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별 말고 직관으로 바로 보라
<19> 증시랑에게 보내는 대혜선사의 답장 ②-4
[본문] 평전(平田)화상이 말씀하였습니다. “신령스런 광명이 어둡지 아니하여 만고에 밝게 빛나니 이 문 안에 들어오려면 알음아리를 두지 말라”라고 하였습니다. 또 고덕이 말씀하였습니다.
“이 일이란 유심(有心)으로써 구할 수 없으며, 무심(無心)으로서도 얻을 수 없으며, 언어로서도 지어낼 수 없으며, 묵묵함으로서도 통할 수 없다.” 이 말은 제일등가는 진흙에 들어가고 물속에 들어가는 노파심의 간절한 말씀입니다.
[강설] 평전화상의 말씀을 인용하였는데 이 말은 너무도 유명하여 규모가 있는 큰 사찰에는 모두 주련으로 걸어 놓았다.
진정한 불법을 이해하려면
만고에 밝게 빛나고 있는 이 신령한 광명을 알아야 한다.
이 신령한 광명은 모든 사람의 참 생명이며
따라서 부처님의 무량공덕 생명이다.
그런데 이것을 바로 이해하려면 사량 분별이나 알음알이를 사용하지 말고 직관으로 바로 보아야 한다. 머리를 굴리거나 생각을 하여 아는 것은 틀린 것이다. 고덕의 말씀을 또 인용하여 설명을 보완하고 있는데 고덕은 우두법융(牛頭法融) 화상이다.
만고에 빛나고 있는 신령한 광명은 유심이나 무심이나 언어나 적묵과 같은 상대적 마음으로는 접근할 수 없는 경지다. 언어의 길이 끊어지고 마음의 갈 길이 적멸한 자리다. 그렇다면 지금까지의 설명은 아무런 소용이 없는데 이 소용없는 가르침이야말로 가장 친절하고 고구정녕하다고 할 수 있다. 마치 물에 빠진 사람을 건지기 위해서는 자신이 물속에 들어가야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머리 굴려 아는 것은 틀린 것
“마음의 갈 길이 적멸한 자리”
[본문] 왕왕 참선하는 사람들이 다만 적당히 생각하여 넘겨버리고는 이것이 무슨 도리인가를 자세히 살펴보지 않습니다. 만약 일개 힘줄이 있고 뼈가 있는 사람이라면 조금 거량하는 것을 듣고 직하(直下)에 금강왕보검(金剛王寶劍)을 빼어들고 단번에 이 유심이니 무심인 언어니 적묵이니 하는 네 갈레의 갈등을 잘라버릴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곧 생사의 길도 끊어지고 범부와 성인의 길도 끊어지고 계교하고 사량하는 길도 끊어지고 이해득실과 시비도 또한 끊어져서 그 사람의 근본자리가 발가벗은 듯이 적나라(赤裸裸)하고 물을 뿌린 듯이 정쇄쇄(淨灑灑) 해져서 가히 붙잡을 것이 없을 것입니다. 어찌 유쾌하지 아니하며, 어찌 기쁘지 아니하겠습니까.
[강설] 참선공부를 하는데 대개 네 단계를 설정하여 이야기 한다. 첫째 정중일여(靜中一如), 둘째 동정일여(動靜一如), 셋째 몽중일여(夢中一如), 넷째 오매일여(寤寐一如)다.
만고에 길이 빛나는 신령스런 광명을 확철대오(確徹大悟)하려면 선불교에서는 화두가 고요히 좌선하는 가운에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여 일여가 되고나서 다시 활동하는 가운데서 일여가 되고, 나아가서 꿈을 꾸는 가운데서도 일여가 되고, 마지막으로 깊이 잠이 들었을 때도 화두가 일여가 된 뒤에 다시 큰 깨달음을 경험해야 한다고 한다.
깊이 잠이 들었을 때도 일여가 되는 경지는 유심 무심 언어 적묵까지 초월한 자리다. 그렇다면 그곳에 무슨 생사가 있을 것이며 범부니 성인이니 하는 것이 있을 것이며 계교니 사량이니 득실시비가 있겠는가.
이러한 경지에서 금강왕보검, 즉 지혜의 칼로 모든 것을 초월한 소식이 표현되어야 한다. 참선이 이와 같이 된다면 그 사람은 마음의 근본자리가 빨가벗은 듯이 적나라하고 물을 뿌린 듯이 정쇄쇄해서 유쾌하고 유쾌할 것이다.
일여(一如)란 일체의식이 의심덩어리[疑團]가 된 상태를 뜻한다. 가끔 참선하는 생각으로 대화를 하거나 일상생활을 하거나 꿈을 꾼 것을 가지고 일상생활 속에서나 꿈속에서 일여가 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는데 큰 착각이다.
자신이 지금 무엇을 하는지, 어디에 있는지, 화두를 드는지 마는지, 심지어 죽었는지 살았는지 까지를 분간하지 못해야 하는 경지다. 선불교에서 화두를 통해서 참선을 하여 이 문제를 해결하려는 방법은 반드시 이러한 관문을 통과해야 한다.
[출처 : 불교신문 2012.0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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