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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슈비츠(Auschwitz) 강제수용소는 크라쿠프(Krakow)에서 서쪽으로 50㎞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인구 5만 명의 작은 공업도시로, 폴란드어로는 오슈비엥침(Oswiecim) 이라고 한다.
폴란드의 고도 이며 아름다운 크라쿠프(Krakow)는 600년 역사를 자랑하고 있다.
역사적 유적지가 많으며 가치 또한 높다.
고도 크라쿠프(Krakow) 옆에 아우슈비츠(Auschwitz) 강제수용소가 존재하고 있다고 하는 것을 상상하기도 싫었다.
크라쿠프시
제2수용소를 관람하고 다시 제1수용소로 이동했다.
내가 폴란드를 여행한 것은 아우슈비츠(Auschwitz) 강제수용소를 직접 목격하기위해서다.
그것은 자료가 현장에 충분히 남아있을 것이라고 가정했기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기대하고 있었던 것 만큼 자료는 충분하지 못했다.
실망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나치는 1945년 패망의 그림자가 짙어갔다.
자신들에게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는 증거나 자료를 소각시키기 시작했다.
유대인 대량학살의 증거도 그 일환이었다.
그래서 유대인 수용소 막사를 소각하고 건물을 파괴시켰다.
때문에 자료가 남아있을 수 없었다.
크라쿠프 메인광장
제2차 세계대전은 나치의 패망으로 끝났다.
나치의 잔학성을 세상에 알릴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막사가 불타거나 파괴된 곳에 새로 막사를 짓고 자료를 수집해 전시하고 있다.
이것만으로도 과거 청산을 위해 한걸음 앞으로 다가간 것이다.
큰 진전이라고 아니할 수없다.
나치의 파괴와 은폐로 역사적 가치나 현실감은 떨어졌다.
그것은 어쩔 수 없다.
시청사 탑
하지만 유대인을 운송 했던 철로는 당시 그대로 모습이다.
유대인을 감시 했던 초소도 그대로다.
유대인이 학살당한 현장에서 자료를 수집해보려 했으나 그것은 욕심이었다.
일행도 회의감을 느끼기시작했다.
제1 수용소가 제2 수용소와 처지가 같다면 굳이 제1 수용소 관람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그래서 회원들은 크라쿠프(Krakow)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나는 이 의견에 반대했다.
수키엔니치 직물회관
나는 제1수용소를 관람하면 제2수용소에서 관람하지 못했던 자료들을 제1수용소에서 보완할 수 있을 것이라고 의견을 제시했다.
그래서 오후 4시를 기다려 다시 제1수용소를 관람했다.
제1수용소는 제2수용소보다 긴장되게 했다.
폴란드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는 제1수용소와 제2수용소가 있다.
두 수용소를 모두 관람할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큰 보람을 느꼈다.
인생에서 만족이란 있을 수 없다.
바실리카 성모 마리아교회
하지만 인류에게 죄를 범하는 우는 없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우슈비츠(Auschwitz) 강제수용소 방문 후 반향을 크게 일으키지는 못했다.
이것은 자료가 빈약 했기때문이다.
나치의 유대인확살에 관한 역사의 일부를 확인 것만으로도 만족했다.
다시 Fero Express 호텔로 돌아왔다.
아우슈비츠(Auschwitz) 강제수용소에서 발견하지 못한 의미를 크라쿠프(Krakow) 고성에서 찾아보고 싶다.
자유여행을 떠난지 23일째 되는 날이다.
성모 승천교회
몸은 피곤하고 식사도 변변치 않다.
일행 모두가 신경이 날카로워져서 사적인 문제로 충돌하기도 했다.
오늘 밤에 숙면을 한다면 내일은 알찬 여행이 될 것같다.
하늘은 화창하고 청명하다.
여행하는 데 즐거운 하루가 될 것 같다.
어제는 아우슈비츠(Auschwitz) 강제수용소를 방문했다.
그래서 하루 종일 기분이 울적했다.
성모 승천교회 내부
새로운 날은 새로운 기분으로 여행을 시작하는 것이 정신건강 수양에 좋을 것 같다.
그러나 식사를 준비해야 한다는 것이 늘 머리를 무겁게 했다.
오늘은 아침식사를 준비하지 않아도 되는 날이다.
호텔식을 하는 날이기때문이다.
그런데 의외로 아침 햇살이 상쾌하고 화사하여 발걸음이 가벼웠다.
호텔 레스토랑이 있는 지하로 내려갔다.
호텔식이 대부분 그렇듯 Fero Express 호텔도 음식이 다양했다.
호텔에서 먹는 식사 만큼은 황제처럼 거드름을 피우며 즐기고 싶다.
시청사 탑 앞에서
그러나 지금까지는 고추장에 맨밥 아니면 양파나 당근으로 식사를 했다.
이것을 적응하는데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다.
그 징후가 몸으로 표출 되고있다.
아침 세수를 하는데 갑자기 코피가 쏟아졌다.
지금까지 아무리 피곤해도 코피가 쏟아진 적이 없었다.
코피가 쏟아진 것은 건강이 악화 되었기때문에 앞으로 조심하라는 증거다.
건강을 호전시키기 위한 방법으로는 잘자고 잘 먹는 것이다.
직물회관 앞에서
그러나 자유여행을 진행하고 있는 상황에서 숙식을 호전시킬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자유여행을 하기 전에 10여년 동안 산행을 했다.
그래서 이번 동유럽 자유여행에서 육체적인 고통은 충분히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반환점을 돌면서 심신이 약해지고 있다.
겁도 난다.
더위도 지속되고 있다.
숙식은 하루하루를 힘들게했다.
호텔에서 거드름을 피우는 것도 평소에 습관화 된 사람만 가능하다.
호텔에서 여유를 가지고 식사를 하려고 해도 생각대로 되지 않았다.
식사는 거의가 폭식이다.
규칙적인 식사가 아니기때문이다.
대화도 의례적인 몇 마디 뿐이다.
그리고 침묵이 지속되고 있다.
식사를 마치고 4층 방으로 올라갔다.
치솔 질을 마치고 가방과 식재료를 든 채 1층 로비로 내려갔다.
친구들은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바벨성으로 이동 중
아이폰을 서울로 연결시켜보고 싶었다.
전화형식으로 통화를 하게되면 통화료를 지불해야한다.
그것도 상상하기 어려운 액수다.
그래서 와이파이가 개통되어있는 로비에서 카톡을 연결시키고 있다.
폴란드 크라쿠프(Krakow) 근교에서 우리나라까지 통화가 가능할까 의심이 들었다.
와이파이는 1층 로비에서 만 가능하다.
로비에서 통화를 시도했다.
아이폰이 연결되었다.
신기하기만 했다
지구 반대편에 있는 이곳에서 우리나라까지 통신이 가능했기때문이다.
와이파이 덕분이다.
서울은 밤 늦은 시각이다.
메시지만 집으로 보내고 렌트 카에 탑승했다.
차량은 크라쿠프(Krakow)로 이동했다.
크라쿠프(Krakow)도 어느 도시와 마찬가지로 주차난이 심각하다.
도로를 몇번 돌다가 빈공간에 주차했다.
신기하게도 이곳은 도로가에 주차를 해도 견인하지 않았다.
아직까지는 차량이 많지않기때문일 것이다.
주차를 마치고 도보로 이동하기시작했다.
크라쿠프(Krakow)는 인구 75만의 작은 도시다.
그러나 과거 폴란드의 정치, 경제, 행정의 중심지였다.
크라쿠프(Krakow)는 비스와 강이 흐르는 넓은 분지에 위치하고 있다.
구시가지는 도시의 좌측에 신시가지는 도시의 우측에 위치하고 있다.
도시의 기원은 8세기로 추정 되며 10세기 중엽에 요새화 되었다.
이후 1320년부터 1609년 까지 폴란드의 수도로 번성했다.
카지미에슈 3세 때다.
카지미에슈 3세는 피아스트 왕조의 마지막 왕이다.
폴란드의 역대 왕들 중에서 대왕이라고 칭호를 붙이는 경우는 카지미에슈(Casimier) 3세 뿐이다.
이것으로 추측해 보건 데 그는 위대한 업적을 남긴 대왕 이었을 것이다.
그는 외교술이 뛰어나 큰 전쟁을 치루지 않고도 적국과 공존했다.
그리고 튜턴기사단 과도 평화를 유지했다.
서양 중세 때 유명한 기사단이 몇 개가 있었다.
그 중 튜턴 기사단은 오스트리아의 빈에 본부를 두고 있는 로마 가톨릭교회 소속이다.
특히 십자군 원정에 큰 활약을 했다.
거리의 악사
튜턴 기사단을 독일 기사단 이라고도 부른다.
정식 명칭은 예루살렘 성모 마리아의 독일 형제 회이다.
카지미에슈 3세는 실롱스크 지역과 포모줴 지역을 수복하는데 실패했다.
하지만 약화 되었던 왕권을 확립하고, 군대를 재정비하는데 성공했다.
이것을 토대로 헝가리를 동맹국으로 만들고 동쪽 루스 지역을 합병했다.
공국으로 분할될 당시 약화 되었던 국내의 행정, 사법, 경제도 혁신을 통해 발전시켰다.
재정이 확보되자 건설 사업에 박차를 가했다.
그리고 동쪽 무역로 를 개척해 이윤을 극대화시켰다.
1364년 크라쿠프(Krakow)대학교를 설립하여 학문과 문화 발전에도 기여했다.
바르샤바가 폴란드의 아픈 역사를 대변한다면, 크라쿠프(Krakow)는 폴란드의 영광스런 과거를 대변하고 있다.
크라쿠프(Krakow)는 11세기부터 16세기말까지 폴란드의 수도로 번영을 누렸다.
유럽 문화와 예술의 중심지로 발전한 것도 바로 그 무렵이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 사령부가 이곳에 설치 되어 있었다.
때문에 연합군의 폭격을 피할 수도 있었다.
그것은 순전히 운이었다.
교회내부
16세기 말 크라쿠프(Krakow)는 왕국의 수도 자리를 바르샤바에 넘겨 주었다.
하지만 예술과 지성은 바르샤바를 능가하고 있다.
그래서 폴란드 국민들로 부터 사랑받고 있는 도시다.
크라쿠프(Krakow)는 비교적 유적지가 많다.
조선왕조 600년의 왕도 한양과 비슷하기때문이다.
크라쿠프(Krakow)는 성곽으로 둘러싸인 원형의 도시다.
그 가운데 광장이 있다.
바벨 성으로 강행군
크라쿠프(Krakow) 메인광장이다.
이곳은 1978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메인광장 입구에 폴란드 왕관의 장식을 본 떠서 꾸민 문루가 있다.
과거 왕국으로 인도하는 듯한 문루를 통과하면 돌이 깔린 좁은 길과 멋스러운 장식을 한 건물들이 나타난다.
메인광장 중앙에 “수키엔니체(Sukiennice)”가 자리하고 있다.
수키엔니체(Sukiennice)는 직물회관이다.
길이 100m 가 넘는 대형 건물로 르네상스 양식이다.
르네상스양식은 그리스 열주식에 로마의 돔 형이 가미된 양식이다.
직물회관에 길드관도 있다.
바벨 성 성문
길드는 수공업자의 동업조합이다.
직물회관은 중앙광장의 핵심이고 번화가의 중심 축이다.
각종 기념품, 침대보, 액세 사리, 섬유관련 상품 등을 판매하고 있다.
지방에서 생산된 직물을 상인 길드가 수합 하여 판매 하였던 곳이다.
그러나 지금은 공예품을 포함해 다양한 상품을 팔고있다.
시청사로 쓰였던 건물에 남아 있는 탑은 시내를 조망하기에 좋다.
내부는 박물관으로 이용되고 있다.
바벨 성에서 내려다본 시내
역사지구의 명물은 13세기에 조성된 중앙시장 광장이다.
당시 유럽에서 가장 큰 규모이며 유럽 경제활동의 중심지다.
광장은 관광객들로 붐 비며 볼거리도 많다.
중앙광장 입구는 많은 레스토랑과 카페가 있다.
우리가 광장에 도착했을 무렵은 이른 시간대였다.
그래서 아직은 영업이 형성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가끔씩 중앙광장으로 이동하는 관광객을 목격할 수 있다.
바벨 성으로 진입
광장의 한 켠에 고딕 양식 첨탑을 자랑하는 바실리카 성모 마리아교회가 있다.
성모 승천교회다.
두개의 첨탑이 형제처럼 나란히 서서 미소를 짓고 있다.
그래서 성당안으로 들어갔다.
아침미사가 진행되고 있다.
성호를 긋고 기도를 했다.
폴란드는 요한 바오로 2세가 탄생한 곳이다.
그는 폴란드인들의 우상이다.
성당내부에 그의 사진이 걸려있다.
크라쿠프 시가지
성당 밖에서도 그의 사진을 발견할 수 있었다.
크라쿠프(Krakow) 바실리카 성모 마리아 교회는 13세기 경에 고딕건축물로 지어졌다.
화려하고 아름다운 성당이다.
바실리카 성모 마리아 교회 옆에 있는 바르바리 천주교 성당도 눈길을 끌었다.
다시 성 보치에하(Wojciecha) 교회로 이동했다.
크라쿠프(Krakow) 성 보치에하(Wojciecha)교회는 크라쿠프 리네크 글루프니에 위치하고 있는 교회이다.
교회로 부터 아름다운 선율이 울리고 있다.
그것은 나팔소리다.
나팔소리는 유구한 역사가 있다.
매시간마다 4번씩 4방향에서 나팔소리가 울리는데, 소리가 중간에서 끊겼다.
13세기 경 몽골인의 침입을 알리기 위해서 라고 했다.
나팔을 불다가 화살을 맞고 쓰러진 나팔수를 기념하기 위한 의식이다.
1320년부터 지금까지 나팔소리가 울린다고 하니 과거를 잊지 않으려는 폴란드 사람들의 성향을 알 수 있을 것같다.
수많은 이민족의 침략을 받았으면서도 폴란드가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전통이 유지되고 있기때문이다.
광장 중앙에 폴란드의 민족시인 아담 미츠키에비치(Adam Mickiewicz )의 조각상이 서있다.
많은 사람들이 동상 주위에서 서성이거나 동상을 지켜보고 있었는데 그는 폴란드인들의 국민적 우상 이었다.
크라쿠프(Krakow) 전통재래시장으로 이동했다.
토요일 아침은 주말동안 먹을 음식을 미리 구입하기 위해 성시를 이룬다.
다시 메인광장에서 그로츠카 거리를 지나 바벨 성으로 이동했다.
바벨 성은 비스와 강이 내려다보이는 바벨언덕에 위치하고 있다.
바벨 성은 16세기 경에 건축되었다.
고딕 양식으로 되어 있고 현재는 박물관으로 개조되어 있다.
500년 역사를 지닌 황금 돔이 찬란하게 빛나고 있다.
이곳은 수도를 바르샤바로 옮긴 후 오랜 세월동안 방치되어 있었다.
현재는 성이 복원돼 대성당, 왕궁, 박물관 등을 일반인들에게 공개하고있다.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는 만큼 바벨 성은 다양한 건축 양식이 혼합되어 있다.
바벨 성은 역사지구의 다른 축이다.
비스와 강
바벨언덕까지 승용차전용도로가 개설되어 있다.
그러나 승용차전용도로는 고위인사만 왕래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성문까지 걸어갔다.
성문은 최근에 복원한 것으로 화려하지는 않았다.
성문에 제복을 입은 병사가 부동 자세를 취하고있다.
도로를 따라 계속 걸어가 바벨 언덕에 도착했다.
바벨 언덕에서 크라쿠프(Krakow) 시 전경을 한 눈에 바라볼 수있다.
가이 환상적이다.
크라쿠프 바벨성
그리고 비스와 강의 운치도 한눈에 바라 볼 수 있다.
바벨 성은 크라쿠프(Krakow)가 폴란드의 수도로 공인 되었을 때 왕들의 거처로 이용되었다.
마치 왕족이나 된 것처럼 바벨언덕을 거닐고 있다.
넓게 트인 시야가 한 눈에 들어왔다.
시원한 바람이 더위를 식혀주었다.
바벨 언덕 아래는 천 길 벼랑이다.
강물이 유유히 흐르고 있다.
시계바늘이 잠시 멈춰선 것같다.
세상이 정지된 듯 평화롭다.
바벨언덕에 서있는 인간은 너무 작게느껴진다.
강 위에 유람선 한 척이 도도하게 파도를 가르고 있다.
갈매기 한 쌍이 그 주위를 맴돌고 있다.
다시 바벨 성 앞 광장으로 이동하고 있다.
화단에 조성된 화초가 만개했다.
갖가지 색깔로 단장하고 있는 바벨 성 만큼 화초도 아름답다.
바벨 성 내부로 들어가고 있다.
감시가 삼엄하다.
바벨 성 내부
사진촬영은 금지다.
추억을 남길 수없어 안타깝다.
바벨 성 내부는 사람들로 입추의 여지가 없다.
몸을 돌릴 수도 없어 앞사람의 발 뒤꿈치를 따라 이동하고 있다.
혹시나 사진을 촬영할까바 감시자의 눈초리는 이리와 같다.
사진촬영을 포기했다.
바벨 성 내부는 화려하고 찬란하다.
폴란드 문화의 정수를 보는 듯하다.
탄성이 저절로 나왔다.
1관을 관람하고 2관으로 이동하고 있다.
2관은 폴란드 왕들의 동상과 시신이 안치되어 있다.
좁은 공간에 관람자가 많아 호흡이 멈출 것 같다.
감시자의 눈초리를 피해 사진을 촬영했다.
가슴이 두근거리기시작했다.
금지 사항을 어겼기때문이다.
바벨 성 밖으로 이동하고 있다.
두근거렸던 심장이 안정되고 있다.
한군데가 더 남아있다.
지하 묘지
지기스문트 1세 예배당이다.
입구는 관광객들로 늘어서 있다.
안내인은 질서를 강조했다.
이곳은 죽기전에 꼭 봐야 할 세계 건축물 1001 번째로 등록되어 있다.
바벨 성을 관람하기 위해 내국인은 물론 외국인도 집결하고 있다.
교황 바오로 2세
오늘이 토요일이다.
평일보다 관광객이 훨씬 많은 이유다.
안내인의 친절은 몸에 배인 것같다.
이것은 지나치지 않다.
친절한 안내로 예배당 구석구석을 관람할 수있었다.
실내 장식은 화려하고 황홀했다.
구체적인 설명이 안내판에 부연되어 있었으나 내용을 파악하는데는 한계가 있다.
그러나 왕조 초기 왕권이 미약하여 로마 가톨릭으로 개종할 수밖에 없었다는 당위성을 설명하고 있는 듯하다.
금색을 덧칠한 돔은 지기스문트 1세 예배당이다.
르네상스 건축양식으로 되어 있다.
외관은 넋을 잃게했다.
지기스문트 1세 때가 폴란드는 황금기의 시작이다.
사회, 문화, 과학이 눈부신 발전을 이룩했던 시기다.
지기스문트 1세와 밀라노의 스포르차 가문 보나와의 결혼은 폴란드 르네상스 예술을 폭발시켰다.
저명한 이탈리아 예술가들이 폴란드로 대거 몰려들었기때문이다.
훌륭한 건축물들이 등장 것도 이 무렵이다.
16세기에 지어진 이 웅장한 건물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지기스문트 1세의 예배당이다.
바벨 대성당을 둘러싼 열여덟 개의 영 묘 중 하나인 지기스문트 1세 예배당은 얕은 그리스 십자가 형태의 평면 설계를 갖추고 있다.
지기스문트 1세와 그 자녀들, 폴란드의 왕족들, 지기스문트 2세와 야기엘론 안네의 무덤이 이곳에 있다.
예배당 건물의 위쪽은 팔각 드럼형태로 되어있다.
유리를 끼운 채광 창이 현란 함을 더했으며 금으로 장식한 십자가가 돔 위에 솟아있다.
벽 세 개의 디자인은 로마 신화 속 장면들을 묘사하고 있다.
성 안에 왕궁과 여러 개의 정원이 있다.
왕궁은 현재 박물관으로 쓰이고 있다.
그 전시 물을 통해 화려했던 당시 궁정생활을 엿볼 수 있었다.
왕궁 옆에는 대관식이 치러졌던 크라쿠프 대성당이 있다.
고딕 양식의 장엄한 외관 뿐 아니라 내부의 제단과 화려한 벽면 장식은 르네상스의 꽃이다.
국보급으로 지정되어 있는 대성당의 제단은 제작기간 만도 12년이 소요 되었다.
야기엘론스키대학교를 찾기위해
야기엘론스키대학교로 이동했다.
그러나 야기엘론스키대학교를 쉽게 찾을 수 없다.
야기엘론스키대학교는 크라쿠프(Krakow)대학교의 이전 명칭이다.
그래서 현지인 들은 야기엘론스키대학교를 이해하지 못했다.
현지 인들을 붙잡고 물어보았을 때 크라쿠프(Krakow)대학교라고 말했어야 했다.
야기엘론스키대학교라고 물었으니 모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야기엘론스키대학교를 찾기위해 이동하다가 많은 사람들이 집결하고 있는 곳을 발견했다.
요한 바오로 2세가 크라쿠프(Krakow) 대주교 재임 시 주교 관이었다.
요한 바오로 2세는 크라쿠프(Krakow)의 인근 바도비체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카를보이티야 다.
야기엘론스키대학교
1938년 아젤로니아대학교 철학과에 입학하여 연극활동을 하다가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학업을 중단했다.
1942년 성직에 뜻을 두고 크라쿠프(Krakow)대학교 신학대학을 졸업했다.
1946년에 사제가 된 후 크라쿠프대학교 신학교수 등을 거쳐 1964년 크라쿠프(Krakow) 대주교로 부임했다.
요한 바오로 2세의 주교 관 발견은 뜻밖이었다.
주교 관을 돌아보고 다시 야기엘론스키대학교로 이동했다.
현지인 들중에서도 야기엘론스키대학교를 알고있는 사람이 없었다.
학생에게 다시 물었다.
지기스문트 예배당
학생은 우리를 직접 대학교로 안내했다.
학생의 친절함에 감동받았다.
야기엘론스키대학교는 규모가 작다.
우리나라 단과대학보다 작았다.
야기엘론스키대학교는 카지미에쉬 2세가 설립한 대학이다.
대학교는 폴란드의 고등 교육기관 중에서 가장 역사가 깊다.
그리고 중앙 유럽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대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