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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운얼굴
누구나 가까이 할 수 있는 ‘쉬운 사람’이 있습니다. 편안한 표정을 짓고 사람들이 잘 이해하도록 ‘쉬운 말’로 허물없이 이야기합니다.
진리를 깨달은 사람의 글은 오히려 쉽습니다. 지적 허영을 버렸기 때문입니다. 복음의 진리는 참 쉽습니다. 쉬운 얼굴입니다. 산을 넘고 물을 건너서 깨달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랫동안 공부를 해서 깨닫는 것도 아닙니다. 진리를 누구나 듣고 쉽게 깨달을 수 있도록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바리새인은 보통 사람이 가까이 하기 어려운 존재였습니다. 분리주의와 귀족주의에 사로잡힌 그들은 낮은 자들과 다르다며 그들을 철저히 배척했습니다. 교만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반면 예수님은 세리와 죄인들까지도 가까이 올 수 있는 분이셨습니다. 쉬운 말씀을 하셨고 낮고 천한 자의 손도 쉽게 잡아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죄인의 친구’라는 말을 들어도 상관하지 않으셨습니다. 누구나 가까이 할 수 있는 참 쉬운 사람이셨던 겁니다.
“예수께서 마태의 집에서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았더니 바리새인들이 보고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마 9:10∼11)
한재욱 목사(서울 강남비전교회)
링반데룽
소설가 황순원의 작품 중에 ‘링반데룽’이란
단편이 있습니다. 주인공이 공수병으로 죽어가는 친구를 지켜보면서 멀어진 애인 ‘설희’와의 재회를 꿈꾸지만 제자리만 맴돌 뿐 다시는 만날 수 없는
링반데룽을 안타까워하는 작품입니다.
링반데룽은 독일어인데 ‘링(Ring)’은 ‘원’을, ‘반데룽(Wanderung)’은 ‘방황’ 혹은 ‘방랑’을 의미합니다. ‘원형방황’으로 번역됩니다. 이 말은 등산용어인데 동일한 지점에서 일정한 장소를
원을 그리며 계속 방황하는 것을 말합니다. 분명 똑바로 나아간다고 믿고 걸었는데 한참 후 바라보니 원래
출발한 그 자리에 서 있더란 말입니다. 등산가들이 제일 무서워하는 게 링반데룽, 즉 원형방황 혹은 환상방황(環狀彷徨)입니다. 계속
한자리를 맴돌다가 그 자리에서 죽고 만다는 것입니다. 이건 눈사태나 폭풍우 자체보다 무서운 적입니다.
올해도 어김없이 사순절을 보냈고 이제 한 주 후면 부활절을 맞게 됩니다. 혹여 우리는 원형방황처럼
그렇게 무의미하게 맞는 절기는 아닌지요. 매년 있어왔고, 어쩔
수 없이 지켜야 하고, 생각 없이 걸어가는 사순절은 아닌지요. 주님을
향해 나아간다고 믿었는데 제자리만 겉돌고 있는 건 아닌지요. 의미 있게 살지 못하면 살아도 사는 게
아닙니다. 주님처럼 뜻 깊게 살지 못 한다면 죽어도 죽을 수 없습니다.
정학진 목사<포천 일동감리교회>
중소 도시에서 살다 보면 아쉽고 그리운 것이 간혹 있습니다. 대도시의
문화적인 혜택이 그렇고, 농촌의 텃밭에서 나오는 푸성귀가 그렇습니다.
농촌은 텃밭을 만들어 푸성귀를 얻기가 쉽지만 중소 도시는 이것도 저것도 쉽게 접할 수 없는 아쉬움이 많습니다. 그런데 교인들을 보면 환경을 넘어서서 당당히 살아가는 것을 보게 됩니다. 바로
자투리땅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자투리땅은 집 밖으로 나서기만 하면 어디에든 있습니다. 담벼락 옆에도, 초등학교 울타리 너머에도, 차도 옆에도 어김없이 눈에 띕니다. 돌을 골라내고 잡초를 뽑고 이랑을
만듭니다. 그러고는 때를 따라 각종 채소의 씨나 오이와 고추의 모종을 심고 고구마도 심습니다. 그 땅은 비록 작지만 수고한 만큼 거두는 즐거움을 줍니다. 각종
채소를 수확할 때가 되면 목사님 맛보시라고 교인들은 목사에게 사랑을 건넵니다. 자투리땅에서 나는 각종
가을걷이는 수고한 이나 그 정성을 나누어 받은 모든 이에게 행복을 가득 안겨줍니다. 그래서 그 작은
땅은 도시의 텃밭이요, 성도들의 정성이요, 사랑입니다.
베드로가 공회 앞에 서서 이렇게 외쳤습니다.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행 4:11) 많은 사람들에게
버린 돌처럼 여겨졌던 예수님은 머릿돌처럼 우뚝 서셔서 인류구원의 대업을 십자가에서 완성하셨습니다. 가장
작은 것으로 가장 위대한 것을 이루신 예수님의 고난의 십자가를 우리도 함께 짊어짐으로써 고난을 넘어선 부활의 소망을 간직하면 좋겠습니다.
이일성 목사(군산 풍원교회)
더 기쁜 사랑의 표현
리차드 버튼은 자신의 연인인 엘리자베스 테일러에게 주려고 25캐럿의
커다란 핑크빛 다이아몬드를 구입했습니다. 백금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다이아몬드 가격만 10억 원이 넘었으며, 행여나 그 다이아몬드를 도난당할 까봐 10억 이상의 돈을 들여 보험까지 들어놓았습니다. 그러나 막상 다이아몬드를
선물하자 엘리자베스는 그다지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저에게 비싼 것을 사주려는 당신의 마음을 나는 사랑하지만 이런 사치품으로 표현하기보다는 그저 정말로 나를 사랑해주기만 하면 되요.”
그리고 다이아몬드를 다시 팔아 좋은 일에 써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결국 리차드는 엘리자베스의 뜻에 따라서 다이아몬드를 팔고 대신 그 돈으로 격렬한 내전지역인 보스나와에 병원을 세우기로 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고백을 즐거이 받으시는 주님이시지만 그 사랑을 통한 선한 일과 선한 나눔을 더욱 기뻐 받으십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마음이 실제적인 행동으로 이루어지도록 노력하십시오.
주님! 선한 나눔과 구제로 주님을 더욱 기쁘게 하는 사람이 되게 하소서!
사랑의 기쁨을 또 다른 사랑의 방법으로 표현하십시오.
<김장환 큐티365/나침반출판사>
가장 필요한 것
뉴잉글랜드 주의 교도소에는 600명의 청소년들이 수감되어 있다고 합니다.
강력범죄가 아닌 이상 대부분 훈방, 합의 조치되거나 소년원으로 가게 되는 미성년자의 특성상
이러한 수는 놀라운 정도로 매우 많은 숫자입니다.
다음은 이들 600명을 대상으로 낸 통계입니다.
- 60%의 아버지는 알코올 의존증 환자
- 75%의 부모님은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자유를 허락
- 70%의 부모님들은 이혼을 했거나 별거 중
- 90%의 아이들은 부모님이 자신에게 무관심하다고 생각
- 100%의 가정은 어떠한 종교생활도 하지 않았음
올바른 길을 걸어가는 인생을 위해서 필요한 많은 것들이 있습니다.
행복한 가정과 바른 가치관, 옳은 길로 이끌어주는 멘토,
그러나 그 중에 가장 필요한 것은 하나님을 알고 그 말씀대로 따르는 신앙과 믿음이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주님! 사랑이 없는 이 세대를 위해 기도하게 하소서!
모든 문제의 근원은 사랑의 부족임을 깊이 깨달으십시오.
<김장환 큐티365/나침반출판사>
위로의 공동체
17살 때 대마초를 시작한 한 남자가 있었습니다.
도박에도 손을 대 13년 동안 중독된 상태로 살았고, 조직에
들어가 활동하다 칼을 맞고 중태에 빠진 적도 있었습니다. 서른 살에는 마약에 빠져 아내와 어린 딸과도
이별을 하는 아픔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상황 속에서도 6년간
마약을 끊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제는 죽을 수밖에 없겠구나’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남편을 보다 못한 이혼한 아내가 7년
만에 찾아와 교회로 인도했습니다. 그렇게 춘천의 한마음교회에 나가게 된 남자는 교회 문을 들어서자마자
깜짝 놀랐습니다.
“그토록 많은 사람이 진심으로 따뜻하게 대해주는 것은 제 인생에 있어서 처음이었습니다. 내가
사소한 존재가 아니며 목숨이 결코 하찮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그때 느꼈습니다.”
인생의 아무런 빛이 보이지 않던 이 남자는 결국 교회에 나와 믿음을 통해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불가능해보이던 마약까지 모두 끊고 이전의 가정을 다시 회복하고 성실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춘천 한마음교회의 김성로 목사님은 상처받은 마음과 실패와 경쟁에 찌든 마음을 가진 사람들에게 교회가 하나님의 사랑을 더 많이 베풀어야
하며 이런 위로의 공동체를 통해 사람들이 위로를 받고 교회도 부흥하게 된다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항상
상처받은 영혼을 위로하고 모든 약자들에게 사랑을 베푸셨습니다. 이제는 그 사랑을 우리가 세상에 베풀고
알려야 합니다. 소외되고 상처받은 모든 영혼들에게 사랑을 전하는 위로의 전령사가 되십시오.
주님! 위로가 사랑이 필요한 곳을 찾아가게 하소서!
위로가 필요한 사람이 있다면 진심으로 마음을 다해 섬기십시오.
<김장환 큐티365/나침반출판사>
선택의 순간
나폴레옹이 프랑스를 통치하고 있을 때에는 잦은 전쟁으로 국경이 수시로 변했습니다.
이때 어떤 스위스인이 국경범접 지역에 호텔을 하나 지었는데 우연찮게 이곳이 나중에 정확한 프랑스와 스위스의 국경지대가 되었습니다. 이 호텔의 중심이 정확히 두 국가의 경계선이었으며 따라서 같은 호텔이지만 어떤 손님이 묶는 숙소는 프랑스령이었고, 어떤 손님이 묶는 곳은 스위스령이었습니다.
호텔에 설치된 전화선도 각각의 나라에 연결된 것이어서 어느 숙소에서 어떤 전화를 사용하느냐에 따라 사용요금도 전혀 다르게 나왔습니다. 만약에 손님이 숙박요금을 내지 않고 도망간다면 정문으로 도망을 갔는지 후문으로 도망을 갔는지에 따라서 신고해야
될 경찰서까지도 달라졌습니다.
선택의 순간은 반드시 찾아옵니다. 삶과 죽음, 천국과
지옥, 세상과 복음, 중간에 비슷하게 걸쳐있다 하더라도 반드시
선택은 해야 하고 그 선택에 따라서 모든 결과가 달라집니다. 성경이 말하는 진리의 바른 길을 인생의
모든 순간에서 지혜롭게 선택하십시오.
주님! 모든 선택의 순간에서 진리의 편에 서게 하소서!
심판의 때에 부끄럽지 않은 성도의 모습을 위해 노력하십시오.
<김장환 큐티365/나침반출판사>
천국의 자격
요한 웨슬레 목사님이 천국에 가는 꿈을 꾼 적이 있다고 합니다.
천국 문 앞에서 출입을 관장하는 천사에게 목사님이 물었습니다.
“나와 함께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 중 몇 명이나 천국에 들어왔습니까?”
천사는 명부를 뒤져본 뒤에 한명도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요? 우리의 신앙이 뭔가 매우 크게 잘못되었나 보군요. 그렇다면 칼빈의 가르침을 따르던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천사는 그들 역시 명부에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종교개혁 역시 잘못되었나 보군요. 그렇다면 천주교인이 들어왔습니까?”
그러나 천사의 대답은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목사님은 그렇다면 도대체 천국에 누가 있는지
천사에게 물었습니다.
“천국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영접하여 성령으로 거듭난 모든 사람들이 와있습니다.”
우리의 모든 구원은 그리스도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따라서 특정 교파와 교리가 아닌 그리스도를
통해 받는 구원에 대한 믿음만이 유일한 천국의 조건이 됩니다. 구원을 위해 유일하게 하나님이 주신 예수의
이름을 오늘도 새기십시오.
주님! 구원의 본질이 그리스도임을 깨달아 알게 하소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만이 구원의 조건임을 잊지 마십시오
<김장환 큐티365/나침반출판사>
듣는 귀를 가진 사람
한 목사님이 청력에 이상이 생긴 것 같아 이비인후과를 찾았습니다.
의사는 검진 전에 먼저 목사님의 귀에 있는 귀지를 제거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귀에서 빼낸 귀지의 양이 엄청난 것 보고 놀란 목사님이 의사에게 말했습니다.
“이렇게나 귀지가 많은데도 소리가 잘 들리다니 정말로 놀라운데요?”
“귀지의 양이 어느 정도 된다 해도 듣는 데에는 전혀 지장이 없습니다.
그러나 제때에 제거해주지 않아서 만약 귀지가 하나로 굳게 된다면 그때는 청력장애가 생깁니다. 귀는
멀쩡히 있지만 소리는 잘 듣지 못하게 됩니다.”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한다는 의사의 말을 통해 목사님은 큰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그렇다! 귀지로 인해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것처럼 불신이 쌓이면 말씀을 믿지 못하게
된다!’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하나님 말씀에 대한 확신이 아닌 불신과 의심만이 쌓이게
될 때 우리의 예배는 신앙생활로 이어지지 않고 종교생활로 그치게 됩니다. 말씀을 듣는 귀와 깨닫는 믿음을
달라고 주님께 기도하십시오.
주님! 매일 드려지는 예배 속에 신앙이 성장하게 하소서!
말씀을 들음으로 믿음이 자라는 기쁨이 있게 되기를 기도하십시오.
<김장환 큐티365/나침반출판사>
더 나은 행동
돌턴이라는 유명한 화학자가 어머니의 생신을 맞아 회색 양말을 선물로 드렸습니다.
어머니는 선물을 받은 뒤 ‘빨간 양말’을 선물해
줘서 고맙다고 했습니다. 깜짝 놀란 돌턴은 회색 양말을 가지고 여러 사람에게 찾아가 무슨 색이냐고 물어봤지만
모두가 빨강색이라고 말했습니다. 돌턴은 자신의 눈에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연구를 한 결과 자신의
눈은 녹색과 적색을 구분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근대원자론을 창시해 물리와 화학에 지대한 공헌을 했던 돌턴은 틈틈이 자신의 눈에 대해서도 연구를 해 색맹에 대한 많은 자료를 남겼습니다. 이유는 단 한 가지 자신과 같은 눈을 가진 사람들을 돕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리고
노년에 들어 남긴 유언도 다음과 같았습니다.
“제가 죽으면 저를 해부해 주십시오. 특히 저의 안구를 통해 색맹인 많은 사람들을 도울
수 있게 되면 좋겠습니다.”
위기에 슬퍼하는 것보다 더 나은 행동이 있습니다. 위기와 고난을 극복하고 다른 사람들을
위해 더 좋은 일을 하는 것이 더 나은 행동이며 다 나은 삶입니다. 어려움에 대한 일차적인 반응을 뛰어넘는
성도가 되십시오.
주님! 고난을 극복함을 넘어 이겨낼 힘을 주소서!
어려운 순간마다 세상 사람과는 다른 반응을 보여주십시오.
<김장환 큐티365/나침반출판사>
한 사람의 결실
미국 일리노이 주에선 1년간 신생아를 유기하는 범죄가 한 건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미국의 다른 주에서는 신생아 유기가 뉴스가 되지 않을 정도로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유독
일리노이 주만 이런 모습을 보이는 것은 평범한 주부인 게라스 씨의 10년이 넘는 노력 덕분입니다.
공중화장실에서 출산하자마자 버려진 한 아이의 이야기를 들은 게라스 씨는 이후부터 버 려지는 신생아들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1년에 버려지는 신생아들이 이루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는
사실을 알고는 큰 충격에 빠집니다. 이후 신생아 유기를 하게 되는 사회적 분위기와 불리한 법, 심리적인 이유까지 홀로 공부를 하며 관련된 법을 청원하고 다수의 시민단체의 협조를 이끌어내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게라스 씨의 노력으로 일리노이 주에는 ‘유기신생아 보호법’이 생겨났고, 지난 10년간
신생아 유기 범죄가 63건밖에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게라쓰 씨는 그 중 30명의 아이가 목숨을 잃었고, 이제는
전국적으로 버림받는 신생아가 없도록 노력을 해야 할 때라며 이제부터 더욱 할 일이 많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나 혼자 뭘 할 수 있겠어?’, ‘혼자서 그렇게 해 봤자야’, 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많은 귀감이 되는 예화입니다. 나 혼자라도
해야 할 일을 마땅히 할 때 하나님은 우리를 엘리야처럼, 다니엘처럼 사용해 주십니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을 깨닫고 행하는 하루를 사십시오.
주님! 필요한 일이라면 우선 시작하는 용기를 주소서!
해야 할 일이라면 두려워말고 용기 있게 시작하십시오.
<김장환 큐티365/나침반출판사>
인연(因緣)
인연(因緣)이란 말은 왠지 불교적인 용어로 느껴져 잘 사용하지 않는 데, 개역 한글 성경을 찾아보니 왕상 3:1에 “솔로몬이 바로와 인연을 맺었다”는 말이 있어서 인연(因緣)이란 말은 불교적인 용어가 아니라 기독교에서도 사용하는 단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F.M. 뮐러는 “독일인의 사랑”이란 글에서 “인간이 이 세상에서 사는 것은 별이 하늘에 있는 것과 같은 것이에요. 별들은 저마다 하나님에 의하여 규정된 궤도에서 서로 만나고 또 헤여져야만 하는 존재에요. 그것을 거부하는 것은 전연 무모한 것이든가 그렇지 않으면 세상의 모든 질서를 파괴하는 것이에요”라고 하였다. 인연은 하나님이 정하신 것인 데, 거부할 때 질서가 파괴된다. 반면에 인연을 아름답게 발전시킬 때 삶을 윤택하게 하고 더 아름다운 사회를 이루게 된다는 뜻이다.
1984년 독일에 교민교회의 선교사로 파송을 받아 사역할 때 부목사로 섬겼던 등촌교회 주일학교 학생들이 위문편지를 보내어 한 장 한 장 보면서 향수를 달래고 힘을 얻었다. 그 중에 유일하게 한 주일학생이 쓴 “선교사님 저도 커서 선교사님과 같이 말씀을 전하는 목사가 되겠어요”라는 내용의 편지를 읽었다. 한 순간의 감정이겠거니, 또 목회의 어려움을 모르고 꿈만으로 생각하는 거겠거니, 그렇게 치부하면서 “좋은 꿈을 가졌는 데, 지금은 열심히 공부해야 할 때”라는 것을 강조하여 답을 보냈다. 그 후 몇 년에 한 번 씩 그로부터 소식을 받게 되었다. 그리고 소식이 끊어졌는 데, 누군가로 부터인지는 모르지만 신학교에 갔다는 소문을 듣기도 하였다. 그리고 몇 년 전에 미국으로부터 새해 인사를 올리는 멜을 받았다. 그 학생은 나를 항상 기억하며 소식을 끊지 않고 인연을 지속시켰는 데, 그러나 나는 그의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기억하지 못하는 비정한 사람이 되어버렸다.
지난 6월에 미국 시에틀에서 있었던 ‘해외 동포를 위한 교육정책협의회’ 때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이름으로만 알던 목사님을 만나 얼굴을 알게 되었고 여러 교회의 성도님들을 만나 인연을 맺기도 하였다. 28년 만에 만난 새벽기도의 동지가 장로가 되어 신실하게 교회를 섬기고 있고, 주일학교 교사로 헌신하던 집사님이 권사가 되어 그 가정에 하룻밤을 묵었고, 대학생이던 여학생이 결혼하여 어엿한 주부가 되어 있는 모습을 보며 감사하였다. 반면에 아무도 모르게 아픔과 시련 속에서 사는 사람도 있었다.
많은 만난 사람 중에 앞서 이야기한 그 주일학생을 워싱튼 공항에서 만났는 데, 토론토 대학에서 박사공부를 하면서 목사가 되어 교회를 맡아 섬기고 있었다. 고신석 목사다. 그 교회에서 수요일 밤 설교를 하면서 “인연(因緣)”이란 참 오묘한 것이라는 생각을 하였다. 고신석 목사를 기도의 수첩에 기록하여 그 인연을 아름답게 세워가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누구와 갖는 인연이라도 파괴적인 끝을 맺어서는 안 되고 맺어진 인연을 아름답게 세워가야 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최한주 목사<푸른숲교회>
경쟁에 찌든 한국인
“한국인은 어디서든 경쟁으로 찌든 삶을 살고 있다”. 이는 한.미 양국에서 한국인의 모습을 영상으로 기록한 미국 켈리포니아대학 버클리 캠퍼스 저널리즘 전공대학원생들의 결론이다. 다음은 7월 9일자 국민일보에 실린 내용을 요약한 것이다.
영상에 등장하는 11살 짜리 한국 초등학생은 주중에 자유롭게 놀 시간이 거의 없다. 영어, 수학, 컴퓨터에 체육까지 개인 과외를 받기 때문이다. 특수부대 출신인 아버지와 여행사를 운영하는 어머니는 아이에게 최고의 교육 기회를 제공하고 싶어 한다. 초등학생은 과학자가 되기를 원하지만 부모는 힘 있는 사람이 되길 원한다. WP지(紙)는 “많은 부모들이 혹독한 교육을 시키면 보상을 받을 거라고 믿는다. 기대와 스트레스가 모두 높은 환경”이라고 전했다.
리포트는 한국에서 경쟁은 ‘평생 지속형’임을 보여준다. 의경을 제대한 20대 청년은 집을 떠나 서울 노량진 고시원에 살면서 경찰 시험 준비에 몰두한다. “최소 수개월에서 수년 동안 이런 생활을 해야 하는 게 현실”이다.
서울 이화여대 앞에서 닭꼬치를 팔아 생계를 유지하는 50대는 출판사업이 망하자 노점상을 시작했다. 가장 힘들었던 건 주변의 시선이었다. WP지는 “한국에서는 직장을 잃었다가 재기하기가 정말 어렵다. 중년 남성들은 체면 때문에라도 직장을 유지하기 위해 분투중이라”고 전했다.
새로운 기회를 찾으려고 한국을 떠나 미국으로 간 한국인의 삶도 녹록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제 2의 박세리를 꿈꾸며 열네 살 때 미국으로 골프 유학을 떠난 20대 여대생은 최근 프로로 전향을 포기하고 귀국을 계획 중이다. 가족의 가치가 다른 무엇보다 귀중하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민 2세 가운데는 부모의 바람과 다른 길을 택하는 경우도 많다. 한 중년 여성은 회사를 그만두고 남편과 함께 패스트푸드점을 열었다. WP지는 “한국인 부모들은 의사, 변호사 등 전문적 직업을 갖기를 원하지만 자식들은 그렇지 않다”고 지적하였다.
아내의 교통사고를 계기로 미국에 정착해 농부가 된 중년 남성은 이제야 속도가 느린 삶을 만끽한다. 미국에서 삶에 지친 한국인들은 나이가 들수록 더 진한 향수를 느껴 아예 한인타운 근처로 이사하는 경우가 많다. 로스엘젤레스에 거주하는 70대 할머니는 매일 새벽 한인타운에 있는 맥도날드 가게로 열심히 ‘출근’하고 있다. 다른 한국 노인들과 수다를 떨 수 있는 유일한 장소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주어진 삶 속에서 하나님과 관계를 이루며 살기를 원하신다. 외적인 조건의 문제가 아니다. 다른 사람보다 더 나은 환경이나 질의 문제도 아니다. 내 모습 이대로 받으시는 하나님이시다.
최한주 목사<푸른숲교회>
세 가지 법정
동물의 세계는 약육강식이다. 이것이 그들의 세계를 이끌어 가는 질서다. 그러나 사람은 그렇지 않다. 인간사회의 질서를 유지시키는 규칙이 있다. 이에 따라 인간관계와 사회생활을 한다. 이는 곧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세 가지 법정의 역할이다.
첫째는 양심의 법정
사람에게는 양심이 있다. 로마서 2:14-15절에서 “율법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송사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고 하였다. 누가 보지 않아도 양심이 판단하므로 바로 돌아서게 된다. 그러므로 성경은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깨긋한 양심”“착한 양심”을 가지라고 한다. 그런데 때로는 이 양심의 법정이 마비될 때가 있다. 이를 가리켜 “화인 맞은 양심”이라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는 아무리 악한 일을 해도 바로 가책을 받지 않고 바른 길로 돌아서지 않는다. 그런데 양심이란 게 상황에 따라 달라지기도 한다. 개인의 양심만으로 전체를 이끌 수 없다. 양심의 법정이란 중요한 것이지만 이것만으로 전체 공동체를 이끌지 못한다.
둘째는 세상 법정
세상 법정은 나라를 다스리거나 백성의 질서를 유지하며 안녕을 도모하기 위해 세운 법을 집행한다. 세상에는 불의와 죄악이 존재하기 때문에 질서를 흐트러뜨리기도 하고 약한 자들의 권익을 저버리는 일이 있다. 이런 것을 방지하고 공평하게 권익을 누리기 위해 필요한 것이 세상 법정이다. 이로 말미암아 평안과 질서가 세워진다. 그러나 세상 법정도 공의롭지 못할 때가 있다. 사람이 재판관이기 때문에 때로는 권세자가 이를 이용하기도 하고, 교모한 방법으로 다른 사람의 권익을 무너뜨리기도 한다. 인간의 지혜와 지식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때로는 잘못 판단해서 법 적용이 잘못되는 경우도 있고, 형평성을 잃는 경우도 있다.
셋째는 하나님의 법정
하나님의 법정에 재판관은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사랑과 공의의 하나님이다. 그러므로 모든 것을 바르게 판단하신다. 어떤 것도 하나님 앞에 숨길 수 없고, 하나님이야말로 가장 공의로운 재판관이시다. 하나님의 법정에서 인정받는 자라야 승리자다. 모든 것이 벌거벗은 것같이 다 드러나는 데, 이 법정에서 인정받을 때 가장 행복한 사람이다. 반면에 이 법정에서 책망 받을 때 영원한 멸망을 당하게 된다. 하나닙의 법정에서 인정받아야 한다.
최한주 목사<푸른숲교회>
세 가지 병
“인간은 울면서 태어나 병과 더불어 살다가 병으로 간다."는 말이 있다. 그만큼 병으로 말미암는 인간의 고통이 크다는 말이다. 그런데 사람에게 나타나는 병은 세 가지다. 이 병을 잘 알고 치료하게 될 때 건강하게 산다.
첫째 ; 육신의 병
베데스다 못가에 각양 질병을 가진 사람들이 있었듯이 사람에게는 헤아릴 수 없는 육체의 병이 있다. 병원마다 사람들이 가득하다. 어떤 것은 병명과 원인을 규명해서 치료하는 병이 있지만, 어떤 것은 이름도 알 수 없을 뿐 아니라 치료도 할 수 없는 병이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병은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는 것으로 이 병을 치료하기 위해 갖은 노력과 돈과 세월을 허비한다. 때로는 병을 알고 치료할 수 있다 하더라도 또 다른 병이 나타난다.
둘째 ; 사회의 병
사회가 건전하지 못할 때 병든 사회라 한다. 인간사회에는 여러 가지 부정부패와 부조리가 있다. 뿌리깊이 내린 범죄 조직이 있고, 성적으로 타락한 갖가지 사회현상과 생명을 파리 목숨보다 못하게 생각하는 악한 집단도 있다. 이런 사회 병은 독버섯처럼 점점 넓게 퍼지고 있다. 사회의 병으로 가정윤리도 파괴되고, 사회윤리와 인간윤리가 점점 부패해져 간다. 하루라도 병든 사회의 모습을 비추지 않으면 뉴스가 안 되듯이 매일 매스컴에 병든 사회의 모습이 보도되고 있다.
셋째 ; 영혼의 병
영혼의 병은 내 영혼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졌던지 잘못된 상태를 가리킨다. 육체의 병과 사회의 병은 피부로나 생활 가운데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영혼의 병은 그런 느낌으로 알 수 있는 게 아니다. 영혼이 병든 사람이 버젓이 활보하며 다닐 수 있다. 뿐 아니라 각양 단체와 심지어 교회에서도 지도자로 활동할 수 있고, 사회에서 갖은 특권과 영화를 누릴 수 있다. 이 병이 최악의 병이다.
사람들은 육체의 병과 사회의 병에 대하여는 많은 관심을 가진다. 고민도하고, 때로는 많은 노력과 경비를 들여 캠페인을 벌이고 추방하기 위해 투자하기도 한다. 그러나 최악의 상태인 영혼의 병에 대하여는 무관심하다. 성경은 ‘영혼’을 치료할 때 다른 병도 치유할 수 있다고 하였다. 요한3서 2절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최한주 목사<푸른숲교회>
세 가지 선물
하나님은 우리가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살도록 귀한 선물을 주셨다. 이 선물을 통해 나님의 나라를 세우고 이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삶을 살게 하셨다. 세 가지 선물은 달란트, 직분 그리고 은사다. 이를 통해 더 하나님을 신실하게 섬기고 이 땅 위에서 가치 있는 삶을 살게 하셨다. 하나님이 주신 선물을 잘 활용할수록 더 귀한 삶을 살 수 있다.
1. 달란트(재능)
이 재능은 사회나 공동체 생활에 필요한 것이다. 모든 사람은 각각의 재능을 가지고 있다. 어떤 사람은 수학을 잘하고 어떤 사람은 미술을 잘한다. 또 체육에 소질이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음악에 소질이 있는 사람도 있다. 사람에게는 각양 재능이 있어서 이들이 합하여 사회와 공동체를 형성한다. 만일 수학만 잘 하는 사람이 모여 산다면 그 사회는 어떠하겠는가? 다양한 재능을 가진 사람들이 자신의 재능을 선한 사역을 위해 능력 껏 발휘할 수록 훌륭한 사회와 공동체를 이룬다. 그러므로 내가 가진 재능이 어떠한가를 확인하고 선한 사역을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2. 직분
이 직분은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위해 필요한 것이다. 교회에는 목사. 장로, 집사와 권사와 같은 각양 직분이 있다. 계급으로서의 직분이 아니라 섬김으로서의 직분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교회를 잘 섬기게 하기 위해서 이와 같은 여러 가지 직분을 각각에게 주셨다. 그러므로 직분을 맡은 자는 그 직분을 활용하므로 교회가 잘 되고 번성하도록 해야 한다. 자신이 직분을 행하므로 교회가 어려워지고 쇠하여진다면 이는 직무를 잘못 행하는 것이다.
3. 은사
하나님과의 영적인 교통과 영적인 사역을 위해 각양 은사를 주셨다. 신유, 방언, 예언과 같은 은사 뿐 아니라 구제와 가르치는 일과 같은 일을 사역을 행하는 것이다. 직분이 없어도 은사는 받을 수 있다. 그래서 바울은 “신령한 은사를 사모하라”고 하였다. 왜냐하면 이로 말미암아 보다 열정적으로 믿음 생활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재능과 직분과 은사는 모두 하나님이 주셨다. 그러므로 자신의 것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것까지 존중히 여겨야 한다. 내가 받은 재능을 통해 사회가 잘 되고, 내가 받은 직분을 통해 교회가 잘 되고, 내가 받은 은사를 통해 내 영혼이 잘 되게 해야 한다.
최한주 목사<푸른숲교회>
세 가지 양식
사람은 나서 죽을 때가지 여러 가지를 습취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라지 못할 뿐 아니라 생명 자체가 죽은 자가 된다. 그래서 이것을 양식이라고 표현하였다. 그런데 사람이 섭취하는 이 양식을 구분해 보면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1. 육체의 양식
사람의 구성요소 중에 육체가 있다. 이 육체를 위해 남녀서부터 부지런히 먹는다. 어머니는 자식이 잘 자라도록 젖을 먹이기도 하고 사람은 자라면서 스스로 먹는 법을 배운다. 만일 육체를 위해 아무것도 먹지 않으면 죽을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사람은 잘 먹으므로 건강한 육체를 유지한다.
2. 지적인 양식
사람은 함께 살면서 공동체를 이루고문명과 문화를 발전시키면서 더 나은 삶의 환경을 추구한다.
이를 위해서 필요한 것이 지식의 양식이다. 예를들면 컴퓨터 문명의 발전으로 10년 전에는 생각하지도 못했던 일들을 하게 되고 갖가지 삶의 질을 향상시켰다.
만일에 지적인 양식을 섭취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사회생활을 할 수 없을 뿐 아니라 문명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게 될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보다 많이 배우으로 사회 속에서 우수한 삶을 살려고 힘쓴다.
3. 영적인 양식
사람은 육체만으로 되어진 게 아니다. 영적인 존재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영적인 부요함을 얻기 위해 영혼을 잘 되게 하는 양식을 먹어야 한다. 그래서 예수님도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으로 살 것이니라”고 하셨다. 무어보다 귀중한 양식이 바로 영적인 양식이고 영적인 양식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다.
만일 영적인 양식을 먹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는가? 그 영혼에 갖가지 부패한 것이 쌓이게 되고 인간의 존재가치를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사람은 영혼의 양식을 부지런히 섭취하므로 영적으로 부요함을 누려야 한다. 그래야 인간의 존재가치를 회복하게 될 것이다.
세 가지 양식을 잘 섭취하고 있는가? 이 세가지 중에 한 가지라도 잘 섭취하지 못한다면 영과 혼과 및 육체로 구성되어진 우리의 모습이 한 편이 일으러지게 될 것이다. 그러면 모든 부분에서 어긋난 삶을 살게 된다. 특별히 영적인 양식은 더욱 그렇다. 그래서 성경말씀은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범사가 잘되고 강건하기를 원하노라”고 하셨다.
최한주 목사<푸른숲교회>
주일학교의 시작
18세기 영국 사회는 그 어느 때보다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부패하였다. 빈부격차가 극심해지고 거리에는 실직지자들과 알콜 중독자들이 붐볐다. 무서운 전염병으로 어린아이들이 대량으로 죽어가고 있었고 문맹자들로 사회에서 버려지고 있었다. 이 때 한 신문업자였던 로버트 레이크스(Robert Raikes)는 부요한 생활을 하며 당시 귀족들이 입는 값비싼 의복을 걸치며 멋쟁이로 다녔다. 그런 그가 불안한 영국사회와 국가의 장래와 인류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처음에 그는 범죄예방을 위해 감옥소 개혁운동에 참여하였다. 불결한 감옥을 개선하고 죄수들의 갱생을 위해 감옥내의 교육진흥활동에 힘썼다. 결과 1774년에는 의회로 하여금 감옥법령을 제정케 하여 새롭게 감옥소를 건축했다. 그러나 아무리 환경을 개선하고 교육하여도 죄수들은 출옥한 후 한 달도 못 미쳐서 다시 감옥으로 들어오는 현실을 보며 사회의 악과 범죄의 원인이 무지의 결과임을 깨닫고 근본적인 치유를 위해 아동들에게 관심을 갖게 되었다.
신실한 그리스도인이었던 레이크스는 주일 아침에 어린아이들을 모아 주일에 예배를 드리게 했다. 노동에 종사하고 거리에 버려진 어린아이들을 교육하기 위해 자기 집을 개방하였다. 자신의 재정으로 숙련된 교사를 고용하고 아동들의 전인교육에 힘썼다. 굶주린 아이들에게 먹을 것을 주고 배우지 못한 아이들을 가르치며 하나님 말씀과 일반교육을 병행하여 오전 8시에서 오후 5시까지 전인교육을 시행하였다. 이것이 주일학교의 시작이었다.
이것이 당시 교구 담임자였던 토마스 프톡 목사의 도움으로 글로스터에 6개의 주일학교가 설립되었다. 그는 자신의 신문에 주일학교에 관한 기사를 실으므로 주일학교 운동이 급속도로 번졌고 초기에는 감리교회가 적극 참여하였다. 1785년에는 “주일학교 촉진 협의회”가 창립되었고 이로부터 2년 후 주일학교에 등록한 학생이 무려 25만명에 달하게 되었다. 1791년에는 미국으로 건너가 필라델피아에서도 같은 협의회가 조직되어 급속히 주일학교 운동이 온 세상으로 확산되었다.
처음에는 교회가 운영하는 학교로 시작하였으나 후에는 교회는 주일학교 역할을 하고 일반교육은 일반학교에서 가르치게 하였다. 레이크스의 주일학교는 어려서부터의 말씀과 일반교육과 삶에 대한 전인교육에 대한 관심을 일깨웠다.
1811년 4월 15일 레이크스가 세상을 떠나는 날 눈물과 웃음이 가득한 어린이들의 잔치 날이 되었다고 한다. 그는 유서에 “내가 죽는 날 나의 저축한 저금을 아동들을 위해 사용해주시오. 이것으로 우리 동네 글라우스터 어린이들 모두에게 1씰링씩 나눠주고 케이크 한 개씩 선물로 주기를 바라오”라고 하였다. 그의 관심은 영국의 사회병을 근본적으로 치유하였다.
최한주 목사<푸른숲교회>
러시아-찬란한 기독교 국가
러시아를 가리켜 “찬란한 기독교 국가”라고 한다면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나 1917년 10월 레닌의 볼쉐비 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 세계에서 가장 찬란한 기독교적인 국가였다. 제2의 도시를 페테스부르그-베드로의 언덕이라 부른 것만 봐도 짐작할 수 있다.
세계 기독교는 1988년 러시아 선교 1,000주년 기념행사를 가졌다. 주후 988년은 러시아 대공 블라디밀이 개종함으로 러시아가 기독교를 받아들인 해다. 믿기 이전의 블라디밀은 탕아였다. 5인의 부인과 800인이 소실을 두고 많은 이교사원을 건축했으며 잔인하였다.
그가 정권을 잡은 뒤 러시아를 통일하기 위해 종교적인 통일의 필요성을 인식했다. 그 때 콘스탄티노플의 소피아 사원의 예배와 사절단의 보고를 받는다. “우리는 천국에 있는지 지상에 있는지 분간할 수 없었습니다. 지상에 그렇게 웅장하고 아름다운 곳은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며 예배의 극치를 경험했습니다. 그 아름다움은 잊을 수가 없습니다”고. 결과 블라디밀 대공은 당시 세계에서 가장 부하며 문명화된 비잔틴 제국의 국교(동방정교)를 택하였다.
블라디밀은 988년 기독교로 개종하고 989년 비잔틴 제국의 바실 2세의 누이동생이며 당시 최고의 미녀였던 Anna를 부인으로 맞이한다. 그리고 키에프 주민에게 칙령을 내려 드니퍼 강에 와서 세례를 받을 것을 명한다. 블라디밀의 생활도 변했다. Anna 공주와 결혼한 뒤 5명의 부인과 헤어진다. 그가 세웠던 이교 신전들을 파괴하고 교회를 세웠다. 학교를 세우고 고아와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며 전쟁을 그치고 평화를 유지한다. 더욱이 놀라운 것은 사형제도를 폐지한 것이다.
비잔틴 교회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이나 신앙생활에 중심을 두기 보다는 웅장한 건물, 예배의 아름다움, 하나님의 용서가 중심이었다. 수도사들은 블라디밀의 회심과 성경 따르면서 펼치는 그의 정책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수 세기 후 모스크바가 러시아의 수도가 되었을 때 모스크바는 기독교 제국의 수도로서 로마와 콘스탄틴에 이어 제 3의 로마로까지 불리웠다. 그는 세계에서 가장 광대한 기독교 국가를 건설하였다.
자원이 풍부한 땅, 교회와 수도원이 세워진 땅, 수많은 성자와 순교자가 배출된 곳, 너무도 아름답고 웅장한 교회 음악의 산실, 풍부한 성자 상이 있고 기독교 문학의 효시인 기독교 국가가 이렇게 세워졌다. 1015년 블라디밀이 사망할 때 자신의 사유 재산을 굶주린 사람들에게 나눠주었다.
불행하게도 국교로서 러시아 정교회는 짜르 정부와 너무 오랫동안 밀착하여 정부의 지배를 받으므로 부패하게 되고 힘을 잃게 된다. 그러므로 1917년 10월 볼쉐비 혁명이 일어났을 때 완전 무방비상태였다. 그 찬란한 기독교 국가가 그렇게 막을 내렸다.
최한주 목사<푸른숲교회>
참 고난과 거짓 고난
요즘 스마트폰을 갖고 있는 초등학생들이 많습니다. 그 아이들은 게임을
합니다. 스마트폰이 없는 아이들은 부러운 눈으로 쳐다보며 자기도 게임을 하게 해달라고 부탁합니다. 그러다 자존심이 상한 아이는 부모에게 스마트폰을 사달라고 조릅니다. 소신
있는 부모는 아이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습니다. 아이는 스마트폰을 사주지 않는 부모를 원망하고, 자신의 신세를 한탄합니다.
고난주간을 맞아 우리가 당하는 고난을 점검해 보길 원합니다. 현재의 어려움을 과연 성도의
고난이라 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께 이로부터 벗어나길 바란다는 간구를 올릴 만한 것일까요? 아마 대부분은 위의 사례처럼 자신의 욕심이 채워지지 않는 것에 대한 불만일 것입니다. 누구는 진학하고, 누구는 취직하는데 자신은 못해 속상합니다. 좋은 차를 타고, 좋은 집에 사는 이들이 부럽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해결되지 않는 질투심과 채워지지 않는 욕심을 고난으로 여깁니다.
또 스스로 뒤집어 쓴 욕심의 굴레를 하나님이 해결해 주셔야 하는 성도의 고난이라 생각합니다.
시편은 고난을 당함으로 주님의 말씀을 깨닫고 준행하게 된다고 합니다. 과연 지금 우리가
고난이라 여기는 것을 통해 정말 그런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요. 성도의 고난이 아니면서 고난인 척하는
거짓 고난을 벗어버리고, 주님을 따르는 성도이기에 받는 참 고난을 잘 감당하기를 원합니다.
강신욱 목사<남서울평촌교회>
범우주적인 업적
영국의 대문호 셰익스피어가 런던의 한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식당에
들어서는 사람마다 셰익스피어에게 정중하게 인사했습니다. 손님들의 관심은 온통 대문호에게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그때 현관을 청소하던 한 청년이 힘없이 빗자루를 던지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이를 본 셰익스피어는 식사를 멈추고 청년을 불러 왜 빗자루를 던졌는지 물었습니다. 청년은 답했습니다. “선생님은 위대한 작품을 쓰셔서 사람들이 눈을
떼지 못할 정도로 존경을 받고, 저는 고작 바닥이나 쓰는 보잘 것 없는 일을 하고 있으니 제 자신이
한심할 뿐입니다.”
셰익스피어는 청년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말했습니다. “그렇지 않다네. 자네와 나는 같은 일을 하고 있다네. 나는 펜으로 하나님이 지으신
우주의 한 부분을 표현하고 있지. 자네는 지금 하나님이 지으신 우주의 한 부분을 아름답게 청소하고 있지
않은가. 우리는 같은 일을 하고 있는 거라네.”
세상에는 학력의 차별도 있고 외모에 대한 편견도 있습니다. 그것은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시각으로 가늠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세상의 기준으로
우리를 판단하지 않으십니다. 당신이 그리스도인이라면 세상과는 다른 눈을 가져야 합니다. 당신이 하는 그 일이 하나님이 기뻐하는 일이라면 당신은 이미 ‘범우주적인
업적’을 쌓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고경환 목사(순복음원당교회)
사순절의 영성,연합
‘나이 먹다, 욕먹다, 잊어 먹다, 골(goal) 먹다, 사업 말아먹다, 감동 먹다’ 등
우리나라 사람들은 ‘먹는다’는 말을 많이 사용합니다. 이어령 이화여대 명예교수는 이런 비유에 대해 한국인들이 ‘네가 내가
되고, 내가 네가 되는 단일성, 통일성’의 감정을 ‘먹는 것’으로
표현하는 경우가 많다고 설명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먹다’라는 표현도 유의미합니다. 복음서에 기록된 최후의 만찬에서 주는 메시지는 ‘죄 사함’과 더불어 ‘한 몸의 결합, 함께
먹고 마시는 하나님 나라’입니다.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이것을 마시라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마 26:26∼28)에서 ‘먹고 마심’은
입으로 먹고 목으로 삼키어 내 몸이 되는 것입니다. 밥 없이 살 수 없듯이 예수님 없이 살 수 없는
것이 우리의 인생임을 깨닫게 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신 예수님과 한 몸으로 사는 삶, 그것이 ‘먹다’이며 ‘연합’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사순절을 보내며 여러 모양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며 말씀을 묵상했습니다. 흑암
속의 빛이, 처절한 겨울 끝의 봄이 더욱 소중한 것처럼 사순절의 간절한 씨름과 참회는 우리로 하여금
놀라운 부활의 기쁨을 누리게 합니다. 고난주간을 보내고 있는 우리 모두가 예수님과 온전히 연합해 찬란한
부활의 열매와 희망을 마주하게 되길 기도합니다.
이인선 목사(서울 열림교회)
다 이루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당신의 삶을 정리하시면서 “다 이루었다”고 하셨습니다(요
19:30).
3년간 진행된 예수님의 사역은 안타까울 정도로 짧았습니다. 예수님을 만나 죄 용서를 받고
병을 고침 받으며 새 생명을 받은 사람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눈먼 사람, 억울하고 가난한 사람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았습니다. 그런데도 주님은 “테 텔레 스타이!(다 이루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고백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삶의 중요한 원리를 배울 수 있습니다. 우리는 모든
일을 다 이루는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내게 하라고 하신 그 일을 하며 살 때 가장 영광스러운
삶을 사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요17:4) 이 땅에서 해야 할 예수님의 가장 중요한 일은 십자가에서 피 흘리심으로 인간을 구원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목적으로 예수님을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일에
집중하셨고 마침내 그 일을 이루셨습니다. 그래서 다 이루었다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십시오.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은 세상에서
성공한 삶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하라고 하신 삶을 사는 것입니다.
한재욱 목사(서울 강남비전교회)
데텔레스타이(다 이루었다)
십자가에 달린 주님께서 하신 일곱 마디 말씀 ‘가상칠언’ 중 여섯 번째로 하신 말씀이 “다 이루었다” 입니다. 이어 주님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시며 돌아가셨습니다. ‘다
이루었다’는 희랍어로 된 열 개의 단어인데, 이 짧은 말은 ‘테텔레스타이(tetelestai)’입니다. 당시 흔하게 쓰이던 말입니다. 화가가 그림을 완성한 후 남긴 말이었고, 상인이 모든 부채를 변재한 후 홀가분한 기분으로 던진 말도 이 말이었습니다.
심부름꾼이 심부름을 모두 마친 후 자신을 보낸 주인에게 돌아와 하는 보고도 이 말이었고, 성전에
있는 제사장이 제사에 사용할 제물을 살펴본 후 최종적으로 내린 결론도 바로 이 말입니다. 테텔레스타이! “흠 없이 완전하다” 혹은 “다
마쳤다”는 말입니다.
기실 우리 주님은 ‘흠 없고 티 없는’ 완전한
제물로서 속죄제물이 되신 것입니다. 서른 셋의 나이, 남들은
예비군 훈련도 마치기 전인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그리스도로서의 모든 임무를 완수하시고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짧은 한마디로 구원을 이루신 것입니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우리
모두는 떠나갈 인생이지요. ‘테텔레스타이’라 말하고 떠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죽는 게 두려운 것이 아니다. 한
번도 제대로 살아보지 못한 게 두려운 것이다.” ‘레미제라블’의
작가 빅토르 위고의 말이 생각나는 고난주간입니다.
정학진 목사<포천 일동감리교회>
죽음은 새로운 시작입니다
고백교회 설립자 중 한 분인 디트리히 본회퍼 목사님은 제2차 세계대전 중 히틀러 암살 계획에 가담한 죄목으로 2년간 옥중생활을 하다 1945년 4월 플로센뷔르크 강제수용소에서 처형됐습니다. 히틀러 정권에 모두가 입을 다문 그때에 분연히 일어서서 양심의 입을 열었던 신앙인이자 신학자였습니다.
그분은 교수대로 끌려가기 전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이것이 마지막입니다. 그러나 나에게 있어선 삶의 시작입니다.” 신앙과 행동이 일치되는 삶을 살았던, 그러면서 행동하는 신앙인의 모습을 보여줬던 그분이 남긴 말은 ‘죽음이 곧 삶의 시작’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죽음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입니다. 가을까지 온
야산을 화려하게 물들였던 이름 없는 들꽃도 자신의 소임을 다하며 고독한 겨울 품으로 사라진 듯 보이지만 그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만물이 생동하는 새 봄에 봄기운을 타고 다시 그 자리에 새싹을 틔워냅니다. 그리고는
다시 아름다운 꽃을 사방에 뽐내며 보는 이로 하여금 행복한 미소를 짓게 합니다. 우리는 다시 예수 부활의
영광을 찬양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는 부활주일을 보냈습니다. 이제 부활의 소망을 간직하면서 교회에 갇혀
있는 신앙이 아닌 행동하는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체험적인 신앙인의
마땅한 신앙고백입니다.
이일성 목사(군산 풍원교회)
최악은 최선이 될 수도
탈무드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랍비 아키바가 여행을 하고 있었습니다. 나귀와 개가 여행길에 동행했습니다. 밤이 어두워졌습니다. 아키바는 머물 곳을 찾다가 마침 헛간 하나를 발견하고 거기서 밤을 지내기로 했습니다. 잠자리에 들기 전 갖고 있던 등잔을 켜고 책을 폈습니다. 그때 갑자기
바람이 불어왔고 불이 꺼졌습니다. 아키바는 할 수 없이 잠을 청했습니다. 그가 자는 사이 여우가 나타나 개를 물어 죽였습니다. 또 사자가
나타나 나귀를 잡아먹었습니다. 해가 뜨자 그는 등잔만 들고 혼자 길을 떠났습니다.
얼마 후 가까운 마을에 도착했는데 살아있는 사람들의 흔적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전날 밤
도둑들이 마을을 습격해 주민들을 전부 살해한 것이었습니다. 아키바는 생각했습니다. ‘만일 바람에 등불이 꺼지지 않았더라면 나도 도둑들에게 발각되어 죽임을 당했을 것이다. 만일 개가 여우에게 물려 죽지 않았더라면 개가 짖어댔을 것이고, 나귀가
사자에게 물려 죽지 않았더라면 나귀가 소란을 피웠을 것이다. 그랬더라면 역시 도둑들에게 발각되었을 것이다. 내가 가진 것을 몽땅 잃었기에 나는 죽음을 면할 수 있었다.’
때때로 최악의 상황은 최선으로 통하는 전화위복이 될 수 있습니다. 오늘이 최악이라고 포기하지
마십시오.
고경환 목사<순복음원당교회>
올바른 기도의 응답
미국에서 남북전쟁이 벌어지고 있었을 때입니다.
북군의 사령관인 조지 워싱턴은 남군의 고든 장군을 샵스버그 전투에서 대파해 기나긴 전쟁의 승기를 거의 잡았습니다. 다음 전투가 벌어지기 전날 밤, 남부 연맹군의 고든 장군과 모든
장교들은 막사에 모여서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습니다. 뜨겁게 기도를 드린 남군의 장교들은 다음 날 전투부터는
자신들이 승리할 것을 확신했습니다. 그러나 다음 날 전투에서도 패배를 했습니다. 그럼에도 결국은 승리하리라는 굳건한 믿음은 여전히 변함없었습니다. 하지만
고든 장군의 진영은 내리 다섯 번의 전투에서 패배하며 결국 북군의 승리로 전쟁이 끝났습니다.
훗날 고든 장군은 그때의 기도를 두고 전쟁에 패배한 것이 오히려 하나님의 응답이었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때 고든 장군이 승리를 했다면 미국은 지금도 노예 제도와 극심한 인종차별이 존재했을 것이며 워싱턴의 뛰어난 통치 없이 그저 평범한
나라로 전락했을 수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편에 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편에 서야 합니다. 나에게 초점을
맞추는 잘못된 기도의 습관을 버리고 하나님의 편에 서기를 간구하는 진실한 기도를 드리십시오.
주님! 주님의 뜻을 묻고 응답에 귀 기울이는 바른 기도를 하게 하소서!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라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김장환 큐티365/나침반출판사>
잘못된 영향력, 잘못된 사용
1961년도에 프랑스에서 한 유괴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대형 자동차 회사의 사장 아들이 납치되었던 커다란 사건이었는데, 범행이 너무 완벽해서 수사가
쉽지 않았습니다. 약 200여명의 경찰이 동원되었고, 연방수사국과 인터폴까지 합세를 해서 수사를 했지만 1년이 넘는 시간이
걸렸습니다.
다행히 1년 6개월 만에 유괴범들을 잡게 되었고, 유괴사건이 거의 없는 프랑스에서 어떻게 거의 완벽한 범죄가 일어날 수 있었는지 경찰들은 범인들을 심문했습니다.
결과는 매우 놀라웠는데 이들은 단지 ‘강탈자’라는
미국의 한 추리소설을 보고 거기에 나오는 그대로 범행을 준비했을 뿐이었습니다. 책에 범행에 대한 내용이
워낙 세밀하고 짜임새 있게 나와 있었기에 그대로 모방했을 뿐인데도 거의 2년에 가까운 시간이 걸려서야
범인을 잡을 수 가 있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같은 책을 읽었다고 범죄자가 되지는 않지만, 그래도 어떠한 책이 줄 수 있는
특정한 영향력은 분명히 있습니다. 책뿐 아니라 우리가 하루 동안 살면서 보고 듣고 생각하는 모든 것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모든 것과 시간과 삶을 잘 사용하여 잘못된 영향력에 빠지지 마십시오.
주님! 세상의 잘못된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나게 하소서!
최근 나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주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보십시오.
<김장환 큐티365/나침반출판사>
마음의 쿠션
작가 조신영 씨는 자신의 책 ‘쿠션’을
통해 우리 인생에는 수많은 불행들이 산재해 있는 것이 현실이라고 말합니다.
재해, 전쟁, 기근, 중독, 갈등, 이별, 사별, 실패, 허무감, 질병 등등 다 열거하기도 힘들 정도로 괴롭고 힘든 일들이 언제나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런 일들이 연달아 일어나는 고단한 삶이라 할지라도 기독교적인 평안을 추구할 수 있는 방법 역시 있다고
말합니다. 외부로부터 오는 자극을 마음속의 쿠션을 통해 완화시키고 무언가 교훈을 얻음으로써 다른 사람과는
다른 반응을 하게 되고, 이 과정에서 긍정적이고 희망적인 일들이 생기며 반응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주어집니다. 이것을 공식으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반응 + 능력 = 자유」
그런데 이런 공식을 어떤 이유로 기독교적 평안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특별한 선물이 바로 자신의 반응을 선택할 수 있는 힘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어려움과 마주하더라도 그리스도인들은 먼저 그 문제를 하나님께 가지고 나와야 합니다. 하나님은
나의 상황과 나의 마음을 모두 알고 계십니다. 나를 위로하시고 또한 환경을 이길 힘을 주시는 하나님께
모든 것을 가지고 나아가십시오.
주님! 인생의 문제가 있을 때 먼저 주님께 가지고 나오게 하소서!
항상 선한 반응을 선택할 마음의 힘을 위해 주님께 간구하십시오.
<김장환 큐티365/나침반출판사>
인정받는 끈기
보스턴에 살던 한 청년이 회계사를 고용한다는 신문 광고를 보고 이력서를 보냈습니다. 며칠을 기다렸으나 붙었는지 떨어졌는지 아무 연락도 없었습니다. 청년은
주소가 맞는지 신문 광고를 다시 살펴본 뒤 다시 이력서를 보냈지만 여전히 어떠한 회답도 없었습니다. 청년은
우체국에 가서 자신의 사정을 설명하고 자신이 우편을 부친 사서함 1720호와 연결된 주소와 수신인을
가르쳐 달라고 간절히 부탁했지만 규정상 가르쳐 줄 수 없다는 대답만 돌아왔습니다.
청년은 다음 날 새벽에 일어나 우체국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사서함 1720호에서 우편물을 꺼내는 집배원을 확인한 뒤에 박스에서 수거한 물건을 배달하는 지역을 확인하기 위해 쫓아갔습니다. 그리고 쫓아다닌 결과 1720호와 연결된 곳이 시내의 증권 중개소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바로 그 사무실로 들어가 담당자를 만나 자신이 수차례 이력서를 보냈는데
어째서 아무런 회답조차 주지 않느냐고 따졌습니다. 담당자는 그건 그렇고 도대체 어떻게 여기를 알게 되었는지
물었고, 청년은 자초지종을 설명했습니다. 청년의 이야기를
다 들은 담당자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습니다.
“내일부터 회사에 나오십시오. 당신은 방금 우리 회사 면접을 통과했습니다.”
끈기 있는 사람은 열정 있는 사람입니다. 끈기 있는 사람은 포기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선한 일에 열정을 갖고 포기하지 않는 끈기 있는 사람이 되십시오.
주님! 복음과 사명의 열정을 갖고 포기하지 않게 하소서!
포기하지 않는 사람은 실패하지 않는 사람임을 깨달으십시오.
<김장환 큐티365/나침반출판사>
요나의 신학대학
한 목사님이 ‘요나가 나온 신학교’라는
설교를 한 적이 있습니다.
“요나는 물고기 뱃속이란 신학대학교를 나왔습니다. 제 말이 맞는지 들어보십시오.
첫째로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서 고난의 의미를 깨달았습니다.
둘째로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서 기도를 배웠고, 하나님과 교제를 시작했습니다. 이 변화를 통해 요나는 하나님께로 향하게 되었고 변화되었습니다. 환란을
통해 교훈을 배우자 주님은 졸업을 시키셨습니다. 그래서 물고기는 요나를 토해냈지요.
고난과 고통이 우리를 찾아올지라도 그 속에서 하나님을 더욱 알아가게 된다면 그것은 크나큰 축복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된 새로운 피조물로 태어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알게 되는 모든 일과
교훈들이 바로 우리들이 만나는 신학교입니다.”
주님을 알게 된 순간부터 우리는 새로운 삶을 살게 됩니다. 삶 속에서 만나는 많은 일들을
통해 주님을 더욱 알게 된다면 그것이 바로 축복이며 은혜입니다. 새로운 피조물에 합당한 생각과 마음을
품으십시오.
주님! 언제나 주님 안에서 모든 일을 행하는 삶이 되게 하소서!
고난을 통해서도 축복을 통해서도 성장하는 신앙의 삶을 사십시오.
<김장환 큐티365/나침반출판사>
남자의 눈물
남자가 눈물을 흘리는 일은 전 세계적으로 남성의 약함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통용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아주 오래전부터 요즘 시대까지 남자는 강해보여야 하며 감정적으로 무뚝뚝해야 된다는 사회적 분위기가 내려오고 있습니다. 남자는 아파도 울면 안 되고, 즐거운 일이 생겨도 티가 나게 기뻐하면
안 됩니다.
그러나 많은 심리학자들은 이런 마음의 태도가 오히려 남자들을 옭매어 감정적인 질식 상태에 빠트린다고 합니다. 자신의 감정을 억압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감정도 억압하기 때문에 한번 감정적인 어려움에 빠진 남성이 만약
가장이라면 곧 그 가정에서도 심각한 문제가 생기기 시 작합니다. 따라서 모든 현상과 결과를 종합해 볼
땐 힘들면 참고 견디며 남자답게 강해지는 것은 모든 문제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아무리 가장이고
강해야만 하는 처지의 남자라고 하더라도 마음이 힘들 때는 누구에게든 힘들다고 털어놓고 도움을 구하는 것이 자신을 살리고 또한 남을 살리는 현명한
방법입니다.
자신의 감정에 솔직해지는 것이 모든 관계의 시작입니다. 하나님께만 우리의 마음을 터놓는
것이 아니라 가족 간에도 서로의 어려움과 바람들을 진솔하게 나누고 대화하는 모습이 우리 사회에 더욱 많이 필요합니다. 어린아이와 같은 심성으로 하나님과 가까운 사람들에게 더욱 솔직한 자신을 표현하십시오.
주님! 마음을 터놓은 진실한 교제가 있게 하소서!
힘들고 슬픈 감정을 솔직히 표현할 줄 아는 사람이 되십시오.
<김장환 큐티365/나침반출판사>
신용조합의 탄생
저금리로 돈을 빌려주는 신용조합은 원래 남을 돕고자 하는 마음에서 생겨났습니다.
프리드리히라는 독일의 한 소년은 일찍 부모님을 여의어 마을의 목사님 손에서 자랐습니다. 목사님
밑에서 말씀과 믿음으로 잘 성장한 그는 독일의 공무원이 되었고, 나중에는 작은 시의 시장의 자리에까지
올랐는데 다음과 같은 다짐을 했습니다.
‘가장 불쌍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위한 정책을 펼치리라’
그는 시의 빈민가를 쭉 둘러보면서 사람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살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높은 이율의 빚에 허덕이고 있었고, 노름과 술로 월급을 대부분 탕진하는 잘못된 생활 습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프리드리히는 먼저 신용조합이라는 것을 만들어 가난한 사람들에게 돈을 빌려줘 고리대금업자에게 진 빛을 갚아준 뒤에 낮은 금리로 돈을
갚게 만드는 정책을 시행했습니다. 그리고 노름과 술이 아닌 저축과 투자를 하도록 서민들을 대상으로 지속적으로
교육을 시켰습니다. 이렇게 시작된 신용조합은 프리드리히가 죽기 전까지 독일에만 423개나 생겼으며 이 제도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빈민층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살아가는 사명자들에게 사랑의 마음과 좋은 생각을 주십니다. 예수님을 통해
사랑을 주시고, 구하는 자에게 지혜를 주시는 하나님에게 사명을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구하십시오.
주님! 선한 일에 필요한 지혜로운 생각을 주소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데 필요한 좋은 생각들을 달라고 간구하십시오.
<김장환 큐티365/나침반출판사>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
베다니 해밀턴은 세계적인 서핑선수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서핑대회인 하와이 대회에서 일찍이 우승을 하며 세계 최고의 자리에 선 그녀는 하나님을 믿는 독실한 크리스천이었습니다. 그러나 연습 도중 상어에게 한쪽 팔을 물려 외팔이가 되는 사고가 일어났습니다.
한 순간에 모든 것을 잃었다고 느낀 베다니는 하나님을 원망하며 더 이상 서핑을 하지 않았지만, 지혜로운
그녀의 부모님은 이 일을 통한 하나님이 주신 뜻이 있을 것이라며 위로했습니다.
이후 태국으로 떠난 선교에서 쓰나미로 부모님을 잃은 어린 아이를 만나게 되면서 베다니는 하나님의 뜻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한쪽 팔로 서핑을 하는 자신을 통해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과 용기를 전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뒤에
한쪽 팔로 서핑을 하는 연습을 하기 시작합니다. 세계 최고의 선수였던 베다니였지만 처음엔 한 쪽 팔만
가지고는 1초도 서 있기가 힘들었습니다. 그러나 오랜 시간의
연습과 상어에 대한 두려움을 이겨낸 채 결국 그녀는 재기에 성공했고, 다시 세계랭킹 상위권에 오르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과 감동을 주는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나에게 일어날 수 있는 가장 최악의 일이라고 하더라도 하나님은 그 일을 선하게, 아름답게
사용하십니다. 우리의 모든 일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찾고, 또한
그 일을 통해 하나님을 전하는 귀한 도구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십시오.
주님!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믿음을 갖게 하소서!
오늘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기도로 물으십시오.
<김장환 큐티365/나침반출판사>
밀란 칙령과 콘스탄틴 황제
주후 313년은 기독교 역사에 하나의 큰 획을 그은 해다. 로마에 복음이 전해진 이후 기독교인들을 말할 수 없는 핍박을 받았다. 당시 믿음의 길은 곧 순교라 할 정도로 거센 핍박을 받았다. 이런 기독교의 수난이 주후 313년 밀란에서 동서 로마의 황제들이 한 자리에 만남으로서 극적인 변화를 일으키게 된다.
로마 제국이 계속되는 권력투쟁과 영토 통제를 위해 주후 284년 디오클레티안 황제가 동과 서로 나뉘어 통치하게 된다. 그리하여 주후 306년 동로마는 콘스탄틴 황제가, 서로마는 리시니우스 황제가 통치하게 된다. 이 두 황제가 주후 313년 전반적인 상황을 토론하기 위해 만났다. 이 때 두 황제는 동서 로마 제국 내에 종교의 자유를 선포하는 <밀란 칙령>에 합의하였다.
1월에 <밀란 칙령>이 공포된 후, 6개월 후에 리시니우스 황제에 의해 발표된 칙령의 일부를 보면 다음과 같다. “크리스찬과 기타 모두에게 본인의 선택에 따라 예배를 드리는 데 있어서 완전한 자유를 허용하는 것이 우리들의 목적이다. 크리스찬들의 종교 또한 기타 본인이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하는 종교에 관해 그것이 어떤 종교이든지 간에 모든 사람에게 신앙의 자유를 완전히 허용하려 하는 것이 우리의 목적이다. 특히 크리스찬들에게 목표를 둔 명령으로 인하여 부과된 어떠한 제약도 이제는 모두 무효화 하려 한다. 크리스찬 종교를 가지려는 사람들은 누구든지 이제부터 자유롭고, 어떤 조건도 없이, 어떤 방해도 받지 않고 예배를 드릴 수 있다”고. 박해의 시기에 몰수 당했던 기독교인들과 교회의 재산들이 밀란 칙령으로 인해 되돌려 받게 되었다.
콘스탄틴 황제는 로마 황제로서 최초의 기독교인이었다. 콘스탄틴 황제는 비잔스라는 작은 도시를 콘스탄티노플(현제의 이스탄불)이라 부르고 도읍을 정하고 비잔틴 제국을 세운다. 특히 그는 수많은 성당을 건설했다. 그이 부인 헬레나는 성지를 순례한 후 성모교회(Church of Sepulchre)를 세웠다. 뿐 아니라 시내산 아래 보배와 같은 수도원을 세우고 기독교 박해가 극심하던 3세기에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 순교한 케더린이란 성녀의 이름을 따서 성 케더린 수도원이라 이름하였다. 이 때 기독교 문화가 매우 발달하였는데 이 문화를 가리켜 “비잔틴 문화”라고 한다.
이 후 주후 381년에 박해의 대상이던 기독교는 밀란 칙령으로 로마에서 국교가 되어 전 유럽으로 번져나가는 계기가 되었다. 한 편으로는 국교가 된 후 점점 기독교의 생명력을 잃고 정치화하는 문제를 갖게 되었다.
최한주 목사<푸른숲교회>
한국 찬송가의 유래
기독교가 처음 한국에 전해져 예배가 드릴 때 어떤 찬송을 불렀을까?
처음에는 우리 말 찬송이 없었기 때문에 한문으로 된 중국어 찬송가를 이용했다. 1887년 백홍준, 서상륜을 중심으로 시작된 새문안 교회도 처음에는 중국어 찬송을 불렀다. 백홍준의 딸 백성관은 “어렸을 때 아버지가 새벽이면 기도하시고 중국어 찬송을 부르셨다”고 하고 아펜셀려 목사님도 “조선말로 찬미를 쓰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고 하였다. 반면에 이화하당이나 배재학당의 채플에서는 영어찬송을 불렀다고 한다.
처음에는 지역이나 선교부에 따라 각기 다른 찬송을 지어 불렀다. 우리나라 최초 찬송가 편찬은 선교사가 입국한 지 8년이 지난 1892년 감리교의 죤스와 로드와일러가 편집한 27편이 수록된 악보 없는 ‘찬미가’였다. 2년 후 장로교는 언드우드에 의해 117곡으로된 ‘찬양가’를 편집하였다. 상단에는 4성부(4聲部) 악보가 그려져 있고 하단부에 가사를 기록한 최초의 서양식 악보가 인쇄된 음악책이었다.
이 찬양가는 주로 서울지방을 중심으로 사용하였다. 반면에 서북지역에서는 장로교 선교사 그래함 리와 기포드 부인이 편집한 ‘찬셩시’를 사용하였다. 이를 기초로 마펫이 137곡을 수록한 곡보 ‘찬셩시’를 간행하였는 데 장로교의 공식 찬송가가 되었다. 감리교의 죤스와 로드와일어의 ‘찬미가’도 계속 증보되어 1902년에는 207곡으로 늘어나 감리교의 찬송가가 되었다.
한국에서 찬송가 편찬에 기여한 인물은 침례교 선교사 펜윅이었다. 그가 1899년 14장의 찬송을 편집한 ‘복음찬미’가 계속 증보되어 1939년 판에는 274곡을 수록하였다. 이 찬송이 침례교의 공식 찬송가가 되었다.
한국에서 주도적인 두 교회인 장로교와 감리교는 연합과 일치를 위해 통일괸 찬송가를 불러야 한다는 인식이 열매를 맺어 1908년에는 장.감 연합의 ‘찬숑가’가 발행되었다. 262곡이 수록된 이 찬송가는 1908년 초판이 6만부, 1910년까지 22만 5천부, 1911년 한 해 동안 5만부가 발행되었다. 이 찬송이 오늘날 불리는 찬송가의 모태가 되었다. 찬송가는 한국 음악에도 양향을 끼쳤고 많은 현재명, 박태준, 안익태 등과 같은 서양 음악가들을 키워낸 온상이었다.
한국 초기에 번역되고 가장 많이 애창된 노래는 미국인 와너가 1859년에 쓴 가사에 브레드버리가 곡을 붙인 “예수 사랑하심(563장)”이었다. 이 노래를 번역한 사람은 펜윅과 애니 베어드였다. 1890년 펜윅이 번약했던 천 가사를 보면 예수님을 “예수씨”라고 번역하였다. 당시 성경번역에서도 바울씨 요한씨 베드로씨라고 불렀던 것을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최한주 목사<푸른숲교회>
클리브랜드와 친구
인생길에서 선택을 해야 할 때가 있다. 그 때 어느 길을 선택하느냐 하는 게 대단히 중요하다. 왜냐하면 내용에 따라서 결과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주어진 선택의 내용들을 두고 많이 기도하며 멘토의 도움을 얻어야 한다.
미국의 역대 대통령 중에 클리브랜드라는 대통령이 있다. 이 분은 이상하게도 22대 대통령을 지내고 그 다음에는 낙선했다가 24대 대통령으로 또 당선된 분이다. 대부분 한 번 하고 말든지 아니면 연속 두 번하고 끝난다. 클리브랜드 대통령처럼 당선되는 경우는 처음이다. 처음엔 이 대통령의 정책이 너무 앞서 가다 보니 국민들이 이해를 못했다. 그래서 낙선했다. 그러나 깨닫고 보니 앞서가는 훌륭한 분이라서 24대에 당선되게 했다. 미국 사람들이 참 좋아하는 대통령이다.
클리브랜드 대통령이 처음 당선되어 취임식을 하는 날 어느 교도소에서 사형 선도를 받고 사형 날짜를 기다리는 죄수 하나가 신문을 받아들더니 하염없이 울고 있었다. 간수가 가서 "왜 우느냐?"라고 물었다. 그가 신문을 보여 주면서 "이 클리브랜드 대통령이 자기와 대학 동기로 친구가 되어 함께 술을 즐겼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 날 늘 다니던 술집으로 함께 가다가 길가에 예배당을 지나치게 되었다, 예배당 안에서 찬송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찬송에 이끌린 클리브랜드가 친구에게 “교회에 가자”고 했다. 그러나 “쓸 데 없는 소리”라고 하면서 술집으로 향했다. 그러나 클리브랜드는 교회로 가고 그 친구 혼자 술집으로 갔다.
교회를 찾은 클리브랜드는 지난 날을 회개하였다. 잠들었던 영혼이 깨어났다. 그 후 그는 신실한 길을 걸으며 변호사가 되고 후에 뉴욕 주지사가 되었다. 그리고 후에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래서 대통령에 취임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의 친구는 계속 술집으로 전전하다가 죄에 물들게 되었다. 결과 20여년 후 용서받지 못할 죄로 인해 사형수가 되었다. 그는 감옥에서 그의 옛 친구의 대통령 취임식을 기사로 읽으며 눈물을 흘리게 되었다. 같은 길을 가다가 한 사람은 대통령의 길을 걷게 되고 또 한 사람은 사형수의 길을 걷게 되었다. 어떻게 그와같이 갈라지게 되었는가? 그 중간에 이 두 사람의 선택이 있었다. 이것이 친구였던 두 사이를 극과 극의 인생이 되게 한 것이다.
우리는 주어진 길을 선택하는 순간에 바른 길을 선택하고 있는가? 가장 영광스럽고 존귀한 길은 “먼저 주의 나라와 의를 위한 길”을 선택하는 것이다.
최한주 목사<푸른숲교회>
기부천사 철가방- 故 김우수 씨
한달 70만원 벌이의 변두리 중국집 배달부. 창문도 없는 약 1.5평짜리 고시원 쪽방에 살면서 어려운 형편의 어린이들을 돕던 후원자. 주말마다 오전 8시부터 13시간 배달 일을 하고, 오후 9시 일당 9만원을 받아 마을버스를 타고 아무도 없는 고시원 쪽방으로 돌아갔다. 휴대전화에는 단 하나의 단축 번호도 저장돼 있지 않고 단 한 통의 문자 메시지도 없었다. 부산이 고향인 김씨는 미혼모의 아이였고, 7세에 고아원에 맡겨졌다. 12세 때 고아원을 뛰쳐나온 탓에 초등학교도 마치지 못했다. 구걸, 양조장 허드렛일, 시장 지게꾼 등 어렵고 힘든 생활을 했다. 소년원도 몇 차례 갔고, 2005년 한 술집에서 "무시한다"며 불을 지르려다 1년 6개월간 징역을 살았다.
그가 새 삶을 살기로 한 것은 감방 안에서 어린이재단 발간 '사과나무'를 읽으면서였다. "잡지에서 불우한 환경에 처해있는 어린이들의 사연을 읽고 며칠을 울었다"고 전한다. 그의 어릴 때가 생각났으리라. 돕고 싶은 아이들이 생기자 제대로 살고 싶어졌다. 그렇게 시작된 제2의 인생, 마지막 5년은 누구보다 뜨거웠다. 하루 담배 2갑을 피우고, 소주 2병을 마셨지만, 아이들을 후원하면서 "술, 담배 살 돈이면 1명 더 도울 수 있다"며 끊었다.
배달 일이 없는 날은 새벽 5시 반에 일어나 경제면을 보면서 전 재산인 300만원어치 주식이 올랐는지, 떨어졌는지 확인하고 오전 8시 반에 시작하는 조조영화를 혼자 보는 게 낙이었다. 영화관을 나서면서는 2000원짜리 스포츠복권을 1장 사는 버릇이 있었다. 동료들은 "'당첨금액이 큰 로또를 사지' 하면, '내 운이 거기까지는 닿지 않을 것 같다'며 웃곤 했다"고.
오후에는 자전거로 한강변을 달렸고, 한 달에 한번 정도는 자전거를 타고 의정부, 속초 등 장거리 여행을 떠났다. 비오는 날이면 근처 풍물시장에서 1만~2만원 짜리 운동화, 옷가지를 샀다. 동료 박산(37)씨는 "'좋은 물건 샀다'며 새 시계를 찬 팔목을 내밀던 아이같은 모습이 눈에 선하다"고.
그의 외로움을 생각하면 아프지만 그래도 기사를 보니 이 사람 참 재미있게 잘 살았다는 생각에 미소가 지어진다. 일없는 날엔 거의 매일 조조영화 관람, 집 근처의 풍물시장 순례, 자전거 여행 같은 소소한 일상을 즐긴 것을 보면 삶을 즐길 줄 아는 멋이 있었다. 소액이지만 주식투자, 복권 구매, 연금납부 같은 일들은 미래의 삶에 대한 꿈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지난 24일 교통사고를 당한 뒤 이틀간 아무도 찾지 않은 병실에서 쓸쓸하게 숨졌다. 빈소를 찾아와 "돈을 허튼데 쓰고 살았다"며 오열하는 중년, "고인보다 잘 살았던 시절에도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라며 미안해하는 아저씨. 초록우산 어린이 재단 후원회장 최불암씨가 상주가 되어 장례를 치뤘다고 한다. 그냥 지나치기엔 뭔가 찡한 생을 산 사람. 신앙의 유무를 떠나서 삶은 본받아야겠다.
최한주 목사<푸른숲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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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3일 이스라엘 군대의 상병인 샬리트가 팔레스타인 무장정파 하마스에 납치되었다가 풀려났다는 기사가 매스컴을 떠들썩하게 했다. 이는 샬리트가 유명한 인기 탤런트기 때문에 그런 게 아니다. 이스라엘이 샬리트 상병 한 사람을 위해 이스라엘 감옥에 갇혀 있던 1027명의 발레스타인 포로를 석방한 것 때문이었다. 샬리트 한 명을 위해 포로로 잡은 1027명의 팔레스타인 군인들을 석방시킨 것이다. 1027명 중에는 테러 등으로 종신형을 선고받은 핵심 무장대원 315명이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살리트는 지난 2006년 6월 25일 가자 지구 남부 이스라엘군 초소에서 경계 근무 중 하마스 무장대원들의 기습 공격으로 받고 납치되었다. 이스라엘은 살리트의 즉각 석방을 요구했으나 거부당했다. 3일 후인 28일 수천 명의 병력과 탱크와 전투기 등을 동원해 가자 지구를 전면 공격했다.
에후드 올메르트 당시 이스라엘 총리는 총 공세를 통해 탱크 100 여대로 주요 도로를 봉쇄하고 총리집무실을 미사일로 공격하여 하마스 장관과 의원 등 요일 60여명을 체포했다. 하마스를 보호해 온 시리아를 압박하기 위해 전투기 4대를 보내 바사르 알아사드 시리아 대통력의 여름 별장이 있는 라타키아 상공을 저공비행하며 무력시위도 하였다.
보복 공격이 계속되자 이스라엘 정부에 대항 국내외 비판이 들끓었다. 더러는 하마스와 대화에 나설 것을 촉구하기도 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이집트의 중재로 살리트 상병을 석방시키기 위해 지루한 협상이 시작되었다. 하마스는 협상 때마다 이스라엘에 갇혀 있는 1000여명의 무장대원을 풀어달라고 하였다.
이스라엘 정부로서는 쉽지 않는 일이었다. 포로로 잡은 이들을 평범한 군인들이 아니다. 하나같이 이스라엘 안보에 위협이 될 수 있는 무장대원들이었다. 다시 팔레스타인으로 돌아가면 더 위협적인 존재가 될 수 있기에 쉽게 동의할 수 없었다.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가 긴급 각료회의를 소집했다. 찬반 투표 끝에 협상 안은 26:3으로 가결하였다.
살리트 상병을 구하는 데 여러 가지 어렵고 힘든 문제가 많았다. 1027명이 장래에 더 위협적인 요인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살리트를 구하므로 이스라엘 정부가 얻은 유일한 한 가지는 “이스라엘은 한 명의 이스라엘 인을 살리는 데 모든 것을 다 한다”는 명분이었다. 이스라엘인들의 그 백성들에 대한 가치관에는 주님의 마음이 담겨져 있다.
예수님은 한 생명이 천하보다 귀하다고 하셨다. 이는 무엇을 주고도 바꿀 수 없는 존재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존귀와 영광의 주님이 이 땅에 오셔서 죄에 속박되어 있는 그 백성의 죄를 제하기 위해 친히 십자가에 못 박혀 살 찢어 피흘려주셨다.
최한주 목사<푸른숲교회>
이단의 목표물이 된 청소년
근래에 이단들이 맹활약하면서 정통 교회 성도들을 교란시키고 있다. 목요전도대원들의 보고에 따르면 정통 교회 성도들의 전도는 잘 보지 못하고 이단들이 요란스럽게 전도하는 일은 쉽게 볼 수 있다고 한다. 대단히 위험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더 심각한 문제는 이단들이 장년층만을 표적으로 삼지 않고 청소년 뿐 아니라 주일학교 학생들까지 표적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고등학생들은 물론이고 주일학생, 심지어는 유치원생들에게까지 악마의 손길을 뻗고 있다. 어떤 이단이 설립한 유치원에서 부르는 노래들 가운데는 “이단교주를 믿어야 하늘나라 가지요”“십자가를 세우지 마세요” 등이 있다고 한다. 다른 이단은 중고등학생들을 대상으로 순결교육을 시키고 어린이들이 잘 가는 병원에 “켄디”를 보급하여 환심을 사고 있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특별히 ‘고3 수험생’들을 대상‘으로 적극적인 포교활동을 계획하고 있어서 교회마다 각별한 주의가 요청된다고 유사기독교 연구소장 최병규 목사가 전한다. 청소년들을 자녀로 둔 부모나 담당 교역자들은 2,3월까지 교회 청소년들이 이단에 물들지 않도록 각별히 관심을 가지고 돌아봐야 한다는 뜻이다.
고 3학년들은 수험준비와 미래의 학과 선택 및 입시에 신경이 예민해져 있어서 휴식과 위로가 필요하다. 이런 면을 이단을 노리고 접근한다. 어떤 이단 단체는 이들을 위한답시고 밤 시간에 공부를 할 수 있는 공부방과 같은 환경을 마련해 주는 등의 여러 가지 편의를 제공해 주므로 청소년들을 미혹하는 일이 있다.
이단들은 이들을 통해 얻은 인적 사항을 통해 그들의 부모들에게 쉽게 접근하는 데, 청소년들과 접근하는 장소로는 학교 정문이나 후문, 쇼핑센터와 영화관, 대학에 입학하면 각양 동아리 모임 장소를 통해 접근 장소로 활용한다.
한 가지 주의해야 할 것은 이들을 피한다고 해결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이다. 피할 수도 없다. 이런 상황을 교회가 심각하게 받아들여 한 두 담당자에게만 짐을 맡기지 말고 전교회가 연합하여 예방하여야 할 것이다.
교회는 더 적극적인 방법으로 이단의 활동에 대하여 청소년들을 교육하고 청소년 스스로가 판단하여 극복할 수 있도록 힘을 길러주어야 한다. 뿐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충만하게 하여 예수님이 시험을 받으셨을 때 말씀으로 물리치셨듯이 말씀으로 사탄의 역사를 물리칠 수 있는 영적인 힘을 가질 수 있게 해야 한다. 그리고 교회는 이들을 위해 깨어 기도해야 한다.
최한주 목사<푸른숲교회>
요가, 그 이면에 있는 얼굴
요가가 어느덧 21세기의 문화가 되었다. 동서양을 넘나들며 한국과 미국에서도 인기를 누리고 있다. 헬스클럽의 75% 이상이 요가 클레스를 열 정도로 생활 스포츠가 되었다. 몸을 비트는 이상한 동작으로 여겨지던 요가가 피트니스산업과 결합해 현대인의 생활 속으로 파고들고 있다. 이런 요가를 기독교인들도 경계 없이 건강생활이란 이름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어떤 교회에서는 ‘크리스쳔 요가’란 이름으로 장려도 한다.
그러면 요가와 기독교 신앙이 어울릴 수 있을까? 요가가 신앙에 아무런 해를 끼치지 않는 단순한 건강요법인가? 이 문제에 대하여 최근에 열린 제 61차 한국복음주의 선교신학회(회장 이훈구) 정기 학술대회에서 이충웅 김천대학 교수(치유선교신학복지학)는 그의 논문 “크리스천 요가에 대한 비판”에서 단호하게 “아니오”라고 하였다. 그는 인도 선교사로 활동하였으며 한세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다음은 이충웅 교수가 요가에 대하여 비판하는 세 가지 내용이다.
첫째/ 요가는 힌두교 자체다.
많은 사람들이 요가를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요가를 종교가 아닌 단순한 운동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요가는 단순한 건강 증진이나 마음의 수양을 위한 수련법이 아니고 힌두교 그 자체다. 요가는 힌두교의 핵심으로 인도하는 네 가지 요소(카르마, 마야, 니르바나, 요가) 중 하나다. 힌두교에서 요가는 단순한 운동이 아니라 영원한 윤회로부터 벗어나 해탈하기 위한 수행법이다.
둘째/ 요가는 힌두교의 선교 전략이다.
‘라마크리슈나 미션’이 요가를 온 세상에 전파하고 있다. 마라크리슈나는 19세기 콜카타 칼리사원(선교지 방문 때 방문한 곳)의 사제로 신에 대한 깨달음을 추구하면서 자신 스스로 신을 바라보고 몸으로 느꼈다고 한다. 이 후 그의 제자 비베카난다가 마라크리슈나 미션을 콜카타에 세우고 전 세계에 힌두교와 요가를 전파하였다. 1898년에 결성된 뉴욕 베단타협회는 미국 내 라마크리슈나 선교회 지부 가운데 가장 오해되었다.
셋째/ 요가는 뉴에이지 운동이다.
뉴에이지란 서양의 세속적인 인본주의와 동양의 고대 신비주의적인 인본주의 운동을 통해 하나님과 관계없이 인간성 회복과 참된 평와와 행복이 실현되는 새로운 시대를 이루려는 범세계적인 종교 운동이다. 요가는 힌두교 신과의 합일을 표현하는 대표적인 뉴에이지 운동이다. ‘하타 요가’는 시바에게 바쳐지는 힌두교인들의 수행방법이다. 달인(達人-Siddha), 연화(蓮花-Padma), 사자(獅子-Simha), 제왕(帝王-BhadrA)은 대표적인 자세다.
세상 문화를 검정없이 쉽게 받아들이는 것은 신앙에 악한 영향을 끼친다.
최한주 목사<푸른숲교회>
화근(禍根)
화근(禍根)이 되는 것은 나쁜 것에서만 오는 게 아니다. 누운 자는 넘어지지 않고 선자가 넘어지듯이 오히려 다른 사람이 갖지 않은 것, 세상에서 가장 귀하고 아름답다고 여기는 것이 오히려 나의 삶을 고통스럽게 하고 망하게 하는 화근이 될 수도 있다.
“분노의 포도”라는 소설로 노벨 문학상을 받은 미국 소설가 존 스타인 백의 작품 가운데 “진주”라는 중편 소설이 있다. 주인공 키노와 그의 아내 조안나는 어부다. 그들은 평생 어부로 살면서 가끔 바다 속의 작은 진주를 캐기도 하면서 평온한 어부의 삶을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보기 드문 아주 큰 진주를 찾았다. 그들은 엄청난 가치가 되는 진주로 말미암아 어려운 가난을 벗어 행복한 삶이 시작될 것을 기대하였다.
그들은 “쉬쉬”하면서 지냈지만 비밀이 오래 가지 못했다. 어느덧 소문에 소문이 마을에 퍼지게 되었다. 그 때부터 키노의 오두막집에는 많은 사람들이 드나들었다. 키노가 큰 진주를 구경하기 위해 온 사람들도 있지만 더러는 흑심을 품고 키노의 오두막집을 기웃거렸다.
어느 날 그들 부부가 병이 나서 병원에 갔다. 의사는 전과 다르게 지나칠 정도로 과잉친절을 베풀며 그들의 오두막집을 몇 번이나 방문하기까지 하면서 진료해 주었다. 의사는 진주가 탐이 나서 병을 낫게 하는 게 아니라 병이 오래 가도록 처방을 하였다. 뿐 아니라 진주 장사들은 키노 부부가 가진 진주를 헐값에 사려고 온간 농간을 부리며 다가왔다. 이들은 오두막집에 폭력배를 보내어 협박까지 하였다. 뿐 아니라 밤중에 강도까지 들어와 키노는 강도와 격투를 벌이기도 하였다.
평안하던 오두막집이 공포의 집으로 변하였다. 키노와 그의 아내 조안나는 날마다 불안과 공포에 떨었다. 진주를 발견했을 때 그것이 행복을 가져다주는 줄 알고 기뻐했는데, 그 진주가 오히려 고통의 원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이없이 변한 현실 속에서 키노 부부는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다. 그래서 그 귀한 진주를 깊은 바다 속에 던져버리고 되돌아왔다. 진주가 행복을 주는 것이 아니고 불행의 시앗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때로는 나의 가장 귀한 것, 그것 때문에 나의 길이 막힐 수가 있다. 내가 가장 자랑하는 것, 그것이 화근이 될 수고 있다. 가룟 유다는 영적인 최고의 위치에 있었다. 그러나 그게 그의 일생을 망하게 하는 위치가 되었다. 사울의 최고의 권력은 그의 삶을 망치게 하는 화근(禍根)이 되었다.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해야 한다. 그에서 지나는 것은 자랑이 오히려 화근이 될 수 있다. 마태복음 6장에서 예수님이 책망하시는 대상이 “의를 행하는 자”들이었다. 구제하고, 기도하며 금식하는 성도는 남달리 영적인 일에 헌신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주 안에서가 아니고 자기 의를 드러내는 도구가 될 때 주님의 책망을 받는 자들이 되었다.
최한주 목사<푸른숲교회>
희망의 노래
베르디의 오페라 ‘나부코’에
나오는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의 가사는 시편 137편을 재구성한 것입니다. 이 말씀에는 바벨론의 포로로서 겪는
이스라엘 백성의 비참하고 슬픈 형편이 그려져 있습니다. 한 곡조 부르라고 강요하는 바벨론 사람들의 조롱에
그들은 강변에 앉아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고, 하나님을 예배하며 즐겁게 노래 부를 때 사용하던 수금을
버드나무에 걸어 놓았습니다. 기쁨의 성전 찬송을 부정한 땅에서 부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베르디는 예루살렘에 대한 뜨거운 사랑을 고백하는 시인의 탄원에 멜로디를 입혀서 자유를 향한 절규와 고난 극복에 대한 굳건한 의지를
장중하게 표현했습니다.
물질주의의 모순과 기계문명의 생명 파괴는 포로기의 비통함보다 더 절박하고 무서운 굴레 속으로 인간을 끌고 갑니다. 그런 우리에게 궁극적 자유를 주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리고
교회는 그토록 위대한 구원의 사건을 기념하는 부활절을 맞았습니다. 우리는 날마다 악에 대하여 죽고 성령의
생명으로 부활해야 합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삶에 참여하는 신앙을 함의하는 예식이 부활절에 베푸는
세례와 성만찬입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은총 안에 사는 성도들은 또다시 우리의 수금을 버드나무에 걸지 않도록 믿음의 절개를 지켜야 할 것입니다. 성도들은 영원히 시온의 노래를 불러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인선 목사(서울 열림교회)
새봄
새봄이 왔습니다. 봄의 아름다운 꽃들은 천사 가브리엘이 배달하는 하나님의
편지입니다. 그 속에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적혀 있습니다. 늘 오는 봄인데 왜 ‘새봄’이라고 할까요. 새로이
보라고 새봄입니다. 새봄은 탐욕의 안경을 벗고 새롭게 보라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봄’이란 글자를 자세히 보십시오.
몸이 두 팔을 위로 뻗은 모양입니다. 봄은 움츠러들었던 몸과 영혼이 기지개를 켜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유대인은 하루를 저녁으로 셈합니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창 1:5) 저녁의 고난을 모르는 자는 아침의 영광을 볼 수 없습니다. 누구도 겨울을 지나지 않고서는 봄을 맞이할 수 없습니다. 추운 겨울을
보내느라 수고했습니다. 겨울을 믿음으로 견딘 여러분을 축복합니다. 그대
가슴에 핀 꽃과 내 가슴에 핀 꽃을 노래하겠습니다. 다시 소망을 주신 주님을 노래하겠습니다.
“겨울도 지나고 비도 그쳤고 지면에는 꽃이 피고 새가 노래할 때가 이르렀는데 비둘기의 소리가 우리 땅에 들리는구나. 무화과나무에는 푸른 열매가 익었고 포도나무는 꽃을 피워 향기를 토하는구나.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아 2:11∼13)
한재욱 목사(서울 강남비전교회)
골고다의 콘체르토
오스트리아의 폴 비트겐슈타인(1887∼1961)은 유명한 피아니스트입니다.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가 오른팔을 잃고 포로로 고생하다 생환했습니다. 피아니스트가 오른팔을 잃었으니 절망적이었습니다.
그에게는 두살 터울의 동생이 있었는데, 논리학과 언어철학의 대가인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입니다. 형의 절망을 잘 알고 있던 동생은 프랑스의 모리스 라벨에게 많은 비용을 지불하고 곡을 만들게 했습니다. 그렇게 ‘왼손을 위한 콘체르토’가
탄생했습니다. 두 손으로도 다루기 어려운 곡이지만 비트겐슈타인은 숱한 어려움과 싸우며 연습한 끝에 놀라운
연주로 많은 사람을 감동시켰습니다.
당시 알프레도 코르토가 이 곡을 양손으로 연주할 수 있는 버전으로 편곡하자 피아니스트들은 환호했습니다. 하지만 작곡가는 노발대발하며 파리의 지휘자들에게 일일이 편지를 보내 “코르토와는
절대 협연하지 말라”고 당부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류 구원을 위해 특별한 곡을 만드셔서 예수님에게 주셨습니다. 그 연주는 참으로
고통스런 것이었습니다. 가시면류관을 쓰고, 온몸과 손발이
피범벅 된 채 골고다 언덕에서 죽는 고통스런 연주였습니다. ‘십자가’란
곡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온몸을 드려 완벽하게 연주하심으로 인류구원의 대업을 이루셨습니다. 이 복음이 우리를 살게 합니다.
정학진 목사<포천 일동감리교회>
내가 그 제자입니다
어느 날 한 자매가 목사를 찾아와 상담하기를 자기는 이 교회에 전혀 쓸모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교회를 그만 다니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때 목사님은 이렇게 말해 주었습니다. “이
세상에 쓸모없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 쓰임 받은 사람은 다양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맹인, 병든 자, 소외된
자, 세리, 창기 등 자신의 삶의 자리에서 고통의 순간을
살아온 사람을 만나 그들을 고치시고 세워서 하나님 나라의 일꾼으로 삼으셨습니다. 자매님도 쓸모없는 존재가
아니라 주님 편에 선 가장 필요한 존재입니다.”
예수님은 열두 제자를 부르시어 하나님 나라의 일꾼으로 훈련시키셨는데 그중 가롯 유다의 선택은 결국 실패로 끝납니다. 과연 예수님의 선택은 실패였을까요. 주님은 마태복음 28장에서 “제자를 삼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열둘로 끝난 것이 아니라, 비워진
열두 번째 제자의 자리를 계속해서 채워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의 열두 제자의 선택은
실패가 아닙니다. 그 자리를 채워야 할 제자는 바로 내가 돼야 합니다.
오늘도 하나님 나라의 변두리만을 헤매고 있는 영혼은 없습니까. 하나님의 사람에게 변두리
인생은 없습니다. 모두가 중심입니다. 하나님나라를 위한 가장
중요한 자리를 차지할 그 미완의 열두 번째 제자는 바로 당신입니다.
이일성 목사(군산 풍원교회)
빛과 그림자
탈무드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사막을 여행했습니다. 사막은 불덩어리같이 뜨거웠고 갈 길은 멀었습니다. 아들이 말했습니다. “목이 마르고 지쳐서 죽을 지경입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격려했습니다. “그렇지만 끝까지 가보아야 하지 않겠니. 얼마 안 가서 사람이 사는
마을을 만날 수 있을 거야.”
부자는 계속해서 걸었고, 그러다 무덤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저것 보세요. 저 사람도 우리처럼 지쳐서 마침내 죽고 말았어요.” 아들이 말했습니다. 그러자 아버지가 말했습니다. “아니야. 무덤이 여기에 있다는 것은 곧 희망이 있다는 거다. 멀지 않은 곳에 마을이 있을 거야. 사람이 없는 곳에는 무덤도 없는
거란다.”
아버지와 아들 중에 여러분의 모습은 누구와 같은가요. 무덤을 보고 절망했던 아들 쪽인가요, 아니면 무덤을 새로운 희망의 기회로 삼은 아버지 쪽인가요. 절망이
있기 때문에 희망이 있습니다. 어둠이 있기에 빛이 있고, 슬픔이
있기에 기쁨도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언제나 평탄할 수만은 없습니다. 하지만 희망을 잃지 않는다면 우리 앞에 놓인 어떤 장애도 극복할 수 있습니다.
진정한 문제는 우리 앞에 놓인 일련의 사건이나 상황이 아니라 그것을 바라보고 대하는 우리의 생각과 태도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고경환 목사<순복음원당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