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중순(10수)
하루시조 284
10 11
말하기 좋다 하고
무명씨(無名氏) 지음
말하기 좋다 하고 남의 말을 말을 것이
남의 말 내 하면 남도 내 말 하는 것이
말로서 말이 많으니 말 말음이 좋아라
어릴 적에 많이 경계(警戒)의 말로 들었던 시조입니다. 내용이야 아주 단순 소박합니다. 내가 남의 말하다보면 남도 내 말 하겠거니 애시당초 삼가는 것이 피차에 좋다. 뜻이야 옳고 좋죠. 하지만 어디 쉽나요? 그럴라 치면 입은 왜 생겨났으며, 귀는 왜 뚫렸나요.
이 작품 속의 말, 내가 하는 남에 관한 말, 남이 하는 나에 관한 말들은 모두 의도가 불순해서 헐뜯거나, 전하는 재미가 쏠쏠해서 소문으로 듣고 하는 말이 되겠습니다. 그러니 칭찬하는 말, 위로하는 말 등은 입 있고 귀 뚫렸으니 응당 하고 살아야겠습니다.
말(言)과 ‘말다(不爲)의 어간인 말’이 같아서 조금 헷갈리긴 해도 조심한다는 뜻에서는 닮았기에 다행 아닌가 싶습니다. [최이해 崔伊海 해설]
하루시조 285
10 12
바람이 불려는지
무명씨(無名氏) 지음
바람이 불려는지 나무끝이 누웃누웃
비 오려는지 떼구름이 머흘머흘
저 님이 내 품에 들려는지 눈을 끔적끔적 하더라
눈짓으로 사랑을 맺는 순간을 노래했습니다. 몸이 백 냥이면 눈이 구십 냥이라고 했던 이유를 알겠네요. 끔적끔적, 둘만 아는 무언의 신호, 보내고 받으려면 눈이 아주 중요합니다.
초장의 누웃누웃과 중장의 머흘머흘은 종장의 끔적끔적을 위한 조연(助演) 역할입니다. 지금은 사전에서 사라진 표현임에 주목합니다. 물론 바람과 비도 ‘저 님’을 위한 들러리인 셈입니다. ‘눈정(情)’을 노래한 또 하나의 매력적인 작품이네요. 사랑은 언제나 온 우주적 조응(照應)입니다. [최이해 崔伊海 해설]
하루시조 286
10 13
수박 같이 두렷한 님아
무명씨(無名氏) 지음
수박 같이 두렷한 님아 참외 같이 단 말씀 마오
가지가지 하시는 말이 말마다 왼말이로다
구시월(九十月) 씨동아 같이 속 성긴 말 말으시소
왼말 - ‘오른말’이 ‘옳은 말’이라고 하면, 그 반대이니 ‘그른 말’이라고 해야겠습니다.
씨동아 – 씨를 받으려고 늙힌 동아. 동아는 동과(冬瓜) - 박과의 한해살이 덩굴성 식물. 줄기는 굵고 단면이 사각(四角)이며 갈색 털이 있다. 잎은 어긋나고 5~7개로 얕게 갈라지며 심장 모양이다. 여름에 노란 종 모양의 꽃이 피고, 열매는 호박 비슷한 긴 타원형이고 익으면 흰 가루가 앉는다. 과육, 종자는 약용한다.
말만 앞세우는 싱거운 남정네한테 돌직구를 날리는 여편네 말씀이 꾸밈 없이 들어 있습니다. 농가 아낙이 분명할진대, 수박이며 참외가 등장하는 것 좀 보십시오. 여러 가지를 뜻하는 ‘가지가지’까지 채소로 들리지 않습니까. [최이해 崔伊海 해설]
하루시조 287
10 14
초당 추야월에
무명씨(無名氏) 지음
초당(草堂) 추야월(秋夜月)에 실솔성(蟋蟀聲)도 못 금(禁)ㅎ거든
무슴하리라 야반(夜半)에 홍안성(鴻雁聲)고
천리(千里)에 님 이별(離別)하고 잠 못 들어 하노라
추야월(秋夜月) - 가을 달밤.
실솔성(蟋蟀聲) - 귀뚜라미 울음소리.
무슴하리라 – 무슨 연유(緣由)로.
야반(夜半) - 밤중.
홍안성(鴻雁聲)고 – 기러기 울음소리인가.
가을은 뭉게구름을 타고 온다고 하고 또, 귀뚜라미 등을 타고 온다고도 합니다. 작자는 이 실솔(蟋蟀)의 소리를 막을 수 없다고 했는데, 마찬가지로 오는 가을을 뉘 막을 수 있겠습니까. 중장은 도치(倒置)로 운율을 살렸는데, 설의(設疑)로 종장을 부드럽게 끄집어내는군요. 달 뜬 가을밤에 멀리 이별한 님 생각에 전전반측(輾轉反側) 불매(不寐)로군요. [최이해 崔伊海 해설]
하루시조 288
10 15
공산 추야월에
무명씨(無名氏) 지음
공산(空山) 추야월(秋夜月)에 느꺼울손 송도(松濤)로다
어와 이 소리를 환해(宦海)로 보내고자
남가(南柯)의 꿈꾸는 분네를 놀랠 법도 있나니
느껍다 - 마음에 복받쳐서 벅차다
송도(松濤) - 소나무가 바람에 흔들려 물결 소리처럼 나는 소리. 송뢰(松籟), 송풍(松風), 솔바람.
환해(宦海) - 관리의 사회. 흔히 험난한 벼슬길을 이른다. 관해.
남가(南柯) - 남가일몽(南柯一夢). 헛된 꿈.
분네 - 둘 이상의 사람을 높여 이르는 말.
벼슬길에 얽매인 또는 지친 사람에게 자연의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내용입니다.
조선시대의 학문하는 사람들의 거의 대부분은 입신양명(立身揚名)을 원했습니다. 그래야 집안도 살리고, 가문도 세울 수 있다고 믿었으니까요. 그런 환로(宦路)에 들지 못했거나, 밀려난 입장에서 가을 달밤에 듣는 솔바람 소리는 그 소리에서나 와 닿는 바람결에서나 상쾌하기 그지없었을 것입니다.
나이가 들고 보니까, 세상은 얼마나 다채로운 것인지, 저 좋아서 하는 일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각 분야별 상수(上手)로 누리는 만족감이 얼마나 길게 가는지 알 것도 같습니다만. [최이해 崔伊海 해설]
하루시조 289
10 16
단풍은 반만 붉고
무명씨(無名氏) 지음
단풍(丹楓)은 반(半)만 붉고 시내는 맑았는데
여울에 그물 치고 바위 위에 누웠으니
아마도 사무한신(事無閑身)은 나뿐인가 하노라
사무한신(事無閑身) - 일이 없어 한가한 신세.
한가하게 전원생활을 즐기는 즐거움을 노래했습니다. 때는 단풍이 절반 물든 초가을이고, 장소는 여울을 낀 강변이군요. 너럭바위가 있어 더욱 정겹게 느껴집니다. 사무한신, 일이 없어 한가한 몸. 자족감이 묻어나는 사자성어입니다.
일생을 어떤 일에 종사하다가 나이가 들어 한 발 빼고 뒤돌아본 지나간 세월이 그립고 아름다우려면 응당 비워진 욕심그릇이 우선되어야 할 것입니다. [최이해 崔伊海 해설]
하루시조 290
10 17
한숨아 너는 어이
무명씨(無名氏) 지음
한숨아 너는 어이 해곳 지면 내게 오나
밤마다 널로 하여 잠 못 들어 원수(怨讐)로다
인간(人間)의 이별(離別)이 하니 돌려간들 어떠하리
해곳 지면 – 해 곧 지면. 해가 지고 곧장.
하니 – 많으니.
돌려간들 – (나를 지나쳐) 돌아 나간들.
한숨을 의인화해서 하소연하듯 작자의 일상을 적었습니다. 해가 있을 때는 어디에 몰입하느라 그냥저냥 견디듯 지냈거늘, 쉬어야 하는 저녁이면 득달같이 찾아드는 수심(愁心)이 잠 못 들게 하여 원수가 따로 없습니다. 그 수심의 근원인즉 이별입니다. 나 말고도 별리에 사무치는 이 많거늘 오늘은 건너 뛰어 돌아 나가기를 빌고 또 빕니다. [최이해 崔伊海 해설]
하루시조 291
10 18
할 일 하사이다
무명씨(無名氏) 지음
할 일 하사이다 부디 할 일 하사이다
술 먹고 취(醉)ㅎ지 말고 늙지 말 일 하사이다
남더러 이 두 일 물으니 다 어렵다 하더라
‘하사이다’의 반복 사용이 묘한 운률을 만들었습니다. ‘할 일’도 그렇지요. 할 일이라는 게 뭡니까. 답은 ‘늙지 말 일’이군요. 아니 늙을 수가 있나요. 내가 늙고 싶지 않다고 안 늙어지나요. 불노초를 찾아 캐어 달여 먹는 일이라면 몰라도요. 그런데 오호라 ‘술에 취하지 말라’도 할 일인데 신기하게도 나이가 들수록 할 수 있는 일 중 가장 쉬운 일이 술 먹고 취하는 일이랍니다. ‘늙지 말 일’과 ‘술 먹고 취하지 말 일’ 이 두 일을 남에게 물으니 다 어렵다고 하더라 깨닫습니다. 어려우니 더욱 ‘할 일’이라는 말일까요.
이 작품의 작자를 남편에게 이르는 아내의 강다짐이라고 보니 비(非)논리가 수긍이 됩니다. [최이해 崔伊海 해설]
하루시조 292
10 19
해 져 황혼이 되면
무명씨(無名氏) 지음
해 져 황혼(黃昏)이 되면 내 못 가도 제 오더니
제 몸에 병(病)이 든지 뉘 손대 잡혔는가
얼마나 긴장할 님이건대 살뜬 애를 끊는고
낮에는 떨어져 지내다가도 밤이 되면 서로 만났더랍니다. 내 쪽에서 갔거나 제 쪽에서 왔거나 했더랍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렇지 못합니다. 도대체 이유가 뭘까요. 알 수가 없습니다. 혹시나 병이 들었을까 싶은데 그건 아닐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딴 님이 생겼을 것인가, 아마도 그쪽에 무게가 갑니다.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 상대가 나보다 열 곱은 나을 것만 같고요. 어찌 해볼 도리가 없으니 애간장이 끊어집니다.
‘긴장할 님’ ‘살뜬 애’에 대한 적확한 해석은 나중으로 미룹니다. [최이해 崔伊海 해설]
하루시조 293
10 20
흉중에 먹은 뜻을
무명씨(無名氏) 지음
흉중(胸中)에 먹은 뜻을 속절없이 못 이루고
반세(半世) 홍진(紅塵)에 남의 우음 된저이고
두어라 시호시호(時乎時乎)니 한(恨)할 줄이 있으랴
흉중(胸中) - 가슴 속. 마음. 생각.
속절없이 - 단념할 수밖에 달리 어찌할 도리가 없이.
반세(半世) - 한세상의 절반. 반세상.
홍진(紅塵) - 거마(車馬)가 일으키는 먼지. 번거롭고 속된 세상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우음 – 웃음거리.
된저이고 – 되었구나.
시호시호(時乎時乎)니 – 때요 때요이니. 때(시절) 탓이리니. 불우(不遇)한 탓이니.
한(恨)할 – 원망스럽게 생각할.
한평생 중에 절반을 보내고 보니 당초의 청운지지(靑雲之志)는 모두 흩어지고 말았습니다. 비록 남의 웃음거리가 되었을망정 시절 탓이려니 하고 위로합니다. 그렇죠, 제 스스로 풍진을 멀리하고자 하니 때 또한 저를 비켜간 것일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암튼 남은 생애 더욱 지조 있는 삶을 살다보면 뭔가 남기는 것이 있을 것이니 그런 인생 또한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최이해 崔伊海 해설]
첫댓글 하루에 한 수씩, 옛시조를 읽자. 그런데 하루 마다 읽는다는 것은 현대인들에게 아주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배달이 필요합니다. 단톡방들을 한 여남은 개 추려서 '하루시조'라고 이름을 붙였더랍니다. 읽기 좋게 사진도 한 컷씩 보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