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암 안정복 선생의 일대기를 담은 한상윤 作
“거친 밥 먹고 베옷 입기”를 읽고
유영채
거친 밥 먹고 베옷 입기. 맨 처음 이 책을 읽고 독후감을 쓸 때 많은 생각을 했다.
분명 이 독서 감상문 대회에는 순암 선생님의 저서로 독후감을 쓰라고 기재되어 있건만, 어찌하여 책의 내용은 없고 선생님과 관련된 내용의 책만이 올라와 있는 것인지. 한참을 고민하던 중 어쩔 수 없이 한상윤 작가님의 책을 읽고 독후감을 쓰기로 결심하였다. 뭐, 꼭 저서에 뿐만 아니라 순암 선생님과 관련된 책에도 선생님의 성품은 녹아있을 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상상 이상이었다. 성품이 녹록한 작품이 아니었다. 선생님의 철학, 선생님의 의견, 선생님의 성품 그 이상의 모든 것들이 스며들은 작품이었다.
그저 어쩔 수 없이 떠밀려 채택한 작품이라기엔 이 책의 작품성이 너무나 컸다. 그 이유 중에는 물론 한상윤 작가님의 풍부한 역량도 있겠지만 애초에 주인공이 되시는, 순암 안정복 선생님이 한상윤 작가님의 그 풍부한 역량이 표현되기에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위대한 분이시라서가 아닐까 생각한다.
이런 위대한 분을 서술한 책을 읽은 나는, 오늘도 그 감동을 적게나마 몇 자 남겨본다.
순암 안정복 선생님은 뛰어난 실학자이다. 실학이란 실제로 유용하게 쓰이는 것을 연구하는 학문인데, 당시 사회풍조로서는 공자 선생님의 유교 사상, 즉 성리학을 중요시 여기었기 때문에 실학을 탐탁지 않게 생각했다. 솔직하게 내 감상을 이야기 하는 것이니 이렇게 털어 놓는다. 그렇지만, 나는 성리학도 아주 쓸모없는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성리학에는 효와 예와 충 등의 사람이라면 당연히 지켜야 할 도리들도 적혀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사람으로써의 도리를 배우고자 성리학을 공부하는 것이 당연한데, 그 즈음의 사회에서는 성리학보다 실학이 좀 더 쓸모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이 책을 읽으며 어느 정도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순암 선생께서 35세가 되셨을 때, 의영고봉사에 제수 되셨을 때. 그 분께서는 길에서 헐벗고 굶어서 얼어 죽은 걸인들을 보셨다고 한다. 수레에는 궐에 바칠 토산물들을 가득 실고 가시던 그 분께서는 그 걸인들을 보며 이렇게 생각하셨다고 한다. 오부에서 작은 토담집 하나에 짚을 좀 깔아 주면 적어도 그들이 얼어 죽을 일은 없을 텐데. 라고. 이 부분에서 나는 알 수 있었다. 어째서 그 시기에 실학이 좀 더 필요 했어야만 했고, 그래서 이 분의 업적이 널리 알려졌는가를. 그 당시의 성리학자들은 선비입네 하고 정치를 펴지만, 정작 그들이 했어야 할, 했어야만 했던 백성을 위한 정치는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200년이 넘게 지난 이 역사를 글로만 보던 나도 이런 감정을 느끼는데, 하물며 직접 오고가며 그 광경을 보시던 순암 선생님께선 어쩌셨을까.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들었다. 왜, 어째서? 그렇게 까지 생각하셨다면, 적어도 한발 나서서 그들을 도우셨으면 되는 것이 아닌가?
그들을 그렇게 놓아두면 그들이 얼어 죽을 것까지 알고 계셨음에도, 그들이 죽지 않을 방법을 알고 계셨음에도, 그리고 그런 그들이 눈앞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어째서 선생께선 그들을 도우시지 않으셨을까.
나는 의영고봉사가 뭔지 정확하게 모른다. 그렇지만 어쨌든 나라의 녹을 먹고 사는 관리라는 것은 알겠다. 적어도 나라의 녹을 먹고 산다면 배는 곪지 않고 사시고 계셨을 터. 근데 눈앞에 굶는 이를 보고도 왜 자신의 쌀독의 쌀을 생각하지 않았던 것인가. 결국 선생님도 입으로만 학문을 외는 학자였단 말인가.
처음에는 꽤 괜찮던 기분으로 책을 읽었다. 선생님의 업적도 대강 알고 나서 책을 읽었으니 선생님이 한없이 위대해 보였다. 그렇지만 토산물을 실어 가셨다던 그 부분에서는 왠지 모르게 짜증이 치밀어 오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실학자는 입으로만 경전을 외던 사람들과는 다를 거라던 나의 편견 때문인가, 아니면 아직 실학자의 피가 끓어오르지 않으신 순암 선생님의 이 경험담의 일부 때문인가. 가볍게 읽던 책을 심각한 마음가짐으로 읽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이런 생각은 나의 오만이었음을 곧 깨달았다.
실학자는 꼭 몸으로 고생하며 백성의 고혈을 느껴봐야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었다. 유명한 실학자 중에 연암 박지원 선생님께서 계신다. 그 분은 유교 경전만 줄줄 외던 샌님 같은 성리학자들 비판하고 풍자하는 글을 많이 남기셨는데, 그 중 내가 기억하는 이야기는 ‘양반전’ 이라는 소설이었다.
돈으로 양반을 산 상민에게 주어진 건 수많은 허례허식과 새벽같이 일어나 잠을 쫓고 얼음에 박을 굴리는 목소리로 동래박의를 외는 그런 어이없는 조건들이었는데, 결국 상민은 양반을 포기하고 상민으로 살아가는 그런 내용이었다. 재미있는 이야기로 기억하고 있지만 사실 내용은 그렇지 않다. 실학의 중심인 실사구시가 들어가며, 글만 줄줄 외는 양반을 풍자하고 실리를 추구하는 그런 내용이었던 것이다.
실학자들이 꼭 몸으로만 일을 해야 실학이 아닌 것이다. 이렇듯 실학자들은 실생활에 도움이 되는 것들을 연구하고 공부하여 백성들도 알기 쉽게 풀어내는 등 백성을 위한 학문을 연구했기 때문에 오랜 기간 뿌리잡힌 성리학을 단기간에 흔들어 버릴 만큼 유용한 것이었다.
이렇듯 훌륭한 실학자에는 정조 때에 다산 선생이 계셨다면 영조 때엔 순암 선생이 계셨다. 순암 선생께서는 수많은 바구니를 가지고 계셨다. 바로 ‘초서롱’과 ‘저서롱’인데, ‘초서롱’에는 다른 사람의 저서를 옮겨 적은 것을, ‘저서롱’에는 자신의 저서를 적은 것을 넣어 놓은 것이다. ‘초서롱’ 같은 경우는 삼국지 등의 유명한 것들인지라 가격도 비싸고 물건은 물건대로 진귀한 것이라 글을 자신이 직접 베껴 소유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이 부분에서 의아하게 생각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니, 개인의 취미가 책을 베껴서 소유하는 것이든 말든 내 알 바가 아닌데 갑자기 뜬금없이 이게 무슨 말일까. 싶을 것이다. 그 분께선 낮에는 구부정하게 앉아 그 글을 필사하시고, 밤에는 등불까지 켜 놓으시며 밤새 글을 적으시는 것이다. 그렇게 그 글을 다 적고 나셔야 뿌듯이 쉬실 수 있었다고 하신다. 그 분의 일대기가 담긴 이 책에 이런 글이 있다.
저 옛날, 중국의 한나라에 유명한 사상가 ‘양자운’이라는 사람이 있었다고 한다. 옛날 그 ‘양자운’이 난해하기 이를 데 없는 [태현경]이라는 글을 짓는데, 한 친구가 와서 한다는 말이, ‘요즈음 세상은 주역조차 어려워 보기를 꺼려하는데, 이 책을 이해하고 읽으려 하는 이가 몇이나 되겠는가?’ 하며 혀를 찼다고 한다. 그러자 ‘양자운’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나는 천 년 후의 양자운을 기다릴 뿐일세.’. 과연, 그 당시에는 아무도 양자운을 알아주지 않았지만, 후에, 그가 이 땅을 밟고 있지 않게 되었을 때에. 그는 낙양의 가치를 올릴 만큼 위대한 사람이 되었다고 한다.
이 글 뒤에는 이 글에 대한 선생님의 생각 뿐 별다른 의견이 첨가되어 있지 않다. 내 의견, 그러니까 주관적으로 내 생각이긴 하지만, 혹시 선생님도 같은 마음으로 글을 쓰시는 것이 아닐까?
저런 것들을 베낄 당시엔 주변 분들께서 몸을 해친다며 말렸다고 하셨다. 그렇지만 순암 선생께선 피곤하면 남의 손을 빌리면서까지 글을 베꼈지 절대 그 일을 그치진 않으셨다고 한다.
선생님도 그런 마음이 아니셨을까. 백성을 위해 좀 더 나은 의견을 저술하기 위해 이렇든 자신을 다듬고 다지는 자신을, 천 년 후의 안정복을 기다리신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선생님께선 옳은 선택을 하신 것이고, 옳으신 행동을 하신 것이다. 단 200년도 되지 않아 실학자로서 흠모되는 분이 되셨으니.
내가 왜 여태껏 이 분을 몰랐나 싶을 정도로 순암 선생께선 이 일들 뿐만 아니라 의외로 많은 일들을 행하셨다. 환곡 제도, 노비제도, 양반제도 등에서 선생님은 많은 개혁을 요구하셨기 때문이다.
앞에서 내가 말했던 나의 오만은 바로 이 부분에서 깨졌다고 할 수 있다. 유명한 만큼의 업적이 없으시다 생각한 나의 생각은 바로 이 의미에서 깨졌다. ‘실사구시의 원조’!
앞서의 내용에서도 한 번 언급했던 실사구시는 사실에 입각하여 진리를 탐구하다. 는 의미인데, 이 생각의 원조 이셨으며 이용후생 등 백성들의 생활을 넉넉히 하고 풍요롭게 하는 것이 진리라는 생각을 내세우신 대표적인 인물이셨기 때문이었다.
그래, 자고로 실학자란 백면서생들의 탁상공론이 아닌 백성의 고혈을 눈으로 보고 느끼고 여기에서 잘못된 법도를 고치어 시행하는 이런 자세를 가져야 하는 것이 옳았다. 나의 생각은 맞는 의견임과 동시에 오만이었던 것이다.
여기서 꺼내 볼 이야기가 있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이 책에는 그분의 성품이 녹아있다고 했다. 이 책에는 소설인지라 허구적인 부분이 있기도 할 것이다. 그렇지만 일단은 내가 책으로, 또 여러 자료를 토대로 본 그분의 성품은 약간 직설적이고 강직한 분인 듯싶다. 순암 선생님의 저서 내용이 약간 이 책에도 나와 있는데, 그 내용을 보면 하시고자 하는 말씀을 직설적으로 표현함을 알 수가 있었다.
특히 그 분의 친구이신 ‘정수연’ 이라는 친구 분 역시 순암 선생님을 떠날 때 莊重(장중:웅장하고 장엄하다)이라는 글귀를 남기신 만큼 순암 선생님의 성격은 매우 직설적인 분이셨다고 한다.
그렇지만 그 분께서는 배우고자 하실 때에는 체면 가릴 것 없이 배우려 하셨다고 하니, 참으로 강직한 성품이 아닐까 싶다. 물론 직설적인 화법은 상대방을 배려하지 않음을 나타내기도 한다. 그러나 자신의 성격이 직설적이며 입조심이 부족함을 알고 계심을 보면 배려하지 않음이 아닌 원래 성격 때문임을 알 수 있다.
책을 읽으며 많은 것을 느꼈다. 처음 안정복이라는 성함을 들었을 때는 누구지? 학자인가? 하는 생각이 제일 먼저 들었다. 실학자라곤 세 분 정도 아는 게 다였으니까.
그렇지만 이 분의 업적을 보다 보니 이름이 없으신 게 아니라 내가 실학자 분들께 관심이 없었구나 싶을 정도로 이 분의 업적은 훌륭했다. 소설로 봤을 뿐인데 이리도 훌륭하신데, 그 분의 업적을 사실대로 담은 책은 눈이 부실 지도 모르겠다.
선생님의 업적에 푹 빠져 글을 더 쓰게 될까봐, 글의 마무리를 지을 수 없게 될 까봐, 이토록 훌륭하신 순암 안정복 선생님의 업적을 감동 깊게 읽은 나는 몇 자 더 적고 싶음에도 불구하고 이만 글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