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평구 연신내와 연서의 유래
-신하가 늦게 도착한 개천-
은평구의 연신내(연신천延臣川) 또는 연서延曙의 유래를 알기 위해서는 우선 <인조별서유기비仁祖別墅遺基碑>에 대한 설명을 해야 할 것 같다.
<인조별서유기비>는 서울시 은평구 역촌동에 위치한 조선 시대 사적비로 1972년 8월 30일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14호로 지정되었다. 이는 인조가 즉위하기 전에 머물었던 별서別墅(별장)가 있던 곳임을 나타낸 비석으로 1695년(숙종 21)에 세운 것이다.
비의 귀부는 8각 기단과 12각 기단의 이중 기단 위에 놓여 있으며, 비신 위에 지붕을 얹은 옥개석이 있다. 비를 보호하기 위해 비각이 세워졌으며 비각의 면적은 약 6평으로 정면 3칸, 측면 3칸에 공포栱包형식을 갖춘 팔작집으로 되어 있다. 비각은 사면을 축대로 쌓아 올린 위에 위치해 있으며, 중앙에 올라가는 계단이 있다.
본래 이곳에는 선조의 아들이며 인조의 생부인 정원군定遠君의 별서가 있었다고 하며, 뒤에 인조가 되는 능양군綾陽君이 머물다가 반정에 성공하여 왕위에 오른 것으로서 이곳은 이조반정의 중심 무대가 되었던 셈이다.
선조에 이어 즉위한 광해군은 임진왜란으로 인한 피해를 복구하는 데 힘쓰는 한편, 중국에서 명나라와 여진족이 세운 후금의 대결이 시작되자 국익을 최우선으로 하는 실리 외교를 전개하였다
은평구 응암동 연서역 터
그러나 광해군은 정비 소생이 아니었기 때문에 혈통상으로 이복동생인 영창永昌대군에 비해 불리한 위치에 있었고, 명나라와 후금에 대한 중립 외교는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가 조선에 은혜를 베풀어으므로 보답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성리학자들의 명분론에 위배되는 요소가 있었다. 게다가 광해군을 지원하여 왕위에 오르게 하고 광해군이 즉위하자 정권을 장악한 북인北人들은 학문적인 정통성에 있어서 퇴계退溪이황李滉의 문인들로 이루어진 남인南人이나 율곡栗谷0101李珥의 문인들로 구성된 서인西人에 비해 취약점을 가지고 있었다.
광해군은 즉위하자마자 자신과 왕위를 다투었던 친형 임해군臨海君을 불궤不軌를 꾀하였다는 죄목으로 진도로 유배보냈다가 다시 교동으로 옮기고 정인홍鄭仁弘, 이이첨李爾瞻등 북인 관료들의 주장에 따라 처형하였다.
1611년(광해군 3)에는 정인홍의 주장에 따라 남인들의 추앙을 받던 이언적李彦迪과 이황을 문묘 제사에서 삭제하고 이를 반대하는 성균관 유생들을 축출해 버렸다. 이를 계기로 남인뿐 아니라 서인까지도 광해군과 북인 정권에 등을 돌리게 되었다. 이에 자극을 받은 광해군은 왕위에 대한 집착을 더욱 강하게 보이기 시작하였고 결국 이복동생인 영창 대군을 왕으로 옹립할 것을 두려워하여 살해하고 만다. 또 정원군의 아들로 능양군의 친동생인 능창군綾昌君을 교동도에 금고했다가 역시 살해하였다. 광해군은 영창 대군의 생모인 인목仁穆대비에 대해서도 압박을 가하여 대비의 존호를 폐하고 서궁西宮이라 부르게 하였으며, 대비가 거처하던 경운궁慶運宮(덕수궁)에 사람을 보내 대비를 시해하려고까지 하였다.
경기도 남양주시에 있는 임해군 묘(좌)와 경기도 포천시에 있는 능창군 묘(우)
이러한 광해군의 '폐 모살제廢母殺弟'는 대부분의 성리학자들에게 패륜으로 인식되었고, 이것은 광해군과 북인에 눌려지내던 서인들에게 반정의 구실이 되었다. 마침내 1623년 3월 13일 밤 평산 부사로 있던 이귀李貴가 중심이 되어 효성 령曉星嶺별장 신경진과 유생 심기원沈器遠, 김자점金自點, 최명길崔鳴吉 등이 당시 인망을 얻고 있던 기류를 대장으로 삼아 6백~7백 명의 병력으로 홍제원弘濟院에 집결하였다.
한편, 능양군은 광해군이 인목 대비를 폐하고 영창 대군을 살해하는 등 정치가 극도로 혼란해지자 이곳 별서에 머물며 겉으로는 허송세월을 하는 척 하면서 몸을 보전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이귀 등의 거병이 있자 친병親兵을 거느리고 연서역으로 가서 장단 부사 이서의 병사 7백여 명을 맞이하여 도합 1천4백여 명의 반정군을 모으게 되었다. 이 때 이서가 약속한 시간에 홍제원에 도착하지 않았으므로 능양군이 몸소 연서역까지 나와 이서를 기다렸다. 때문에 뒷날 이 곳을 이서가 지각한 곳이라는 뜻에서 연서라고 하였다거나 신하를 늦게 만난 개천이란 뜻에서 연신내라고 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해 온다.
은평구 역촌동에 있는 <인조별서유기비>
1천4백 명의 반정군은 먼저 창의문彰義門을 돌파하고 창덕궁으로 향하였다. 마침 연회가 한창이던 광해군은 반정군이 대궐에 들어간 뒤에야 간신히 피신하여 의관醫官안국신安國臣의 집에 숨었지만 곧 붙잡혔다. 그리고 능양군이 옥새를 거두어 경운궁에 유폐 중이던 대비 김씨에게 바치 니, 대비는 광해군을 폐하고 능양군을 즉위시켰다. 이가 바로 인조이다.
<인조별서유기비>는 이와 같은 역사적 사실을 기록한 것으로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인조 대왕이 아직 왕위에 오르기 전 머무르던 별장은 한성 10리 안에 있는 가까운 곳이다. 광해군의 혼란이 이미 극에 달하여 국가의 위태로움이 목전에 있었다. 우리 인조 대왕은 하늘과 백성과 함께 응하여 나라의 혼란을 진정시키고, 정도正道로 돌리고자 하셨다. 나라를 중흥시킨 모든 선조들의 덕과 하늘의 인도함을 받아 계해癸亥년 3월 11일, 즉 옥새를 바꿔 받기 전 날 두세 사람의 심복 신하들과 함께 이 정자에 머물러 쉬었다.>
한편 당시 반정군들은 현 종로구 청운동의 창의문 밖 정자에서 광해군 폐위를 결의한 다음 세검정 개울가에서 칼을 씻었다. 이곳에서 칼을 씻고 칼집에 넣은 곳이라고 해 정자의 이름이 세검정洗劍亭이 되었으며 또한 인조반정군들은 칼날을 세워 궁으로 진입하여 피를 흘리지 않고 혁명을 성사시켰다.
창의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