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군포교와 불교학과 동문의 역할
함현준 82/육군사관학교 군종실장
Ⅰ. 緖 言 - 한국불교 내일을 밝힐 희망, 군불교
Ⅱ. 군불교의 역사
Ⅲ. 군불교의 성장과 발전
Ⅳ. 불교학과 동문들의 군포교 역할과 비중
Ⅴ. 結 語 - 불교학과를 중심으로 한 군포교 활성화 방안
Ⅰ. 緖 言 - 한국불교 내일을 밝힐 희망 군불교
동국대학교가 불교정신을 바탕으로 학술과 인격을 연마하고, 지혜와 자비를 충만케 하여 서로 신뢰하고 공경하는 이상세계의 구현을 건학이념으로 하고 있음은 이미 주지의 사실이며 그 건학이념을 가장 충실하게 구현하고자 설립된 학과가 바로 동국대학교 불교대학 불교학과라는 데에는 그 누구도 이견이 없을 것이다.
불교학과는 그간 세계 인류에 널리 보급되어 찬란히 발전해 온 불교의 역사문화와 심오한 사상체계를 연구하여 이상세계를 제시하며 창조적인 생활 선도에 헌신하는 인재를 배출해 왔다. 그리하여 이들은 불교계 안팎에서 종무행정, 종립학교의 교법사 및 종교교사, 각 군의 군법사, 사회복지사업가, NGO 활동가, 학계 교계 언론 및 미디어계 등에 진출 하여 다종다양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
그러한 불교학과 졸업생의 진출 분야가운데 단일직군가운데 가장 많은 졸업생들이 활동하고 있는 분야가 바로 군포교 분야이다. 한국불교의 미래를 밝힐 희망이라 불리고 있는 군불교계에 활동하고 있거나 활동했던 불교학과 학부와 대학원 출신의 군법사, 군종병, 군포교사 등은 정확한 수치 통계 확인이 쉽지 않은 상황을 감안하더라도 대략 600여명이 넘을 것으로 추산된다.
그 가운데에서도 군포교의 핵심주체인 군법사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군포교는 불교학과 출신 군법사가 최초로 파송된 1968년부터 지금까지 48년의 세월동안 실로 괄목할 만한 성장세를 이루어 왔으며, 특히 불교학과 출신 동문들이 주역이 되어 활약한 군불교가 지금까지 군포교역사에 큰 중심축이 되어 커다란 흐름을 만들어 왔다는 점은 자부와 긍지를 가져도 좋을 것이다.
본 발표에서는 불교학과 출신 동문들의 활동상을 중심으로 군불교의 역사와 현황을 살펴보고 나아가 불교학과를 중심으로 하는 군포교의 발전방안을 모색해 보고자 한다.
Ⅱ. 군불교의 역사
1) 군불교의 여명기 - 군종제도의 탄생과 불교계의 활동
군내(軍內)의 불교포교는 한국전쟁의 포연 속에 있던 1951년 3월 7일 불교종군포교사회의 창립으로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불교종군포교사회는 6·25 이전부터 군부대를 출입하면서 설법, 위문 등으로 장병교화에 힘을 기울여 왔던 오관수(경남교무원포교사) 스님을 비롯하여 백운봉(부산 길상사 주지)스님, 임영수(부산 복천사 주지)스님, 이법홍(부산 금수사 주지)스님 등 15명으로 구성되었는데 한국전쟁 당시 임시수도였던 부산 묘각사에 총본부를 두고 출범하였다.
불교종군포교사회는 취지문을 통해 “우리들 뜻있는 동지들을 모아 만시지탄(晩時之歎)이 무변하나마 성전(6·25동란을 칭함)에 이바지하기 위하여 교계를 대표하여 무고히 돌아가신 영령들을 위로하고 도탄에 헤매는 국민의 정신적 위안자가 되어 싸우는 조국의 멸공통일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까 하여, 나아가서는 대한불교를 부흥하여 세계 불화(佛化) 운동의 굳센 걸음을 내딛고자 조직하노라.”고 설립의 의미를 공포하였다.
또 불교는 호국이족(護國利族)에 이바지하자, 불교는 멸공통일의 전위가 되자, 불교는 민족화를 강조하자는 3개 항의 강령을 내세우며 휴전이 발표된 1953년 7월까지 적극적인 활동을 전개하였다.
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5월 6일, 군종포교사회는 국방부장관에게 불교의 군종포교의 필요성과 허락을 요청하는 건백서(建白書)를 제출하였다. 종군포교사들의 신분보장을 위해 소령급 이상의 문관증을 발급할 것과 국방부 군목과(軍牧課)를 군신국(軍信局)으로 개칭하는 등을 요망하는 건백서를 제출하여 군종제도에 불교가 동등하게 참여할 것을 희망하였으나, 당시에는 군종활동을 허락받는 정도에 그치고 말았다.
군종제도는 1950년 12월 21일 종군목사의 군부대 활동에 관한 대통령 비서실 지시 제29호에 따라 1951년 2월 7일 육본 일반명령 제31호로 육군본부 인사국 내에 군승과가 설치되면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1951년 4월 14일 군승과는 군목과로 개칭되었다. 종군 목사들은 처음에는 무보수 촉탁이었으나 1952년 6월부터 유급문관으로 바뀌었다.
해군본부는 1950년 12월 10일 군목실을 두고 군종업무를 실시해 왔으며, 공군은 1952년 3월 30일 군종제도를 창설하였다. 군종제도는 당시 UN군 군목을 포함한 외국인 선교사들이 대통령에게 요청해 이루어져 불교는 활동은 있었으나 공식적인 군종제도안에 편입되지 못한 채 배제되며 군종제도가 시작되었다.
휴전 후에도 불교는 군종제도에 참여하지 못하였지만, 자연발생적으로 군대 내에서 불교활동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이 가운데 특히 육, 해, 공군의 사관학교 불교활동은 매우 활발하였다. 육군사관학교의 불교활동은 학교가 진해로 내려가 있을 때부터 시작되었으나 태릉으로 육사가 이전한 후 1954년 서울 3월에 공식적으로 불교부가 조직되었다. 당시 중대장이었던 유상종 대위(예비역 육군 준장)는 초대 불교부 지도장교를 맡아 헌신적인 노력으로 육사불교부를 크게 활성화 시켰다.
1959년 10월에 해군사관학교 불교부가 조직되었고, 1960년 10월에는 사관생도불자들이 3군사관학교 체육대회를 마치고 조계사에 모여 제1회 3군사관학교 연합대법회를 봉행하여 군포교의 당위성을 세간에 알리게 되면서 군종승제 실시에 대한 문제를 군 내외에 대두시켰다. 이 일을 계기로 군 내 불자들이 자체적으로 불교회를 조직하고 불교계에서도 군내의 불교활동에 많은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였다.
청담스님을 비롯해 능가스님, 추담스님, 광덕스님, 청하스님 등 당시 포교 원력을 가진 스님들은 군부대를 방문하고 위문과 지원활동을 통해 군포교가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이 같은 활동들이 뒷받침되어 1960년대에 이르러 군승파견의 필요성이 강하게 대두되기 시작했다.
2) 군불교의 개척기 - 월남전 참전과 군법사 제도의 태동
군종승제도의 실시여부가 종단문제로 본격화되기 시작한 것은 1964년 12월, 조계종 총무원은 국방부 군종승제도의 실시를 요청하는 청원서를 제출했으나 국방부로부터 어떤 대답도 얻지 못하였다. 이에 총무원은 1965년 2월, 국방부, 국회, 청와대에 2차 청원서를 내고 군종승제도의 실시를 촉구하였다.
그 해 3월 마침내 국회 국방위원회는 군종승제도의 설치 청원에 대한 심의회를 열고, 군종승제도의 설정을 위하여 향후 1년간 군종승제도 연구 기간으로 정하여 불교관계 업무를 연구·검토 한다는 것과 본 기간 중에 군 포교사를 군에 적정 배속시켜 불교에 관한 포교업무를 추진하고 국방부장관이 추천하는 군종승제도 연구위원 5명을 불교기관 및 대학에 위탁 교육시켜 불교에 관한 지식을 연수케 한다는 것, 그리고 군종승제도 연구위원은 1966년 4월 말까지 연구결과를 국회에 보고토록 한다 는 등의 4개 항을 마침내 결정하기에 이른다.
국회의 이 같은 결정에 따라 국방부와 조계종은 군종승제도 실시에 관한 원칙을 확인하고 구체적인 사항에 합의하였다. 조계종은 8월 30일 군포교사 10명을 위촉해 각 군 본부 및 주요 부대의 장병교화를 담당케 하였다. 10명의 포교사는 능가, 인수, 광덕, 무진장, 자순, 성자, 기부 스님과 오형근, 김항배, 목정배 교수였다.
마침내 1966년 3월 동국대 불교대학 내에 <군승후보교육원>이 개설되었다. <군승후보교육원>에서는 자격을 갖춘 불교대학 졸업자 가운데 30명을 선발하여 교육하였으며 그 중 권기종, 권오현, 김봉식 등 17명이 교육을 마치고 수료하여 군승선발과 파송준비의 토대가 마련되게 되었다.
1966년 7월 육군본부는 군종승 14명에 대한 소집 및 교육 임관 등 1966년도 충원 계획의 구체안을 국방부에 제출하였다. 그러나 당시 군종승제도의 실시에 회의적이었던 국방부장관의 결재 보류로 1년여 동안 군종승제도의 실시는 미궁에 빠져 들게 된다. 장관의 결재가 보류된 상태에서 조계종총무원의 청와대 청원서 제출과 대불련을 비롯한 불교계의 항의와 시위가 이어지게 되었고 마침내 국회국방위는 1966년 7월 17일 회의를 열고, 군종승제도에 대한 결과를 보고하고 군종승제도 설치에 따른 예산을 예비비로 충당하며 군종승의 충원은 14명으로 하되 월남에 3명, 국내에 11명을 종군케 할 것 등을 결의하였다.
1967년 1월 25일 동국대학교 불교대학 군승후보교육원 졸업생 17명은 군승제도 추진위원회를 발족시켰다. 이 추진위에는 대학생불교연합회도 가담하였으며, 전국신도회도 동참하겠다는 담화를 발표하였다. 신도단체에까지 군종문제가 확산되자 1967년 4월 18일 국방부는 군승제도 준비를 위하여 4월 30일까지 군종위원 행정실무자 각 1명씩을 군속으로 임명할 것과 5월 31일까지 군승준비위를 국방부 안에 설치할 것을 약속하였으나, 예산 부족 등을 이유로 9월 1일 군종위원 1명만을 발령하는데 그치게 되었다.
행정적인 군승파송제도를 마련해 나갔던 것과 아울러 군승파송 필요성의 가장 큰 단초가 되었던 것은 바로 월남전의 발발과 한국군의 참전이었다. 당시 불교국가인 월남과 한국 불교계는 월남전 이전부터 신뢰관계를 형성하고 있었다. 당시 남베트남에서는 천주교를 바탕으로 한 고딘디엠(본래 이름은 응오딘디엠) 정권이 1963년 8월 남베트남의 주요 사찰을 습격, 승려와 신도들을 강제로 체포·구금하고 이에 항의하는 스님들의 분신 등이 잇따랐다. 이 소식에 한국불교계는 이를 강력 항의하는 운동을 벌였었다. 청담스님 등 수십 명의 스님이 항의 단식을 하고 종단은 추도식을 대대적으로 벌였으며 종교탄압을 중지하는 항의공문을 발송했다.
이후 군부 쿠데타로 고딘디엠 정권이 무너지고 새 정권이 들어선 뒤 남베트남 불교도들은 당시 한국불교의 성원에 감사하는 편지를 보내 두 나라 불교도의 우애가 한층 깊어진 상태였다. 양국 불교계의 이 같은 신뢰는 1965년 한국의 월남전 참전 뒤 한국불교의 역할에 대한 군부의 인식을 일깨우는 데 크게 기여한다. 대다수의 국민이 불교신자였던 당시 월남의 상황에서 종교교류를 통한 다양한 대민작전에 불교의 역할이 기대되었고 1964년 월남에서도 군승제도를 도입한 것도 자극제가 되었다.
종단은 특히 월남전에 참전하는 병사들을 위해 2,500기의 호신불을 국방부에 전달하고 참전부대에서도 <불교신문>이나 물품 지원을 호소하는 사례가 많아 불교의 종군은 거의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분위기가 군내에서도 강하게 형성됐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때마침 주월 한국군사령관이었던 채명신장군이 총무원을 예방하여 월남전 상황에서의 종군승 파송의 필요성 역설한 것이 기폭제가 되어 군승파송의 분위기가 고조되기에 이른다.
결국 국방부는 5월 24일 국방부령 124호로 군종장교 요원 선발규정을 공포하고, 7월 4일 불교대학을 졸업한 대덕 지위의 승려로서 국방부에서 실시하는 군승자격시험에 합격한 자로 한다는 내용을 종단에 통보하고 조계종이 군종장교요원 추천단체로 지정함으로써 수많은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불교계의 오랜 숙원이었던 군종승제도가 마침내 실현되게 되었다.
3) 군법사제도의 실시 - 불교학과 동문, 군불교의 첫 발을 내딛다.
1968년 국방부는 7월 17일 군종장교 인원조정 작업에서 군승19명을 증편하기로 하고 우선 그해 육군에 5명을 배당하여 조계종에 추천을 의뢰하였다. 조계종은 <군승후보교육원>을 수료한 동국대학교 불교대학 불교학과 출신 권기종, 김봉식, 이지행, 권오현, 장만수 등을 추천하였고 국방부는 9월3일 이들 5명을 제1기 군승장교 최종합격자로 선발하였다.
전원 불교학과 출신이었던 이들 5명은 9월 14일 육군보병학교에 입교하여 10주간의 군사훈련을 받고 11월 30일 임관해 한국불교사상 최초의 군법사가 되었다. 군종24기로 임관된 제1기 군법사 5명은 국방부와 육군의 방침에 따라 국내에 2명이 배치되고 3명은 1969년 1월 월남에 파병되기에 이른다.
이들은 1969년 1월 5일 월남을 향해 출발했다. 군법사의 월남파병은 군법사제도를 도입한 가장 중요한 요인이기도 했다. 이들에게 거는 기대는 군내는 물론 불교계, 그리고 월남 현지에서도 대단했다. 1969년부터 주월한국군 사령부 및 맹호·백마·십자성 등 사단급부대에 1명씩 배치돼 있던 군법사는 월남파병 4년이 경과한 1973년 월남 철군 때까지 모두 16명이 복무하게 된다.
제1기 군법사들이 군내에서 종교업무와 교육활동 등 다양한 활동으로 불교의 이미지를 부각시키면서 정기법회 및 한글의식을 정착시키는 등 군종업무를 개척하는 가운데 1969년 7월 군법사 제2기 7명이 임관하였다. 이에 앞서 6월 이인수 법사가 공군 특별간부 제20기로 임관하여 공군 최초의 군법사가 되었고, 1970년 군법사 3기로 입대한 김정길 법사가 7월 해군특교대 제51차로 임관하여 첫 해군법사가 되면서 명실 공히 육, 해, 공군이 모두 갖추어진 본격적인 군포교가 출발하기에 이른다.
Ⅲ. 군불교의 성장과 발전
1) 초기 군법사의 활약 - 군포교의 초석을 다지다.
1968년 11월 30일 최초의 군승 임관 후 주로 월남에서 활동한 초기 군법사들은 한국에서도 오늘날 군포교활동의 지침이 되는 활동들을 하나씩 펼쳐나갔다. 최초로 군법사가 파송되어진 1969년과 1970년은 한 해에 불과했지만 1년 동안 많은 일이 일어났다. 처음에는 각 부대에서 어떤 호칭으로 불러야 할지 몰라 혼란을 겪고, 정기법회 때 사용할 법요집 조차 없어 군법사들이 일일이 만들어야 했지만 난관을 딛고 하나씩 역사를 써나갔다.
오늘날 군법사로 불리는 호칭은 처음에 ‘군사승’, ‘종군승’, ‘군종승’, ‘군승’등 각기 다른 호칭으로 불리었다. 제도가 확정되고 임관하면서 ‘군종승(軍宗僧)’ 으로 확정
되어졌다. 하지만 호칭으로는 발음이나 어의가 불편해 실제로는 ‘군승’ 이라는 호칭
이 더 널리 사용됐다. 이에 1기생부터 ‘군법사’ 혹은 ‘군종법사’로 호칭하도록 정해 오늘날까지 이르고 있다.
군법사들이 들어오자 군목들의 호칭도 변화가 일어났다. 이들은 신부, 목사 모두 군목(軍牧)으로 부르다 군법사들이 들어오자 공통 명칭을 ‘군종장교’ 로 변경했다.
최초 군승5명은 군종장교 전체의60분의1에 불과했지만 군내의 불교신자들은 오랜 염원 끝에 배출된 군법사들에 대한 기대가 컸다. 처음 대하는 군승들에 대해 장교와 사병, 군 당국 해당부대, 그리고 법사자신들까지 모든 것이 낯설고 처음이었다. 호칭에서부터 두발, 복장, 먹는 문제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새로 시작됐다. 군승제도 연구 단계에서부터 많은 논의가 있어 왔었지만 막상 현장에서는 현실과 이론의 벽에 부딪혀야만 했던 것이다. 군 내부에서는 불교 군종제도가 생겼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큰 호기심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1기 군법사들을 가장 괴롭힌 것은 이 같은 불교 군종장교에 대한 인식이나 병영 내 문화가 아니라 불교활동을 위한 시설과 포교기반의 부족이었다. 법당이 없는 것은 물론 불교책자도 마땅한 것이 없었다. 그야말로 전무한 상태였다. 군법사들은 군목 사무실에 책상 하나를 얻어 업무를 하나하나 해 갔다. 법회는 내무반이나 식당에 부처님 사진 액자 하나를 걸어놓고 진행했다.
그러나 당시의 법회는 일정한 형식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일반사찰에서 하던 전통불공이나 예식절차는 군내의 문화와는 맞지가 않았다. 일요정기법회라는 말조차 생소하던 시절, 일주일 단위로 움직여지던 군대의 조직질서와 문화는 전통적 음력위주의 흐름에 익숙해 있던 기존의 불교의례와 합일되지 못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동국대 불교학과 출신의 1기 군법사들은 자체 타이핑을 해서 법회의식을 위한 법요집을 만들어 법회 때 활용하게 된다. 한문중심의 기존불교의식은 젊은 장병들에게는 맞지 않았다. 삼귀의와 사홍서원을 노래로 부르고 법문과 찬불가가 불리워지는 정형화된 정기법회의식은 바로 이러한 각고의 노력 끝에 만들어진 불교학과 출신 1기 군법사들의 역작이었다.
군승예법에 정해진 법회 순서는 초기 군법사들의 꾸준한 시험과 연찬 과정을 거쳐 마련된 것이다. 최초 군내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불교가 기독교 예배처럼 정기행사의 의식(儀式)이 있는지 자주 질문할 정도로 갖춰진 것 하나 없던 시절이었다. 이 같은 열세에도 불구하고 초창기 군법사들은 개척자로서의 긍지와 사명감을 갖고 업무에 임했다. 이러한 일련의 흐름은 군대라는 당시에는 우리사회에서 가장 현대화, 과학화된 조직에 불교가 적응하는 과정이었던 것이다.
2) 군법사단 창립과 군법사 후보생제도의 실시
1970년에 들어서면서 군포교는 가파른 성장세를 보였다. 군승은 육·해·공군 삼군 모두 배치되어 활발한 포교활동을 전개하기 시작했고 군부대 내에 군법당이 건립되기 시작했다. 1968년 첫 걸음을 시작한 군불교는 1971년에 이르면서 10개의 군법당을 건립했고, 4개가 건립 중에 있었을 정도로 군포교는 빠르게 성장했다. 육군 중앙불교 장교회 창립을 필두로 각 군 지회별로 잇따라 건립돼 군내불자들도 활발한 신행활동을 펼쳐나가게 된다.
총무원도 후원회를 조직하는 등 적극적인 지원에 나서고, 군승수가 늘어나면서 이를 총괄할 조직이 생기는 등 1970년대는 군포교의 발전이 이어졌다. 지지부진하던 후원회는 1976년 대한불교진흥원이 생겨 군법당 건립과 기동력을 지원하면서 한층 활기를 띠었다. 또 총무원은 군승준칙을 마련해 군승자격을 강화하고 군포교의 효율성을 꾀했다. 1970년 7월2일 총무원 청담장로원장, 총무부장 경우스님, 교무부장 월주 스님, 동국대 재단 상무 법안 스님은 군내 포교활동과 군승 지원문제 등을 협의하기 위해 당시 공식적으로 육군참모총장을 방문하기도 했다.
1972년 들어 군법사가 늘어나고 군법당도 16개로 급증했다. 군법사, 군법당이 늘어나고 각 부대에서 불교장교회가 결성되는 등 군포교는 1970년대 초반부터 본격적인 궤도에 오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법회나 포교 등은 군법사들의 개인 재량에 따라 좌우됐다. 의식이 서로 달라 혼선도 일어났다. 단순한 연락조직으로는 이 모든 변화와 성장을 감당할 수가 없었다. 또 늘어나는 군법당과 신자에 비해 군법사는 턱없이 부족했다.
기독교는 전군 신자화 운동으로 성장세가 두드러졌지만, 한참이나 뒤져 출발한 불교는 아직 사단에까지 법사를 파견할 충분한 인원을 확보하지 못하는 상태였다. 이에 따라 이미 기존에 확보된 17명의 법사를 충당하는 과제도 해결해야했다.
1기생 3명이 처음 전역하고 새로운 군법사들의 임관이 늘어나면서 군법사 충원을 위해 군불교와 관련된 업무를 총괄할 조직다운 조직이 필요해진 시점이 도래한 것이다.
원래 1970년도부터 군법사 전체를 ‘군승단(軍僧團)’으로 부르는 모임이 있었다. 단장은 당시 육군본부에 근무하던 1기 권기종 법사였다. 하지만 당시 군승단은 조직이 아니라 군법사들을 총칭해서 부르는 명칭에 불과했다. 단장 업무도 군법사 대변과 종단과의 연락 업무가 전부였다. 이에 1기 군법사들을 중심으로 군법사단 창립문제를 본격적으로 논의했다. 1972년 6월 26일부터 3일간 불교정화기념회관에서육·해·공군 군법사25명이 참석한 가운데 군법사단 창립총회가 열렸다. 이날 창립총회에서 6장 14조로 돼 있는 군법사단 규약이 채택되고 초대 군법사단 단장에 육군본부 종단보좌관으로 근무하던 권오현 법사를 선출했다. 부단장에는 이지행 법사(육군 대위), 김정길 법사(해군 대위), 이인수 법사(공군 대위),간사에 장충식(육군대위) 법사를 선출했다.
군법사단은 1972년 9월 25일 총무원으로부터 인수받은 사무실을 개설했다. 당시 총무원은 현재 동국대 혜화관이 된 장충동 공무원 교육원을 매입해 청사로 사용하고 있었다. 군법사단 사무실 역시 이곳에서 문을 열었고 군불교와 관련된 제반 업무를 총괄하며 발전을 모색하기에 이른다.
군법사의 충원을 위해 군법사단은 동국대와 주요사찰 그리고 총무원 등과의 협조를 통해 군법사 자원확보에 총력을 기울이게 된다. 그 결과물이 바로 군법사 후보생제도의 탄생이다.
동국대학교 불교대학에 재학 중인 군법사 희망자들은 대학재학중에 국방부 시험에 합격하여 졸업 후 현역으로 소집되는 과정에서 군법사단 임원들의 사전 면접을 거치도록 했다. 사실 군종장교 후보생 제도는 1966년 제정됐지만 불교는 이보다 늦은 1972년에야 후보생제도가 실시되게 된 것이다.
국방부는 1972년 3월 10일 ‘국방부령 제212호’에 의거, 동국대학교 불교대학을 예비군종장교 선발학교로 지정한 데 이어 4월 20일 선발요강을 발표한다. 불교대학(불교학과, 철학과, 인도철학과, 불교미술과) 학생들은 이에 따라 재학 중에 소정의 시험을 거쳐 선발돼 재학 중에 소정의 교육을 받고 졸업 후 대덕 법계를 품수 받은 후 군승으로 임관할 수 있도록 제도적 장치가 마련된 것이다. 이 제도로 말미암아 동국대학교 불교대학에서는 군법사후보생을 공식적으로 선발 할 수 있는 유일한 창구역할을 감당하게 되었다.
Ⅳ. 불교학과 동문들의 군포교 역할과 비중
1970년대와 1980년대 군포교의 척박한 현실 속에서도 군불교는 지속적 성장과 발전을 이어나가게 된다. 군법당 건립 등 외형적 성장뿐만 아니라 제도의 정착과 포교의 내실화를 다지는 데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이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필수 불가결하게 대두되는 문제는 군법사의 인원충원과 관련된 문제였다.
당시 병역법 50조3항은 군종장교의 선발 시 지원 자격을 ‘목사 신부 또는 학사이상의 학위를 가진 대덕지위의 승려로서 소속종교단체에서 그 자격을 인정한자’ 로 되어 있었다. 조계종에서는 병역법시행령상의 군종장교자격이 가능한 대학을 동국대 불교대학 한 곳에서 4년제 대학을 졸업하고 중앙승가대학이나 지방강원에 재학 중인 스님들도 가능하도록 그 범위를 넓힐 것을 요구하는 개정안을 마련하고 다양한 루트를 통해 입법청원활동을 하기 시작했다.
군포교를 감당할 군법사자원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현실 속에서 당시까지만 해도 중앙승가대학은 정규대학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었고 전통강원인 승가대학 졸업자는 대상이 되지 못했다. 게다가 시행령이 불교대학에 재학하고 있는 자로 한정되어 있어 일반 4년제 대학을 졸업한 스님이라 할지라도 군종장교로 임관할 길이 없었다.
조계종 총무원은 이 조항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지속적으로 건의 한 끝에 군인사법개정안이 국회에 제출되기에 이르고 1989년 12월11일 국회본회의를 통과하게 된다. 개정된 군인사법과 병역법은 군종장교 등의 임용자격을 승려에게만, 학사학위 이상의 대덕법계를 가진 자로 구분하던 것을 개신교·가톨릭과 마찬가지로 ‘학사학위이상자로 소속종단에서 그 자격을 인정한 자’ 로 변경했다.
1993년에 이르러 당시 김영삼 대통령의 불교계 공약사업의 이행에 따라 오랜 숙원이던 군승정원의 확대가 이루어지게 된다. 이전까지 불교는 법당 수에 비해 군법사가 턱없이 부족해 많은 어려움을 겪었었다. 이를 해결하는 길은 불교계에 대한 군법사 할당 몫을 늘리는 것과 동국대학교 불교대학에 이어 지정 학교를 늘리는 두 가지 방법이 대안으로 제시되어 왔었다.
군법사의 충원은 김영삼 대통령의 1992년 후보시절 공약으로 17사단 훼불사건 후 1993년부터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이는 1968년 군법사 파송에 버금가는 획기적 정책이었다. 훼불사건으로 한창 시끄럽던 1993년 4월 10일 국무총리 행정조정실은 국방부에‘제14대 대통령선거 공약 추진계획 수립 보고’공문을 내려 보내 군종제도개선을 통보했다. 이에 따라 국방부는 7월16일 군종제도개선안 검토에 들어가 기독교계의 반발에 따른 수년의 논의와 합의 끝에 결국 국방부는 종교별 신자 수 배정 원칙을 적용해 개신교 10명, 천주교 14명, 불교 75명으로 증원하는 것으로 결론 맺었다. 전체적인 군 인력이 감소하는 추세였지만, 불교계의 거센 요구와 신자수비율에 맞지 않는 불공평한 현실을 고쳐야 한다는 당위성이 작용한 것이다. 김영삼 대통령은 1995년 5월 국방부가 마련한 최종안을 결재했다.
그와 맞물려 중앙승가대학이 1996년 12월 11일 교육부로부터 4년제 정규대학으로 인가를 받게 된다. 이에 따라 동국대학교 불대대학만이 아니라 중앙승가대학도 군종장교를 파견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됐다. 중앙승가대학은 1997년2월부터 정규대로 승격한 뒤 5월8일 국방부에 인가신청서를 신청했고, 이어서 9월에 중앙승가대학교가 국방부로부터 군종장교후보생 지원 대학으로 인가를 받았다. 이로써 군포교의 최대 장애였던 부족한 군법사 확보문제가 일정정도 해소되기에 이른다.
그러나 그러한 발전적 확대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계획에 따르면 군종장교 비율 조정에 따라 군법사는 2000년까지 90명에서 170여명까지 늘어나게 되어 있었다. 하지만 2016년 현재 군법사 수는 예정된 기간보다 15여 년 가까이 더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현재 136명(육군93명, 해군21명, 공군22명)에 머물고 있고 병력자원축소에 따른 감군계획(減軍計劃)과 군종편제조율 문제 등이 맞물려 군법사의 인원확충은 쉽지 않는 상태이다.
앞으로도 군불교는 진각종, 천태종 등 불교대학을 유지 운영하고 있는 타종단의 군법사 배출문제와 비구니군승의 충원 등 산적한 문제를 발전적으로 해결해야할 과제를 안고 있으나 아직은 답보상태에 머물고 있는 실정이다.
1968년 군법사제도가 태동한 이래 2016년 현재까지 총 504명의 군법사가 배출되었다. 그 가운데 불교학과 학부출신 동문의 수는 현재 139명으로 파악되고 있고 경주캠퍼스 불교학과와 대학원 불교학전공자를 포함하게 되면 그 수는 300명이 넘는다.
앞서 기술한 바와 같이 1966년 동국대학교 불교학과를 중심으로 <군승후보교육원>이 개설된 이래 군불교 태동기에는 군법사의 대다수가 동국대학교 불교대학 불교학과 출신들로 이루어져 있었으나 점차 군내의 포교현장이 확대되고 척박한 군불교의 환경 속에서 더 많은 포교인력의 필요성으로 말미암아 군법사 배출의 문호가 개방되어 다양한 출신들이 군포교의 현장에서 활동하게 되었지만 동국대학교 불교학과가 군포교와 군불교 발전의 중심역할을 해 오면서 큰 복전이 되었음은 그 누구도 부인 할 수 없을 것이다.
불교학과 출신 동문 군법사들은 군불교의 개척기부터 일요법회의 정례화와 한글법회의식의 개발, 설법을 중심으로 하는 법회의 정착 등 포교방법의 혁신에 선도적 역할을 감당해 왔으며 군법사단(후에 군승단으로 개칭)과 2005년 대한불교조계종 군종특별교구의 출범 이후 지금에 이르기 까지 군불교의 중심역할을 계속해서 이어오고 있다.
Ⅴ. 結 語 - 불교학과를 중심으로 한 군포교 활성화 방안
불교학과 동문들이 지금까지 군불교에 끼친 영향과 역할은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할 것이며 태동기부터 지금 현재에 이르도록 군불교 역사의 큰 흐름을 군포교의 현장에서 가장 핵심적으로 주도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지나간 과거의 그 화려했던 활동상은 작금에 이르러 여러 아쉬움을 드러내고 있음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현실이다. 불교대학의 군승후보생 지원 비율은 갈수록 그 숫자가 줄어들고 있으며 2015년도 동국대학교 불교대학에 군승후보생 지원자가 한 명도 나오지 않았다는 것은 이러한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
물론 군불교의 현장에서 포교와 전법의 사명을 감당해 나감에 있어 불교계의 여러 주체들이 함께 힘을 나누어 포교의 성과를 극대화해 나가야 한다는 대의명분에 이의를 제기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또한 안보환경의 변화와 군의 현실적 여건도 하루가 다르게 변화를 거듭하고 있는 상황이다. 기존 동국대학교 불교대학, 불교학과가 중심이 되어 군포교를 개척해 나가던 때에 비하면 여러 가지 외형적, 환경적 조건도 많이 좋아진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년 군승지원율은 그다지 높지 못하며 종단과 불교계의 관심도 초창기에 비해 오히려 낮아지고 있는 느낌이다. 그러나 아직 군포교 분야는 한국불교의 미래를 위해 앞으로도 개척해 나가야할 많은 과제가 산적해 있는 곳이다. 군불교의 핵심 코어 역할을 동국대학교 불교대학 불교학과가 앞으로도 해 나가기 위해서는 불교공부를 통한 포교와 전법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의 전환이 다시 한 번 강조될 필요가 있다.
포교와 전법의 사명감으로 군불교의 현장에서 불철주야 헌신해 왔던 불교학교 동문 선배님들의 정신과 열정을 앞으로도 계속해서 이어나가기 위해서는 포교의 중요성에 대한 열정을 가진 후학들의 관심과 종단 안팎의 배려와 제도적 지원 그리고 동국대학교 불교대학 불교학과가 군포교 현장의 중심역할을 계승해 나가기 위해 실질적인 포교방법론에 대한 교육과 제도 보완이 필요하고 본다.
자의든 타의든 군포교 현장에서 불교는 타종교와의 비교와 영향에 끊임없이 놓여지는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타 종교는 군대를 황금어장이라고 부르며 공세적 선교활동에 매진하고 있는 그 기저에는 전국적으로 배출되는 신학대학 출신들의 엄청난 인력자원을 바탕으로 한 자신감과 경쟁력이 바탕에 깔려 있다.
게다가 그들은 설교학, 목회학, 전도(선교)학, 조직신학 등을 바탕으로 현장에서 즉각 활용 가능한 충분한 실전적 역량을 섬세하게 훈련받고 배출되고 있는데 비해 현재 동국대학교 불교대학에서 진행되고 있는 교과과정은 상대적으로 포교, 전법과 관련된 분야의 실무교육이 그다지 강조되고 있지 못한 실정이다.
물론 군불교를 포함한 다양한 포교의 현장에서는 이론이나 교학, 그리고 그 응용이 각각 별개의 독립적인 분야로서 요청되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모든 것들이 융합되고 감각적으로 응용되어질 때 포교의 역량이 더욱 극대화 되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110년의 전통을 이어온 동국대학교 불교대학 불교학과(불교학부)가 앞으로 군포교 분야뿐만 아니라 현대사회와 불교계가 요구하는 인재를 배출하는 핵심 역할을 지켜나가고자 한다면 학문적 지식뿐만 아니라 불교적 사유를 바탕으로 한 보다 전문적이고 실무적인 능력과 역량을 갖춘 인재를 키워내기 위한 학풍과 학제를 만들어 나갈 필요가 있다고 본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동국대학교 불교대학 불교학과는 군포교의 발전은 물론이거니와 지나간 110년에 머물지 않고 다가올 100년을 준비할 수 있을 것이며 이 사회가 요구하는 인재를 배출함은 물론 불교의 발전에도 크게 기여할 수 있게 되리라 본다.
<참고문헌>
국방부 군종정책과 편, 『전투군종사』, 국방부, 2014.
대한불교조계종 군종특별교구, 『불교군종사,군승40년사』,불교군종사편찬위원회, 2008.
동국대학교 석림동문회 편, 『한국불교현대사』, 시공사, 1997.
불교군종사 편찬위원회 편, 『불교군종사』, 군법사단, 198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