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 인생의 동화, 문학은 없었다.
(안데르센이 직접 쓴 자신의 이야기)
1
내 인생은 아름다운 한 편의 동화다. 그토록 풍요롭고도 행복한.
내가 헐벗은 채 세상에 나왔을 때 만약 한 요정이 나타나, "원하는 대로 네
인생의 길과 목표를 선택하여라. 그러하면 내 너를 보호하고 이끌리라. 꼭 그렇게
되도록 열심히 살거라" 하고 말했다 한들, 내 운명은 내가 지내 온 것보다 더
행복하고 더 낫게 이끌려 오지 않았을 것이다. 내 인생 이야기를, 이 세상이 내게
말해 준 그대로 되돌려 말해 주겠다. 그것은 세상 모든 것을 최상으로 이끄는
사랑에 찬 신이 존재한다는 이야기이다.
내 조국 덴마크는 시적인 나라다. 민담과 옛 민요들, 그리고 이웃 나라인 스웨덴과
노르웨이의 역사와 함께 얽혀 있는 풍요로운 역사로 가득 찬 나라다. 덴마크의
섬들은 찬란한 너도밤나무 숲과 밀밭과 크로바 들판으로 덮여 있어서 마치 위대한
양식을 갖춘 정원들처럼 보인다.
내가 태어난 곳 오덴세는 이 섬들 중의 하나인 핀에 있는데, 오덴세라는 이름은
이 곳에 살았었다는 전설이 내려오는 오딘이라는 신의 이름을 따서 지어진 것이다.
이 곳은 우리 주의 서울이며 코펜하겐으로부터 34.2킬로미터 떨어져 있다.
1805년, 이 곳의 어느 작고 초라한 방에는 서로 끝없이 사랑하는 젊은 부부가
살고 있었다. 신기료장이인 남편은 채 스물두 살이 되지 않은, 시적 천성을 가진
재주 많은 사람이었고, 몇 년 연상인 아내는 세상일이나 사는 일에는 서툴렀으나
사랑으로 가득한 가슴을 지니고 있었다.
이 젊은 부부는, 단칸방에 구둣방과 살림방을 차렸는데 바로 얼마 전 세상을 뜬
트람페 백작의 관을 운반하는데 쓰였던 목재 틀을 이용해서 신혼부부의 침대를
꾸몄다. 침대 테두리에 붙어 있는 검은 천 조각이 아직 그것을 상기시켜 주고
있었다.
1805년 4월 2일, 이 침대에는 베일과 촛대에 둘러싸인 백작의 시체 대신 생명을
지닌 어린아이가 누워 울고 있었다. 바로 나,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이다.
태어나서 며칠 간 큰 소리로 우는 동안 나의 아버지는 침대머리에 앉아
홀베르그를 큰 소리로 읽었다 한다. 그리고 농담조로 이렇게 말하곤 했다.
"너 잘 테냐, 조용히 들을 테냐?"
그러나 나는 계속 울어 대었고, 교회에서 세례를 받을 때도 큰 소리로 울었으므로
다혈질인 목사님은, "얘는 꼭 고양이처럼 우는군요" 라고 말했다. 어머니는
목사님의 이 말을 결코 잊어버릴 수가 없었다고 한다. 가난한 이민으로 나의 대부가
되었던 고마트 아저씨는 내가 어린 아이 때 큰 소리로 울면 울수록 자라서 노래를
잘 부를 수 있을 것이라는 말로 어머니를 위로하곤 했다.
구두 수선 도구들, 침대 그리고 내가 누워 잠자는 벤치로 꽉차 버린 우리의
유일한 작은 방이 내 유년 시절의 거처였다. 그러나 사방 벽은 그림들로 가득 차
있었고, 구둣방의 천장 쪽에는 책과 노래책으로 가득 찬 널빤지로 된 서가가 있었다.
작은 부엌은 반짝반짝 빛나는 접시와 그릇들로 가득했다. 옆집을 마주한 추녀의
홈통에는 흙과 야채들이 자라고 있는 큰 상자가 있었는데 ^6,36^이것이 내 어머니의
정원이었다^36,3^ 사다리 위에 올라서면 이 곳으로 뛰어내릴 수가 있었다. 내가 쓴
동화 '눈의 여왕' 속에서 이 정원은 아직도 꽃피어 있다.
무녀 독남인 나는 몹시 엄하게 자랐다. 나는 어머니로부터, 어머니 어렸을 때보다
훨씬 행복하며, 어머니에 비하면 백작 아들같다는 이야기를 들어야만 했다. 어머니는
어린 아이 때 동냥질을 하라고 부모로부터 집에서 내쫓겼으며, 그 짓을 할 수가
없자 온종일 다리 아래 앉아 울었다 한다. 내 작품 '즉흥시인'에 나오는 늙은
도미니카의 모습 속에, 그리고 '바이올린 켜는 사람'의 어머니 속에 나는 두 가지
다른 형태로 내 어머니의 품성을 재현해 놓았다.
아버지는 모든 것을 내 마음대로 하게 내버려 두었다. 나는 그의 완전한 사랑을
소유했으며, 그는 오로지 나를 위해 살았다.
일요일이면 아름다운 경치를 보여주고, 변화하는 그림들이라 할 수 있는 연극을
보여 주기도 했다. 그리고 홀베르그의 코미디와 '천일야화'를 큰 소리로 읽어주었다.
그러한 순간에만 아버지는 진정 즐거워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왜냐하면 아버지의
인생에 있어, 그리고 수공업자로서 스스로를 행복하다고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아버지의 부모님은 유복한 농사꾼이었다. 그러나 불행한 일들이 계속해서 그들을
덮쳤다. 가축들이 죽었고 마당이 불탔다. 그 충격으로 마침내 할아버지는 실성을 해
버렸다. 그래서 할머니는 할아버지와 함께 오덴세로 이사를 와서 원기 왕성하던
소년이던 아버지를 구두장이 수업을 받도록 했던 것이다. 라틴어 학교를 다니는
것이 아버지의 불붙는 소망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보다못한 두어 명의 잘사는 사람들이 한때 아버지를 도와 주기로 했지만 그것은
말로 그치고 말았다. 불쌍한 나의 아버지는 자기의 열렬한 소망이 실현되는 것을
보지 못했다. 그 후 그 일은 결코 그의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내가 어렸을 때, 라틴어 학교에 다니는 학생이 우리 집에 와서 구두를 맞추면서
책을 내보이고 자신이 배운 것을 이야기했을 때 아버지의 눈에 눈물이 고이던 것을
기억한다.
"나도 저 길을 가야만 했는데^5,5,5^." 하고 아버지는 말했었다. 그리고 내게
격하게 입을 맞추고는 그 날 저녁 내내 말이 없었다.
아버지는 같은 직업의 사람들과 어울리는 일이 드물었다.
대신 일요일이면 숲으로 나갔다. 그 때는 꼭 나를 데리고 갔다. 그러나 아버지는
밖에 나가면 별로 말을 하지 않고 생각에 잠겨 조용히 앉아 있곤했다. 그러면 나는
그 주위를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풀잎 위에 딸기를 늘어 놓거나 화환을 만들기도
했다.
1년에 한 번, 특히 5월에 싹이 파릇파릇 돋을 때면 어머니도 함께 숲으로 나갔다.
그럴 때면 어머니는 1년을 통틀어 그녀의 유일한 외출복인 면직물 원피스, 성찬식
때나 차려 입곤 하던 그 옷을 입고 나갔다. 그리고 언제나 한 무더기의 싱싱한
너도밤나무 가지를 집으로 가져 오곤 했다.
가져와서는 반짝반짝 윤이 나는 난로 뒤에다 심었다. 더 때가 지나면 성요하네스
잡초가 들보의 틈서리에 꽂히기도 했다. 그리고 그 자라나는 모습을 보고 우리는
우리가 오래 살 것인지 아닌지를 추측해 보곤 했다.
어머니는 깨끗하고 청결한 우리의 작은 방을 늘 풀과 그림들로 장식했다. 그리고
침대보와 커튼이 언제나 하얗게 되어 있다는 사실에서 자부심을 찾기도 했다.
할머니는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어린 손자를 보기 위해 매일 우리 집에 왔다.
나는 할머니의 기쁨이요, 행복이었다.
할머니는 온화한 푸른 눈과 어렵게 생을 견뎌 온 가냘픈 체구를 가진 지극히
사랑스러운 조용한 늙은이였다. 유복한 농부의 아내였던 할머니는 이제 몹시
궁핍하게 되어 정신 박약인 할아버지와 함께 조금 남은 재산으로 구입한 작은 집에
살고 있었다. 나는 결코 할머니가 우는 것을 본 적이 없다. 그러나 조용히 한숨을
내쉬며 할머니의 외할머니에 대해 이야기할때면 더욱 깊은 인상을 남겼다. 즉
독일의 카셀 출신인 할머니의 외할머니는, (우리 할머니의 표현을 빌자면) '딴따라
패'와 눈이 맞아 마음대로 결혼을 하고는 부모와 고향을 버리고 도망을 쳤으며,
그리고 이제 그 후손들이 그 죄값을 치르고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우리 할머니가
외할머니의 성을 부르는 것을 결코 들어 본 적이 없다. 그녀는 타고난 덴마크
인이었던 것이다.
할머니는 빈민 병원 곁 한구석에 정원을 가꾸었으며, 토요일 저녁이면 꽃들을
얻어 집으로 가지고 왔다. 그 꽃들은 어머니의 서랍장을 장식했으나 또한 나의
것이기도 했다. 그러면 나는 허락을 얻어 그 꽃들을 물잔 속에 넣어 두곤 했다. 그
기쁨이 얼마나 컸던가!
할머니는 모든 것을 내게 가져다 주었다. 그녀는 온 영혼으로 나를 사랑하였다.
나는 그것을 알았고, 그리고 이해했다.
할머니는 1년에 두 번 정원에서 나오는 녹색 쓰레기들을 불에 태웠다. 그럴 때면
나는 할머니를 따라 빈민 병원에 들어갈 수 있었으며, 녹색 잎들과 완두콩 줄기,
그리고 많은 꽃들 속에서 놀았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내가 많은 가치를 두던
것이었는데, 나는 거기에서 집에서보다 훨씬 좋은 음식을 먹을 수가 있었다.
병원 마당에는 정신병 환자들이 마음대로 이리저리 돌아다니고 있었다. 나는
호기심과 공포심이 뒤섞인 채 그들을 뒤쫓아다녔다. 나는 경비병들과 함께 미쳐
날뛰는 환자들에게 들어가 보려고 시도하기까지 했다. 긴 복도가 그들의 병실을
지나가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경비병이 없는 틈을 이용해서 땅바닥에 누워 문틈으로 한 병실을
들여다보게 되었다. 짚으로 된 침대 위에 벌거벗은 여자가 앉아 있었다. 그녀의
머리카락은 어깨까지 늘어져 있었으며 아주 사랑스러운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녀는 갑자기 벌떡 일어나더니 내가 누워 있는 문틈으로 돌진해
왔다. 음식을 넣어 주는 작은 벼락닫이 문이 열렸다. 그녀는 노려보면서 나를 향해
긴 팔을 뻗었다.
나는 공포에 쌓여 비명을 질렀다 ^6,36^나는 그녀의 손가락 끝이 내 옷에 닿는
것을 느꼈다^36,3^. 반쯤 넋을 잃고 있을 때에야 경비병이 왔다. 후일 나이가
들어서도 이 때의 광경, 이 때의 인상은 내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잎들을 태우는 장소 아주 가까이에 가난한 할머니들이 물레를 돌리는 방이
있었다. 나는 자주 그 곳에 놀러갔는데 곧 그들의 귀염둥이가 되었다. 나는 아주
말을 잘 해서 그들 모두를 놀라게 하였다.
나는 우연히 인간의 내장이 어떤 모양으로 생겼는지에 관해 듣게 되었다. 물론
그것을 조금도 이해하지 못한 채 말이다. 그러나 바로 이 비밀스러운 것이 나를
잡아 끌었다.
나는 백묵으로 그 할머니들의 방문에다 마구 둥근 모양의 나선들을 그려 놓았다.
내 딴에는 사람의 내장을 그린다고 한 것이었다. 심장과 폐에 관한 나의 묘사는
할머니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그래서 나는 이상하고 영리한 아이로 여겨졌다.
내가 말을 잘한 대가로 할머니들은 옛날 이야기들을 하는 것으로 보상을 해 주었다.
'천일야화'에 나오는 것같이 풍요로운 세계가 내 눈앞에 펼쳐졌던 것이다. 그러는
사이 할머니들의 옛날 이야기들과 내가 빈민 병원에서 본 미친 사람들의 모습은
어찌나 내게 깊은 영향을 미쳤던지 나는 어두워지기만 하면 감히 집 밖으로 나갈
생각을 하지 못할 정도였다.
나는 또 해가 지면 꽃무늬의 긴 커튼이 달린 부모님의 침대에 누워도 좋다는
허락을 얻곤 했다. 왜냐하면 내가 잠자는 침대가 당시 그 방의 공간을 좁혀서는 안
되었는데다가 부모님의 침대에 누워 있으면, 마치 실제 세계가 내게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처럼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정신 박약인 할아버지에게는 무지무지한 공포를 가지고 있었다. 단 몇번밖에
할아버지와 얘기를 하지 않았는데 할아버지는 나에게 '당신' 이라는 이상한 호칭을
사용하였다. 그는, 동물의 머리가 달린 인간들이나 날개 달린 동물 같은 이상한
형체들을 목각으로 만들어서는 그것들을 바구니에 싸서 밖으로 나가곤 했다. 그러면
농부의 아내들이 어디에서나 그를 대접했다. 그는 그 목각들을 그들의 아이들에게
선물하곤 했기 때문이다. 어느 날 나는, 길거리에서 아이들이 할아버지의 뒤를
쫓아가면서 소리지르는 것을 목격했다. 나는 무서워서 계단 뒤로 몸을 숨겼다. 내가
그이 살과 피로 이루어진 존재임을 잘 알고 있었던 까닭이었다.
내가 자란 바로 그 환경은 오직 나의 상상력을 채워 주는 데에만 도움을 주었다.
아직 증기선도 없고 우편 연결도 쉽지 않던 그 당시 오덴세는 오늘날과는 완전히
다른 도시였다. 다른 도시에 비해 한 1백 년쯤 뒤져 있다고 생각해도 될 것이다.
옛날에나 있음직한 많은 미신 같은 관습들이 아직도 오덴세를 지배하고 있었던
것으로도 그것은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수공업자 조합은 이리저리 떼를 지어
행진을 했고, 그들의 앞에는 채찍과 방울을 든 광대들이 앞서갔다. 참회 화요일 전의
월요일(사육제 전의 월요일)에는 백정들이 꽃으로 장식을 한 가장 살찐 황소를
데리고 거리를 지나갔다. 그 황소의 등에는 날개 달린 흰옷을 입은 소년이 앉아
있었다. 선원들은 음악에 맞춰 깃발을 휘두르며 시내를 통과했다. 마지막으로
바다에서는 두 대의 보트사이에 널빤지를 놓고 그 위에서 가장 용감한 두 사람이
격투를 했다. 물속에 빠지지 않는 자가 승자였다.
그러나 내 기억 속에 특별히 남아 있는 것은 1808년 스페인 군의 핀 주둔이다.
나는 그 때 사실 세 살밖에 되지 않았으나 거리를 떠들며 돌아다니던 갈색의
이방인들과 그들이 공중으로 쏘아 올리던 대표를 아직도 똑똑히 기억한다. 나는
빈민 병원 옆의 다 쓰러져 가는 낡은 교회의 짚더미 위에서 사람들이 잠자는 것을
보았다.
어느 날인가는 어느 스페인 병사가 나를 자기 팔에 안아서 가슴에 달고 있던
은으로 된 그림을 내 입술에다 눌렀다. 어머니는 그 일로 화를 내었다. 어머니는
그것이 카톨릭적인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나는 그 그림이 마음에 들었다. 나와
춤을 추었던 그 이방의 병사는 내게 입을 맞추고 울었다. 그도 고향 스페인에 내
또래의 자식이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이 동료 한 사람이 처형장으로 끌려가는 것도 보았다. 프랑스 인을
살해했기 때문이다. 나는 이 일에 자극을 받아서 여러 해가 지난 후 '병사' 라는
짧은 시를 썼다. 그것을 샤미소가 독일어로 번역하여 후일 '병사의 노래' 라는
책에도 수록이 되었다.
나는 거의 다른 아이들과 함께 놀아 본 적이 없었다. 학교에서도 그들과 함께
놀지 않고 교실 안에 있었다. 집에서도 장난감은 충분했다. 아버지가 내게 만들어
준 것들이었다.
가장 큰 기쁨은, 인형의 옷을 깁는다든지 아니면 어머니의 앞치마를 벽과 마당에
심어진 구즈베리 딸기 숲 앞의 두 개의 막대기 사이에 걸어 놓고 햇빛에 비치는
이파리를 들여다보는 것이었다.
나는 이상하게 꿈꾸는 듯한 아이였다. 자주 두 눈을 꼭 감고 걸었으므로 사람들은
내 시력이 약한 것으로 믿었다. 바로 이 감각이야말로 아주 특별하게 발달이 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때때로 수확철이 되면 어머니는 들판으로 나가서 이삭들을 주워 왔다. 그럴 때면
나도 어머니를 따랐다. 마치 보아의 풍성한 들판으로 나가는 성경의 룻처럼
따라나갔다. 어느 날 우리는, 관리인이 거칠기로 소문난 곳으로 가게 되었다.
우리는 그가 무시무시하게 큰 채찍을 들고 달려오는 것을 보았다. 어머니와 다른
사람들은 도망을 쳤다. 그러나 나는 아무것도 신지 않은 것 같은 발레용 나막신을
신고 있었기 때문에 그루터기들이 마구 찔러 대어서 달릴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
자리에 그냥 남아 있었다.
나는 벌써 채찍이 올라가는 것을 보았다. 나는 그의 얼굴을 똑바로 들여다보며
나도 모르게 부르짖었다.
"저기 하느님이 보고 계신데 어떻게 당신이 날 때릴 수 있겠어요!"
가혹하기로 이름난 그 사람이 갑자기 나를 부드럽게 바라보더니, 내 뺨을
쓰다듬으며 내 이름을 묻고 돈을 주었다.
내가 어머니에게 그 돈을 보여 주자 어머니는 다른 사람들에게 말했다.
"얘는, 정말 이상한 아이에요. 한스 크리스티안 말이에요. 모두가 그에겐 잘해
주거든요. 저 나쁜 작자까지 그에게 돈을 주었어요."
나는 경건하게 그러나 미신적으로 자라났다. 또한 나는 결핍이라든가 부족에 대한
개념이 없었다. 우리는 그저 하루하루를 연명해 갈 정도의 살림살이였으나 나에게는
모든 것이 풍족했다. 어떤 할머니는 아버지의 옷을 내게 맞게 고쳐 주기도 했다.
나는 때때로 부모님을 따라 극장에 갔다. 나는 그 곳에서 처음으로 독일어로 된
연극을 보았다.
'도나우강의 여자'는 온 도시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작품이었다. 그러나 나는
오페라로 취급된 홀베르그의 '술집 정치극'을 보았다. 극장과 거기 모인
사람들에게서 받은 첫인상은 결코 내 속에 정치적인 것이 잠자고 있다는 그런
인식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내가 그 많은 삶을 보았을 때 내뱉은 첫 반응은, "이
곳의 사람들처럼 많은 버터 통을 가졌더라면 정말 좋은 버터를 먹었을텐데!"라는
탄성이었던 것이다.
극장은 곧 내가 가장 사랑하는 장소가 되었다. 그러나 나는 아주 드물게 밖에 그
곳에 갈 수 없었으므로 나는 영화 광고지를 돌리는 사람을 사귀게 되었다.
그는 나에게 매일 광고지 한 장씩을 주었다. 나는 그것을 가지고 극장 한
귀퉁이에 앉아서 그 연극의 제목에 다른 코미디를 내 나름대로 새롭게 창작해
보기도 하고, 그 속에 다른 인물들을 집어 넣어 보기도 했다. 그것이 내 최초의
무의식적인 창작이었다.
아버지가 즐겨 읽어 주었던 것은 코미디나 단편들만은 아니었다. 역사책이나
성경같은 것도 있었다. 그리고는 조용히 생각에 잠기면서 자기가 읽어 준 것을
곰곰이 생각해 보곤 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그런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런
까닭에 그는 점점 말이 없어져 갔다. 어느 날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면서 성경을
덮었다.
"예수도 우리와 같은 인간이었어. 그러나 비상한 인간이었지."
어머니는 이 말에 소스라치게 놀라서 눈물을 터뜨렸다.
나도 불안에 싸여서 하느님에게 아버지의 이 불경한 말을 용서해 달라고 빌었다.
"우리가 우리의 마음 속에 지니고 있는 이외의 다른 악마는 없다"고 아버지가
말하는 것도 나는 들었다.
나는 아버지와 아버지의 영혼을 걱정하였다. 그래서 나는 어느 날 아침 아버지가
못을 뽑다가 팔에 세 군데나 깊이 찔리자 그것이 자신의 존재를 나타내기 위하여
지난 밤에 아버지를 찾아온 악마의 소행이라는 어머니와 이웃 여자의 의견에 완전히
동의했다.
아버지가 숲을 찾아가는 일이 잦아졌다. 마음의 안정을 찾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신문에서 호기심을 가지고 읽은 독일에서의 전쟁 소식이 그의 가슴 속을 가득
채웠기 때문이다. 나폴레옹은 그의 영웅이었다. 더구나 당시 덴마크는 프랑스와
연합해 있었다. 그러다보니 아버지의 관심사는 오직 전쟁 이야기뿐이었다.
아버지는 소위로 귀환할 것이라는 희망으로 군대에 갔다. 어머니는 울었다. 이웃
사람들은 어깨를 으쓱하더니 꼭 필요하지도 않은데 총에 맞아 죽으러 나가는 것은
만용이라고 말했다.
군대가 출발하는 날 아침, 나는 아버지가 노래를 부르며 즐겁게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다. 그러나 가슴은 격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나는 아버지와의 입맞춤에서
그것을 알아차렸다. 나는 마침 홍역에 걸려 방에 누워 있었다. 북소리가 울리고
어머니는 울면서 성문 밖까지 아버지를 전송 나갔다. 그들이 집을 나가자 할머니가
찾아왔다. 할머니는 온화한 눈으로 나를 찬찬히 살피더니, 내가 지금 죽는다해도
그것이 신의 뜻이라면 좋은 것이라고 말했다. 그것은 내가 기억하는 고통에 찬
최초의 아침들 중의 하나였다.
그 사이 아버지의 연대는 홀슈타인에서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고 고전했다.
평화가 다시 찾아왔고 지원병들은 자신들의 일터로 돌아왔다.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아가는 듯이 보였다.
나는 다시 인형을 가지고 놀면서 코미디 연극 놀이를 독일어로 하였다. 왜냐하면
독일어로 된 것만을 보아 왔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내 독일어는 되는 대로 만들어
붙인 나만이 알아들을 수 있는 독일어였다. 그 중에는 유일하게 제대로 된 독일어가
한마디 있었는데 그것은 '빗자루'라는 단어로 아버지가 홀슈타인에서 가지고 온 여러
가지 말 중에서 언뜻 들었던 것이었다.
"네가 내 여행 덕을 보는구나." 하고 아버지는 농담을 했다.
"네가 나처럼 멀리까지 가게 될지는 신만이 아신단다. 그러나 그렇게 되도록 해야
한다. 그것을 생각해 보아라. 한스 크리스티안."
그러나 어머니는 내가 집에 남아 있어야 하며 아버지처럼 건강을 잃어서는 안
되며 집을 떠나 멀리 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했다.
아버지는 건강 때문에 고통 받고 있었다.
어느 날 아침, 그는 심한 환상 속에서 일어나더니 전쟁에 나갔던 것과 나폴레옹
이야기만을 늘어놓았다. 그는 나폴레옹으로부터 명령을 받았으며, 스스로 직접
지휘를 한다고 생각했다.
어머니는 즉시 나를 의사에게로가 아니라 오덴세에서 반 마일쯤 떨어진 곳에 살고
있는 용하다는 여자에게로 보냈다. 그녀는 아버지의 상태를 꼬치꼬치 캐묻더니 내
팔 위에다 털실을 재고 이상한 표시를 하더니 마지막으로 내 가슴에 초록 가지
하나를 놓았다. 구세주께서 처형당한 나무와 같은 종류의 조각이라고 말했다.
"이제 가거라! 강을 따라 집으로 가거라. 만약 아버지가 이번에 돌아가신다면
너는 그의 영혼을 만날 것이다."
내가 얼마나 불안해했는지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그토록 미신에 가득
찼었고 내게서는 환상이 그토록 가볍게 움직이고 있었다.
"너, 아무도 안 만났지?"
내가 집으로 들어서자마자 어머니는 물었다. 나는 뛰는 가슴을 누르며 아니라고
말했다. 아버지는 그로부터 사흘째 되는 날 죽었다. 그의 시체는 침대에 눕혀졌다.
나는 그 앞에 어머니와 함께 누워 있었다. 간밤 내내 귀뚜라미가 찌륵찌륵 울었다.
"그는 죽었단다. 너는 그를 부를 필요가 없어. 얼음 처녀가 그를 데려갔단다."
어머니는 귀뚜라미에게 말했다.
나는 어머니가 무엇을 말하는지 알고 있었다. 지난 겨울 우리 방의 유리창이
얼어붙었을 때, 아버지는 그 유리창에 나있는 팔을 벌린 처녀의 형태와 비슷한
그림을 가리키면서, "아마도 그녀가 날 데려갈 거야"라고 농담처럼 말했던 것이다.
세인트 크누츠 교회 묘지에 묻혔다. 할머니는 아버지의 무덤위에 장미를 심었다.
이제 같은 장소에는 두 개의 낯선 무덤이 있다. 이 무덤들 위로 풀이 무성하게
자랐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부터 나는 완전히 나 자신을 책임져야만 했다. 어머니는
다른 사람들의 빨래를 해 주러 다녔다. 나는 집에 혼자 앉아 연극 놀이를 하고
인형을 깁고 연극 작품들을 읽었다. 사람들은 내게 언제나 깨끗하게 옷을 잘 입고
다닌다고 말했다. 나는 후리후리하게 키가 컸고 거의 노란색에 가까운 밝은 색의
머리카락에 모자를 쓰지 않고 다녔다.
우리 이웃에는 마담 분케플로트라는 이름의 목사 미망인이 올케와 함께 살고
있었다. 그 부인은 내게 퍽 친절하게 대해 주었다.
고인이 된 목사님은 시를 썼었고, 그 당시 덴마크 문단에서는 꽤 명성을 얻고
있었다. 그의 '물레노래'는 당시 사람들의 입에 자주 오르내렸다.
나는 '덴마크 시인들을 위한 동판화'에서 내 동시대인들이 잊어버린 그를 다음과
같이 노래하였다.
물레가락이 달그락달그락,
물레가 돌아간다
물레 노래가 날아간다
청춘의 노래는 곧
옛 멜로디가 되리니.
이 집에서 나는 처음으로 시인의 이름이 입에 오르내리는 것을 들었다. 그것이
무엇인가 성스러운 것을 상징하는 것처럼 존경의 대상으로 불리는 것도 들었다.
아버지는 홀베르그의 코미디를 자주 읽어 주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작가에
대해 말한 것이 아니라 그저 그의 문학에 대해서 얘기했던 것이다.
분케플로트 목사의 누이동생은, 자신의 오빠를 시인이라고 말했다. 그럴 때 그녀의
두 눈은 반짝였다. 나는 시인이 된다는 것은 무엇인가. 찬란한 것, 행복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 곳에서 나는 처음으로 셰익스피어를 읽었다. 대담한 묘사나 유혈의 사건들,
마녀와 유령들은 바로 내 취향에 맞았다. 나는 즉시 셰익스피어를 인형극으로
연기했다. 햄릿의 유령을 보았고, 리어 왕과 함께 황야에서 살았다. 나는 작품
속에서 사람이 많이 죽으면 죽을수록 더 재미있다고 생각했다.
내가 첫 작품을 쓴 것도 바로 그 때였다. 그것은 물론, 모든 등장 인물들이 죽은
비극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나는 피라무스와 티스베의 옛 노래에서 내용을
빌어왔다. 그러나 나는 둘 다 티스베를 사랑하여 그녀가 죽자 따라 자살하는 그의
아들을 등장시켜 줄거리를 확대시켰다. 은자의 대사 중 많은 부분은 성경에서, 교리
문답에서, 특히 '이웃에 대한 의무' 에서 따왔다. 그 작품은 '아보르와 엘비라'였다.
"농어와 건대구(얼간이나 멍청이를 가르킴)라는 제목이 더 맞을걸 그랬구나."
내가 그 작품을 우리 골목에 사는 모든 사람들에게 읽어 주고 그녀에게 보이자
이웃 부인은 이렇게 말을 했다.
나는 완전히 기가 죽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들이 칭찬하는 작품을 그녀가
놀리는 것으로 느꼈기 때문이었다.
나는 슬퍼하면서 그것을 어머니에게 이야기했다.
"자기 아들이 그런 것을 짓지 못하니까 그렇게 말하는 거야."
어머니는 대꾸했다.
나는 그 말에 위로를 받고 왕과 왕비가 등장하는 새 작품을 쓰기 시작했다.
셰익스피어에나 나오는 왕과 왕비가 보통 사람들처럼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했다. 나는 어머니나 다른 사람들에게 도대체 왕은 어떻게 말하느냐고 물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제대로 알고 있지 않았다. 그들은 오덴세에 왕이 있었던 것은
오래 전의 일이며, 아마도 그 왕은 외국어로 말했을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나는
독일어, 불어, 영어가 덴마크어로 번역되어 있는 일종의 사전을 하나 마련했다.
그것은 큰 도움이 되었다. 나는 각국의 언어에서 한 단어를 골라 그것을 내 작품의
왕과 왕비의 대사에다 끼워 넣었다. 그러나 내가 그토록 고귀한 인물들에게
어울린다고 생각한 언어는 바빌론의 언어가 되고 말았다.
모든 사람들이 내 작품을 들어야만 했다. 그것을 낭독하는 것이 내게는 진정한
축복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같은 기쁨을 느끼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은 머리에
떠오르지도 않았다.
이웃집 아들은 직물 공장에 기숙하면서 매주 약간의 돈을 집으로 가지고 왔다.
사람들은 내가 하는 일 없이 빈둥거리기만 한다고 했다. 나 역시 공장에 다녀야
한다는 것이었다.
"돈 때문만은 아니란다. 그래야 네가 무엇을 하는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잖니."
어머니도 그렇게 말을 했다. 그러나 할머니는 마음 속으로 몹시 슬퍼하면서 나를
한쪽으로 끌고 갔다. 내가 다른 가난한 아이들과 그런 곳에 함께 다니게 될 줄은
정말 생각해 보지도 않았다는 것이었다.
공장에는 많은 독일 직공들이 와서 일하고 있었다. 그들은 노래를 부르며 즐겁게
이야기했다. 또한 나는 많은 야비한 농담들이 오고가는 것을 들으면서, 어린 아이는
그러한 것도 순진한 귀로 들을 수 있다는 사실을 배웠다. 그러한 것은 내 마음에
아무런 자리도 차지하지 않았다.
그 당시 나는 이상하리 만큼 곱고 높은 소프라노 음성을 가지고 있었다. 내가
우리 집의 작은 정원에서 노래를 할 때면 골목의 사람들은 귀를 귀울였다. 우리
골목에 붙어 있는 추밀원 정원에 있는 고상한 외국 사람들도 판자 울타리에 기대
서서 귀를 기울였다.
그래서 공장 사람들이 내게 노래할 수 있느냐고 물었을 때, 나는 자신있게 노래를
불렀다. 모든 베틀이 멈추었으며, 직공들이 내 노래에 귀를 기울였다. 나는 부르고
또 불러야만 했다. 내가 맡은 일은 다른 소년들에게 떠넘겨졌다. 이제 나는
코미디도 연기할 수 있다고 이야기하고 홀베르그와 셰익스피어의 온갖 장면들을
생각해 내었다. 모두가 나를 좋아했다. 이렇게 해서 나는 공장에서의 첫 며칠을
아주 재미있게 보냈다.
그러나 어느 날 내가 노래에 열중해 있을 테였다.
"저 자식은 사내 새끼가 아니라 어린 계집아이야."
어느 직공이 소리치더니 나를 붙잡았다. 나는 비명을 지르면서 신음하였다. 다른
직공들도 그 농담을 재미있다고 생각하면서 내 팔과 다리를 꼭 붙잡았다. 나는
계집아이처럼 큰 소리로, 바보처럼 애원을 했다.
공장에서 뛰쳐나와 어머니에게로 달려갔다. 어머니는 즉시 더 이상 그런 곳에
가지 않아도 된다고 약속해 주었다.
나는 다시 분케플로트 부인을 찾아갈 수 있었다. 그녀의 생일날 나는 하얀
비단으로 직접 바늘 쌈지를 만들어 선물했다.
우리 이웃에 있는 또 다른 늙은 목사 미망인들과도 알게 되었다. 그녀는 나에게
순회 도서관에서 빌려 온 장편 소설들을 낭독하게 했다.
어떤 소설은 다음과 같이 시작되고 있었다.
폭풍우가 치는 밤이었다. 비가 유리창을 때리고 있었다.
"참 훌륭한 책이구나."
하고 그 늙은 부인은 말했다.
나는 어떻게 그런 것을 아느냐고 아주 순진하게 물었다.
"나는 첫 문장만 듣고도 안단다. 아주 훌륭하게 되어갈 거라는 걸 말이야."
나는 그녀의 통찰력에 매우 놀랐다.
언젠가 수확기에 나와 어머니는, 어머니가 태어났던 보겐세 근처에 있는 귀족의
장원으로 오덴세에서 수마일 떨어진 길을 갔다. 그 곳의 귀부인이 ^6,36^어머니는
그 귀부인의 부모의 시중을 들었다^36,3^ 어머니에게 한 번 방문해 주면 좋겠다고
말했던 것이다.
그것은 내게는 대여행이었다. 우리는 걸어갔다. 이틀은 족히 걸렸을 것이다.
그 곳에서 나는 강한 인상을 받았다. 마침 홉을 수확하는 철이었다. 창고 속에서
큰 통을 빙둘러 나는 어머니 곁에 앉아서 홉 가려내는 일을 도왔다. 사람들은, 옛날
이야기와 그리고 각자 보고 겪었던 이상한 일들을 이야기하였다.
어느 날 오후 나는 한 늙은 남자가, 신은 이 곳에서 일어나는 일과 그리고 앞으로
일어나게 될 일을 모두 아신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이 말이 내 생각을 온통
빼앗았다.
저녁때 나는 혼자 마당으로 나갔다. 마당에는 깊은 연못이 있었는데 그 연못 속에
있는 몇 개의 돌 위에 발을 올려 놓았을 때, 여기서 일어나는 일을 정말 신이 알고
있을까 하는 생각이 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만약 신이, 내가 앞으로도 여러 해
더 살아가도록 정해 놓았다면 이제 물 속에 뛰어든다해도 그것이 신의 뜻이라면
나는 익사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순간적으로 나는 물에 빠지기로 결심하고,
가장 깊은 곳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 때였다. 또 다른 생각이 내 영혼을 스쳐갔다.
나는 비명을 지르면 누가 나를 쫓아오기라도 하듯 달렸다. 그리고 울면서
어머니의 품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어머니도 그 어느 누구도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아 낼 수 없었다. 어느 부인은 내가 틀림없이 유령을 보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나 자신도 그 말을 믿었다.
어머니는 젊은 수공업자와 재혼했다. 그러나 역시 수공업자 신분인 그의 가족은
그가 너무 보잘것 없는 짝을 찾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어머니도 나도 그의 가족을
방문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아 낼 수 없었다.
나의 계부는 전혀 나의 교육에 관여하려 하지 않은 조용한 젊은이였다. 그래서
나는 완전히 요지경 속을 들여다보며 인형 놀이를 하며 살았다. 여러 가지 색의
헝겊을 모으는 것은 나의 가장 큰 행복이었다. 그러면 나는 그 모은 헝겊들을 직접
자르고 바느질했다. 어머니는 그것을 내가 재단사가 되기 위한 좋은 연습이라고
생각했으며, 틀림없이 그 일을 위해 태어났다고 믿었다. 그러나 나는 극장에 가서
배우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하지만 어머니는 반대였다. 어머니는 떠돌아다니는
유랑 극단과 줄타기 광대 이외의 다른 연극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아니, 나는 꼭
재단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재단사라는 직업의 운명에서 날 어느 정도 위로한 유일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그렇게 되면 내가 인형극에 쓸 제법 많은 헝겊을 얻게 될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나의 독서욕이나, 많은 연극 장면들, 특히 아름다운 목소리는 오덴세에 있는 몇몇
고상한 상류 가정에서 주목을 불러일으켰다. 나는 그들에게 자주 불러갔다. 그리고
나의 특이한 사람 됨됨이가 그들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내가 방문하게 된 많은 사람들 중 회크 굴트베르크 대령과 그의 가족은 많은
관심을 보여 주었다. 언젠가는 지금은 왕이 된 크리스티안 왕자에게 데려가기도
했다.
지난 해에 나는 약간의 돈을 저축했다. 세어 보니 13탈러였다. 나는 이제껏
그토록 많은 재산을 가져 본 적이 없었다. 어머니가 아주 확고하게 내가 이제 재단
기술을 배우러 가야 한다고 말했으므로 나는 어머니에게 코펜하겐으로 여행하게 해
달라고 간청했다. 코펜하겐은 그 당시 내게 있어서는 세계에서 가장 큰 도시였다.
"거기 가서 뭐가 될래?"
"난 유명하게 될래요."
이렇게 대답하면서 내가 읽은 위대한 남자들에 관해 어머니에게 이야기했다.
"우선 많은 역경을 뚫고 나가면 그 다음에는 유명해진대요."
정말이지 나를 이끌던 설명할 길 없는 충동이었다. 나는 울고 간청했다. 어머니는
마침내 굴복했다. 그러나 우선 카드와 커피로 내 미래의 운명을 점쳐 보기 위해
빈민 구호소에 있는 용하다는 늙은 여자를 데려오게 했다.
"당신의 아들은 위대한 사람이 될 거요. 그의 명예를 기리기 위하여 오덴세에는
언젠가 환히 불이 밝혀질 거예요."
그 말을 듣자 어머니는 울었다.
나는 여행 허락을 얻었다. 이웃 사람들은 모두 어머니에게 열네 살밖에 안 된
나를 그토록 멀리 떨어지고 혼란스런 도시인 코펜하겐으로 가게 한다는 것은 끔찍한
일이라고 말했다.
"그래요, 자식이 날 안심시키지 않는군요. 하지만 난 허락하지 않을 수가
없었어요. 그러나 니보르크 이상 더 가지 못할 거라고 믿어요. 그 거친 바다를 보면
불안해져도 아마도 다시 되돌아올 거예요."
어머니는 이렇게 스스로를 달랬다.
내가 견진 성사를 받기 전 여름에 왕립 극장의 가수와 배우들이 오덴세에 와서
오페라와 비극을 공연한 일이 있었다. 온 도시가 그 일로 술렁거렸다. 광고지를
돌리는 사람과 알고 있었던 나는, 무대 뒤에서 모든 공연을 볼 수 있었다. 심지어는
시동이나 은자 등의 배역으로 무대에 등장하여 몇 마디 대사까지 했었다. 나는
어찌나 열심이었던지, 배우들이 무대 옷을 갈아입기 위해서 올 때면 이미 옷을 다
차려 입고 서 있을 정도였다.
이런 일로 해서 그들은 나를 주목하게 되었고, 나의 어린애다움을 마음에 들어
했다. 그들은 내게 친절하게 말을 걸었고, 나는 지상의 신들을 우러르듯 그들을
보았다. 그때 나는 알게 되었다. 나는 연극을 위해 태어났던 것이다. 그리고 내가
유명한 사람이 되어야 할 곳은 코펜하겐이었다. 그 때문에 코펜하겐은 내가
추구하는 목표였다. 나는 코펜하겐에 있는 큰 극장들에 대해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것을 많이 들었다. 특히 사람들은 발레리나인 마담 샬을 그 누구보다 첫째로
꼽았다. 그 까닭에 나는 그녀를, 내가 그녀의 보호 속에 들어가기만 하면 날 위해
모든 것을 마련해 줄 수 있는 그러한 사람으로 보았다.
이러한 생각에 가득 차서 나는 오덴세의 명망 있는 시민 중의 한사람인 늙은
인쇄업자 이베르센 씨를 찾아갔다. 그는 배우들이 오덴세에 왔을 때 그들과 많은
교분을 맺었던 사람이었다. 그 발레리나도 알고 있음에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에게 그녀에게 줄 추천서를 부탁할 작정이었다. 그 나머지의 것은 신이 덧붙여 줄
것이다.
그 늙은 분은 처음으로 나를 보는데도 나의 청원을 친절하게 귀담아들어 주었다.
그러나 그런 짓을 하지 말라고 단호하게 충고했으며, 수공업을 배우라고 말했다.
"그건 정말이지 큰 죄가 될 것입니다."
나는 이렇게 대꾸했다. 그는 내 말에 멈칫 놀라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이것이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는 그 발레리나를 개인적으로 알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편지를
써 주겠다고 말했다. 나는 편지를 얻었다. 그리고 벌써 목표에 가까이 가 있다고
믿게 되었다.
어머니는 작은 옷 보따리를 쌌다. 그리고 마부에게 눈먼 승객이나 다름없는 나를
코펜하겐까지 데려가 달라고 당부했다. 거기에 3탈러가 들어있었다.
그 날 오후, 어머니는 슬퍼하면서 나를 성문 밖까지 배웅했다. 성문 밖에는
할머니가 서 있었다. 할머니의 아름답던 머릿결은 백발이 되어 있었다. 할머니는 내
목에 매달리면서 한 마디 말도 못하고 울었다. 나 역시 매우 슬펐다.
그렇게 우리는 헤어졌다. 나는 할머니를 다시는 보지 못했다. 할머니는 다음 해에
돌아가셨다. 나는 그녀의 무덤조차 정확히 알지 못한다. 그녀는 빈민 공동 묘지에
쉬고 있다.
마부가 경적을 불었다. 해가 찬란하게 빛나는 오후였다. 해는 곧 나의 가벼운,
어린애다운 감각 속으로도 비쳤다. 나는 모든 것이 즐겁고 신기했다. 동경하던
목적지를 향해 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니보르크의 대발트 해협에 도착하고,
배가 섬에서 멀어졌을 때, 나는 하늘의 신 이외에는 알지 못하는 고독하고 내버려진
사람임을 절실하게 느꼈다.
제란트 섬에 도착하자마자 해변가에 서 있는 창고 뒤로 가서 무릎을 꿇고 신에게
도와 달라고 기도하였다. 그렇게 하자 위로가 되었다. 나는 확고하게 신과 내
행복을 믿었다.
도시와 마을들을 지나갔다.
짐을 다시 꾸리는 동안 나는 마차 옆에 서서 빵을 씹어 먹었다.
나는 벌써 넓은 세상으로 나와 있다고 생각했다.
------
2
1819년 9월 5일 월요일 아침, 난생 처음 나는 프레데릭스베르그 언덕에서
코펜하겐을 볼 수 있었다. 작은 짐 꾸러미를 들고 슐로스그르텐을 지나, 긴 가로수
길과 시 외곽을 지나 시내로 들어갔다. 내가 도착하기 바로 전날 저녁은, 유럽 여러
나라로 퍼져 나간 그 유명한 유태인 박해가 터진 날이었다. 온 도시가 흥분 속에
있었다. 모든 사람들이 길거리에 나와 있었다. 따라서 코펜하겐의 소란과 소요는
당시 내게는 가장 큰 도시였던 코펜하겐에 대해 상상하던 것과 일치했다.
호주머니에는 채 10탈러도 안 된 돈을 가지고 나는 작은 여관에 들었다.
내가 맨 먼저 찾아간 곳은 극장이었다. 나는 여러 번 같은 극장 주변을 돌며 벽을
올려다보았다. 나는 극장을 내 고향을 보듯 살펴보았다. 이 곳을 매일 서성거리며
표파는 사람이 나를 유심히 보고는 표를 갖겠느냐고 믿었다. 그래서 나는 그의
제의를 대단히 감사해 하면서 받아들였다. 그는 내가 자기를 놀린다고 생각하고
화를 내었으므로, 나는 놀라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그 장소를 떠나고 말았다. 그 때
나는 전혀 예상조차 하지 못했다. 10년 후 내 처녀작이 그 곳에서 공연되리라는
사실을, 내가 그런 방식으로 덴마크 관객 앞에 나타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다음 날 나는 견진 성사 때 입던 옷을 꺼내 입었다. 부츠도 잊지 않았다.
나로서는 가장 잘 차려 입고, 눈까지 내려오는 모자를 쓰고 발레리나인 마담 샬을
찾아갔다. 그녀에게 내 추천서를 전하기 위하여.
벨을 누르기 전에 나는 문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내가 여기서 도움과 보호를
찾게 해 달라고 신에게 간구했다. 그 때 바구니를 든 하녀가 계단을 올라왔다.
그녀는 나를 보고 친절하게 미소 짓더니 내게 1실링을 주고는 뛰어갔다. 나는
놀라서 그녀와 1실링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견진 성사때의 옷까지 꺼내 입었으니
제법 단정해 보일 것이라 생각했었다. 그녀는 어떻게 내가 구걸을 하려 한다고
생각할 수 있었을까?
나는 그녀를 소리쳐 불렀다.
"그냥 가져!"
그녀는 소리치고는 가 버렸다.
마침내 나는 발레리나의 면회를 허락 받았다. 그녀는 나를 아주 이상하다는 듯이
바라보면서도 내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녀는 이 편지를 써 준 사람을 전혀 알지 못했다. 그래도 나는 연극에 대한 내
마음 속의 욕망을 토로하였다.
어떤 역할을 연기할 수 있느냐는 그녀의 질문에 나는 "신데렐라" 라고 대답했다.
이 작품은 오덴세에서 왕립 극단에 의해 공연되었는데 주인공이 어찌나 나를
감동시켰던지 기억만으로 완벽하게 그것을 연기할 수 있었다. 그 사이 나는 부츠를
벗어도 좋다는 허락을 얻었다. 부츠를 신고는 가볍게 움직일 수 없기 때문이었다.
나는 큰 모자를 탬버린 삼아 춤추고 노래하기 시작했다.
이 지상의 지위와 부도
근심 걱정을 면할 수는 없지요.
나의 거동을 본 발레리나는 나를 미친 사람으로 간주했다. 결국 나는 쫓겨나고
말았다. 그러나 이에 실망하지 않고 일자리를 얻기 위하여 극장주를 찾아갔다.
그는 나를 찬찬히 바라보더니 연극을 하기에는 너무 말랐다고 말했다. 나는, 1백
탈러의 출연료로 취직만 될 수 있다면 살이 찔 거라고 말했다. 그러나 극장주는 내
길을 가라고 말하면서 여기는 교양을 갖춘 사람만 고용한다고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나는 매우 슬펐다. 위로와 충고를 해 줄 사람도 없었다. 죽는 것만이 유일한
방법처럼 생각되었다. 그러나 곧 신을 생각했다. 어린 아이가 완벽한 믿음으로
아버지에게 매달리듯이 내 생각은 신에게로 향했다.
나는 실컷 울고 나서 나 자신에게 말했다. 만약 모든 것이 불행하게 흘러간다면
신은 나에게 도움을 보내리라. 나는 그걸 믿었다. 무엇인가를 성취하기 전에 많은
고통을 당해야 하는 법이다.
나는 극장으로 가서 오페라 '포올과 비르지니'의 맨 위층의 싼 관람석의 표를
샀다. 연인들의 이별은 몹시 내 마음을 감동시켜서 나는 격하게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내 옆에 앉아 있던 두어 명의 부인들이 그저 연극일 뿐이라고, 저건 아무
의미가 없다고 나를 위로했다. 한 부인은 내게 소시지가 들어 있는 큰 샌드위치를
주기도 했다.
나는 모든 사람을 신뢰하고 있었다. 그래서 아주 솔직하게 포올과 비르지니
때문에 우는 것이 아니라 내가 연극을 나의 비르지니로 생각하기 때문에, 내가 만약
연극과 이별한다면 나도 포올처럼 불행해질 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우는 것이라고
고백하였다. 그들은 나를 천천히 바라보았으나 나를 이해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나는 내가 왜 코펜하겐으로 왔는지, 내가 얼마나 고독하게 여기 있는지를
이야기하였다. 그 부인은 내게 더 많은 빵과 과일과 과자를 주었다.
나는 길거리를 지나갔다. 아무도 나를 알지 못했다. 나는 완전히 버림받은
몸이었다. 그러자 나는 오덴세에 있을 때 어느 신문에서 시보니라는 이탈리아 인에
관해 읽은 생각이 났다. 그는 코펜하겐의 음악 학교 교장이었다.
'그래, 모든 사람들이 내 목소리를 칭찬했었지. 어쩌면 그가 나를 돌봐 줄지도
몰라. 만약 그렇지 않으면 나는 그 날 밤을 집으로 돌아가는 배를 찾아야 하리라.'
집으로 돌아간다는 생각을 하자 나는 더 격하게 마음이 움직였다. 이러한
고통스러운 상황에서 나는 시보니 씨를 찾아갔다. 그는 마침 점심 모임을 갖고
있었다. 내게 문을 열어 준 가정부에게 나는 가수로 취직하고 싶다는 내 갈망뿐
아니라, 내 살아온 이야기를 모두 털어놓았다. 그녀는 동정심을 가지고 내 이야기를
귀기울여 들었다. 그녀는 내 이야기의 대부분을 손님들에게 반복했음에 틀림없었다.
나는 오래 기다려야 했으니까 말이다.
문이 열리자, 모든 손님들이 나와서 나를 관찰했다. 나는 노래를 불러야 했다.
시보니 씨는 주의 깊게 들었다. 나는 홀베르그의 연극 몇 장면과 두어 편의 시를
낭송했다. 그러자 나 자신의 불행한 처지가 생각나 눈물을 터뜨리고 말았다. 모든
손님들이 박수를 쳤다.
"내가 예언하겠네. 이 아이는 언젠가는 크게 될 거야. 그러나 후일 모든 관객이
네게 박수 갈채를 보내더라도 너무 허영심에 들뜨지 말아라!"
바게센 씨가 말했다.
그는 순수하고 진정한 천분에 관해 몇 마디 덧붙이면서 천분이란 나이를
먹을수록, 사람들 사이에 섞일수록 파멸해 가는 것이라고 말했다.
나는 그 모든 것을 이해하지는 못했다. 시보니 씨는 내 목소리를 교육시켜
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내가 왕립 극장의 가수로 데뷔할 수 있도록 도와
주겠다고 약속했다. 나는 너무나 행복해서 웃고 울었다.
가정부가 나를 밖으로 불러 내 볼을 쓰다듬으며 내일 바이제 교수에게 가 보라고
했다.
나는 바이제 교수에게 갔다. 그 역시 가난하게 태어나서 열심히 노력하여 성공한
사람이었다.
그는 내 처지를 이해했다. 그리고 나를 위해 70탈러를 모금해 주었다.
나는 어머니에게 첫 편지를 썼다. 환호하는 편지였다. 온 세상의 행복이 내게로
밀려들고 있었다.
어머니는 기쁜 나머지 편지를 모든 사람들에게 보여 주었다. 몇 사람은
놀라워했고, 다른 사람들은 미소 지었다.
시보니 씨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독일어를 배워야 했다. 오덴세에서 코펜하겐으로
올 때 함께 타고 온 어느 코펜하겐 여성이, 자신이 아는 어학선생에게서 공짜로 몇
시간 배울 수 있게 알선해 주었다. 그래서 나는 독일어를 배웠다. 시보니 씨는 네게
자기 집을 언제나 드나들 수 있게 해 주었다. 그러나 반년이 지나자 내 목소리는
변성기가 되었다. 아니면 겨울내내 변변히 신지도 못하고, 따뜻한 외투도 없이 지낸
까닭에 목소리가 상한 것인지도 몰랐다.
내가 훌륭한 가수가 될 전망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시보니 씨는 내게
정직하게 그것을 말해 주면서 오덴세로 돌아가 그 곳에서 수공업을 배우라고 충고해
주었다. 내 상상력의 풍요로운 색채로 실제 느꼈던 행복을 어머니에게로 그려
보냈던 나는 이제 오덴세로 돌아가서 웃음거리가 되어야 하다니!
이러한 생각에 고통당하면서 나는 으깨어지는 듯한 심정으로 서 있었다. 그러나
큰 불행처럼 보이는 곳에 보다 나은 상태로의 계단이 놓여 있었다.
버림받은 기분으로 그 곳에 서서 외로이 내가 뭘 시작해야 할 것인지 곰곰
생각하고 있을 때 내게 그토록 많은 호의를 베풀어 주었던 오덴세의 굴트베르크
대령의 동생인 시인이 코펜하겐에 살고 있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는 당시 시 외곽의 새로 단장한 교회 묘지 옆에 살고 있었다. 이 묘지를 그는
자신의 시에서 그토록 아름답게 노래했었다.
나는 그에게 편지를 써서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뒤이어 그를 찾아간 나는 그가
활기 넘치며 다정한 사람임을 알았다. 그는 나를 친절하게 맞아주었다. 그는 내
편지에서 내가 얼마나 글자를 틀리게 쓰고 있는지 알았으므로 내게 덴마크 어
수업을 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또한 독일어도 가르쳐 주겠다고 했다. 그는 당시
출간된 책의 수입 일부를 내게 주었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1백탈러 이상이
들어왔던 것으로 기억된다. 바이제 씨와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나를 후원해
주었던 것이다.
여관에서 사는 것은 내게 너무나 비쌌다. 나는 좀더 싼 집을 찾아야 했다.
세상 물정을 몰랐던 나는 코펜하겐에서 가장 악명 높은 거리에 있는 어느 과부의
집에 방을 얻었다. 그녀는 좋아하면서 나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내 주위에 어떤
세계가 돌고 있는지 예감하지 못했다.
그녀는 엄격하면서도 활동적인 여자였다. 그녀가 도시의 모든 다른 사람들을
어찌나 무시무시한 악인으로 묘사했던지 나는 그녀의 곁에 있으면 안전한 항구에
있는 듯한 생각이 들 정도였다.
나는 방 한 칸에 매달 20탈러를 지불해야 했다. 창문도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빈
식당을 방으로 썼다. 그러나 나는 그녀의 거실에 앉아도 좋다는 허락을 얻었다.
나는 우선 이틀 동안 그것을 시도해 보았다. 쉽게 사람을 사귀는 나는 그 동안
그녀가 좋아져서 마치 고향집에 있는 것처럼 느꼈다. 그러나 월 16탈러 이상을 낼
수는 없었다. 바이제 씨와 굴트베르크 씨로부터 받는 돈이 바로 이 액수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는 한 번도 그 이외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슬펐다.
주인 여자가 외출을 한 다음 나는 소파 위에 앉아 죽은 그녀 남편의 초상화를
보고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나는 아직 어린애였다. 눈물이 내 뺨위를 흘러내리자
나는 그 그림의 두 눈을 내 눈물로 발랐다. 내가 얼마나 슬픈지 그 죽은 남편이
느끼도록 하기 위하여, 그의 아내의 가슴에 영향을 미치도록 하기 위하여. 그녀는
내게서 더 이상 짜낼 수 없다는 것을 파악했음에 틀림없었다. 외출에서 돌아왔을 때
그녀는 계속 16탈러로 있게 해주겠다고 말했다. 나는 신과 그리고 그 죽은 남편에게
감사했다.
내가 살고 있는 집에 친절한 젊은 숙녀가 있었다. 혼자 살고 있는 그녀는 때때로
울었다. 매일 저녁 그녀의 늙은 아버지가 찾아왔기 때문이다.
나는 자주 그에게 문을 열어 주었다. 그는 눈에 띄지 않는 수수한 옷을 입고 목을
완전히 싸 감추고 모자를 눈 위에까지 내려쓰고 있었다. 그는 항상 딸과 차를
마셨는데 그 때에는 아무도 그 자리에 함께 있어서는 안되었다. 그가 사람을
싫어하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아버지가 오는 것을 진심으로 기뻐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여러 해가 흐른 후 어느 날 저녁 나는 불빛이 찬란한 홀의 한가운데로 훈장을 단
고상한 늙은 남자가 들어서는 것을 보았다. 바로 내가 문을 열어 주곤 했던 그
아버지였다. 그가 손님이었을 당시, 그는 내가 문을 열어 준다는 것도 눈치채지
못했을 것이다. 또 그 당시 내 편에서도 코미디 연극에만 온 정신이 쏠려 있었다.
즉 인형놀이를 하고 인형 옷을 깁는 데에만 열중해 있을 만큼 유치했던 것이다.
나는 여러 가지 헝겊을 얻기 위해 상점마다 돌아다니며 주인들에게 간청을 하곤
했다. 나는 단 한 푼의 돈도 없었다. 내 하숙집 여주인이 한 달 선불로 모든 돈을
가졌기 때문이다. 때때로 내가 달라고 할 때에만 그녀는 약간의 돈을 주었다.
그러면 나는 그 돈으로 종이나 혹은 코미디 책을 사는 데 썼다. 그럴 때면 나는
몹시 기뻤다. 또 굴트베르크 교수가 극장의 제일가는 희곡작가요, 대단히 선량하고
교양 있는 작가인 린드그렌씨로 하여금 나에게 수업을 베풀어주도록 주선해 주었을
때에는 정말 곱절이나 기뻤다. 그는 내게 헨드릭이나, 혹은 내가 특별한 재능을
보이고 있다고 사람들이 말한 바보 소년 같은, 홀베르그 연극의 여러 역할을
배우도록 해 주었다. 그러나 내가 진정 하고 싶었던 것은 위대한 화가 코레기오의
역할이었다. 린드그렌 씨는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엄숙하게 위대한 화가 코레기오의
역할을 흉내 낼 수 있겠느냐고 물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기어이 나 혼자
힘으로라도 이 역을 습득해도 좋다는 허락을 얻었다.
나는 코레기오의 화랑에서의 모놀로그를 어찌나 감정을 섞어 잘 암송했던지
린드그렌 씨는 내게, 이렇게 말을 할 정도였다.
"감정은 그대로 지니시오. 그러나 배우는 되지 마시오! 당신이 무엇이 될
것인지는 신만이 아시는 일이긴 하지만. 굴트베르크 교수와 의논해 보시오! 라틴
어를 좀 배우도록 해요. 그것이 대학생이 되는 길이니."
내가 대학생이 되다니! 그런 생각은 아직 내 머릿속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내게는
극장이 훨씬 가까이 있었고 또 그것이 더 좋았기 때문이다. 우선 나는 공짜로
독일어 수업을 해 주고 있던 아가씨와 그 문제에 관해 상의했다. 그녀는 라틴
어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비싼 언어이며, 그것을 공짜로 배우기는 불가능하다고
했다. 그 사이 굴트베르크 씨는 내가 그의 친구 한 사람에게 1주 몇 시간 라틴 어
수업을 받도록 주선해 주었다. 남성 무용수 달렌 씨였다. 그의 아내는 당시 덴마크
무대의 일류 예술가들 중의 한 사람이었다.
나는 자주 그의 집에 갔다. 그 부드럽고 다정한 부인은 내게 잘 대해 주었다.
달렌 씨는 나를 자신의 무용 학교에 받아 주었다. 그것은 내게 있어서는 연극
무대로 나아가는 또 하나의 발걸음이었다.
나는 오전 내내 긴 막대기처럼 다리를 뻗으며 서 있었다. 그러나 나의 굳은
의지에도 불구하고 달렌 씨는 내가 단역 배우 이상은 더 발전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래도 나는 얻은 게 있었다. 어느 날 저녁인가 무대 뒤편에 있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던 것이다. 단역들이 있는 칸막이 좌석의 맨 뒷줄에 앉아 있어도
되었던 것이다.
벌써 무대에 발을 들여놓은 것처럼 생각되었다. 그러나 나는 무대 위에는 아직 한
번도 선 적이 없었다.
오페레타 '두 명의 사보아 사람'이 공연되던 어느 저녁이었다.
시장 장면에서는 무대를 꽉채우기 위해 누구나 무대 위에 등장할 수 있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약간 분장을 하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행복한 기분으로 무대로
나갔다. 나는 늘 입던 옷을 입고 있었다. 견진 성사 때의 그 옷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솔질을 하고 수선을 했어도 그 옷은 초라해 보였다. 나는 또 얼굴을 덮는 큰
모자도 썼다. 나는 내 꼴이 우습다는 것을 의식하고 있었고, 내 모습을 감추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이 때문에 오히려 내 움직임이 도드라졌다. 내 짧은 조끼가 내
긴 몸체에 비해 너무 드러나지 않게 하려면 나는 가만히 서 있어서는 안 되었다.
사람들이 나를 웃음거리로 삼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나는 이 순간
난생 처음 조명을 받으며 무대에 등장했다. 그 때 당시에는 대인기를 끌었지만
지금은 잊혀진 가수가 나왔다. 그는 내 손을 잡더니 비웃으면서 내 무대 데뷔에
행운을 빈다고 말했다.
"제가 덴마크 관객에게 당신을 소개해도 되겠습니까?"
그는 말하면서 나를 조명 아래로 이끌었다. 사람들은 내 모습을 보고 웃었다.
나는 그것을 느꼈으며, 내 눈에 눈물이 고였다.
나는 그를 뿌리치고 무대를 떠났다. 그러나 그 후 곧 달렌 씨가 발레에서 단역을
하도록 해 주었다. 내가 맡은 것은 악마 역할이었다. 나는 이 발레의 인연으로 교수
하이베르크 여사를 알게 되었다. 시인의 부인이요, 지금은 덴마크 무대의 존경 받는
예술가인 그녀는, 그 당시 그 발레에 어린 소녀 역을 맡아 출연했던 것이다.
우리의 이름이 프로그램 종이 위에 인쇄되어 있었다. 그것은 내 일생에서 잊지
못할 순간이었다. 내 이름이 인쇄되다니! 나는 그 속에서 불멸의 후광을 보았다고
믿었다. 나는 그 인쇄된 이름을 보고 또 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날 밤 발레 프로그램을 손에 들고 잠자리에 들었다. 누워서 불빛에 내 이름을
읽었다. 나는 행복했다.
이제 나는 코펜하겐에서의 두 해째를 맞고 있었다. 나를 위해 모금되었던 돈은 다
쓰고 없었다. 그러나 나는 수치스러워서 결핍과 곤궁함을 고백할 수가 없었다.
나는 거처를 아침 커피만을 제공하는 어느 선원의 미망인 집으로 옮겼다. 어둡고
암울한 날들이었다. 하숙집 여주인은 내가 다른 집에서 식사하기 위해 외출한다고
믿었다. 그러나 나는 킬스베르그 공원 벤치에서 작은 빵을 씹고 있었다. 아주
드물게 허름한 식당에 가서 가장 멀찍이 떨어진 식탁을 골라 앉기도 했다. 버림받은
상태였으나 제대로 실감하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내게 친절하게 말을 거는
사람이면 모두 정직한 친구로 생각했다. 신은 내 작은 방에 함께 계셨고 저녁
기도를 올리는 저녁마다 나는 순진하게 신에게 물었다.
"곧 나아지겠지요?"
나는 1년 중 첫날의 상태가 그 해 내내 지속된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내
최상의 목표는 연극에서 배역을 얻는 것이었다. 바로 새해 첫날이었다. 극장은 문을
닫고 있었다. 반쯤 눈이 먼 늙은 수위만이 무대로 통하는 입구에 앉아 있었다.
무대에는 아무도 없었다.
나는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살짝 수위 곁을 지나 무대위로 올라가 무릎을 꿇고
아무도 없는 객석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시 한 줄 떠오르지 않았다. 나는 큰 소리로
'주기도문'을 외운 후, 새해 첫날 무대에서 객석을 향해 이야기했으니 올해에는 이
곳에서 더 많은 배역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 아래 그 곳을 나왔다.
코펜하겐에 온 두 해째에도 밖으로 나가 보지 못했다. 딱 한 번 동물원에 간 적이
있었는데, 이 곳에서 사람들의 다양한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세 해째 되던 어느 봄날 아침 나는 처음 밖으로 나갔다. 그 곳은 프리드리히
6세가 여름 별장으로 이용하던 프레데릭스베르그가 가르텐이라는 곳이었다.
나는 이제 막 싹트기 시작한 너도밤나무 아래 서 있었다. 태양이 잎들을 투명하게
만들고, 새들이 노래하고 있었다.
나는 이 풍경에 압도당하여 크게 소리를 지르고 내 양팔을 나무 둘레에 감고는
입맞추었다.
"미친 사람아냐!"
내 곁에서 어떤 남자가 말했다. 그는 이 궁정의 관리였다. 나는 놀라서 도망을
쳤다. 그리고는 풀이 죽은 채 시내로 되돌아왔다.
나중에 사귀게 된 친구 한 사람이 이 시절의 나를 처음으로 보았노라고 말해
주었다. 그것은 어느 부유한 상인의 살롱에서였는데, 사람들은 나를 놀리려고 일부러
자작시를 한 편 낭독해 달라고 청했다. 나는 몹시 감정을 섞어서 시를 낭송했다고
한다. 그래서 조롱하려던 기분은 동정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내가 대학에서 공부를 할 수 있으면 참 좋을 것이라고 말하는 소리를 들었다.
사람들은 내게 학문에 전념하라고 충고했다. 그러나 아무도 날 위해 한걸음을
내디뎌 주지 않았다. 목숨을 연명하는 것도 힘들어진 상황이었다. 그 때 비극을 한
편 써서 왕립 극장에 제출해 보아야겠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렇게 해서 돈을 받게
되면 나는 대학 공부를 시작하고 싶었다.
그 해 여름 내내 나는 극심한 고통으로 시달렸다. 그러나 나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만약 내가 조금이라도 내 고통에 대해 이야기하였더라면 내게 관심을 보여
준 많은 사람들은 틀림없이 내 고통이 덜어지도록 도와 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때의 내 사정이 어떤지 말하지 못하도록 거짓 거품이 나를 막고 있었다. 그래도
나는 행복감에 도취해 있었으니 그 때 처음으로 월터 스콧을 읽었던 것이다. 새로운
세계가 열리고 있었다.
나는 현실을 잊었다. 그리고 점심 비용을 도서관에서 책을 빌리는 데 썼다.
내게 제 2의 아버지가 되어 준 분은 지금의 상공회의소 고문인 콜린 씨였다. 또
그의 자식들과도 형제 자매처럼 지냈다. 나는 그 당시 처음으로 그를 보았는데, 그는
최고의 유능함과 고귀한 마음이 결합한, 덴마크의 가장 중요한 사람들 중 한
사람이었다. 나는 그를 존경했다. 그는 벌써 그때 왕립 극장 극장장이었다. 사람들은
그가 내게 관심을 가져 준다면 가장 좋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나는 난생
처음으로, 후일 내게 그토록 소중하게 될 그 집을 찾아가게 되었다.
코펜하겐의 제방이 확장되기 이전에 그의 집은 성문밖에 있었으며 스페인 공사의
여름 별장으로도 사용되었다. 지금도 약간 삐뚜름히 기울어진, 각이 진 그 집은
그대로 명망 높은 거리 그 곳에 같은 모습으로 놓여있다. 입구 쪽으로는 고대풍의
나무 발코니가 이어져 있고 마당과 뾰족한 합각 지붕 위로는 큰 나무가 초록색
가지들을 뻗치고 있었다. 그 집은 내게 내 부모님의 집이 되어야만 했다.
나는 처음에 콜린 씨에게서 상인 같은 느낌만을 받았다. 그는 몇마디하진
않았으나 진지했다. 관심은 기대하지도 않은 채 나왔다. 그러나 진정으로 나를
걱정해 주고 모든 사람들에게 나의 존재를 알린 사람은 바로 콜린씨였다. 그 당시
나는 그가 내 말에 귀기울이는 조용함을 이해하지 못했다. 곤궁하다는 나의 말에,
그의 가슴에서는 피가 끓고 있고 항상 열성과 행운으로 날 위해 영향을 끼쳐 주고
날 도와 줄 것을 다짐하고 있었는데도 말이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칭찬을 늘어놓은 내 제출 작품 '알프솔'에 대해 그는 어찌나
가볍게 언급했던지 그가 보호자라기보다는 적으로 생각될 지경이었다. 그러나 며칠
지나지 않아 나는 극장 관리부로 호출을 받았다. 그 곳에서 라베크 씨는 '알프솔'은
무대 공연에는 쓸모가 없는 작품이라고 돌려 주었다. 그러면서 그 작품 속에는 많은
황금 낟알이 들어 있으며, 내가 진지하게 공부를 하면, 언젠가는 덴마크 무대를 위해
작품을 쓸 수 있을 것이란 희망을 가져도 될 것이라고 덧붙여 주었다. 그는 내게
공연할 가치가 있는 작품을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격려해 주었다.
콜린 씨는 내가 수업을 받으며 생활해 갈 수 있도록 프리드리히 5세 왕에게
장학생으로 추천해 주었다. 왕은 몇 년 동안 매해 일정 금액을 장학금으로 주었다.
아울러 마침 활동적인 교장이 새로 부임한 슬라겔세의 라틴 어 학교에서도 콜린
씨의 주선에 의해 공짜 수업을 받기로 되었다. 나는 너무 놀라 벙어리가 될
지경이었다.
나는 내 인생이 이런 방향으로 흘러가리라고는 결코 생각해 보지 않았었다.
나는 코펜하겐에서 12마일 떨어져 있는 슬라겔세로 떠나게 되었다. 그곳은 시인
바게센 씨와 잉게만 씨가 학교를 다닌 곳이기도 했다.
나는 콜린 씨로부터 3개월마다 돈을 받았다. 그는 내 열성과 진도를 시험해야
하는 사람이었다. 두 번째 그에게 갔을 때, 나는 감사의 마음을 표시했다. 그러자
그는 부드럽고 다정하게 말했다.
"자네에게 부족한 것이나 또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모든 것을 숨김없이 써
보내게."
이 시간부터 나는 그의 마음 속에 뿌리를 박았다. 어떤 아버지도 그가 내게 해
주고 있는 이상의 것을 해 줄 수는 없을 것이다. 후일 내가 누리게 된 행운을
그보다 더 마음 속으로 기뻐해 준 사람은 없었다. 또 내 근심을 그보다 더 진정으로
함께 걱정해 준 사람도 없었다. 덴마크의 가장 유능한 인물 중의 한 사람이 나를
자기 친자식처럼 생각해 주었다고 말할 수 있어서 나는 정말 자랑스럽다.
어느 아름다운 가을날, 나는 우편 마차 편으로 코펜하겐을 떠났다. 슬라겔세에서
학교 생활을 시작하기 위해서였다. 내 옆에는, 한 달 전에 대학에서의 첫 시험을
치르고 이제 대학생이 된 모습을 보여 주기, 부모와 친구들을 만나기 위해 고향인
유틀란트로 가는 대학생이 앉아 있었다. 그는 이제 자기 앞에 놓여 있는 새로운
생활에 대한 기쁨으로 환호하고 있었다. 그는 내게, 그가 만약 나 같은 사정에 처해
있다면, 그래서 다시 라틴 어 학교에 다니는 일을 시작해야 한다면,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이 될 것이라고 단언했다. 그러나 나는 용기를 가지고 제란트의 그
작은 섬으로 여행했다.
어머니는 아마 나로부터 가장 행복한 편지를 받았을 것이다. 아버지와 늙은
할머니가 아직 살아 계셔서 내가 라틴 어 학교에 다니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이신다면 얼마나 좋으셨을까.
------
3
늦은 저녁 슬라겔세에 있는 여관에 도착하자, 나는 여관 여주인에게 이 도시에 볼
만한 것이 있는 지를 물었다.
"그럼, 새로운 영국제 소화기와 바스트홀름 목사님의 도서관이지."
여주인의 말처럼 그것들이 이 도시에서 주목해 볼 만한 전부였다.
두어 명의 창기병 장교들이 세련된 사교계를 이끌고 있었다. 어떤 집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학생의 성적이 올라갔는지 떨어졌는지 등의 것을 모두 빤히
알고 있었다. 총연습 때면 라틴 어 학교의 학생들과 시내의 하녀들에게 공짜로
입장을 시켜 주었던 사립극장이 대화의 풍성한 소재를 제공해 주었다. 그 곳은
숲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고 해안까지는 더욱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러나 중요 우편
도로는 시내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종종 우편 마차의 호각 소리가 울려 오기도
했다.
나는 교양 있는 계층의 점잖은 미망인 집에 하숙을 얻었다. 나는 배우려는 강한
의지를 갖고 있었지만, 바다에 내던져진 것처럼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파도가 한
차례 지나가고 나면 다음 파도가 뒤따랐다. 문법, 지리, 수학. 나는 그런 것들에게
압도당할 것처럼 느꼈고, 내가 이 모든 것에 결코 적응할 수 없을지 모른다는
공포에 사로잡혔다.
모든 사람을 비웃고자 하는 특이한 욕망을 가진 교장은 물론 나라고 해서 예외로
삼지 않았다. 그는 내게는 신성 그 자체처럼 그 곳에 서 있었다. 그가 내뱉는 모든
말을 절대적으로 믿었다. 어느 날 내가 그의 질문에 틀린 대답을 하고, 뒤이어 그가
날더러 바보라고 말했을 때 나는 콜린 씨에게 이 사실을 알리면서 사람들이 내게
베풀어 준 것에 대해 보답을 못할 것 같다고 토로를 할 정도였다. 그러면 콜린 씨는
나를 위로해 주었다. 나는 차츰 좋은 성적을 획득하기 시작했다. 선생님들은 내게
진심으로 잘해주었다. 그러나 잘해 나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점점 더 나
자신에 대한 신뢰를 잃고 있었다. 그러나 첫 시험에서 나는 교장의 칭찬을 얻었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기록부에다 기입해 주었다. 이 일에 기뻐하면서 나는 며칠 후
코펜하겐으로 왔다.
나의 발전을 알아차린 굴트베르크 씨는 친절하게 맞아 주면서 나의 열성을 칭찬해
주었다. 오덴세에 있는 그의 형님도 내가 모험을 떠난 이후 한 번도 가 보지 못한
내 고향을 다음 여름에는 다시 볼 수 있도록 비용을 약속해 주었다.
나는 발트 해협을 건너 걸어서 오덴세로 갔다. 고향에 가까워지고 오래된 높은
교회 종탑을 쳐다보자 내 가슴은 점점 부드럽게 녹아 갔다. 신의 보호를 가슴 깊이
느꼈다.
어머니를 만나자마자 나는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어머니는 행복해하셨고
이베르센 씨네 가족과 굴트베르크 씨네 가족도 모두 나를 진심으로 반겨 주었다.
작은 골목에서 사람들이 내 뒷모습을 보기 위해 창문을 여는 것을 보았다. 내가
기막히게 일이 잘 풀렸다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집 위에 높은 탑을 지어 놓은 가장 부유한 사람이 나를 초대해 그 탑으로
이끌었을 때, 도시와 그 주변을 내려다볼 수 있었다. 그리고 광장 아래쪽에서 내가
어릴 때부터 알고 있던 빈민 병원의 몇몇 불쌍한 여인네들이 날 올려다보았을 때
나는 진정 행복의 성벽 위에 서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내가 슬라겔세로
돌아가자마자 이 후광은 사라져 버리고 이에 대한 생각도 모두 사라져 버렸다.
나는 행동 및 태도와 관련하여 기록부에 항상 '대단히 우수함'의 성적을 얻었다.
언젠가 한 번은 그냥 '우수함'의 성적을 받는 일이 일어났다. 그 때문에 나는 콜린
씨에게 편지를 쓰고 '우수함'의 성적을 받은 것은 전혀 내 잘못이 아니라고 진지하게
단언을 할 만큼, 나는 걱정 많고 유치한 아이였다.
교장 선생님은 슬라겔세에 머무는 것에 싫증을 내고, 헬싱괴르에 있는 라틴 어
학교의 임기가 다 된 교장의 후임을 간청하여 그 자리를 얻었다. 그는 내게 그
이야기를 해 주면서 내가 자신을 따라 그 곳으로 가도 좋으며 자신의 집에서 살 수
있다는 것을 콜린 씨에게 써도 좋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당장 이사와도 좋다고
말하였다. 그러면 나는 1년 반 후에 대학생이 될 수 있을 것이며 그 같은 일은 내가
그 곳에 남아 있으면 일어 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면 그가 직접 내게 라틴
어와 그리스 어를 몇 시간씩 개인 수업해 주겠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교장은
직접 콜린 씨에게 편지를 썼다. 이 편지는 ^6,36^후일 내가 보게 되었지만^36,3^
나의 열성과 진도와 훌륭한 능력에 대한 최상의 칭찬을 담고 있었다. 내 능력에
대해 말하자면, 나는 전혀 잘못 생각했고, 그 능력의 결핍 때문에 자주 울었다. 나는
교장 선생님이 나를 그토록 좋게 평가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전혀 아무런 감도
잡을 수 없었다. 만약 그가 내게 그것을 표명해 주었더라면 나는 고무 받고 기운을
얻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와 반대로 그는 끊임없이 나를 비난하여 나의 기를 꺾어
놓았던 것이다.
나는 물론 즉각 콜린 씨의 허락을 얻었다. 그래서 교장 선생님의 집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 곳은 내게는 불행의 집이었다.
나는 그를 따라 헬싱괴르로 옮겨 갔다. 한 번도 1마일 이상 넓이를 가져 본 적이
없고 마치 덴마크와 스웨덴 사이의 부풀어오른 푸른 강처럼 보이는 외레준트에
밀접해 있는, 덴마크의 가장 아름다운 곳의 하나인 그 곳으로.
온갖 국적의 배들이 수백 척씩 그 곳을 지나갔다. 겨울이면 얼음이 얼어 나라들
사이에 단단한 다리를 놓아 주었고, 봄이 되어 얼음이 깨어질 때면 그것은 마치
떠내려가는 빙하와도 같았다.
이 곳의 자연은 내게 생생한 인상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나는 몰래 그 자연을
훔쳐보아야 했다.
학교 시간이 끝나면 대개 집의 문이 닫혀져 버렸다. 나는 후덥 지근한 공부방에
앉아서 라틴 어를 배우거나 아이들과 놀거나 아니면 내 작은 방에 들어앉아
있어야만 했다. 집 밖으로 놀러 나갈 수가 없었다. 이 집에서의 생활은 내 기억의
가장 어두운 부분을 차지한다. 나는 거의 질식할 지경이었다. 저녁마다 신께 올리는
기도에서 이 성찬을 거두어 차라리 죽음을 내리게 해 달라고 빌었다. 나는 나
자신에 대한 어떠한 믿음도 가질 수가 없었다. 교장이 나를 조롱하고 내 감정을
우스꽝스럽게 만드는 데서 즐거움을 느낄 때, 그것이 얼마나 내게 심한 일인가를
나는 결코 편지에서 발설한 적이 없었다. 나는 나 자신을 제외하고는 그 어느
누구도 탓해 본적이 없었다.
"저 자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거야. 저 환상적인 작자는 현실에 적응하지
못한 거야."
코펜하겐 사람들이 이렇게 말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시절 콜린
씨에게 가는 내 편지는 그토록 음침하고 절망적인 분위기를 띠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콜린 씨의 마음을 깊이 감동시켰다. 그러나 그는 나를 도울 수가 없었다.
사람들은 그 이유가 내 내면의 문제 때문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내 감정은 몹시
탄력성이 있었고, 모든 햇빛을 받아들일 용의가 있었다. 그러나 코펜하겐으로 여행
허가를 얻는 휴일만 이 감정 속으로 살짝 빠져 들어갔다. 코펜하겐의 집으로
돌아가는 그 며칠 동안은 얼마나 굉장한 변화가 일어났던가!
모든 우아함과 청결함, 교양 갖춘 세계의 안락함이 있는 코펜하겐의 집으로!
그러나 나는 며칠 후면 다시 교장에게로 돌아가야 했다.
교장은 코펜하겐에서 막 돌아온 참이었는데, 내가 그 곳에서 자작시를 낭독했다는
소리를 들었다고 했다. 그 시를 가져오라고 했다. 그가 그 시에서 문학의 불꽃을
발견한다면 날 용서해 주겠다는 것이었다.
나는 떨면서 시 '죽어 가는 아이'를 가져갔다.
그는 읽고 나더니 그것은 감정의 장난이며 시시덕거리는 잡담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그는 노골적으로 화를 냈다. 내가 시를 쓰는 것으로 시간을 헛되이
낭비하고 있다는 믿음에서 그가 나를 비난했더라면 괜찮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것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이날부터 나는 더욱 불행해졌다. 정신적으로 어찌나 고통을 받았던지 거의 파멸할
지경이었다. 내 인생에 있어 가장 음울하고 불행한 시기였다. 그 때 마침 교사 한
사람이 코펜하겐으로 여행을 하게 되어 콜린 씨에게 내 사정이 대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이야기해 주었다. 그리고 그가 임시로 날 학교에서 그리고 교장의
집에서 빼내어 주었다.
교장과 작별하면서, 내가 받았던 호의에 감사하다고 말했을 때 이 격렬한 남자는
나를 저주하면서 내가 결코 대학생이 될 수 없을 것이며, 시는 서점 바닥에서
먼지가 앉고, 나 자신은 정신 병원에서 생을 마감하게 될 것이라는 말로 끝을
맺었다. 나는 마음 속 깊이 충격을 받으면서 그를 떠났다.
여러 해가 지난 후 내 작품들이 사람들에게 읽혀지고 '즉흥시인'이 출간되었을 때,
코펜하겐에서 그를 다시 만났다. 그는 내게 화해하는 태도로 손을 내밀면서 나를
잘못 생각했으며 잘못 판단했노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제 내게는 아무 상관이
없다고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그 어둡고 암울하던 날도 내 인생에 축복을 가져다
주었던 것이다.
북방 언어 및 시에 대한 열성으로 후일 덴마크에서 명성을 얻게 된 젊은 남자가
내 선생님이 되었다. 나는 작은 다락방을 빌려 살았다. 그 방은 '바이올린'에
묘사되어 있다. 또한 '그림 없는 그림책'을 읽으며 사람들은 알 수 있을 것이다.
내가 그 곳에서 자주 달의 방문을 받았다는 것을 말이다.
나는 나를 후원하는 사람들로부터 일정한 금액을 받을 수 있었다. 이제 수업료도
지불해야 했다. 다시 말해 다른 방식으로 절약을 해야 했다. 몇몇 가정이 내게
그들의 식탁에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주 중에 그 식탁들은 모두 자리가 찼다. 나는
당시 많은 코펜하겐의 가난한 대학생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일종의 '밥 먹으러 오는
사람' 이었다. 여러 가정의 다양함을 들여다보는 것도 기분 전환이 되었다.
나는 열심히 공부했다. 헬싱괴르에서는 특히 수학에서 아주 우수한 성적을
얻었다. 따라서 이 과목들은 이제 나 스스로에게 맡겨졌고 모든 것은 그리스 어와
라틴 어에서 뒤떨어진 것을 보충하는데 집중했다.
그러나 또 하나의 방향에서 ^6,36^아마도 사람들은 믿을 수 없겠지만^36,3^ 많이
도와 주어야겠다고 탁월한 선생님은 생각했는데, 그것은 바로 종교 과목이었다. 그는
엄격하게 성서의 말씀을 지키고 있었다. 성경은 나도 잘 알고 있었다. 학교에 처음
들어가면서부터 나는 성서에서 말하고 가르치는 모든 것을 생생하게 받아들였다.
신은 사랑이라는 것을 감정과 개념으로 파악했다. 이에 반대하는 모든 것, 영겁의
불이 지속되는 지옥을 나는 인정하지 않았다.
교실 의자 위의 억압 받는 존재로부터 벗어나자 나는 모순으로 뒤죽박죽이
되었다. 나는 마치 자연인인 것처럼 말을 했다. 아주 고귀하고 사랑스러운, 그러나
철저하게 글자 그대로의 성경을 믿고 있던 선생님은 자주 나를 걱정하게 되었다.
우리는 똑같이 순수한 불길을 가슴에 담은 채 논쟁을 했다. 이 더럽혀지지 않고,
재능 있는 젊은 사람과 만난 것은 내게는 참으로 잘된 일이었다.
이즈음 덴마크 문학에는 신선한 물결이 지나가고 있었다. 국민들은 문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에 비하면 정치는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했다. 탁월한 작품인
'사이코'와 '도공 발터'로 인정 받고, 시인이라는 명성까지 얻은 하이베르크가 덴마크
무대에 보드빌(프랑스에서 생긴 통속 가극)을 끌어들인 것이다. 그것은 덴마크 식
보드빌이었다. 그 때문에 그것은 환호와 함께 받아들여졌고 다른 모든 것을 거의
몰아내 버렸던 것이다. 탈리아가 덴마크 무대에 사육제를 개최했다면, 하이베르크는
덴마크 무대의 비서 격이었다.
나는 외르스테드 근처에서 처음으로 그와 알게 되었다. 세련되고 말 잘하고 그
당시의 영웅이었던 하이베르크는 나를 높게 평가하여 말을 걸어 주었다. 그는
친절하게 대해 주었으며 나는 그를 방문하게 되었다.
그는 나의 해학에 찬 시들을 가치 있다고 판단, 주간지 '날으는 우편마차'에 실어
주었다. 그보다 바로 직전에 시 '죽어 가는 아이'가 어느 신문에 실리게 할 수
있었다. 평소 보잘 것 없는 작품들을 잘 받아들이던 그 수많은 잡지 발행인들 어느
누구도 나같은 학생의 시를 실어 줄 용기를 갖지 못했다. 그래서 당시 나의 가장 잘
알려진 시는 일종의 사과문과 함께 게재될 수밖에 없었다.
하이베르크는 이것을 알고, 자기 신문의 명예로운 자리를 내게 내 주었던 것이다.
두 편의 해학적인 내 시는 'h'라는 이니셜로 제대로 데뷔를 한 셈이었다.
나는 '날으는 우편마차'가 내 시를 싣고 나왔던 그 첫날 저녁을 기억한다. 나는,
내게 잘해 주었으나 나의 시인 기질을 하찮은 것으로 여기며, 시 한줄 한줄마다
비난을 하는 사람의 집을 방문하고 있던 중이었다. 주인 남자가 '날으는 우편마차'를
손에 들고 들어왔다.
"오늘 저녁 두 편의 우수한 시가 실려 있어. 하이베르크의 시야. 다른 어느
누구도 그런 것을 쓸 수가 없어."
그리고 그 시를 열광하여 낭송했다. 내가 몰래 숭배하던 이 집의 딸이 그것을
지은 사람이 나라고 기뻐하며 외쳤다. 그러자 모든 사람들이 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그것은 내 마음을 매우 아프게 했다.
1828년 9월, 나는 대학생이 되었다. 시험을 끝내자 수천 가지의 아이디어와
생각들이 흡사 벌떼처럼 쏟아져 나왔다. 특히 내 처녀작 '아마크로가는 도보여행'
속에 잘 묘사되어 있다. 어떤 서적상도 그 작은 책을 출판해 주려고 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자비로 출판을 감행했으며 그것은 나오자마자 며칠 만에 다 팔리고
말았다. 서적상 라이제 씨가 두 번째 판권을 샀다. 뒤이어 그는 제3판을 찍어 냈다.
그 책은 스웨덴에서도 출판이 되었다. 모두가 그 책을 읽었다. 나는 환호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나는 '대학생' 이었으며 내 최고의 목표에 도달해 있었다. 나는 기쁨에
도취되었다. 이러한 도취 속에서 나는 운율을 맞춘 시로 된 내 최초의 희곡
'니콜라이 탑 위에서의 사람' 혹은 '1층 좌석 사람들은 뭐라고 말하나요?'를 썼다.
이 작품은 우리에게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을, 즉 기사극을 풍자함으로써
실패하고 말았다. 그 외에도 이 작품은 보드빌에 대한 열광을 조롱하고 있었다.
함께 공부하는 동료 학생들은 그 작품을 환호하면서 받아들였다. 그들은 나를
자랑스러워했다. 나는 그 해에 덴마크 무대에 작품을 올린 두 번째 동창생이었다.
나와 같은 대학생이었던 아르네젠이 보드빌 '민중 극장에서의 음모'를 썼던 것이다.
이 작품은 장기 공연목록에 올라가 있었다. 우리는 10월의 두 젊은 작가였고, 이
학기가 배출한 열여섯 시인 가운데 두 명이었다. 사람들은 농담으로 이 열여섯을
네명은 크고 열두명은 작다고 분류했다.
이제 나는 행복한 사람이었다. 시인의 용기와 젊음의 감각을 지니고 있었다. 모든
집들이 내게 문을 열기 시작했다. 나는 이 서클에서 저 서클로 날아다녔다. 그러나
나는 또한 상당히 배짱을 가지고 공부를 했기 때문에 1829년 9월 문헌학과 철학
시험에 좋은 성적으로 합격하고, 많은 갈채를 받은 내 처녀 시집을 출간할 수
있었다. 생은 햇빛을 받으며 내 앞에 놓여 있었다.
시인이 된 나는 소위 이 나라의 제1급 가정들에게 친절하고 다정한 사람들을
만났다. 그들은 나의 좋은 점을 높이 사주고 그들의 교제 범위에 나를 받아 주었다.
또 그들의 행복하고 풍요로운 여름 휴가에 나를 참여하도록 해 주었다. 나는 그
곳에서 자연과, 숲의 고독, 시골 생활에 나 자신을 내맡길 수가 있었다. 그 곳에서야
비로소 나는 제대로 된 덴마크의 자연 속에 들어가 살 수 있었다.
그 곳에서 동화의 대부분을 지었다. 나를 둘러싼 자연, 그리고 내 속의 본성이 내
직업에 관해 설교를 해 주었다. 옛 기셀펠트의 들판 위에서, 예전의 수도원에서,
깊은 고독의 한가운데에서, 호수와 언덕과 함께 행복한 날들을 보냈다. 성의
소유주이며 아우구스텐부르크 공작 부인의 어머니인 단네스크욜트 백작 부인은
참으로 훌륭하고 사랑스러운 부인이었다. 나는 민중의 가난한 어린아이가 아니라
친절하게 받아들여진 손님이었다. 지금은 자연 속에 있는 그녀의 무덤에
너도밤나무들이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기셀펠크보다 더 풍요로운 녹지가 있는 브레겐트베드도 있었다. 덴마크 재무상
몰트케 백작의 소유다. 우리 나라에서 가장 풍요롭고 아름다운 영지 중의 하나인 이
장소에서 내가 누렸던 손님으로서의 자유, 그리고 나를 둘러싸고 있던 행복한 가정
생활은 내 생 위에 비치는 햇빛을 더욱 넓게 만들어 놓았다. 어쩌면, 혹 내가 이
이름들을 강조하여 자랑하려는 것처럼, 혹은 내가 이 이름들에게 감사의 말을
늘어놓으려는 것처럼 비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들은 그런 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또 만약 내가 그러한 의도를 갖고 있다면 나는 더 많은 이름들을
언급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 두 장소와 또 토르발센 씨에 의해 유명해진
슈탐페 남작 소유나 니제만을 언급하려 한다. 그 곳에서 나는 그 위대한 예술가
토르발센 씨와 함께 지냈다. 내 젊은 시절의 가장 값진 친구이며 후일의 소유주인
사람과 우정을 맺었던 것이다.
이 여러 가지 다른 범주에서의 생활은 내게 큰 영향을 미쳤다. 영주들에게서도,
귀족들에게서도, 또 아주 가난한 민중들에게서도 고귀하며 인간적인 것을
발견하였다. 선량함에 있어 우리 모두는 같다!
덴마크의 겨울 역시 아름답고 풍요롭다. 그 때에도 나는 시골에서 며칠을 보내며
자연속에서의 본래적인 것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1년 중 가장 많은 시간은
코펜하겐에서 지냈다. 사랑스러운 아이들이 자라고 있는, 콜린 씨의 결혼한 아들
딸들의 집에서 나는 고향에 온 듯이 느꼈다. 천재적인 작곡가 하르트만과의 우정도
해가 갈수록 돈독해졌다. 그의 집에는 예술과 자연의 싱싱함이 꽃피어 있었다.
실제 생활에 있어서 내 충고자가 콜린 씨였다면 새로운 작품에 있어서의 충고자는
외르스테드 씨였다. 극장은 내가 매일 저녁 찾아가는 클럽이 되었다. 바로 이 해에
나는 소위 궁정 1층 관람석에 자리 하나를 얻었다. 그것은 물론 내 자신의 노력으로
얻을 수 있었다.
첫번째 작품이 받아들여지고 나면 1층의 최하층 좌석을 얻는다. 두 번째 작품
후에는 연극 배우들의 자리인 공짜 1층석에, 그리고 세 개의 큰 작품이나 여러 개의
작은 작품들이 받아들여지고 나면 작가는 번호가 매겨진 일등 좌석까지 나아가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토르발센이나, 외렌슐레거 등 몇몇 나이 든 시인들을 만날 수
있고 나 역시 1840년 일곱 작품을 공연한 후에 이 곳에 자리 하나를 차지했던
것이다. 토르발센 씨가 살아 있었을 때 나는 그의 요청에 따라 자주 그의 옆자리에
앉곤 했다. 외렌슐레거 역시 나의 다정한 이웃이었다. 그리고 많은 저녁 시간,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겠지만) 이 위대한 두 정신 사이에 앉아 있으면 경건한
겸손함이 내 영혼을 뚫고 지나가는 것이었다. 지난 날의 내 인생이 눈앞을 떠돌며
흘러간다.
내가 단역 배우들의 맨 뒷자리에 앉아있던 때도, 또 유치하게 미신에 잠겨 어두운
저 무대 위에 무릎을 꿇고 바로 지금 내가 최상급의 중요한 인물들 사이에 앉아
있는 이 자리 앞에서 주기도문을 외웠던 시절도 흘러간다. 만약 나의 동료가 나를
보고서, 저기 두 위대한 정신들 사이에 안데르센이 오만하고 자랑스럽게 앉아
있다고 판단한다면 그는 얼마나 날 잘못 판단하고 있는 것인가!
내 마음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은 겸손함이요, 내 행복을 벌어들일 힘을 달라는
신에게의 간구일 뿐이다. 신이여, 항상 제게 이 감정을 허용하소서! 나는
토르발센에게서도, 오렌슐레거에서도 우정을 발견하였다. 북방의 지평선 위에 있는
이 중요한 두 별에게서 말이다. 내 마음 속에 있는, 그리고 날 둘러싸고 있는 두
분의 반사광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1843년 성탄절, 나는 동화집을 출간함으로써 덴마크에서 인정을 받게 되었다. 그
때부터 나는 한탄할 이유가 없게 되었다. 나는 내가 벌어들인 것을, 아니 더 이상의
것을 내 고향을 위해 쓰기도 했다. 나는 내가 지금까지 써온 모든 것 덴마크에서
절대적으로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은 이 문학에 나의 온 힘을 쏟았다.
맨 처음 출간된 책에서 나는, 어렸을 때 들었던 전래 동화를 이야기하였다. 그
책은 나 자신의 독창적인 동화로 끝을 맺고 있다. 그 동화는 호프마(독일
낭만주의의 작가)의 동화와 상당히 비슷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심금을
울린 것은 바로 이 동화인 것 같다.
따라서 나는 점점 더 동화 쪽으로 기울어지게 됨에 따라 대부분의 동화를 나
스스로 창작하고자 했다. 그 다음 해에 새로운 동화책이 나왔고 뒤이어 곧 세 번째
동화책이 나왔다. 그 속에 들어 있는 상당히 긴 동화 '인어 공주'는 나의
창작품이었다.
이 동화로 인해 사람들의 관심이 특히 높아졌고 다음에 나오는 동화집들에 대한
관심도 높아졌다. 매해 크리스마스 때마다 새로운 동화집이 나와서 나의 동화집이
걸리지 않는 크리스마스 트리는 없을 지경이 되었다. 일급 희극 배우들 중 몇몇은
내 동화 하나하나를 무대에서 관객들에게 이야기해 주는 시도를 하기도 했다.
그것은 지겨울 정도로 많이 들은 시 낭송으로부터의 전환이기도 했다. 이렇게 하여
'꿋꿋한 장난감 병정' '돼지치기 소년' '사랑하는 연인들'이나 동화가, 왕립 극장이나,
사립 극장의 무대에 올려져 좋은 반응을 얻었다.
동화를 이야기하는 방식을 고려하여, 독자를 올바른 관점으로 이끌기 위하여 나는
첫 동화집에다 "어린이에게 들려 주는 동화"라는 제목을 붙였다. 직접 어린이들에게
이야기로 들려 준다는 기분으로 종이 위에 옮겨 썼다. 그렇게 하자 여러 연령층의
사람들이 좋아하게 되었다.
어린이들은 내가 장식물이라 부르고 싶은 것을 특히 재미있어 하였다. 그에 반해
나이 든 사람들은 보다 깊은 이념을 담고 있는 작품들에 관심을 가졌다.
동화는 어린이와 어른들이 모두 읽는 장르가 되었다. 그리고 이 사실은 동화를
쓰려는 사람들에게 어려운 과제를 안겨 주게 되었다. 동화는 덴마크의 열려진
가슴들을 찾았다. 누구나가 그것을 읽었다. 그래서 나는 "어린이들에게 들려 주는"
이라는 수식어를 지웠다. 그리고 모두 내가 창작한 세 권의 새로운 동화집을
내놓았다. 이들은 모두 내 조국에서 큰 호응을 얻었다. 나는 더 이상의 것을 바랄
수가 없다.
동시에 나는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그토록 명예로운 평가가 정당화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불안을, 아니 공포를 느꼈다. 가슴을 시원하게 해 주는 한 줄기 햇빛이
나를 뚫고 들어온다. 나는 용기와 기쁨을 느끼고 더욱 이 방향으로 나를
발전시켜야겠다는 생각과 동화의 본질 속으로 뚫고 들어가서 내가 길어 퍼 올려야
할 동화의 원천과 본질을 더욱 깊이 주의해야 겠다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다.
나는, 예술과 인생이 내게 분명해지면 해질수록 더욱 많은 햇빛이 바깥으로부터
내 영혼으로 뚫고 들어오는 행복한 체험을 하였다. 어두웠던 젊은 시절에 비해
지극한 축복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내 마음을 뚫고 들어온 것은 확신과 안정이었다. 게다가 그 안정감은 가끔씩 하는
여행과 잘 조화를 이루었다. 나는 어디에 가나 집에 있는 것처럼 느꼈다. 사람들과
쉽게 사귀었고 그러면 그들은 신뢰와 다정함을 되돌려 주었다.
나는 올덴부르크에서 동화를 여러 차례 독일어로 낭독했다. 물론 도처에서 덴마크
어로 읽을 수 있었다. 그리고 덴마크 어로 읽어야 낭독이 가질 수 있는 조명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덴마크 어에는 번역이 재생시킬 수 없는 언어의 힘이 놓여 있다.
독일어로 읽으면 동화는 내게 좀 낯선 것이 되어 버린다. 낭독할 때 나의 영혼을
독일어 속에 옮겨 놓은 것은 어렵다. 또 나의 독일어 발음도 너무 부드럽다. 그래서
단어 하나하나를 발음할 때마다 그것을 목구멍 밖으로 내오기 위해 마치 달리기 할
때의 도움닫기를 해야 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래도 독일 어디에서나 나의 독일어 동화 낭독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동화
낭독에서 외국어 발음이 가장 많이 허용되었다고 믿고 싶다. 여기서 외국적이란
것은 거의 순진성이라는 말과 동의어일 정도로 크게 중요치 않다. 그것은 오히려
낭독에 자연적인 색채 효과를 부여해 주었다. 어디에서나 나는 탁월한 남자들과,
재치 있는 여성들이 관심을 가지고 따르는 것을 보았다. 사람들은 내게 읽어 달라고
간청하였고 나는 기꺼이 그렇게 하였다.
이 시간까지의 내 인생의 동화가 내 앞에 펼쳐져 있다. 그토록 풍요롭고
아름답게. 나는 아무리 애를 써도 이렇게 창작할 수는 없을 것이다. 나는 내가
행운아라고 느낀다. 내가 만난 거의 모든 사람들이 내게 마음을 열고 다정하게 맞아
주었다. 인간에 대한 신뢰가 실망으로 변하는 일은 드물었다. 영주에서부터 아주
가난한 농사꾼에 이르기까지 나는 고귀한 인간의 가슴이 뛰고 있는 것을 느꼈다.
산다는 것, 신과 인간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의 즐거움이다.
내가 사랑하는 친구들 사이에 앉아서 하는 것처럼 그렇게 나는 솔직하게 모두를
믿으면서 나 자신의 살아온 동화를 이야기하였다. 내 행복은 물론 근심도
털어놓았다. 마치 신 앞에 털어놓듯이 내가 누린 경의와 인정에 대한 기쁨을
토로하였다. 그것이 허영심일까? 그렇게는 생각되지 않는다. 내 감정은 격해
있으면서도 동시에 겸손하다. 나는 신에게 감사를 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