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배구사에서 박계조(朴啓祚)가 차지하는 비중은 절대적이다.지금은 대표적인 겨울스포츠로서 많은 팬들의 사랑을 받고 있지만 배구는 박계조란 인물이 등장하기까지만해도 비인기종목으로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이 땅에 배구가 처음 소개된 것은 1916년 3월. 1895년 미국 매사추세츠주의 YMCA체육주임 윌리엄 G 모건이 배구를 창안한지 21년만이었다. 당시 배구는 12인제로 일종의 레크리에이션 성격을 띠고 있었으며 이듬해 3월 중앙 YMCA체육관에서 회원들과 재경 서양인들 사이에 열린 경기가 최초의 공식 배구경기로 기록에 남아있다. YMCA 회원중심으로 퍼져가던 배구는 1925년 8월 나라 고조중학의 미키 유료 교사의 배구강습회를 계기로 일본 체육교사 중심으로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같은해 최초의 공식 배구대회인 제1회 전조선배구대회가 열렸고 27년 전국체전격인 제23회 조선신궁대회에서 정식 종목으로 채택되기도 했다. 일본인 중심의 경성사범이 우승을 도맡다시피해 별다른 인기를 끌지 못하던 배구는 31년 제1고보가 팀을 창설한뒤 박계조의 등장을 계기로 전환점을 맞는다. 1학년때부터 말썽꾸러기로 소문난 박계조가 배구에 입문한 계기는 그의 성격만큼이나 별났다. 선생님에 대한 장난과 유머있는 말솜씨로 이미 교내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었던 박계조는 2학년에 진학하던 해 몇몇 친구들과 점심시간에 배구공을 갖고 공빼앗기 놀이를 하다 상급생을 들이받았다. 넘어진 상급생은 배구부 주장 조영규로 운동장에서 박계조의 패스하는 폼이며 민감한 운동신경을 넋을 잃고 바라보던 참이었다. 잠시후 조영규는 도망간 박계조를 잡아 놓고 `배구를 시작하면 벌을 주지 않겠다'고 꼬드긴뒤 지도교사였던 스기하라에게 데려갔다. 이미 박계조를 눈여겨 봐 온 스기하라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고 박계조는 내친김에 훗날 최고의 공격수로 명성을 떨친 친구 안종호와 함께 배구를 익혀나갔다. 그러나 강화우체국장이었던 아버지가 보약을 먹이며 금지옥엽으로 키워온 3대독자가 운동을 한다는데 가만있을리 없었다. 부친의 반대에 스기하라 선생마저 손을 들었고 박계조는 집에 돌아와 아버지의 감시아래 공부에 열중해야 했다. 문제는 배구부실. 대회가 코앞에 닥쳤지만 특유의 너스레와 야무진 플레이로 분위기를 주도했던 박계조가 빠지자 부원들은 연습할 맛을 잃었다. 할수 없이 스기하라 선생은 박계조를 몰래 불러들였고 제1고보는 며칠후 열린 조선신궁대회에서 숙적 경성사범을 제압, 장안의 화제를 모았다. 하지만 박계조란 이름이 조선땅에 널리 알려진 것은 그가 1935년 우여곡절끝에 실업팀인 철도국에 입단한 뒤 부터였다. 단짝 안종호와 체신국의 스카우트 싸움끝에 철도국 유니폼을 입은 박계조는 사네지마 감독의 지도아래 점프 자세와 타법, 스윙 위치 등을 교정받으며 비로소 제대로 된 배구선수로 성장했다. 당시 철도국과 체신국의 경기는 라이벌전으로 유명했는데 박계조-안종호의 콤비플레이가 명성을 더해가자 수천명의 관중들이 경기장을 가득 메웠고 전국적으로 배구단 창단 열기가 일었다. 다만 철도국 선수시절 아쉬웠던 점은 두주불사형이었던 사네지마 감독, 육상부 유약한과 어울리면서 술을 배우기 시작, 훗날 그의 단명을 재촉했던 부분이다. 여하튼 박계조는 입단 3년째 일본대학 배구의 패권을 다투던 와세다 대학과 친선경기를 계기로 일본행을 택한다. 만주 원정길에 경성에 들른 와세다대학의 감독이 3차례의 경기에서 전위에 서 뛰어난 임기응변과 센스로 공격을 이끈 박계조의 플레이에 반해 스카우트를 제의한 것이다. 국내 배구선수의 첫 해외진출이었기에 더욱 관심을 모았던 박계조는 곧 주전으로 기용, 와세다대학에게 수많은 우승컵을 안기며 `영웅'으로 우뚝 섰다. 그러나 잘 나가는 이 '조센징'에 대한 일본인들의 시각은 부정적일 수 밖에 없었다. 한국식 이름을 고수하던 그에 대해 일본인들의 반감이 거세지고 이를 지켜보던 팀 감독과 동료들은 창씨 개명을 요구, 끝내 이름을 무라이(村井)로 바꿔야 했다. 이즈음 그는 자신을 따르던 신입생 이와다 사브로의 소개로 누이 이와다 후미코와 교제를 시작, 양가의 반대를 무릅쓰고 약혼식을 올린다. 후미코는 박계조와 사귀기 전부터 배구경기가 있을때마다 관중석에 앉아 그의 이름을 연호하곤 했던 열성팬중의 한명이었다. 약혼식을 올린뒤 불과 닷새만에 전쟁터에 끌려간 박계조는 광복후 귀국, 가회동에 살림을 꾸리고 오광섭 안종호 등과 함께 배구협회를 조직하는 등 국내 활동을 재 개했다. 이화여고에서 교편을 잡으면서 이름있는 선수들을 불러모아 계림구락부를 조직했고 체신국으로 자리를 옮겨 안종호가 이끌던 남전과 새로운 라이벌 시대를 열었다. 그러나 박계조는 천성이 호방하고 사람과 어울리기를 좋아한 탓에 가정생활을 등한시, 부인 후미코와 3명의 자녀들은 가난과 굶주림에 어려운 삶을 살아야 했다. 화려한 선수생활과는 달리 그의 말년은 쓸쓸했다. 전쟁이 발발하자 평소 사회주의에 관심이 있던 그는 남전조직책 조직부장으로 활동, 주위 사람들과 멀어지게 됐고 9.28 수복 직후에는 경찰에 끌려가 고문을 받기도 했다. 다행히 배구팬이었던 경찰의 도움으로 풀려난 박계조는 목포와 진해에서 해군팀을 창설하고 배구강습회를 여는 등 후진 양성에 힘을 쓰다 55년 아시아배구선수권대회 코치로 임명된뒤 훈련도중 쓰러지고 말았다. 그의 나이 36세. 오로지 배구밖에 몰랐던 그가 남긴 것은 지갑안에 있던 아내 후미코의 사진과 그 뒤에 적힌 `가장 사랑하는 나의 아내'란 애틋한 문구가 전부 였다.
출처: 곤양배구동호회 원문보기 글쓴이: 점프가모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