먹도록 주신 일입니다. 래불사가 막 중건되었을 당시에는 겨우 동쪽 건물에 띠로 엮어 지은 세 칸짜리 작은 방, 작은 가마 솥 한 개만이 있었고, 모초茅草 뿌리를 지펴서 밥을 지었으며, 생활은 궁핍하고 어려워 근근이 목숨을 이어가기조차 힘들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공은 언제나 물을 끓여 질항아리에 버드나무 잎을 넣어 길가는 행인들에게 마시도록 주는 것을 꾸준히 하셨습니다. 당동립黨同立 호법노거사는 여러 해가 지난 후, 경공에게 여쭙길, “고생스런 이러한 생활을 스님께서는 어떻게 참아내셨습니까?” 그 말에 경공께서 대답하시길, “모든 걸 다 아미타 부처님께 의지합니다!”(全都靠阿彌陀佛啊)
경공의 인품은 더없이 너그럽고 인정이 많으셨기 때문에, 주변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경공을 대단히 존경하였습니다. 그러나 정작 사원에서는 그 영문을 모르겠는데 오히려 언제나 늘 경공을 업신여기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대략 1982년 즈음에 현공노화상은 자비하신 마음을 베풀어 경공에게 동백산에 가서 상주하도록 배려하셨으며, 1987년 2월까지 동백산에서 사시다가 다시 래불사로 돌아가셨습니다. 경공의 너그러우신 덕행과 선행은 느끼지 못하는 사이에 어느 덧 이 지역의 사람들에게 깊이 영향을 주셨으며, 매달 초하루와 보름이 되면 모두들 경공께 가서 절을 하였습니다. 지금은 누구를 막론하고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가 생기면 모두가 육신보살께 가서 구할 생각을 합니다.
(인연생거사)
나무아미타불! 주의 깊고 세심하신 당수파거사께서 저희들을 위해 경공노화상에 관한 이러한 귀중한 자료를 강술해주신 은혜에 감사드리며, 이 자리를 빌려 당거사의 무량한 공덕에 수희隨喜합니다!
말학은 또 많은 인자仁者들로부터 경공노화상에 관해 대단히 중요한 작용을 일으켰던 작은 일 하나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 어르신은 평소에는 늘 오직 “아미타불”의 명호만을 부르셨지만, 그러나 만약 누군가가 어르신께 인사를 하면, 그 사람에게는 오히려 “관세음보살” 하고 화답하셨으며, 몇 십 년 동안 늘 언제나 이와 같이 하셨다고 합니다.
관세음보살상 앞에 대대로 전해 내려온 대련이 한 폭 걸려 있습니다.
자재하게 관하는 속에서 관자재보살을 보니, (自在觀, 觀自在)
존재하는 “나”도 없고, 존재하는 “사람”도 없는 경지에 이르렀을 때 (無我在,無人在)
묻겠노니, 이때에는 그대 자신은 어디에 있는가? (問此時自家安在?)
자신이 있는 곳을 알면 자연히 자재하다. (知所在自然自在)
(주)만약 자신이 어느 곳에 있는 지를 알 수 있으면, 그대는 곧 자연으로 돌아가 심신이 자재하다.
여여하게 오시는 부처님, 부처님 여래께서 관세음보살에게 말씀하시길, (如來佛, 佛如來)
장차 올 것이 있고 아직 오지 않음이 있다고 하셨나니, (有將來, 有未來)
구경에 이 몸은 어떻게 얻어 온 것인가? (究這身如何得來)
이미 지나간 세월은 마치 여래를 본 것과 같이 분명하고 또렷하다. (已過來如見如來.)
24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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