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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성탄 제 2 강 메시지_아산UBF
임마누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말씀 / 마태복음 1:1~25
요절 / 마태복음 1: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합리성을 내세우는 입장에서는 ‘이렇게 하지 말고 더 나은 방법 없는가?’ 문제제기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초대교회 때 헬라철학자들도 문제제기 하였습니다. ‘왜 전능하신 하나님이 사람의 몸을 입으셨는가? 그럴 리가 있는가? 그럴 필요가 있는가?’ 초대교회를 300년간 괴롭힌 영지주의 이단의 논리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셔서 우리와 함께 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오랜 구속의 경륜을 가지고 이루신 생명의 길이요 최고의 구원 방법입니다. 오늘 말씀이 성탄의 깊은 의미를 우리에게 심겨주는 은혜의 말씀되기를 기도합니다.
1절을 보십시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 아브라함은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입니다. 다윗은 통일 이스라엘 왕국을 이룬 왕입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은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사람들 입니다. 창세기 22:18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말씀에서 ‘네 씨’는 여러 후손이 아니라 특정한 한 사람,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왕에게 사무엘하7:16절 “네 집과 네 나라가 내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왕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하셨다 하라”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의 나라가 영원히 보전되고 왕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하신 것은 지상왕국이 영원히 지속되는 것이 아니라 다윗의 후손에서 영원한 왕 메시야가 나올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오늘 마태복음에서 예수님 족보를 기록할 때,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이라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어느 날 갑자기 예수님을 보내신 것이 아니라, 오래 전부터 하나님께서 우리 세상에 메시야를 보내시겠다고 약속해 주셨던 언약이 이루어졌다는 것을 말합니다.
2절~6절을 보십시오. 누가 누구를 낳았다는 기록이 연속되어 있습니다. 오늘 말씀 마태복음에서는 여자들의 이름이 올라가기도 하고 올라가지 않기도 합니다. 마태가 예수님 족보에 이름 올린 여자들은 이방인 입니다. 다말은 가나안 사람이었습니다. 라합은 여리고성 사람이었습니다. 룻은 모압 사람이었고 우리아가 헷, 힛타이트족이었기 때문에 아내도 동족 결혼한 것으로 추정합니다. 인종 문제 뿐 아니라 삶도 특이하였습니다. 유다와 다말은 시아버지와 며느리관계였습니다. 라합은 여리고 기생이었습니다. 우리아의 아내는 다윗의 부하 우리아 장군의 아내였습니다. 이들은 근친상간, 성매매, 불륜, 혼전관계로 비난받을 소지가 다분합니다. 그렇지만, 여인들은 믿음의 사람들이었습니다. 다말은 남편들이 사망하는 운명에 지지 않았습니다. 약속 지키지 않은 상황에 대하여 믿음으로 자기 권리를 관철시켰습니다. 라합은 이집트에서 장자재앙을 내리신 하나님, 홍해를 가르시고 길을 내신 하나님, 이집트 군대를 바다에 수장시키신 하나님 소식을 들었습니다. 낮에는 구름기둥과 밤에는 불기둥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호하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들었습니다. 그는 상천하지의 하나님을 믿고 자기 성을 멸망시키러 온 이스라엘 정탐꾼을 숨겨주고 살려주었습니다. 젊은 과부였던 룻은 믿음으로 보아스와 결혼하였습니다. 남편 있는 밧세바는 다윗왕과 불륜을 저질렀지만, 다윗왕의 회개에 함께 하였습니다.
마태복음 저자는 왜 족보를 유대 순혈주의로 기록하지 않고 이방여인들을 추가한 것입니까? 도덕적 문제가 있는 사람들을 예수님 족보에 왜 선명하게 올린 것입니까? 예수님의 족보를 통해서 그리스도는 만민의 그리스도임을 밝히고자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실 때, 회개한 죄인들을 쓰셨음을 증언하고자 한 것입니다.
계속해서 7절~11절을 보십시오. 다윗 왕국은 솔로몬 이후 남유다와 북이스라엘로 분열되었습니다. 이스라엘과 유다의 역사는 배신과 배교와 음란과 실패였습니다. 왕들은 타락하여 하나님 믿기를 거부하고 강대국을 의지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부지런히 보내셨지만, 왕에서부터 백성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습니다. 왕부터 백성들까지 바알에게 절하였고 아세라에게 제물을 바쳤으며 각지에 산당을 세워 거기 들어가 절하였습니다. 그들 사회는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을 얕잡아보았으며, 힘없는 과부 도와주는 것을 거부하였고 불쌍한 고아를 방치하였으며 약한 자에게 빼앗았습니다. 끊임없이 반복하는 죄악 속에서 그들의 나라는 힘을 잃었고 이방 나라는 하나님의 징계 도구가 되어 그들을 치고 때렸습니다. 그들은 회개하지 않아 나라는 멸망하여 지구상에서 사라졌습니다. 북이스라엘이 B.C 722년 남유다가 B.C 586년의 일이었습니다. 그들은 수없이 죽임 당하고 노예로 끌려갔으며, 그들의 땅에 세운 아름다운 성전과 견고한 성은 완전히 무너져 예루살렘은 여우들이 놀다 가는 황무지로 변하였습니다. 7절에서 11절까지의 역사가 전하는 것은 왕과 나라의 타락과 멸망입니다.
12절부터 17절까지의 역사는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던 70년과 그 후 400년 동안 선지자도 나타나지 않던 시대입니다. 왕국시대의 타락과 멸망, 바벨론 포로시대와 선지자도 없는 시대가 보여주는 것은 인간의 역사입니다. 인간의 역사는 죄로 점철된 역사입니다. 이스라엘과 유다는 자신들이 하나님을 잘 섬긴다고 자부하였지만, 사실은 바알로 대표되는 돈 중심, 물질 중심이었습니다. 실제 삶에서 하나님을 믿는 것을 거부하였으며, 신앙 따로, 상황 따로 살았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약속을 파기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주신 약속의 말씀을 거두지 않으셨습니다. “맛단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 죄와 허물과 멸망과 어둠의 시대에도 하나님께서는 메시야를 주시겠다는 약속을 신실하게 이루셨습니다. 사람들 사이에서 약속을 지키지 않을 때 흔히 하는 말이 있습니다. “네가 먼저 약속을 안 지켰잖아? 그래서 나도 안 지킨 거야” “네가 나로 하여금 약속 안 지키게 만들었잖아?” 사람은 진실하지 않고 신뢰하기 어렵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약속을 지키셨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을 보내주셨습니다.
18절을 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 모친 마리아가 요셉과 정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예수님께서 잉태되신 것은 성령으로 잉태되신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인 아담의 속성을 받지 아니하시고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가지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자의 몸에서 나셔서 완전한 사람이십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성령으로 잉태되셔서 아담의 피를 받지 않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하신 것은 죄에 빠진 세상을 구원하기 위함입니다. 고린도전서 15:21,22 절은 기록하였습니다. “사망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한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예수님께서는 육신의 몸을 입고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십니다.
19-20절을 보십시오. 남편 요셉은 마리아의 임신을 알았을 때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요셉은 깊은 내면성이 있었습니다. 그는 마리아와 이혼하더라도 마리아의 문제를 공개적으로 드러내고자 하지 않았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도우셨습니다. 주의 천사를 보내어 요셉이 오해를 풀도록 도와주었습니다.
21절을 보십시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천사는 요셉에게 태어날 아들의 이름을 예수라 짓도록 방향을 주었습니다. "예수" 이름의 뜻은 '하나님은 구원이시다'입니다. 천사는 마리아의 몸에서 나는 예수님을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라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22,23절을 보십시오. 마리아가 아들을 낳게 되리라는 것은 구약성경에 예언된 것임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임마누엘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입니다. 우리에게 오시는 예수님의 별명을 말합니다. 죄인들의 특징은 죄 때문에 고통스러워하면서도 결코 자기 죄를 버리려 하지 않는 것입니다. 오히려 죄를 사랑하고 죄를 꼭 붙잡습니다. 죄인들이 죄에서 놓임 받기 까지는 오랜 인내가 필요합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이사야 말씀이 전해진 것은 남유다 12대 아하스 때였습니다. 그는 앗수르를 의지하였습니다. 위기를 느낀 아람과 북이스라엘은 먼저 남유다를 공격했습니다. 이때 앗수르는 남유다를 구해주지 않았습니다. 이 전쟁에서 남유다 12만 명이 죽었습니다. 20만 명이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많은 재물을 빼앗겼습니다. 이것은 아하스가 하나님을 버렸기 때문이었습니다. 유다 왕 중에서 바알 상을 만들기 까지 한 사람은 아하스가 유일하였습니다. 아하스시대에 유다는 암몬의 더러운 몰렉에게 아들을 제물로 드리는 인신제사를 행하였습니다. 유다의 모든 푸른나무 아래에서 산당 제사를 드렸습니다. 유다에 대하여 아람과 북이스라엘 뿐 아니라 에돔도 쳐들어오고 블레셋도 쳐들어 옵니다. 선지자 이사야는 아람과 북이스라엘이 쳐들어왔을 때, 아하스에게 하나님을 의지하라고 하였습니다. 아하스는 이것을 거절하고 앗수르를 의지하였습니다. 앗수르의 디글랏빌레셀 3세는 유다로부터의 구원 요청을 받고 와서는 돕지 않고 오히려 유다를 공격하였습니다. 유다왕 아하스는 여호와의 전과 왕궁의 보물을 뇌물로 바치고 신하들의 재물까지 달라고 하여 앗수르 왕에게 바칩니다. 하나님을 저버리고 미련한 고집부린 유다는 멸망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유다에게 구원의 메시지를 주셨습니다. 선지자를 보내어 북이스라엘에 잡혀간 남유다 포로 20만명을 풀어주도록 하셨습니다. 부패한 백성이 회복될 소망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로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이사야7:14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유다가 죄 지어 비참한 포로가 되었을 때에도 함께 해주셨습니다. 그들에게 새로운 왕을 보내어 소망의 역사를 시작할 것임을 알려 주셨습니다.
24,25절을 보십시오. 요셉은 주의 사자의 방향대로 순종하였습니다. 요셉은 눈에 보이는 것에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마리아를 통하여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아들을 낳기 까지 믿음과 순종으로 성탄 역사를 동역하고 쓰임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잉태되셨을 때, 천사는 그 때로부터 730년 전(B.C 735~720)에 예언되었던 이사야의 ‘임마누엘’을 예수님의 다른 이름이라고 고지해주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시는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 속국이었습니다. 유다 지역의 농업이 붕괴되고 있어서 농지를 버리고 객지를 떠도는 가난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로마가 직접 세금을 징수하지 않는 바람에 세금징수원들이 임의로 세금을 더 많이 거둬들여 백성들은 가난 위에 세금 착취로 괴로움이 많았습니다. 장사하는 사람들에게 너무 과중한 세금이 부과되어서 힘들게 장사하였어도 얻는 것이 없었습니다. 로마에 대한 반란이 끊임없이 일어났습니다. 갈릴리 지역에서 특히 로마에 대한 반란 주동자가 많이 나왔습니다.
3년간의 코로나 기간 동안 전 세계 모든 나라들이 정부가 주는 지원금으로 연명하는 백성들이 많았습니다. 코로나 시기가 끝나자 전 세계가 코로나 기간 동안 돈이 너무 많이 풀려 돈 가치는 떨어지고 물가는 올라 생활 고통이 심해졌습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여 에너지 물가, 곡물가격이 엎친데 덮쳐 더 올랐습니다. 사람들은 거리에 있는 가게, 건물로 지어 놓은 마트에 가지 않고 집에서 배달 주문하는 패턴으로 구매 소비 방식이 바뀌었습니다. 미국의 경제활동 하는 사람 중에서 자영업자 비율이 7%인데, 우리나라는 정리해고, 명예퇴직으로 직장에서 나오면 자영업 하기 때문에 자영업자 비율이 24%나 됩니다. 코로나 때 뿐 아니라 코로나 이후 불경기와 고물가 속에서 생활고에 시달리는 국민들이 많아졌습니다. 전 세계를 상대로 장사하여 우리나라에 반도체 대금으로 많은 달러를 갖다 주던 중국이 미국의 제재로 경제가 어려워졌습니다. 기업들이 투자를 적게 하고 인원 채용을 늘리지 않습니다. 올해 졸업하는 대학생들, 가장 힘든 불경기에 가장 취업이 어려운 세대가 아닐까 여겨집니다.
이럴 때, 사람들은 서로 원망하고 미워합니다. 인심은 사나워지고 예민해 집니다. 서로 용서하지 못하며 상처받은 말들이 머리에 떠오르고 가슴에 사무칩니다. 분노가 솟아납니다. 가만히 있어도 불평이 생기고 없던 원망이 솟아납니다. 세상에 어려움이 있을 때에는 어느 시대나 인심이 사납고 서로 미워하는 일이 많습니다. 초기 기독교 시대에 많은 사람들이 병자들이 생기면 길에 갖다 버렸습니다. 초기 선교사들이 조선에 왔을 때도 길거리에는 전염병으로 죽어 매장해주지도 않은 시체들이 성벽아래에 방치되어 있었고 길거리를 떠돌다 병들어 죽어가는 많은 가난한 병자들이 있었습니다. 근래 우리나라도 몇 년 전까지 듣기로 꽃동네 공동체에서는 겨울에 뒷산에 자주 올라가 보아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노인들을 꽃동네 공동체 뒷산에 버리고 가는 사람들이 있어서 버려진 노인들이 저체온증으로 산에서 사망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각박한 세상에서 사람들은 연약한 사람, 어려움에 빠진 사람과 함께 하지 않습니다. 외면하고 버리고 떠나고 고립시킵니다. 아픈 사람일수록 주변 사람에게 부담까지 더하기 때문입니다. 죄인일수록 죄 없다고 주장하며 사람들을 찔러대는 법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런 시대에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세상은 구원을 원하면서도 구원자 예수님께서 오시는 것을 환영하지 않았습니다. 유대 예루살렘은 메시야가 언제 어디에서 오시는지 구약성경의 예언을 통하여 알고 있었지만, 메시야가 오시는 것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소수의 기득권은 로마에 붙어 이권을 계속 가지는 것에만 집착하였고, 그렇지 못한 다수의 사람들은 로마를 몰아내고 로마의 속국신세를 면하고 로마에서 해방되는 것에만 열을 내고 불평과 불만의 산을 키우고만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은 함께 해주지 않고는 구원할 수 없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을 사랑하실 때, 죄인들 속에 오셔서 그들의 괴로움과 그들의 버림받음과 그들의 가난에 함께 하시는 사랑을 하고자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 창조주의 영광을 가지셨지만, 사람의 몸을 입고 우리와 함께 하시고자 오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인들과 함께 하심으로 구원을 이루시는 방법을 택하셨습니다.
원래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스스로 죄를 인식할 수 있도록 죄와 싸울 수 있도록 율법을 주셨습니다. 율법을 통하여 우리는 죄를 분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 깨달을 수 있었으며, 어떻게 살아야 의인의 삶인지 인식할 수 있었습니다. 거기까지였습니다. 율법은 죄를 드러내는 거울 역할은 하였지만, 인간 본성을 변화시키지 못하였습니다. 외적 규범은 되었으나 내면 변화를 일으키지 못하였습니다. 목표는 제시하였지만 그것을 이룰 능력을 주지 못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어 선지자들을 많이 보내주셨습니다. 계속 보내주시고 거듭하여 보내주셨습니다. 선지자들을 통하여 메시지가 전달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기는 하였습니다. 귀에 들려오는 외부의 음성은 전달되었습니다. 하지만 인간 근본이 변화되지 않았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뜻을 알았다고 해도 실천할 능력이 없다는 것이 선지자 메시지가 전달될수록 분명하게 드러났습니다. 선지자를 통한 메시지 전달도 끝내 내면 변화는 일어나게 하지 않았습니다.
죄는 단순한 실수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죄는 관계의 완전한 단절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하여 자신의 한계적인 생각의 테두리 안에서만 이해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우리 인생을 위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고 잘 이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사람의 몸을 입고 우리에게 오신 것입니다. “성육신” 사람의 몸을 입는 것입니다. 창조주 이신 하나님께서 연약하고 불완전한 속성을 가진 육신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과 본체이시지만 하나님의 본질과 속성을 가장 잘 보여주시는 가장 분명한 길, 성육신하여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우리가 가장 잘 이해하고 느끼고 체험할 수 있는 구원자로 우리 곁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완전한 속죄를 위하여 사람의 몸을 입으셨습니다. 완전한 하나님이자 완전한 인간만이 죄를 위한 속죄를 이룰 수 있었기에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육신”은 인류 구원을 위한 유일하고 가장 완벽한 해결책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성육신”하신 하나님으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하늘 위 멀리에서 우리를 돕는 방식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생활하시러 오신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와 함께 하시며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 종교지도자들은 죄인들을 멀리하였습니다. 자기들이 거하고 생활하는 경계를 분명히 하고 사람들을 대하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죄인들과 식사하시고 대화하시고 소외되고 버려진 자들을 만져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결국 십자가에 자기 몸을 희생제물을 내어주셨습니다. 죄인들을 대신하여 십자가에 매달려 고통당하시며 물과 피를 다 쏟아 죽으심으로써 우리를 향한 지극한 사랑을 실천하여 주셨습니다. 하늘 영광을 버려 희생하고 스스로 낮아져 죄인들과 함께 하는 “성육신”과 “임마누엘”은 예수님을 통하여 보여주신 하나님의 구원의 방법이요 생명을 구하는 길입니다. 함께한다는 것은 어떤 사람과 함께 하더라도 반드시 희생이 동원될 수밖에 없습니다. 희생이 동반하지 않고는 함께 하는 것은 정말 어렵습니다.
올해가 지나면 내년부터 저의 은퇴까지는 7년 남습니다. 은퇴 5년 남았을 때부터 계승 작업이 본격 이루어집니다. 저는 여러분 앞에서 리더십 발휘하는 날이 2년 남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미 여러 면에서 계승 작업은 벌써 시작된 면도 있습니다.
저는 1986년 가을부터 양들을 초청하였습니다. 지금까지 가는 곳마다 생명의 열매를 얻는 은혜를 받았습니다. 제가 영적이거나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었고 방법이 좋았습니다. 저는 87년에 저 한 명이었던 학생회에 6명의 목자가 세워지는 것을 보았는데, 어린 양들과 함께 하는 것이 비밀인 것을 배웠습니다. 일주일에 한 번 만나서 일대일 하고 일주일에 한 번 주일예배 초청하는 시대는 끝났다고 보았습니다. 목자는 어린 양과 늘 함께 하는 것이 중요함을 배웠습니다. 함께 하기 위하여 목자는 자기를 희생하여야 함을 배웠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이었습니다. “함께 하는 것” 이를 위하여 “희생 하는 것” 예수님께서 보여주시고 모범이 되신 목자의 길입니다.
서사라 목자와 저는 올해로 결혼 30주년 되었습니다. 지금까지의 결혼생활동안 우리 식구끼리 살았던 날이 얼마 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신혼 때부터 우리 가족들 필요보다 방 하나 더 있는 집을 구하여 양들 데리고 살았습니다. 서사라 목자는 항상 여섯 명, 일곱 명, 열 명, 열 한 명 식사를 매일 준비하였습니다. 나사렛대 최연소 임용 기록을 갖고 있었고 지금은 호서대학교 교수이며 우리나라 정보보호분야에서 유명한 모 교수가 우리가 호서대 앞에 살 때 우리 센터 겸 집에 한 번 왔었습니다. 그는 호서대학교 교수사회에서 UBF에 대한 찬사를 아끼지 않습니다. 가난하여 콩 한 알 밖에 없는 사람이 콩 한 쪽도 없는 학생들을 집에 데리고 사는 것을 보았다고 하였습니다. 그런 생활에 충격과 감동 받았다고 호서대 여러 교수들에게 지금도 말하고 있습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함께 하는 것에 생명이 있습니다. 함께 하는 것에 은혜가 있습니다. 함께 하는 것에 열매가 있습니다.
저는 우리 가운데 가장 먼저 개척센터를 위하여 기도하고 도전하는 이마태 목자님이 양들에게 비싼 밥을 아주 많이 사주는 것을 보았습니다. 저는 천사라 사모님께도 비싼 음식을 많이 사드린 줄 알고 천사라 사모님께 여쭤봤는데, 별로 안 샀다고 하셨습니다. 제가 천사라 사모님을 편들어서 그러는 것이 아니고, 이마태 목자님더러 양들에게 비싼 밥 사는 것이 양 치는데 큰 도움 안 될 것이라고 해주었습니다. 비싼 밥이 효과 있는 것이 아니라 양들은 함께 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비싼 밥 사주는 것은 큰 맘 먹고 한 번 이벤트로 해주고 보내면 그만입니다. 함께 하는 것은 나의 할 말을 참고 나의 기준을 뒤로 물리며 들어주고 인내해주고 시간내주고 나를 내주어야 하는 수고가 따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나에게 그렇게 해주신 것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해주신 것과 같이 함께 해주고 함께 해주기 위하여 희생할 때 생명잔치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의 삶이 생명잔치 되기를 기도합니다. 성탄이 우리 인생의 생명잔치가 시작되는 성탄이 되고 생명잔치가 지속되는 성탄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지금도 우리 곁에는 목자의 함께 하여 주는 것이 절실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지금 우리의 캠퍼스에는 여러 가지 말보다, 일주일에 한 번, 혹은 어쩌다 이벤트 같은 것보다 실제로 이야기를 들어주고 이해하고 공감해주기를 바라는 이웃들과 청년들이 많습니다. 지금도 우리 주변에는 상처가 아물지 않은 사람, 여전히 마음의 어려움이 있는 사람도 많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일상에서 그리스도의 임마누엘을 실천하고 그 은혜를 함께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의 임마누엘에 동참하는 것이 그리스도를 잘 알고 그리스도의 은혜를 더 깊이 체험하는 비결이 됩니다. 아산과 천안의 대학 출신 청년들의 취업이 어렵습니다. 취업만 그런 것이 아니라 양극화 시대에는 약자들의 어려움은 더 커집니다. 우리 청년들이 함께 하시는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 정말 필요합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은 우리가 실패하고 좌절할 때도 함께 하십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은 우리가 고난과 어려움에 있을 때에도 늘 함께 하십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님의 함께 하심을 굳게 믿고 어디에서든 다시 시작하고 다시 출발하고 다시 도전할 수 있습니다.
함께 하시는 예수님을 믿을 때, 우리는 궁극적으로 최후의 승리를 얻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영원히 함께 하십니다. 지금 우리가 함께 하시는 예수님을 믿고 굳게 붙잡아 나가면 예수님께서는 새 하늘과 새 땅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서도 늘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임마누엘의 은혜가 심령에 넘치시기를 기도합니다. 그동안 예수님께서 나와 함께 해주셨습니다. 임마누엘의 은혜를 실제 삶에서 나누시기를 기도합니다. 나도 고난 받는 이웃, 어려움 겪는 우리시대 청년들과 함께 하는 목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를 위하여 지금도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우리가 괴로움 많은 이 시대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가는 소망의 통로로 쓰임받기를 기도합니다. 임마누엘의 은혜가 더욱 심령에 가득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아산UB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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