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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잠언 제14강
말씀 / 잠언 25:1-26:28절
요절 / 잠언 25:28절
자기의 마음을 제어하는 사람
“자기의 마음을 제어하지 아니하는 자는 성읍이 무너지고 성벽이 없는 것과 같으니라”
지난주 시위대가 서부지방법원을 점거하는 충격적인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어떤 사람이 자기 친구가 현장에서 체포 구금되어 회사에 출근하지 못해 해고될 위기에 처했으니 도와달라는 글을 올렸습니다. 첫째는 법원점거에 참여한 사람들이 이상한 사회부적응자가 아니라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하는 사람들이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둘째는 그런데도 왜 그렇게 극단적인 행동을 했을까 입니다. 싸늘한 댓글이 많았습니다. ‘어떻게 결근 사유가 폭동일 수 있냐’, 회사는 중요하면서 법원은 우습냐?‘ 세상을 살다보면 정말 화나게 하는 일들을 만납니다. 억울하고 답답하고 열 받게 할지라도 마음을 제어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성읍이 무너지는 것처럼 크나큰 재앙을 만날 수 있습니다. 질서를 지키고 순종할 수 있어야 나라의 중심이 서고 교회의 중심이 든든해집니다. 말씀을 통해 마음을 제어하는 지혜를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솔로몬의 잠언은 유다왕 히스기야의 신하들이 편집된 것입니다.(1) 따라서 왕도와 신하도에 대한 메시지가 핵심일 것입니다. 1-5절은 왕도에 관한 메시지로 볼 수 있습니다. 2절을 보십시오. “일을 숨기는 것은 하나님의 영화요 일을 살피는 것은 왕의 영화니라” 창조주 하나님이 세상을 다스리는 일은 숨겨져 있습니다. 우주로부터 거대한 팔이 나와 태양계와 지구를 돌리든지, 혹은 계절이 변할 때마다 ‘봄이 오거라’, 말씀이 선포되는 그런 일은 없습니다. 그런데도 태초부터 지금까지 창조세계는 멈추지 아니하고 운행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창조 세계를 주관하는 일은 숨겨져 있습니다. 그러나 왕은 백성을 살피는 손길을 부지런히 드러내어야 합니다. 전쟁이 예상되면 군대를 소집하고, 경제가 어려우면 전문가들을 모아 대책회의를 해야 합니다. 힘없는 백성을 위해 신문고를 설치하여 그들의 아픔에도 귀를 귀울여야 합니다. 세종대왕은 업무를 살피느라 밤을 지새우는 경우가 많았다고 합니다. 지도자의 머리가 나빠 모임을 망치는 것이 아닙니다. 부지런히 살피지 않을 때 망칩니다.
3절을 보십시오. 하늘의 높음과 땅의 깊음 같이 왕의 마음은 헤아릴 수 없다고 했습니다.(3) ‘왕의 마음은 헤아릴 수 없어야 한다’가 좀더 정확한 표현일 것입니다. 왕의 마음은 유치하거나 단순하지 말아야 합니다. ‘꿍꿍이가 많아야 한다. 권모술수를 잘 부려야 한다’, 그런 뜻이 아닙니다. 지도자는 모든 사람을 헤아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부자도 헤아리고 가난한 사람도 헤아리고 보수도 헤아리고 진보도 헤아려야 합니다. 자기 지지층만이 아닌 온 백성에게 유익을 주기 위해 고민해야 합니다.
4,5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은에서 찌꺼기를 제하라 그리하면 장색의 쓸 만한 그릇이 나올 것이요 왕 앞에서 악한 자를 제하라 그리하면 그의 왕위가 의로 말미암아 견고히 서리라” 찌꺼기는 간신을 상징합니다. 간신이 온갖 찬사와 아부의 말로 왕을 무한 높이면, 찌꺼기로 보기보다 보석으로 보여질 수 있습니다. 은에서 찌꺼기를 제해야 예쁜 그릇이 만들어지듯이, 거짓으로 아첨하는 자들을 멀리해야 합니다. 듣고 싶은 말보다 들어야 할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때 왕위가 견고히 서게 될 것입니다.
6절부터는 신하의 도리, 팔로워들의 자세입니다. 6절을 보십시오. 왕 앞에서 스스로 높은 체 하지 말고 대인의 자리에 서지 말아야 합니다. 신하가 어찌 스스로 높은 체할 수 있을까요? 학문이나 실무능력이 왕보다 높을 때입니다. ‘왕은 지위만 높을 뿐, 나보다 한수 아래’, 그런 생각을 가진 자는 언젠가는 추락하게 될 사람입니다. 능력자일수록 겸손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높이실 때까지 기다릴 수 없다면, 그는 능력자가 아니라 미련한 자입니다.(7) 8절을 보십시오. 서둘러 다투는 자가 되지 말아야 합니다.(8) 앞뒤 충분히 따져보고 난 후에 화를 내도 늦지 않습니다. 감정을 가라앉히고 천천히 들여다보니 화났을 때 놓쳤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어떤 분은 ‘화 난 상태에서는 절대 말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가졌습니다. 100% 할 말, 못할 말, 마구 끄집어 던지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평소 은밀하게 상의했던 일까지도 끄집어내어 공격할 수 있습니다.(9) 그나마 있던 관계성마저 완전히 박살내고 신뢰하지 못할 인간으로 낙인 찍을 수 있습니다.(10)
왕이든지, 신하든지 말조심해야 합니다. 11절을 읽겠습니다. “경우에 합당한 말은 아로새긴 은쟁반에 금 사과니라” ‘경우에 합당한 말’이란 ‘하고 싶은 말이 아니라 해야 할 말’입니다. 하고 싶은 말보다 해야 할 말을 해야 하는데, 해야 할 말보다 하고 싶은 말을 꺼내기에 익숙합니다. 장례식장에 갈 때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고민하게 됩니다. 어떤 경우에는 함께 울며 유족의 슬픔에 동참해야 할 때가 있고, 어떤 경우에는 하늘 소망을 심고 밝고 힘있게 권면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어렵습니다. 경우에 합당한 말을 하려면 잘 들어야 합니다. ‘아마 그럴거야’, 대충 건너짚지 말고 무슨 의도로 말하는지 청종해야 합니다. 내가 듣기 싫어하는 말 속에 내가 미처 보지 못했던 것, 내가 경험하지 못했던 세계에서 나오는 통찰이 담겨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듣기 싫은 말이라 할지라도 곰곰히 생각해보고 근거가 있다면 귀를 열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렇게 충분히 들었다면, 이제는 어떻게 말해야 할지를 고민해야 합니다. 어떻게 말하는 것이 상대방을 살리는 말이며 도움이 되는 말인지를 가다듬어야 합니다. 그렇게 충분히 듣고 충분히 생각하여 말하는 것이 슬기입니다. 슬기로운 사람의 책망은 청종하는 귀를 가진 사람에게 금 고리와 정금 장식을 달아주는 것처럼 유익합니다.(12) 그를 고용한 주인의 마음을 시원하게 합니다.(13) 그것은 아첨하는 말과 다릅니다. 마음이 없으면서 선물한다는 말은 비 없는 구름이나 바람처럼, 당장은 사람을 혹하게 할 수 있지만 결국 실망으로 돌아올 것입니다.(14) 겸손과 진실을 담아야 하고 절대 기분내키는 대로 말하지 말고 오래 참음으로 말해야 합니다. 그러면 관원까지도 설득할 수 있는 힘을 갖게 됩니다.(15)
16-20절은 가까운 관계에 있는 사람, 21-28절은 그렇지 않은 사람에 대한 처신입니다. 16,17절을 보십시오. “너는 꿀을 보거든 족하리만큼 먹으라 과식함으로 토할까 두려우니라 너는 이웃집에 자주 다니지 말라 그가 너를 싫어하며 미워할까 두려우니라” 좋은 관계라도 지나치면 독이 됩니다. 인간적으로 친하다고 선을 넘지 말아야 합니다. 좋은 관계도 부담스런 관계로 변질됩니다. 마음에 들지 않아도 가짜 뉴스로 공격하지 말아야 합니다.(18) 악성 댓글을 달지 말아야 합니다. 말로 찌르는 것이 방망이나 칼이나 화살로 날카롭게 찌르는 것처럼 치명적인 상처를 입힐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환난날에 무조건 좋은 말만 하는 것도 좋지 않습니다.(19) 근거없는 장밋빛 미래는 뼈를 어긋나게 하는 것처럼 의인의 길을 가는데 걸림돌이 될 수 있습니다. 뼈 때리는 진실한 말이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특히 하나님의 훈련을 받을 때입니다. 스스로 깨달으면 좋은데, 가르쳐주지 않으면 깨닫지 못할 때입니다. 물론 진실을 말하는 것과 공감능력이 없는 말은 구분해야 합니다. 상처입은 영혼을 향해 노래하는 것은 추운 날에 옷을 벗기는 것과 같습니다.(20) 욥의 세 친구가 했던 것처럼 상처에 식초를 붓는 말이 될 수 있으니, 조심해야 합니다. 21,22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네 원수가 배고파하거든 음식을 먹이고 목말라 하거든 물을 마시게 하라 그리하는 것은 핀 숯을 그의 머리에 놓는 것과 일반이요 여호와께서 네게 갚아 주시리라” 원수같은 자가 어려울 때, 박수치고 노래하고 싶은 것이 사람의 본성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제시하는 복수는 음식을 먹이고 물을 마시도록 해주는 것입니다. 원수와 다른 차원의 행동을 하는 것이 원수를 가장 부끄럽게 하는 것입니다. 나아가 여호와의 개입을 끌어오는 지혜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2장에서 본문에 대한 주석을 이렇게 달았습니다.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롬12:21) 빛이 어둠을 이기듯이, 선이 악을 이깁니다. 어떤 이유로든 남을 헐뜯고 공격하는 말은 말하는 사람부터 사납게 만듭니다.(23) 24절을 보십시오. 돈 많은 여인과 큰 집에서 싸우며 사는 것보다 혼자 움막에서 사는 것이 낫습니다. 다툼과 분쟁의 고통이 얼마나 큰 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할 수 있는 대로 화평하기에 힘써야 합니다. 25절을 보십시오. 가깝지 않기에 함부로 말해도 된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좋은 기별, 좋은 말은 가까운 사람이든지, 멀리 있는 사람이든지 목마른 사람에게 냉수처럼 새 힘을 줍니다. 복음을 아는 사람은 항상 좋은 기별, 좋은 말 하기에 힘써야 합니다. 물론 좋은 말과 아부하는 말을 구분해야 합니다. 의인이 악인에게 굴복하여 아부하는 것은 우물을 흐리고 샘을 더럽게 하는 것처럼 치명적인 것입니다.(26) 꿀을 많이 먹으면 탈이 나듯이, 과한 칭찬, 과한 찬사는 탈 나게 만듭니다.(27)
참 어렵습니다. 언제 진실한 말을 해야 하고 언제 화살처럼 찌르는 말을 해야 하는지, 어떤 것이 원수 사랑의 말이며, 어떤 것이 악인에 대한 아부의 말인지 말입니다. 아는 것도 어렵지만 아는 대로 행하기가 어렵습니다. 자기의 마음을 제어하지 못할 때입니다. 28절을 읽겠습니다. “자기의 마음을 제어하지 아니하는 자는 성읍이 무너지고 성벽이 없는 것과 같으니라” 성읍이 무너지고 성벽이 없으면 적들의 공격을 물리칠 수 없는데, 마음을 제어하지 못하는 사람이 그러합니다. 세상과의 싸움, 나 자신과의 싸움, 마귀와의 싸움에서 승리하려면 마음을 제어하는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잠언 4장 23절은 이미 말씀했습니다.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마음을 제어하는 훈련은 수도원에 있는 수도사들의 고행만이 전부가 아닙니다. 일상의 관계에서 여러 사람들과 부딪히며 피드백을 받는 생활 또한 마음 제어의 좋은 훈련입니다. 마음과 말은 연결되어 있습니다. 내 입에서 튀어나오는 말을 보면, 내 마음이 어떤 상태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좋은 말, 덕이 되는 말을 하고자 노력하는 것이 마음을 제어하는 훈련으로 연결됩니다. 거친 말, 나쁜 말, 상스런 말을 멀리하면 마음도 거칠고 상스런 세계를 물리치는 훈련이 됩니다. 누군가에게 상처주는 말을 했다면, 그것을 가벼이 여기지 않는 것입니다. ‘내 마음이 거칠어진 것은 아닌가?’, 상대방을 탓하지 말고 자기를 돌아보고 인식하는 계기로 삼아야 합니다. 나의 말이 누군가에게 큰 힘이 되었다면, 그것을 하찮게 흘려버리지 말고 ‘이런 말이 힘을 주는구나! 기회가 되면 다시 해봐야겠다’, 새로이 결심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혀를 제어함으로서 마음을 제어하는 훈련이 됩니다. 한편 마음을 어둡고 거칠어지게 만드는 통로가 될 수 있는 것들을 멀리해야 합니다. 예를 들면 폭력물이나 음란물이 그러합니다.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한다고 말씀했습니다.(롬8:5) 폭력과 음란을 좇는 영상을 많이 보면, 마음 또한 그렇게 사납고 음란한 세계로 떠내려갑니다. 가장 좋은 방법은 말씀을 통해 영적 가치관을 쌓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영이 내 마음을 다스려주시도록 기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거룩한 당신의 영으로 내 마음을 다스려 주옵소서. 당신의 영을 따라 경건하게 살게 하옵서” 소리 내어 기도해야 합니다. 찬송을 통해 어둠의 세력을 떨쳐버리는 것도 좋습니다. 내 마음과 입술이 성령으로 충만해지도록 훈련해야 합니다. 그렇게 마음을 제어하는 사람은 언제 어디에 있든지 흔들리는 아니하고 의인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마음을 제어하지 않는 자를 성경은 미련한 자라고 합니다. 26장 1-11절은 미련한 자에 대한 말씀입니다. 26:1절을 보십시오. 미련한 자에게는 영예가 합당하지 않습니다. 영예가 주어지면 재앙을 가져옵니다. 서울대를 나오고 최고 지위에 오를지라도 재앙을 가져옵니다. 여름에 눈이 오는 것처럼, 추수철에 비 오는 것처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저지릅니다. 미련한 자의 분노는 참새가 짹짹하며 떠도는 것과 제비가 시끄럽게 날아가는 것처럼 의미 없습니다.(2) 말에게 채찍이 필요하고 나귀에게 재갈이 필요한 것처럼, 미련한 자에게는 말이 아닌 막대기가 필요합니다.(3) 미련한 자의 어리석은 것을 따라 대답하지 말아야 합니다.(4) 그런데 5절에서는 미련한 자에게는 그의 어리석음을 따라 대답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표준새번역은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미련한 사람이 어리석은 말을 할 때에는 같은 말로 대응하여 주어라. 그가 지혜로운 체할까 두렵다” ‘어리석은 말에 장단 맞추어주지 말아야 하고, 그가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가르치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분별되지 않는다면, 침묵하는 것도 지혜입니다.
6절을 보십시오. 미련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자기 발을 베는 고통으로 돌아올 수 있습니다. 오래 전 어떤 목자는 캠퍼스에 전도하러 나갔다가 자식뻘 후배에게 어마어마한 폭언을 들었습니다. 70,80 캠퍼스 시절이었으면, ‘너는 선배도 없냐? 새까만 후배 놈이 어디서...’, 아작 냈을 것입니다. 그 청년은 자신을 ‘캠퍼스 지킴이’ 같은 투사로 생각하여 그리 강하게 말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미련한 자입니다. 다리뼈가 어긋나면 힘차게 달릴 수 없는 것처럼, 마음이 어긋나고 뒤틀어지면 입에서 나오는 말이 그러합니다. 건전한 말, 덕을 끼치는 말보다 어그러진 말, 뒤틀린 말을 뱉습니다. 거친 말, 사나운 말은 마음이 어그러지고 뒤틀려 있음을 드러내는 것입니다.(7) 미련한 자에게 높은 자리도 주지 말아야 합니다. 돌에 물매를 매는 것, 요즘으로 비유하면 총알을 장전한 총을 쥐어주는 것처럼 위험한 일입니다.(8) 9절을 보십시오. 미련한 자의 잠언은 술 취한 자가 가시나무를 든 것처럼 위험합니다. ‘미련한 자의 잠언’이란 ‘자기는 지혜로 생각하는데, 실은 영적으로 미련한 말’을 말씀합니다. 미련한 자는 지혜로 여기고 확신을 담아 쏟아냅니다. 온갖 물건을 만드는 장인이라도 미련한 자를 지혜로운 자로 고쳐낼 수 없습니다.(10) 11절을 읽겠습니다. “개가 그 토한 것을 도로 먹는 것 같이 미련한 자는 그 미련한 것을 거듭 행하느니라” 개가 토하는 것은 먹지 말아야 할 것을 먹었을 때입니다. 저희 집 또리는 가방을 열고 초코릿 꺼내먹는데 달인입니다. 그렇게 먹고 나면 엄청 토합니다. 개와 쵸코릿이 상극이기에 하루 정도 죽을 듯이 고통스러워하는데, 기회가 오면 다시 훔쳐 먹고 다시 토합니다. 그것을 반복합니다. 사료를 과식하여 토할 때가 있는데, 토한 것을 다시 먹습니다. 절제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미련한 자의 언행이 그와 같습니다. 미련한 언행으로 힘든 일을 겪고 나면, ‘스스로 깨닫고 달라지겠지’라고 기대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고통 자체가 미련함을 바꾸지 못합니다. 회개하고 돌이켜서 마음을 제어하기 전까지는 개와 같이 미련한 삶을 반복합니다.
미련한 자가 어떠한 사람인지, 막연하게 다가올지 모르겠습니다. 12-28절에서는 몇몇 미련한 자의 샘플을 제시합니다. 첫째는 게으른 자입니다.(12-16) 둘째 다투는 자(17-19), 셋째 말쟁이(20-22), 넷째 원수(23-28)입니다.
첫째 게으른 자입니다.(12-16) 잠언은 게으른 자를 반복하여 문제시합니다. 게으름은 가정과 사회의 기초를 뒤흔들기 때문입니다. 게으른 자는 게으르게 사는 것을 지혜로 여깁니다.(12) 한의대를 들어올 정도로 똑똑했었는데, 막상 수업을 듣지 않고 전국을 유랑했던 어떤 형제가 있었습니다. 당연히 학교에서 제적당했습니다. 유랑생활을 계속하자, 가족과 친구들의 관계도 끊어졌습니다. 이곳저곳 돈을 빌리고 노숙자처럼 살았습니다. 친구였던 목자가 불쌍히 여기고 데려오지 않았다면, 노숙자로 생을 마쳤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정작 자신은 스스로를 자유로운 영혼으로 생각했습니다. 그에게 ‘자유로운 영혼이 아니라 한 사람도 사랑하지 않는 이기적인 영혼, 소중한 관계를 위해 노력하지 않는 게으른 영혼’이라고 책망했던 기억이 납니다. 게으름의 뿌리는 두려움과 안일입니다. 13절을 보십시오. 길에 사자가 있다, 거리에 사자가 있다며 밖으로 나가려고 하지 않는 비유가 그러합니다.(13) 문짝이 돌쩌귀를 따라서 도는 것 같이 침상에서 돕니다. 이미 낯선 세계를 개척하기를 두려워하며 이미 익숙한 세계에서 편안하게 사는 것을 전부로 생각합니다. 15절을 보십시오. 게으름이 깊어지면 그 손을 그릇에 넣고 입으로 올리기조차 괴로워합니다. 과장된 표현이지요. 그런데 게으름의 해악을 잘 표현했습니다.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할 수 있는데도 하찮은 이유로 주저앉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해 버립니다.
둘째는 다툼을 좋아하는 자입니다.(17-19) 17절입니다. 앞뒤전후 사정도 제대로 모르면서 다툼에 끼여들지 말아야 합니다.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상습적으로 끼여들어 한쪽 편 드는 자는 개의 귀를 잡는 것처럼 상처를 입을 것입니다. 햇불을 던지며 화살을 쏟아서 이웃에게 많은 피해를 끼쳐놓고 ‘실은 재미있자고 한 장난이었어’, 말하는 자들도 그와 같습니다.(18,19) 함께 하지 말아야 할 미련한 자들이니, 속지 말아야 합니다.
셋째, 말쟁이입니다.(20-22) 20절의 말쟁이란 단지 말 많은 사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원어로 ‘나르간’, ‘나쁜 소문을 퍼뜨리는 사람’입니다. 나무가 다하면 불이 꺼지듯이, 말쟁이가 없어지면 다툼이 쉬게 됩니다. 반면 말쟁이가 있는 곳마다 타는 불에 나무를 더하여 불길을 키우는 것처럼, 다툼과 분열을 키우게 됩니다.(21) 남에 대한 악소문은 별식과 같아서 뱃속 깊은 데로 내려가서 오랫동안 마음 깊이 남습니다.(22) 그러므로 조심해야 합니다. 최근 우리나라는 좌우 진영으로 나뉘어 극심한 갈등을 겪고 있습니다. 음모론을 퍼뜨리는 유투버들, 말쟁이들에게 일정 부분 책임이 있습니다. 말쟁이 알고리즘에 갇히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는 할 수 있는 대로 좋은 말, 덕이 되는 말을 듣고 퍼 나르기에 힘써야 합니다. 복음을 나르는 복음쟁이가 되면 제일 좋겠습니다. 은혜를 끼는 말, 덕을 세우는 말을 하는 자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넷째, 원수입니다.(23-28) 입술은 온유한데, 마음이 악한 자들이 있습니다.(23) 겉으로 부드러운 말에 속기 쉬운데, 정체는 원수임을 알아야 합니다.(24) 말에 속지 말고 마음에 담긴 가증함을 보아야 합니다(25) 함정을 파고 돌을 굴리지만, 정작 자신이 빠지고 치입니다.(26,27) 말로 끼치는 피해 또한 강도의 폭력 못지않은 상처를 줄 수 있습니다.(28)
야고보는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온전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약3:2) 말을 통해 자기를 돌아보고 마음을 제어하기에 힘쓰라는 말씀입니다. 그들이 지혜로운 사람이며, 견고한 인생의 집을 짓는 자들입니다. 우리 각 사람에게 믿음 주시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