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물지 않은 상처
김도현
오늘도 허탕이다. 봄 그믐치가 아직은 차가운데 어디서 간밤의 도둑비를 피했는지. 새싹은 아직 땅속에서 돋고 있는데 배나 굶고 있지 않은지. 또래를 찾아갔다가 따돌림이나 당하는 건 아닌지. 이런저런 걱정으로 간밤을 지새우고 새벽을 열었으나 역시 허탕이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보금자리 주변을 둘러본다. 흔적이 없다. 찾아 나선 발길이 저절로 조금씩 조금씩 더 나아간다. 지난해 녀석의 안식처를 지으려고 울 옆에 밀쳐놓은 고목 등걸 밑에도 없다. 뒤뜰 오죽군락 속을 들여다보지만 거기도 없다. 토종벌통 옆에도, 전나무 아래에도 녀석의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힘 빠진 발길을 돌려 다시 집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다. 깊은 아쉬움이 남는다. 아홉 달을 사람 손에 길들여진 탓에 두려움이 없는 녀석이라 누구를 만나도 쉬이 도망을 가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 마음이 아리다. 다섯 달 전에는 넓은 곳에 자유롭게 잘 살아가라고 산으로 데리고 가서 풀어주었는데도 며칠 후 제 발로 찾아왔던 녀석이다. 저쪽 모퉁이에서 불쑥 튀어나와 보이지 않는 꼬리를 흔들며 껑충 뛰어올 것만 같다. 나 없는 사이 구경 왔던 누군가 잘못 닫아놓은 문을 나와 자취를 감춘 지 벌써 한 주일째다. 귀엽고 앳된 모습이 눈에 아른거려 아픈 마음이 한 주일이 지나도 아물지 않는다.
낫지 않는 병을 얻은 아내가 결국 눈을 감았다. 담당 의사의 진단은 여덟 달을 넘길 수 없다고 했는데 여섯 해를 데리고 있다가 보냈다. 중간에는 지병에다 합병증인 폐렴까지 더해져 짧은 목숨을 더욱 짧게 한 적이 한두 번 아니다. 해도 후회 안 해도 후회인데, 해보고 하는 후회는 한이 없을 거라는 생각으로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지 했다. 환자의 목에 가래가 차서 호흡이 곤란하면 내 입으로 그걸 빨아냈다. 식물 된 채 누워만 있었던 관계로, 예상되는 욕창예방을 위해 매 시간단위로 체위변경을 시키고 마사지를 해야만 했다. 괄약근 퇴보에 따라 발생한 지독한 변비는 장갑 낀 내손으로 해결할 수밖에 없었다. 의사는 약이 없다고 했지만 산천을 누비며 열매와 잎을 따고 뿌리를 캐다가 달여 먹였다. 도회지를 벗어나 산골 마을에 집을 짓고 좋은 공기를 마시게 했다. 덕분인지 아내는 의사 진다보다 일곱 갑절 더 살았다. 이런 나의 간병을 보고 혹자는 남편의 정성이 대단해서 하늘이 감동했다고 하지만, 나는 아니었다. 아내가 나한테 와서 한 일을 되짚어 보면 내가 한 일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마음이었다. 아내는 내게로 와서 서른 해를 살면서 나와 아이들, 가정을 위해서만 살았다. 그 서른 해의 희생에 비하면 나의 노력은 아무 것도 아니다.
아내는 두 눈을 잘 감고 갔다. 자꾸 문지방 위를 쳐다보던 아내의 손을 잡는 순간 미소를 지으며 지그시 눈을 감더니 수면에 들어갔다. 편안한 얼굴이었다. 다섯 번째 폐렴으로 아내는 갔다. 이젠 더 이상 붙잡아 둘 수 없었다. 얼굴과 손발의 색이 변해지는 걸 보고 도뇨관과 음식호스를 뺐다. 산소발생기의 공급호스를 뺀 건 그 한참 후다. 혹시 하는 마음이 가져다 준 미련 때문이었을까. 차분히 구급차를 부르고 아이들에게 알렸다. 울지말자고 다짐했다. 힘들었다. 내내 참아왔지만 관속에 누운 아내를 보고서는 절규를 할 수밖에 없었다.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다. 아내 이름을 부르며 잘 가라고 고함을 질렀다. 염을 못하게 하기를 참 잘했다고 생각했다. 수의는 생전에 가장 아끼던 한복을 입혔다. 더욱 잘한 일이었다. 창백한 얼굴이었지만 고운 분칠과 화장을 하고 한복을 입은 채 관속에 누운 모습은 흡사 인형이었다. 딸아이들 키울 때 옷 갈아입히기 하던 인형의 모습이 거기 있었다. 너무 곱고 아름다우며 편안한 모습이었다. 사람 놀라게 하려고 관속에 숨어있는 모습이었다. 이마에다 잘 가라는 작별의 키스를 할 때서야 드디어 마지막인 줄 알게 되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애당초부터 잡지 말고 그냥 보내주었을 걸하고 후회를 했다.
희한한 일이었다. 죽은 아내가 돌아왔다. 삼우제를 마치고 아이들을 다 돌려보낸 다음날 아침에 현관문을 열고 나가니 새끼 고라니 한 마리가 와 있었다. 아직 말라붙은 배꼽이 떨어지지도 않은 아주 어린 놈이었다. 어디서부터 걸어왔는지 다리에 힘이 빠져 계단에 기대어 있었다. 불현듯 동물을 좋아하는 아내가 떠올랐다. 혼자 있는 남편에게 아내는 고라니로 환생하여 돌아온 것으로 여겼다. 아내 이름 끝 자를 따서 '남이'라고 부르고 분유를 사다 먹이며 돌봤다. 남이는 장염에 걸려 단 한번의 병치레만을 치르고는 잘 자라주었다. 아침 운동을 나가면 졸졸 따라 다녔다. 우리 없이 키워도 달아나지 않았다. 온종일 남이와 있으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지냈다. 우리에는 여러 종의 동물이 같이 살고 있으나 오직 한 마리만 있는 동물은 남이 뿐이다. 동별상련이었다. 그렇게 같이 살아 온 남이가 가출을 했다. 얼마전, 주위 사람과 아이들의 측은지심에 휘말려 새 짝을 맞아들였다. 남이가 알아챈 것 같다. 밭쪽에 남이가 다녀간 발자국이 선명하게 나있다. 쓰린 마음이 아려온다. 새 상처로 묵은 상처가 아물지 않는다. 남이가 그립다.
첫댓글 제가 예전에 알던 분의 글이군요.그 고라니가 살던 곳도 보고 얼굴도 보았는데 그뒤 한번 찾아왔는지 궁금하네요.
제목을 '남이'라고 하면 어떨까?
이 작품을 보면서
제목 하나만 잘 정해도 작품이 훨씬 달라진다는 것을 느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