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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자 - 김동원 시인)
1. 시(詩)와 시조(時調)의 정확한 차이점은
“고려 말 조선 초의 시조작가들을 살펴보면 거의가 유학자요, 그 중에서도 성리학과 관련된 인물이다. 다시 말해서 시조 발생기의 시조 담당 계층은 고려 말 신흥사대부요 성리학자들이라는 이야기다. 이런 현상은 시조와 성리학과는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 있다는 것을 증명해 주는 것이다. 그래서 성리학이 우리나라에 들어오기 이전의 작품들은 후세인의 위작이라 볼 수밖에 없고, 성리학이 들어온 이후의 시기에 지어진 작품을 진품이라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시조는 어디까지나 고려 말 신흥사대부의 이념을 담기 위하여 형성된 문학이고, 그 신흥사대부의 이념이란 다름 아닌 성리학 즉 주자학을 의미한다. 그러면 주자학이란 어떠한 학문인가? 중국 송대의 학문으로 주자가 완성했으므로 주자학이라 한다. 주자의 학설은 주돈이‧ 장횡거‧ 정명도‧ 정이천 등의 학설을 계승하여 대성한 것이다. 그는 만물의 근원을 理, 음양‧ 오행을 氣라 하여, 理는 만물에 性을 주며, 氣는 만물에 形을 준다고 하였다. 사람의 性에 있어서는 理는 본연의 性으로 虛靈不昧하여 衆理를 갖추어 만사에 응하는 것인데, 기질의 성에 있어서는 선악의 구별이 있고, 완전한 인격을 갖추려면 居敬과 窮理가 필요하게 된다. 敬에 居한다고 하는 것은 기질의 性에서 생하는 人慾을 끊고 외부의 유혹을 물리쳐 마음을 항상 조용히 하는 것이다. 理를 구명한다는 것은 만물의 이치를 구명하는 것인데, 그 理는 內在해 있기 때문에 객관적 사물에 대하여 그 理를 구명해야 한다.
주자학은 이처럼 우주만물의 이치를 궁리하는 학문인데, 그런 의미에서 이것을 달리 성리학 또는 理學이라고 불렀다. 또 정주학, 송학, 도학이라고도 불렀다. 이러한 주자학을 우리나라에서 처음 받아들인 것은 고려 때의 안향이라고 하니, 시조문학의 형성은 바로 이 성리학의 도입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은 학계의 통설처럼 되었다.” (원용우, 전 교원대학교수)
이병기 박사의 조사에 따르면 “시조(時調)의 명칭이 역사 문헌에 나타나는 것은 영조 시대 사람인 신광수(1712~1775)의「石北潗」관서악부 15의 ”일반으로 시조의 장․단을 배(排)한 것은 이세춘으로 비롯된다(一斑始祖排長短 來自長安李世春)”(『고시조해설』, 한춘섭)라는 기록이라고 합니다. 물론 시조라는 이름으로 부르기 전에는, 단가(短歌), 시여(詩餘), 신번(新飜), 장단가(長短歌), 신조(新調)로 불렸습니다. 이런 명칭은 시조시와 시조창으로 구분되어 한동안 사용됩니다. 훗날 1908년『소년』창간호에 실린 최남선의「해에게서 소년에게」란 신체시 발표이후, 시조(時調)는 현대시조(現代時調)로 계승되며, 신체시는 자유시(自由詩)로 변용 수용됩니다.
■ 의문점과 질문 → 다 아시다시피『시경 詩經』(BC 12세기 ~ BC 6세기 초)은 공자(孔子, BC 551 ~ BC 479)가 제자들을 위해 교육용으로 활용한 교재입니다. 시경은 춘추 시대의 민요를 중심으로 하여 모은, 중국에서 가장 오래 된 시집입니다. 황허강[黃河] 중류 주위안[中原] 지방의 시로서, 시대적으로는 주초(周初)부터 춘추(春秋) 초기까지의 것 305편을 수록하고 있습니다. 본디 3,000여 편이었던 것을 공자가 311편으로 간추려 정리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오늘날 전하는 것은 305편입니다. 제가『시경 詩經』을 언급한 것은 시(詩 ․ 시시, 글시)라는 한자가 기원전 천 년 전부터 이미 널리 사용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연유로 고려에 와서 ‘때시 時’을 뜻하는 시절가조(時節歌調)로 그 명칭의 의미가 변했는지 궁금해서입니다. 시조(詩調)라고 해도 될 텐데, 굳이 시조(時調)라고 명명한 다른 이유가 있습니까. 시(詩)에 담긴 내용과 시조(時調)에 담긴 내용의 차이점을 듣고 싶습니다.
(민병도, 한국문인협회 시조분과회장)
2. 왜 시조인가
“그렇다면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형식의 자유시를 두고도 구시대적 유물로 평가하는 시조를 쓰는 까닭은 무엇인가. 지금은 우리민족이 지켜온 오랜 역사적 유물이라는 당위론을 대신할 분명한 현실적 명분이 필요하다. 아무리 훌륭한 유산이라 할지라도 현실적 미의식이 결여된 외형의 보전을 창작이라는 이름으로 합리화시킬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오늘의 시조가 현대인의 사상과 감정을 대변하여 사색과 사유를 통한 보편적 가치를 창출해내는 궁극적 테제를 지녔는가. 이러한 질문에 대한 대답은 경우와 환경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대체로 세 가지 정도로 구분하여 생각해 볼 수 있겠다.
우선 ‘시조가 지닌 창조적 정형성’을 들 수 있다. 시조는 유럽의 소네트나 일본의 하이꾸, 중국의 5언이나 7언 등 다른 나라의 정형시가 지닌 절대자수에서 벗어난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보편적인 시조의 형식질서라고 하는 3장 6구 12음보를 포괄적 기준율로 인정하고 있으나 세세한 자수에 있어서는 지금까지도 통일된 결론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이은상/ 초장 3․4․4․4, 중장 3․4․4․4, 종장 3․4․4․4 -<시조단형추이芻議, 1924>∣ 이병기/ 초장 6~9․6~9, 중장 5~8․6~9, 종장 3․5~8․4~5․3~4 -<율격과 시조, 1928년∣ 조윤제/ 초장 3․4․4(3)․4, 중장 3․4․4(3)․4, 종장 3․5․4․3 -<시조자수고, 1930>)
어쩌면 그것은 시조만이 지닌 ‘정형 속의 자유정신’ 혹은 ‘창조적 정형성’으로 이해함이 타당할 것이다. 이 같은 사례는 이질적인 문화를 수용하면서 창조적으로 계승해 온 우리 고대문화의 여러 차별성에서 익히 보아온 바이지만 민족적 수월성과도 궤를 같이 한다고 보아진다. 이는 세계문학사가 평가해야할 가치이자 유산에 다름 아니다.” (민병도, 한국문인협회 시조분과회장)
현대시 일 백년을 거치면서, 운문 형태의 자유시는 폭발적으로 진화했습니다. 김소월의 「엄마야 누나야」와 서정주의「冬天」은 그 좋은 예입니다. 이 두 편의 시는 시조의 틀을 변형 수용한 수작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시조의 정형(定型) 인 3장(章) 4음보격(音步格) 45자(字) 내외로 된 비연시(非聯詩)로서의 3행시의 흔적이 남아있는 작품 군들입니다. 즉, 3행 시조가 초장(初章), 중장(中章), 종장(終章), 특히 종장 첫 구는 예외 없이 3음절로 통일되어 기본율격을 3 ․ 4 ․ 3 ․ 4 조(調) 또는 3 ․ 4 ․ 4 ․ 4 조(調)를 따름에 반해, 아래에 소개한 4행 자유시인 김소월의「엄마야 누나야」와 7 ․ 5조의 변형인 5행시인 서정주의「동천」은 비교적 자구의 내용은 자유롭지만, 그 형식만은 여전히 외형률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뜰에는 반짝이는 금모래 빛,
뒷문 밖에는 갈잎의 노래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 김소월,「엄마야 누나야」전문
「엄마야 누나야」는 1925년 간행된 시집『진달래꽃』(매문사) 속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사람이 걷는 것을 ‘발걸음’이라 하듯, 시의 발걸음은 ‘음보(音步)입니다. ‘엄마야 ∨ 누나야 ∨ 강변 살자.’는 세 마디로 끊어 읽는데, 이것을 3음보율이라고 하며 시조의 흔적이 여전히 나타납니다.「엄마야 누나야」는 각 시행 마다 음보의 마디가 규칙적으로 반복되며,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처럼, 시의 처음과 끝을 동일하게 표현한 시법인 수미 상관으로 이뤄져 있습니다. 수미상관의 장점은 운율을 형성 할 뿐 아니라, 반복을 통해 그 의미를 강조하며, 긴 여운을 남기는 효과도 줍니다. 물론 시구도 유성음 ‘ㄹ, ㄴ, ㅁ' 등의 연음으로 이루어져 발음이 부드럽지만, “뜰에는 반짝이는 금모래 빛, / 뒷문 밖에는 갈잎의 노래,” 역시 대구(對句)의 운율로 짜였습니다. 시와 노래의 공통점이 모두 언어를 통해 가락을 느낀다면,「엄마야 누나야」야말로 완벽에 가까운 노랫말입니다.
내 마음 속 우리 님의 고은 눈섭을
즈문밤의 꿈으로 맑게 씻어서
하늘에다 옴기어 심어놨더니
동지 섣달 나르는 매서운 새가
그걸 알고 시늉하며 비끼어 가네
― 서정주,「冬天」전문
이 시는 미당의 53세 때 제5시집『동천(冬天)』(1968년)의 표제시가 된 작품이다. 전연으로 된 5행 26어절의 단시(短詩)입니다.「동천」은 총 62자(字)로 된 자유시지만 간결하고 고도로 축약된, 겨울 하늘에 펼쳐 논 놀라운 여백미가 압권입니다. 한시 형태의 정제된 아름다움이 있는가 하면, 3장 4음보 45자로 구성된 우리 정형시조의 틀을 파격한 외적 율조와 7․5조 민요 가락을 현대시에 버무려 오롯이 살렸습니다. 항용 우리가「동천」에서 가장 놀라워하는 신비경은 이 시 속엔 분명 ‘달’은 없는데, 오랫동안 여러 수십 번 곱씹어 읊조리면 묘하게도 ‘초승달’ 이미지가 흠뻑 되비친다는 점입니다. 이런 시법이 바로 미당의 신묘한 재주입니다. 보는 형상을 움직여 보이지 않는 세계를 마음대로 주물리는 신비로운 주술적 언어 감각은 가히 태생적입니다. 시어 “고운 눈썹”이란 보조관념을 통해 원관념인 ‘초승달’을 겨울 하늘 화폭 속 한 마리 새와 함께 천년 꿈의 붓으로 멋들어지게 한 폭 한국화로 그려냈습니다.
■ 의문점과 질문 → 시조가 근대로 넘어오면서, 형식과 내용면에서 현대를 담기엔 임계점에 도달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일부 현대 시조의 파격을 보면, 상당부분 자유시에 기대거나 흡수된 점 또한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위에 인용된 김소월의「엄마야 누나야」, 서정주의「冬天」은 시조의 형식을 빌려와 새롭게 진화된 일련의 작품군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과연 시조가 미래에도 자유시와 경쟁해 살아남을 수 있는가, 있다면 무엇을 근거로 예측할 수 있습니까.
(이강엽, 대구교육대학교 국어과 교수)
3. 현대 시조는 모성과 부성을 어떻게 수용해야 하는 가
장애 극복을 주도하는 인물이 누구인가에 따라 크게 둘로 나뉜다. <眞定>과 <大城>은 어니와 자식이 합심하여 문제해결에 나서는 데 반해, <孫順>과 <貧女>는 자식만이 나설 뿐 어머니는 방관하거나 문제의 내막을 전혀 모른다. 또, 전자는 <眞定>은 어머니가 먼저 나서고(#2) 자식이 뒤따르는(#3) 순서인 데 반해서 <大城>은 자식이 먼저 나서고(#4) 어머니가 따르는(#5) 순서이다. 만일 孝 또한 여느 윤리와 마찬가지로 궁극적으로 보다 나은 삶을 위한 것이라면 부모와 자식에게 共同善으로 인식될 만한 相生이 요구되는 바, 이러한 차이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왕이면 부모와 자식 모두 문제해결을 위해 나서고, 적어도 문제해결의 실마리는 성인인 부모가 제공해줄 수 있다면 효도가 강요되는 희생으로 비춰질 염려는 적을 것이다. 또, 문제해결을 위해 자식만이 나서는 두 작품의 경우도, 어머니가 자식의 어려운 처지를 헤아려 안쓰러워하기라도(#6, #7) 하는 <貧女>와, 초지일관 어떠한 역할도 하지 않은 채 자식의 행위를 아예 의식도 하지 못하는 <孫順>은 그 정도가 다르다. (이강엽, 대구교육대학교 국어과 교수)
이강엽 교수님이 소개한 위글과 반대로, 아래에 예를 든 문인수의「쉬」와 이규리의「젖는다」두 편의 시는, 자식과 부모와의 바람직한 관계를 시사하는 동시에, 늙은 어머니의 엄혹한 실존을 다룬 현실성을 바탕한 자유시입니다. 간간이 사모곡의 형식을 빌어 발표되는 '부모'에 대한 시는 많이 있지만, 특히 이규리와 문인수의 작품은 효에 대한 극명한 음양구조의 차이점이 눈길을 끌어 여기에 소개합니다.
그의 상가엘 다녀왔습니다.
환갑을 지난 그가 아흔이 넘은 그의 아버지를 안고 오줌을 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생(生)의 여러 요긴한 동작들이 노구를 떠났으므로, 하지만 정신은 아직 초롱 같았으므로 노인께서 참 난감해하실까봐 "아버지, 쉬, 쉬이, 어이쿠, 어이쿠, 시원허시것다아" 농하듯 어리광 부리듯 그렇게 오줌을 뉘었다고 합니다.
온몸, 온몸으로 사무쳐 들어가듯 아, 몸 갚아드리듯 그렇게 그가 아버지를 안고 있을 때 노인은 또 얼마나 더 작게, 더 가볍게 몸 움츠리려 애썼을가요. 툭, 툭, 끊기는 오줌발, 그러나 그 길고 긴 뜨신 끈. 아들은 자꾸 안타까이 따에 붙들어매려 했을 것이고, 아버지는 이제 힘겹게 마저 풀고 있었겠지요. 쉬 -
쉬! 우주가 참 조용하였겠습니다.
― 문인수,「쉬」전문
「쉬」는 시인 정진규와 그의 부친 사이에 있었던 일을 문인수 시인이 듣고 시로 붙들었다고 합니다. 환갑 지난 아들과 아흔의 아버지 사이가 참으로 따뜻합니다. 우리는 이 시에서 한 남성이 노쇠해 죽음 직전이 됐을 때 오줌발의 양상이 어떠한지를 실감나게 표현한 점을 특히 주목합니다. 남성의 양기는 돌출입니다. 마지막 한 방울까지 몸 밖으로 '오줌'을 짜내야 시원함을 느낍니다. "툭, 툭, 끊기는 오줌발, 그러나 그 길고 긴 뜨신 끈, 아들은 자꾸 안타까이 따에 붙들어매려 했을 것이고, 아버지는 이제 힘겹게 마저 풀고 있었겠지요. 쉬 - / 쉬! 우주가 참 조용하였겠습니다.” 이 시구에 들어있는 참 멋진 시어 “뜨신 끈”과 “쉬! 우주가 참 조용하였겠습니다.”는 지상과 우주를 잇는 시적 상상력이 압권입니다. 흙으로 돌아갈 낡은 몸을 “따에 붙들어 매려”하는 아들의 아비에 대한 애정과 어쩔 수 없이 자연으로 돌아가야 하는 인간 몸의 한계상황을 이 시는 잘 포착했습니다.
웃어도 찔금, 걸을 때도 찔끔, 긴장하면 주룩 샌다는 일흔 어머니 요즘 우울하시다 세상에는 비도 새고 날도 새고 비밀도 새지만, 새는 것은 분명 누군가를 뭔가를 젖게 하지만, 오줌이 새는 일은 치사하게 김새는 일이다
집 안의 틈 모두 막아내다가 생고무 같던 어머니의 막이 너덜해졌다 모로 누운 저 축축한 잠이 가파르고, 아무도 막아주지 못한 생애의 저음부, 수고는 꼭 따뜻하게 되돌아오는 것만은 아니다 어머니 숨어 기저귀 차다가 화들짝 놀란다 나, 저 물컹한 자리 닿지 않았음 좋겠다 짓무른 아랫도리처럼 눈가가 불그레한 어머니, 혼자 오래 젖는다
― 이규리,「젖는다」전문
한편, 축축하게 '젖은' 늙은 여자가 돌아 갈 마지막 '늪'은 어떤 모습일까요. 시「젖는다」는 그 물음에 아주 아프게 답합니다. '젖다'란 뜻은 '물이 배어들다·습하다·심정에 익숙해지다'의 의미를 지닙니다. '새다'는 '틈이나 구멍으로 조금씩 빠져 나가거나, 말, 빛, 비밀 같은 것이 몰래 알려지다'란 의미입니다. "웃어도 찔끔, 걸을 때도 찔끔, 긴장하면 주룩 샌다는 일흔 어머니 요즘 우울하시다" 앞서 문인수의「쉬」에서 보았지만 늙은 남자의 고민은 몸속 물이 말라 더 이상 나올 물이 없다는 것이 안타까움이라면, 반대로 이규리의「젖는다」속의 여성의 마지막 고민은 늘 물이 많아 새는 것입니다. 여성의 몸이 더 이상 오물리지 못하고 그 기능이 현저히 저하되어 언제나 주변부가 습한 것입니다. "집 안의 틈 모두 막아내다가 생고무 같던 어머니의 막이 너덜해졌다" 기능이 거이 상실된 여성성을 ‘막이 너덜해졌다’ 참으로 적확한 리얼리티입니다. "모로 누운 저 축축한 잠이 가파르고, 아무도 막아주지 못한 생애의 저음부, 수고는 꼭 따뜻하게 되돌아오는 것만은 아니다" "어머니 숨어 기저귀 차다가 화들짝 놀란다 나, 저 물컹한 자리 닿지 않았음 좋겠다 짓무른 아랫도리처럼 눈가가 불그레한 어머니, 혼자 오래 젖는다" 만 년을 여자의 몸속에서 다시 산다 해도 남자는 이 심경을 이해하지 못하겠지요. 참혹한 실존이, 오히려 고결한 추함으로 드러납니다.
■ 의문점과 질문 → 현대시는 모성과 부성의 관점을 운문과 산문시의 여러 형태로 발전시켜 왔습니다. 문인수의「쉬」와 이규리의「젖는다」는 효의 상생 문제와 노모의 생리적 고독을 아주 실감나게 그린 좋은 실례입니다. 이 우주 만물 가운데 부모의 피와 살로 이뤄지지 않은 생명이 있겠습니까. 현대 사회를 보면, 지옥도 같습니다. 돈 때문에 부모가 죽기 싫다는 자식과 함께 억지로 동반 자살하는가 하면, 재산이 탐나 부모 뒤통수를 망치로 쳐 죽이는 패륜도 서슴지 않습니다. 날로 ‘윗세대와 아랫세대’간의 불통 시대에 상생이라는 관점에서 ‘시조의 역할’이 있다면 한 말씀 주십시오.
(이솔희, 경북대학교 강사)
4. 현대 시조와 자유시가 나아가야할 올바른 이미지 사용법은
20세기 세계문학사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던 이미지즘은 오늘날까지도 우리 문
학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image’는 우리말로 번역하면 심상(心像) 혹은 영상(映像)이라는 뜻이므로, ‘IMAGISM’은 우리말로 사상주의(寫像主義)라고 번역한다. 따라서 사상주의를 신봉하는 시인 imagist들이 주장하는 시는 심상(心像)의 ‘명확성’을 중요한 골자로 한다.
그런데 이러한 이미지즘이 구미(歐美)에서 발생하여 우리나라에 들어온 서구 문예사조가 아니라 그 시발점은 동양의 한시였으며, 우리나라 초창기 기록문학이 한문학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곧 우리 문학에서 이미지즘의 뿌리가 시작되었다고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다. 이러한 해석은 지금까지 유지해 오던 문학에 있어 ‘서구 중심주의’내지는 ‘동양에 대한 서양의 우월성’을 바로잡을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된다. 또한 사고의 폭을 좀 더 확대해 보면 문학에서 그 우열을 가린다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생각에 도달하게 된다. 즉, 열등한 문학과 우등한 문학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문학이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학에서 우열을 따지는 경우는 우리나라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현대시조는 오랜 시간 동안 우리와 함께 하면서 우리 민족의 정서를 담당한 문학으로 우리의 정체성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그러한 까닭에 세계무대에서 우리 문학의 정체성을 드러내기에도 가장 용이한 장르이다. 그러나 현재, 현대시조는 자유시에 밀려 그 위치가 견고하지 못한 실정이다. 현대시조는 서구 이미지즘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에 대한 연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어 대부분의 연구자들이 현대시조와 서구 이미지즘과의 관계를 알지 못한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 문학사의 발전을 위해서도 바람직하지 못한 현상이다. (…) 20세기 시문학은 이미지즘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시문학 분야에 이미지즘 운동이 일어나면서 동ㆍ서양 예술분야에 획기적인 변화가 생겼다. 이미지즘은 1909년 흄에 의해 시작되었지만 그 후에 가담한 에즈라 파운드에 의해 꽃피우기 시작했다. (…) 1913년 파운드는 우연히 어니스트 페놀로사의 시작 노트를 접하게 되었고 페놀로사가 남긴 노트를 보고 한시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에즈라 파운드는 한시를 통해 그동안 식상했던 낭만주의를 청산하기 위해 이미지즘 운동을 하는 과정에서 페놀로사로부터 받은 시작 노트를 바탕으로 중국이라는 번역 시집을 발간하게 된다. (이솔희,「현대시조의 세계적 보편성 고찰」- 서구 이미지즘과 한시의 영향관계를 중심으로-. 경북대학교 강사)
그렇습니다. 이미지(심상心象)는 인간 욕망이 신체적 지각에 의해 마음속에서 재생된 것입니다. 문학적 이미지는 이런 몸각 ․ 기억 ․ 꿈 ․ 병 ․ 등이 과거 현재 미래의 상상력에 의해 언어로 구체화됩니다. 시에서 이미지는 표면상으로는 묘사로 함축해 표현하며, 이런 이미지를 언어화 하는 능력이 상상력입니다. 즉, 이미지는 언어로 그려진 한 폭의 아름다운 그림입니다. 러스킨은 “상상력의 암시 없이 시가 생산될 수 없다. 시는 독자에게 직설적으로 의미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시 읽는 독자에게 상상력을 자극시켜 현실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것까지 연상하고 공감하게 하는 예술”로 보았습니다. 이미지의 역사는 태초 인류의 출발과 그 궤를 같이 합니다. 초기 인류는 동굴벽화를 통해 그림과 기호로 그들의 삶을 표현했으며, 이것은 고대의 상형 문자를 거쳐 기록의 도구로 발전해 오늘 날 소리와 그림이미지가 복합된 영상 언어가 됩니다.
알고 보면, 이미지는 우주의 무의식이 시인을 매개로 의식의 영상을 통해 언어로 찍힌 것입니다. 그러나 현대시사에서 줄곧 이미지를 파고 든 김춘수는 후기에 “언어의 의미로부터의 언어의 해방”이라는 “소위 무의미시를 주창합니다. 실재로 그는 언어를 언어(의미)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해서 병치시킨 이미지 상호간의 연결고리를 끊어버립니다. 그러면, 이미지들 사이의 연결고리(논리관계)가 사라지면 언어는 의미의 전달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로서 하나의 대상이 된 다고 보았습니다. 그렇게 되면 낯설지만 또 하나의 새로운 세계가 이룩”(이진흥)된다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무의미시는 미완성의 실패로 끝났으며, 이미지의 파편들만으론 시가 될 수 없음을 반증한 셈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래시파의 젊은 시인들은 현대의 온갖 이미지의 조각을 더 미세하게 잘라, 조작의 기법으로 무의식적으로 마구 뿌려댑니다. 물론 언어가 모든 것과 소통할 이유야 없지만, “오늘날의 새로운 경향의 시는 상관관계가 멀게 느껴지는 이미지의 조합이나 산문적인 형식의 실험을 통해”(2012, 매일신문 심사평) 너무나 작위적으로 흐른 것이 문제입니다. 말의 상투적인 틀을 해체하고 인간의 감성을 새롭게 드러내는 것은 반길 일이나 시가 얼토당토아니한데 까지 간다면 그것이야말로 언어도단입니다.
이문재는 이런 이미지 과잉이 도로 시의 독자들을 멀어지게 한다고 했습니다. “이미지는 고급스럽고 세련될지 모라도, 이미지를 추구하는 시는 현실과 시차가 있다. 이미지는 독자들의 삶의 문제를 건드리지 못한다. 이미지 위주의 시는 현실의 바깥에서 더 먼 바깥을 바라본다. 이미지 위주의 시는 다 읽고 났을 때 독자로 하여금 “그래서?”라고 질문을 하게 만든다. (…) 한국 현대시의 천칭은 이미지 쪽으로 내려가 있다. 그것도 너무 오래, 너무 많이 내려가 있다. 시가 독자들의 구체적인 삶의 문제에 개입하려면 메시지가 있어야 한다. 이미지의 효과를 버리지 않으면서 거기에 메시지의 힘을 결합해야 한다. 이름 하여 ‘이메시지’(image+message =imassage)"를 주창합니다.
신문 투입구로 살그머니 들어오는 붉은 손톱이 희고도 차가운 손.
잡으면 기겁하겠지, 야쿠르트 아줌마 !
― 이종문,「손」전문
현대시는 ‘이미지와 묘사’의 전성시대입니다. “신문 투입구로 살그머니 들어오는 붉은 손톱이 희고도 차가운 손.”의 묘사는 “잡으며”란 촉각어를 만나 순식간에 놀람의 이미지인 “기겁”으로 폭발합니다. “붉은 손톱”의 시각적 이미지와 도시 노동여의 “차가운 손”의 대비는 여인의 본성과 고된 삶이 묘한 불협화음의 극점을 이룹니다. 일상이란 하나의 ‘풍경’을 통해 천 개의 상상력을 증폭시킨「손」은, 좋은 시야말로 체험이 바탕 된 ‘번쩍’하는 재기가 들었음을 잘 보여준 수작입니다.
틈만 나면 저는, 그 새벽 “야쿠르트 아줌마 !”가 만약, 신문 투입구에서「손」을 잡혔다면 그녀의 심장이 어땠을까, 그런 엉뚱한 상상의 재미에 푹 빠집니다. 반면 혹, 여자의 “희고도 차가운 손”목이 쑤∼욱 빠졌다면, 시인 이종문이 만났을 “기겁”은 또 어떠하였을까 하는, 그런 개살맞은 생각으로 마냥 폭소합니다. 시조집『봄날도 환한 봄날』(2005년, 만인사) 속에 든「손」은, 시조의 형식미와 율조의 감칠맛, 기존의 관념과 질서를 깨부순 파격입니다. 어떤 시조에서도 보지 못한 현실에 대한 놀라운 인식과 의표를 찌릅니다. 그의 말대로 “짧으면서도 긴 여운을 거느리고 있는 시, 가락이 펄, 펄 살아 있어서 술술 읽혀지고 외워지는 시, 시가 진지하다 못해 딱딱하게 굳어져가는 시대에 이왕이며 쉽게 이해되고 저절로 웃음이 나오기도 하는 시, 이게 정말 시야? 라고 생각되면서도 시가 아니라는 증거를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는 시”가 이종문의 시조집에는 가득 차 있습니다.
아삭, 창문을 여는 한 그루 사과나무 기척
사방四方이 없어 부푸는 둥근 것들은 동쪽부터 빨갛게 물들어간다
과수원 중천으로 핑그르르
누군가 붉은 전구를 둘러 끄고 있다
당분간은 철조망의 계절
어두워진 빨강, 눈 밖에 난 검은 여름이
여름 내내 흔들리다 간 곳에
흔들린 맛들이 떨어져 있다
집 한 채를 허무는 공사가 한창이고
유독 허공의 맛을 즐기는 것들의 입맛에는 어지러운 인이 박혀 있다
죽은 옹이는 사과의 말을 듣는 귀
지난 가을 찢어진 가지가 있고 그건 방향의 편애
북향에도 쓸모없는 편애가 한창이다
비스듬한 접목의 자리
망종 무렵이 기울어져 있어 씨 뿌리는 철
서로 모르는 계절이 어슬렁거리는 과수원
바람을 가득 가두워놓고 있는 철조망
사과는 지금 황경 75도
윗목이 따뜻해 졌는지 기울어진 사과나무를
이 밤, 철모르는 그믐달은
풋사과처럼 삼만 광년을 달릴지도 모른다
― 황은주,「삼만 광년을 풋사과의 속도로」
「삼만 광년을 풋사과의 속도로」의 1연 첫 행 “아삭”이란 이미지는 시작(詩作)에서 첫 행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상기시킨 재기발랄한 시구입니다. 처녀가 한 입 사과를 베어 물 때 나는 상큼한 소리를 통해, 느닷없이 시 행간의 여백을 신맛의 미각적 상상과 청각적 소리 이미지로 가득 채웠습니다. 아침을 알리는 “사과나무 기척”이란 기찬 의인화도 집어야하지만, 커가는 사과 둘레를 비유한 “사방四方이 없어 부푸는 둥근 것들”의 기교는, 허공과 사과의 접촉을 통해 불교의 색즉시공 공즉시색의 사상까지 시적 의미의 해석을 요구합니다. 섬세한 관찰이 이미지로 도드라진 “동쪽부터 빨갛게 물들어” 가는 아침 사과의 시각적 심상은, 인상파 화가들의 색체에 대한 놀라운 감각까지 연상시킵니다. “과수원 중천으로 핑그르르 / 누군가 붉은 전구를 둘러 끄고”있다는 이 번뜩이는 시적 표현은, 낮과 저녁 사이의 시간이동에 대한 기존 화법을 완전히 뒤집은 참신성입니다.
2연의 사물에 대한 치밀한 묘사는 신인의 키를 훌쩍 뛰어넘습니다. 썩은 사과의 움푹한 한 쪽을 “어두워진 빨강,”으로 관찰한 시적 화자의 매서운 눈매 역시 화가의 그것입니다. 그리고 더 놀라움은, 태풍이 쓸고 간 과수원 한 쪽에 떨어진 사과를 “흔들린 맛들이 떨어져 있다”고 묘사한 이 부분과 사과의 단맛에 취해 “어지러운 인”을 박으며, 마구 과일을 파먹고 있는 벌레들을 “집 한 채 허무는 공사”로 비유한 것은, 와우 ! 미각적 이미지의 절경입니다. “죽은 옹이”를 “사과의 말을 듣는 귀”로 은유한 3연의 시 읽는 맛도 일품이지만, 지난 가을 남쪽 햇살에 씨알을 너무 많이 달아 찢어진 사과 가지들의 무지를 “방향의 편애”로 본 시선 또한 독창적입니다. 4연의 빠른 시상의 전개를 위해 “서로 모르는 계절이 어슬렁 거리는 과수원 / 바람”의 행 걸침과 늦여름과 가을 사이를 24절기의 아홉 번째인 “망종”과 그때의 태양의 기울기인 “황경 75도”로 처리한 계절의 시각이동도 창작자는 눈 여겨 볼 대목입니다. 물론 은하 중심으로부터 약 3만 광년 떨어져 살고 있는 지구의 풋사과의 존재를 시 제목으로 설정한 시인의 통찰 역시 압권입니다.
■ 의문점과 질문 → 현대시작법 중 이미지의 중요성은 갈수록 커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 시조든 자유시든 이미지 과잉, 조작의 범람 또한 심각한 수준에 도달한 듯합니다. 시 속에 이미지가 갖는 공을 인정하더라도, 시는 감동과 공감이 우선되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현재진행형인 미래시파의 젊은 시인들은 온갖 추상이미지의 조각을 더 미세하게 잘라, 조작의 기법으로 무의식적으로 마구 뿌려댑니다. 물론 언어가 모든 것과 소통할 이유야 없지만, 산문적인 형식의 실험을 통해 너무나 작위적으로 흐른 것이 문제입니다. 말의 상투적인 틀을 해체하고 인간의 감성을 새롭게 드러내는 것은 반길 일이나 시가 얼토당토아니한데 까지 간다면 그것이야말로 언어도단이 아니겠습니까. 현대 젊은 시인들이 어떻게 이미지를 사용해야 하는지 올바른 방향이 있다면, 배우고 싶습니다.
(유성호, 한양대 교수)
5. 가람 시조의 격조(格調)는 현대 자유시 속에서
어떤 방법으로 수용되어야 하는가?
“격조는 작가 자신의 감정에서 흘러나오는 리듬에서 생겨나며 동시에 그 작품의 내용 의미와 조화되는 경지로 변화시키자는 주장을 가람은 수행한 것이다. 이러한 격조를 형상화하기 위하여 가람 시조는 치밀하고도 섬세한 묘사를 매우 중시했다. 이는 자연 사물의 감각적 실재를 충실하게 구현하면서 동시에 그 본질을 파악하려고 노력해온 결실이기도 하다. 특별히 자연 사물에 대한 섬세한 묘사를 바탕으로 하여 현실을 파악하는 감각을 그는 일관되게 보이면서, 그 기저에 어떤 본원적 가치에 대한 외경과 긍정을 담았다. 이러한 생각은 자연 전통에 접맥되게 그를 이끌었다. 원래 ‘전통’이란 모든 창작 주체들의 상상력의 원천이자 소재의 보고이며, 창작 방법이나 양식 선택을 일차적으로 규율하는 미학적 전제의 총체이기도 하다. 이때 전통은 연속성과 보편성을 속성으로 하는, “오랜 기간에 걸쳐 공유된 형태적, 문체론적, 이념적 속성을 대다수의 작품에 반영시킨 역사적 구상(historical scheme)”으로 정의될 수 있다. 또한 그것은 “오랜 과거가 현재에 물려준 신념, 관습, 방법 등. 오랜 역사를 통하여 형성된 한 집단의 문화를 그 집단에 속한 사람들과의 관련성 속에서 바라본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전통은 시간의 흐름 속에 형성된 자기 규정성의 핵심적 전제이자 인자(因子)인 셈이다. 이러한 전통의 함의를 시에 투사할 경우, 우리는 어렵지 않게 자연 형상의 전통과 만날 수 있다.” 유성호(한양대 교수)
■ 의문점과 질문 → 가람의 「난초 4」는 지금 읽어도 당시의 여타 시조와 다르게 섬세한 감각과 절제된 언어 미학이 1930년대 작품으로 보기 힘들 정도로 뛰어납니다. ‘난초’로 상징된 조선 선비의 외유내강이 한 눈에 잡힌 이 시는, 유 교수님의 표현 되로 “ ‘격조’라는 말이 그 중심에 모아”진 수작입니다. 하여, 이런 가람의 “자연 사물에 대한 섬세한 묘사”와 “본원적 가치에 대한 외경과 긍정”의 격조는, 현대 자유시 속에서 어떻게 수용되어야 할까요? 그리고 자유시도 격조 있는 작품의 형상화가 가능한지요. 혹시, 이런 격조 있는 작품이 있다면, 알고 싶습니다.
세미나 기조 연설을 하는 이정환 대구시조시인협회장
김동원, 이종문 시인
왼쪽 부터 (박진형시인, 유성호 한양대교수, 민병도, 김동원, 이정환 시인)
축사를 하는 문무학 대구예총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