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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반갑습니다.
어 지금 천수경강의를 저희가 계속하고 있는 중에,
오늘은 신묘장구대다라니 그 다라니들어가는 부분입니다.
제가 이제 몇번 말씀드린것처럼 신묘장구대다라니를 전통적을 해석을 하지 않았었는데,
이거야 뭐 사실 해석을 관세음보살님 내지는 찬탄하고 이러는 부분이기 때문에,
해석을 해도 할수도 있고, 또 뭐 안해도 안할수도 있고 그렇죠.
그런데 보통 진언이나 다라니 이런것들을 해석하지 않는 이유를 말씀드렸었습니다.
해석하지 않는 이유는 우리가 모든 말에는 다 분별이 담기고 아 그러한데,
이 다라니라는것은 해석하지 않음으로써, 또 아무뜻없이 독송하는것을 통해서,
그말을 외면서 거기에 어떤 해석이나 분별이나 생각을 개입시키지 않고,
이해하려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그냥 소리 하나의 소리 파동 그 자체로써 온전히 관하고,
똑똑히 들으면서 관하고 그럼으로써 지관수행을 하기 위한 방편으로 하는것의 일환이기 때문에,
우리가 다라니나 진언이나 이런것들은 해석을 하지 않는다고 제가 말씀을 드렸습니다.
어느날 어떤 보살님께서 저한테 질문을 하세요.
어떤글에서 또 책에서 보니까,
천수경의 신묘장구대다라니는 우리가 알고 있기로는 관세음보살님의
어떤 신묘한 어떤 다라니문을 담은거라고 얘기를 들었는데,
당신이 읽은 책에 보니까, 이건 완전히 아니다 그러더라.
이것은 힌두교 시바신을 찬양하는 비슈니신을 찬양하고 뭐 이러는 힌두교 신들에 대한
찬양을 담고 있는 내용이라고 하던데,
그렇다면 우리 불자들이 이것을 읽으면 안되는것 아니냐?
천수경을 이제 한국불교에서 폐기처분해야 되는것 아니냐?
이렇게 질문을 하시는 분이 계셨습니다.
여러분 생각은 어떠세요?
그 이제 우리나라에서 대표적으로 민희식교수님이라는 그분께서
신묘장구대다라니에 대한 어떤 것을 연구하다가 밝혀낸 부분들도 그 부분인데요.
신묘장구대다라니는 본래 브라흐만의 신들인 시바신과 비슈니신을 예찬하는 다라니였다.
라는것을 이 민희식교수님이라는 분이 밝혀서 어떤 내용인지도 이렇게 쭉 해석을 하고
그런 부분이 나옵니다.
그중에 대표적으로 몇가지를 보면,
니라간타할때, 이것은 푸른목의 신인데 시바신을 의미한다.
그리고 다린나례 새바라할때 이것은 대지를 지탱하는 신으로 비슈니신을 의미한다.
그러고 또 뭐 바나마 나바할때 배꼽에서 연꽃이 피어나는 분 비슈니신이고,
또 싯다유예 새바라야라는것도 요가를 성취하신 분으로 시바신
뭐 이런식으로 해서 바라하 목카하 이분도 산돼지 얼굴을 하신분으로 비슈니신을 얘기하고,
또 자가라 욕다야도 원반을 드신분이라고 비슈니신을
또 뭐 마하라 구타다라야는 큰 곤봉을 든분 해서 또 비슈니신을 의미한다.
이런식으로 시바신과 비슈니신을 찬탄하는 어떤 것이 신묘장구대다라니다.
이렇게 책을 내서 쓰셨다는것이죠.
그런데 이걸보고 어떤분들은 아주 그야말로 어 뭐랄까 시체말로 호들갑을 떠시면서 난리났다.
우리가 지금 여태까지 독송해 오던게 관세음보살님을 찬탄하고 생각하고 독송해 오던게,
힌두교의 비슈니와 시바신을 찬탄하는 것이였으면 큰일나는것 아니냐?
하면서 이러는 분들이 계세요.
어 그런데 우리가 아셔야될것이 뭐냐면? 우리는 대승불교권이거든요.
대승불교라는건 뭐냐면? 초기불교에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그 가르침만이 진리이다 라고 얘기하는 종교가 대승불교가 아닙니다.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우리가 한국불교에서 행하고 있는
모든 수행법들이 염불 부처님 당시에는 없었어요. 진언 없었습니다.
절하는것도 절수행 이렇게 하는것도 없었습니다. 화두, 간화선 뭐 이런것들도 없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수행법들이 다 부처님 당시에 있었던것이 아니고,
다 역사속에서 만들어진 것들입니다.
특히나 우리가 지금 진언이나 다라니 반야심경에도 보면 아제아제 바라아제 해서 나오는데,
이러한 모든것들이 부처님 당시에서 부터 있었던것이 아니라,
인도의 바라문교 전통적인 바라문교 혹은 힌두교에서 영향을 받아서
이렇게 밀교가 만들어지고 그러면서 우리가 많은 다라니나 진언 같은것들이
불교에서 이렇게 채택해온 것이다 라는것을 우리는 잘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대승불교나 초기불교가 바라문교에 많은 영향을 주어서
불교의 영향을 받아서, 바라문교가 또 힌두교로 거듭나기도 했고,
또 그러는 과정에서는 저쪽 어디입니까.
그리스 로마쪽이라든가 또 어디입니까. 지금 서아시아쪽,
그 쪽에 있는 다양한 문화적 전통들도 같이 습합되어 온것이죠.
그리고 대승불교 경전들도 보면,
중국에서 만들어진 원각경이나 부모은중경이나 우리가 아주 중요하다고 알고 있는
이런 많은 경전들이라든가 진언들이 중국불교에서 나온것들이기도 하거든요.
그러면 지금 우리는 이것들을 다 없애야되느냐?
어 불교의 특징이 뭐냐면? 불교의 특징이 다른 종교와는 다르게
다른 종교들은 선교나 어떤 전법을 할때, 그 나라에 가면 그 나라의 전통적인 신들을
치면서 싸워 이기면서 그 나라에 이 종교를 가지고 갖던 문화라면,
불교는 이 나라에 가면 이 나라 전통종교도 다 받아들이고 수용하고 습합하고
또 저 나라에 가면 저 나라의 전통종교도 다 받아들이고 받아드리는 대수용의 역사입니다.
불교의 역사는, 그런데 그것이 어떤 사람은 불교의 잘 모르는 사람은 잘못된것 아니냐?
어떻게 이것도 받아들이고 저것도 받아들이고 그러면 불교의 본질을 잊어버리고
비불교적으로 바뀌는게 아니냐? 이렇게 생각하시는 분들이 계시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불교의 본질을 가지고 가기 때문에,
본질은 변함없단 말이예요. 본질은 그대로인데, 겉에 드러난 껍데기 방편들을
온갖 다양한 방편들을 쓸수가 있는겁니다.
그런 차원에서는 그런것들을 우리가 무조건 잘못됐다 이렇게만 볼수가 없는것이죠.
불교에서 본다면 이세상 모든것들은 다 방편입니다.
우리가 말하나 입을 벌려서 말을 했다는것 다 방편입니다. 진리가 아니예요.
그래서 그것을 진리가 아니라고 할수도 없고 진리라고 할수도 없단말이죠.
왜냐하면 말로 탁 얘기해버리면 그것은 벌써 진리에서 어긋납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도 팔십년을 살다가 열반하시면서
나는 한법도 설한바가 없다고 하셨고
금강경에서도 보면 법은 법이 아니다 그러므로 법이다.
법이라고 할만한것이 따로 없다. 그랬단 말이예요.
진리라고 내세울만한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것이 진리란 말이죠.
그래서 진리라는것을 얘기할려면 말로 딱 설했다하면 벌써 어긋난다 말이예요.
그래서 대승불교에서도 승의제와 세속제라고 해서
말로 표현된것은 진짜 진리가 아니라 세속적인 방편의 진리다.
그래서 세속제, 세속진리라고 했습니다.
승의진리라는것이 있어서 승의진리는 승의제는 말로 표현할수 없는 그냥 그 본질자체다.
지난번에 말씀드린것처럼 우리가 탁(죽비를 치시며) 소리를 들을때,
소리를 듣는 나는 분별하기 이전에 소리를 듣는(죽비를 치시며) 내가 있단 말이죠.
이걸 어떤 보는 보고 듣는 어떤게 있잖습니까?
보고 듣는 어떤것은 어떤놈은 보는놈 듣는놈 이 어떤 부분은 해석하고 생각하고
판단하는 놈이 아니란 말이죠.
우리가 갓난아기때도 소리를 들으면 (죽비를 치시며) 그소리를 탁 들었고,
지금도 소리를 듣는다 말이예요.
지금과 옛날이 다른점은 갓난아기때는 소리를 들으면 깜짝놀라고
들었다는것만 알뿐이지, 이게 무슨 소리인지 판단은 안했는데,
지금 우리는 어떤 소리를 들으면 판단하고 분별하고 해석한다 말이죠.
그래서 좋은 소리면 좋다고 집착하고 싫은 소리면 싫다고 거부하려고 하는게 다를 뿐이다.
그런데 어쨌든 동양인이 되었든, 서양인이 되었든, 옛날 사람이 되었든, 지금이 되었든,
전생의 여러분이 되었든, 지금의 여러분이 되었든, 갓난아기때 여러분이 되었든,
지금의 여러분이 되었든, 이소리(죽비를 치시며)를 듣는, 듣는 뭔가는 하나도 바뀌지 않고
변함없는 그냥 그 본성이라고 한다 말이죠.
볼때 보는 놈이 있고, 들을때 듣는 놈이 있고,
생각이 일어날때 생각이 일어난다라는것을 아는 놈이 있단 말이죠.
그 본성에서 본다면 우리가 불성이라고 하는 그 본래면목이라고 선에서 말하는
그 자리에서 본다면 어느것 하나 말로 표현할 필요가 없는겁니다.
그 본성은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똑같을 뿐이고,
크고 작은것도 없고, 막고 틀린것도 없고, 말로 설명할수도 없는,
그냥 텅빈 공이라고 하는 허공성을 가진 진리 그 자체밖에 없단말이예요.
그 말로 설명할수 없습니다.
그것을 말로 설명하려고 하면 벌써 다 어긋나 버린다 말이예요.
진리가 아니란 말이죠. 그런 어떤 허공성과도 같은 이런 공의 자리,
그런 텅빈 그 자리에서는 그 어떤것도 이름 붙일수가 없어요.
그런데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또 스님들이 얘기하는 모든 법문은
그 직바로 가르키든 아니면 둘러둘러서 얘기하든 전부다 그 본연의 자리를
본래자리라고 하는 본래면목이라고 하고 이러는 그 자리를
우리가 알아차리게 하기 위해서 법을 설하는것 밖에 없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어떤 방법을 써도 상관이 없어요.
뭐만 하면? 본성만 깨달으면 된다말이예요. 본성만 알면 된다말이예요.
그러니까 어떤 방편을 써도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선방에서는 스님들은 자기 본성을 탁 직지인심해주기 위해서
탁 바로 가로 질러서 가르쳐주기 위해서 말로 하면은 말의 뜻을 따라가잖습니까?
본성을 볼려면 요렇게 요렇게 하면 됩니다.
또 본성은 이러 이러한거니까, 이렇게 이렇게 보면 됩니다.
그러면 그 말을 따라가가지고 못 본다 말이죠.
왜냐하면 말을 따라가서는 생각으로는 본성을 볼수가 없기 때문에,
생각을 가지고는 수행을 할수가 없어요.
생각으로 만들어 내는 모든것은 수행에서 어긋나는것 뿐이다.
생각 너머를 가르키는거거든요.
그러니까 생각 너머를 가르켜야 되기 때문에, 생각을 딱 끊기 위해서
이해 되지 않는 말도 되지 않는 말로 말하는 말로써, 가르친다 말이죠.
그래서 도가 무엇이냐고 물을때,
뭐 똥막대기다라고 하고, 뜰앞의 잣나무라고도 하고, 호떡이라고도 하고
아무거나 해도 상관없는거예요. 컵이라고 해도 좋고, 저 나무 한그루라고 해도 좋고,
그냥 숨쉬는거라고 해도 좋고, 바람부는거라고 해도 좋고, 새소리라고 해도 좋고,
뭐 이렇게 두들기면서 얘기해도 좋고, 손가락을 들면서 법이라고 해도 좋고,
뭐라고 해도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왜 아무상관이 없을까요? 예수님이라고 해도 좋고, 부처님이라고 해도 좋고,
알?이라고 해도 좋고,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모든 우리 눈에 드러난 모든것, 우리가 개념지어 생각하는 모든것,
이것을 금강경에서는 상이라고 그런다 말이예요. 상
개념이고 표상이란 뿐이죠. 허상일뿐이란 말이예요.
우리가 생각할수 있는 모든 대상은 전부 다 허상일 뿐입니다.
그것은 진짜가 아니다.
전부 다 허상일 뿐입니다.
그런데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은 뭐냐면?
우리가 떠 받들고 있었던 모든 허상, 허상이 허상인줄 아는것이 바로 부처님 가르침이예요.
그 어떤 스님은 저 마른 부처님을 갖다가 도끼질해가지고 때기도 하지 않습니까?
이 부처님이라는 상도 상이라는것을 알게 하기 위해서는 무슨짓을 해도 상관이 없다.
예수님을 가르치면서 얘기해도 상관이 없는것이죠.
그러니까 본질에 있어서는 어떤 방편을 써도 상관이 없다.
뭐냐하면 됩니까? 본질을 보게만 하면 된다말이죠.
모든 수행법은 본질 본래면목을 보게 하는 방편으로 사용된겁니다.
염불은 부처님 명호를 염함으로써, 염함으로써
마른 똥막대기도 법을 가르치는 방편이 될진대,
부처님 명호를 외는것이 방편이 안되겠습니까?
경전을 독송하는것이 방편이 안되겠습니까?
시바신을 부르는게 방편이 안되겠습니까?
아니면 오죽했으면 어떤 스님은 외국인들에게 관세음보살 염불하기가 너무 어려워요.
발음이 안되요. 그랬더니, 너는 뭔 발음이 제일 편하냐? 그랬더니, 코카콜라가 편하다.
그러면 너는 계속해서 코카콜라만 해라.
아니면 나는 성모마리아만 맨날 찿았습니다.
너는 성모마리아를 계속 염해라. 그것도 염불이 될수가 있다.
저는 단어도 모릅니다. 가나다라마바사도 잘 못뗐읍니다. 그러면 가나다라마까지만 해라.
가나다라마까지만 반복해도 그게 도에 이르는 길이 된다.
부처님은 말한디도 외지 못하는 제자에게는 그냥 걸레를 닦자 하면서,
걸레질만 하도록 하면서 그 자리를 보게 이끌어 주게 됐단 말이죠.
그러니까 무슨 방편을 써도 상~관이 없는겁니다.
그러니까 밀교와 싸워가지고 밀교와 전쟁을 해서, 힌두교와 싸워서 전쟁을 해서.
인도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불교가 최고니까,
힌두교는 완전히 나쁜 진리가 아니다라고 생각해서 힌두교와 싸워서 전쟁을 일으켜서
힌두교를 다 몰살시켜야 불교가 드러난다라고 생각을 해서 한다면,
불교가 힌두교와 싸웠겠죠. 그럴 필요가 없는겁니다.
저쪽 저쪽에 보면은 기독교와 천주교와 이슬람교와
유대교와 뭐 엄청난 종교전쟁이 일어나지 않았습니까?
그게 내 종교가 절대적으로 옳다. 절대적으로 옳은것이 있다라고 생각을 하니까,
그걸 포용할수가 없는거죠.
그런데 불교는 절대적으로 옳은법이 어디있습니까?
그런게 없단 말이죠. 그러니까 포용하고 수용하는 종교다.
그러면 밀교를 전쟁을 벌이고 있는게 아니라, 힌두교와 전쟁을 벌이는것이 아니라,
힌두교에서 쓰고 있는 다양한 방법을 이러한것들을 그냥 받아들이수도 있다.
왜? 그것도 방편이 되죠.
다라니 진언을 한다. 그것도 진언 다라니를 끊임없이 외면서,
코카콜라를 해도 좋고 가나다마바사다도 해도 좋을진대,
시바신을 찬양하는 말을 하면 어떻고 무슨말을 하면 어떻습니까?
그 또한 하나의 상일 뿐인데
어차피 이세상에는 이세상 사람들이 머리가지고 만들어낸 상밖에 없어요.
허상의 세계밖에 없습니다.
불자들이 만든 상도 상이고, 힌두교인들이 만든 상도 상이고,
기독교인들이 만든 상도 상입니다.
그건 불자들이 만든 상은 더 아름답고 좋고, 깨지 않아도 되고,
기독교 힌두교인들이 만든 상만 잘못됐으니 깨부셔야된다. 그게 아닙니다.
불자들이 만든상도 전부도 똑같은 상일뿐이다.
전부 다 허망한것 뿐이죠.
그런 모든 상을 타파하는게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이잖습니까?
그러니까 그걸 못 받아들일 이유가 뭐가 있겠습니까?
물론 옛날에 이 천수경을 중국에서 와가지고 한국으로 건너오면서,
이 천수경 신앙을 신묘장구대다라니를 대비주 신앙이 중국과 삼국시대부터 있었는데,
그때부터 있었던 많은 스님들이, 이 힌두교 시바신을 찬탄하는것이라는것을 사실은
그때는 몰랐겠죠. 지금처럼 이렇게 전문적인 연구가 일어나고 이러지 않았을 때이니까,
그런데 그냥 스님들이 맹목적으로 그냥 했겠죠.
이걸 통해서 그냥 그자리에 이르면 된다는라는 것이 있으니까,
그런데 지금에 와서 이것을 밝혀내는 박사가 생겼다.
할지라도 사실은 근원에서 달라질건 없습니다.
근원에서 달라지려도 한다면 대승불교도 다 버러버려야합니다.
간화선도 다 버러버려야 되요. 부처님 가르침만 진짜라고 생각한다면,
방편의 가르침이 다 쓸데없다고 생각한다면,
그 스님들께서 하시는 모든 선법, 법문, 수없이 많은 스님들이 쓰신 어록,
이런것들도 다 폐기처분해야합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그것만 절대라고 생각해야죠.
그런데 불교가 그런것이 아니다. 불교는 그런게 아닙니다.
불교는 문자에 치우쳐서, 팔만대장경에 치우쳐서,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이건만이 진리다. 이런게 아니란 말이예요.
그것을 말하는 부처님이 내가 여태까지 법을 설했지만 내가 법을 설한것은
법이 아니다. 난 한마디도 설한바가 없다. 그리고 소소한 계율들은 버려도 좋다.
그렇게 얘기한 이유가 그겁니다.
여기에, 문자에, 여기에 얽매여서는 진리를 볼수 없다는 얘기를 하는거예요.
그러니까 물론 저는 그렀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우리가 이걸 알고 있는 이상 굳이
신묘장구대다라니 대비주수행에 목숨을 걸고 목매고 이럴 필요없겠죠.
여러분 이런 천수경 관련된 다양한 책들이 나와있는데, 해설서가 나와 있는데,
많은 그런 책들에서는 스님들이 아마도 몰랐었을수도 있고 옛날에, 몰랐었을수도 있고,
또 알지만 신앙의 측면에서 굳이 그걸 밝힐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수행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분별심만 자꾸 생기니까,
그래서 얘기 안했었을수도 있는데, 지금은 정보가 워낙 다 공유되고 오픈된 시대다 보니까,
있는 그대로 얘기하고 있는 그대로 얘기하는게 좋을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
제가 말씀드리는데,
이 천수경은 천수경을 빼고 한국불교를 말할수 없는 상황이예요. 지금
한국불교에서 모든 기도를 할때 천수경을 무조건 하잖습니까?
그 이거를 종단 차원에서 야 우리 이거 하지 말자하고 정하면 모르겠지만,
그러지 않은 상황이라면 우리가 막 굳이, 굳이 안 할필요는 없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한편으로 굳이 금강경, 반야심경 좋은 경전 많은데
굳이 이것만을 막 붙잡을 필요도 없겠죠.
그런데 이 천수경은 그래서 우리가 수행으로써 천수경을 하는것도
요즘 많은 사람들이 많이 하지만 의례, 의식으로 자리잡은 경전입니다.
그래서 이 천수경을 독송함으로써, 하나의 전반적인 차원의 찬탄, 발원
이런 모든 의식이 담겨 있기 때문에, 하나의 의식으로써 자리잡은게
천수경이라는 경전입니다.
그래서 그런 차원에서는 이 또한 우리가 무조건 잘못됐다고 볼수는 없다.
하나의 방편일수가 있다. 그래서 그런 차원에서 신묘장구대다라니를
알아주시면 좋겠다는 그런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제가 신묘장구대다라니에 대한 따로 해석은 하지 않겠습니다.
그 전에 말씀드린것처럼 수월스님이라든가, 또 용성스님이라든가, 또는 숭산스님도
대비주 백일기도를 통해서 깨달음을 얻으셨다고 하고
천태종 창종하신 상월원각조사도 대비주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얻으셨다.
이런 스님들께서 대비주 수행을 통해서 깨달음을 얻은 이유가 여기에 있는겁니다.
아무 상관이 없는거예요. 어떤 방편을 쓰던지 아무 상관이 없는겁니다.
도가 무엇인가? 무엇입니까? 했을때,
옛날 스님들이 손가락을 들고 뭐 특별한 얘기를 했다고 할하고, 방하고 했다고 해서
그것만을 쓸 필요가 전혀 없는거예요. 그건 그 스님이 그냥 쓰는 방법인 겁니다.
천명이면 천명, 만명이면 만명 다 다른 방법을 쓸수도 있는거예요.
대비주라는 방법을 쓸수도 있는것이고, 뭘써도 상관이 없는겁니다.
그 다음 진도 조금만 나가겠습니다.
사방찬인데요. 사방찬이라고 해서 동서남북 사방을 찬탄하는 게송, 찬가 게송입니다.
동서남북 사방을 맑히는 의식이지요.
우주법계의 동쪽, 서쪽, 남쪽, 북쪽하는 모든 공간을 맑게 씻어내는 의식을 얘기하는것이구요.
인도라는 나라는 방위를 찬탄하고 예비하는 어떤 풍습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인도사람들이 방위를 찬탄하는 풍습 때문에,
부처님도 방위의 비유를 들어서, 경전을 설하기도 하셨죠.
예를 들어 육방예경같으면 부모님이나 스승이나 아내나 친척이나 모든이들을
섬겨야된다. 이런 얘기들을 육방예경을 통해서 동쪽은 부모님이고 남쪽은 스승이고,
서쪽은 아내고, 북쪽은 친척이고, 아래는 노비이고, 위쪽은 사문이고 스승님이다.
이런식으로해서 육방에 예를 표해야한다. 이런 경전을 설했는데요.
이게 동서남북을 찬탄하는 인도에서의 문화와도 연결이 돼있습니다.
이걸 불교적으로 본다면, 나와 내주변을 맑고 청정하게 한다라는
즉 대비주수행을 통해서 물로 씻어내듯이 내 주변이 청결하게 다 깨끗하게 씻어진다. 청정해진다.
이걸 의미합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도 그렇게 기독교 천주교에서도 세례 이런것을 할때
물로 이렇게 하는데, 이게 서양에만 있는게 아니라, 불교에서도 관정 또는 관불, 관욕
이라고 해서 물로 씻어주는 이런 의식을 상징으로써 많이 사용을 하고 있죠.
그 대비주를 독송하면 사방이 이렇게 맑혀진다. 청정해진다.
왜 그러겠습니까? 대비주를 독송한다는것은 하나의 수행을 한다는것이고,
수행을 통해서 제가 아까 말씀드린, 우리 주변에 있는 지금 동서남북 어디를 가도,
어느 공간에 있는 전부다 상만 있어요. 상만...
표상이 있단말이예요. 개념지어진것만 있단 말이죠.
전부다 만들어 놓은겁니다. 우리가, 의식으로 만들어 놓은것 밖에,
본래는 텅비어서 아무것도 없는데, 의식으로 만들어 놓은것만 있어요.
동쪽으로 가면 여기는 뭐가 있고, 저쪽에 뭐가 있고, 여기는 뭐가 있고, 저기는 뭐가 있고,
생각만 일으켰다면 온갖 모든 곳곳에마다 상을 일으킨다 말이예요.
그런데 본래 자리에는 그런 상이 탁 타파된 자리에는 어디 꺼리길게 뭐가 있겠습니까?
우리는 동쪽에 가면 동쪽에서 걸리고. 서쪽에 가면 서쪽에서 걸리고,
이 일하다 보면 이일에 걸리고, 저 일하다 보면 저일에 걸리고,
이 일때문에 괴롭고, 저 일때문에 괴롭고 계속 걸리지만,
탁 깨닫고 보면, 깨닫고 보면 대비주를 통해서 탁 깨닫고 보면,
어디도 막힘이 없고 걸림이 없겠죠.
본래 우리를 걸림 있게 만들었던게 하나도 없으니까,
내마음으로써 내생각으로 상을 만들어 냈고, 내마음이 만들어 놓은 상에
내 스스로 들어와가지고 거기서 괴로워한 것 뿐이니까,
내 의식으로 만들어가지고 괴로움을 만들었던것 뿐인데
그 의식이 탁 타파되고 나면 이게 모든게 허망한거라는걸 깨닫고 나면,
공하다는것을 탁 깨닫고 나면, 동서남북이 어디있고, 동서남북이 지저분한게 어디있고
번뇌가 어디있고 오염된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동쪽으로 가든 서쪽으로 가든 어디로 가든 전부다 청정해질수 밖에 없는것이죠.
그것을 상징으로써 이렇게 이야기를 한겁니다.
일쇄동방결도량(一灑東方潔道場).
쇄하면 뿌릴 쇄자입니다. 결은 깨끗이 한다는거구요.
한번 물을 뿌려서 동쪽 방향을 결 깨끗이 한다는거예요.
동쪽 방향의 청정한 도량을 만든다. 도량 전체를 깨끗하게 한다.
도량이라는것 자체도 청정한 곳을 도량이라고 합니다.
절만 절이 아니고, 내 마음이 청정하면 그곳이 바로 도량이다.
그래서 깨끗한 물을 뿌린다. 이것 자체가 우리 마음의 오염된 번뇌
흐릿흐릿한 이런 오염된 모든것들을 물로 깨끗하게 씻어낸다. 이런 뜻이예요.
모든 상, 개념, 망상, 분별 이것을 씻어낸다는 소리예요.
망상 분별을 한번 물뿌려서 씻어내버렸더니
모든 동쪽 방향이 도량 전부다 도량이 되고 도량이 청정하게 바뀐다.
이쇄남방득청량(二灑南方得淸凉).
또 한번 물 뿌리니, 남쪽 방향이 청량을 얻는다. 청량함을 얻는다. 깨끗하고 청정함을 얻는다.
아주 갈증나는 마음에 한쪽에 청량한 감로수를 뿌리듯이 그런 청량감을 얻게 된다.
삼쇄서방구정토(三灑西方俱淨土).
세번 또 물을 뿌리면, 또 서방 서쪽 방향이 모두 정토를 이루게 된다.
깨끗한 청정한 정토를 이루게 된다.
사쇄북방영안강(四灑北方永安康).
네째로 북방에 물을 뿌리게 되니까, 영은 길게 오래오래 이소리고, 안은 편안할 안자죠.
강이라는건 고요하다 편안하다 이소리고 강령하다 이렇게 쓰잖아요.
그래서 북방이 편안하고 아주 편안해진다. 고요해지고 강령해진다.
오래오래 세세생생 편안해진다. 그런 소리죠.
그래서 대비주 수행을 통해서 이 사방 사방찬 사방이 아주 찬탄할만큼
청정해지고 깨끗해지고 이런다는겁니다.
그러니까 우리 마음공부를 통해 모든 번뇌 망상 이런것들이 동서남북 전체가 깨끗하게
청정해지고, 정화가되고, 청량해지고, 극락이되고. 편안해진다. 그 얘기를 하는거죠.
그다음이 도량찬인데요. 도량을 찬탄하는 게송입니다.
도량이라는건 아까 말씀드린것처럼 꼭 절만 절이 아니라,
내집도 수행하는 사람이 있는 집은 그 집이 도량이고,
내가 길을 걸으면 그 길위가 도량이고,
나라는 마음이 도량이고
내 몸이 도량이다.
유마경에서 보면 즉심이 곧 도량이다.
바로 그 마음이 내마음이 바로 도량이다. 이렇게 얘기했어요.
도량청정무하예(道場淸淨無瑕穢).
도량이 청정하여 티끌 하자구요. 더러울 예자입니다.
도량이 청정하여 티끌과 더러운것이 모두가 없어지니,
이렇게 동서남북 전체가 수행을 통해서 다라니수행을 통해서
청정해지고 깨끗해서 번뇌 망상이 모두 없어지니까,
도량이 청정해져서 무하예 티끌과 번뇌가 다 없어졌습니다.
삼보천룡강차지(三寶天龍降此地).
그렇게 되니까, 삼보와 불법승 삼보와 천룡 천과 하늘에 있는 천신들,
그리고 용 이게 모두 화엄성중 천신들을 얘기합니다.
삼보님과 천룡 천신들이 모두 강차지 이 땅에 이 도량에 강림한다. 내리신다.
내려서 우리를 옹호해주고, 우리를 위신력으로 거두어 주시고,
우리를 어떤 돌봐주신다. 이런 뜻이예요.
즉 마음이 청정하고 수행을 하는 자는 그야말로 삼보와 천룡이 그 사람 옆에 강림해서
그 사람을 옹호하고 도와주고 그렇게 된다. 그런 얘기입니다.
아금지송묘진언(我今持誦妙眞言).
내가 지금 지송한다. 묘한 진언을 지송하니, 대비주라는 묘진언을 지송하니,
원사자비밀가호(願賜慈悲密加護).
원컨대, 주십시요. 줄 사입니다. 자비의 비밀스러운 가피를 보내주십시요.
이런 소리예요. 내가 이러한 수행을 통해서 정진하니까, 내가 이렇게 묘진언을 지송하니,
나에게 자비의 비밀스런 가호를 베풀어주소서 하는 이런 의미죠.
즉 대비주를 진심으로 이렇게 독송을 하고 마음을 청정히 하게 됐을때,
비밀스러운 가호와 불법승 삼보님과 또 천룡 야차 수없이 많은 호법선신들의
가호가 우리에게 내려진다. 하는것을 얘기합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말씀드리고 다음번에 참회게부터 말씀드리겠구요.
혹시 요 관련된 내용이나 지금까지 공부한것 질문 있으시면
질문 한두분 받고 끝낼까요? 질문있으십니까?
.......
워낙 완벽하게 이해를 잘 하셔서...
질문없으신거죠?
네 네 알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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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불교에서 본다면 이세상 모든것들은 다 방편입니다.
우리가 말하나 입을 벌려서 말을 했다는것 다 방편입니다. 진리가 아니예요.
그래서 그것을 진리가 아니라고 할수도 없고 진리라고 할수도 없단말이죠.'
'천수경을 독송함으로써, 하나의 전반적인 차원의 찬탄, 발원
이런 모든 의식이 담겨 있기 때문에, 하나의 의식으로써 자리잡은게
천수경이라는 경전입니다.
그래서 그런 차원에서는 이 또한 우리가 무조건 잘못됐다고 볼수는 없다.
하나의 방편일수가 있다. 그래서 그런 차원에서 신묘장구대다라니를
알아주시면 좋겠다는 그런 생각이 듭니다.'
분별심을 내려놓겠습니다~
향광심 법우님 수고했어요^^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_()_
향광심 법우님!
찬탄을 보냅니다.
고맙습니다
감사 합니다
사랑합니다
이 인연 공덕으로 꼭 ~~
성불하십시요
향광심 법우님 감사합니다.
날마다 무섭게 정진하는 법우님!
이 인연 공덕으로 기필코 성불 하시겠네요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우리는 대승불교권이거든요.
대승불교라는건 뭐냐면? 초기불교에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그 가르침만이 진리이다 라고 얘기하는 종교가 대승불교가 아닙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수행법들이 다 부처님 당시에 있었던것이 아니고,
다 역사속에서 만들어진 것들입니다
말로 표현된것은 진짜 진리가 아니라 세속적인 방편의 진리다
그런데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은 뭐냐면?
우리가 떠 받들고 있었던 모든 허상, 허상이 허상인줄 아는것이 바로 부처님 가르침이예요
그런데 불교는 절대적으로 옳은법이 어디있습니까?
그런게 없단 말이죠. 그러니까 포용하고 수용하는 종교다.
워낙 완벽하게 이해를 잘 하셔서...
질문없으신거죠?
네 네 알겠습니다.
_()()()_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어떻게 보답할까요?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