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적산가옥 [敵産家屋]
적산(敵産)은 본래 ‘자기 나라의 영토나 점령지 안에 있는 적국의 재산 또는 적국인의 재산’을 뜻하나, 우리나라에서는 해방 후 일본인들이 물러간 뒤 남겨놓고 간 집이나 건물을 지칭한다. 국내의 적산가옥은 해방 후 일반인에게 대부분 불하(拂下)되었다.
2.불하
일제하 주요관료기구나 산업경제구조의 상층부를 독식한 일본인이 남기고간 재산을 어떻게 관리하면서 불하하느냐?의 문제는 그 당시에는 개인 부의 판도가 달라질 수 있는 문제였다.
적산이 기회주의자나 모리배에게는 “주인없는 떡”으로 보였으며 이를 취하기 위해 온갖 획책을 다하였다.김송의 소설 <무기없는 민족>에서 적산과정이 묘사되어 있다.
해외에서 돌아온 전재민이나 독립유공자에게 당연히 돌아가야 할 적산가옥이 기민한 모리배의 수중으로 흘러들어 투기의 대상이 되거나 적산을 무분별하게 매입하는 친일파의 세태를 묘사한 엄흥섭의 <집 없는 사람들>과 적산에 대한 탐욕과 좌절을 그린 김영수의 <황혼>을 통해 적산불하의 왜곡상을 볼수 있다.
미군정 하에서는 산업시설을 제외한 일본인의 사유재산이 매매행위를 통하여 양도되고 그것이 법적으로 인정되는 맹점이 있었다.
3.역사 문화적 가치의 재인식- 철저한 검증과 조사
구룡포 적산가옥을 관광문화 자원으로 특화 한다는 것은 경제적 논리만으로 접근하는것은 아닌가? 민족적,문화적,지역적 특수성을 반영하는 특화된 관광자원은 없는가?과메기도 있고 해수욕장도 있고 대보 구만리 청보리밭도 있고 구룡의 설화도 있는데...특화할 수는 없는가?
4.적산가옥은 일제의 잔재인가?
전문가들은 적산가옥을 일본식 주택으로만 볼 수 없다고 말한다. 이를테면 지붕 형식과 창문 등은 일본식이지만, 온돌과 두꺼운 벽을 사용한 것은 한국식이며, 벽난로·입식 구조는 서양식이라는 것이다. 더욱이 이 적산가옥엔 일본인들이 산 기간보다 해방 뒤 한국인들이 산 기간이 더 길다는 것이다. 김정동 교수는 “일본인들이 남긴 건물이어서 막연한 반감을 가질 수도 있지만, 실제로는 근대 시기 한국에 도입되고 적응한 주택의 한 형태로 봐야 한다”고 말한다.
5.적산가옥을 보존·활용하려는 시도
문화재청이 2005년 가치가 크다고 판단한 용산구 적산가옥 2채를 등록문화재로 올리려고 했지만 소유자의 반대로 실패했다. 김수정 서울시 문화재과 조사연구팀장은 “잘 지어진 적산가옥들을 등록문화재로 올리면 정부의 지원도 받고 적절히 활용할 수도 있다”면서도 “현재는 소유자들이 개발이익을 우선시하기 때문에 보존·활용하는 방안은 거의 검토되지 않고 있다”고 한다.
6.군산·포항선 관광자원으로 활용
적산가옥은 군산, 포항, 목포, 부산, 인천 등 식민지 수탈의 근거지였던 항구도시에 많이 남아 있다. 일부 지방정부는 일제 때 적산가옥과 근대건축물들을 역사 교육과 관광 자원으로 활용하고 있다.
전북 군산시는 올해 일제강점 100년을 맞아 월명동·영화동을 ‘근대역사 경관’으로 지정하고 이곳의 적산가옥들을 관광자원으로 개발하기로 했다. 군산 내항은 일제 강점기에 호남평야에서 생산된 쌀을 일본으로 가져가기 위한 기지로 이용됐다. 월명동·영화동에는 이때 지어진 적산가옥 100여채가 아직 남아 있는데, 군산시는 이 일대에 근대역사 탐방로(3㎞)를 만들 계획이다. 또 등록문화재인 조선은행 군산지점과 장미동 옛 나가사키18은행 군산지점, 개정면 옛 시마타니 농장 귀중품 창고 등은 각종 공연장과 미술관 등 ‘예술창작 벨트’로 조성된다.
포항 구룡포에도 적산가옥 40여채가 남아 있다. 구룡포는 1910년대까지는 한적한 어항이었지만 그 뒤 현대식 방파제가 생기면서 경북 최대의 어업기지가 됐다. 대형 어선을 이끈 일본인 선주·선원들이 몰려들었고 이들을 상대로 한 상점과 유곽(성매매 지역)이 들어섰다. 1933년에는 구룡포에 270여가구 1100여명의 일본인이 살았다고 <영일군사>는 기록하고 있다. 현재 구룡포 읍내 장안마을에는 좁은 골목 좌우로 일본식 2층 목조가옥들이 즐비하다. 포항시는 이곳을 보존·개발해 일본인과 내국인 관광객을 유치하는 사업을 추진중이다.
부산과 목포에도 여전히 적산가옥들이 많이 남아 있다. 부산의 경우 영화 <친구>를 찍었던 남포동 건어물 도매시장의 건물 대부분이 적산가옥으로 이뤄져 있다. 목포도 호남평야의 쌀을 실어 나르던 항구답게 중앙동과 만호동 등지에 적산가옥이 남아 있다.
황평우 문화연대 문화유산위원장은 “적산가옥들을 역사 교육과 관광 자원으로 활용할 수 있는 정책이 계속 나와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