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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펜하우어는 1788년 2월에 독일의 단치히에서 성공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쇼펜하우어가 살았던 18-19세기는 산업혁명이 성공하고 자본주의가 발전하는 시대였고 왕정을 타파해 가는 시민혁명의 시기였고 이성의 힘을 믿었던 시대였다. 또한 그만큼 민중들은 봉건제와 자본제의 이중모순속에 고통을 받았던 시기였고,전쟁이 빈발했던 혼란스런 과도기였으며, 근대이성의 힘을 의심받았던 시대였다.
쇼펜하우어의 아버지는 아들이 자신의 직업을 물려 받아 상인이 되기를 바랐다. 그래서 일찍부터 상인으로서의 교양과 실무를 쌓기 위해 당시 널리 쓰이던 프랑스어 교육을 위해 조기 유학(10살때!)을 보내기도 했다. 12-15세 동안에는 함부르크 철학박사 룽게에게 상인이 되기 위해 필요한 교육을 받게 된다.그의 학문이 현실을 중시하고 구체적 지식이 활용되는 특징이 있는 것은 이 때 교육의 영향이 아니였나 생각이 든다. 그는 우리나라 초등6년에 해당하는 12세부터 평생학자로서 살고 싶다는 희망을 갖게 된다. 아버지는 이런 아들에게 이런 제안을 한다.
" 학자가 되려면 여기서 남아 라틴어 공부를 하고 상인이 된다 하면 2년간 유럽여행을 같이 가자!"
쇼펜하우어는 당근(!) 여행을 선택하게 된다. 15-17세 사이 2년 동안의 유럽여행을 통해 영어를 습득하고 여행에서 보고 들은 바를 기록에 남겼다. 정규교육을 포기하고 선택한 이 여행은 소년 쇼펜하우어의 인격 형성에 큰 영향을 끼쳤다.그 핵심을 보면,
첫째,그는 '여행을 통해 살아 있는 인간이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의 굴레를 보았으며,그 속에서 인간은 고통과 괴로움을 겪을 수 밖에 없다'는 자각을 갖기 시작했다.
둘째, 그는 '나는 어릴 때부터 단순히 사물의 이름을 외는 것에 만족하지 않았다.사물을 관찰하고 탐구하고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한 다음에야 인식하고 이해하게 되었다.'고 회고하고 있다. 이러한 학문적 태도가 정규교육에 의존하지 않고 여행을 통해 느낀 바를 기록하고 사색하는 그의 습관에서 생겨난 것이라 생각된다.
여행에서 되돌아 온 그는 아버지와의 약속대로 상점견습생이 된다.그런데 바로 그 해 진심으로 존경해 마지 않았던 아버지가 불의의 사고로 사망하고 크게 실의에 빠진다. 이듬해 18세에 당시 30대의 한창 나이인 어머니가 자유로운 도시인 바이마르로 이사를 하는 것을 보고 그는 이 행위를 아버지에 대한 배신으로 느꼈고 평생 어머니와 불편하게 지냈다. 어머니도 아들의 태도- 어떤 견해에 함부로 판단내리는 버릇,무뚝뚝한 얼굴,아무도 해결할 수 없는 문제에 대한 비탄-를 싫어 했다. 쇼펜하우어는 평생 여자의 적이라고 칭할 만큼 여자에 대한 관념이 부정적이였고 당연한 듯 그는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
쇼펜하우어는 아버지의 유지였던 상인의 길을 포기하고 19세때 대학에 들어가기 위한 공부를 시작했다. 당시 어머니는 독일사교계의 유명인이 되였고 본인이 직접 글을 쓰는 문인으로서 많은 지식인들과 교류하였다. 이 들중 괴테,빌란트,프리드리히 마이어,칼 루드비히,베르너,페르노프등과 쇼펜하우너는 교류하였고 괴테와 빌란트는 그의 천재성을 파악하고 후견인 역할을 해 주었다.
쇼펜하우어는 21세에 법적인 성인자격을 갖고 어머니가 갖고 있는 아버지의 재산 일부를 상속받게 되었고 이 재산을 기반으로 생계걱정없이 평생을 학문연구에 매진하게 되었다.그는 그해 괴팅겐대학에 입학하여 의학을 공부하기 시작했으나 이듬해 바로 철학으로 전공을 바꾸고 23살에 베를린대학으로 옮겨 피히테,헤겔,슐라이어마허등의 강의를 듣게 된다. 이때 그는 모든 분야의 학문에 두루 관심을 갖고 열심히 공부에 매진하게 된다.그리고 25세에 '충족이유율의 네 가지 근원에 대하여'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게 된다.
쇼펜하우어의 박사논문을 보고 괴테는 그의 비범함을 꿰뚫고 색채론과 관련하여 같이 연구할 것을 제안한다. 사제지간으로 발전한 그들의 관계는 쇼펜하우어가 색채론에 있어 괴테와 다른 이론을 내세우면서 소원해 졌으나 괴테는 그를 평생 인간적으로 후원했다고 한다.
그 당시 20대의 열정적인 쇼펜하우어에게 영향을 끼친 철학으로는 칸트철학과 동양철학(중국.인도철학)이였다.칸트의 물자체(우리가 알 수 없는 분야,不可知영역)와 경험세계의 이분법적 도식을 그대로 받아 들였지만 쇼펜하우어는 그 물자체가 단일할 것이며 그 자체의 운동을 규정하는 힘 또는 의지가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윤리관에 있어서도 인간 내적 세계를 이루는 물자체도 사람마다 각각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닌 공통의 단일성이 있는 것이고 그것 때문에 인간의 마음에는 공통의 동정심을 갖고있다고 믿었다. 이 동정심이야말로 칸트가 이야기하는 이성의 힘이 아니라 사람의 윤리관의 원천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쇼펜하우어는 당시 유명한 동양학자 프리드리히 마이어를 통해 인도철학과 중국철학을 흡수하면서 '모든 물질의 근본적인 동일성,무가치성,현상계의 비참함,명상을 통한 해탈등의 명제를 그대로 받아들였다. 쇼펜하우너는 당시 본인이 무신론자임을 공개적으로 밝힌 최초의 철학자로 알려져 있다. 아직도 종교사회인 그 당시에는 그렇게 선언하는 것이 큰 위협이 되였음은 물론이였다.
쇼펜하우어는 그의 최대의 역작인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라는 책을 30세에 완성하였다. 그는 이 책이 사상사적으로 획기적인 선을 긋는 역할을 할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당시 학계에서는 큰 반향을 얻지 못했다. 이 책은 그로 부터 26년이 지난 그의 노년기에 주목을 받게 되었고 이 저작의 해설서격인 '인생을 생각한다'(1850년,그의 나이56세.마지막 저작)가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계기가 되었다. 괴테는 쇼펜하우어의 저작의 내용보다 문체와 표현의 명쾌함에 더 찬사를 보냈을 만큼 쇼펜하우어는 지금도 독일문학사상 명문장가로 알려져 있다.
쇼펜하우어는 18020년 32세에 베를린 대학 철학교수가 되었으나 인기가 별로 없었다. 당시 헤겔은 명교수로 강단철학을 장악하고 있었는데 쇼펜하우어는 헤겔을 어용학자로 인식했고 국가권력의 비호를 받는 듯한 헤겔의 철학을 경멸했다.쇼펜하우어는 자신의 철학을 이해못하는 세상과 어울리지 못했다. 1831년 그의 나이 43세에 콜레라가 유행하는 베를린(헤겔은 콜레라에 걸려 사망했다)을 떠나 프랑크푸르트에 정착을 했고 여기에서 공적 활동을 접고 72세로 사망하기까지 30년의 세월을 운둔자의 삶을 살았다.칸트의 산책이 너무도 정확하여 유명해진 것처럼 쇼펜하우어도 그의 범상치 않은 외모와 애견과 함께 산책을 하며 큰 목소리로 혼잣말을 하면서 걸어다니는 것으로 유명했다.
쇼펜하우어는 이 시기에 1836년 '자연에 있어서 의지에 대하여',1841년 '윤리학의 두 가지 근본문제'등의 글을 남겼다. 노후에 쇼펜하우어는 자신의 학문일생을 전반부 30년을 창조시대,후반부를 정비시대로 구분하고 자신의 독자적인 학문은 창조시대에 이룩되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인간은 30살,겨우 35살까지 세계로부터 받은 인상에 의해 그 사람이 생각해 낼 수 있는 모든 사상을 탄생시킨다'는 대목은 이 시대 젊은 친구들에게 많은 영감을 준다고 생각된다. 하지만 분투하고 성찰하는 모습이 젊음의 가치라면 누군들 청춘이 아니겠는가!! 단지 쇼펜하우어 자신은 그랬다는 것이라고 이해하고 넘어갈 대목이다.
1840년대 들어 쇼펜하우어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나타나는데 그와 같은 부류인 학자들이 아니라 민간철학애호가들로 주로 법률가였다. 사물을 있는 그대로 객관적으로 관찰하려는 법률가의 사고방식이 쇼펜하우어의 현실적 감각과 맞아 떨여졌다고 볼 것이다. 1850년대에 들어서는 바그너같은 예술가들이 그의 주변에 모여들기 시작했다. '의지의 완전한 소멸,더 이상 방황하지 않는 완벽한 체념만이 세계를 파악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쇼펜하우어의 사상은 당시 부조리하고 참혹한 초기자본주의 모습을 그려낼려 하는 예술가들에게 깊은 영감을 주었다 할 수 있다.또한 쇼펜하우어는 예술을 일상의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라 했으며 특히 음악이 인간들사이에 보편성,일반성(언어를 몰라도 음악은 같이 듣고 공감하고 감동할 수 있다)을 갖는 수단이라고 강조했다.
쇼펜하우어의 철학사상적 업적은 무엇일까?
첫째, 세상은 결핍과 부족,성욕과 사랑,질투와 선망,증오와 야심,횡포와 탐욕,그리고 질병과 권태등으로 이루어진 괴로움으로 가득차 있다는 것이다.,여기에서 인간은 고뇌와 허무로 채워지는 일생을 살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그럼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고 했나? '무엇보다 고독을 견디고 나아가 고독을 사랑하는 정신적 경지를 체득해야만 한다'고 쇼펜하우어는 주장한다. 고독이 정상적인 것이라고 인정해야만 거기에서 동정심이 나오고 사람간의 연대가 가능하다고 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후대의 그 유명한 철학자들,키에르케로르,니체,토마스 만이 공통적으로 주장하는 '고독한 초인;이라는 사상이 싹트게 된다.
둘째,근대의 유럽의 정신은 이성이 지배하는 시대였다. 산업혁명과 시민혁명으로 상징되는 근대는 이성이 만들어 논 시대였던 것이다. '이성을 바탕으로 하여 스스로를 전능하다고 생각한 근대과학의 망상과 낙천주의가 판친 세계에서,이성만으로는 해명이 불가능한 세계와 인간의 내면이 존재한다'고 그는 믿었다. 쇼펜하우어는 이성의 그늘에 가린 인간의 참된 면이 바로 '고뇌'이며 '절망'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이성을 통해 세계와 인간을 보는 데 반대했다. 그는 의지를 통해 세계와 인간을 연관지었으며,적극적으로 의지의 역할을 주장했다. 그의 의지론의 가부를 떠나 그는 근대문명을 비판한 선구자였음을 알 수 있다.
쇼펜하우어는 72살이던 해 1860년 급성폐렴으로 사망했다. 오랜 세월 겪어온 강단철학자들의 묵살,그리고 만성적인 판매부진에 시달려온 그에게 죽기 전 몇 해는 영광의 시기였다. 그는 젊었을 적 학문의 길로 접어 들면서 피력했던 꿈인, '19세기의 진정한 철학자'가 되었음을 확인하고 죽어간 행복한 철학자가 되였다.
' 나도 이제 목적지에 이르렀다. 생의 마지막 단계에 나는 나 자신이 해 온 작업이 빛을 발하는 것을 내 눈으로 직접 볼 수 있었고,만족을 느꼈다.바라는 게 있다면 이 빛이 영원하기를,'
이성의 시대에 그 보다 앞서는 인간 존재의 제 1요소로 '의지'라고 주장했던 근대의 철학자.
정신과 이성이 아니라 직관력.창조력.비합리적인 것에 주목했던 철학자.
여인상(像)에 있어 부정적이여서 독신으로 살면서 나름대로 연애는 할 만큼 한-것 같은- 철학자
염세주의자라 하면서 현실 치세에도 밝았고 '의지'의 중요성을 강조했던 철학자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에게 범상치 않은 외모로 위안을 주었던 철학자.쇼펜하우어를 위해 건배...!! 영어로 치어스!!!!!!
첫댓글 쇼펜하우어를 배우다 보면, 그의 철학적 사상이 그 시대적 상황에서 출발함을 알 수 있다. 그가 살았던 시대(초기자본주의 시기)의 상황을 배경으로(민중들의 삶이 얼마나 고단했는지), 그러한 상황을 벗어 날 수 있는 방법을 찾고자 했다는 생각을 합니다.그는 "인간의 의지(욕구,욕망,충동)를 극복(해탈)하는 것"을 주장했다. 물론 금욕해야 한다고 했지요. 그때의 어려운 상황(초기 자본주의 시기 나타난 수탈,착취,침략전쟁 등)속의 인간들의 모습은 허무 자체일 수 있었겠죠.그런 면에서 쇼펜하우어의 염세주의적 사고는 이해된다. 허나 세상이 그가 말하는 '의지'가 전부일까? 인간의 의지로 세상을 설명하는 것이 가능한 것인가?
철학자의 자질은 우선 고독이겠지요.. 환경도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사랑하는 아버지를 잃은 쇼펜하우어 철학자의 나라 독일을 가보고 싶어요 늘 우울한 날씨인지 일조양은 많은지... 나도 철학자가 되어 고독과 대화하고 싶습니다 ('나는 어느별에서 왔니?') 연휴에 이렇게 긴 글 잘 읽었습니다^^
ㅎㅎㅎ 저는 개인적으로 소펜하우어 책을 잘 읽는 편이예요. 그럼 저도 염세주의적 사고가 있었나 봐요^^
자신의 죽음 앞에서 자신이 해 온 일에 대해 빛을 발하게 만드는 일도 어려운데,
그 빛을 확인하고 만족스럽게 죽었으니 쇼펜하우어는 행복하지 않았을까, 상상해 봅니다.
그런 삶을 살기 위해서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고민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