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발의 99만보. 1
-99만보를 걷는다
마음이 따뜻해질 때까지
인생이 훈훈해질 때까지
황망히 99만보를 걷는다
99만보를 걷는 건
어두운 골목길에 등 밝히는 일
그대의 행복에 미소 짓는 일
떨어질지도 모르는 어느 나락에서
간절히 손을 모으고 기도하는 일이다
그리하여
더 이상 두려움의 바다에 빠져
허우적거리지 않기를
있을지도 모르는 것들에 휘둘려
겁먹지 않기를
어떤 미혹에도 선을 넘지 않고
의연하게 걸어가기를
악마와 마주친 영혼은
돌아보지도 않기를
함께 있어 좋은 가지 풀잎을 엮어
가슴깊이 외로운 꽃을 피우고
맨드라미 씨알 작은 꽃잎에 매달린
새벽 해맑은 이슬이 되어
내 마음이 따뜻해질 때까지
내 인생이 훈훈해질 때까지
힘써 99만보를 걷는다
인생은 둥글어졌는가?
사는 것이 모서리를 지우는 일이라고
누군가 저쪽 탁자에 턱을 고이고 있다
그래, 온통 모서리 투성이로 태어나
세찬 강줄기의 상류부터 시작해
옹벽에 부딪치기를 수백 수천 번
모서리가 없어져 자갈이 되는 것
그리고 끝내 모래가 되고
먼지가 되어 사라지듯이
지렁이의 몸속을 지나
억겁을 살아야 하는 것
뒤돌아보니
사는 것은 둥글어지는 일
둥글지 못한 나를 버리는 일
내 인생은 둥글어졌는가?
어디 모가 났는지
혹, 모서리가 남아 있는지
아직도 세차게 남한강 바닥을
더 야무지게 굴러야 한다
하얀 나무
어디서 마른 나물 냄새가 난다
죽은 나무에게서 나는 냄새다
지상에서 가지 못한 여행
죽어서 가기 위해 얼굴에
금빛을 칠하는 하얀 나무
아주 오랫동안 멀리 다니려고
빼곡하게 여행 지도를 그려 넣는다
지상에서 달세 물어 하루하루 금빛을 칠하더니
이제는 얼굴에 모스크 사원처럼 황금을 칠한다
걱정 마르지 않는 아등바등 펴고 살았으니
마르고 닳지 않게 성찬을 그려 넣는다
신의 거룩한 세계까지 무사히 안내해 달라고
이집트의 파라오가 되어
사자의 커다란 두 눈도 그려 넣는다
혹시 그 사자가 오리고기를 좋아하실까
훈제 오리를 통째로 얹는다
일생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가는 길목에 서면
다시 떠오르는 태양을 위해
빛의 존재와 대면할
지고한 대화목록을 짜고
만개의 바람이 부는 언덕까지
천개의 주문을 담아 봉인한다
잠시 후, 내게서 마른 나물 냄새가 난다
죽은 나무에게서 나는 냄새다
나팔꽃에 깃든 사랑
짙은 연무 속에
거센 바람으로 기억되기
방석에 앉지 않고 서성거리기
다시 안개 속에 꼭꼭 박혀서
등보이지 않기
곧게 펴지 않고 구부린 등이
뭉뚱그려져 우물쭈물 사라지기
바람을 안고 가는 이마엔
햇살 들지 않기
보라색 가지 꽃을
잠재워 두지 못한 열두시에
힘없이 피어 오른 안개가
머물다 간 정오 같은
너는 무슨 힘으로 피어올라
바람을 안고 가는 가
우리의 사랑
저녁이면 나팔꽃처럼
넝쿨손에 기대인
풀대같이 흔들리는 사랑
바람처럼 여린 고백이 사라진다는
한순간 아침의 서늘한 옷자락
바람이 흘러간 자국은
들판에 지천으로 쏟아지고
연보라 스펙트럼
하늘 너울이 된다
옹고집 계보학
아직도 붓을 들어 쓰고 있다는
팔순 아버지의 뿌리 깊은 족보 대하록
책상 위에 펼쳐진 흐린 정신을 쓸면서
날마다 쓰고 지우는 글씨들 난삽하네
옹고집 훈장님 아들 가방꼬리가 짧아
노상에서 노상 삽질을 했지
뼈마디 굵은 손가락으로 먹물을 찍어
동몽선습 천자문을 적었지
바람결에 소학이 80고개 언덕까지 따라와
한지(韓紙)에 펼쳐보는 청정한 소리
죽기까지 한 삽의 상투를 틀어 올려
한 치도 굽히지 않던 아버님 소리가
한 올의 머리카락도 조상으로 빗어 올리는
옹고집 머릿결이 손수 책을 매고
외우는 경전, 우주에 낭낭하다
이간질 학문은 가르칠 수 없다고
문경세재 넘어 박달재 오지 산골에
수구골통 조상 할아버지 오롯이 상투를 세워
망건 탕건 정자관을 모두 쓰고
무단에 휩쓸리는 대대손손
아들딸은 손수 가르쳐 가방끈이 없네
사장의자에 앉아도 현장잡부가 최고 이력이네
한 주먹밖에 안 되는 상투를 무덤까지 가져간 쇠고집
묫등에 성성한 풀도 상투 틀고 앉아 저마다 옹고집이다
아직도 한 올의 머리카락까지 조상의 것이라고
한 오라기도 내놓지 않겠다는 도포자락
단아한 학이 하늘 높이 날고 있다
늦었습니다. 선처부탁해요~
첫댓글 감사합니다. 접수했습니다.
이력이 빠졌네요.^^
김신영/충북 충주 산척 출생
중앙대 대학원 졸업. 문학박사.
홍익대 등 대학 출강
1994년 《동서문학》등단
저서 시집 1996년『화려한 망사버섯의 정원』,
2017년『맨발의 99만보』외
대학교재 집필, 평론집 등 다수
기독시인학교 교장.
계간 힐링문화 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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