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렛 대처의 一代記(일대기)를 다룬 영화 '철의 여인'이 개봉되어 상영중이다. 메릴 스트립이 대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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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포스터 | 役을 맡았다. 이 연기로 올해 오스카 주연여우상 후보로 지명되었다. 1980년대의 대처 관련 동영상을 보면 보수 정치가로서의 단호함과 여성으로서의 매력을 두루 갖추었다. 이 영화를 즐기려면 대처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李明博(이명박) 대통령이 광우병 亂動(난동)에 쩔쩔 매던 때 <월간조선(2008년 9월호)>에 썼던 대처 이야기를 再錄(재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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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릿 대처 前 영국 수상 (출처: 英 마가릿대처재단) |
盧泰愚(노태우) 대통령은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고 폴란드, 헝가리에 이어 체코에서도 공산당 정권이 민중봉기로 무너지고 있던 1989년 11월 유럽을 방문하면서 영국 총리 대처와 회담했다. 1989년 11월 28일 오후, 그리고 그날 저녁 총리관저에서 있었던 만찬에서 ‘鐵(철)의 여인’ 대처 총리는 노 대통령과 많은 대화를 나눴다. 대처는 그해 6월에 있었던 중국의 톈안먼(天安門) 사건에 대해서 분개하고 있었다. “덩샤오핑(鄧小平)은 문화혁명 때 고생을 많이 해서 절대로 그런 일이 재발되어서는 안 된다고 늘 말해왔고, 자오쯔양(趙紫陽)과는 홍콩 반환교섭으로 자주 만났는데, 교섭결과도 대체로 만족스럽고, 1997년 반환까지 잘될 줄 알았는데…. 덩샤오핑은 고생을 많이 한 사람이고, 자오쯔양도 퍽 합리적인 사람이었는데, 그런 사람들이 그런 무자비한 짓을 했다는 것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물론 외국 귀빈이 와 있어서 나라 체면도 있었다지만, 그 사람들은 최루탄도 없는지… 꼭 총을 쏘아 사람을 죽여야만 되는 것인지… 참으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노태우 대통령은 노사문제로 화제를 돌렸다. “우리는 지난 30년간 열심히 배우고, 일하고, 수출해서 많이 발전했습니다. 요즈음 민주화가 진행되면서 노사분규나 젊은층의 극단주의 등 어려움이 많습니다. 총리께서는 노사분규를 과감히 처리하여 산업평화를 이루는 데 성공하셨는데, 그 비결은 무엇입니까?” “노사관계의 비결은 간단합니다. 일반 노조원들은 순진하고 정직하고 부지런하게 일합니다. 문제는 노조 지도층인데, 그들이 모든 문제를 일으킵니다. 그래서 노조지도자(union boss)가 파업을 하려면 노조원 전체의 비밀투표에 의한 동의를 받아야 되도록 법을 고쳤습니다. 그랬더니 대부분의 근로자들이 가담치 않았고, 간혹 파업이 일어나기는 하지만, 피해가 있으면 그들에게 책임을 지우도록 되어 있습니다. 요는 노조 지도층의 독재적 권위를 분쇄해야 합니다.” “처칠이 아니라 대처를 읽어야” 지난 7월 하순 李明博(이명박) 대통령은 처칠의 리더십을 다룬 책을 청와대 직원들에게 선물로 돌렸다. 한 네티즌이 필자의 사이트에 글을 올렸는데, “지금은 처칠을 읽을 때가 아니라 레이건과 대처를 읽을 때”라는 내용이었다. 핵무장한 북한정권을 상대함에 있어선 레이건 미국 대통령, 국내의 좌파적 개혁저항 세력을 무력화시키는 데는 대처를 연구해야 한다는 충고였다. 필자는 다른 관점에서 이명박 대통령에게 대처가 가정교사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촛불시위에 대처하는 과정에서 노출된 이명박 대통령의 약점들-홍보부족, 연설의 문제, 법질서 수호 실패, 신념의 不在(부재) 등은 거의 전부가 대처 연구에 의하여 치료될 수 있는 항목들이다. 특히 개혁저항세력화한 좌파를 어떻게 다뤄야 하는가에 대한 답이 대처에 있다. 대처 총리는 노태우 대통령을 만나기 4년 전 탄광노조와 1년간 대결하여 完勝(완승)했다. 영국에서 가장 강력한 정치력을 행사하던 노조를 굴복시킴으로써 다른 노조의 영향력도 전반적으로 약화시키고 공기업 민영화를 통한 작은 정부의 길을 열었다. 영국의 탄광은 산업혁명의 동력을 제공한 역사적 존재였다. 탄광노조는 자신들의 희생으로 산업화가 이뤄졌다는 자부심을 가졌고 정부와 대중은 일종의 부채 의식을 지녔다. 이것이 탄광노조의 규모와 결합되면서 그들의 정치적 영향력을 드높였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 직전에 영국엔 3000개의 탄광에서 약 100만 명의 鑛夫(광부)들이 일하고 있었다. 연간 생산량은 2억9200만 t이었다. 1946년에 노동당 정부는 탄광을 국유화했다. 이때의 광부 수는 70만, 연간 생산량은 1억8700만 t, 탄광 수는 980개였다. 이즈음부터 탄광의 채산성이 나빠졌다. 시설과잉, 인원과잉 상태인데도 노조의 반발로 採算性(채산성)이 없는 탄광을 정리할 수 없었다. 1973~74년에 있었던 탄광노조의 총파업 직후 총선에서 히스 보수당 정권이 패배했다. 탄광 노조가 총파업을 하면 정권을 바꿀 수 있다는 일종의 신화가 생겼다. 탄광 노조는 1981년 말에 아서 스카길을 위원장으로 선출했다. 마거릿 대처 총리는 그 순간 대결은 불가피하다고 판단했다고 한다. 회고록에서 대처는 “노조가 정치적 목적을 가진 집단한테 넘어갔으므로 대결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고 썼다. 1984~85년의 탄광노조 파업을 영국 언론은 ‘스카길의 스트라이크’라고 이름 붙였다. 스카길의 아버지도 鑛夫(광부)였고 영국 공산당원이었다. 스카길도 7년간 청년공산동맹원으로 일하다가 노동당에 입당했다. 그는 스탈린을 옹호했고, 바웬사가 주도한 폴란드의 자유노조 운동을 비판했다. 스카길은 소련으로부터도 금전적 지원을 받았다. 1980년대 초반 세계사적인 의미가 있는 파업이 영국과 폴란드에서 일어났다. 자유를 앞세운 폴란드의 파업은 공산세계를 붕괴시키는 뇌관 역할을 했다. 철밥통을 지키려던 영국 탄광노조의 파업은 自滅(자멸)함으로써 대처의 신보수주의적 개혁을 가능하게 했다. 두 상반된 노조운동이 전 세계적으로 자본주의를 강화하고 사회주의를 약화시키는 방향에선 협력한 셈이다. 탄광 정리를 결심하고 있던 대처 수상은 스카길이 노조위원장에 뽑히는 걸 보고는 대결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탄광이 파업할 때의 가장 큰 문제는 석탄 발전소였다. 대처는 석탄 在庫量(재고량)을 충분히 확보하도록 동력자원부 장관에게 지시했다. 탄광 파업이 시작되면 시위대가 석탄 반출을 막을 것이다. 발전소로 수송이 가능한 위치에 석탄을 가져다 놓아야 했다. 기름, 원자력, 가스 발전소도 시설을 최대한 가동할 수 있도록 준비했다. 대처는 탄광노조와 싸워야 할 때 일선에 나설 동력자원부 장관과 탄광공사 사장을 鬪士型(투사형)으로 앉혔다. 피터 워커 장관은 홍보에 강한 사람이었다. 대처는 언론이 탄광노조의 강경한 투쟁을 편들지 않도록 하여 여론의 지지를 확보하는 것이 승리의 비결이라고 판단했다. 워커 장관은 신문사 편집책임자들에게 수시로 전화를 거는 이였다. 국영인 석탄공사 사장이 된 아이언 맥그리거는 영국철강공사 회장으로 있을 때 파업사태를 원만히 수습한 경험이 있었다. 1983년 10월 탄광노조 대의원회의는 公社(공사)측이 제시한 조건을 거부하고 연장근무를 하지 않기로 결의했다. 대처는 노조가 정부와 대결하기 위해 투쟁 분위기를 조성한다고 판단했다. 廢鑛 반대 파업 시작 노동당 정부도 1974~79년 사이에 32개의 탄광을 폐쇄했다. 대처 정부가 들어서서 조사를 해보니 75%의 탄광이 적자였다. 석탄공사는 연간 13억 파운드의 국가보조를 받고 있었다. 물론 이 돈은 납세자의 부담이다. 당시 광부 수는 20만2000명이었다. 공기업인 석탄공사 사장이 된 아이언 맥그리거는 향후 3년 사이 인원 6만4000명을 줄이고 연간 2500만 t 생산분의 시설능력을 폐기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그는 50세 이하 早期(조기)퇴직 보상제도도 발표했다. 퇴직신청자에겐 근무기간 1년마다 1000파운드씩 보태주기로 했다. 탄광노조는 채산성 악화에 따른 탄광폐쇄 계획에 반대했다. 그들은 석탄 매장량이 바닥날 때까지는 폐쇄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위원장 스카길은 “어느 정도의 적자라야 탄광을 포기할 수 있다고 생각하나”란 질문에 대해서 “적자는 무한정이라도 좋다”고 답했다. 1984년 3월 아이언 맥그리거 석탄공사 사장은 앞으로 1년 사이 20개의 탄광을 폐쇄하겠다고 발표했다. 1차로 요크셔의 콜톤우드坑(갱)의 폐쇄를 선언했다. 탄광노조도 신속하게 대응했다. 노조는 내부 규약에 전국적인 총파업을 하려면 찬반투표에서 조합원으로부터 55%의 지지를 받아야 한다고 되어 있었다. 노조 집행부는 투표를 했을 경우 55%의 지지를 얻기는 어렵다고 판단했다. 그들은 편법을 썼다. 노조에 가입한 지역 탄광이 개별적으로 파업을 시작하고 중앙집행부는 이를 사후 승인하는 형식을 취했다. 파업 첫날 83개의 탄광이 파업, 81개는 가동했다. 탄광노조는 기동시위대를 조직하여 파업에 불참한 광부들을 협박했다. 경찰이 이를 제대로 막지 못하니 겁을 집어먹은 광부들이 일하러 나가지 않았다. 곧 파업 탄광수가 100개를 돌파했다. 파업찬반 투표를 하려던 개별 노조도 기동시위대의 횡포에 눌려 투표를 연기했다. 대처는 일을 하고 싶은 광부들을 정부가 보호해주지 못하면 노조와의 싸움에서 진다는 판단을 했다. 경찰력을 투입, 기동시위대의 협박에 시달리는 파업불참 광부들을 지켜주도록 했다. 신변의 위협을 느끼던 광부들은 경찰이 보호해주자 지역노조별로 파업 찬반 투표에 들어갔다. 노팅엄셔를 비롯한 여러 군데의 탄광에서 투표가 진행되었다. 7만 명이 투표했고 그중 5만 명이 파업에 반대하는 데 표를 던졌다. 11개로 줄었던 가동 탄광수가 44개로 회복되었다. “정치인은 경찰을 지원해야” 대처는 1년간 지속된 탄광노조 파업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파업불참 광부들이 일을 계속 할 수 있도록 하는 방향으로 경찰력을 집중 배치했다. 善意(선의)가 惡意(악의)를 이기려면 힘이 있어야 한다. 민주국가에서 선량한 시민을 지키는 것은 시민의 힘이 아니라 국가 공권력이다. 그 공권력을 유지할 수 있도록 세금을 내는 국민들은 경찰의 보호를 받을 의무가 있다. 촛불시위가 불법화, 폭력화되었을 때 이명박 정부의 경찰은 선량한 시민들을 보호하는 데 실패했다. 광화문 근처의 언론사를 폭도들의 공격으로부터 지켜내는 데도 실패했다. 지난 5월 말에서 6월 초 사이 보수신문들도 일시적으로나마 親(친)촛불-反(반)정부의 성향을 보였다. 폭도들의 협박으로부터 경찰이 자신들을 지켜주지 못한다고 생각한 언론이 잠시 촛불시위대 편으로 기운 것이다. 방송과 신문이 다 같이 물대포 사용까지도 ‘과잉진압’이라고 비판하니 경찰은 폭력시위대를 진압할 의지를 잃었다. 폭력시위대를 진압할 때 발길질을 한 경찰관의 모습이 동영상에 잡히니 경찰은 그를 불구속 입건하고 지휘관을 직위 해제했다. 이는 진압경찰의 사기를 더욱 떨어뜨렸다. 용기백배한 시위대는 언론이 자신들을 ‘正義(정의)의 사도’로 치켜준다고 생각하고, 안심하고 거리로 몰려나와 경찰을 조롱하기 시작했다. 주부들과 어린이들까지 촛불 시위대에 합류하는 것을 본 이명박 대통령은 겁을 집어먹고는 30개월 이상 미국산 쇠고기를 수입하지 않기로 하는 방향으로 추가협상을 해야 했다. 국민들을 제대로 설득하고 공권력을 엄격하게 사용하였으면 할 필요가 없었던 퇴각이고 협상이었다. 경찰의 엄정진압을 정치적으로 뒷받침해야 할 여당은 거짓에 속은 민심을 ‘성난 民心(민심)’이라고 미화하곤 연행된 불법시위자들을 경찰이 선처해줄 것을 요청하기도 했다. 대처 총리는 퇴임 후에 쓴 회고록에서 “폭동은 경찰이 정부로부터 도덕적이고 실제적인 뒷받침을 완벽하게 받아야 진압할 수 있다”고 했다. 그는 “특히 정치인들이 경찰의 사기를 떨어뜨려선 안 된다”고 했다. 영국 정부는 경찰이 폭동진압에서 취할 수 있는 법적 행동을 명백히 천명했다. 특히 파업거부 광부들을 위협하는 탄광노조측의 기동시위대에 대해선 집결하기 전에도 경찰이 사전에 해산시킬 수 있음을 분명히 했다. 대처 총리는 한 연설에서 경찰을 이렇게 지원했다. “경찰은 법질서를 수호하고 있다. 그들은 이 정부를 지키는 게 아니다. 이 사태는 정부와 광부의 대결이 아니다. 이는 (파업) 광부와 (파업 거부) 광부 사이의 싸움이다. 정부는 그 사이에서 법을 수호하고 있다.” 대처는 경찰이 진압에 골몰하다 보니 폭도들을 너무 적게 체포하여 법정에 세우게 되었다고 반성했다. 시위대를 저지하는 데 주력하다 보니 시위대에 대한 採證(채증)이 어려웠던 것이다. 파업기간 중 영국 경찰은 불법시위자 1만1291명을 체포했고, 8392명이 유죄선고를 받았다. 최고 형량은 징역 9개월이었다. 시위대원 6명이 사망했다. 서울경찰청 통계에 따르면 촛불시위가 본격적으로 폭력화한 지난 5월 24일 이후 7월 18일까지 진압경찰은 464명이 부상당했다. 이들 중 95명은 중상이다. 이 기간 경찰버스 120대가 파손되고 방패 무전기 방석모 등 1641점을 폭도들에게 빼앗겼다. 이 기간 경찰은 987명의 불법시위자들을 연행하여 13명을 구속, 886명을 불구속, 56명을 즉심에 넘겼다. 6월 13일 MBC 뉴스데스크는 이런 시위를 두고, ‘누군가 조직하지 않았어도 광장을 가득 메웠던 시민들, 그리고 이들이 보여준 비폭력 평화시위’라고 논평했다. “法治가 暴治를 눌러야” 영국 탄광노조는 발전소 및 제철소로 수송되는 석탄이나 코크스를 저지하기 위해 기동시위대를 투입했다. 경찰이 이를 진압하려 하니 충돌이 빚어졌다. 1984년 5월 29일엔 5000명의 시위대가 경찰에 돌을 던졌다. 경찰은 騎馬隊(기마대)를 동원하여 이들을 짓밟았다. 69명이 다쳤다. 다음날 대처 총리는 유명한 연설을 했다. “여러분들은 어제 텔레비전을 통해서 그 광경을 보셨을 줄 압니다. 어제 광경은 法治(법치: the rule of the law)를 暴治(폭치: the rule of the mob)로 뒤바꾸려는 책동이었습니다. 그게 성공하도록 내버려둬선 안 됩니다. 저들의 기도는 실패할 것입니다. 첫째, 훌륭한 경찰이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직무를 용감하게, 그러나 공정하게 집행할 수 있도록 잘 훈련되었습니다. 둘째, 압도적 다수의 영국인들은 명예를 중시하고, 점잖으며, 법을 준수하는 이들입니다. 이들은 협박에 굴복하지 않습니다. 저는 시위대를 뚫고 일터로 나간 분들의 용기에 경의를 표합니다. 법치는 폭치를 눌러야 합니다.” 두 달 뒤 대처는 의회연설에서 “광부들에게 굴복하는 것은 ‘의회민주주의에 의한 통치’(the rule of parliamentary democracy)를 ‘폭도들에 의한 통치’(the rule of the mob)에 양도하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 그는 또 폭도들을 ‘내부의 敵(적)’이라고 불렀다. “우리는 포클랜드에선 외부의 적과 싸웠지만 지금은 내부의 적과 싸우고 있습니다. 내부의 적은 자유에 대해선 더 위협적이고 더 싸우기 어려운 상대입니다.” 대처는 의회의 토론에서 탄광노조의 파업을 지지하는 노동당에 대해서도 猛攻(맹공)을 퍼부었다. “노동당은 모든 파업을 지지합니다. 그 파업이 무슨 명목으로 하든, 어떤 손해를 끼치든 무조건 지지합니다. 이번에 노동당은 일하는 광부를 공격하는 파업광부들을 지지함으로써 이 나라에서 전체 노동자들의 권익을 대표한다는 그들의 주장에 대한 신뢰를 완전히 무너뜨렸습니다.” 힘이 되지 않는 대통령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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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對(대)국민담화를 통해 쇠고기파문에 대해 사과하고 한미FTA협조를 당부하고 있다. | 탄광노조와 대결함에 있어서 대처는 ‘총리의 말’을 가장 무서운 무기로 사용했다. 대처의 말은 논리적이고 단호하다. 이런 말은 탄광노조와 맞서는 경찰에겐 힘이 되고, 파업을 반대하는 대중에겐 논리적 근거를 제공했다. 노동당이나 파업광부들의 억지를 붕괴시키는 무기이기도 했다. 촛불시위가 불법·폭력으로 치닫기 시작할 때 이명박 대통령이 對(대)국민 연설을 통하여 이렇게 말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미국산 쇠고기는 절대적으로 안전합니다. 3억 미국인과 117개국의 사람들이 먹었지만 한 사람도 인간 광우병에 걸리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거짓이냐, 진실이냐, 과학이냐, 미신이냐의 문제입니다. 절대적으로 안전한 미국산 쇠고기가 절대적으로 위험한 물질이라고 선동하는 MBC와 불법시위를 일삼는 촛불난동 세력은 공공의 적입니다. 거짓과 불법으로 법치를 무너뜨리려는 세력은 민주주의의 적입니다. 국민이 민주적 절차를 통해 선택한 이 정부는 거짓과 폭력에 굴복할 수 없습니다. 공동체를 지키기 위하여 모든 적법 수단을 동원할 것입니다. 민주사회에서 가장 不義(불의)한 짓은 법치에 대한 도전입니다. 민주사회에서 가장 정의로운 행위는 법을 지키는 것입니다.” 이명박 대통령이 촛불시위 기간에 한 의미 있는 발언은 “소통에 문제가 있었다” “‘아침 이슬’을 들으면서 수도 없이 자책했다” “나도 한일회담 반대 시위를 한 사람이다” 정도였다. 대처 연설에서 느낄 수 있는, 불법행위에 대한 법질서 수호 책임자로서의 公憤心(공분심)이 없었다. 이런 이명박 대통령의 말은 경찰에 힘이 되지 않고 오히려 부담이 되었다. 폭도들에게는 힘이 되었을 것이다. 경멸 받는 대통령과 매 맞는 경찰을 정치적으로 뒷받침해주어야 할 한나라당은 대통령 등 뒤에 숨어서 촛불예찬론을 펴기도 했다. 이명박 대통령과 한나라당은 자신들을 공격하는 촛불시위대의 본질과 정체를 몰랐던 것 같다. 절대적으로 안전한 미국산 쇠고기를 절대적으로 위험한 물질이라고 선동한 것 자체가 反美(반미)운동의 한 표현이었음을 몰랐던 것 같다. 한반도의 모든 정치적 사건은 좌우대결의 반영이다. 이념을 포기한 실용주의로는 사물의 본질을 볼 수 없다. 반면 대처는 탄광노조의 지도부를 노동운동가로 보지 않았다. 그들을 극좌 공산주의자로 보았다. 그는 회고록에서 이렇게 썼다. <탄광노조의 파업이 실패함으로써 영국은 파쇼 좌익(the Fascist Left)이 무정부 상태를 만드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마르크시스트들은 법이 지배하는 나라에 도전함으로써 경제의 법칙을 무너뜨리려 했다. 그들은 실패했다. 그럼으로써 자유시장경제와 자유로운 사회는 상호의존적임을 증명했다. 누구도 잊을 수 없는 교훈이었다.> 촛불시위를 주도한 세력은 親北反美的(친북반미적) 노선을 추종해왔던 인맥과 단체들이었다. 이명박 대통령은 주동세력의 정체를 직접 국민들에게 알려야 했었다. 대통령이, 국민들에게 올바른 정보를 제공하여 선동에 속아 넘어가지 않도록 하는 행위를 부끄럽고 두려운 것으로 여기니 我軍(아군)은 사기가 죽고 敵軍(적군)은 용기백배한 셈이다. 대처가 쓴 ‘파쇼좌익’이란 말은 촛불주동세력에게도 정확하게 들어맞는다. 좌익에게는 말이 통하지 않고 힘만이 통한다. 민주정부의 가장 큰 힘은 법이다. 그 법을 갖고도 쓰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도 도울 수 없다. 발전소가 얼마나 버틸 수 있나? 대처 총리는 파업기간에도 석탄공사와 탄광노조의 협상을 허용했다. 탄광노조는 ‘채산성 악화를 이유로 한 폐광’ 방침을 포기하라고 요구하였으니 협상이 지속될 수가 없었다. 탄광노조 협상 팀은 공사 측과 회의를 마치면서 “우리끼리 더 할 이야기가 있으니 먼저 나가라”고 했다. 노조 측은 나중에 기자들에게 “공사 측이 일방적으로 협상을 깨고 나가버렸다”고 말했다. 대처는 ‘이 에피소드는 스카길 같은 자들과 협상한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다시 한번 보여주었다’고 썼다. 그럼에도 협상을 해야 했던 것은 너무 강경하게 보여 여론이 친노조 쪽으로 기우는 것을 피하기 위함이었다. 대처 정부 하에서 장관들은 불법파업을 하는 탄광노조에 대해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하여 노조의 기금을 압류해야 한다는 주장을 했다. 대처도 동조하고 싶었으나 주무장관인 피터 워커가 “그렇게 하면 여론이 탄광노조를 동정하게 된다”고 반대했다. 정부 차원의 소송은 하지 않았지만, 나중에 탄광노조 내부에서 집행부를 상대로 민사 소송을 걸었는데 이것이 奏效(주효)했다. 대처는 파업이 끝난 뒤 “초기에 정부가 노조 집행부에 대해서 소송을 걸었더라면 일찍 끝낼 수 있었을 것이다”고 아쉬워했다고 한다. 1984년 7월 9일 영국 항만노조가 탄광노조를 지원하기 위하여 전국적인 파업을 선언했으나 참여자가 적어 10일 만에 끝났다. 대처는 석탄공사와 탄광노조 사이의 협상과정에서 ‘채산성이 없는 탄광은 폐업한다’는 원칙이 모호해질까 걱정했다. 협상이 계속되니 직장에 복귀하는 광부들 숫자도 줄었다. 탄광노조가 협상에서 승리할 가능성이 있는 것처럼 보이면 파업 이탈자도 감소하는 것이다. 다행히 탄광노조 측이 먼저 협상 중단을 선언해버렸다. 탄광노조의 파업에 정부가 얼마나 버틸 수 있는가는 석탄발전소가 얼마나 가동할 수 있는가에 달려 있었다. 1985년 11월까지 정상 가동할 수 있는 석탄재고량이 있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발전용 석탄을 수입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으나 광부들을 자극할 수 있다고 해서 포기했다. 탄광노조는 이탈자가 생기자 탄광촌에 사는 가족까지 협박하고 집을 공격하는 수법을 썼다. 경찰은 파업불참 광부들 집에 비상전화를 놓아 경찰서에 직통으로 신고할 수 있도록 했고, 정복 경찰의 순찰을 강화했다. 모든 싸움이 다 그렇지만 상대 진영의 내분을 활용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임을 대처는 잘 알고 있었다. 좌익에겐 안 통하는 ‘장돌뱅이의 타산’ 1984년 8월7일 요크셔의 두 광부가 요크셔 탄광지부를 상대로 ‘찬반투표 없이 파업을 시작한 것은 불법’이란 이유로 민사소송을 제기했다. 이 사건은 나중에 결정적 의미를 띠게 된다. 대처는 1984년 8월 9일부터 27일까지 스위스에서 휴가를 보냈다. 그는 창가에 앉아 추리소설을 읽으려 해도 국내사태 때문에 집중이 되지 않았다고 했다. 대처 수상이 이 무렵 가장 걱정한 것은 석탄공사와 탄광노조가 재개한 협상이었다. 대처 수상은 석탄공사의 아이언 맥그리거 사장이 좌익들의 생리와 전술을 이해하지 못하고 기업인의 편법에 빠질 가능성이 있다고 보았다. 대처는 회고록에서 이렇게 썼다. <그는 정치인이 아니고 비즈니스맨이었다. 그는 합리적인 방법으로 타결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일단 광부들이 파업을 끝내고 복귀하면 합의사항에 관계없이 그가 원하는 방향으로 구조조정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우리는 오랜 경험상 아서 스카길 같은 인물들은 합의문의 모호성을 악용하여 문제를 원위치시킬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떤 경우에도 ‘채산성이 없는 탄광은 문을 닫는다’는 원칙을 양보해선 안 될 일이었다. 경제성이 없는 탄광도 문을 닫게 해선 안 된다는 탄광노조의 요구는 분쇄되어야 하고, 분쇄되었다는 것을 명백하게 보여주어야 하고, 정치적 목적으로 파업을 하는 행위는 용인할 수 없다는 것을 확실히 해야만 했다.> 대처 총리가 정치인과 기업인의 차이를 설명한 부분이 흥미롭다. 대처가 보기에 정치인은 욕을 많이 먹지만 원칙과 이념을 걸고 싸울 줄 아는 직업인이다. 그가 보는 기업인은 타산적인데(그러한 자신을 합리적이라 생각한다), 스카길 같은 좌익한테는 그런 합리성이 통하지 않는다. 원칙(이념)을 떠난 합리성은 ‘장돌뱅이의 편법’으로 전락할 수 있기 때문이다. 대처 수상의 이 관찰은 촛불난동 사태를 전후한 이명박 대통령의 행태를 비판해온 필자의 견해와도 일치한다. 이명박 대통령은 취임사에서부터 ‘이념을 포기한 실용주의’를 강조하여 좌익들에게 추파를 던졌다. 善意(선의)를 베풀면 선의로 화답할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은 기업인다운 합리성인데, 돌아온 것은 선동과 난동이었다. ‘원칙을 떠난 합리성’은 정치의 세계, 특히 좌익과 이념적으로 대결해야 하는 영국이나 한국에선 먹히지 않는다. 탄광노조의 파업기간 중 대처 총리는 파업에 불참하고 일터로 돌아간 광부들과 그 가족들을 보호하고 격려하는 데 신경을 많이 썼다. 1984년 9월 그는 단체를 만든 파업불참 광부들의 부인들을 초청하여 현장의 생생한 이야기를 들었다(이명박 대통령이 촛불시위로 피해를 본 광화문 일대의 상인들을 청와대로 초청하여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가?). 부인들은 석탄공사의 말단 직원들이 노조 편을 드는 경우가 많다고 불평했다. 노조가 탄광촌의 상점주인을 겁주어 불참광부들에겐 물건을 팔지 못하게 하고, “너희 부모들을 죽이겠다고”고 아이들에게까지 협박하고 있다고 호소했다. 1984년 9월 1일엔 일하는 광부협회가 조직되었다. 대처 총리는 요크셔의 탄광촌을 방문했다. 파업중인 광부들은 밭에 나가서 채소뿌리를 캐내어 먹고 있었다. 여기서도 석탄공사의 홍보기능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대처 총리는 그런 가운데서도 석탄공사의 한 간부(마이클 이톤)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다가 “이런 사람이라면 대변인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톤은 석탄공사 대변인으로 발탁되어 맹활약했으나 내부 견제로 많은 고생을 했다고 한다. 노조 재산을 압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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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임 초기, 재래시장 상인들을 격려하는 이명박 대통령. | 이는 대처 총리가 탄광노조와 싸우면서 홍보를 얼마나 重視(중시)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민주사회에선 엄정한 법집행에 여론의 뒷받침이 따르지 않으면 지속하기가 매우 어렵다. 이명박 대통령이 촛불 난동에 경찰력을 단호하게 행사할 수 없었던 것도 지지여론을 확보하는 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정부와 한나라당이 홍보에 실패하여 상당수 국민들이 미국산 쇠고기는 위험하다고 오해하고 촛불시위를 정당하다고 誤判(오판)하도록 방치했던 것이다. 9월 25일 대처 총리를 곤경에 처하게 한 사건이 또 발생했다. 탄광을 가동시키는 데 필수요원인 坑(갱)안전요원들의 조합이 파업을 결의했다. 목적은 탄광노조를 도와주려는 것이었다. 이들이 파업을 하면 가동중인 탄광도 작업을 제대로 하지 못할 것이다. 대처 총리는 이들에게 상당한 양보를 하더라도 파업 돌입을 막아야 한다고 판단했다. 안전요원 조합의 온건파가 득세하여 파업결의를 철회했다. 위기 뒤에는 호기가 온다고 했다. 1984년 8월 요크셔의 두 광부가 요크셔 탄광 노조를 상대로 ‘찬반투표를 하지 않고 불법파업을 했다’면서 적법성 여부를 가려달라는 민사소송을 제기했었다. 10월에 영국 법원은 이 파업이 불법이라고 판결한 뒤 불복한 스카길 노조위원장과 노조에 대해 법정모독죄를 적용하여 20만 파운드가 넘는 벌금을 선고했다. 노조가 벌금을 내는 것을 거부하자 법원은 노조의 재산을 압류해버렸다. 노조는 재산을 해외에 도피시켰다. 법원은 도피재산을 추적하여 500만 파운드를 회수했다. 이 무렵 영국의 탄광 노조가 리비아, 아프가니스탄, 소련의 비밀지원을 받았다는 폭로기사가 터졌다. 당시 탄광노조의 핵심 인사들은 사회주의자들이었다. 영국인들은 일자리를 지키기 위한 파업에 대해서는 동정적이었으나 외국의 도움을 받아가면서까지 파업을 하는 데 대해선 냉담해졌다. 여론의 지지를 잃은 파업임이 드러나자 파업대열에서 이탈, 작업현장으로 복귀하는 광부들이 늘어났다. 석탄공사는 이때를 놓치지 않고 “11월 19일까지 직장에 복귀하는 광부들에겐 크리스마스 보너스를 지급한다”고 발표했다. 첫 주에 2203명이 복귀했다. 그해 12월엔 시위대원이 광부를 태우고 가던 택시를 향해 돌을 던져 운전자를 죽이는 사건이 발생했다. 또 다시 여론이 악화되고 직장으로 복귀하는 광부들이 늘었다. 12월 29일 피터 워커 동력자원부 장관은 “현재의 석탄생산량으로 보아 1985년에도 발전량을 줄일 필요가 없을 것이다”고 발표했다. 과거 정부가 탄광노조의 파업에 굴복한 이유는 발전량의 감소로 제한送電(송전)을 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스카길 탄광노조 위원장은 발전량이 곧 줄어들 것이고 정부가 굴복하고 말 것이라고 예고했으나 在庫(재고)를 미리 많이 확보했던 대처 정부는 “시간은 우리 편이다”고 선언한 셈이었다. 탄광 문을 닫다 승리를 예감한 대처 총리는 ‘어중간한 승리’가 아니라 ‘확실한 승리’를 관철시켜야 영국 노조의 버릇을 고칠 수 있다고 확신한다. 코너로 몰린 탄광노조의 ‘체면을 살려주어야 한다’는 건의와 중재도 들어왔다. 총리는 중재에 참여하는 정부 관계자들에게 세 가지 원칙을 지켜야 한다고 지시했다. 1. 탄광업의 미래에 관한 논의는 파업을 끝내 놓고 해야 한다. 2. 파업불참 광부들의 입장을 불리하게 만드는 약속을 해선 안 된다. 3. 노조가 채산성 없는 탄광의 폐쇄 조치가 철회되었다는 주장을 할 수 있는 어떤 약속도 해선 안 된다. 1985년 1월 중순 현재 파업에 불참한 광부들이 7만5000명에 달하고 매주 2500명꼴로 복귀하고 있었다. 대처는 탄광노조원의 과반수가 복귀하면 파업을 계속할 명분이 사라진다고 보았다. 탄광노조의 파업기간에 여론은 항상 노조의 파업에 불리했다. 좌익신문을 제외하곤 파업을 지지하는 언론이 없었다. 1984년 말의 여론 조사에서 파업지지는 7%, 반대가 88%였다. 논리적으로 잘 정리되고 쉽게 표현된 대처 총리의 단호한 연설과 논평이 이런 여론을 만들어낸 가장 큰 요인이었다. 대처는 1984년 11월 칼톤 클럽 연설에서 법치의 소중함을 강조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민주주의를 쟁취한 지가 오래인데 아직도 문명을 건설하기 위하여 泥田鬪狗(이전투구)를 하고 있는 시대인 것처럼 생각하고 法治(법치)의 나라를 비웃는 것은 영웅적 행동이 아닙니다.” 대처는 의회토론에서 야당인 노동당의 당수 킨노크를 향하여 직격탄을 퍼부었다. 총리는 노동당이 탄광노조의 폭력과 불법에 침묵한 것을 조목조목 지적했다. 대처는 “나는 지금부터 야당 지도자에게 도전장을 내겠다”고 하더니 이렇게 쏘아붙였다. “탄광노조에 대해서 그 합의를 수용하라고 권하겠습니까, 안하겠습니까(장내에서 ‘대답하라’는 고함)? 그는 대답하지 않을 겁니다. 왜냐하면 대답할 용기가 없으니까요.” 1985년 2월 27일 드디어 파업에 불참한 광부 숫자가 전체 노조원의 과반수에 도달했다. 스카길이 더 버틸 명분은 사라졌다. 3월 3일 탄광노조 대의원들은 파업중지를 결의했다. 그날 대처는 다우닝 10번지 관저 앞에서 기자들 앞에 섰다. “일터를 지켰던 광부, 항만 노동자, 발전소 직원, 운전사, 철도원들, 그리고 간부들이 진정한 승리자들이다. 이들이 영국의 바퀴가 계속해서 돌아가도록 했다. 영국이 정지하지 않도록 했던 모든 노동자들이 이긴 것이다.” 대처 정부는 탄광노조를 패배시킨 뒤 채산성 없는 탄광의 폐쇄에 착수했다. 1994년 탄광이 민영화될 때 남은 것은 15개에 불과했다. 2005년엔 8개가 가동 중이었으나 지금은 全廢(전폐) 상태다. 탄광노조의 아서 스카길 위원장은 2000년까지 재임했다. 그는 1996년에 노동당을 탈당, 사회노동당을 창당한 이후 두 번 하원선거에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그는 2.4%의 득표율을 기록했다. “사회? 그런 건 없습니다” 1999년에 미국의 시사주간지 <타임>은 마거릿 대처를 ‘20세기의 20대 정치인’ 가운데 한 명으로 뽑았다. ‘대처리즘’이란 말을 남길 정도로 대처의 정치적 유산은 영국뿐 아니라 세계 도처에서 지금도 큰 영향력과 상상력을 행사하고 있다. 법치주의, 작은 정부, 시장경제, 민간의 자율과 책임을 강조한 대처의 신보수주의적 개혁은 한국에서도 유력한 모델로 연구되고 있다. 대처는 아마도 가장 많은 名言(명언)을 남긴 정치인중 한 사람으로 꼽힐 것이다. 대처는 1987년 9월 23일 <우먼즈 오운>(Woman's Own)이란 잡지와 인터뷰하면서 이런 말을 남겼다. “우리는 너무나 오랫동안 너무나 많은 어린이들에게 이렇게 잘못 가르쳤다고 생각합니다. ‘내 문제는 정부가 해결해주어야 한다’ ‘내게 문제가 있지만 정부를 찾아가면 경제적 지원을 해줄 것이다’ ‘나는 집이 없다. 정부가 집을 마련해줘야 한다’는 식이지요. 그들은 자신들의 문제를 사회에 轉嫁(전가)하고 있어요. 그런데 사회가 누구예요? 사회? 그런 건 없습니다! 개인으로서의 남자와 여자가 있고, 가족들이 있는 것뿐입니다. 정부는 (사회가 아니라) 사람들을 통해서만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먼저 스스로를 도와야 합니다. 스스로를 돕고 이웃을 돕는 것은 여러분들의 의무입니다. 삶이란 것은 주고 받는 거예요. 주는 것 없이 받을 생각만 하면 안 됩니다.” “사회? 그런 건 없습니다!”라는 말이 유명해졌다. 한국의 자칭 진보적 인사들은 인간의 모든 문제들을 개인이 아니라 사회에 돌린다. 30명을 연쇄살인한 犯人(범인)의 책임도 사회의 냉대에 있다고 한다. 북한의 배고픔과 살육도 金正日(김정일)이 아니라 국제사회에 있다고 한다. ‘사회’라는 개념을 만들어 모든 책임을 거기에 떠넘기곤 “우리는 결백하다”고 홀가분해하는 꼴이다. 이런 위선적 태도에 대해서 대처는 가차 없는 비판을 가한 것이다. “파쇼좌익을 변화시키는 것은 오직 힘” 대처는 1981년 9월 20일 연설에서 자신의 정치철학을 이렇게 말했다. “나의 정치는 나와 수백만의 나 같은 사람들이 자라면서 배운 것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하루를 정직하게 일한 代價(대가)로 정직한 돈을 번다, 분수에 맞추어 살아라, 비 오는 날에 대비하여 달걀을 남겨두라, 낼 돈은 제때에 내고 살아라, 경찰에 협조하라!” 대처 여사는 퇴임 후에 회고록과 <국가운영술>(Statecraft)이라는 책을 썼다. <국가운영술>에서 대처는 對北(대북)정책에도 참고가 될 만한 충고를 많이 하고 있다. 그는 소련전문가들이 소련의 지도부를 강·온파로 분류한 것은 잘못이었다고 지적했다. 전체주의 체제 안에서는 의미 있는 정책 차이가 있을 수 없다는 이야기다. 한때 한국의 북한 전문가들도 북한 권력층 내부를 강·온파로 나누고 김정일을 개혁온건파, 군부를 反(반)개혁 강경파라고 설명한 적이 있었다. 이에 대해서 黃長燁(황장엽) 선생은 “북한에서는 김정일만 결정권을 갖고 있는데 무슨 강경, 온건이냐”고 비웃었던 적이 있다. 대처 여사는 또 對蘇(대소) 강경정책이 소련의 강경한 대응을 부를 것이라는 서구사회의 비판도 틀렸음이 확인되었다고 지적했다. <그들은 평화를 원하면 전쟁을 준비해선 안 된다, 안전을 원하면 안전을 위협을 해선 안 된다, 협력을 원하면 타협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 접근법은 완전히 틀렸다. 닉슨, 포드, 카터가 이끌던 미국이 데탕트 정책으로 소련을 상대로 타협적으로 나왔을 때 소련은 군비를 증강하고 침략정책을 추구했다. 레이건 대통령이 등장하여 군사적 優位(우위), 체제경쟁, 그리고 소련의 침략에 대한 반격작전을 펴자 소련은 협조적으로 나왔고, 무장해제했으며, 마침내 무너졌다.> 레이건, 대처, 요한 바오로 2세, 바웬사는 1980년대에 서로 협력하여 공산권을 무너뜨린 거인들이다. 탄광노조든, 소련이든 ‘파쇼 좌익’에 대해선 힘만이 먹힌다는 대처의 경험적 관찰은, 개혁저항세력화한 자칭 진보세력의 도전을 극복해가면서 햇볕정책을 代替(대체)할 새로운 對北(대북)정책을 모색해야 하는 이명박 대통령에게 하는 충고처럼 들린다. 좌익이념과 인간의 본성에 대한 깊은 省察(성찰)이 대처의 정책과 전략을 뒷받침했다. 대처는 <국가운영술>에서 소련을 誤判(오판)한 지식인들을 가차 없이 비판하고 있다. 미국의 저명한 경제학자 갈브레이스는 공산주의와 자본주의가 경쟁을 하다가 보면 ‘수렴’(convergence) 현상을 일으켜 사회민주주의 체제로 변할 것이라고 터무니없는 예언을 했다. 그는 1984년 소련 경제가 도저히 더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되었는데도 소련방문記(기)에서 “소련 시스템이 거대한 물질적 진보를 이룩한 것을 알 수 있었다”고 썼다. 진실, 正義, 자유 영국의 생물학자 줄리안 헉슬리는 소련이 大饑饉(대기근)을 겪고 있던 1932년에 소련을 방문하여 “소련 사람들의 건강상태와 육체적 조건은 영국인보다 높다”고 말했다. 영국 문학가 조지 버나드 쇼는 “스탈린은 10년 전엔 상상할 수 없었던 물건들을 공급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에게 경의를 표한다”고 말했다. 영국 정치학자 해롤드 러스키는 “소련의 감옥은 수감자들이 인간다운 생활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좋다”고 썼다. 대처는 이런 위선적인 지식인들이 공산주의가 붕괴된 뒤에도 그 공을 레이건에 돌리지 않는 것은 “거의 범죄에 가까운 행위”라고 비판했다. 대처는 소련은 무너진 것이 아니라 무너뜨린 것이며 서방세계의 승리는 “진실, 正義(정의), 자유가 이긴 것을 뜻한다”고 정의했다. 여기서 정의는 공정한 법치를 뜻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